
항아리
이것은 옛것이 되기 위해 날마다 죽는다
이것은 구수하고 정겹고 따뜻하고 고색창연하기 위해 시간을 숙성시킨다
이것은 효모로 시작해서 발효로 끝난다
안기는 모든 것들을 심장에 집결시키느라 변두리보다 중심이 더 크다
이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보다 왜 살아야 하느냐를 고민한다
그럴 때 햇살과 바람은 그의 밀교이다
이것은 자신을 객관적으로 나열하다가 주관적으로 통합해 응축시키지만 일정한 음정과 여운을 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것은 세계를 회의하면서도 세계를 성찰한다, 천천히 그리고 둥글게
앵무새 경전
노을깃털 단청을 덧칠해서
반야선원 기도는 늦어질 거 같다
그건 어쩌면 핑계일 터, 금강이란 법명 가진
앵무새 염불수행이 좋아서
How are you 한 번 듣고 싶어서
십분 이십분 결국, 안녕! 어디가?
그러나, Hello 다 들을 수 없다
누가 기도 안하느냐 물으면
금강의 목에서 흘러나오는
일갈을 듣는 것이 좋았다고 고백해 버릴까
인간이면서 금강은 고사하고
한 개 단단한 돌멩이도 되지 못한 나를
날카롭게 바라보는 금강의 표정은
해석이 불가능해서 빛나는 경전이다
어떻게 저렇게 철저하게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을까
오감의 깃털 부리로 쓰다듬으며
고요한 명상에도 잠기는 금강
“그대는 지금 나를 아는가?”*
부리로 짚는 주장자가 쿵쿵
급히 법당 안으로 드나들다가
발바닥에 붙은 신발 그 티끌 데리고
아뿔사! 문턱을 넘었다
*청원선사가 석두선사에게 묻는 말
벽시계
한 소녀가 우물곁에 서 있네요
1시는 한 두레박 초록을
2시는 두 두레박 단풍을 퍼올리고
소녀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는데
우물은, 글쎄 늙지도 않네요
한 여자가 우물곁에 서 있네요
3시는 세 두레박 스치는 햇살을
4시는 네 두레박 물빛 낮달을 퍼올리고
여자는 조금씩 노파가 되어가는데
우물은, 어쩌면 늙지 않을까요
벽에 걸린 낡은 우물에서
출렁출렁 흘러나온 세월이
아이를 잡아먹고
여자를 잡아먹고
노파를 잡아먹는 동안
세상에, 우물도 아직도 그대로네요
고래가 울었다
학동선착장에 도착한 뉴월드페리호
물결에 삐걱삐걱 소릴낸다
심해를 유영하는 고래의 울음소리 같다
굵은 밧줄이 뱃머릴 질끈 묶으면
더 깊어지는 울음 외진 골목의
해금강 외도를 경유하며 통째
삼켰던 먹이들을 고스란히 게워놓는다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던 젊은 남녀
새우등을 서로 기대던 노부부
갈매기처럼 자주 두 팔을 퍼덕거리던 사내
울컥, 소화불량의 어제들을 토해낸 고래는
다시 먼 수평선을 바라본다
잔등 위에 키우던 두 줄기 푸른 분수는
어느 섬에 놓아두고 온 것일까
막배가 될 때까지 저 고단한 항해는 또 다시
수만의 사람들을 실어나를 것이지만,
아이는 해마처럼 아빠 등에 업혀 잠이 들고
잔교를 걸어나오는 내 등 뒤로
우우 흰 고래 울음소리만 따라온다
페루
서울역 대합실 앞, 악사들이 연주하는 음악이 발을 적신다 ‘페루에 가실래요?’ 원주민 사내가 내 귀를 빌려 속삭인다 꿈꾸는 남자의 퀭한 눈 속으로 병풍처럼 펼쳐지는 마추픽추, 하늘과 맞닿은 공중도시의 봉우리 위로 수천마리 새떼들이 날아오르고 출렁, 내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산포니아 소리, 손에 든 차표가 망설이며 잠시 뒤를 돌아본다 출렁이는 남자의 눈동자 속으로 이제 막 기차가 출발한다 기차는 나를 태우고 쿠스코 산악지대를 지나 우루밤바 계곡으로 태양의 신전을 향해 간다 어느새 산의 경사면을 걸어 올라가고 있는 나는 잃어버린 잉카의 후손일까 인티파티나 위로 이글이글 태양이 솟아오르고 누군가 나의 전생을 물을 때 택시 경적소리가 내 귓속을 파고든다 음악은 오후의 광장을 적시고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 마추픽추, 휘청거리며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는 내 목덜미를 휘감는 소리 세뇨리따!
