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달마장현종론 제15권
4. 변연기품(辯緣起品)④
4.3. 12연기(緣起)에 따른 윤회전생[4]
8) 명색(名色)에 대하여
이미 무명에 대해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명색(名色)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지만, 색에 대해서는 이미 분별하였다.1)
‘명(名,nāma)’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名)이란 무색의 4온(蘊)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부처님께서는 무색의 4온을 설하여 ‘명’이라고 이름하였다.
어째서 ‘명’이라고 이름한 것인가?
능히 나타내어 부르는 것[表召]이기 때문이니, [‘명’이라 함은] 능히 여러 가지의 소연(所緣)을 나타내어 부르는 것을 말한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명’은 마땅히 무색의 법을 모두 포섭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불상응행법은 소연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
‘나타내어 부르는 것’은 오로지 무색에만 존재하는 것으로, ‘색’의 명칭을 해석하여 말한 것에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과 같다.2)
또한 [무색의 4온은] 미세하기 때문으로, 그러한 각각의 의미에 대해 이치에 따라 ‘명’을 설정하여 그것의 명칭으로 나타낸 것이다.3)
그렇다고 무표색 등도 역시 ‘명’이라 칭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것의 소의(所依,즉 표업)는 현량(現量)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이다.
또한 일체의 [3]계(界)ㆍ[9]지(地)ㆍ[5]취(趣)ㆍ[4]생(生)에서 능히 두루 추구[趣求]하는 것이기 때문에 ‘명’이라는 명칭으로 설정하였다.4)
그리고 무루의 무색도 ‘명’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니, [무루가] 비록 이것(‘명’)에 의해 드러나고 밝혀지는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또한 설하는 자의 정의(情意)에 따라 [무색의 4온을] 전체적으로 ‘명’이라 설하였는데, 더 이상 번거롭게 따져 힐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밖의 널리 결택해 보아야 할 점에 대해서는 『순정리론』에서 설한 바와 같다.5)
9) 촉(觸)에 대하여
① 안(眼) 등의 6촉
‘명’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촉(觸)의 상(相)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촉은 여섯 가지로서,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난다.
논하여 말하겠다.
촉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안촉(眼觸) 내지 의촉(意觸)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다시 어떤 것인가?
[이것은]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난 것으로, 이를테면 근(根)ㆍ경(境)ㆍ식(識)의 세 가지가 화합하였기 때문에 별도로 존재하는 촉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여섯 번째의 세 가지는 비록 각기 시간[世]을 달리하여 존재하는 것일지라도 인과로서 상속(相屬)하기 때문에 화합의 뜻이 성립할 수 있다.
혹은 동일한 결과[同一果]가 바로 화합의 뜻이니, 비록 근ㆍ경ㆍ식이 반드시 함께 생기하지 않았을지라도 ‘촉’이라는 결과가 동일하기 때문에 ‘화합’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6)
그리고 ‘촉’ 자체가 개별적으로 실재한다는 것은 대지법(大地法) 중에서 이미 성취하였다.7)
[촉은] 비록 세 가지가 화합하여 생겨난 것일지라도 결정코 식(識)과 구기(俱起)하니, [계경에서] 식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 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내적으로 존재하는 식신(識身)과 외적인 명색의 두 가지가 있으니, 이 두 가지를 연으로 하여 온갖 촉이 생기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내적으로] 존재하는 식신’이라는 말은 6내처(內處)를 나타내며, ‘외적인 명색’이라는 말은 6외처(外處)를 나타내는 것으로, 그 뜻이 필시 그러해야 할 것이니, 가타(伽他)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가타에서는
“안(眼)과 색(色)의 두 가지 등에 [의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경에서 설하기를
“식과 촉은 다 같이 명색을 연으로 한다”고 하였다.
이렇듯 [식과 촉은] 생연(生緣)이 이미 동일한데 생겨나는 시간이 어찌 전후라고 하겠는가?
