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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1권
7.2.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法隨念)
68.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기를 원하는 자도 조용히 혼자 머물러
“법은 세존에 의해서
① 잘 설해졌고
②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③ 시간이 걸리지 않고
④ 와서 보라는 것이고
⑤ 향상으로 인도하고
⑥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A.iii.285)라고,
교학(pariyatti, 배움)과 아홉 가지 출세간법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해야 한다.
(1) 잘 설해졌고
69.
(1) 잘 설해졌고라는
이 구절에는 교학(pariyatti)도 포함되지만 나머지 [다섯 구절]의 경우에는 출세간법만 포함된다.
여기서 교학은 잘 설해졌나니 시작도 중간도 끝도 좋고 의미와 표현을 갖추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존이 설하신 것은 단 하나의 게송이라도 더할 나위 없이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에 [그 게송의] 첫째 구(句)로 처음이 좋고, 둘째, 셋째 구로 중간이 좋고, 마지막 구로 끝이 좋다.
같은 뜻을 나열하는 경은 서론(序分)으로 처음이 좋고, 결론(流通分)으로 끝이 좋고, 나머지(正宗分)로 중간이 좋다.
여러 뜻을 나열하는 경은 처음의 나열로 처음이 좋고, 마지막의 [나열]로 끝이 좋고, 나머지로 중간이 좋다.
다시 서론과 그것을 설하게 된 동기로 처음이 좋고, 제도하려는 자들의 근기에 따른다고 해서 뜻이 전도되지 않고 또 원인과 비유가 적절하기 때문에 중간이 좋고, 경청하는 자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결론으로 끝이 좋다.
70. 교법(sāsana-dhamma) 전체는 자기에게 이로운 계로 처음이 좋고, 사마타와 위빳사나와 도와 과로 중간이 좋고, 열반으로 끝이 좋다.
혹은 계와 삼매로 처음이 좋고, 위빳사나와 도로 중간이 좋고, 과와 열반으로 끝이 좋다.
부처님이 잘 깨달으셨기 대문에 처음이 좋고, 법이 좋은 법이기 대문에 중간이 좋고, 승가가 잘 실천하기 때문에 끝이 좋다.
혹은 이것을 듣고 여여하게 수행하는 자가 얻어야 할 등각(等覺, abhisamdhi)으로 처음이 좋고, 독각(獨覺, pacceka-bodhi)으로 중간이 좋고, 성문각(聲聞覺, sāvakabodhi)으로 끝이 좋다.
71. 들을 때 이 교법은 장애를 억압하기 때문에 듣는 것만으로도 좋다.(kalyāṇa). 그러므로 처음이 좋다.
도닦을 때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행복을 가져오기 때문에 도닦음으로 좋다. 그러므로 중간이 좋다.
[사마타와 위빳사나의 행복을 가져오도록] 그렇게 도닦으면 도닦음의 과거 완성될 때 평정(tādi-bhāva)을 가져오기 때문에 도닦음의 과로도 좋다. 그러므로 끝이 좋다.
이와 같이 처음과 중간과 끝이 좋기 때문에 잘 설해졌다고 한다.
72. 세존은 법을 설하실 때 교법의 청정범행과 도의 청정범행을 설하시고 여러 가지 방편들로 그것을 밝히신다.
그것은 적절하게 의미(attha)를 구족했기 때문에 의미를 갖추었고, 표현(byañjana)을 구족했기 때문에 표현을 갖추었다.
선언하고, 설명하고 드러내고, 분별하고, 밝히고, 서술함으로써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에 적합하기 때문에 의미를 갖추었고, 음절과 단어와 세목과 문체와 어원과 설명을 구족했기 때문에 표현을 갖추었다.
의미가 심오하고 통찰함이 심오하기 때문에 의미를 갖추었고, 법이 심오하고 가르침이 심오하기 때문에 표현을 갖추었다.
의무애해(義無碍解)와 변(辯)무애해의 영역이기 때문에 의미를 갖추었고, 법무애해와 사(詞)무애해의 영역이기 때문에 표현을 갖추었다.
현자가 경험할만하기 때문에 슬기로운 자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므로 의미를 갖추었고, 믿을만하기 때문에 세간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일으키므로 표현을 갖추었다.
의도가 심오하기 때문에 의미를 갖추었고, 문장이 분명하기 때문에 표현을 갖추었다.
첨가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전체가 원만한 상태로써 지극히 원만하다.
삭제해야 할 것이 없기 때문에 결점이 없는 상태로써 청정하다.
계 등의 다섯 가지 법의 무더기와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결점이 없고 [고해를] 건너게 하기 위하여 생겼고, 세간적인 것에 무관심하기 때문에 지극히 청정하다.
