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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본 50년 두타문학사
소설가 김익하
1. 집필하면서
두타문학회가 구곡양장 세월 끝에 2019년 6월 24일로 쉰 돌을 맞는다.
불과 백여 년 남짓한 연조年條의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그 역사 반을 하나의 궤적에 맞물려 쉼 없이 이어온 명맥이다. 상징적으로 살펴볼 때, 두타문학은 이론 여지없이 영동지역 문학권인 삼척문학 원류다. 이런 논리로 두타문학사는 곧 삼척문학통사라 규정해도 허튼소리가 아닐뿐더러 반론 또한, 없으리라 본다. 이럴 듯 갈수기엔 적은 수량대로, 홍수기에는 강안이 범람하도록 그렇게 구불구불 흘러 오늘에 이른 50년 물길이 곧 두타문학 맥락이다. 물론 우주 안 자연 섭리의 흐름이 그러하듯 발원지에서 하구까지 흘러 오늘에 이른 물도 있지만, 흩어져 딴 길로 가거나 중도에 증발하거나 또한, 지하로 스며든 물도 있는 굴곡진 역사임에도 내일을 향하여 끊임없이 이어 흘러갈 물길이다.
그러나 두타문학 50년 동안 그 문학사를 본격적으로 분석 평가해서 향후 공동지향성적 타깃 존이나 비전을 제시한 사례가 작금까지 없었다는 일부 지적은 뼈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충언이다. 외부 시선에서 남기택南基澤. 文學評論家은 <삼척지역문학의 양상>에서 두타문학을 평가하면서 기존 문학 활동을 폄하함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 ‘시낭송회와 시화전, 동인지, 기관지 발간이라는 형식과 맞물려 반복되는’ ‘관변단체 행사와 유사한 요식적 문학 행위가 지닌 비효율성은 기존 문학사를 통해 얼마든 확인된다’면서 ‘문인 재생산의 곤란과 이론적・학술적 담론의 부재’를 당면한 ‘난제’로 꼽았다.*1⁾남기택 『강원영동지역문화의 정체와 전망』p250 이는 집단지향성(collective intentionality)과 공동헌신(joint commitment)을 모토로 존재하는 집단에게는 적확한 지적으로 평가한다.
사실 두타문학도 쌓인 연조를 내세워 기회 있을 때마다 편년사적으로 정리하거나, 사진으로 보여주기식으로 화사하게 표피적인 외장만 했으나 지극히 문학 본질적인 부분-이를테면 전통성이나 작품의 평가에 궁구함도 없이 명확지 않은, 그저 피상적인 언급으로 일관했을 뿐이란 일부 지적에도 전적으로 귀를 열어놓고 경청해야 한다. 즉 얼굴 주름을 보면 나이 듦을 아는데, 어떻게 왜 무슨 일로 그렇게 늙었는지 알 수 없다는 논지가 정곡에 닫기 때문이다. 사실 편년사 식으로 나열하는 일은 발간하는 연간지 부록으로 첨부된 ‹두타문학회 약사›만으로도 가름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 문학사 전통성 공론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긴커녕 필연성조차 인식 못 하는 ‘무지의 장막(Veil of Ignorance)’ 늪에 빠졌다는 게 또한, 현실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마치 광복절에 태극기를 달면서도 광복기념인지 건국기념인지 모르는 역사 불감증 증후군 환자와 다를 바 없다는 괴리 상황에 빠진 그런 미망 상태와 오십보백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두타문학 50년을 맞아 어느 부분에 방점을 찍어 무엇을 어떻게 읽어서 50년 문학사를 정리한 다음 어떤 기록으로 후대에 남길 것인가. 이제 그런 물음에 대답을 내놓아야 할 시점과 자리로 왔다고 본다. 다시 말해 달제어獺祭魚 식으로 어부마다 너른 바다에서 잡은 고기들을 한 줄로 보기 좋게 꿰어 상품성 있는 물건으로 만들어 놓을 당위성과 마주했다는 뜻이다. 우선 두타문학 50년 흐름 밑에 쌓인 침전물은 무엇이며, 그 성분은 삼척문학사에서 어떤 문학적 명증성과 지향성이 있는가. 그 성분을 분석 취합해서 기록으로 남겨야 후대에 두타문학 본질을 적확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다. 그 결과물이 곧 50주년을 맞이한 두타문학 전통성의 민낯이다.
다만 근자에 이르러 로컬리즘 이론을 확대하면서 지방문학(특히 영동지역 문학)에 관심을 천착하는 남기택의 논문 몇 편*2⁾남기택 『강원영동지역문학의 정체와 전망』에 실린 논문들. 에서 조심스럽게 두타문학에 대한 부분적으로 접근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50년 역사를 빛낼 평가작업이 깊이 있게 이루어지지 않은 주요 원인은 ‘습작 문단’과 문학 미적 수준 취약성으로 출발한 지방문학에 대한 경시 풍조도 한 가닥으로 보겠으나,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자체 비평기능 부재에서 오는 학문 빈곤으로 귀착된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50년 역사를 기려야 하는 처지에 마땅히 그 작업을 등한시했음을 이 시점에서 반성해야 함은 물론 타자 시점인 ‘우리’로 돌아가 100년사를 맞을 그 날에는 더 많은 페이지가 그 부분으로 채워져야 하고, 또한 그런 긍정적인 지향성 이벤트 프레임으로 짜여야 한다는 공통인식과 공동노력을 필수로 한다. 유의미한 역사에 대한 평가작업은 그 역사를 빛낼 근본 바탕이 되기 때문에 비껴갈 문제가 아니라 정면으로 맞닥뜨려 엮는 일이 두타문학 재귀적 책무라 본다.
간간이 두타문학회 출신이 아닌 범 삼척 출신 작고 문인들-이를테면 문학 활동이 일단락된 최인희崔寅熙(1926∼1958)·진인탁陳仁鐸(1923∼1993), 등에 대한 평가작업이 있긴 했으나, 본회 회원들에 대한 평가작업에는 인색했다. 이는 작품제작 작업이 진행 중이라거나, 아직 평가대상에 오르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온 듯하다. 다행히 최근 소속회원의 작품평가나마 정일남鄭一南·김진광金振光이 시집 해설형식으로 꾸준히 비평기능으로 작동하여 나름대로 일부 회원의 문학평가 자료로 축적하고 있으나, 이 역시 작품의 학술적인 분석보다는 한국 문단 어디서나 횡행하는 ‘주례사식’ 작품해설 카테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채 긍정적인 데로만 추가 기울었다는 평가다. 문학평가에서는 ‘서로 인간적으로 잘 앎’이나 ‘인간관계마저 거를 칠 수도 있다는 우려.’는 문학 본질뿐만 아니라 당사자의 문학 발전을 위해선 분명 유독한 일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는 ‘부정확한 비판은 분노를 산다면 부정확한 칭찬은 조롱을 산다’*3⁾『슬픔을 배우는 슬픔』<정확한 칭찬>에서고 피력했다.
정일남의 경우 한때 ‘이런 산문을 다시 쓰지 않을 것이다.’*4⁾정일남 『변방문학과 일몰의 풍경 p5 시선사 2013년 라 선언한 적도 있지만, 이제 50년 역사 명찰을 단 일원으로서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을 막자면 누구든 마땅히 쓴소리가 섞인 평가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내성이 있으리라 믿어 응당 활성화하고, 아는 만큼 작품평가 작업에 참여하여 문학사 정립에 일익을 담당하는 게 모두 일로 되었다.
50주년을 맞은 문학사를 정리하는 소이는 그리 간단한 노릇이 아닐뿐더러 참으로 곤욕스러운 난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편집자 의지가 워낙 간곡하기에, 차마 내칠 수가 없어 다시 흐려진 기억을 더듬고, 50년 동안 헤진 자료와 바랜 글자 행간을 읽으면서, 또 누군가 이 시점에서 이 일을 반드시(설사 완벽하지 않을지라도) 정리부터 시작할 일로 여겨 원찮게 다시 프로레슬러인 릭 플레어(Ric Flair. 1949. 2. 25∼)처럼(관중은 그에게 악역을 요구하곤 그의 경기에 가차 없이 욕설을 퍼붓는다.) 욕망태기까지 둘러쓰게 되었다. 어떤 이는 밖에서 들여다보는 시선보다 안에서 내부를 훑어보는 눈이 더 밝다고들 한다. 그러나 그건 근자近者의 맹점盲點 논리처럼 사정을 모르는 소리다. 이미 보는 눈이 무리 정서에 젖었기에 ‘맞춤돋보기’를 쓴 격이고 ‘한 집 건너 처삼촌 집’이니 안목이 안쪽으로 굽을 수도 있는 우愚 때문이다. 가령 구르다가 굴참나무 밑 얕은 구덩이에 빠진 도토리들에 비견해 보자. 구덩이에 모인 도토리들은 굴러갈 방향을 모르지만, 먼눈에서 보면 구를 방향이 명료하게 보이는 이치와 같다.
그런데 자료를 추리고 회원 개별의 원고를 보고 집필하다 보니 초고가 책 한 권의 분량에 닿았다. 본고를 게재할 지면이 뻔히 한정됨을 앎으로 회원 개인 문학의 연보와 평가, 그리고 『두타문학』 발간을 모토로 한 편년사를 추려 내고 개괄 부분에서 요점만을 뽑아 편집자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도 긴 것 같다. 아울러 자료를 보내준 분께 양해를 구한다.