연이 갖추어졌으면 반드시 일어나는 것으로, 능히 [그 생기를] 장애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안촉 등에 의해 생겨난 수(受) 등의 제법은 안식 등과 구기한다’는 사실이 바로 증명되는 것이니, 안식 등과 그 생인(生因)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경에서는
“이러한 수(受), 이러한 상(想), 이러한 사(思), 이러한 식(識), 이와 같은 제법은 서로 뒤섞여 서로를 떠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것이다.8)
따라서 식과 촉이 구기한다는 사실은 이치상 지극히 잘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② 유대촉(有對觸)과 증어촉(增語觸)
바로 앞에서 논설한 6촉은 다시 종합되어 두 가지가 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다섯 가지와 상응하는 것은 유대(有對)이며
여섯 번째와 구기하는 것은 증어(增語)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안(眼) 등의 5촉(觸)을 설하여 유대촉(有對觸)이라 이름하니, 유대의 근(공간적 점유성을 갖는 5근)을 소의로 삼았기 때문이며, 오로지 유대의 법을 경계대상으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제6의촉(意觸)을 설하여 증어촉(增語觸)이라고 이름한다.9)
여기서 ‘증어’란 이를테면 명(名)을 말하는데, ‘명’은 바로 의촉이 소연으로 삼는 장경(長境)이기 때문에 편향되게 이것만을 증어촉이라고 이름한 것이다.10)
즉 의식은 명(名)과 의(義)를 모두 경계대상으로 삼지만 5식은 ‘명’을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장경’이라고 말한 것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안식은 단지 ‘푸르다’는 사실만을 능히 요별할 뿐, ‘이것은 바로 푸른 것이다’라는 [명 즉 개념]을 요별하지 못하지만,
의식은 ‘푸르다’는 사실도 요별할뿐더러 ‘이것은 바로 푸른 것이다’라는 [명] 역시 요별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는 바와 같다.11)
따라서 유대촉이라는 말이 소의와 경계에 따라 설정된 것이라면, 증어촉이라는 말은 [소연이 된] 장경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의식을 일컬어 증어(增語)라고 하니, 말을 발(發)하는데 뛰어난 것[增上]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의식은 말을 증상(增上,addhikṛtya, 이를테면 표준이 되는 근거)으로 삼아 비로소 경계로 전전(展轉)하지만 5식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유독 의식만을 ‘증어’라고 이름하였으며, 이것과 상응하는 촉을 ‘증어촉’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유대촉이라는 말은 소의와 경계에 따른 것이라면, 증어촉이라는 말은 상응의 주체(즉 의식)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이다.”
③ 8촉과 3촉
바로 앞에서 논설한 6촉은 개별적인 상응관계에 따라 다시 여덟 가지의 종류가 된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명(明)과 무명과 두 가지가 아닌 촉은
무루와 염오와 그 밖의 것과 [상응한 것이고]
애촉(愛觸)ㆍ에촉(恚觸)은 두 가지와 상응한 것이며
낙(樂) 등의 촉은 3수(受)에 따른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촉은] 명ㆍ무명 등과 상응하여 세 가지 종류가 되는데, 첫째가 명촉(明觸)이며, 둘째가 무명촉(無明觸)이며, 셋째가 비명비무명촉(非明非無明觸)이다.
이 세 가지는 차례대로 무루와 염오와 그 밖의 것과 상응하는 촉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그 밖의 것’이란 이를테면 무루와 염오를 제외한 나머지, 즉 유루의 선과 무부무기를 말한다.
그리고 무명촉 중의 일부는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에 근거하여 다시 애(愛)와 에(恚)의 두 가지 촉을 설정하였으니, 애탐과 진에의 수면(隨眠)과 서로 상응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일체의 촉을 모두 다 포섭하여 다시 세 가지 촉을 성취하니, 첫째는 순락수촉(順樂受觸)이며, 둘째는 순고수촉(順苦受觸)이며, 셋째는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이다.12)
무엇을 일러 순수촉(順受觸)이라 한 것인가?
