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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성장한 자들의 생각을 가지고 같은 길을 걸음
(빌립보서 3:13-16)
“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賞)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
지난 시간에 푯대를 향하여 좇아감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었다. 오늘은 어떻게 푯대를 향하여 좇아갈 것인가에 대해 함께 나누겠다. 사람들은 그냥 살아가지 않고 나름대로 다 푯대를 가지고 있다. 공부를 하는 사람도, 사업을 하는 사람도, 운동을 하는 사람도 푯대를 향하여 열심히 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푯대같은 것이 없이 그저 편안하게 산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에게는 편안하게 사는 것이 푯대가 될 것이다. 어쨌든 다 푯대를 가지고 산다. 문제는 어떤 푯대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어떤 푯대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의 방향이 결정된다. 어린 아이가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생각하면 그쪽으로 방향을 설정해서 국가대표 선수가 되어 월드컵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기가 어떤 푯대를 갖는가에 따라서 자기의 운명이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열심히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려간 사람이다. 그런데 어느 날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는 눈이 멀었고, 아나니아 형제에게 안수를 받고 눈의 비늘이 벗겨졌다. 눈의 비늘이 벗겨졌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 내가 이때까지 동쪽으로 달려갔던 것은 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 것이 아니구나! 그리스도가 나의 푯대구나! 이렇게 사도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세계가 열렸고, 또 새로운 푯대를 가지게 되었다.
사도 바울은 자기는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데 "나는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좇아간다."고 간증하고 있다. 상(賞)은 푯대를 향하여 좇아간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받는 것을 이야기한다. 공부나 사업을잘 하는 사람도 상을 받을 수 있고, 운동을 열심히 해서 금메달을 딸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상들은 상은 상이고 나는 나이다. 아무리 좋은 상을 목에 걸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의 기쁨이 될 지는 몰라도 영원한 기쁨이 될 수는 없다. '화무십일홍'이란 말이 있다. 아무리 좋은 꽃도 열흘밖에 못 간다는 말이다. '권무십일'이란 말도 있다. 아무리 좋은 권좌에 앉더라도 오래 못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이 곧 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상'은 어떤 상인가? 내가 그리스도라는 상을 받았다는 뜻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바로 내 자신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내 자신이 되고 내 생명이 되는 것은,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자신이기 때문에 나와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히 그리스도를 누리고 그리스도를 사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간증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부름은 너무너무 다른 부름이다. 하나님은 이런 그리스도를 상으로 준비하셔서 우리를 부르셨는데, 이것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다. 이 말은 아래에서 부른 부름의 상도 있다는 말이다. 위에서 부른 부름의 상이 무엇인가? 이것은 나를 지으신 분이 부른 부름의 상이고, 나의 근원에서 부른 부름의 상이고, 나의 하나님이 부른 부름의 상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 부르심의 상, 인생에게 주어진 영광스러운 위임을, 에서가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 버렸듯이 너무 가볍게 여기고 이것을 팔아 버리고 말았다. 오히려 밑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지라' 하고 그쪽으로 좇아가고 말았다. 이 말은 무엇인가? 원래 천사는 사람을 섬기도록 만들어진 자다. 섬기려면 능력도 필요하고 지식도 필요하다. 그런데 자기보다 못한 천사가 부러워서 그것이 상인 줄 알고 좇아가다 보니까 사람은 일생동안 천사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인생의 영광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왜 나는 안되나?! 왜 나는 죽나? 왜 나는 병에 걸리나? 왜 나는 내맘대로 안되나? 이것은 전부 다 천사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천사에게 지배를 받고 있어서 인생에게 주어진 영광스런 위임을 개똥처럼 여기고 말았다. 그래서 인류는 전부 다 위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이 아니고, 밑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좇아가려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쫒아간 사람이다.