2. 두타문학 태동 전 삼척 문학환경
두타문학 뿌리를 서술할 때마다 『제왕운기』를 저술한 이승휴李承休(1233∼1300) 시대까지 끌어올리는 일을 능사로 평가했다. 그러나 시원 정립을 무려 칠백 년이나 올려잡아 서술하기에는 참으로 논거가 박약하고 궁색하긴 만하다. 시공 편차가 터무니없이 벌어질 뿐만 아니라 50년 두타문학 갈피를 눈 씻고 아무리 뒤적여도 이승휴 『제왕운기』 위대성을 추상적으로 기술하거나, 한시 몇 편을 가져와 중언부언할 뿐, 저서에 녹아 흐르는 민족사관과 시대정신의 영속성을 규명하고 이어받으려고 노력한 흔적은 『두타문학』 아무 데서도 찾아보려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김영기金永琪는 『두타문학』 제6집 이후에도 이승휴 문학 정신을 뿌리로 삼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지만, 애당초 『두타문학』 제3집 <두타문학의 지평>*5⁾김영기 <두타산의 인상> 『두타문학』 제3집 p6 을 이승휴 민족문학 정신이 아니라 두타산 정기와 그 상징성에 무게를 두었을 뿐이다. 또한, 김영준金榮俊(1934∼1996)은 ‘나만의 이야기,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고 두타산의 정기가 승화된 예술성과 향토성이 짙게 채색된 문학의 씨앗을 이 땅에 깊이 그 뿌리를 내리게 하여야 한다.’ 고 『두타문학』 제6집 <또다시 신념을>이란 권두언으로 언급한 게 두타문학 최초 집단지향성 선언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함에도 이승휴 민족문학 개념을 궁구하고 어떤 흐름을 두타문학에다 접목한다는 명시는 물론 차제에 전통성조차 규명하려는 노력마저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혹자로부터 아직 50년이 채 되지 않아 진행 중인데 평가 작업하긴 이른 시점이라는 반론이 있을는지 모르나, 두타문학 탄생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규정하기에는 아전인수식이라 인과관계로 성립시키려는 서술은 처음부터 공허할 수밖에 없고 그게 또한, 가상이설로 필연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무런 논거도 없는 데서 주춧돌을 가져와 두타문학 전통성 정립을 서술하는 자리에다 놓는 일은 앞뒤 문맥상 논리적 정당성 결여 때문에 반드시 신중을 기할 일이다. 따는 인위적인 견강부회한 가설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재물을 모은 하천한 사람이 품계를 높이고자 멸문명문가문의 족보를 사들이려는 심산과 다를 바 없으며, 소 먹일 풀이 없다고 이웃집 짚가리에서 짚단을 가져오려는 일과 다를 바 없다. 이제 두타문학 50년을 맞아 수사학적 환상에서 ‘탈맥락화(Decontextualization)’ 하여 존재의 실체를 규정하는 자기 성찰할 때가 왔다고 본다. 우리는 지상에서 새로운 현상이 발생하면 그 원인을 규명하려고 하늘 방위를 살핀 다음 풍토환경을 우선 살핌을 정석으로 한다. 두타문학사 서술에서도 예외 없이 태동에 앞서 지역 문학적 환경을 살펴봄이 두타문학회 전통성 정립과정에서 선행되어야 함에도, 불행히도 과문인지 몰라도 파편적인 언급만 있었을 뿐 심도 있게 이를 토대로 규명한 글을 접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해서 늦게나마 두타문학이 태동에 앞선 직전 삼척지역 문학환경을 살펴 그 직간접 원인을 궁구해 보는 작업도 효용적 요소가 있으리라 여겨 조심스럽게 살펴봤다.
삼척에는 두타문학 뿌리가 된 동예문학회와 불모지문학회, 그리고 영시문학회 외 다른 문학회가 결성하기에 앞서 1세대*6⁾ 남기택『강원영동지역문학의 정체성』p241 청운 刊 문학인들이 있었다. 남기택은 1세대 문학인으로 진인탁·최인희·이성교李姓敎·김영준으로 언급했는데, 이들 가운데 김영준은 문학을 시작한 연조와 출생 연대는 비슷하나 1세대로 특정하는 탈향脫鄕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두타문학 태동과 발전 전개과정에 깊이 관여했고, 삼척 문화사업에 비중을 두어 활동했으므로 문학 활동 성향과 성과 측면에서 제외하여 논의함이 논증적 의제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본다.
굳이 삼척에서 문학적인 세대로 구분하자면 정일남·박종철朴鍾徹 등과 함께 묶어 삼척문학사에서 1.5세대, 즉 두타문학사에서 1세대로 규정하여 평가함이 삼척 현대문학사 정리에 적확하다. 삼척 현대문학사 1세대에서 김영준을 제외한 자리에다 소설과 수필을 쓴 홍영의洪永義(1915∼1975)와 평론가 김영기를 포함하는 게 문학 활동무대로 한 형태별로 정리하든 생활영역 측면에서 따지든 올바른 분류다. 물론 남기택은 ‘시 장르가 지배적인 경향’을 보이는 영동지역 문학권역 특성상 시인 위주와 나이 기준으로 언급해서 텍스트로 그렇게 한정적으로 서술한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안타깝게도 장르가 산문인 두 사람은 소수 장르라서 삼척 현대문학사를 언급하는 자리에는 늘 논외로 한 건 또한, 사실이다.
1세대 문학인들은 모두 삼척 태생이지만, 산업근대화로 광공업도시로 탈바꿈한 삼척에서 인문학 배움 때문에 일찍 고향을 떠난 탈향인脫鄕人이고, 외지에 생활 근거지를 두고 중앙문단에서만 활동한 ‘출가외인出嫁外人’으로 특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공업계 교육을 경험한 뒤 독학과 사숙으로 문학을 접하는 대부분 향토 붙박이 문청文靑과 달리 문학과 연관된 인문학 공부를 체계적으로 습득하여 일찍 중앙문단에 합류해서 활동할 만큼 좋은 문학환경과 맞물려 등단 시기가 빠르다는 공통점도 유사하게 공유하고 있다.
자연 친화와 유리琉璃의 세계*7⁾정일남『변방문학과 일몰의 풍경』p28 시선사 刊 를 추구하다 서른셋에 요절한 최인희, 고독한 토착의식*8⁾정일남『변방문학과 일몰의 풍경』p51 시선사 刊 을 끊임없이 노래하는 이성교, 용설란 미학과 귀소성歸巢性*9⁾정일남『변방문학과 일몰의 풍경』p209 시선사 刊 의 진인탁, 『율곡 이이론』을 일어로 논문을 쓰고 대구 매일일보에『애정백서』를 연재하여 호평을 받은*10⁾정연휘 편저『삼척문학통사』p623 도서출판 해가 刊⁾ 홍영의, 『님의 침묵』으로 출발하여*11⁾정일남『변방문학과 일몰의 풍경』p70 시선사 刊 김유정 문학론*12⁾김영기『金裕貞-그 문학과 생애』1992년 지문사 刊 을 평가하고 태백산 영토 곳곳을 샅샅이 끌어안은 김영기. 이들 1세대가 삼척에서 생활했다는 가설을 상정한 필자의 견해를, ‘모름지기 삼척 문학환경과 후학들 문학 성장에 영향을 끼쳐 더 일찍 삼척문학이 화려하게 개화했으리라’ 란 말로 사석에서 피력한 바가 있다.
그러나 1세대인 이 탈향문인들은 엄밀히 말하면 출생지는 삼척이나 고향에서 문학 활동은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지방 소수 문청들과도 문학적 교류마저 단절되어 있었다. 생업 탓일 테지만 서른셋에 요절한 최인희를 제외한 1세대 문인들은 중앙 문단에서 집중으로 활동했으나, 원거리 지역인 삼척의 변방문학*13⁾정일남『변방문학과 일몰의 풍경』시선사 刊 에 문학 밑거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삼척에서 바라보는 이들에 대한 시선은 분명 출가외인들이다. 삼척 후배 문청들은 문명文名만 돌아온 그들의 문학세계를 알고자 빛바랜 고서에서 낯선 글을 찾아 읽으며 ‘우리 고향 출신에도 이런 문인이 있었다.’ 그렇게 대리만족으로 그쳐야만 했다. 다만 김영기만은 강원문학을 선도하는 위치에서 강원일보에 근무하는 관계로 두타문학을 창립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강원일보 문화면에서 ‘70년의 강원문단’*14⁾강원일보 1969년 연말시리즈 ‘70년의 강원문단’ 제하 기사이나 ‘2월의 강원문단’*15⁾1971년 2월 28일자 ‘2월의 강원문단’ 제하 기사 같은 기획기사로 회원들 사기를 북돋워 주었으며, 『두타문학』에 연이어 투고하는 열정을 보여 그나마 후학들의 위안이 되었다. 여느 탈향문인과 달리 김형화金炯華와 공식 대담에서도 문학 활동에서 ‘삼척문학, 그 침체의 책임은 면치 못한다.*16⁾『두타문학』제5집 p13 1977년 刊 고 자책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성교는 몇몇 후배의 문단 등단에 힘을 보태주었다. 그러나 대체로 삼척 출신 1세대 문인들은 삼척에다 전통을 이을 만큼 직접으로 문학적인 풍토를 배양하지 못했다.
1960년대, 삼척 외적인 문학환경은 왜 불모지였을까? 이 물음은 반드시 사안에 대한 본질을 규명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지금껏 삼척문학사에서 문제 돌출은 물론 관심 밖에 두어 마치 ‘고르디우스의 매듭(Gordian knot)’처럼 남아있었다. 다만 이에 대해 남기택은 ‘식민지 근대와 전후 혼란 등 근대사의 특수성 속에서 삼척은 미적 근대의 실현이라는 ‘근대문학적 사건’이 발생할 만한 계기를 오래도록 맞지 못했다’*17⁾남기택 <삼척지역문학의 양상> 『강원영동지역문학의 정체와 전망』p235 고 지적했다. 이는 지역성을 전제, 해방 전후 보편적인 인식론에 근거했을 따름이라 여겨진다.
산과 강, 그리고 바다. 천혜의 수려한 자연환경과 역사적 문화유산 등 지정학적 조건으로 봐서 예향으로 발전할 여건은 충분했으나, 삼척은 지리적 환경과 사회적 변혁에 옭아 묶여 문향 및 예향으로 탈바꿈하지 못했다고 본다. 영동 산악 척박한 땅도 문제지만, 왜구침입이 잦은 지리적 군사요충지라 삼국시대부터 조선대까지 최전선 변경으로 지방관이 문관보다 무관을 우선 파견했을 만큼 무운으로 그늘진 곳이다. 행동거지가 불손한 군관민을 한재너미에서 잡아와 동두고개에서 목을 날리는 형장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논밭이 옥토여서 뜰에 정자를 지어놓고 농한기에 육자배기를 늘어지게 불러 젖히는 풍류가 질펀한 곡창지대가 아니라 바닷가에서 해초를 뜯고 깊은 산중에서 숯을 구우며 얼굴이 검은 탄으로 범벅된 생활, 즉 한 짬도 여유롭게 옆마저 살필 수 없는 팍팍한 삶에 무시로 왜구에게 목숨까지 잃는 고을이었다. 변경지대라 당연히 방위정책이 문화정책보다 앞설 수밖에 땅이기도 했다. 일찍 문향으로 이름을 얻은 인접 강릉보다 상대적으로 문학적 환경이 낙후될 수밖에 없었던 근원이 바로 지리적 환경 때문이라고 지적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지하자원 착취로 광공업이 성행하여 일부 농업과 어업에 종사자를 제외하고 바탕 삶을 광공업에 두었다. 그 광공업 인력수요를 충족하고자 1939년 인문계가 아닌 공업계 학교인 3년제 삼척공립직업학교가 사직리에 들어서고, 해방 직전인 1944년 토목과·광산과·기계과·건축과·전기과를 편제로 한 삼척공립공업학교로 개편하자, 이때부터 문과에 소질 있는 아이들은 학문 길을 찾아 강릉으로, 춘천으로, 또 서울로 떠나갔다. 그렇게 비운 자리에 강원도뿐 아니라 전국에서 취업하기 어려운 60년대를 살아가려고 이공계 젊은이들이 삼척에 유입했다. 마치 1830년대 시카고나 1970년대 마산처럼 삼척은 기능성 인력이 들어차고 인문학 예비인력이 일찍 외지로 빠져나가는 이른바 ‘문거공래文去工來현상’을 초래했다. 이런 인력자원 교체로 삼척은 탈공업화가 아니라 탈인문학 풍토로 급격히 굳어져 예비 문청마저 고갈하면서 광공업화로 도시특성이 공업기능 육성도시로 경직했다.
