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먹을까 외 3편
서 성 수
물이 끓으면
산에서 막 데려온 목이버섯 말랑말랑함을 넣고
노루궁뎅이버섯 보드라움과 엉큼함을 넣고
먹버섯 시커먼 속살도 넣고
골짜기를 건너고 능선을 넘다보면
나는 자꾸 작아지고
어느 순간 산 속은 커다란 우주가 되어 있다
키 큰 나무는 행성을 이고
주위에 작은 넝쿨은 위성이 되어 공전하고
물소리 바람소리는 주파수가 다른 전파를 발신하고 있는데
어느 별에서 왔는지
덤불 속에서 안테나 곧추 세우며 우주선이 불시착한 곳
싸리버섯 무더기가 줄지어 모여 있다
물이 넘쳐서 뚜껑을 열 때
함께 터져 나오는
산과 계곡과 능선이 만든 맛과 향이
그때 그 여자의 체취를 닮아 있다
아픔과 연민과 사랑이 한 몸으로 뒤섞여 뜨겁기만 했던
떠나가려는 손 놓아주지 않았더라면
꽁꽁 묶어 같이 울었더라면
어느 곳에선가 살아있다고 잘 지내고 있다고
가끔은 생각하고 있다고 보고 싶기도 하다고
그렇게 둘만의 암호로 전파를 발신해준다면
한 나절 산에서 따온 별똥별 한 보따리
어깨에 동여 메고 달려갈 텐데
가쁜 숨 기꺼이 뱉어 내면서
산골 세탁소
어제는 노루가 빨랫감을 잔뜩 들고 다녀갔지
바지는 기장 줄여달라고 하고 울 스웨터는 손빨래를 부탁하고
흰 바람막이에 묻은 오딧물도 뺄 수 있냐고 묻고
하얀 털 보송보송한 궁둥이 흔들며 돌아가고 나니
비목나무 잎 향기가 한참동안 나는데
벤젠 기름 냄새 보다야 건강하고
탁월한 세정 효과 기대해도 되겠다.
각재목 가로 걸치고 지붕 올린 처마 밑에
웃옷이랑 바지들 걸어놓으니
멀리 산 능선 짙은 녹음에
모두 초록물이 드는 건 아닌지
돈벌이가 될까 모두들 염려했지만
까마귀도 한 번씩 외투를 맡기고
오소리 너구리도 묵은 때 빼달라고 외출복 가져오고
함박꽃 꽃무늬 드레스 입고 작은 결혼식을 준비하는
순도 99프로 맑은 바람 속 피톤치드가
세탁기 안에서 몇 바퀴 돌아가고 나면
단골손님이 만족하는 상큼한 새 옷 냄새가 되살아난다고
달콤한 소문에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잠을 깨고 보니
어제 밤 세탁기에 넣어
밤사이 다 돌아간 빨랫감이
마른 햇볕에 널어달라고 야단이었다
약산골, 2월
창문 안에는 이미 겨울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물푸레나무는 이미 다이어트 중이라 허리에 군살이 보이지 않는다
고로쇠나무 당단풍은 얼굴에 영양팩을 바르고 수분 보충을 하고 있다
열매를 모두 중간상인에게 넘겨준 다래는
넝쿨 안에 약간의 비상금을 꼬깃꼬깃 숨겨 두었다
소나무도 늦잠에서 일어났는지 상록의 이불을 널어두고
비탈면 경사가 버거운 참나무 몇몇은 벤치 프레스로 몸만들기에 열중이다
돌무더기 너덜 한쪽에 독신의 오소리 원룸에 창문이 열리고
가끔씩 불안한 걸음걸이의 고라니가 안을 기웃거리다 돌아 선다
이 동네에서 제일 바쁜 다람쥐는 또 새로운 알바를 구하려고
교차로 구직 광고란에 연신 싸인펜을 긋는 중이다
이사 온 지 얼마 안 된 까마귀는 아침저녁으로
바위 틈 깊숙한 곳까지 수상한 이웃들의 동태를 탐색하고 있다
퇴적암의 날카로운 예각이 이미 대세가 되어버린 북사면에는
표면이 둥글둥글하여 다산할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낭설로
화강암을 수입해야 한다고 신용장을 개설해주고
기후변화에 무감각해진 영지나 상황 같은 약용버섯 당원들이
항암이나 혈액 순환 개선 등의 약효를 강조하는
새로운 공약을 개발 중이다
창문 안에는 여전히 겨울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계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곳 채널의 아이피 주소는
추위가 보석처럼 열리는 겨울나라
* 약산골 : 속리산 남쪽에 있는 골짜기
속이 보이는 산
커다란 뱃속에 들어왔다
능선으로 주름진 점막에
끈끈한 초록의 점성을 가진 숲
햇살도 한풀 꺾여서 소심하게 내려앉는 골짜기
갑자기 다가오는 비릿한 짐승의 울음소리
덜컥 내려앉는 겁 많은 허파의 돌기 사이로
산안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나를 삼킨 사나운 이빨과 냉정한 목젖을 지나