예수님은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말은 그의 부르심이 영생인 줄 안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위임한 그 위임이 영생이고 참 생명임을 아시고, 그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좇아가신 분이다. 누가 부르느냐에 따라서, 또 누구에게 응답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인생은 완전하게 달라진다.
세상에는 상들이 참 많다. 권위가 있는 상이 있는가 하면, 별로 권위가 없는 상도 있다. 1971년도에 박정희 대통령이 '대통령컵'이라는 상을 만들어 축구대회를 열었다. 그런데 그 상은 별로 권위가 없어서 대회에 참가할 축구단을 한국에 유치하느라 굉장히 애를 썼다. 그 상의 권위가 없기 때문에 결국 없어졌다. 그런데 월드컵이라든가 윔블던 테니스 대회 같은 것은 대회 개최자가 아주 권위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대회에 나가서 상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최자가 누구인가? 부르는 자가 누구인가? 이것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이다.
우리 인생은 어떤 상을 좇아가느냐에 달려 있다. 사탄의 상을 좇아갈 것인가? 하나님의 상을 좇아갈 것인가? 다시 말하면 생명과 안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좇아갈 것인가? 선악과 안에서 부르는 부름의 상을 좇아갈 것인가? 얼른 보면 생명은 너무 시시해 보이고 선악은 너무 대단해 보인다. 그래서 아담은 대단해 보이는 그 상을 좇아간 결과, 그 상의 종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 인생에게는 많은 상들이 제시돼 있는데, 오늘 우리가 이 시간에 온 것도 그냥 온 것이 아니고 부르심의 상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우리는 그 부르심의 상을 향하여 좇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영원 안에서 세우신 푯대이다. '영원 안에서 세우셨다'는 말은 천지와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아담이 지어지기 전에, 하나님이 이 '그리스도'라는 푯대를 세우시고 창조를 하신 것을 말한다. '영원 전에 세워졌다'는 말은 무엇인가? 거기는 어떤 형편도 없었고, 어떤 사정도 없었고, 선도 없었고, 악도 없었다. 그래서 창세기 3장 이후에 있는 그런 복잡하고 어려운 사정이 하나도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만 있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필요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푯대로 영원한 계획을 세우신 것이다.
우리의 형편에 맞추어진 푯대는 그것이 굉장한 가치가 있는 것 같지만, 아무런 가치가 없다. '대통령컵' 우승이 제3공화국 시절에는 아주 권위 있는 상이었을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 푯대는 없어지고 역사의 뒤안길로 그냥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영원 안에서 세워진 푯대이다. 하나님은 이 그리스도를 목표로 사람을 지으셨다. 만물은 사람을 목표로 지어졌다. 풀 한 포기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으려면 사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없으면 그냥 풀에 불과하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이름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사람에 의해서 가치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만물의 중심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사람의 푯대는 바로 그리스도다. 사람은 그리스도를 푯대로 해서 지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의 성공은 그리스도에 달려 있다. 그리스도가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농부가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의 목표는 바로 열매를 보기 위한 것이다. 열매가 없다면 바람이 왜 불었는지 비가 왜 왔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열매 안에서 모든 것이 다 해석되고 모든 것의 가치가 드러난다. 열매가 없으면 허무하다.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목표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세우신 것이다. 우리의 형편과 전혀 관계없이 영원 안에서 세워진 이 푯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나는 여러 푯대를 정했었다. 중학교 때는 축구가 좋아서 축구선수가 되려고 축구부에 들어갔다. 그 다음에 웅변하는 사람이 부러워서 웅변부에 들어갔다. 그때 나는 '정치외교학과에 들어가야지!' 이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런저런 푯대를 많이 세웠지만 지금은 하나도 없다. 내가 세운 푯대는 하나도 없다. 그런데 내가 45년 전에 한 영원한 푯대를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다 했지만 한번도 그 푯대는 바뀐 적이 없었다. 지금도 그 푯대가 나의 영원한 푯대다.