이와 같이 의미와 표현을 갖추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을 드러내기 때문에 교법을 잘 설해졌다.
73. 혼은 이 [법은] 뜻이 전도된 것이 없으므로 잘(suṭṭhu) 설해졌다(akkhāto). 그러므로 잘 설해졌다(svākkhāto)고 한다.
다른 외도들의 법에는 그 뜻이 전도되어있다.
장애가 된다고 설한 그 법들에는 장애가 없고, 출구라고 한 법들은 출구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법은 잘못 설해졌다.
세존의 법은 그와 같이 전도되지 않았다.
‘이 법들은 장애가 되고 이 법들은 출구이다’라고 설한 그 법들이 사실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법은 잘 설해졌다.
74. 열반에 걸맞게 도를 설하셨고, 도에 걸맞게 열반을 설하셨기 때문에 출세간법이 잘 설해졌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세존은 제자들에게 열반으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널리 선포하셨고 열반은 도닦음과 더불어 부합한다.
마치 강가강의 물과 야무나강의 물이 서로 만나 합류하듯이,
그와 같이 세존은 제자들에게 열반으로 인도하는 도를 널리 선포하셨고 열반은 도닦음과 더불어 부합한다.(D.ii.223)”
75. 성스러운 도는 양극단에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중도(中道, majjhimāpaṭipadā)다. 중도라고 설하셨기 때문에 잘 성해졌다.
사문의 과(沙門果)는 오직 오염원들을 가라앉힌 것이다. 오염원들을 가라앉힌 것이라 설하셨기 때문에 잘 설해졌다.
열반은 영원함, 불사(不死), 귀의처, 의지할 곳 등의 고유성질을 가진다. 영원함 등의 고유성질로 설하셨기 때문에 잘 설해졌다. 이와 같이 출세간법이 잘 설해졌다.
(2)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76. (2)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성스러운 도는 우선 자기의 상속에서 탐욕 등을 없애는 성인에 의해 스스로(sāma) 보아 알만하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sandiṭṭika)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탐욕에 물들었고, 압도되었고, 전도된 마음을 가진 자는 자기를 괴롭히는 것을 생각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것을 생각하고 둘 다를 괴롭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는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슬픔을 겪는다. 탐욕을 버렸을 때 자기를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고 타인을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으며 둘 다를 괴롭히는 것도 생각지 않는다.
정신적인 고통도 겪지 않는다.
바라문이여, 이와 같이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A.i.156-57)”
77. 다시 아홉 가지 출세간법을 얻게 되면 누구나 타인을 믿는 것에 의존함을 버리고 반조하는 지혜로 스스로 보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78. 혹은 찬탄할만한(pasatthā) 견해(diṭṭhi)가 찬탄할만한 견해(sandiṭṭhi)이다. 찬탄할만한 견해로 물리치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sandiṭṭhuka)이다.
왜냐하면 성스러운 도는 그것과 연결된 바른 견해로,
성스러운 과는 그것의 원인인 바른 견해로,
열반은 이 열반을 대상으로 가지는 바른 견해로 오염원들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전차로 승리하기 때문에 전차병이라 하듯이 아홉 가지 출세간법도 바른 견해로 승리하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79. 혹은 견(diṭṭha)은 보는 것(dassana)을 뜻한다. 견(diṭṭha)이 바로 본 것(sandiṭṭha)이다. 즉 본다는 뜻이다.
볼만하기 때문에 sandiṭṭhi-ka(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출세간법은 그것이 보이자마자 수행을 관통하고 [열반의] 실현을 관통하여 윤회의 두려움을 물리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옷(vattha)을 입을만하기(arahati) 때문에 옷을 입을 수 있는 자(vatthika)라 하듯이 볼(sandiṭṭha) 만하기(arahati)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 (sandiṭṭhika)이다.
(3) 시간이 걸리지 않고
80. [(3) 시간이 걸리지 않고:
자신의 결과를 주는 데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akāla)이다.
시간이 걸리지 않음이 바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akālika)이다.
일이나 7일 등의 시간을 경과하지 않고 결과를 준다. 즉 그것은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결과를 주는 것이라고 설했다.
81. 혹은 자신의 결과를 주는데 긴 시간이 걸리는 것이 시간이 걸리는 것(kālika)이다.
무엇이 그것인가?
세간적인 유익한 법(善法)이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가 바로 그 다음에 따라오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라는 용어는 도에 관해서 설한 것이다.