문과에 소질이 있는 인적자원이 빠져나간 광공업 도시 삼척 문학환경은 동양시멘트 분진과 화력발전소 탄가루로 땅껍질이 산성화하듯 문학 풍토도 불모지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탄광지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극단적인 예로 삼척에서 도서관이란 삼척여고에 달랑 하나였고 그도 재학생들에게만 기회를 준 문화의 사각지대여서 그 열악함은 물론 관리들이 삼척 문화환경 개선에 얼마나 태연 무심했던가를 짐작하게 했다. 그런 환경이었으니 아이들은 삼척에서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는 사람보다 도시락을 자전거 뒤에다 매달고 회사로 출근하는 사람을 보고 자라며 장래 희망직업도 그런 데에 두었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회사에 다니는 이야기와 25일 월급 다음날 특식을 사 와서 아버지 이야기를 입에 올리는 처지에서는 죽서루에 늘비하게 매달린 한시 간판이나 준경묘, 공양왕릉 등은 자연 한 모서리로만 인식하며 문화 소외 외풍 지역에서 자랐다. 이런 풍토를 바탕으로 해서 불모지문학회는 삼척사회를 향하여 문학회 이름으로 ‘불모지’*18⁾『불모지』 서문. 불모지문학회 刊 로 내세우는 가학적이고 무언의 저항적인 모서리를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6·25전쟁이 휩쓸어간 가난한 땅에 버려진 60년대 삼척 청년들. 일자리가 없어도 이 세대들은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홍수로 몽돌만 들어찬 사대광장 주변을 서성거렸다. 문학마저 그렇게 단절된 불모지 삼척 땅에도 긴 절망을 뚫고 먼 곳에서 날아든 씨앗처럼 문학이란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싹은 먼 앞선 세대나 선배들이 부려놓은 토양에서 아니라 전통이 없는 맨땅에서 자생으로 발아한 날것이었다. 1959년 9월에 삼척 최초 문학회인 동예문학회東藝文學會가 탄생했다. 창립회원인 정일남의 글을 읽어보면 이승휴 민족사관 요소와 별개인 나름 문학적 취향에 따른 ‘자연 발생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자기 작품을 남에게 보이고 남이 쓴 작품을 받아 읽어보는 과정에서 문학의 폭을 넓히고 역량을 높이는 데는 동인 활동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중략) 이런 절박한 필요에 따라 누가 처음에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는 모일 수 있었다. 1958년 가을 어느 날, 동해가 내다보이는 정라진 부둣가 ‘동궁’ 다방에 모인 사람들은 김영준, 박종철, 정일남, 이경국, 김은숙, 이영애 등이었다. (밑줄은 필자)
-정일남 <“동예” 동인시대의 회고> 실직문화 3집 p95 1992
1958년 무렵 삼척문화원에서 전후 빈민가족 아이들에게 야간 중등교육과정을 가르쳤다. 이 학교 교사들이 문학적 취향에 뜻이 맞아 뭔가 체계적인 만남을 가지고 토론하고자 모인 게 바로 동예문학회 골격이 되었다고 했다. 김영준, 김정남金正男, 정일남, 이경국李璟國· 박종철, 김은숙金恩淑이 참여하고, 대전에서 생활하는 이윤자李允子까지 작품을 보내와 일곱 명이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예문학회는 창립한 지 이태 뒤인 1961년 8월 30일에 『동예』 1집을 발간하고, 그해 12월 1일에 2집을 발간했다. 두 번 문집을 석 달 만에 연이어 발간한다는 의미는 그 문집에 실린 작품의 미적 우량평가를 떠나서 얼마나 문학에 목말라서 그렇게 단기에 작품을 열정적으로 분출해냈는지, 그 까닭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동예 문학인들은 1962년 5월 30일에 『동예』 3집을 발간하고 잠시 활동잠복기에 들어갔다. 김영준만 삼척에다 남겨두고 뿔뿔이 면겸免歉의 땅을 찾아*19⁾김영준 산문집 『빛나는 아침 땅에서』 p133 혜화당 刊 고향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둥우리에 알[문집] 세 개만 남기고 떠나 폐소廢巢가 된 걸까. 아니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문학도를 모이게 한 둥우리와 그곳에 담긴 세 알의 상징성은 삼척문학사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기념비적인 푯돌을 세우는 결과를 낳았다.
동예문학회 출현은 삼척문학사 서술에서 효시 앞자리에 매김을 한다는 데 모두 동의한다. 문학 불모지에서 흩어졌던 문학도를 하나로 묶어놓은 집단을 삼척에서 최초로 결성함으로써 후발 각 문학회 결성에 직간접적인 동기로 작동했기 때문이다. 다른 또 하나 삼척문학사에 분명하게 직시해 놓을 일은 그것이 비록 프린트 판으로 얄팍하고 빈약한 작품집일지라도 삼척에서 최초 문학지를 발간했다는 획기적인 상징성이다.
이것은 문학 활동의 순환고리에서 보면 문학 생산자가 문학 소비자를 위하여 문학 생산을 공식적으로 공표했다는 상징성을 갖는 행위로 정리할 수 있다. 동시에 이 행위는 곧 문학작품도 여느 생산품과 같이 구매자, 또는 소비자를 만족까지 시켜야 할 책무를 졌다는 의미로도 읽히어진다. 요컨대 소문난 맛집을 택시를 불러서라도 찾아드는 식객을 위하듯 질 좋은 작품을 영속적으로 생산해야 하는 부담도 안아야 하는 일이지만, 역설적으로 이제 내 작품을 읽을 사람이 생긴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도 있어 문학소비자를 비로소 의식하고 인식했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삼척문학사에서 기념비적 사건 이상으로 더 상징적으로 조명되어야 부분이다. 삼척에서 최초로 흩어진 문학도를 한 카테고리로 묶어 토론장을 만들고, 문청들의 습작품이지만 문학소비자를 위하여 발표장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문학사에 효시가 되었던 모든 창간물의 형색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1964년 12월 20일 동예문학회 뒤이어 결성된 불모지문학회不毛地文學會도 태동과정은 동예문학회 처지와 엇비슷했다. ‘또래 몇이 자주 모여 문학에 관한 열정을 나누다 보니 자연스럽게 되었다. (중략) 날짜와 장소도 일정치 않았다. 매일 만나는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 부르면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있었기에 굳이 절차와 형식에 따르지 않았다.’*20⁾정연휘 편저
『삼척문학통사』 p655 도서출판 해가 刊 아닌 게 아니라 삼척 땅을 스쳐 간 옛 문인이나 죽서루에 내걸린 과객 시인들의 한문 현판에는 관심도 없었다.
불모지문학회 초창기 회원은 김익하金益河·정연휘鄭然輝·최홍걸崔鴻杰·이종한李鍾漢으로 단출했지만, 20대 안팎의 한창 팔팔한 나이 때였다. 각 문학회 중간 나이 때라서 위아래 소통의 가교역할을 했기에 후일 삼척문학회 발기에 중추역할을 한다. 불모지문학회는 창립 한 해 뒤 『불모지』의 발간(‘95. 03. 21)을 끝으로 문집은 내지 않았다. 이 불모지문학회도 김익하의 군대 입대, 정연휘의 학업으로 상경, 최홍걸과 이종한의 직장 때문에 외지로 나가자, 모임 회기나 인원이 들쑥날쑥했다. 그러나 이종한을 제외한 3인은 둘씩 번갈아 삼척에 남아 끝까지 문학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 모임의 토론은 치열했다. ‘삼두마차 김익하, 최홍걸, 정연휘는 우정을 밑에 깔고 견제하고 때론 격려하며 열린 정신으로 빛깔이 다른 정서가 빛깔이 다른 정서를 보완 수용해 갔다.*21⁾정연휘 <나의 문학 세계> 삼척문학통사 p374 나이 한 살 차이지만, 문학을 말할 때 서로 격렬하게 부딪치며 성장했다고 회고했다.
정연휘가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귀향하자 삼척에 새로운 문학 흐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1966년 1월 10일, 한일예식장에서 삼척 최초로 ‘제1회 불모지문학회 밤’을 개최했다. 그리고 이어서 1968년 4월 21일에서 5월 7일까지 삼척과 북평 일원에서 ‘김익하·정연휘 2인 시화전’을 열고 북평여고에서 강연도 함으로써 문학 불모지 삼척에서 동예문학회의 업적과 또 다른 문학운동이 확산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정연휘에게서 대학컴퍼스의 문학행사 노하우가 그대로 이전된, 이 흐름은 삼척에서 낯선 흐름이었으나, 문청이건 관람객이건 신선한 감동을 넘어 가히 문화적 충격을 주기에 충분한 사건이기도 했다. 문청이 책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행위는 소극적인 표현방법이랄 수 있다. 그보다 적극적인 표현방법은 시화를 통하여 시각적 이미지를 공유하는 시화전이고, 아주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은 시 음률을 음향적 이미지로 담아 타자 감정에다 주입하려는 시낭송이다. 문학세력이 집중된 서울에서는 이런 유의 문학행사가 이미 연례행사처럼 벌어져 신성할 것도 없었으나, 삼척에서는 지금껏 문학 내적으로 그치던 문학 행위가 타자로 향해 적극적 표현행위를 장착하여 문학영역을 확장한 셈이다. 공공장소에 내걸린 시화와 무대 위에서 이루어진 시낭송은 문학 질과는 별개로 삼척문학사 진척에서는 진일보하여 또 다른 긍정적인 이정표를 세우지만, 지금 와서는 외곬 프레임에 묶이는 단초로 작동했다.
공동 문학 질은 균일하고 균질할 수 없어 오직 개개인 문학 능력을 재고하는 일이지만, 문학행사 파급효과는 그와 다른 지역사회에서 존재적 근원을 보장받는 일이다. 문학 행위 영속은 인정과 보장을 받아야 가능하기에 공동체로선 우선 가치를 지낼 수밖에 없다. 우선 문학이 문학회 밖으로 나와 대중과 소통되어 문학 존재를 알렸다는 것. 광공업으로 산업화한 도시에 정서적 울림을 주었다는 것. 자라나는 예비 문인에게 동기부여 기회를 주었다는 것. 공개된 장소에서 이루어진 문학행사 성공으로 지방 관청에서 지원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것. 그리고 지역에서 문학 활동의 필연적인 기제라는 것 등. 그러면서도 문학도 스스로 문학 공공성에 책무를 다하는 사명감도 가져야 한다는 것.-이런 측면에서 불모지문학회는 5년으로 단명했으나, 지역 사회에 문학을 인지시킨 계기와 성과 때문에 삼척문학사를 논할 때 더 깊이 궁구하여 재평가해야 할 부분이다.