위에서 온 푯대, 이 푯대만이 영원한 푯대이고, 인생에게는 절대적인 이 푯대가 필요하다. 우리가 구속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구속은 우리의 영원한 푯대는 아니다. 구속은 왜 생겼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가서 바로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그 노예상태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기 위하여 유월절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구속한 것이다. 바로의 종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필요없다. 그러니까 구속은 과도기적으로 필요한 것이지, 영원 안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영원한 목표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영원 전에, 영원 안에서 우리의 푯대로 세워진 것이다. 우리가 타락하지 않았더라도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다. 만약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그대로 평안하게 살아도 그것도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다. 아무런 죄가 없이 살았다 해도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다. 타락하지 않았어도 그리스도가 푯대이고, 창세기 3장 이후에 타락했어도 그리스도가 푯대인 것이다. 다만, 타락한 사람은 구속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구속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가 된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원래 건강한 상태로 만드셨는데, 우리가 병이 들었다. 병원에 가서 병을 고치고 이제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사람의 푯대는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다.
직장에 다니다 아팠다. 병이 나으면 다시 직장에 복귀해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푯대는 그리스도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형편이나 우리의 어떠함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좇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떨 때는 모든 일이 잘 풀려서 하나님의 은혜다 하고 교회 생활 열심히 하다가, 뭔가 내 뜻대로 일이 잘 안되고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이 있는가 없는가 이렇게 생각을 해서 헤매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라도 우리는 이 푯대를 잃어버리면 안 된다. 내가 아파도 그리스도가 푯대고, 내가 건강해도 그리스도가 푯대고, 사업이 잘 되도 그리스도가 푯대고, 사업이 망해도 그리스도가 푯대고, 날씨가 좋아도 그리스도가 푯대고, 날씨가 나빠도 그리스도가 푯대다. 이 영원한 그리스도가 없다면 우리는 오락가락 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것이다. 하루에도 열두 번 오락가락 할 때가 있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라는 푯대가 없기 때문에 내 기분에 좋을 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이유가 천당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옛날에는 이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요사이는 이것을 믿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만약에 우리가 천당에 간다면 우리의 푯대가 이루어진 것인가? 천당에 가도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미국에 처음 갔을 때는 너무 좋아서 거기가 천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한두 달 살아 보면 미국이나 한국이나 똑같다. 좋은 집을 지어 살아 보니, 한 달 지나니까 처음에 들어갔던 그 기분이 안생겼다. 문제는 바로 사람이다. 환경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마지막에 가면 허무해진다. 잘 사는 사람도 허무해지고, 못 사는 사람도 허무해진다. 그래서 전도서에 보면 제일 처음에 허무로부터 시작한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이 말은 사람들이 가장 부러워했던 솔로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가 없으면 모든 것이 다 마지막에 가면 허무해진다. 우리가 가야 할 이 목표를, 우리의 형편과 우리의 사정에 의해 만드신 것이 아니고 영원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는 우리의 사정 안에서 오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오신 분이다.
그러면 그리스도만을 푯대로 해서 좇아간다고 했는데, 그러면 어떻게 좇아간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여기서 '온전히 이루었다'고 개역성경에 쓰여 있고, 다른 성경에는 성숙한 사람이라고 쓰여 있다.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참 어려운 말인데 내 경험 안에서 보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다.
나는 20대 중반에 너무 곤고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사방이 막혀, 머리둘 곳도 없고 위로 받을 곳도 없는 외톨이와 같았다. 젊은 나이인데도 에너지가 완전히 빠진 엔진처럼 방황하던 그때에 우리 교회를 만났다. 우리 교회를 만난 후, 여기에 가면 내가 위로를 받고 평안을 얻고 사람으로 인정받고 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살았던 서울을 버리고 대구로 내려갔고, 대구에 가면 이제껏 살았던 인생과 다른 인생을 살 것이라 생각했다.
