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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참수행의 핵심 '37보리분법' -1편-
[일러두기]
1. 스크립트를 문장 단위로 정리한 것입니다.
2. 주제를 고려하여 목차를 붙였습니다.
실참수행의 핵심 '37보리분법' -1편-, 수행의 목적과 방법
그래서 37 조도품도 그와 같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똑같은 내용들이 들어있긴 한데 이름을 달리한 것은 그 각각이 각각의 카테고리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선지 얘기를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부지 37 보리 분법 아님, 조도품에 대한 걸 다 알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37 보리 분법에서 꼭 필요한 부분들은 당연히 있습니다.
맨 처음에 4년 천호죠 하나로 줄이면 뭐가 돼요?
사띠죠 염치입니다. 사띠.
그 다음에 오력이나 이런 거에서는 뭐가 주가 됩니까?
미리 아주 아까도 얘기했죠.
아까 대반일반경에 그런 얘기를 했죠.
노력이 일반으로 이끈다 하는데, 해탈의 나아가게 한다는 얘긴데 어떻게 하기 때문에 노력이 해탈로 나아가는지를 알면 됩니다.
그리고 사띠가 어떻게 작용을 해야만이 헤탈로 나아가는지를 알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은 이렇게 그 부분에서 7가지로 나누시는 부분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들만 명확하게 이해를 하면 그 부분 전체를 어느 정도는 파악이 되어 나가는데 딱 하나 안 되는게 있습니다.
뭘까?
이거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 부분을 통과하지 못하면 다음이 안 돼 로켓 발사하듯이 일단 분리되어야만이 더 올라가질 수, 또 이단 분리가 되어지고 3단 분리가 되듯이 칠각지 부분은 어떤 경우든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나아가야 됩니다.
그래서 칠각지를 각지라고 한 이유가 있습니다.
[명칭, 보리분법과 조도법]
명칭을 먼저 한번 볼게요.
보리밥이 맞아요? 저도법이 맞아요?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법을 도와주는 건데 각질이라고 생각을 하면은 보리 문법이 맞습니다.
근데 각지가 아니고 그것들이 깨달음을 돕는데 필수적으로 작용하는 요소라고 생각할 것 같으면은 조도품이 맞습니다.
어떤게 맞을까요.
사실은 중요한 부분은 아닌데 아마 37 보리 분법이나 조도품을 하다가 보면은 이게 어떤 작용들을 하는가 하는 것들을 알면은이 용어가 틀렸구나 하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수술을 아마 이해를 하게 됩니다.
보통 보면은 보디를 따와서 보리라고 하고, 니빠 나를 떠와서 열반이라고 하고, 보살도 보디 사타였다 와서 보살이라고 그냥 입력해 가지고 이렇게 쓰는 경우들이 허다한데, 부처님이 거기에 맞는 용어들을 쓸 때는 그 어떤 분명히 구분을 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노력 부분도 위리야가 있고 dt가 있고 또 다른 용어들이 있고 각각 다 틀립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들도 여러분들이 어차피 초기 경전을 공부하고 빨리를 공부해 나가면 조금씩 이해를 해나갈 기가 좀 수월해질 겁니다.
[왜 수행하는가]
여기서 하나 좀 질문을 좀 드릴게요.
왜 수행하려고 합니까?
만족하고 즐기기요?
만족하고 즐기려면 수행을 안 해도 꼭 안 해도 됩니다.
욕심을 저 말입니까?
그거는 본인이 판단을 해 보시죠?
예.
나중에 수액 문답할 때 뒤에 그 질문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은 수행을 꼭 해야 되는 겁니까?
뭘 얻기 위해서 사설은 어쨌든 죽은 이유가 되니까 만약 윤회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것조차도 의미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근데 왜 그러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행을 하라고 할까 하는 부분입니다.
그게 이제 오늘 그 서두 부분에 들어가는 그 프린트 물에 나와 있는 부분입니다.
근데 스님이 봤을 때는 수행을 하는 목적은 해탈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근데 해탈에 이르지 못하면 어떻게 해야 될까?
내가 아무리 열심히 수행을 했는데 이생에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
[수행의 이익]
그러면 어떤 이익이 있어서 내가 수행을 했을까?
그것도 일리는 있습니다.
처음에 스님이 그 태국에 지금부터 한 35년 전에 갔었는데 그때부터 쭉 있었는데 그때 들어가서 처음 느꼈던 의문이 그거였습니다.
왜 수행해야 할까?
하는 실제 수행을 해보면 태국 스님보다도 제가 더 훨씬 잘했어요.
더 열심히 앉아 있었고 오래도록 앉아 있었고, 자세도 흐트러짐 없이 잘 견뎌 나가고 근데 과연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 태국 스님들 마음보다 내 마음이 온화했을까?
그렇지는 말했던 것같아.
오히려 스님 마음은 그분들보다도 분노에 더 휩싸여 있었고, 또 하고자 하는 욕심에도 휩싸여 있을지 탐진치가 조금이라도 엷어진 상태에서 수행을 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수행에서 얻어지는 이익은 그 태국 스님들이 다 아란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범부중생이 있는 사람도 있고 또 조금 더 깨달음의 길에 조금 더 다가산 사람도 있고 깨달은 사람들도 있겠죠.
