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성명]
정권에 유불리 따지며 추모도 애도도 ‘미루라’는 공영방송의 권언유착
: “총선에 영향” 준다며 세월호 10주기 방송 막은 KBS를 규탄한다
박민 사장 취임 이후 KBS의 공공성과 방송독립성이 처참한 수준으로 무너지고 있다. 최근 임명된 한 KBS 제작간부가 4월에 방영하기로 되어 있던 세월호 참사 10주기 다큐멘터리를 “총선에 영향을 준다”는 이유로 돌연 “6월 이후에 다른 재난과 엮어서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시리즈로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제작진이 “총선은 4월 10일이고 방송은 8일 뒤이므로 총선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반박했으나 “총선 앞뒤 두 달이 총선 영향권”이라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한다.
이미 80% 가량 제작이 진행된 프로그램에 대한 느닷없는 간부의 개입에 ‘제작자율성 침해’라는 안팎의 지적이 커지자 KBS 사측은 “4월 총선을 앞둔 시기에 민감한 아이템이 총선 일자를 중심으로 방송되는 것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선거 공정성 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 하에 6월 이후 방송하기로 했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누구에게’ 민감한 아이템이며, ‘어떤’ 영향을 미친단 말인가. 납득하기 어렵다.
KBS는 앞서 2월 7일 대통령의 ‘특별대담방송’을 공개한 바 있다. 정권에 민감한 내용은 교묘하게 회피하면서 일방적인 대담을 녹화·편집한 탓에 ‘땡윤방송’, ‘정권의 나팔수’라는 비판이 거셌다. 그러나 KBS는 ‘특별대담방송’을 재방송까지 편성해 내보내는 이례적인 행보를 보였다. 재방송일은 설날 당일인 2월 10일로, KBS 사측이 주장하는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총선 앞뒤 두 달’이 시작되는 날짜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KBS 사측의 논리는 자가당착인 동시에 ‘정권의 입맛에 맞는 내용만 방송으로 내보내겠다’는 권언유착을 스스로 인정한 셈이나 마찬가지다.
언론인에게 제작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중요한 이유는 언론이 정치·자본으로부터 독립되었을 때만이 권력을 비판하고 감시하며,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아닌 사회 구성원 전체를 아우르며 공공의 이익을 위한 언론의 역할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그 어떤 매체보다도 ‘국민의 방송’으로서 역할과 책무가 있다.
KBS <다큐인사이트>팀이 준비하고 있던 다큐멘터리는 세월호 참사 후 10년을 보낸 단원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었다고 한다. 비극적인 대형 참사와 재난 사고 이후 우리 사회가 느끼는 비통함과 안타까움, 유가족과 당사자가 느끼는 상실감과 고통, ‘진상을 밝혀 달라’는 상식적인 요구, 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변화하자는 각계의 약속, 이 참사를 잊지 말고 기억해서 같은 슬픔을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 공동체가 함께 하는 추모와 애도의 목소리를 언론이 담아내는 것은 당연한 역할이자 상식적인 공영방송의 책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KBS는 그러한 책무를 저버리는 것을 넘어 정권에 유불리함을 따지며 참사가 일어난 10주기를 기억하고 추모하자는 목소리와 참사로부터 살아남은 존재들을 정치적 의도가 숨겨진 ‘불순한/불온한’ 행동으로 오독하고 예단하며 삭제하려 하고 있다. ‘선거공정성’, ‘총선에 영향’을 운운하지만 KBS의 이 ‘억지’야말로 정략적 폭력이자, 공영방송 KBS로부터 국민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방송의 공공성과 공영성에 대한 심대한 침해이다.
우리는 KBS에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를 예정대로 4월에 방송할 것을 엄중히 요구한다. 정권에 불리한 내용이라면 추모와 애도마저 ‘연기하라’는 KBS 제작1 본부장 이제원과 ‘국민의 방송’ KBS를 ‘박민의 방송’, ‘정권을 위한 방송’으로 전락시킨 KBS 사장 박민은 국민들에게 정중히 사죄하고 사퇴하라.
2024년 2월 21일
인천여성민우회 외 53개단체 연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