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 김약로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다가 병조판서로 전직 명령이 난 것은 그가 평안감영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평안도의 수려한 자연과 아름다운 누대(樓臺) 그리고 풍악 소리와 기라성 같은 미녀들을 마음속을 잊을 수가 없어 그는 심하게 울화병이 생겼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말하였다.
병조에서 만약 나를 데리러 오는 놈이 있으면 당장 때려죽이리라 그러자 병조에 소속된 사람들 가운데 평양으로 내려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용호영(龍虎營)에 소속된 여러 장교들이 서로 의논을 하였다.
"상관의 명이 이러니 정말 감히 내려갈 수가 없네 그렇다고 이 때문에 내려가지 못한다면 또한 때를 맞추지 못해서 죄를 짓게 되니 이를 장차 어찌할꼬?" 그 가운데 한 장교가 말하였다.
“내가 당장 내려가서 무사히 모셔 오겠소? 그러면 여러분들이 내게 크게 한턱내겠소?” 그러자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대답하였다.
“자네가 내려가서 무사히 모시고 온다면 야 우리는 술자리를 성대하게 차리고 기다리지.”
“그렇다면 내 곧 떠나리다.” 하고는 군졸들 가운데 키가 크고 위풍과 기력이 있는 사람 10쌍을 가려 새로 지은 옷을 갈아입히고 호령하는 법과 곤봉 쓰는 법 등을 모두 익히게 한 다음 그들을 데리고 갔다.
이때 김약로는 매일 같이 연광정에서 풍악을 울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길게 펼쳐진 숲 사이를 바라보니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마음속으로 몹시 의아해하고 있는데 새 옷을 차려입은 장교 하나가 앞으로 달려오더니 하인더러 아뢰라고 시키는 것이었다.
“병조(兵曹)의 교련관(敎鍊官) 이현신이랍니다.” 김약로가 크게 노하여 책상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병조의 교련관이 뭐 하러 왔다더냐?” 그 장교는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섬돌에 올라 군례(軍禮)를 올린 뒤에 호령을 하였다.
“순령수는 빨리나와 인사를 올려라.”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20여명의 군졸들이 뜰에서 절을 올렸다. 그리고는 동서로 나뉘어 서는데, 그들의 용모와 풍채 군복이 평안감영의 나졸들에 비하면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그 장교가 홀연 또 큰소리로 호령하였다.
“주변에서 잡소리 내는 것을 금하노라!” 이런 호령을 두어 차례 한 뒤에야 땅에 엎드려 아뢰었다.
“사또께옵서는 비록 관찰사로서 이곳에 행차하셨사오나 진정 관찰사처럼 행차하셔서는 아니 되옵니다. 이제는 대사마(大司馬)이시자 대장군으로서의 행차이옵니다. 저들이 감히 이처럼 떠들어대는데 고을에서 나온 장교는 어째 그걸 금지시키지 못한단 말이옵니까? 고을에서 나온 장교를 부득이 잡아드려 죄로 다스려야 겠사옵니다.” 하고는 호령하였다.
“주변에 소란을 금하고 고을에서 나온 장교를 빨리 잡아드려라.” 군졸들이 명을 받들고 나가더니 고을에서 나온 장교의 목을 철사줄로 묶어 잡아들였다. 그러자 서울에서 내려온 장교가 분부하였다.
“사또님의 행차는 비록 일개 도를 다스리는 분의 행차지만 이처럼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 하물며 이제는 대사마(大司馬)이시자 대장군의 행차인데 이렇게 소란스러워서야 되겠느냐? 너희들은 어찌 감히 그 난잡한 것을 금하지 않는단 말이냐?” 하고는 고을에서 나온 장교를 국법에 따라 처리하게 하였다.
군졸들이 지니고 갔던 병조의 흰 몽둥이를 쥐고는 옷을 벗기고 내려치니 그 소리가 연광정을 진동시켰다. 그들의 응대하는 소리와 몽둥이를 쓰는 법은 바로 용호영 등 서울의 오영에서 쓰는 방식으로 평안감영(平安監營)의 방식과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김약로는 기분이 매우 개운해져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앉아서는 서울에서 온 장교가 하는 대로 맡겨 버렸다.
곤장이 일곱 대에 이르렀을 때 서울에서 온 장교가 또 아뢰었다.
“곤장은 일곱 대를 넘길 수 없습니다.” 하고는 고을에서 나온 장교의 결박을 풀어준 뒤 끌어냈다.
김약로는 마음속으로 매우 겸연쩍어서 감영 소속의 아전을 불러 말하였다.
“감영에 있는 과실자 기록을 모두 가져다가 서울서 온 장교에게 주어라.” 장교가 그 기록을 일일이 그 죄를 심문하여 어떤 사람은 곤장 다섯대를 때리고 어떤 사람은 일곱대 혹은 아홉대를 때려서 끌어냈다. 김약로가 또 말하였다.
“그전의 과실자 기록 가운데 지운 것들도 모두 서울서 온 장교에게 주어라.” 장교가 다시 전처럼 처리하였다. 김약로가 매우 기뻐하며 서울에서 온 장교에게 물었다.
“자네는 나이가 몇이고 누구 집안인가?” 장교는 나이가 몇이고 아무개 집안이라고 대답하였다. "자네 평양에는 초행인가?"
“그러하옵니다.”
"이렇듯 경치가 좋은 데를 자네는 어찌 한번도 구경하지 못했는가?" 하고는 장부를 드리라고 하여 돈 백냥과 쌀 다섯섬을 상으로 주겠다고 써주며 말하였다.
“내일 여기 들어와 한바탕 놀아도 좋으니라 기생과 풍악과 음식은 내 마련해 주마.” 하면서 마치 낯이 익은 사람처럼 신임하였다.
김약로는 며칠을 더 평양에 머물다가 그 장교와 함께 상경하였다.
이 이야기가 전해져, 한때 담소거리가 되었다.
주(註)
①김약로(金若魯,1694~1753) : 조선조 영조 때의 문신. 자는 이민(而敏,而民)호는 만휴당(晩休堂)본관은 청풍. 유(楺)의 아들. 시호는 충정(忠正)
②화증(火症) : 걸핏하면 화를 벌컥 내는 증세
③양언(揚言) : 공공연하게 말함.
④용호영(龍虎營) : 조선시대 대궐의 숙위(宿衛) 왕가(王駕)의 호종(扈從)등을 맡아보던 관아.
⑤순뢰(巡牢) : 순령수(巡令手)와 뇌자(牢子). 뇌자는 죄인을 다루는 군졸.
⑥연광정(練光亭) : 평양 대동강가에 있는 누대.
⑦대사마(大司馬) :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예스럽게 이르던 말.
⑧부과기(付過記) : 부과(附過)관리나 군졸의 공무상 과실이 있을 때 즉시 처벌하지 않고 명부에 적어두는 일.
⑨수(數) : 죄를 심문함.
⑩효주(爻周) : 글이나 문서에 효(爻)자 모양을 연달아 써서 찍음.
⑪하기(下記) : 돈 치른 것을 적은 장부.
⑫숙면인(熟面人) : 낯이 익은 사람.
(국역 기문총화(記文叢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