그분들은 한결같이 부처님과 같이 살려고 했다는 부처님이 사는 길을 그대로 흉내라도 내면서 가려고 했다는 구나 하고 빨리 그걸 제어를 하고 다음 것으로 넘어갈 수가 있다는 그 얘기는 뭐냐면, 수행하면서 얻어지는 이익이 틀림없이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수행을 해 나가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다른 예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스님 목소리가 들립니까?
아무 생각하지 말고 스님 목소리만 그냥 귀담아서 한번 들어 보십시오.
어떤 효과들이 있을까?
그냥 일반적으로 들었을 때보다도 훨씬 많은 효과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냥 듣기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정확하게 그것을 잘 기억을 해놔야 그래서 그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것들이 있을 것 같으면 가슴에 탁 담아 두게 됩니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그게 1분이라 하더라도 1분 동안 그런 작용을 했다고 칩시다.
근데 어떤 사람들은 스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생각에 딱 입사했다, 그리고 뭔가 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러면 스님 말을 듣기는 했는데 그 내용이 자기 것이 못 돼 버리는 거예요.
그리고 그 1분 동안은 틀림없이 자기 생각을 하거나 아니면 뭘 하거나 했을 때는 알아차림이 없었기 때문에 선한 마음이 일어나지는 잘 안 한다는 일분인데 수행을 하고 있을 때와 하지 않을 때는 그만큼 차이가 나 버립니다.
그 부처님 밀대기를 보면은 보통 싯다르타 태자의 탄생부터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대담하다 불기 위해서는 과거 전생에 십바라밀을 쌓은 거부터 먼저 항상 얘기가 되고 나서 그 다음 이생에서 부처님 일대기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쉽게 얘기를 하면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선한 마음으로 마음이 많이 기울어져 있지 않으면 수행을 지속해 나가지도 못하고 깨달음이 이르는 것은 힘들다 하는 얘기, 또 바람 일들을 쭉 해 나가지 못한 상태에서 수행을 하면 수행은 계단과 같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한 계단 오르고 그 다음에 또 한 단계가 있고 그래서 그 단계를 넘어가는데, 굉장히 힘이 든다는 그리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걸 넘지 못하고 그냥 포기를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수행은 하고 싶은데 그러면 수행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뭘까?
37 보리 분법을 배우려고 하는 것은 실제 수행에서 깨달음에 이르든지 아니면 좀 더 많은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도록 만들기 위해서 수행을 할 거란 말입니다.
그걸 도와주는 것들이 뭐가 있을 거 아닌가?
바라밀은 수행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려주는 데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바라밀이 완성이 되어야만이 수행에서 깨달음에 이르기는 해주지만 그 바라밀이 수행의 단계를 박차서 다음 단계로 올려주는 데는 한계를 지닌다는 뜻입니다.
보통 게를 잘 지킨다 그러면 마음이 좀 더 자애로운 마음이 일어나지고 또 선한 마음들이 더욱더 지속적으로 일어나질 겁니다.
그래서 그게 수행안내는 도움을 주기는 합니다. 초기 단계지 나중에 한참 진행이 되고 나서는 그게 큰 도움을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단계 단계를 넘어가도록 하는데는 그 단계에 맞는 것들이 틀림없이 필요를 하게 됩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삼매 알아차림이 사띠가 분명하게 잘 됐을 대상과 잘 일치를 시키고 있는데 아주 고요해지고 편안해집니다.
삼매 탁 들고 싶은데 안 들어가져요?
뭐가 부족해서 그럴까요?
많이 연습해 가지고 탁 들어갈 때를 알면 탁 들어가지는데 보통 겁이 나서 거기서 들어가지질 못합니다.
예를 들면 잠자리에 들 때 마지막 숨을 쉰게 뭔지 아는 사람 있어요.
잠에서 깨어날 때 무슨 숨을 쉬는지 아는 사람 있어요.
평소에 그걸 안 하니까 삼매에도 1단계 삼매에서 그냥 계속적으로 머물다가 평온하고 고유한 상태면 경험하고 푹 들어가지질 못하는 걸 어쩌다 한번 푹 들어갔다 들어갔는데,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탁 깨어나져 버리는 조그만한 자극인데도 쉽게 말하면 개미귀가하는 소리라도 그게 아주 크게 들려서 그게 자극이 돼서 탁 삼매가 안 그러고 싶은데 그래서 조금 더 자유자재로 좀 있다가 그 삼매에 힘을 좀 받아서 사띠 힘을 더 키우고 싶은데 그게 안 되는 거야.
그건 왜 그럴까?
외부적인 자극들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들이 평상시 때 훈련이 안 되면 그냥 금방 반응을 해버 아주 크게 그와 같이 수행에는 수행을 도와주는 각각의 인자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잘 평상시 때 훈련들을 해 나와야만이 수행을 해나가는데 조금 더 여부하게 진행을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왜 수행해야 할까]
그래서 다시 돌아서 물어보겠습니다.
왜 수행해야 할까? 왜 수행을 해야 할까?
이러기 위해서는 하나 나와 있습니다.
그 하나가 뭐냐는 마음의 청정도 맞습니다.
선한 마음들을 지속적으로 일으키기 위한 겁니다.