촉은 바로 낙(樂) 등의 수(受)에 의해 영납되기 때문에, 혹은 수의 행상(行相)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순수(順受)’라고 이름한 것이다.
어떻게 촉이 수에 의해 영납되고, 그 행상의 근거가 된다는 것인가?
[수의] 행상은 촉의 그것과 지극히 유사할뿐더러 촉에 근거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는 낙 등의 수와 상응하기 때문에, 혹은 능히 낙 등의 수를 인기하여 낳기 때문에 ‘순수’라고 이름하였다.
곧 이와 같은 촉을 모두 합하면 열여섯 가지의 종류가 된다.13)
10) 수(受)에 대하여
① 6수와 신(身)ㆍ심수(心受)
이미 촉의 상에 대해 분별하였다.
‘수’의 상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즉 觸)으로부터 6수(受)가 생겨나니,
다섯은 신(身)에 속하고, 나머지는 심(心)에 속한다.
이러한 심수는 다시 열여덟 가지가 되는데
의근행(意近行)이 다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앞에서 설한 6촉으로부터 6수가 생겨나니, 말하자면 안촉에서 생겨난 수[眼觸所生受] 내지 의촉에서 생겨난 수[意觸所生受]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6수는 종합되어 두 가지가 되는데, 첫째가 신수(身受)이며, 둘째가 심수(心受)이다.
즉 이러한 6수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를 설하여 신수라고 하였으니, 색근(色根)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의촉에서 생겨난 ‘수’를 설하여 심수라고 하였으니, 다만 마음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② 심수―18의근행(意近行)
앞에서 설한 하나의 심수(心受)는 의근행(意近行)의 차이로 말미암아 다시 나누어져 열여덟 가지가 된다.14)
무엇을 일러 18의근행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희(喜)ㆍ우(憂)ㆍ사(捨) 각각에 대한 여섯 가지의 근행을 말한다.
이것은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열여덟 가지로 설정된 것인가?
세 가지 영납(領納)은 오로지 의(意)와 상응하며, 경계대상에 차이(즉 6境)가 있기 때문에 열여덟 가지가 된 것이다.
즉 하나의 수가 그 자체로서 의식과 상응하고 경계대상을 달리하여 여섯 가지가 되는 것은 아니니, [희ㆍ우ㆍ사라는] 영납이 다르기 때문이다.15)
의근행이란 명칭은 어떠한 뜻에 근거한 것인가?
희 등이 세력을 갖고 능히 근연(近緣)이 되어 의(意,즉 7心界의 意地)로 하여금 경계대상으로 자주 유행(遊行)하게 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만약 ‘희 등이 의를 근연으로 삼아 온갖 경계대상으로 자주 유행하기 때문에 [의근행이라 한다]’고 설한다면,16) 상(想) 등도 역시 이러한 [의근행이라는] 명칭을 획득해야 할 것이니, [그것 역시] ‘의’와 상응하고 ‘의’로 말미암아 [경계대상으로] 유행하기 때문이다.
만약 오로지 의지(意地)에만 의근행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어찌 경에 위배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안근이 색을 보고 나서 희수(喜受)에 수순하는 색에 대해 ‘희’의 근행을 일으킨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설과 상위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이는 안식에 근거하여 부정관(不淨觀)을 인기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이러한 부정관은 오로지 의지(意地)에 포섭될 뿐이다.
즉 계경에서는 말하기를,
“안근이 색을 보고 나서 부정(不淨)을 관찰함에 따라 구족하여 안주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앞의 경설) 역시 이와 같은 것으로, 5식신에 근거하여 인기된 의지는 희 등의 근행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희 등을 근연으로 하여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설하였던 것으로,
그 경에서는
‘안근이 색을 보고 나서……(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의근행은 5식에 의해 인기된 의식과 상응하는 것으로, 이에 대해 힐난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신수(身受)는 의근행이 되지 않는 것인가?