3. 10년 층위별로 본 두타문학 약사
창립기創立期 [1969]
1968년 11월 4일 밤에 열린 ‘제2회 불모지문학회 밤’은 삼척문학회(두타문학회 전신) 결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행사 명칭과 달리 동예문학회·불모지문학회·영시문학회·죽서루아동문학회·노가리문학회와 삼척여고 문예반 학생까지-삼척 관내 문학단체와 문학에 재능있는 학생까지 합동으로 치러낸 범문학적 행사였던 탓이다. 결과론이지만, 삼척문학회의 태동을 위한 예행연습장으로 작동했다.
불모지문학회를 제외한 각 문학회에서는 몇몇이 모여앉아 작품을 읽고 서로 작품평했던 사랑방 토론식 문학 활동이 시화전과 시낭송회를 보면서 그 한계를 직감했다. 무엇보다 지방에다 문학을 토착화하자면 당장 시급한 것은 내부활동보다 외부 지향적인 문학 행위가 성장을 위한 자극에서나 회원의 확장에서나 파급효과가 크다는 것을 인지했다. 더구나 ‘제1회 불모지문학회 밤’에 참석하여 그 효과를 톡톡히 체험하고 실감했던 터다.
그런데 단독으로 행사를 기획 집행하자니 가용인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각 문학회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 살길을 찾아 회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긴 어느 문학회나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동예문학회에는 김영준·정일남·박종철, 불모지문학회는 김익하·정연휘·최홍걸, 영시문학회는 김형화, 그렇게 남았다. 그런 처지인데 불모지문학회가 일으킨 문학의 열기를 영속적으로 승계하자면 문학 활동에 동적인 에너지원이 필수적 기재였고, 그것을 해결하려면 수를 불리는 외연 확충작업이 무엇보다 더 우선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그런 문학 흐름의 요구가 삼척 문학도들 사이에서 ‘제2회 불모지문학회 밤’의 계기로 서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에 따른 결론은 문학 소비 소외지대나 다를 바 없는 삼척에서 난립하는 문학회를 통합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우연 일치일지는 몰라도 그런 흐름을 모두 부담 없이 공감하고 있었다. 사실 각 문학회 구성은 본질적인 문학을 지향하는 관점 편차가 아니었고, 또한 특정 지을 만한 문학 유파도 없이 소통이 쉬운 세대별로 어울렸고, 그리고 서로의 면면과 이미 작품세계를 소상히 알고 있어 화합 통합하는 데 걸림돌은 없었다. 당시 정연휘가 삼척문화원에 근무하여 그곳이 문청들의 아지트였는데, 김영준·박종철·김익하·최홍걸·김형화 등이 무시로 드나들며 이런저런 일로 자주 술자릴 같이하면서 토론하기 일쑤였다. 그런 기회로 문학회 통합이 자연스럽게 큰 흐름을 잡기 시작했다. 척박한 곳에서 서로 생존을 위한 피치 못할 통합으로 물길이 흘렀다.
삼척문학회로 통합하기에 앞서 1965년 김지도·조무근·조무남 외 14명의 초등학교 교사들로 구성한 죽서루아동문학회竹西樓兒童文學會. 김형화·박종화朴鍾和·김준영·함영범·이희돈·윤경희 등의 삼척대학생으로 1965년에 이루어진 영시문학회. 그 밖에 김영대金榮大·박종철(1967년 가담) 등의 동양시멘트회사 재직자들로 이루어진 수적문학회水滴文學會. 박용수 등의 불사조문학회不死鳥文學會, 심낙영沈洛英 등의 노가리문학회를 포함하여 삼척에는 일곱 개의 문학회가 있었다. 문학회의 숫자로만 보면, 인구 이십칠만 명*22⁾『삼척시지』분군 전 인구통계에 불과한 지방도시에 삼만팔천 명에 문학회가 하나의 꼴이니 과히 문학회 르네상스라는 말을 들을 만했다.
1969년 6월 24일. 지금은 철거해 없어진 옛 삼척공관 문화원*23⁾현재 삼진철물건재상사 옆 회의실에는 삼척 소재 문학회 소속 회원 열두 명이 모였다. 동예문학회의 김영준·정일남·박종철, 불모지문학회의 김익하·정연휘·최홍걸·박자운朴子雲, 영시문학회의 김형화·김준영金俊榮·함영범·이희돈·윤경희尹京姬였다. 개인 사정으로 창립 장소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김종욱金鍾昱(1932∼2000)·이종한·고성범 등이 합류한 15명으로 한 모임이다. 모임 이름을 ‘삼척문학회’로 제정한 다음, 삼척 소재 문학회의 활동이 전무한 김종욱이 연장자격으로 초대 회장을 맡았다. 삼척문학회는 출발한 첫해 뚜렷한 자취를 남기지 않은 채 통합문학회로 출범한 지 여섯 달 만에 1960년대를 마감하고 1970년대 맞는다. 창립 그대로 두타문학 기원 뜻만 새긴 해였다.
정립기鼎立期 [1970∼1979]
1970년 벽두 김영준이 두타문학회의 제2대 회장을 맡았다. 비로소 조직의 활성이 본격화했다. 그해 4월 26일부터 30일까지 닷새 동안 제2회 동인시화전을 태백다방에서 열었는데, 이때 소책자로 발간된 『삼척시단』이 『삼척문학』(『두타문학』의 전신) 제1집인 창간호로 이름을 새겼다. 회원 15명 가운데 12명의 작품을 게재한 32쪽 얄따란 문집이다.
이어서 10월 23일 『삼척시단』을 『삼척문단』으로 개명한 제2집이 나왔고, 그다음 해인 1971년 2월 14일에 제3집 『삼척문학』을 내놨다. 문집행태를 보면 창간호가 타자로 식자한 프린트판인 반면, 제2・3집은 필경한 프린트 판, 표지 제자는 정연휘가 썼고 김영준이 표지화를 그렸다. 변화로는 필진이 확대되어 제2집(65쪽)에 17명, 제3집(89쪽)에 11명으로 각 장르 작품이 고루 실려 비로소 문학종합지 포맷으로 탈바꿈했다. 문학사에 기록해 두어야 할 일은 제3집에 정일남이 권두언으로 쓴 <동인서약서>와 김영기가 특별기고 형식으로 투고한 제1.2집 게재 작품에 대한 총괄 평評 <두타산의 인상>이라는 글이다.
우리의 출발은 그 자체가 몸부림이다.
그것은 피동의 몸부림이 아니라 능동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작업장에서 열심히 작업한다. 문학을 위한 작업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캐기 위한 작업이며, 괴로움이다. 육체와 정신을 반반이 갈라서 시험해 보는 작업이다. 우리는 동인지의 이념이나 ‘에골’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동인지를 발간하는 의도가 예술의 유행성이나 졸렬한 작당적 행위로 보지 않기 때문에 시대성과 조류에 편승하지 않는다.
습작과정이란 대명사를 시인하면서 각자가 입을 다물고 열심히 작업능률을 향상하고 있다. 동인의 다양한 생활세계가 제 나름대로 문학세계를 확장해 나가고 있는데, 우리는 하등의 제약이나 압력을 가하지 않는다. 우리는 순수나 참여의 문학사적 이론에 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념을 앞세우지 않기 때문이다. 저마다 당하고 있는 생활의 밑바닥에서 개성과 독자성을 최대한으로 추구한다.
동인 각자가 조금씩 거리를 두고 서로 견제하면서 빛같이 다른 정서의 세계로 구축하는 것을 생명으로 여길 따름이다. 당분간 우리의 이 작업을 반발 없이 꾸준히 작업에만 열중할 것이다. 주위의 눈부신 배경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도 없이 당면한 저마다의 숨 가뿐 작업이 언젠가는 의미를 부여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문단의 영지에 돌을 던지게 될 것이다. (*편의상 문단을 조정했고, 밑줄은 필자)
-정일남 <동인 서약서> 전문 『삼착문학』제3집 p4・1971년 刊
이미 1970년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시 『제재소 근처」로 강원문단에 등단한 정일남은 두타문학 선도자답게 결연한 문장으로 능동적인 습작과정을 치열하게 하되 60년대 문학 평단의 쟁점이었던 순수나 참여의 논쟁이나 노동문학, 또는 민중문학 태동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시대성과 시류에 편승 없이 개성과 독자성을 최대한 추구하자고 공동선언한 셈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동인지 이념이나, ‘에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분명히 천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 정리해두어야 용어가 있다. 바로 동인同人이란 단어다. 두타문학사를 말하는 사이에 회원이란 용어 대신 ‘동예동인’이니 ‘불모지동인’이니 하는 지칭을 일부 회원들에게서 가끔 듣는다. 적확한 표현이 아니기에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일로 본다. 동인이란 일반적 광의는 문학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지만, 문학사 맥락으로 본 협의는 ‘한 유파[에콜(êcole)]를 지향하는 문학도의 모임’이라는 정의가 문학인 용어로 적절하단 판단이다. 그러나 <동인 서약서> 내용에서 밝혔듯이 삼척에서 자연적으로 태생한 문학 모임은 지향의 다면성과 문학동호인격 성분 때문에 ‘동인회’가 아니라 ‘문학회’란 호칭이 적확하듯 앞으로 서술하매 있어 ‘동인회’ 또는 ‘동인’을 ‘문학회’ 또는 ‘회원’으로 통일하여 서술하고자 한다.
한편 두타문학의 원격 응원자인 김영기는 <두타산의 인상>에서 제1・2집에 실린 회원들 시작품을 총평하면서 서정으로 출발하는 토속성은 살만한데, 지나친 감상성, 비유의 디테일과 상징성, 연륜과 의욕의 대립, 관념과 추상 용어와 리얼리티, 격정적인 제스처는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 다음 <두타산 인상>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두타산은 멀리 보일 때도 있고 가깝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 산 자체는 그대로입니다. 우리의 인식의 관계일 뿐입니다. 시 자체는 변함이 없는데 그 시가 내포하는 의미는 언제나 변하고 있는-본원적으로는 우주에 통하고 현실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그런 표현을 찾아내라고 하고 싶습니다. 두타산은 인식의 차원을 말해줍니다. 어떻게 그것이 멀고 가까운가? 이러한 질문방식은 시의 형식을 체득하고, 시의 의미를 다양한 통일성을 요청하는 질문방식입니다. 두타산의 인상. 얼마나 믿음직한 자세입니까? 나는 그런 것들을 삼척문학 동인들의 세계에서 보고 싶습니다. (밑줄은 필자)
-김영기 <두타산의 인상>『삼척문학』제3집 p6
이 문장이 내포한 두타산 상징적인 표징은 뒤에 삼척문학회를 ‘두타문학회’로 개칭하는 하나의 근간을 제공했다. 1978년 12월 20일 월례회에서 삼척문학회 명칭을 두타문학회頭陀文學會로 변경했다. 일찍부터 문학회 명칭에 의견이 분분했다. 강원도 내 십여 개 문학단체가 존속하나, 소재지 명칭을 사용하는 데는 삼척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문학회 명칭에서도 소재지 명칭을 차용한 경우가 드물었다. 소재지 명칭을 사용할 경우 한국문인협회 지부 연간지로 혼돈하거나, 소재지 문화원 기관지(소재지 홍보용의 간행물을 담당했다.)로 오인할 수도 있다는 요지다. 또한, 가뜩이나 정서적으로 광공업 도시 이미지가 두드러진 곳인데 ‘고상하게 멋진 구석도 없을뿐더러’ 관제 냄새까지 난다고 개명의 정당성에 부연했다.