경전 곳곳에 그런게 있죠 밥을 먹을 때도 수행을 하고, 심지어 똥을 쌀 때도 수행을 하고, 머리를 한번 만질 때도 수행을 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수행을 하면 적어도 선한 마음을 유지를 할 수가 있다는, 그 시간 동안 나쁜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끔 방어를 해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평상시대 수행을 쭉 해 나오면은 본인에게도 서로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본인에게는 많은 이익이 근데 수행을 해보신 분들은 아마 경험들을 했을 겁니다.
잘 안 돼요.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다가도 다시 또 퇴보하고 또 다시 좀 하려고 하다 보면 또 퇴보하고 계속적으로 반복을 하다가 어떤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그러다가 그냥 끝나버립니다.
물론 출간 스님들한테 오면은 그런 얘기를 하겠죠.
그럴 때는 집중 수행을 좀 해라 그래서 힘을 좀 길러라 하고, 퇴보하는게 전에는 하루 지나서 다시 또 돌아갔으면 이제는 한 일주일 간다고 칩시다.
곧 퇴보 안 하는게 아니라 다시 또 탭으로 한다는 거예요.
안 하고 싶은데 그래서 적어도수록 내가 이생에서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래도 선한 마음 지속적으로 일으키면서 잘 살아가려고 하는데 그게 안 된다는 거야.
뭐가 부족해서 그럴까?
뭐가 부족해서 그래요.
신심이 다 해결해 주지는 않습니다.
신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단계가 되고 나면은 이제 그때는 안 하겠죠.
그래서 그런 확신으로 바뀔 때까지는 적어도 대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평정한 마음들을 유지할 단계가 되어 있어야만이 확신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그래서 오로지 이길 웬 다른 길이었다는 마음이 딱 확신으로 자리잡게 될 때 그때야만이 퇴보를 안하기는 됩니다.
그래서 신심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는 37 조도품 에 가장 핵심이 뭘까?
사띠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좌지우지를 합니다.
그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인식하지 않으면 수행에서 미끄러지지 않는 퇴보하지 않는 단계로 넘어갈 방법은 없습니다.
근데 사띠에는 힘들이 차이가 있죠.
힘들의 차이가 틀린 것이 존재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면서 한 1시간을 앉아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망상 때문에 아니면 또 다른 여부적인 요인 때문에 10분도 못한다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힘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힘을 길러주기 위한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 번째 대상을 먼저 대상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 대상이 명확하지 않으면 사띠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37 보리분법의 맨 처음에 놓은게 그 대상에 대한 4가지 부분을 얘기를 적어도 수행을 하려면 사띠를 하려면 대상이 뭔지를 알아야만이 그 대상의마음을 기울일까 합니다.
그 다음에 대상이 뭔지를 알아차리고 나면 그 다음에 필요한 것들이 틀린 것이 존재를 합니다. 그것들을 끊임없이 쫓아가야 되기 때문에 왜냐하면 금방금방 변하거든 금방금방 달아나려고 합니다.
마음은 그걸 붙잡으려도 해도 안 되고 그걸 밀쳐내려고 해도 안 되고 그냥 있는 그대로 삭제를 해야 되는데 힘이 없으면 그게 안 되는 거야.
그래서 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수행하는 자들에게는 힘을 일부러 각각의 수행체에 가면 일부러 딱 정해놓고 그걸 하도록 강요합니다.
마실 간다 1시간 자선에 서면 1시간 기행을 하도록 합니다.
딱 균형을 맞추도록 합니다.
또 어떤 곳에 갈 것 같으면은 자선 시간 경영시간을 딱 정해놓고 그 패턴대로 쭉 하도록 합니다.
서로 그게 마음에 대한 관찰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동일하게 그렇게 제 공을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면은, 마음은 대상으로부터 벗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일부러 다 각각의 규정을 만들어서 그것에 따라 하도록 그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수행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게 이 두 가지입니다.
대상을 사태하는 것,
그리고 그 사태한 대상들이 끊임없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힘이 본인에게 생기도록 하는 것,
그 두 가지가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아까 대념 마빡이 닛빠나수다.
부분을 명상 시간에 하고 있던데 그 부분을 잠깐 좀 얘기를 하겠습니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특성이 있습니다.
수학화 또 바카와 또 담보 그 다음에 산티티코 아칼리코 a빠 씻고 오빠 나 있고 바짝 땅 윗뇨이띠 그렇게 얘기 합니다.
그거는 여러분들 아시죠?
법을 설하는데 부처님은 차별 없이 모든 것을 펼쳐나 보여주는 겁니다.
근데 그 펼쳐 놔 준 건데 그것들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했느냐 하면, 첫 번째 산 띠띠꾸라고 스스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지금 스님을 보고 있습니다.
근데 끼로는 스님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습니다.
어디에다 삿대를 해야 될까요?
귀에다 해야 되겠죠.
그러면 귀에다가 삽질을 정확하게 한 사람들은 스님이 보일 거야. 안 보일까요 안 보입니까?
근데 여러분들은 스님 보이잖아
그만큼 마음은기에 있다가도 눈으로 가고 또 생각으로도 가고 왔다 갔다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면은 스스로 체험되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스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니까 분명히 보고 있고 또 다른 자극들도 하고 있을 것인데. 그것은 해 나에게 나타나지 않고 나아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소리밖에 없는 것이 돼 버립니다.
그게 1단계가 됩니다.
스스로 체험되는 1단계 근데 소리가 인식될 때 어떤 식으로 인식되어 질까요?