의근행과 동류의 법[同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의근행은 오로지 의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근(近)’이라 이름하였으며, 3세[법] 등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경계를 분별하기 때문에 ‘행(行)’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나 일체의 신수는 이러한 사실과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의근(意近)이 아니며, 역시 ‘행’이라고도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17)
어찌 신수도 역시 이러한 상을 갖는다고 하지 않겠는가?
즉 신수가 색 등의 경계대상을 영납하고 나서 의식(意識)이 수행(隨行)하는 것으로, 신수의 힘으로 말미암아 의식은 경계 대상으로 자주 유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역시 그렇지 않으니, 이미 [신수의] 상에 대해 논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모든 신수는 의식에 근거하지 않을뿐더러 무분별이기 때문이다.18)
[다시 말해] 그것은 능히 경계대상의 공덕(선오)과 과실(오)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의 세력이 의지(意地)로 하여금 경계대상으로 자주 유행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이니, 말하자면 신수 후에 결정적으로 의식이 존재하여 속생(續生)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의수(意受,즉 심수)는 반드시 의식과 동시에 존재하니, 그래서 오로지 의수만을 의근행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못 보는 등의 생류도 비록 ‘보고 나서[見已]……’ 내지는 ‘감촉하고 나서[觸已]……’라고 하는 사실은 없을지라도 근행을 갖기 때문에 [신수는 의근행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제3정려에 존재하는 의지(意地)의 낙근(樂根) 역시 마땅히 의근행 중에 포섭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초계(初界,즉 욕계)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의 경계대상에] 집중하여 머물기[凝滯] 때문이다.
이를테면 욕계 중에는 의지의 낙근(즉 의식과 상응하는 낙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제3정려에 존재할지라도 의근행으로 설정하지 않는 것이다.19)
또한 그러한 [제3정려]지의 낙근은 [하나의] 경계대상에 집중하여 머무는 것이지만, 경계대상으로 근행(近行)하고 자주 옮겨 다녀[推移] (다시 말해 희 등을 근연으로 하여 자주 경계대상으로 유행하여) 하나의 소연에 머물지 않을 때 비로소 ‘행’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낙근과] 대응하는 고근(苦根)에 포섭되는 의근행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0)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사(捨)의 의근행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 것이니, 이에 대응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니, 우(憂)와 희(喜)가 바로 ‘사’에 대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제3정려에 존재하는 의지의 낙근은 자류인 근본지(根本地)의 사근(捨根)과 대응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낙근을 의근행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21)
그렇지만 근분지(近分地) 등에는 ‘사’ 등의 근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과실이 없으니, 초계(初界) 중에는 동일한 지(地,욕계 근분지)로서 대응하는 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혹은 또한 있을 수 있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근분지의] 의지(意地)의 사근(捨根) 등에는 동일한 지(地)로서 적대되는 법이 있을 수 있지만, 의지의 낙근에는 결정코 동일한 지로서 적대되는 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사(捨)의 의근행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
③ 18의근행의 계계(界繫)분별과 소연
온갖 의근행 중의 몇 가지가 욕계계(繫)이며, 욕계 의근행에는 몇 가지 소연이 있는 것인가?
색계와 무색계에 대한 물음도 역시 이와 같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욕계계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여덟 가지이며
색계와 상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두 가지와 세 가지이다.
[색계의] 두 정(定)의 계(繫)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열두 가지이고
여덟 가지는 자계(自界)를, 두 가지는 무색계를 소연으로 하며
뒤의 두 정의 계와, 욕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여섯 가지이고
네 가지는 자계를, 한 가지는 상계를 소연으로 한다.
무색계의 첫 번째 근분(近分)의 계(繫)와,
색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네 가지이며, 자계는 한 가지를
네 가지 근본지와 [위의] 세 변지(邊地)에서는
오로지 자신의 경계 한 가지만을 소연으로 한다.
논하여 말하겠다.
욕계에 계속(繫屬)되는 의근행은 열여덟 가지 모두이며,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의 수도 역시 그러하다.