대구에 내려간 이후에, 깊은 어둠에 빠진 시간이 길었다. 위로를 받으러 갔지만 나를 위로해 줄 사람이 없고, 내게 평안을 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원하는 것을 주는 곳이 아니었다. 내 생각과 내 그림을 가지고 갔는데, 교회가 나의 생각과 그림과는 전혀 맞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너무 좋아하고 충만하게 사는데, 나는 마치 바깥 어두운 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과도 같았다.
나는 오히려 대구에 와서 교회를 만나기 전의 어둠보다 더 어두웠다. 교회를 만나기 전의 절망보다 더 큰 절망이 내게 왔다. 내가 왜 대구에 왔는가? 큰 강을 건넜기에 되돌아갈 수도 없었고, 빛이 없는 어둠 가운데 있었다. 나보다 더 어두운 사람이 없을 정도로 헤맸고 한마디 말씀도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순회도 가고 교회 생활은 다 했다. 그렇지만 나 자신으로 한 게 아니었고, 물고기가 흐름에 움직이듯 움직인 것이었고, 형제들이 결혼을 하니 나도 결혼을 하였지만, 항상 곤고하고 갑갑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 내 인생의 바닥이 드러났다. 더 이상 아닌 것을 맞는 것으로 가장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될 대로 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하나님을 도무지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정말 어둡고 더 이상은 못 살겠다고 오만 발악을 다 했다. '내가 이렬려고 대구에 왔는가? 종교 안에 있었으면 포장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있을 텐데...' 모든 것이 다 벗겨져 나가고 비참했다. 숨을 곳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자리를 경험하였다. 완전히 나락에 떨어지는 경험을 나는 교회 안에 와서 경험하게 되었다.
더 이상 내 인생에 빛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때, 캄캄한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왔다. 그 말씀이 바로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산 혼이 된지라" 흙이라는 말씀이 그때에 들렸다. 내가 우리 교회에 와서 최초로 들렸던 말씀이 '흙'이었다. 나는 내 사정과 형편, 내 문제 때문에, 가난하고 외로워서 교회에 왔지, 하나님 말씀이 들린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내 인생이 완전히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비로소 내게 말씀이 들렸는데, 그 말씀이 바로 '흙'이었다.
그 말씀이 들리니 내 인생이 갑자기 밝아졌다. 흙은 씨를 뿌리는 사람만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완전히 버려져 쓸모없는 인생인데, 그때 하나님이 빛으로 내 인생에 찾아오셨다. 그때 그 길을 가게 되었는데, 나는 그때까지 정말 목사님이 어떤 분인지를 전혀 몰랐다. 그분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시고 어떻게 사시는지를 몰랐다. 내 앞에 계신 한 사람을 전혀 몰랐다. 그러니까 나는 목사님을 흉내내고 본받으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상하게 말씀이 들리고 그 길을 걷게 되니까, 목사님이 이 자리에 살고 계시고 이 자리에서 이 말씀이 나오는구나! 이 자리에서 그 삶이 나오고 이 자리에서 이 생각이 나오는구나! 이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전에 나는 목사님과 분리되면 죽을 줄 알고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는데, 이 길을 알고 난 후 이것이 시간과 공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 사람이 아니면 그 사람을 모르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면서 그 사람을 알려고 한 것이었다.
개가 주인과 평생을 살아도 주인을 알 수 없다. 생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생명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삶이 완전히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마음으로 이 말을 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 이루었다. 온전히 이루었다'는 말은 어떤 완성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이제 인간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이제 하나님이 지으신 흙의 자리로 돌아왔다는 말이다. 처음으로 내가 사람이 된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 앞에 가시는 분을 알게 되었다. 저분은 누구에게 이끌려 가는 사람이구나! 이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그분이 지금 나에게 푯대가 되셨다. 그때 자매가 내 바짓가랑이를 잡아도 그 푯대를 향해 운명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그전에는 내가 내 힘으로 가야 하니까 자매와 싸웠다. 그런데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다. 내 운명이 결정되어 있고 내 푯대가 이미 정해져 있어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내 마음과 내 생각과 내 온 존재가 그 푯대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깨닫게 되었다.