어떤 사람들은 끼에서 그 소리가 들리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소리가 가슴에서 새겨지면서 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스님이 말하고 있는이 자리까지 마음이 가야만이 그 소리가 들리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어떤게 맞을까요?
스스로 단마에 대해서 체험이 되어지는 사람들은 외부로 향해 있어 가지고는 일단은 안 되겠죠 그럼 스님 말하고 있는이 자리에 내 마음이 거기 뺏겨 있어서는 안 됩니다. 가장 1차적인 것은 소리는 파동으로서 나한테 들리는 겁니다.
그럼 귀에서 뭔가가 들리는 소리가 나야 됩니다.
그래서 이게 아한지 언지 하는 소리가 분명하게 인식이 되어야 됩니다.
근데 그게 계속되어 나가다가 어느 순간에 귀에서 들리는게 아닌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들리는 거예요 그 소리가 웅웅하고 울리기도 하고, 아니면 뭔가 족집게로 톡톡 찌르는 느낌들도 들고 어떨 때는 흡입하는 느낌들도 들고, 왜 이렇게 바뀔까요?
똑같이 체험되는 건데 왜 이렇게 밖에 나갈까요?
여기 있을 때도 삿대가 있었고 여기 있을 때도 사띠가 있는데 어떤게 여러분들 가슴에 많이 남아요?
가슴이 찡하고 맺힐 때가 훨씬 오래가죠 끼어서 들리는 것보다 본인이 수행을 하면서 그것을 스스로 자꾸 체험을 해봐야 됩니다.
그래서 본인이 사띠가 어느 정도의 힘으로 강해져 있구나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스스로 파악을 할 수가 있어요.
[법의 특성 1]
법의 특성 6가지 중에서 첫 번째가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냥 내가 경전상에서 내용들을 확인해 가지고 아 이거는 사성제지 이것은 삼법인이지 이건 팔정도지 그건 아는 것은 아른마리인 거고 그 아르마리가 여러분들을 해탈에 이끌어 주지 못합니다.
그 아랫마리가 여러분들을 좀 더 선한 마음을 지니고 생활을 하도록 만들어 주지는 못한다는 거예요.
그럼 법의 특성 첫 번째가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은 수행을 해야만이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에요.
[법의 특성 2]
그 다음에 두 번 법의 특성 두 번째가 시간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실제 수행을 해보면 시간의 의미는 사실은 별 의미가 없어집니다.
특히 이제 그 수행을 많이 해본 사람들은 자선을 하면은 언제 1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게 후딱 지나가 버립니다.
그런데 사띠는 놓치지 않는 것 같거든 또 어떤 경우는 내가이 정도의 경제는 도달했는데. 그 다음은 경전상으로 분명히이 단계인데 이 단계를 지나야 그다음 단계인데 이게 한참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확 돌파를 하고 얘기하는 것들이 한번에 쭉 치고 넘어갈 때가 있습니다.
남들은 한참 시간이 걸려서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되는데 원형 그러지 않고 그대로 넘어가시게 수행해서 그런 경험을 해보면 대부분 사람들은 더욱더 수행시간을 늘리고 수행을 하려고 하게 됩니다.
수행의 이로움들을 이제 체험을 했기 때문에 법이 시간하고 관계없이 시간을 초월한다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이왕 에는 여러분들이 스님이 가르쳐 주는 대로 수행을 조금 해봐야 됩니다.
이왕 할 것 같으면 수행의 이익을 얻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아 내가이 길로 쭉 가도 무리가 없겠구나, 이 길로 쭉 가더라도 틀림없이 나는 깨달음의 이르겠구나 하는 확신들은 들 수 있도록 돼야 된다는 그 다음에 세 번째가 a 바 씻고라는 뜻입니다.
[수행의 검증]
검증이 가능해야 된답니다.
그 태국 같은 경우에는 각 단계를 검증하는 것들이 아주 면밀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 수행자가 수행을 아주 열심히 하고 굳건하게 앉아 있는데 흐트러짐이 없이 보인다 과연 삼매 들었을까 안 들었을까?
본인은 그 삼매가 자유자재가 되지 않으면 뭘 모릅니다.
대상 분명하기 때문에 대상 문명에서 고요하게 대상을 알아차리고 있는데 삼매인지 아닌지를 모르는 거라고 그래서 검증을 해봅니다.
아주 가느다란 아지랑이 같은 이름 가지고 코를 본다든지 대부분 사람들은 재채기를 하는데 재채기를 안 하거든 손을 요만큼 들어 올리나 봅니다.
그리고 나아버리고 안 내려와요.
질문이 있습니까?
그래서 그런 단계를 거치면 그 단계를 인정해 주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그렇게 만들긴 합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검증을 할까?
내가이 계속 수행을 해야 될지 아닐지 하는 걸 어떤 식으로 검증이 될까요?
어떻게 검증해야 돼요 스님은 안 되고 와서 만날 문답하면서 검증을 해야 될까요?
선생님 여러분들께 없는데 그럼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검증할 수 있도록 온 뒤에 가장 기본적인 거 얘기해 봅시다.
오늘. 예 맞습니다.
일상생활하면서 수행이 시간을 따로 정하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본인이 오늘은 화를 몇 번 냈다, 오늘은 누구하고 좀 안 좋고 언짢은 일들이 있었다 없었다 하는 걸 자꾸 체크를 해봐야 됩니다.