러닝머신 위의 얼룩말
러닝머신이 달린다 50분
타임 위에 구름처럼 올라선다
가볍게 워밍업이 시작되고
조금씩 속도를 내기 시작하는 아침
7.0 스피드는 내 다리를 빠르게 굴린다
50분 충전으로 하루를 연명하는,
구름처럼 살고 싶다 생각하는 순간
덜컹거리는 내 안에서 히이잉
얼룩말 한 마리 튀어나온다
나이로비 정글이 부채처럼 펼쳐지고
희고 검은 띠의 목덜미로
조금씩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바닥을 걷어차며 질주하는 엉덩이 뒤로
어디서 나타난 원숭이들 따라오고 가끔씩
사자의 울음소리도 쫒아온다
간밤의 어둠을 묶어둔 포장마차 몇 지나
주걱부리 황새가 내려앉은 물가엔
먼저 도착한 동료들
그래 너무 늦게 도착했네? 어쩌구
서로의 슬픔을 묻는 동안
달리지 못한 시간들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러닝머신이 멈추자 죽은 속도가
나를 죽은 아파트에 내려놓는다
얼룩말 한 마리 엉거주춤
내 안으로 황급히 들어온다
눈사람
무너져 내린 뼈마디 모두
시커멓게 뭉개지면 어쩌나
바람에 걸려 넘어진 한줌의 잔설이라도
그러모아 꾹꾹 눌러 입자
내 속을 들여다 보지마라
모든 것에는 유통기한이 있어
이 차갑고 견고한 결정체도 녹기 마련이지만
새가 날아가듯 눈에서 멀어진다고
영원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슴 활짝 펴고 몸의 중심을 잡자
벌써 햇볕이 유백색 목련을 밀어내고
지붕 없는 둥지에서 잠자던 박새들도 불러낸다
더 이상 큰 말씀 빠져나가지 않게
숨 할딱거리는 겨울에 자물통 채우자
이건 허튼소리가 아니다
칼날 같은 마음이 녹아
해상을 떠내려가는 유빙일지라도
기껏, 꽁꽁 담금질한 나를 고정 시키는 일
다시 네 곁에 앉기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쌓아야하나
유채꽃
허리 주춤주춤 세우고
인적 드문 반월성 기슭 돌아 나오는 낯선 바람
흐드러진 향으로 슬쩍, 발목 걸어본다
둥근 날개 허공으로 밀어 올린
흰나비처럼
아찔한 내 몸 위로 화들짝 누워버리는 사내
모가지 꺾고 하루쯤 엮이고 싶은 것이다
오래 그리워하다
꽃이 되어버린 봄날
건네고 싶은 말 있는 듯
꽃대 위에 덩그러니 앉은
고분처럼 미동 없는 얼굴 하나
저 바람의 목덜미 잡고
깔깔거리는 돌담 닮은 아이 서넛
퍼질러 낳았으면
저녁 무렵 가창오리떼
꽃이 핀다 물결처럼 핀다 저토록 출렁이며 떼를 지어 핀다 갯마을 너머로 스러지는 일몰의 배경 나는 지는 해를 따라 길어지는 갈대 한 송이 꺾어보지만 바람은 단 하나의 얼굴을 잃어버린다 수면 위로 떠내려가는 저녁의 풍경 아찔한 현기증에 새들은 제 그림자를 물고 구름까지 날아간다 새들이 닿는 곳은 허공의 뒤 켠 잠시 흔들리는 파문에 어깨를 기대면 왁자지껄 피어났다 스러지는 저 쓸쓸한 소멸 어느 날의 이별처럼 가창오리 떼가 날아오른다
물푸레나무의 겨울나기
뒷산 길섶 물푸레나무
잎 다 떨군 가지들이 자잘한 뿌리 같다
저마다 눈을 달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촉수들
겨울을 견디기 위해 나무는
뿌리를 지상으로 밀어내고
동면하는 짐승인 양
잎들은 땅속에 묻어두는 것이다
젖은 뿌릴 햇살에 널어 말리는 동안
저쪽 안부가 궁금한 제 우듬지를
땅 속 깊숙이 내려놓고
칭얼대는 어린 새순에게 그렁그렁 젖을 먹이며
사슴벌레 쉬었다 갈 그늘을 짓고 개똥지빠귀
둥질 어디에 앉힐까 궁리하는 것이다
이윽고 기다리던 봄비들이
물조리개처럼 마른 숲을 적시면
공중의 뿌리들은 재빨리 땅 아래로 내려가고
잎들은 천천히 지상으로 걸어 나와
공중의 빈 곳을 채우는 것이다
껍질을 벗겨내면 금방이라도 푸른 피
한 바가질 쏟아 낼 것 같은,
뒷산 길섶에 거꾸로 박힌 내가 서 있다
첫댓글 숨어 있어도 혼자 우는 고래소리가 들립니다. 축하합니다
안기는 모든 것들을 심장에 집결시키느라 변두리보다 중심이 더 크다는 항아리~~인상적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축하 드립니다.
스케일도 크고
삶을 시로 말하는 법도 깊이를 동반하고 있으니
앞으로 한국시단의 큰 얼굴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