여러 명칭을 두고 설왕설래하다 결국, 두타문학회로 결정했다. 이미 『삼척문학』 제3집에서 김영기가 <두타산의 인상>이란 칼럼에서 두타산의 정기를 본받으라고 언급한 바도 있거니와 또한, 삼척에서 두타산頭陀山. 1357m이 제일 높은 명산인 데다, 동안거사 휴휴休休 이승휴 선생이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집필한 연고지라, 그 상징성도 참작되었다. 그리고 두타頭陀라는 어휘가 제거와 세척 의미로, 의식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심신을 단련한다는 불교적 뜻도 내포해서 이름으로 정하는데 한몫했다.
그렇게 개명한 『두타문학』 제6집이 한해를 거른 1979년 5월 1일, 저물어 가는 1970년대 끝을 장식하게 되었다. 문학회 명칭변경은 『삼척시단』이 태어난 지 9년 만이다. 제자도 예서체『頭陀文學』으로 바뀌었다. 책 부피에 따라 한차례 획이 다소 굵어졌으나 지금까지 두타문학 제자로 사용하는 예서체 『頭陀文學』은, 조선조 5현 가운데 한 사람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 후손으로 알려진 서예가 일도一道 김태수金兌洙 선생 필체다. 김익하와 쌍용양회공업주식회사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연고로 필체를 표제로 얻게 되었다.
창립한 1969년부터 1970대까지 두타문학사를 평가하면 외형적으로는 여러 개로 난립하던 문학회를 두타문학회 하나로 통합시대를 열었고, 문집 발간, 시화전, 시낭송회, 문학의 밤 등 외부적인 문학 활동을 광공제 같은 지역행사로 통해 전개하여 삼척 사회에 문학을 널리 알린 정립기鼎立期였다고 지정할 수 있겠다.
이 기간에 발간한 여섯 권의 문집에는 총 166편 작품이 실렸다. 시 144편, 수필 10편, 콩트 2편, 단편 6편, 중편 1편, 평론 2편, 대담 1편이다. 문학 품질 계량 측면에서 살펴보면 『삼척문학』 제5집을 발간한 1977년 전후 기점으로 뚜렷한 변화를 보이긴 했다. 그러나 ‘작품 역시 아마추어리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사실인바 이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문학적 성숙이 필요한 시기’*24⁾남기택 『강원영동지역문학의 정체와 전망』p237 청운 刊 였고, ‘예비 문인들의 습작문단’ *25)정연휘 「삼척문학 원류와 두타문학」『두타문학』제32집 p84 수준이라서 미적 성숙성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회원들의 들고남이 빈번하여 문학회는 창립 이후 가장 부침이 심했던 시기로 기록했다. 이 기간에 23명 회원이 입회하고 22명이 탈퇴했다. 회원들이 크게 들고남으로써 문학회로선 부침 늪에 빠지는 홍역을 치렀던 반면, 활발한 교체 과정에서 스크린 효과로 일회성 인원은 퇴출하고 능력을 잠재한 새로운 회원이 들어오는 긍정적인 측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등단기登壇期 [1980∼1989]
문학회 가장 침체기였던 1983년, 정연휘와 김익하가 구상한 백일장이 이듬해인 1984년 10월 20일 일요일. 죽서루 경내에서 제1회 <영동지구 주부・학생백일장>이란 행사명으로 열렸다. 이날 백일장 행사에는 350명*26⁾『두타문학』제12집 p248이 참가하여 삼척에서 최초로 열린 한글백일장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로 동행한 학부모들과 더불어 죽서루 경내가 참가자로 북적였다. 상주인구가 많은 도시의 백일장에서도 보기 드문 열기였다.
*영동지구한글백일장 참가 인원수(1회∼5회)
분 류 | 1회 | 2회 | 3회 | 4회 | 5회 | 계 |
시행 연도 | 1984년 | 1985년 | 1986년 | 1987년 | 1988년 |
|
참가 인원 | 350명 | 345명 | 357명 | 275명 | 251명 | 1,578명 |
*『두타문학』 제12집 자료집 p248 참조
1986년 10월 3일. 제3회부터 <영동지구한글백일장>으로 이름이 바뀐, 이 백일장은 제11회인 1994년 10월 9일에는 제11회 <동안이승휴백일장>으로 또 한 번 명칭마저 바뀌었다. 그러다 2002년에는 매년 3・4백 명이나 참가하는 인원을 수용할 예산 부담 때문에 한국문인협회 삼척지부로 이관했다. 지금은 사단법인 동안이승휴사상선양회에서 <이승휴・제왕운기 문화제> 에 포함하여 10월에 매년 열린다. 행사를 처음 기획했던 의도대로 문학 인구의 저변확대와 광공업 도시인 삼척 탈공업화에 일조한 셈이다.
1985년, 가장 큰 변화는 외연 확장 일환에 따른 명예회원들 영입이다. 이른바 ‘출가외인’, 탈향 문인들이 ‘명예 회원’으로 고향 문학회에 입회했다. 이성교·김영기·김정남·김원대·김원우 등이다. 이로써 세력 확장과 중앙문단과의 소통 통로 역할이 비로소 마련된 셈이다. 아울러 1세대 문학인의 작품을 발굴, 평가작업 기점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영동문학권인 두타문학희 ‘외화내빈·외만내공外滿內空·상대하소上大下小’란 평가를 받을 만큼 구조적 취약성과 성장동력 획득이 불가한, 전체 평균 연령 고령화라는 딜레마를 초래했다. 단적으로 비유하여 주소록*27⁾2018년에는 53명 『두타문학』제41집 주소록 참조 에는 사람이 그득한 데, 조각공원에서 바다 시 낭송회를 하자면 회장이 직접 나서 앰프를 설치일까지 도와야 할 만큼 가용동력을 상실했다. 즉 외연의 확장으로 연간지의 발간에 고급 집필진은 확보되었으나, 역설적으로 조직 성장 진취성과 탄력성은 백화현상을 초래했다. 이런 상황은 현재도 진행형이라 외장 허세를 경계해야 할 지경까지 이뤘다.
1980년대의 두타문학사를 총괄하면 우선 회원들이 중앙 무대로 등단을 연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정일남을 필두로 등단한 회원 수는 시 7명, 소설 3명이다. 이는 예전에 이미 등단한 회원 수 5명을 포함하면(1989년 12월 기준) 총 29명 가운데 15명으로 51%를 점유하여 불모지가 밀림지대로 개량될 만큼 수적으로 성과를 거둔 시기이다. 10년 동안 11회 시낭송, 3회 문학 강연회, 6회 백일장를 개최했다. 6명의 회장이 역임했고, 총 10권의 연간지를 펴냈다. 총 518편으로 시 427편, 동시 5편, 수필 34편, 콩트 7편, 단편 23편, 중편 4편, 평론 7편, 대담 2편, 자료 9편으로 전기 대비 작품 발표량이 무려 212%나 폭증하는 현상을 나타냈다.
이 기간 들어온 회원은 33명이고 나간 회원이 18명으로 50년사에서 들고남이 가장 빈번했다. 『두타문학』 제5집 기점으로 문학을 취미로 하던 회원들이 나가면서 아마추어 습작 문단의 티를 벗고 창작 문단으로 출발하여 제8집부터는 기성 필진 유입으로 지방문학지로는 어느 정도 질량 궤도에 올랐다. 문학 성향은 시 경우, 에콜에서 일탈하여 개성 있는 목소리로 다양하게 나름의 세계로 모색하는 모양새를 띠었고, 산문은 잡문 형식의 영역은 확대되었으나 소설문학은 들고남으로 인원이 확충되지 않아 몇몇 사람이 죽자사자 써내야 문집의 부피를 살릴 수 있었다. 한편 문학회 위상이 점차 높아짐에 따라 원거리로 생활근거지를 옮기더라도 두타문학회에 적籍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변 환경은 산업화 급물살로 급변했다. 이는 주변 환경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문학인의 대사회성 대응반응을 살펴보는 척도가 된다. 1980년 4월 21일, 인접 탄광 도시 사북읍에서 광부 삼천오백여 명이 어용노조와 임금 소폭인상에 항의, 폭동을 일으켜, 인구 삼만 사북읍을 나흘 동안 치안 공백 상태로 만들었다. 이때 한 명이 숨지고 백육십 명이 부상했다. 탄광이 많은 삼척 탄광지대까지 영향이 미쳤고,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노사문제가 현안으로 급부상했다. 삼척은 대체로 생활방식이 지역별로 세 갈래로 나눠 있다. 탄전지대, 화전 및 농촌지대 그리고 해안지대다. 탄전지대이기도 한 삼척은 사북사태가 남 일 같지 않은 코앞에 닥친 일이었다.
두타문인 가운데서도 일찍 탄광 현실에 관심을 가진 회원이 있었다. 광부생활을 체험한 정일남과 최승익崔勝益, 탄광 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낸 김태수와 탄광촌에서 교직 생활한 김진광이다. 『두타문학』 제12호까지 발표된 시들 가운데 탄광을 대상으로 한 작품은 제12호 최승익의 11편이 유일하고, 소설에는 제9·10집에 작품을 발표한 김태수의 「공차」와 「해부도」가 유일하다. 특히 최승익 시 11편 가운데 「매몰, 그리고 생환까지」가 비록 시어화詩語化 이전의 ‘날것’으로 분출되었지만, 사북사태 근간에 닿았다는 평가다. 김태수의 막장에서 매몰된 자 이야기인 「해부도」보다 「광차」는 리얼리티를 돋보이게 하는 지도나 공고문을 그대로 삽입하는 현장 르포 방식 소설 쓰기가 이채로워 기대를 높였으나, 소설 쓰기에서 시 작업으로 돌아선 일이 소설을 쓰는 필자 처지에서 보면 아쉬움의 끝은 크다.
또 80년대 하나의 일. 1983년 6월 30일 밤 10시 15분, kbs TV가 기획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가 생방송이 전파를 타자마자 전국을 오열 바다로 몰아넣었다. 가족을 찾으려는 벽보와 ‘만남의 광장’으로 몰려드는 인파로 여의도광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신청 10만952건 가운데 5만3천536건이 방송되어 1만1천189가족이 상봉했다. 또한, 단일 주제 생방송 4백53시간45분이라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두타문학』에는 그것을 소재로 한 작품은 단 한 편도 없었다. 다만 한 해 앞서 김익하가 1982년 『현대문학』 10월호 <신예작가 9인 단편소설특집>에서 단편소설 「고목에서 땅으로」가 이산 아픔을 다루었을 뿐이다. 지역문학이라 해서 시선마저 지역에 한정시키면 중앙문단 틀로 진입하지 못하고 영원히 ‘변방문학’ 원주민으로 고착될 것이 자명하므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활성기活性期 [1990∼1999]
이 기간은 두타문학회 활성기活性期로 정리할 수 있겠다.