수행을 해보니까 아 그 빈도가 자꾸 줄어든다, 그러면 계속 수행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똑같다 할 것 같으면 수행의 진척이 없다고 보는데 여기서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본인이 화를 내고 있으면서도 사띠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경우 나는 사퇴하고 있어 사띠는 선심수죠 선한 마음이죠.
그러면 사띠를 하고 있으면 선한 마음이 일어나 있을 것 같으면 화가 일어나야 될까요?
일 착각을 사띠를 무조건 알아차리고 있으면 그게 사띠라고 착각을 하면 안 된다는 선한 마음이 지속적으로 일어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사띠입니다.
그러면 선하지 않고 탐진치에 해당되는 것이 얼마만큼 일어났느냐 하는 걸 자꾸 체크를 해보라는 거예요.
가장 좋은 것은 외부적인 자극이 있을 때 대부분 나이든 분들이나 혼자 있을 때는 탐진치가 거의 안 일어납니다.
대부분은 외부적인 자극이 있을 때 탐진치들은 많이 일어납니다.
외부적인 자극이 있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수행하면서 그걸 자꾸 체크해 보면 아 내가 그래도 수행이 조금 더 늘었구나,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예요.
그건 누가 하는 거예요?
본인이 해야.
스님한테 와서 문답을 받더라도 그 이상을 해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 다음에 오빠 나 있고라고 그렇게 하는 관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관심만 있으면 수행은 그리고 법을 듣고 법을 알도록 하는 것은 관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지 뭐 나이가 많다고 아니면 성별이 틀리다고 아니면 어떤 장애를 안고 있다고 못하는 것은 아니다.
불교를 믿든 안 믿든 그거하고는 전혀 관계도 없다는, 마음을 기울여 내가 수행해야만이 그래도이 어려운 삶들을 갖다가 돌파해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고 그걸 거기에 마음을 기울이냐 안 기우냐 기울이지 않으면은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말한 법의 특성은 여기에다가 이제 행자들이 칭찬하는 행자들은 좀 더 깨달음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좀 더 쉽게 해탈에 이르도록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그 사람들은 이길 해라 다시는 미끄러지 않는 삶의 이미 올라선 사람들은이 길만이 길이다 하고 자꾸 이끌어줄 수밖에 없다는 부처님 법의 특성은 그와 같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아무리 교약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법문을 많이 듣고 아무리 내가 뭔가를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 내가 체험 돼지고 그것이 수행되지 않으면 부처님 법은 한쪽 다리를 잃은 사람과 마찬가지다.
특히 이제 여기 계신 분들은 교학적으로도 그렇고 여러 가지 부분들을 많이 갖춘 분들이 참 많습니다.
근데 거기에 만족해 버리면 이번 인생에서 부처님 가르침을 법을 만난 의미가 퇴색해져 버린 거예요 한번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 마스크를 쓰고 있죠.
당분을 감고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한번 해 보십시오
자기가 그것을 사띠 할 수 있을만큼만 그리시고 내쉬고 한번 해 됐습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걸 알겠습니까?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어떤 사람들은 들이쉬는 걸 알아차리고 내쉬는 걸 알아차린 경우들도 있고,
어떤 사람들은 들으실 때 텁텁한 느낌 시원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내실 때 텁텁한 느낌을 받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들이시는 걸 처음부터 끝까지 쭉 따라가고 내쉴 때 내신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쭉 따라가면서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숨을 들으실 때 들이시는게 내가 마음이 들으신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니까 이게 들으시지는구나 하고 알게 되고 내쉴 때도 내시는구나 하고 마음을 내야만이 내시는 걸 내가 알아차리는구나 하고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잡념이 든다든지 아니면 그것을 놓쳐 버렸을 경우는 재배를 합니다.
각각의 성향에 따라서 알아차리는 삭제하는 방법들은 각각 틀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사념처라는 여러분들은 어떤 걸 따라야 될까 어떤 사람들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사람들이 계속 들으시고 내쉬고 알게 됩니까?
어떻게든 들으실 때 시원하네 내쉴 때 답답하네 알고 나눌 수도 있고 모든 사람은 들으시고 내쉬고 하는 걸 아 이게 숨이 좀 앞에 들이시는 것과 지금 들으시는게 숨이 차이가 있구나 하는 분명히 구분해서 하는 경우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
수행을 할 때 착각하는 부분들이 이 부분입니다.
나는 신념처 수행하니까 신념 첫 수행만 해.
나는 수년째 수행하니까 수염 첫 수행만 해.
그래서 각각의 수행체에 가면 그 방법만 가르쳐 줍니다.
근데 처음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것만 해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예요.
각각의 방법으로 사띠가 되어지고 있는데 나머지 세계는 놓쳐버리라는 얘기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어떨 때 그렇게 알아차려지게 될까?
일본 2번 3번 4번 방법을 크게 나눠 가지고 그렇게 알아차려지는 것은 어떨 때 그렇게 알아차리게 지게 될까?
그렇죠 대상이 끄달려 들어가면 숨을 인위적으로 자꾸 조절하게 되고 그렇게 되죠.
그러면 대상을 삭제하는게 문제가 되어야 되니까 아니면 그건 알아차리는 건 어쨌든 마음이 알아차리는 거니까 마음을 가만히 둬 가지고 마음에 아주 평온한 상태가 되도록 만드는게 우선입니까?
