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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영락경 제6권
18. 무량경품[3]
[부처님의 게송]
그때에 세존께서 문득 이 게송을 말씀하셨다.
일체의 모든 법계는
본래 없어서 있는 바가 없는데
나고 죽음을 달관하지 못하여
법이 으레 있다고 여기니,
3세(世)의 고(苦)를 겪고 나서
나아가 보살의 길을 구하며
퇴전(退轉)을 항하 모래 수처럼 한들
어찌 본래 없음에 달할 수 있으랴?
10력(力)의 부처님, 현세를 불쌍히 여기시고
중생의 무리 어여삐 생각하사
가짜 호칭의 법을 연설해서
지극한 도의 밝음을 알게 하시며,
해탈하여 견줄 이 없는 부처님
법의 소리 속히 연설하시어
한량없는 중생의 무리에게
법의 감로를 듬뿍 채우네.
큰 도는 형상이 없고
유정(有情)과 무정도 아니니
다만 물들어 더럽힌 마음을 내면
세 가지 선(禪)을 얻지 못하리.
만약 근본을 닦아 익히고자 하거든
청정한 일곱 가지 무루(無漏)와
아홉 가지 청정한 경지를 창달할지니,
이것이 소위 도의 문에 나아감이네.
처음 도량에 나아가고자 하여
얽매어 집착한 열네 가지 마음을
부처를 얻으면 마땅히 멸해야 하고
그런 뒤에 도의 과를 이루어야 하네.
열여섯 가지 온갖 훌륭한 진리와
보살의 온갖 법인(法印)으로
감로의 지혜를 수기 받아
그로 인해 여래라고 호칭하도다.
서른두 가지의 법의 근본과
보살의 신통지혜로
3세의 근심을 소멸시키면
점차 열반에 이르네.
대저 불도를 구하고
부처님 나라를 장엄하여
시방세계에 명성이 두루하고 싶다면
선(禪)을 닦아야 곧 얻으리.
무루의 세 가지 선행(禪行)은
모든 부처님의 깊고 오묘한 곳간,
중생을 위하여 서원을 세우고
죽음이 없는 법을 설하도다.
행이 다해 행을 짓지 않고
과(果)도 또한 과보가 없고
도(道)는 평등한 지혜로 따라오니
마음이 한결같아 삿된 생각이 없네.
네 가지 믿음은 여래의 보배요
여섯 가지 외도는 세상 번뇌라 하네.
일곱 가지 깨달음의 청정한 방편으로
여덟 가지 도가 갖추어 이루어지도다.
세속의 5신통의 도는
새가 허공을 가는 것 같아서
목숨은 땅[地大]에 매었으니
나고 죽음의 어려움 면치 못하나,
6신통의 대승의 도는
허공 사이를 노닐면서
끝내 퇴전(退轉)하지 않으니
이 편안함은 여지가 있지 않도다.
지혜의 관(觀)으로 청정을 요달해서
어둠 속을 모조리 비추어
집착도 없고 물들지도 않는 까닭에
하늘에서 가장 높은 이[天尊:부처님]라 호칭하네.
도(道)의 생겨남은 스스로 나지 않으니
인연이라야 비로소 도가 있도다.
법마다 스스로를 알지 못해
비고 고요하나니 무엇을 도라 하랴?
사람은 본래 생사에 처해서
유랑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나니
정진하여 게을리 하지 않으면
점점 거룩한 율[聖律]에 감응하리.
마음의 구슬은 본래가 스스로 밝아서
바깥의 광명을 빌지 않지만,
해와 달에는 다섯 가림 있으니
어찌 능히 비추는 바 있으랴?
부처님의 근본 행은 청정하여서
마음의 지혜에 흠과 티끌이 없네.
스스로 제도하고 다시 상대를 제도하면
이르는 곳마다 걸림이 없도다.
여러 가지 욕망을 능히 끊고
여러 가지 얽매임과 집착을 제거하면
여러 가지 법의 광명으로 비추어서
어리석음의 어둠을 알지 못하리.