90년대 여러 곡절을 겪긴 했으나 지속적인 문예 진흥기금 지원으로 연간지 발간이 안정권이 들었고, 동기간 문단 등단자는 20명으로 시 13명, 수필 5명, 시조 1명, 소설 1명이며, 이 기간에 연간지 10권이 발간되었다. 총 1,016편으로 시 886편, 동시 18편, 수필 58편, 콩트 3편, 단편 12편, 중편 2편, 평론 10편, 시조 21편, 자료 10편으로 전기 대비 96.5% 증가율을 보였다. 그리고 저작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28권 시집 및 작품집을 발간했다. 활발한 등단으로 필진이 두꺼워져 꺼진 동력을 찾았으면 차세대가 부쩍 성숙했다는 것. 특히 이 기간에 박종화의 문하생들이 등단함으로써 토착 문학의 풍토 근간을 마련했고, 김일두金一斗는 공무원 사회의 잠재적 문학 동력을 흡수하는 데 힘을 보탰다. 월간 『두타문학』이 창작의욕을 부추기는 한편 종합 장르 수용 가능성을 보였다는 것. 강원도 시인뿐 아니라 연변 문학인에게 지면을 열어 탈년간지 가능성을 점검했다는 것. 이를 두고 이성교는 ‘지역성을 탈피하기 위한 새로운 시도이며’ ‘이렇게 되면 삼척『두타문학』은 우리 문단(강원문단)의 창구 같은 역할을 하는 셈’*28⁾『두타문학』제18집 p25 1995년 刊 이라며 두타문학 확장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등한시하던 삼척 문화유산에 대해 처음으로 공동 테마로 수용하여 문학성을 확장 추구함으로써 앞으로 다듬어 갈 지역 문학의 한 패턴으로 제시했다는 게 수확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두타문학에선 작품집 발간은 매월 진행되는 월간 두타시낭송회와 연간 『두타문학』이 밭이 되어 얻어 들인 수확이지만, 그것이 정례화되어 매너리즘에 빠지는 경향으로 흐른 바도 있어 다수 작품집이, 그 작품성은 그 수를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으로 나타났다는 게 중평이다. 이 기간 21명 회원이 들어오고 9명이 탈퇴했다. 다만 애석한 일은 두타문학회의 기둥인 김영준과 원로 박재문을 잃음이다.
이양기移讓期 [2000∼2009]
2000년대는 두타문학회 1세대에서 차세대 이양기移讓期로 볼 수 있다. 총괄하면 외형상으로는 두타문학 발전은 긍정적인 싸이클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앞선 세대가 열심히 써 등단하고 그 탄력으로 다음 세대가 부지런히 써 등단한 뒤 저서 활동까지 활발했으니 지방 문단 처지에서는 나무랄 수 없는 발전이었다. 이 기간 발간된 연간지에 10권에 총1,170편의 작품이 발표되었다. 전기 대비 14.9%, 소폭 증가에 그쳤다. 시 1.026편, 동시 43편, 동화 1편, 수필 65편, 단편 14편, 희곡 1편, 평론 17편, 자료 3편이다. 한편 들고남이 진정되었고 필진이 안정화되었다고 분석했다.
동기간 문단 등단자는 총 17명으로 시 15명, 수필 1명, 동화 1명, 시 등단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저작활동도 활발하여 21권 저작물이 발간되었다. 이 기간에 30명이 들어왔고 15명이 탈퇴했다. 들고남이 잦은 ‘나그네문인’ 조기 이탈로 차세대층 형성이 90년대에 비하여 크게 차별화되지 않았다. 그리고 문학행사 영역 확대 및 가중시화 하는 현상으로 문학이 행사를 위한 도구화 경향으로 흘러 외형성장만 앞섰다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또한, 시인에 대한 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나, 두타문인이 아니라 작고 문인, 그도 동일 인물에 편중화되었다는 문제점을 노정했고, 늦게나마 지역환경과 지역역사에 대해 문학이 피상적이긴 하나 접근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 그리고 여성 회장 출현과 능력제가 아니라 내부 정서상 연공순위로 세습된다는 것을 2000년대 두타문학회 발걸음으로 꼽을 수 있겠다. 안타까운 일은 장영철(60세), 이출남(51세)이 일찍 일생을 마감한 일이다. 이출남의 경우, 그 간접원인이 두타문학회 40주년 기념행사 준비 때문이라서 애석함을 더했다.
모색기摸索期 [2010∼2019]
이 기간에 발간된 10권 연간지에 발표된 작품은 총 1.137편으로 전기 대비 0.2%로 줄었는데 시 발표량이 0.6% 감소에 따른 결과다. 그러나 두타문학회는 안정세를 취했다. 시 968편, 동시 52편, 시조 37편, 수필 53편, 단편 15편, 중편 1편, 평론 5편, 자료 6편이다.
23명이 들어왔고 12명이 나갔다. 들고남이 진정되었고 필진이 안정화되었다고 분석했다. 이 기간 문단 등단자는 총 17명으로 시 15명, 수필 1명, 동화 1명, 시의 등단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저작도 활발하여 42권 시집 및 작품집이 발간되어 시집 발간이 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이제 두타문학의 50주년을 맞아 또 다른 진전된 모습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아야 할 모색기에 접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두타문학 총괄정리 및 분석
1969년에 출범하여 2018년까지 49년간 두타문학회에 남았거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난 인원은 모두 141명이다. 현재원(제41집 회원명부 기준)이 53명이니 나머지 88명은 타계했거나, 두타문학회에서 이탈한 사람들이다. 또 등단한 사람은 총 72명인데 현재 53명 가운데 49명이 등단하여 92.4%를 차지했다. 다른 지역 문학단체에 대비해서도 그리 낮은 등단 수치는 아니다. 그러나 53명 가운데 23명인 36.5%가 삼척 인근이 아닌 다른 지역에 거주하여 지역 활동에 외화내빈 현상의 주원인이 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두타문학회 역사가 쌓이고 위상이 높아질수록 삼척에서 떠났어도 회원자격을 유지하려는 데서 비롯되기도 했다. 회원 증감 추이를 보면 ‘나그네 문인’ 들고남의 빈도가 감소한 대신 이른바 문학 취향의 ‘퇴직회원’ 인입 증가로 평균 연령대가 높아지면서 반동적으로 성장동력 둔화현상을 초래하기도 했다.
*두타문학회원의 등단 현황(2018년 말 기준)
장르별 | 시 | 시조 | 동시 | 수필 | 소설 | 평론 | 총원 |
총등단 인원 | 51명 | 2명 | 4명 | 9명 | 5명 | 1명 | 72명 |
현등단 인원 | 35명 | 1명 | 3명 | 6명 | 3명 | 1명 | 49명 |
*등단 매체별 현황
매체별 | 신춘 | 월간 | 격월간 | 계간 | 반년간 | 연간 | 뮤크지 | 기타 | 계 |
총원 | 6명 | 37명 | 7명 | 17명 | 0명 | 0명 | 0명 | 5명 | 72명 |
현재원 | 3명 | 25명 | 5명 | 13명 | 0명 | 0명 | 0명 | 3명 | 49명 |
등단 매체를 분석해보면 신춘문예 6명, 월간지 37명, 격월간 7명, 계간지 17명, 기타 5명이다. 한국 문단 현실에서는 신춘문예와 극히 몇몇 전문 문학지를 제외한 출판사는 원고료 지급 대신 등단조건으로 책을 암묵적으로 강매하는 생존 상술로 신인등단 과정을 왜곡시켜 문학의 질적 하향 평준화 근원이 되었다는 문단 지적이 있은 지 오래다. 아주 맹랑한 일은 1인 출판사를 차려 자천 등단하는 몰염치한 사례까지 있었다. 돈만 있으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세태에 문학도 비껴가지 못했다는 뜻이다. 이러한 왜곡현상으로 문학 독자의 탈문학 현상을 낳기도 했으며, 시의 경우 시를 읽는 사람보다 시를 쓰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개탄하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나오는가 하면, 수필집이란 명명 대신 ‘산문집’이라 붙이는 소이도 그런 글의 질적 하향에 따른 차별심리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두타문학회를 구성하고 있는 인적사항을 여러모로 분석해 보았다. 50년 두타문학회 성쇠에 가장 민감하게 작용한 요소는 회원들의 입회와 탈퇴의 들고남으로 조직과 필진의 무너짐이다. 연차별로 축출하면 다음과 같은 변화를 보였다.
*회원 들고남의 현황
연차별 | 40년 이상 | 30년 이상 | 20년 이상 | 10년 이상 | 5년 이상 | 2년 이상 | 1년 미만 | 계 |
입회 인원 | 6명 | 10명 | 11명 | 22명 | 25명 | 34명 | 33명 | 141명 |
잔류 인원 | 6명 | 8명 | 7명 | 15명 | 9명 | 5명 | 4명 | 54명 |
탈퇴 인원 | 0명 | 2명 | 4명 | 7명 | 16명 | 29명 | 29명 | 87명 |
탈퇴율 | 0% | 20% | 36.3% | 31.8% | 64% | 85.2% | 87.8% | 61.7% |
49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141명의 회원이 228회 들고났다. 탈퇴율을 살펴보면 5년 미만 탈퇴율이 평균 86.5%로 가장 높다. 심지어 입회하여 1년 남짓 보내고 나간 회원이 17명이고, 작품 단 한 편도 발표하지 않은 사람도 13명이나 되었다. 그렇게 들고남이 잦음은 가입과정에서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방증인데, 결론적으로 말해 ‘길손문학인’, ‘나그네문인’ 숙박소가 되었던 셈이다. 이는 회원 확보가 어려웠던 창립 초기 무검증에 따른 결과가 큰 영향을 미쳤지만, 이젠 회원층이 두꺼워진 만큼 새로이 가입하려는 회원에게는 문학 능력뿐만 아니라 인적면도 철저한 검증과정을 거쳐야 이런 문제점이 개선될 것을 시사하고 있다.
*회원의 들고남의 분석표
위 꺾은선 그래프는 회원의 들고남을 찍은 것인데, 초창기는 들고남의 확률이 100% 선에 근접한 불안정 추세를 보이다가 『두타문학』 제23집이 나온 무렵인 2000년대부터 거의 2·30%로 안정상태로 들어섰음을 보여주고 있다.