[몸은 욕계에 있으면서] 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은 오로지 열두 가지로서, 향ㆍ미의 여섯 가지를 제외한 그것이니, 거기에는 그러한 경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2)
무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은 오로지 세 가지만이 있을 수 있으니, 거기에는 색 등의 다섯 가지 소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23)
그리고 불계(不繫)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의근행도 역시 오로지 세 가지 뿐이다.
욕계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색계계(繫)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초정려와 제2정려에는 오로지 열두 가지 의근행만이 있으니, 이를테면 여섯 가지 우수(憂受)을 제외한 그것이다.
만약 소연에 대해 설해 볼 것 같으면, 거기에는 결정코 염오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하지(下地,즉 욕계)를 경계로 삼을 경우 선을 소연으로 하는데,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의근행도 역시 열두 가지가 있다.24)
그리고 향ㆍ미의 네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여덟 가지 의근행은 자계(自界,즉 색계)를 소연으로 삼으며, 두 가지는 무색계를 소연으로 삼으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25) 나아가 불계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도 역시 오로지 두 가지 종류뿐이다.
제3정려와 제4정려에서는 오로지 여섯 가지의 의근행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사수(捨受)의 그것이다. 그
리고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선의 의근행에도 역시 모두 여섯 가지가 있을 수 있으며, 향ㆍ미의 두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는 자계(즉 색계)의 소연이 되며, 한 가지는 무색계의 소연이 되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나아가 불계의 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도 역시 오로지 한 가지 종류뿐이다.
이상 색계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제 마땅히 무색계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공무변처(空無邊處)의 근분(近分)에는 오로지 네 가지 종류의 의근행만이 있을 뿐이니, 이를테면 다만 색ㆍ성ㆍ촉ㆍ법을 소연으로 삼는 사(捨)의 의근행이 바로 그것이다.26)
그리고 제4정려를 소연으로 삼는 경우에도 역시 네 가지 종류를 모두 갖추고 있는데, 이것은 개별적인 소연이 있다고 인정하는 자에 따라 설한 경우이다.27)
그러나 만약 그러한 지(地)에서는 오로지 하지를 전체적으로 소연으로 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다만 그것이 뒤섞인 것을 소연[雜緣]으로 하는 법근행 한 가지만이 있을 뿐이다.
또한 무색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도 오로지 한 가지뿐이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불계법을 소연으로 삼는 것도 역시 오로지 한 가지 종류뿐이다.
나아가 [무색계의] 네 가지 근본지와 위의 세 변지(邊地,식무변처 이상의 3지의 近分)에는 오로지 한 가지 [의근행]만 존재할 뿐이니, 이를테면 법근행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다만 자지의 경계만을 소연으로 삼으니, 무색계의 근본지에서는 하지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며, 그러한 위의 세 변지에서는 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하지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뒤(본론 제38권 ‘4무색정’)에서 마땅히 분별하는 바와 같다. 그리고 불계의 법을 소연으로 하는 것도 역시 오로지 한 가지 종류뿐이다.
④ 18의근행의 유루ㆍ무루, 성취ㆍ획득에 관한 분별
108느낌 | |||
36느낌[36도] | |||
18느낌[18의행] | |||
과거의 | 눈의 | 기쁨 | 탐착에 의지한 |
탐착을 여읜 | |||
근심 | 탐착에 의지한 | ||
탐착을 여읜 | |||
평정 | 탐착에 의지한 | ||
탐착을 여읜 | |||
귀의 | |||
코의 | |||
혀의 | |||
몸의 | |||
마음의 | |||
미래의 | |||
현재의 |
잡아함경_485. 우다이경, 중아함경_163. 분별육처경(分別六處經)
온갖 의근행은 무루와도 통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열여덟 가지는 오로지 유루일 뿐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의근행으로서 무루와 통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근행은 존재[有]를 증장시키기 때문으로, 무루의 제법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근행은 유정이라면 모두 갖는 것이지만, 무루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다시 말해 모두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근행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어떤 이는 설하기를,
“성도(聖道,즉 무루)는 애써 노력하지 않고서 자연적[任運]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무상계(無相界)에 수순하기 때문에 근행의 체(體)가 아니다. 즉 근행과 이러한 [성도의] 체는 서로 반대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누가 몇 가지의 의근행을 성취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색계 선심을 획득하지 않았다면,
욕계의 일체의 근행과, 초ㆍ제2정려의 여덟 가지(미ㆍ향을 제외한 네 가지 경계의 喜와 捨)와, 제3ㆍ제4정려의 네 가지(捨)와, 무색계의 한 가지(法)를 성취하는데,
성취한 상계(上界)의 의근행은 모두 하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지 않으니, 오로지 염오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미 색계의 선심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았다면,28)
욕계의 일체 의근행과 초정려의 열 가지 의근행을 성취한다.