(4) 와서 보라는 것이고
82. [(4) 와서 보라는 것이고]:
“와서 이 법을 보라(ehi. Passa imaṁ dhammaṁ)’고 이와 같이 검사하기 위해 초대를 할만하기 때문에 와서 보라는 것(ehipassika)이다.
무슨 이유로 와서 보라는 것인가?
있기 때문이고 청정하기 때문이다. 빈 주먹에 금화나 황금이있다고 말할순 있지만 ‘와서 이것을 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무슨 이유인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변이나 대변이라면 실제로 있다 하더라도 아름다움을 드러내 보이면서 마음을 흡족케 하기 위해서는 ‘와서 이것을 보라’고말할 수없다. 오히려 풀이나 나뭇잎으로 가려야만 할 것이다.
왜 그런가? 더럽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아홉 가지 출세간 법은 그 고유성질로 존재하는 것이고 구름없는 하늘에 둥근 보름달처럼, 황금색 돌 위에 놓인 보석처럼 청정하다.
그러므로 있기 때문이고 청정하기 때문에 와서 보라고 초대 할 만하다. 그래서 와서 보라는 것(ahipassika)이다.
(5) 향상으로 인도하고
83. [(5) 향상으로 인도하고]:
인도할만하기 때문에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opaneyyika)이다. 여기서 판별은 다음과 같다.
인도함(upanayana)이 인도(upanaya)다. 자기의 옷이나 머리가 불타는 것도 상관치 않고 오직 수행으로 [이 법을] 자기의 마음에 인도 할 수 있기 때문에 인도하는 것(opaneyyika)이다. 인도하는 것이 바로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opaneyyika)이다.
이것은 형성된 출세간법들(열반을 제외한 네 가지 도와 네 가지 과)에 적용된다.
형성되지 않은 [열반]은 자기의 마음에 [마음의 대상으로] 삼을 만하기 때문에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 opaneyyika)이다. 깨달아서 체득할 만하다는 뜻이다.
84. 혹은 성스러운 도는[성스러운 사람들을]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인도할만한 것(upaneyya)이다.
과와 열반은 실현해야 할 것으로 인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인도할만한 것(upneyya)이다.
인도 할만한 것9,upaneyya)이 바로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upaneyyika)이다.
(6)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85. (6) 지자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리한 지자 등 모든 지자는
‘나는 도를 닦았고, 과를 얻었고, 열반을 실현했다’라고 각각 자신 안에서 알아야 한다.
은사가 도를 닦을 때 [제자가] 함께 머문다해서 그의 오염원들이 버려지는 것이 아니고,
은사가 과를 증득했다 해서 제자가 행복하게 머무는 것도 아니요,
은사가 열반을 실현했다 해서 제자가 실현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타인의 머리에 꾸며놓은 장식처럼 [밖에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지자들이 자신의 마음에서 볼 수 있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어리석은 자의 경계가 아니다.
86. 그리고 이 법은 잘 설해졌다. 왜 그런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걸리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보아 알 수 있는 것이다.
와서 보라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와서 보라는 것은 향상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87. 이와 같이 ‘잘 설해졌고’라는 등으로 구분한 법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할 때,
“그때 그의 마음은 탐욕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때 그의 마음은 법을 의지하여 올곧아진다.(A.iii.285)”
이와 같이 앞서 설한 방법대로(§66) 장애들을 억압할 때 차례에 따라 어떤 한 순간에 禪의 구성요소들이 일어나게 된다.
법의 덕은 심오하기 때문에 혹은 갖가지 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에 전념하기 때문에 이 禪은 본삼매에는 이르지 못하고 근접에만 이른다. 이처럼 이것은 법의 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통해 일어나기 때문에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法隨念)이라부른다.
88. 이러한 법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닦는 비구는
‘이와 같이 향상으로 인도하는 법을 설하고 이러한 공덕을 갖춘 스승을 과거에도 본 적이 없고 현재에도 세존 이외에 어떤 분도 본 적이 없다’라고 생각하면서,
법의 덕을 봄으로써 천인사를 존중하고 천인사에 순종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을 내고 믿음이 깊어진다.
희열과 기쁨이 커지고,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법과 함께 사는 것 같은 인식을 얻는다.
법의 공덕을 계속해서 생각함을 항상 몸속에 지니고 있을 때 그의 몸도 탐묘처럼 예배를 받을만하다.
그의 마음은 위없는 법의 증득으로 향한다.
계를 범할 대상을 만날 때 뛰어난 법의 성품을 계속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양심과 수치심이 나타난다.
더 이상 통찰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적어도 선처로 인도한다.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항상 게을리 하지 말지니
이와 같이 큰 위력을 가진법을 계속해서 생각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