*회원의 활동 기간 통계표
활동 기간 | 40년 이상 | 30년 이상 | 20년 이상 | 10년 이상 | 5년 이상 | 2년 이상 | 1년 이하 | 계 |
해당 인원 | 6명 | 8명 | 7명 | 15명 | 9명 | 5명 | 4명 | 54명 |
비율 | 11% | 14.8% | 12.9% | *27.7% | *16.6% | 9.2% | 7.4% |
|
별표(*) 표시한 부분, 즉 5년에서 20년 미만 활동한 회원이 44.3%를 차지하여 가장 두꺼운 층위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대체로 꺾은선 그래프에서 안정세를 보이는 기간에 입회한 소위 두타문학회의 2세대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삼척에 생활근거지로 삼기에 탈향하지 않은 부류다. 이 두 데이터 분석에서 얻은 결과물은 두타문학회 잠재동력이 이 층위에 있고, 이 층위의 문학에 대한 분출 강도 강약에 따라 두타문학회 미래 성쇠가 가름 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환언하면 이젠 기층층위 세대 틀을 벗어나 새로운 에너지, 참신한 프레임으로 두타문학 전통성을 구체적으로 인식해서 확립 계승해 나갈 짐을 질 세대란 뜻이다. 다만 핸디캡은 이들도 이미 육십 줄에 들어선, 문학에 대한 열정 쇠퇴기에 접어들어 초입에 다다랐다는 점이다. 반면 30년 이상 활동한 25.8% 그룹은 대부분 외지에 있고, 노령화로 순발력과 참신함이 미치지 못하매 이제 상징적인 역할만 가능할 뿐이어서 이들 2세대는 두타문학 운명을 회피할 자유마저 없는 처지의 층위기도 하다.
이제 두타문학사 50년 동안 『두타문학』 41권을 통하여 발표된 작품현황을 살펴보자.
*두타문학』에 게재한 작품수(제1집∼제41집)
장르 | 시 | 시조 | 동시 | 동화 | 수필 | 콩트 | 단편 | 중편 | 평론 | 희곡 | 자료 | 계 |
편수 | 3,451 | 58 | 118 | 1 | 218 | 12 | 70 | 8 | 41 | 1 | 31 | 4.009 |
에콜 형태가 아닌 다양한 문학 성향, 이를테면 향토성 짙은 삼척 풍습과 경물에 대한 역사성, 탄광과 바다를 소재로 한 지역 특수성, 이상과 현실 괴리 문제, 사회와 개인 양립과 속성 문제, 괴리된 사랑에 대한 다양한 갈등 등을 보인 이런 작품들을 책으로 묶어내면 시집 50권, 동시집 1권, 수필집 6권, 소설집 9권, 평론 4권 분량이다. 이들 가운데는 꽃눈형성(Flower Pud Formation)의 시기 것이 있는가 하면 만화滿花에 이뤄 농밀하게 달콤한 열매도 있을 것이다. 그러함에도 이것이 문학 불모지인 삼척에다 50년 동안 문학의 풍토를 조성하면서 우공이산처럼 쌓아온 두타문학 생생한 문학적 숨결이고 그리고 족적으로 유산 자격을 함유한다.
*시부문 작품을 게재한 상위 10명 회원
회원명 | 박종화 | 정연휘 | 김진광 | 이창식 | 최홍걸 | 김소정 | 이성교 | 정순란 | 서순우 | 김영준 |
작품수 | 187 | 182 | 148 | 134 | 132 | 115 | 98 | 84 | 83 | 82 |
*시부문 외 부문별 상위 작품 게재한 회원
장르 | 아동문학부문 | 수필부문 | 소설부문 | 평론부문 | ||||||
회원명 | 장영철 | 김영채 | 박종철 | 서상순 | 김원우 | 김익하 | 조관선 | 김영기 | 정일남 | 김진광 |
작품수 | 80 | 51 | 37 | 31 | 19 | 31 | 13 | 8 | 7 | 6 |
문필가가 발표하는 작품 양이 문학의 성과와 별개이지만, 활동이 부지런하다는 것만 틀림없다. 대체로 입회가 이른 회원의 게재 작품 양이 많을 거란 예측이 맞는 듯하지만, 통계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음을 알 수 있다. 상위 그룹에 든 몇몇 회원은 입회가 늦었음에도 부지런함을 보였다. 삼다三多 가운데 다작은 시인, 작가를 성숙시키는 매질이기에 게으름을 금할 일이다. 하지만 자기 작품의 성찰을 위해 ‘득구불토得句不吐’를 말한 추사 언질 의미는 자기 문학수학과정에서 되새겨 볼 일이다.
개인 저작물은 비록 그 작품이 『두타문학』으로 통하여 발표한 작품으로 묶었다 하더라도 개인 문학 성과일 뿐 두타문학회 문학 성과라 볼 수 없어 통계 분석 대상에서 논외로 했다. 앞으로의 작업은 앞서 언급한 4.009편 작품에 대하여 각각 주제별로 분류하고 분석하여 두타문학 본질과 특성의 흐름을 갈래별로 정리해두는 일이다.
*두타문학회 역대 회장 재임 사항
회차 | 성 명 | 재임 기간 | 회차 | 성 명 | 재임 기간 |
초 대 | 김종옥 | ‘69. 06. 24∼‘69. 12. 31 | 제12대 | 박문구 | ‘98. 01. 01∼‘02. 12. 31 |
제2대 | 김영준 | ‘70. 01. 01∼‘79. 06. 19 | 제13대 | 김소정 | ‘03. 01. 01∼‘03. 12. 31 |
제3대 | 김형화 | ‘79. 06. 20∼‘80. 01. 31 | 제14대 | 박종화 | ‘04. 01. 01∼‘04. 12. 31 |
제4대 | 김영준 | ‘81. 02. 01∼‘81. 11. 28 | 제15대 | 박대용 | ‘05. 01. 01∼‘07. 09. 07 |
제5대 | 정연휘 | ‘81. 12. 01∼‘87. 12. 31 | 제16대 | 이출남 | ‘07. 09. 08∼‘09. 07. 09 |
제6대 | 최홍걸 | ‘88. 01. 01∼‘89. 12. 31 | 제17대 | 김일두 | ‘10. 04. 01∼‘12. 01. 27 |
제7대 | 박종화 | ‘90. 01. 01∼‘91. 12. 31 | 제18대 | 서순우 | ‘12. 01. 28∼‘13. 12. 27 |
제8대 | 김태수 | ‘92. 01. 01∼‘92. 04. 16 | 제19대 | 강동수 | ‘13. 12. 29∼‘15. 12. 22 |
제9대 | 박종화 | ‘92. 04. 17∼‘92. 12. 31 | 제20대 | 정순란 | ‘15. 12. 23∼‘18. 01. 25 |
제10대 | 정연휘 | ‘93. 01. 01∼‘96. 12. 31 | 제21대 | 서성옥 | ‘18. 01. 26∼ |
제11대 | 김진광 | ‘97. 01. 01∼‘97. 12. 31 | 재2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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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문학회 50년 동안 제21대에 이르기까지 17명이 회장으로서 살림을 맡아 갖은 고생을 감내해왔다. 길게는 김영준의 경우 2대에 거쳐 11년 6개월, 짧게는 제8대 김태수로 3개월 보름 남짓했고, 재임한 사람은 3명으로 제2·3대 김영준, 제5·10대 정연휘이고, 박종화는 제7·9·14대 세 번 회장을 맡았다.
60년대 문학단체장은 상징적 성격이 강해 문학 성과에 따른 경륜으로 가름했지만, 테카르트마케팅(techart marketing) 시대는 조직관리 능력자를 수장으로 하는 경향으로 변화했다. 문학단체도 유기체이기 때문이다. 유기체는 움직이며 변화하는 속성을 가진다. 그러한 변화는 회장인 리더의 성향에 따르는 게 필연이며 결과 또한, 그런 경향으로 반응한다. 리더십 상황이론을 전개한 허시와 브랜차드(Pual Hersy & Kenneth H. Blanchard)는 ‘관리란 조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개인이나 집단과 더불어, 그리고 개인이나 집단을 통하여 일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으로 정의했다. 이는 회장은 문학적 자질과 또 다른 재능이 요구함을 암시한다. 즉 CEO 타입 회장을 말함이다. 그러나 문학을 수단으로 할 때는 문학의 저급화를 초래할 위험성이 있다.
두타문학회 회장을 맡은 17명도 리더십 유형에다 대입하면 두타문학회가 변천한 과정 추이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례로 초창기 기틀을 다진 김영준 리더십, 위기 때마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문학회를 탈바꿈시킨 정연휘 리더십, 대관청관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대외행사를 일사천리로 진행하던 김일두 리디십이 그런 사례에 적용된다고 예시할 수 있겠다.
대체로 두타문학회 회장은 특정한 사안이 없는 한 연공순으로 맡았다. 지역 문학 특수성 때문에 불가역적 결정일 수도 있지만, 피동적이고 안주하는 타입에겐 명절차례나 기제사처럼 관례대로 한다? -관례대로 하는 건 하던 대로 한다는 의미니 곧 마지못해 하는 일로 타성에 젖어 문학회 동력의 상실 원인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단체 리더 선정은 신중해야 함은 불변의 조건이다. 연장자 우대가 아니라 지방화 시대에는 여건 환경에 관리 마인드를 가진 리더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해서 ‘내가 연공도 오래되었고 나이가 많으니까’ 그런 이유로 리드 자리를 맡아서는 곤란하다. 또한, 가뜩 개인 마인드를 중시하는 예술인지라 문학 스타일이 독특한 회장은 회원들을 아우르지 않고 마이웨이를 외치며 제 갈 길로 가는 맹점이 있다. 새로움과 경이로움을 생명으로 하는 자기 문학에서는 성과를 낼지 모르지만, 문학집단 리드로선 이질감을 배척하고 전통을 얕보고 성토하려는 경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실제 역대 회장 가운데는 그런 성향 회장도 몇 있어 조직과 화합에 문제를 노출하기도 했다.
해서 정체되었을 때는 변혁적 리더십을, 개인 특성 편차로 조직이 출렁일 때는 제휴 리더십을 지닌 회원에게 연공을 피해서라도 맡겨야 한다. 더구나 문학회는 발만 맞추는 축구팀이 아니다. 개인 능력을 무한히 발휘하여 팀 위상을 높이는 집단이기에 조정하고 조율하고 풍토를 편안하게 하는 리더여야 팀을 활성화할 수 있다. 그런 까닭으로 피동적인 리더도 또한, 진취성 문제로 곤란하다.
두타문학 50년사 기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제356회(2019년 5월 31일 기준)를 맞은 <두타시 낭송회>(엄격히 낭독회지만)로 전국 장수 시낭송회로 자리매김한 일이다. <두타시 낭송회>의 효시는 1971년 새마을다방에서 개최한 ‘제1회 문학의 밤’에서 비롯되었지만,제8대 회장을 역임한 김태수의 기획으로 월간 낭송회로 정착해서 48년 뒤 지금에 이르면서 매달 연륜을 보태가고 있다. 시낭송회와 같이 매월 발간되는 문집 『월간 두타문학』은 비록 30쪽 안팎으로 회원들과 독자들의 도움으로 출판되지만, 전국 어느 문학회도 갖지 못한 출판 기록물이다. 그리고 회원들에게 월마다 작품을 써내야 하는 책무를 주며 연간지 『두타문학』의 작품 공급원 구실을 감당하기에 두타문학회로선 상당한 기능과 비중을 지닌 행사임이 분명하다.