나는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따라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이천 년 전의 그리스도를 생각했지만, 이제 이천 년 전의 그리스도는 모르지만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그분이 나의 모든 것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그 사람을 따라간다는 것은 그냥 몸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의 생각과 내 생각이 같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사람의 생명에서 그 생각이 나온다. 그 사람의 생명과 내 생명이 같지 않으면 아무리 따라가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 따라가면 갈수록 내 안에서 그분이 발견되고 알아져 갔다. 그때 이후에 나는 순회를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옛날에는 젖먹이처럼 어미 젖 떨어지면 죽는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운명을 알고 난 후에 순회를 가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앞에 있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고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나 스스로 만든 사람이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조성된 사람인 것을 알게 되었다. 옛날에는 목사님 옆에 붙어 있어야 알 줄 알았는데, 이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운명과 영원한 푯대를 알고 난 후 내가 떨어져 있어도 알 수 있었다.
생명은 생각을 가져온다. 한 생명이라야 한 생각이 된다. 목사님이 이럴 때 이렇게 생각하시고 사셨구나를 알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내가 목사님께 물어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고, 내가 사는 것이 그가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이 같다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삼성의 창업자 이병철 회장은 아들 셋 중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삼성을 맡기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셋째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와 생각이 같았다. 생각이 같은 그 아들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다른 아들들은 굳이 아버지 뒤를 좇아갈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앞에 달려가는 그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이어야만, 내가 그 사람을 따라갈 수 있다. 바울의 글을 보니 '이 생명으로 이 생각을 했구나! 이 생명으로 이 삶을 살았구나!' 하고 이해가 된다. “내가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해로 여겼다.” 나는 옛날에 세상이 해로 보이지 않았고 너무 좋은 것이 많았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알고 난 후 나도 이런 표현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만이 이 표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 바울은 어찌하든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자기의 목표였다. 그리스도와 이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간다.” 이렇게 말한 다음에 “우리 온전히 이룬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 자리에서 그 운명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게 된다. 내가 캄캄한 어둠에 있을 때, 나로 말미암은 모든 것이 다 끝나게 되었을 때에 내 귀가 열리고 눈이 떠져서 내 인생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니까, 그때부터 그렇게 어려웠던 말씀이 다 알아졌다. 나를 이야기하는 말씀이었고, 내 생명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이었다.
바울은 어떤 마음으로 이런 말을 했는가? '내가 그러한 것처럼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해야 그리스도를 좇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자기의 생각을 형제들도 똑같이 갖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옛날에 '내 심장을 가지고 그 형제에게 심어주고 싶다.'고 하셨다. 잘 따라오다가 엉뚱한 곳으로 가버린 형제에게 생명이 같아야 따라오는 것이지 결심해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은 어떻게 그런 분이 되셨을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데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야기이다. 우리가 아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예수는 성전에 올라가 양이 번제단에서 태워지는 모습을 보았고, 이 일은 수천 년 동안 계속되어 왔으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이 양을 받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고 그 이상의 계시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양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고 아셨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모든 제사는 끝나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다. 번제로 드린 양 안에서 내 인생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나를 원하시는구나! 내 근원이신 하나님, 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결국 나를 보시고 만족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만족을 채우는 이것이 예수의 유일한 목표였다. 우리 인생이 예수님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면, 우리도 예수로 사는 것이다. 나는 옛날에 이천 년 전의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러웠었다. 이제는 하나도 부럽지 않다. 내가 가는 길 안에서 그들이 발견되고 그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노아는 멸망의 시대, 네피림의 시대의 사람이다. 왜 멸망의 시대인가? 모두 다 하나님이 쓸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전부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에 대해 귀가 막히고 눈이 어둡고 마음이 닫혀서 모두 하나님처럼 되려 하는 것이 네피림의 시대이다. 그런데 노아는 의인이고 완전한 자라고 하였다. 이 말은 네피림과 다르다는 말이다. 네피림은 자기 뜻대로 사는 것밖에 없는데, 노아는 내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내 인생은 지으신 자의 목적 때문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지으신 자가 보실 때, 지으신 자의 목적을 아는 사람이 완전한 자인 것이다.