열반은 성품이 청정하여
오가는 것을 볼 수 없고
깊고 미묘하여 볼 수 없고
담박하여 변하고 바뀌지 않도다.
선정의 한결같은 뜻에 들어서
온갖 시방(十方)을 감동시키고
신족의 도력(道力)도 강하여서
여덟 가지 진리를 손상하지 않도다.
그 까닭에 큰 서원 발해
눈물로 중생을 불쌍히 여겨
대신하여 고통 받기를 염(念)하나니
이것이야말로 실로 훌륭하도다.
사람은 무상을 헤아리지 못하고
삼계의 영화를 탐내고 집착하여
바람에 불려 떨어진 낙엽처럼
나아가는 바를 따라 유전하네.
허공은 변제(邊際)가 없듯이
도의 행도 또한 가없네.
허공은 음향으로써 보답하지만
비고 고요함은 근본이 없네.
사람은 본래 어머니 태에서 나오면
행에 따라 5도(道)로 물드니,
선악이 사람의 형상을 추적함은
마치 그림자가 그 몸을 따름과 같도다.
만일 5음(陰)을 능히 멸하면
신식(神識)은 공(空)으로 돌아가
다시는 나고 늙고 죽지 않으리니
이곳은 실로 쾌락하네.
모든 부처님의 곳간을 알려 해도
깊고 그윽하여 볼 수가 없으니,
경계를 넘고 3세를 넘어서
나고 죽음의 언덕을 돌아보라.
본래 나[我]는 어리석고 미혹해서
이 이글거리는 가마솥에 들었었지만
지금은 이 재앙을 여의고
청정한 연못에서 유희하도다.
나는 이제 비록 고통을 면했으나
나만 여의고 그대는 못 여의었으니
혼자 좋은 것은 큰 서원 아닐세
어찌 홀로 멸도를 취하겠는가?
다시 현생(現生)에 돌아와
방편으로 교화하고 번뇌에 처하면서
널리 제도하길 끝없도록 하니
겁수(劫數)의 기간을 마다하지 않도다.
나날이 제도함이 항하의 모래 같아서
이와 견줄 짝이 없으나
털끝만한 자기 공훈을
내세워 계교하지 않도다.
제도한 이를 가깝게도 생각지 않고
제도 못한 이를 멀리 생각하지도 않으며
심식(心識)은 담박하여 한결같아서
구경에 이르러도 걸림이 없도다.
색상(色相)은 몸에 갖추어 있고
얼굴은 비할 데 없이 준수하며
모든 근(根)이 마침내 순수하게 성숙해서
이내 커다란 즐거움을 이루네.
총명한 근기는 행을 갖추었으나
깨달음은 오히려 다시 점차적이어서
어리석은 이를 만나면
이것이 바로 심각한 어려움이네.
보살이 정의(定意)에 들어가면
유와 무의 상념을 염(念)하지 않아
혼자 걸어도 두려움 없어
덕으로 온갖 어려움[山岳]을 지나가도다.
행자에게 다섯 품이 있어
나아가고, 물러나고, 중간의 법이 있네.
뜻을 세움이 수미산[安明]과 같고,
마음이 굳건해 움직일 수 없도다.
6바라밀의 큰 신통 지혜
신족(神足)으로 오감을 통해
법계에 세 가지 생각이 없으니,
그 까닭에 법륜을 능히 굴리네.
본래 한량없는 선(善)을 쌓아
스스로 인중존(人中尊)을 이루고,
도는 평등하여 세 가지 근본이 없는데,
마음으로 안팎의 청정을 헤아리도다.
성품의 행(行)에는 약간의 차이 있으나
법을 행함에는 차이가 없네.
다만 세상을 위하여 말하는 이는
차이가 있는 품을 분별한다네.
과거의 행에도 여러 겁 동안
일찍이 상념을 일으킨 적 없으니
그러므로 노니는 마음 경계가 없어
허공에 정체되어 있지 않도다.
땅은 지극한 정성의 근본이 되어
더럽고 더럽지 않음을 능히 참네.
지혜의 마음이 용납하는 바는
제도하고 제도하지 않음을 보지 않도다.