즉 사(捨)에 여섯 가지 종류를 갖추었으니,
미지지(未至地) 중의 선심은 향ㆍ미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며,
희(喜)에는 오로지 네 가지만이 존재하니,
그것은 다만 염오한 것이어서 하지의 경계(즉 향ㆍ미)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어찌 의근행은 안식 등에 의해 인기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에게는 이미 비(鼻)ㆍ설(舌) 두 가지 식이 존재하지 않으니, 마땅히 향ㆍ미를 소연으로 하는 근행도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책망은 옳지 않으니,
[만약 의근행이 안식 등에 의해 인기된다고 한다면]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이거나 벙어리 등의 존재[自性]와 태어나는 찰나[生念]에 있는 자와 선정 중에 있는 자는 모두 마땅히 어떠한 경우에도 색 등의 근행을 갖는 일이 없어야 하기 때문으로, 일체의 의근행은 5식에 의해 인기되어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색계의 선심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아직 욕탐을 떠나지 않은 이는] 나아가 제2정려의 여덟 가지 근행(즉 4喜와 4捨)을 성취하며,
제3ㆍ제4정려와 무색계의 경우는 앞에서 설한 바(욕계에 태어난 자로서 아직 색계 선심을 획득하지 않은 경우)와 같다.
이미 욕탐을 떠났을지라도 만약 아직 제2정려의 선심을 획득하지 않은 자라면, 그는 욕계와 초정려의 열두 가지 근행을 성취하니, 이를테면 여섯 가지 우(憂)를 제외한 그것이다.
그리고 제2정려 등의 경우에 대해서는 모두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즉 만약 이미 제2정려의 선심을 획득하였을지라도 아직 초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았다면, 제2정려의 열 가지 근행을 성취한다.
이를테면 ‘희’에는 다만 네 가지가 존재하니, 그것은 오로지 염오한 것이어서 [하지의 경계(즉 향ㆍ미)를 소연으로 삼지 않기] 때문이며,
‘사’에 여섯 가지 종류를 갖추었으니, 이미 그것(즉 제2정려)의 근분(近分)의 선심을 획득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의 [제3ㆍ제4정려와 무색계의] 경우는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그리고 이 같은 도리에 준하여 그 밖의 경우에 대해서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색계에 태어났다면 오로지 욕계의 사(捨)의 법근행(法近行) 한 가지만을 성취할 것이니, 이를테면 통과심(通果心)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29)
이러한 온갖 의근행의 획득(獲得)관계는 어떠한가?
이를테면 욕탐을 떠난 자와 앞의 여덟 가지 무간도(無間道)와 여덟 가지 해탈도(解脫道)에서는 초정려 근분지(近分地) 중의 여섯 가지 사(捨)근행을 획득한다.
제9무간도와 해탈도 중에서는 욕계 통과심과 구기하는 법(즉 제6 법경)의 사근행을 획득하고,
초정려의 열두 가지 근행을 획득하는데, 여기서 초정려라는 말은 그 권속을 함께 포섭한다.
이러한 이치에 따라 상지(上地)의 염오를 떠난 자의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앞의 경우와는] 차별되는 점이 있다.