월간 두타시낭송회 행사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해마다 7월 말이나 8월 초순에 삼척비치조각공원에서 개최하는 ‘여름바다시낭송회’다. 외지 관광객에게 삼척 두타문학을 알리는 절호의 기회고, 자기 작품을 많은 관객에게 목소리로 전달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주문협과 삼척 인근 문학인이 함께하는 시간이기에 두타문학회에겐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했다. 다음은 월간 두타시낭송회에 기록으로 남을 행사를 추려보았다.
*주요 두타문학회 월간 시낭송 현황
회 차 | 개최날짜 | 장 소 | 적 요 |
제62회 | ‘94. 11. 25 | 문화원 사랑방 | 김영준 회갑 기념 |
제71회 | ‘95. 08. 19 | 강릉 경포대 해변 | 강릉 ‘열린시낭송회’ 공동 시낭송회 |
제75회 | ‘95. 12. 03 | 서울 삼성출판박물관 | 구상 시인 초청 |
제78회 | ‘96. 03. 24 | 설경 태백산 정상 | 주제 ‘독도는 우리 땅’ |
제89회 | ‘97. 02. 20 | 태백산 천제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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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9회 | ‘00. 06. 23 | 문예회관 | 신범순 교수 초청 |
제139회 | ‘01. 04. 27 | 문예회관 | 배재홍 교수 초청 |
제153회 | ‘02. 06. 28 | 여성회관 | 엄창섭 교수 초청 |
제180회 | ‘04. 09. 04 | 문화원 | 삼우회 고향방문 세미나. (제188회) 2차(‘05. 06. 04) |
제192회 | ‘05. 09. 25 | 평창 봉평 | 메밀꽃 필 무렵 문학기행 |
제205회 | ‘06. 10. 21 | 춘천 산토리 | ‘가을, 호수 그리고 시’ 장수시낭송회 |
제228회 | ‘08. 09. 06 | 소양호 박물관 | 춘천수향시와 전국 장수시낭송회 |
제249회 | ‘10. 06. 25 | 하장중고등학교 | 제261회, 제273회. 3회 개최 |
제283회 | ‘13. 04. 26 | 궁촌 영은사 | 제297회 개최 |
제293회 | ‘14. 02. 27 | 삼척의료원 로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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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8회 | ‘15. 05. 30 | 삼척장미공원 | 장미축제 |
제334회 | ‘17. 07. 29 | 정라진 나릿골 | 감성마을 정라진 바다와 함께 |
제336회 | ‘17. 09. 24 | 함백산 만항재 | 산상의화원에서 |
제337회 | ‘17. 10. 29 | 무릉계곡 | 거제사터 돌탑에서 |
조금 아쉬운 일과 더 보탤 일은 바깥 행사인 경우 대민으로부터 호응도가 점점 낮아진다는 점이다. 이는 자기 충족성과 객관적 계량치의 괴리현상 결과인데 과연 참신함에 충족했으며, 시로써 관객과 감정 소통이 원만했던가를 스스로 검증하면서 쌍방 피로감을 경계해야 장수의 가치를 보존할 수 있다.
한때 퍼블릭 릴레이션스(Public Relations), 즉 ‘자기 PR시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미지마케팅 중요성을 강조하는 용어다. 그럼 두타문학회 홍보 및 소통장인 <삼척두타문학회> 카페 실상은 어떤가? 50년을 맞아 그곳에도 새로운 맞춤형 운용과 활성화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현재(2018년 말 기준) 회원 수 106명에 하루 방문객이 10명도 채 되지 않을 때가 많으며, 월간두타시 등재 때만 반짝할 뿐, 평소 드나드는 회원은 오륙 명에 불과한 실정이다. 문협카페 운영 문제-공론의 장을 활성화하여 상대적 불만이 퇴적되지 않게 여론이 응집했다가 쉽사리 빠져나가는 기능을 갖추어야 소통마당이 제격의 구실을 할 수가 있다. 그러긴 위해서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많이 발생할 소지가 있는 ‘단톡방’ 같은 ‘끼리끼리’ 소통장소가 아니라 훨씬 오픈된 문협 카페를 통하여 상호소통이 건설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한두 사람만 부지런히 드나들 뿐 개점휴업상태로 침체 된 게 문제다. 카페 활성화를 서둘러 홍보와 소통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해내도록 공동으로 가꾸어야 할 책무가 모두에게 있으므로 나이 탓으로 돌리기에 앞서 자기 글을 올릴 수 있는 기능은 최소한 익혀서 소통장에 합류하여야 한다.
10 맺음말
본 글 1990년대 두타문학회의 약사 머리말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두타문학회란 집은 호적명부에만 빽빽하게 이름만 올라있을 뿐, 다음 세대를 이어갈 가임可姙 청춘남녀가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다. 시낭송하고 연간 문집을 만들어 낼 때만 잠긴 빗장을 열고 손님을 맞는 매너리즘에 따른 극복이 현안으로 닥쳤다는 느낌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삼척문학통사』를 정리 발간한 2011년을 기점으로 변화 바람이 일어야 했는데 실기했다고 본다. 지금과 아주 다른 풍향과 풍속을 가진 바람결이어야 두타문학은 또 다른 모습으로 약진을 기대할 수 있다. 이를테면 지향적인 담론의 풍토, 부족함에 따른 파괴적 혁신, 각자도생 위험성 경계. 비전과 철학 함유. 디스토피아적 상황에서 원심분리기처럼 중심축을 꿰뚫어갈 공동지향적인 바람-그런 것들이다.
이제 문학 경쟁력도 블루오션이 아니라 레드오션이다. 문학 본질 경향이나 문학단체 존재 가치도 위상도 이제 흐름의 풍향이 예전과 판이하다. 단체에 소속하지 않아도 문학 활동이 가능한 시대라 문학단체의 위상이 ‘슬러지 스토레이지(sludge storage)’ 같다는 냉소적인 비판 소리마저 나온다. 문학뿐만 아니라 세상 유무형 것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가치가 변형하므로 영원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문제는 그 흐름을 깨닫지 못하거나 편승하지 않으면 현실에서 낙후되고 도태되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냉혹함이다.
문학의 질적 향상과 소통을 위하여 문학비평풍토를 진작시키고, 외적으로는 이승휴문학상 제정 및 시행에 따르는 문학적인 풍토 조성과 기능 제공, 또 『두타문학』이 영동을 포괄할 수 있는 문학잡지로 육성하고, 문학공원 조성과 문학비 건립 등 문학적 성장 스토리가 있어야 한다. 물론 상위 단체인 삼척문협, 삼척예총과 연계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나 인원구성으로 보면 같은 구성원이기에 추진합의에는 갈등이 없으리라 본다. 『두타문학』 경우 외부 필진에게 문호 개방, 연간지에서 반간지·춘추지·계간지·격월간지·월간지로 점차 감당해낼 능력을 배양하고, 재원의 확보를 위한 고정적인 스폰서 발굴, 우수 필진 확보. 등 오픈이노베이션 마인드가 필요한 시점에 왔다는 생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방화시대가 지방문화를 평준화시켰다는 지적을 받는다. 또한, 지원받는 처지란 문학행사 자체가 행정편의식 관변행사 프레임에 갇히는 딜레마에 빠지는 원인으로 작동했다. 마치 지방향토행사장을 찾으며 전국행사장에 떠돌아다니는 각설이패와 같은 이벤트사의 레퍼토리가 주요무대를 이루듯 특징 없는 문학행사로 문학의 질이 평준화 및 모듈화가 되어 문학본질과 향토성이 옅어지는 경향과 탈문학화 하는 경향으로 번지고 있으므로 관변행사에 호응하되 문학 정체성을 훼손하는 발걸음은 삼가야 한다.
그리고 사회환경 변화에 문학회는 언제나 존멸의 두 운명에 맞닥뜨린다. 미국 천재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avid Foster Wallace. 1962. 2. 21∼2009. 9. 12)는 대중오락에 장악된 문화에 자신도 어쩔 수 없이 길들여 간다고 했다. 더구나 문학회는 전통 맥을 면면히 이어가는 사물놀이패가 아니다. 뭐니뭐니해도 문학 가치는 새로운 영역의 창작이고 경이다. 문학인 모임에서 문학적 담론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쯤’은 안다지만 파고들면 사실 그쯤도 모르는 ‘터널 비전(tunnel vision)’의 밀림에 갇혀있다. 세상에는 ‘현자의 돌(philosopher’s stone)’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선배 문학을 답습하는 자세에서 떠나 새로운 문학 흐름 물결이 일어나도록 자세 변경이 필연적 명제다. 전통을 답습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에 가늠자를 댈 때는 그건 곧 침체로 결론이 나기 때문이다. 요즘 문학 가공자들이 고민해야 할 명제를 잃은 게 아니라 버렸다고 이야기한다. 즉 편하게 생각하고 편안하게 쓴다는 말이다. 주객이 전도되어 공자 말씀대로 ‘씀’ 자체부터 즐김을 최상 가치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즐기는 것을 만들 때는 뼈가 깎이는 고통과 인내 과정을 겪어 이루어진 것이라야 진정 즐거운 가치를 획득한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취향에만 만족하려는 문학, 퇴직자 자투리 시간 에움 문학은 문학 가공자가 취할 본역이 아니라 즐기는 자의 취미 한 부분일 뿐이다.
50년 장구한 역사를 가졌다는데, 다른 지방 문학동호회와 어떤 게 다르고 무엇이 특이한가? 특이한 게 있다면 쌓아놓은 문학적 가치는 무엇인가, 이 물음에 귀를 닫아서는 안 된다. 50년 된 어른답게 이젠 대답을 할 때가 왔다. 그래야 헛살았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테니까. 문학 본질은 획일성이 아니라 새로움에 대한 다양성이다. 이 새로움과 다양성에서 두타문학 특질과 전통성을 어떻게 규명할 것인지 모두 고민할 때가 왔다는 숙제를 안고 글마감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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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산정 선생님 집필에 경의와 감사 말씀 드립니다
정리해 주신 취렴 선생님께도 감사 말씀 드립니다...이제 두달 남았습니다.
진행에 박차를 가해 보겠습니다.
산정님, 수고 많았어요. 그 많은 자료를 수집하기 쉽지 않은데 너무 많은 공을 드렸소.
반세기가 영화 스크린처럼 스쳐가네요. 취렴님께도 감사드려요.
늘 하는 말이지만 <두타문학>은 지구 상에 단 하나 뿐이오.
고향을 배반하고 객지를 떠도는 몸. 죽어도 육신을 받아줄 고향은 아니지만
문학의 출발이 그곳 이니 잊을 수 없는 곳. 구름 흘러가는 쪽을 오늘도 바라봅니다.
거듭 노고에 감사드리고 취렴님, 두타산 1357을 1353으로 수정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