노아는 방주를 지었다. 방주는 여덟 식구와 만유를 포함하는 것이다. 그런데 네피림은 한 사람도 포함할 수 없다. 내가 나를 위해 살면 내 가족도 내 안에 들어올 수 없다. 오직 나밖에는 없다. 같이 살아도 그 사람이 내게 안식을 누릴 수 없고, 그 사람이 내 안에 와서 홍수를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인생이 내 것이 아니고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함하는 방주가 된다. 방주는 큰 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포함하는 인격을 이야기한다. 노아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하나님의 목적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은 과정을 거쳐 결국 자기 목적이 다 없어지고 자기의 뜻과 가능성과 힘이 다 끝나고, 마지막에 아무것도 없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이삭을 주셨다. 아브라함의 전 인생을 압축하면 이삭 한사람밖에 없다. 이삭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노아가 추구했던 방주도 그리스도이다. 노아도 그리스도가 목표이고, 아브라함의 목표도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하려면 무엇을 기록하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기를 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책에는 하나님의 관심에 속한 것만 기록되지, 하나님의 관심 밖에 있는 것은 기록되지 않는다. 생명책에는 생명만 기록된다. 생명책은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 생명이다. 그래서 생명 이외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만 기록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자기의 일을 하고 계시다. 하나님의 일은 그리스도가 씨가 되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땅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이고 하나님의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답답해지는 것이다. '하나님, 왜 나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십니까? 왜 악한 자를 내버려 두십니까? 왜 소말리아 사람들은 굶어 죽습니까? 왜 세상이 이렇게 혼란하고 복잡합니까?' 하나님이 그 일을 해주실 줄로 알면 우리 인생은 답답해진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일을 하신다. 농사를 지어보면 농부는 자기 밭에만 관심이 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밖에 없었다. 다른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차별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으시다.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에만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세우셨다.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위하여 부르신, 씨를 뿌리기 위하여 하나님이 나를 흙으로 지으신 이 자리가 내 자리로 발견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영원 안에서 그리스도라는 목표를 세우셨구나! 사람의 목표는 그리스도구나! 하고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해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 자신을 분배하고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게 하려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셨구나! 이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들은 오직 이 생각만 가지고 부르심의 목표를 향하여 달려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옛날에 나는 생각이 너무나 복잡해서 '내 머리를 목사님 머리와 딱 바꿀 수가 없는가.' 그런 생각을 했다. 생각이 멈춰지지 않았다. 이 생각의 기계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그런데 이 그리스도의 목표를 알고 난 다음에 생각이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통제할 수 없었던 많은 생각들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리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 여기서 '행한다'는 말은 '나란히 선다, 열을 지어 간다, 군대가 행렬을 해서 간다.'는 뜻이다. 신병교육대 조교하면서 제식훈련을 가르쳤는데, 제식훈련은 무엇인가? 앞 사람의 뒷꼭지만 봐야한다. 다른 데를 보면 안 된다. 제식훈련의 목표는 무엇인가? 열 사람인데 딱 한 사람으로 보여야 된다. 발도 똑같이 올라가야 하고 보폭도 같아야 한다. 심지어 손도 똑같은 각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 제식훈련이다. 이것은 바로 한 길로만 간다는 것이다.