그게 웃으니까 수행을 할 때는 어떤 경우든지 대상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가만히 두면 어떤 어떻게 된다고 그랬어요.
큰 것 따라 움직인다고 그랬거든요.
경전 여러분을 많이 읽어 봤잖아요
그것 따라가면 그것들을 마음을 알아차리면 되는 건데 나는 그렇게 안 하고 자꾸 인위적으로 대상을 먼저 찾는 거야.
그래서 수행은 절대 그렇게 하지 마라.
먼저 마음을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되도록 만들고 나서 그러고 나서 대상이 나타나면 그것을 사띠를 하면 돼.
그게 이제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지나면 한 달 뒤에나 여러분들 뵙게 되는데 먼저 숙제를 먼저 하나 내 드리겠습니다.
하루 중에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 있는 그대로입니다.
내가 의도적으로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시간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
우스갯소리 같지만 어느 정도 수행에 대해서 숙달된 스님도 처음에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하루 중에 1분도 못했습니다.
진짜 어려운 겁니다.
경전에도 그런게 있죠.
마음이 번뇌에 쌓이지 않고 고요한 상태에 있으면 내가 걸어가겠다 했는데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는 경전에도 나옵니다.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기 위한 것은 참 힘이 듭니다.
포기해야 될 건 좀 포기를 해야 됩니다. 포기를 하지 않으면 절대 있는 그대로 알아서 살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소리 들리죠.
소리 들리려면 포기해야 될 걸 포기해야 돼요.
생각하고 보고 하는 거 포기해야 됩니다.
안되면 강제적으로라도 눈을 감아야 됩니다.
그래야 소리가 오롯이 들린다는 거예요.
단맛보다 여러분 읽어 봤을 거니까 못 딜라스님의 일화를 잘 할 겁니다.
봇들로 스님 수행을 가르칠 때 어떻게 가르쳤어요.
오소리 굴에 들어가서 이 오소리를 잡으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물어봅니다.
일곱 살짜리 아라하니 여러분 잘 알죠 다른 구멍은 다 맞고 한 구멍만 보고 알아차리면 된다. 그런데 다른 분은 빨리 도망치려고 그 한 구멍 남아 있는 것으로서 빨리 알려 놓을 내가 빨리 움직여서 그걸 잡지 않으면은 소형이 또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면 나머지 것들은 포기를 하십시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을 포기를 하고 보면 보인다.
본다 하고만 알아차려야 들리면 들린다 하고만 알아차려야 되지 무슨 소리라고 알아차리면 이미 생각이 들어가 버립니다.
그럼 듣는다고 생각하고 같이 짬뽕이 돼 버립니다.
걸어가면 걸어간다고 분명히 알아차려야 됩니다.
그래서 발을 들어올리면 들어 올린다고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내려놓는다고 호흡을 알아차릴 것 같으면 배가 부르면 불러온다고 알아서 해야 되고. 꺼지면 꺼진다고 알아차리게 나머지 것들은 전부 다 문을 닫아야 된다.
강제적으로라도 그렇게 했을 때 적어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가능성이 훨씬 높아진다.
그래서 그런 시간을 한 달 동안 한번 가져보십시오.
조금씩 변화가 있을 겁니다.
하나를 알아차렸을 때 내가 얼마나 산만하게 살아왔는가 하는 것들이 드러나집니다.
대부분 그리 안 하려고 그럽니다.
대부분은 두 개 세계를 같이 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강제적으로라도 반드시 하나만 알고 물론 하나만 하면 아직은 사띠 힘이 크지 않기 때문에 자꾸 놓치게 되고 또 생각들이 끼어들게 됩니다.
탐진치가 또 자꾸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다시 스톱하고 마음을 구하고 평온하게 하고 나서 하나만 알아차리고 그 훈련들을 한번 지속해서 다음 시간에 왔을 때 그렇게 했을 때 어떤 현상들이 있었는지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맨 분들한테 질문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근데 숙제를 해주면 또 안 올 수가 있는데 그래도 수행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수행은 여러분들의 교리를 가르치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수행은 수행이 되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왜 수행하는 것인가 하는 부분의 첫머리에 보면 이 사념처경을 설한 곳이 깐마 사단마라고 하는 꿀루국에 있는 곳에서 했습니다.
왜 하필 여기서 했을까?
이 중요한 것을 왜 그랬을까요?
문헌을 다 뒤져봐도 정확하게 거기에 대한 얘기는 없습니다.
근데 추측건데 그게 살고 있던 사람들이 우리 황 회장 말마따나 어느 정도 샀지 않은 힘들이 있었고 또 경제적으로 풍요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그렇게 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바빠 죽겠는데 수행하라면 할 수 있을까?
또는 누군가가 아파서 아니면 누군가가 돌아가셔서 정신력을 힘들었어 스트레스 받아 죽겠는데 사태를 하면 사퇴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것이 안 됩니다.
물론 그것들도 다 수행의 대상이 되어야 되겠지만 안 된다는 여러분 지금 연세들이 어떻게 됐어요?
70 넘은 사람 수행 포기하십시오.
안 됩니다.
왜 그럴까?
체력이 못 봤죠.
체력이 못 받쳐주는 수행 안 해도 뭐라 하지 마.
몸이 못 바쳐 줍니다.
선한 마음만 계속 이렇게 들어가십시오.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생활에 쪼달려 가지고 하는 사람들도 안 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생활이 좀 안정되어 있고 체력적으로도 뒷받침이 돼야만이 가능해집니다.