긴 식도를 지나왔을 것이다
날카로운 너덜과 가파른 된비알에
골짜기는 더 깊숙하게 들어서고
나지막이 내려앉은 하늘과 구름을 떠받치는 등뼈를 찾아가면서
그의 내력이 적힌 뼈마디 사이 책갈피를 넘겨보면
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낙엽의 전언
여기도 강물이었던 적이 있어 물결 굽이쳐 흐르고
저기도 바다였던 적이 있어 푸른 속에 파도가 일렁이고
그기도 하늘이었던 적이 있어 구름은 몰려다니고
돌아눕는 등허리 뼈마디에 빠짐없이 새겨져 있다
실핏줄처럼 물길이 나누어지고
체액이 가지런히 흘러가면서
숨을 쉬고 맥박을 뛰게 하는 갈색의 장기들
분해해야 할 섬유소는 능선마다 펼쳐져 있고
소화를 마친 영양소는 바위 곳곳으로 숨어들었다
한 생애 고스란히
새겨놓은 산
그 속은 잔잔한 바다를 닮아 있다
당선소감
다르지 않은 삶과 시
제가 살고 있는 속리산 약산골에도 비가 내렸습니다. 여름과 가을의 딱 그 경계입니다. 오늘 따라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가 더 친근하게 들립니다. 산골에 사는 재미 중 이맘때는 버섯을 따러가는 일입니다. 작년에 봐두었던 싸리버섯 밭이 있는 능선을 찾아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거짓말처럼 발밑에 한 무더기의 능이버섯을 만났을 때의 기분과 같았습니다. 송이버섯을 딸 때 보이는 금빛 후광과 같았습니다. 이럴 때 꼭 누군가 나타나 빼앗아 갈 것 같은 조바심이 나는 일도 참 이상합니다.
숲에다 대고 친구들에게 큰 소리로 자랑을 하면 물푸레나무와 고로쇠나무, 다래, 소나무 고라니와 오소리, 다람쥐, 까치도 한 목소리로 축하해주겠지요. 제 삶의 근거지이면서 시의 무대이기도한 약산골과 피앗재에서 시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려고 합니다. 삶과 다르지 않은 시를 써보려고 합니다. 등단의 길을 내딛게 해주신 시와경계와 심사위원 선생님과 시인의 길로 이끌어준 선배 시인들께도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시부문 심사평
인간 자연 우주의 몸 나누기, 그 근저에 깔린 우리 삶의 해부
상상력이 활달한 시인을 만났다. 그의 시에서 다루는 사물은 일상적 의미와 현실을 성큼 넘어선다. 인간과 사물은 즐겨 자연, 나아가 우주와 몸 나누기를 하며 역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일테면 라면 하나에 “아침 나절 산에서 따온 별똥별 한 보따리”가 들어가고, “키 큰 나무는 행성을 이고” “작은 넝쿨은 위성이 되어 공전”(「라면 먹을까」)한다. 이런 원초적인 상상력은 산능선 그 커다란 뱃속에 들어온 자아가 오래전 강물이기도, 하늘이기도 했던 산의 내력과 서서히 조우하며 “하늘과 구름을 떠받치는 등뼈”를 찾아 산의 거대한 소화기능을 체득하는 순간으로 이어진다(「속이 보이는 산」). 모든 것을 소화해야 하는 산. 이런 상상력은 상상력 자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우리 삶을 날카롭게 해부하는 데 바쳐진다. 나무와 동물들의 힘든 겨울나기를 다룬 「약산골, 2월」의 익살과 유머에는 생태를 훼손하는 인간들의 생존방식에 대한 은근한 풍자가 스며 있다. 이는 「산골 세탁소」에서 우리는 노루와 까마귀 너구리 오소리가 가져오는 빨랫감의 신선함에 빠질 때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반전을 맞는 것과도 같은 맥락이다. 서성수 시인의 자연은 오늘의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힘을 가진다. 그는 자연 속에 살면서 인간 자연 우주가 하나가 된 지점을 떠올림은 물론, 거기에 기대어 기울어진 인간의 생존양식에 균형을 찾아주려 한다. 거기에 이 분 시의 내밀함이 있다. 당선을 축하하며 정진을 당부드린다.
- 손진은(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