이를테면 제4정려의 탐을 떠났을 때의 제9무간도와 해탈도에서는 필시 자지(自地)와 상지의 통과심과 구기하는 법의 사근행을 획득하지 않으며, 공무변처 등의 온갖 지의 탐을 떠났을 때의 일체의 무간도와 해탈도에서는 오로지 법의 사근행 한 가지만을 획득한다.
그리고 무학을 획득하였을 때에는 욕계와 초ㆍ제2정려의 열두 가지 근행과,30) 제3ㆍ제4정려의 여섯 가지 사근행, 공무변처의 네 가지 사근행, 상지 각각의 법의 사근행 한 가지를 획득한다.
나아가 태어나는 단계[受生位]의 경우, 상지로부터 몰하여 하지에 태어날 때에는 해당하는 지에 존재하는 근행을 획득하고, 온갖 정려지에 태어날 때에는 하지의 법의 사근행도 역시 함께 획득한다.
또한 ‘희’ 등의 18의근행은 탐기(耽嗜)와 출리(出離)의 소의로서 차별되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서른여섯 가지의 사구(師句)가 된다”고 설하였다.31)
즉 이러한 차별의 말씀[句]은 능히 대사(大師)를 나타내는 것으로, 바로 스승의 표식이기 때문에 ‘사구(śāstṛ pada)’라고 이름하였다.
다시 말해 이와 같은 온갖 말씀은 오로지 깨달은 자[佛]이신 위대한 스승[大師]께서만 능히 알고, 능히 설할 수 있으니, 다른 이에게는 그러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탐기의 소의란 이를테면 온갖 염오함의 수(受)를 말하며,
출리의 소의란 이를테면 온갖 선(善)의 ‘수’를 말하는 것으로,
무부무기는 선과 염오함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두 가지 중 어느 하나에 포섭된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그래서 별도로 설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서른여섯 가지의 근행을 [3]계(界) [9]지(地)에 따라 규정하면 [이러하다].
욕계 중에는 서른여섯 가지를 모두 갖추고 있다.
초정려와 제2정려에는 오로지 스무 가지만이 존재하니, 이를테면 탐기의 소의가 되는 것이 여덟 가지이며, 출리의 소의가 되는 것이 열두 가지이다.
제3ㆍ제4정려에는 오로지 열 가지만이 존재하니, 탐기의 소의 네 가지와 출리의 소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공무변처의 근분지(近分地)의 경우, 만약 별연(別緣)으로 [존재한다고] 인정한다면 다섯 가지가 존재하니, 탐기의 소의 한 가지와 출리의 소의 네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로지 총연(總緣)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다만 두 가지 종류만 존재하니, 탐기의 소의 한 가지와 출리의 소의 한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무색계의 근본지(根本地)와 위의 세 변지(邊地)에는 각기 두 가지만 존재하니,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상은 [3]계 [9]지에 근거한 것이다.
[서른여섯 가지의 근행을] 소연에 따라 규정하면 [이러하다].
욕계에서 욕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서른여섯 가지 모두이며, 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하는 것은 오로지 스물네 가지뿐이니, 향ㆍ미를 반연하는 두 가지 소의(탐기와 출리)의 각기 여섯 가지를 제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32)
무색계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은 오로지 여섯 가지 종류이니, 두 가지 소의에 따른 법근행의 각기 세 가지가 그것이다. 또한 불계(不繫)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것도 역시 오로지 이러한 여섯 가지이다.
이상과 같은 도리에 따라 색ㆍ무색계에서 [각각의] 경계를 소연으로 삼는 근행의 차별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⑤ 무명ㆍ명색ㆍ촉ㆍ수 이외 다른 지(支)에 대해 설하지 않는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그 밖의 나머지 존재 지분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 밖의 지(支)는 이미 설하였거나 마땅히 설할 것이기 때문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12지분 중] 그 밖의 나머지 존재 지분에 대해서는 이미 설한 것도 있고, 혹은 앞으로 마땅히 설할 것도 있기 때문에 여기서 논설하지 않는 것이니,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33)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다시 이러한 게송을 짓게 되었던가?