이 말을 갈라디아서에 보면 '따라 산다, 본받는다'는 말로 번역된다. 이것은 '같은 줄에서 간다'는 말이다. 앞에 있는 사람이 밟은 그대로 밟는다는 것이다. 밟은 그대로 밟으면 발자국이 몇 개이겠는가? 하나밖에 없다. 열이라도 하나, 백이라도 한 발자국밖에 없다. 그런 것이 세상에 있는가? 아무리 훈련을 잘 해도 그런 것이 없다. 그런데 생명 안에서는 똑같은 것이다. 생명은 똑같다. 의사가 건강한 한 사람을 해부해 보면 해부한 그 사람 안에 인류 전체가 다 들어있다. 오직 생명의 세계만, 앞에 있는 사람의 발자국을 뒤에서 똑같이 밟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렇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앞에 있는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고, 구체적으로 교회 안에 오면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보이는 것이다. 이상하다. 내 앞에 있는 한 사람이 보인다. 나보다 먼저 간 사람이 보이는 것이다. 저 형제는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길을 나보다 앞서 가고 있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누구를 따라가겠는가? 내 앞에 있는 그 사람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고 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 교회에 와서 교회를 보고 공산당 같다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다. 생각하는 것이 똑같고, 말하는 것이 똑같고, 다 똑같은 것이다. 학교에 근무할 때 다른 선생들이 나와 홍원선 선생을 헷갈려 했다. 얼굴은 다르다. 그런데 이상하게 같은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왜인가? 생명이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간에 그대로 행할지니라.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앞에 있는 사람을 향하여 따라간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자기가 온전히 성숙해간다고 생각하면, 즉 하나님이 원래 우리를 부르신 그 자리로 돌아오게 되면, 앞에 있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좇아가야 된다는 말이 아니고, 저절로 좇아가게 된다. 앞에 있는 목표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 사람의 생각 속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내 생각과 다른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해진 생명의 길로 간다면, 내가 가는 거나 그가 가는 거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에게 “인자는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나를 판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말했다. 예수님이 가룟 유다 앞에서 사람의 길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 길 안에서 발견되지 못하고, 자기 길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결국 그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는 정해진 길로 간다.”는 것이다. 이 길은 누가 칭찬해서 가는 것도 아니고 누가 반대해서 가는 것도 아니다. 어떤 경우라도 정해진 대로 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자기 길을 생각했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실격되고 말았다.
만일 예수가 그 길로 간 사람이라고 우리에게 보인다면, 우리도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그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으니까 헌금을 해도 소용없고, 청소를 해도 소용이 없고, 교회 일을 열심히 해도 거리감이 생기는 것이다.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열심을 다 한다. 그런데 열심히 해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그 안에서 내 자신이 발견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앞에 있는 사람의 행렬을 따라 자동적으로 가게 된다.
“만일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여기서 ‘달리 생각하면’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가? 목사님이 우리에게 여태껏 하신 말씀은 다르지 않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딱 한 말씀이다. 꾸준하게 한 말씀만 하셨다. 절대 다른 말씀은 하신 적이 없다. 그 말씀이 무엇인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이다. 그런데 어느날 목사님이 병원에서 나오신 다음에 ‘십자가에서 못 박혀서 내려올 수 없는 예수’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나는 그 말씀이 여태까지 하신 모든 말씀을 목사님이 그대로 하시는 줄 알았다.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내 안에서 ‘목사님이 여태까지 하신 말씀과 똑같은 말씀인데, 왜 굳이 사람들이 헷갈리게 내려올 수 없는 예수를 말씀하시는가?' 그런 생각이 들었고, 또 그 생각 때문에 상당히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서 내 안에 그 형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도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르구나!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 목사님이 꼭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말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 성경에도 나와 있는 말이다. 바울도 그 예수 이외에는 다른 말은 하지 않기로 작정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 말만 했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십자가에서 못 박혀 내려올 수 없는 예수를 말씀하셔야 되었는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에 있으면, 지금 우리가 아는 것만큼 예수가 명확하지 않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예수를 믿고 있는가?