왜 그러냐면 수행의 단계에서 한 단계 올라갈 때 힘이 없으면 못 올라가집니다. 특히 나이가 많이 들면 체력이 받치면 안 됩니다.
그래서 70이 안 된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지금이라도 해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이 이생에서 해탈에 이른다.
그거는 버리고 꾸루국에서이 법을 설했던 이유가 거기에서 살아야만이 깨달음에이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놓을 수 있는 조건이 됐기 때문에 아까 얘기한 37 조도품이 나왔던 대반열반경 왜 그 하도 많은 사람들 다 제끼는 여러분들은 들어도 모르기 때문에 못 따라오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지는 거예요.
거기에 맞는 사람들이 있을 때 부처님은 그게 맞는 법을 설한 것, 그러니까 제발 여러분들은 체력과 정신적으로 안정이 되었을 때 지금이 가장 수행하기 좋을 때다 하고 판단들을 하고 수행을 하려는 마음을 자꾸 일으키라.
근데 좋은 점을 본인이 체험을 하게 되면은 그 벌 이제 법을 체험했다고 합니다.
체험하면은 본인 스스로 자꾸 하게 됩니다.
근데 아까도 얘기했지만 법이라고 하는 특성은 스스로 노력하고 스스로 체험해 보지 않으면은 법은 여러분들 것이 아니라는, 외우고 있더라도 그것은 그 법은 여러분들 것이 아니고 남의 것들이 남의 소세는 부처님 거지 여러분들께 아니라는 걸 부처님이 법을 설립되는 그것이 여러분들이 체험에서 여러분들 것이 되라고 하는 것들이지 그냥 부처님 법이라고 해가지고 그것들을 두라고 하는 얘기는 아니라는 그래서 수행해서 얻어지는 이익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그게 이제 개념적인 처음에 나오는 서두 부분인데 실제로 본인이 아이 상태인가 아닌가 하는 걸 스스로 확인하는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깨달음의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
그게 첫 번째가 그걸 하기 전에 에콰야노 맞고라고 하는 부분이 맨 처음에 나옵니다.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죠.
어떤게 유일하다는 뜻이죠.
깨달음의 이력에 위한 유일한 길을 얘기하는 겁니까 왜 이리 편입돼요.
다른 거는 해가 좀 깨달음 이룰 수 없어요.
왜 지극히 테라보다 옛날 그것도 지금 아닙니다.
옛날 장로들이 사고방식을 그대로 지금 가지고 있습니까?
수행에서 깨달음이 이루는 방법은 개념처경의 4가지 염치 부분에 다른 것들이 포함이 되기는 합니다.
포함이 되긴 하더라도 그게 아니라도 충분히 깨달은 사람들이 부처님 당시에도 많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안 한다가 포지선이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누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상태에서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같은 경우도 부진법을 듣다가 깨달음에 이릅니다.;
많은 것들이 있는데 왜 굳이 대님 체격만이 잘못 보고 있다는 그걸 그걸 유일한 길이라고 하는 것을
깨달음의 이르기 위한 유일한 길로서 봐야 되느냐 아니면 문맥으로 봤을 때 여기에도이 페이지의 스님이 적어 놨습니다.
왜 일본에 보면 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왜 수행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먼저 중생들이 청정을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렇게 적어 놨죠.
그래서 희노애나가 죽음이 있는 중생의 삶에서 번뇌를 없어요 청정하게 되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입니다.
즉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이제 몇 개가 계속 나옵니다.
슬픔과 비탄을 넘어서기 위해서 괴로움과 근심과 소멸을 위해서 뭐 이렇게 쭉 나옵니다.
그럼 여기서 엣가요 맞고라고 하는 거는 뭘 의미할까?
수액만이 오직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행만이 오직 유일한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수행을 해야만이 쉽게 말하면 청정을 획득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스트레스 없이 살고 도화가 점진적으로 이르는다는 뜻입니다.
다른 길로서는 깨달음의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문은 닫혔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것이 수행밖에는 없다는 것 아니요 그걸 그게 사념처가 됐던 칠각지가 됐던 37조도 품에 다 틀립니다.
근데 여기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말한 수행법을 얘기하는 겁니다.
쉽게만 대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사띠 하는 것, 그것이 있을 때 그것을 수행이라고 한다는
그래서 그 수행만이 오직 유일한 길이지 다른 길로서 청정을 획득하고 스트레스를 벗어나고 도가 이르려고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이생에서 조금 더 죽음으로 덮어서 나기 위해서 죽음의 공포로부터 일상생활에 생기는 스트레스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항상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은 경제는 아무리 배운다 해가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밖에는 없다는 것들을 각각의 학자들이나 또 옛날부터 지내지 오는 방법들이 해석하는 것이 각각 틀립니다.
근데 여러분들은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 되는 것이 그것은 수행 매는 다른 길이 없다고 분명하게 이해를 해야만이 이 방법으로 이것으로 다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다.
그래서 그게 3페이지에 보면은 두 번째 단락에 번뇌를 없애기 위해서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엣가야는 오직 하나의 길이 있습니다.
다른 선택사항은 없습니다.