성인의 행은 매우 훌륭해서
이 온갖 고통을 능히 참으며
억 겁에 공덕을 행하여서
비로소 한 법의 근본을 이루도다.
세 가지 정(定)과 공과 무상
무원(無願)으로 온갖 법을 행하고,
온갖 지혜와 10력(力)의 슬기로
생겨남이 없는 곳을 초월하도다.
본래 음향의 지혜를 닦은
여덟 가지 소리[八聲]는 매우 청정하고 미묘하네.
5온(薀)의 행을 분별하여
사념과 상념의 탐냄을 없애도다.
나고 죽음의 근본에 빠진 채
벗어날 요긴한 길 구하지 않는데,
세 가지 근본에서 근본을 버리지 않아야
곧 도의 요체에 나오리라.
스스로 숙명통(宿命通)을 인식하면
법신은 불가사의해서
있음[有]을 헐고 무등(無等)을 이루리니
이 힘은 막을 수 없네.
허공은 양(量)과 경계가 없어서
하나도 아니고 둘, 셋도 아니네.
본래의 서원을 따라 행해서
온갖 묘한 도를 청정히 닦네.
나고 죽음의 찌꺼기 법을
어리석은 자는 탐내고 즐기지만,
지혜의 관(觀)으로 물들어 집착함 없으면
어리석고 미혹한 법을 영원히 없애네.
보살은 고요함을 즐겨서
한량없는 법을 사유하고,
현재에 나고 멸하지 않아서
있음도 아니요 있지 않음도 아니네.
스스로 숙명통을 인식해서
본래의 나고 죽음의 뿌리를 관하면
마치 사람이 강과 바다에 임박한 것 같아서
이내 떨면서 두려워하네.
큰 서원의 바라밀은
도지(道地)의 행을 바르고 평등이 하여
앉거나 눕거나 깊은 곳간에 들어가
더러운 행을 언제나 여의네.
땅ㆍ물ㆍ불ㆍ바람ㆍ공(空)에
신식(神識)은 집착에 기대어 머무니,
소굴의 처소를 구하고자 하지만
신식의 취향을 알지 못하네.
사람도 또한 믿음이 그러해서
인연은 함께 합쳐져 모이지만
식은 4대(大)와 공을 여의므로
제각기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네.
법의 바다는 끝이 없어
안팎의 티끌도 받아들이지만
본래의 성품은 스스로 청정하여서
더러운 물듦을 분별하지 않네.
큰 도는 본래 법이 없어서
법을 관해도 안팎이 청정하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를 염(念)하지 않으니
세상의 지혜로는 견줄 것이 없네.
여러 가지 온갖 소리와
양(量)이 있고 양이 없는 법은
겁수(劫數)의 마멸법이라 깨달으면
어찌 상존(常存)하는 것이 있을까보냐?
중생의 액운을 능히 끊어주고
네 가지 마(魔)의 경지 영영 여의어
탐하고 시기함이 본래 성품 없어
이에 청정한 관(觀)에 감응하네.
본래 보리수 밑에 앉아서
첫 밤과 중간도 또한 마찬가지로
한마음, 한뜻으로 그치니
정의(定意)는 다시 어지러움 없네.
7일 동안 체(體)가 기울지 않고
3세의 법을 모두 살펴서
하나를 멸하니 다시 하나 없어
이로부터 이내 깨쳤다네.
이제 이미 부처를 이루어
제도 못한 이를 불쌍히 여겨서
위없는 법을 굴리면서
녹야원에 있노라.
먼저 네 가지 밝은 지혜인
고(苦)ㆍ집[習]ㆍ멸(滅)ㆍ도(道)의 지혜를 설해
깨닫지 못한 이를 위하여
세 번 설하여 성취케 하니,
온갖 한량없는 대중은
감로의 법을 처음 듣고
모두 무생(無生)의 마음 얻어서
다시는 나고 멸함이 없느니라.
비록 이 생(生)을 나타냈으나
신(神)은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어서
가는 데마다 법륜을 굴리고
곳곳에서 변화를 나타내네.