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만, 내려올 수 있는데도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그냥 달려 계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목사님은 예수님은 ‘내려올 수 있지만’이 아니고, ‘내려오고 싶지만 뛰어내려오고 싶지만 뛰어내려올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뛰어내려올 수 있는데 안 뛰어내린 것과, 뛰어내리고 싶지만 못 뛰어내리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우리는 '뛰어내려올 수 있지만 안 뛰어내린 예수' 안에는 포함될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구속될 수가 없다. 그런데 뛰어내리고 싶지만 뛰어내릴 수 없는 어찌할 수 없는 사람, 그 사람은 그냥 사람이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우리와 아무런 차이가 없는 사람이라야 우리가 그 사람 안에 포함되고, 그래야 그 안에 우리가 구속된다. 그래서 목사님은 주구장창 이 자리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인생을 우리가 부끄러워했다. 아담이 버렸던 자리이고 아담이 가볍게 생각했던 자리다. 이 자리는 하나님에게만 필요한 자리다. 사람은 이 자리를 싫어하고 시시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에게만 필요한 자리가 뛰어내리고 싶지만 뛰어내릴 수 없는 그 사람이다. 노아의 날 방주를 예비할 때 옥에 갇힌 그 사람도 포함된다. 모든 만유가 다 포함되는 자리가 바로 '내려올 수 없는 예수'다.
'달리 생각하면’이라는 말은 '다른 생각을 가지면'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 예수를 분명하게 생각하지 않고 애매하게 생각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실 것이다" 즉 '폭로되리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달리 생각하면 우리가 영원한 푯대이신 그리스도를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안의 심각한 문제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내려올 수 없는 그리스도'를 빗겨갔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 인생의 정해진 길을 빗겨갔다고 볼 수 있다. 다른 것을 목표로 추구한다는 것이다. 은사를 추구한다든지, 좋은 일을 추구한다든지, 선한 일을 추구한다든지, 교육 사업을 한다든지 기독교가 사회에 공헌한 일이 너무 많다. 여러가지 좋은 일들을 많이 했다. 문제는 우리에게 이 예수가 명백해지지 않으면 ‘좋은 일’과 ‘그리스도‘가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자칫 엉뚱한 길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이라고 할 때의 ‘달리’라는 말 속에는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스도 이외의 그 어떤 것도 우리와 관계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부름을 받은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이것이 기독교인의 고민이다. 하나가 되려고 노력하면 더욱 분열된다. 그런데 내려올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니고 어찌할 수 없는 이 그리스도 안에 우리가 발견된다면, 그리스도가 푯대가 되면, 우리는 하나 될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바라시는 그 인격,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추구하고 사모한다면, 우리는 저절로 하나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내가 정한 길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길이다.
우리가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은 어디에도 없다. 온전히 이 한 길밖에는 우리 길이 없다. 우리가 아직 다 이루었다는 것도 아니고 다 잡았다는 것도 아니지만, 우리가 지금 달려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번도 ‘아! 이제 다 되었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미국에 입국했다고 미국을 다 아는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첫 문, 시작을 여는 것이다. 미국 사람도 미국 전체를 다 돌아다닐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광활한 곳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측량할 수 없다. 이런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길에 들어섰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니라."(빌 3:13-16) 이렇게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간증하고 있다.
바울은 스스로 이야기할 때 ‘나는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아직 도달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볼 때 바울은 목표에 도달된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은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는 함께 나를 본(本)받는 자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누가 자기를 좇아가든지 안 좇아가든지 그 푯대를 향하여 갔는데, 그 푯대를 향해 가는 그 바울이 형제들에게 푯대가 되었다. 그 길로 갔는데, 다른 사람에게 길이 된 것이다. 이것은 누구와 함께 가는 길이 아니고 내가 푯대를 향해서 가는 길인데, 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푯대가 되고 다른 사람에게 길이 된다. 그런데 길이 딱 한 길로 정해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만나게 되고, 우리가 한 생명이구나! 한 운명이구나! 하고 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완전한 교통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