번뇌를 없애고 청정하게 되기 위해서는 오직 수행하는 길뿐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고. 스님이 분명히 적어는 여러분들도 이 길을 따라가려고 해야지. 공부를 하는 목적 또는 해탈이라는 목적 또는 좀 더 평온하게 살기 위한 목적, 그 모든 것들은 수행을 통하는 방법,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하죠.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법수행과 심수행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심수행은 수행을 통하는 구법수행은 경정보를 열심히 해도 수당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얘기를 하죠.
맞습니까 이 착각을 해버리면 안 되는 거예요 법은 실천하지 않으면은 의미가 없습니다.
실천된 법은 수행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것이 단지 부처님 법을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서 수다원에 이르는 것 뿐이고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가지고 아 부처님 말씀이 맞고 난 것을 깨닫고 수다원에 이르는 거 그런 방법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은 수행을 통하지 않고 다른 방법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 정확하게 기준에서 수행을 하느냐?
하니까 불필요 없다는 수행을 하면 되는데요.
근데 수행을 하려고 하면 37 보령금이 됐던 사명을 오해 없이 정확하게 숙지를 하고 그래서 그 깊이 한 그 농약대로 헤쳐맨을 했을 때에 수행의 속에 목적이 나타나는 건데 그것을 도시하고 수행 수행만 하니까 그것이 오해의 소리 그렇죠 이제 그럴 수는 그거는 물론 수행을 통해서 우리가 법을 체득하고 플라운을 어떻게 무화과에 들어가는 것은 맞는데 이 수행이라는 여기에는 반드시 확실하고 명확한 그런 확신하는 이런 체계가 반장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래서 가장 기본이 되는게이 37보리분법에서 산염체가 가장 먼저 노는 겁니다.
뭔지를 알아야 되는 거니까 그래서 그게 나오는 거고, 그 다음에 노는 것들이 그러면 대상을 알아차렸는데 힘이 어떤 것을 작용을 해야 될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력들이 필요한 것이고, 오건이 필요한 것이고 그러니까 꺼내든 이해가 있어야만 힘이 생기는 거니까 그래서 어떤 것이 균형을 맞아야 된다 하는 것들을 되는 것이고, 그렇게 어느 정도 하다가 보면은 틀림없이 망상들도 생겨나고 또 각각의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그럼 그 장애들을 어떤 식으로 해결해야 되는가 하는 것들을 설명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뭐냐면 칠각지 부분에 들어가 시는 거예요 사띠가 되면 그 다음에는 법에 대한 조사가 분명히 들어가지고 하는이 진행 과정들을 그려서 설명들을 구분을 해 놨게 되는 거고 이걸 통틀어서 팔정도에 들어간다 팔정도가 완성이 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 37조도품입니다.
그래서 황 회장님 얘기는 뭔 얘긴지는 내가 이해를 합니다.
근데 이제 조건이 틀리다는 생각은 틀린 것이 해야 됩니다.
한국 사람들은 수행 방법에 대한 것들을 설명을 안 해주면 사띠를 하지 않습니다.
할 방법을 모릅니다.
근데 미얀마는 태국 같은 경우에는 어릴 때부터 계속적으로 학교에서부터 교육을 받아왔고 수행하는 것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특별히 그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죠.
어느 정도는 충분히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수행을 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게 중요한 것이지 그뭘 대상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이미 그 사람들은 숙지를 하고 있는 상태라는 그래서 그런 아마 얘기를 했을 거고, 이제 물론 수행이 좀 더 많이 진책되고 나면 단계들을 세분화 자꾸 시켜 줍니다.
그건 이제 조금 더 어느 정도 공부가 되고 나면 이제 그렇게 되는 거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퇴하고 있느냐 안 하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어떤 대상을 가지고 수행을 할 것이냐 하는 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마 좀 더 순리적일 겁니다.
그래서 이제 한국인들은 자꾸 이제 그걸 따지려고 그럽니다.
이게 부처님 말씀에 어디에 해당이 되는지 아니면 이것이 어디에 연결되는지를 자꾸 하려고 합니다.
근데 그 사람들이 봤을 때는 의미없이 그럴 동안에 이미 그 사람은 마음에서 자꾸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고, 또 정오심이 자꾸 일어나고 있는데 사띠를 안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게 의미가 없는 건데 자꾸 그걸 따지려고 한다 하기 때문에 그냥 수행하면 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뿐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저도 그런 얘기를 처음에 가서 많이 들었어요.
그 사람들보다 훨씬 열심히 잘하고 있거든 근데 그 스님들이 저보고 비웃어요,
폼은 훨씬 자기들보다도 열심히 잘 하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엔 탐진치가 될거야, 어떤 것이 먼저여야 되는 걸 갖다가 잊어버리고 따지려고 자꾸 한다는 그걸 조금 이해를 하고 그 사람들 입장을 들어보면 수행이 답이구나, 하는 것들이 아마 드러나질 거라고 봅니다.
자 지금 몇시나 됐습니까?
오늘은 이거 부분은 크게 여러분들이 봤을 때 무리가 되는 부분은 아닙니다.
수행을 하면 이런 이익이 있다는 것들을 설명을 해 놓은 거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가서 한번 쭉 읽어보면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다음 달부터는 이제 본격적으로 수행에 대한 것들을 프린트를 하면서 여러분들하고 직접 물어보고 답하고 할 겁니다.
그래서 공부들을 이걸 가지고 공부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수행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겁니다.
자기 자신하고 끊임없이 자꾸 싸워서 이기는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 주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