다음 본송을 널리 해석하는데 따른 의심을 막기 위해서였다.
즉 다음의 본송 중에서 번뇌 등을 설함에 따라 이에 대해 이와 같은 의심(어떠한 까닭에서 이러한 존재 지분에 대해서는 설하지 않았던가? 하는 의심)을 낳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앞에서 이미 네 가지 지분(무명ㆍ명색ㆍ촉ㆍ수)의 뜻을 널리 밝혔고, 그 밖의 나머지 존재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마땅히 널리 해석할 것이지만, 다음의 송문(頌文)에서 혹(惑)ㆍ업(業)ㆍ사(事)에 근거하여 비유로써 열두 가지 존재의 지분을 전체적으로 밝히려고 하였기 때문에 궤범사(軌範師)는 다시 이러한 게송을 짓게 되었던 것이다.
11) 비유(譬喩)에 의한 혹(惑)ㆍ업(業)ㆍ사(事)의 관계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듯이 열두 가지 존재지분[有支]은 오로지 세 가지에 간략히 포섭될 수 있으니,34)
이를테면 혹(惑)ㆍ업(業)ㆍ사(事)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의 작용에는 차별이 있을 것이니, 그것을 비유로 나타내면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여기서 번뇌를 설하자면, 그것은
종자와 같고, 또한 용과 같으며
풀의 뿌리나 나무의 줄기와 같고
아울러 겨가 쌀을 싸고 있는 것과 같다.
업은 겨에 싸여있는 쌀과 같고
약초와 같고 꽃과 같으며
온갖 이숙의 결과인 사(事)는
익은 음식물과 같다.
논하여 말하겠다.
어찌하여 이 세 가지를 종자 등과 서로 유사하다고 한 것인가?35)
이를테면 종자로부터 싹과 잎 등이 생겨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로부터 번뇌와 ‘업’과 ‘사’가 생겨난다.
용이 못을 지키면 물이 항상 마르지 않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번뇌가 상속을 획득하여 생의 못[生池]을 지키면 혹ㆍ업ㆍ사가 끝없이 흘러가게 된다.
풀의 뿌리를 뽑지 않으면 싹을 베어도 베어도 다시 생겨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聖道)로써 번뇌의 뿌리를 뽑아내지 않으면 생의 모종은 끊어도 끊어도 다시 일어나게 된다.
나무의 줄기로부터 빈번히 가지와 꽃과 열매가 생겨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혹(惑,즉 번뇌)으로부터 ‘혹’과 ‘업’과 ‘사’가 자꾸 자꾸 일어난다.
겨가 쌀을 싸고 있어 능히 싹 등을 낳을 수 있지만, 쌀 자체로서는 능히 싹 등을 낳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번뇌가 업을 싸고 있어 능히 후유(後有)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니, 업 자체로서는 능히 초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이상 惑 즉 번뇌의 비유)
또한 쌀이 겨에 싸여 있어 능히 싹 등을 낳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업도 번뇌에 싸여 있어 능히 이숙을 초래한다.
온갖 약초가 결과를 맺으면 그것을 후변(後邊, 병의 최후)이라고 하듯이,
업도 결과를 맺으면 다시 이숙의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
꽃은 과실에 대해 그 생기의 직접적인 원인[近因]이 되듯이,
업도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능히 이숙의 결과를 낳는다.(이상 업의 비유)
익은 음식물은 마땅히 수용되는 것일 뿐 전생(轉生)하여 또 다른 음식물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숙의 결과인 ‘사(事)’도 이미 성숙되었으면 능히 또 다른 생의 이숙을 초래할 수 없다.
만약 모든 이숙과가 다시 또 다른 생을 초래한다면, 또 다른 생은 다시 또 다른 생을 초래하게 되어 마땅히 해탈도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이상 事 즉 이숙과의 비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