여기에서 부처 되려고 나타나서
열 달을 어머님의 태(胎) 속에 있었으나
성인에겐 티끌과 때가 없어서
다섯 가지 욕심을 탐내지 않네.
이 까닭에 정진하여 배워서
‘있다’, ‘없다’의 식을 여읨을 생각하면
체(體)의 성품과 행이 자연스러워
법계를 헐지 않으리.
지나간 것은 헤아릴 수 없고
오는 것 또한 다함이 없으며
현재는 다시 변하고 바뀜은
신식의 소재가 됨이니라.
식은 나고 죽음의 근본이 되어
유랑함에 다함이 없으니
무위의 언덕에 이르고자 하면
세 가지 선을 으뜸으로 삼아라.
바라건대 무색(無色)의 법을 얻어
형상 없는 옷으로써 물들이고
없음에서 스스로 즐겨야지
3유(有)에 처하기를 원하지 말라.
내 본래의 굳은 맹세를 염(念)하건대
본제(本際)의 중생을 위하여
다시 세속을 따르더라도
큰 서원의 마음 빠트리지 않네.
보살의 세 가지 근본 행함에
서로 승부의 마음이 있으니,
나는 이제 비로소 스스로 통달하여
정진 가운데 최고가 되었네.
여래가 나타낸 변화는
능히 사량할 수 없으니,
혹 바윗돌 사이에 처해도
고요하고 잠잠해서 언설이 없네.
안의 6진(塵) 분별하매
나도 없고 남의 상념도 없으니,
바깥 법도 당연히 그러해서
항상의 상념은 항상의 상념이 아니네.
나는 처음 뜻을 발하면서부터
행을 세워도 내 몸만 위하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먼저 깨쳤지만
어찌 나머지를 위하지 않으랴?
그러므로 힘써 부지런히 배우는 이
본래의 염원을 저버릴까 걱정하여
아직 제도 못한 자를 제도함이니
이것을 여래의 맹세라고 말하네.
부처는 본래 처음부터 원을 발하여
겁수의 어려움은 걱정하지 않았으니,
비록 티끌 욕심에 처해 있지만
이 고통 또한 오래지 않으리.
바른 법은 본래 둘이 없어서
차품(差品)에 3호(號)가 있네.
도는 해와 달의 비춤과 같아서
높고 낮은 마음이 있지 않노라.
하나의 지(智)와 하나의 혜(慧)는
본래 하나의 원(願)으로부터 이루어졌으니,
나는 이제 하나를 버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제일 존귀한 이라고 호칭하네.
두 관(觀)은 하나의 법으로부터이고
염(念)을 행하여 세 가지 고통 지나면
본래 괴로움의 경계가 없다고
법신은 스스로 분별하리라.
보살은 방편의 슬기를 잡아
사람으로 하여금 법의 상념 없게 하고
참 사람[眞人]의 뜻은 늘 청정해서
일어남과 일어나지 않음을 생각지 않네.
항상 큰 사랑하는 마음으로써
중생을 염(念)하길 빠트리지 않아
이로 말미암아 스스로 법의 뜻을
영락(瓔珞)하여 갖추는 지혜 있네.
도의 근본은 스스로 나가 없으니
이것에서 중생의 입이 나왔고,
중생을 위해서는 본래 스스로
나가 없다고 설할 수 없네.
이제 마땅히 행이 있음을 설하여
도의 자취를 점점 보게 해서
항상의 상념이 없음을 알게 하면,
오랜 후엔 반드시 스스로 깨달으리라.
세상에 있으면서 성스러운 행을 닦으며
끝내 의(義)의 근본을 잃지 않지만,
문자를 쓰는 까닭에
세상 사람에게 나타나지 않네.
온갖 부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온갖 정(定)의 뜻에 노닐면
사람 가운데 신룡(神龍)으로 걸어
4무외(無畏)를 얻네.
여래는 따로 제(諦)가 있으니
하나하나 불가사의해서
의지함도 없고 물든 바도 없으니
이 때문에 인중존(人中尊)이라 호칭하네.
무릇 사람은 세상의 법도를 배워서
일제히 상념 없음에 이를 수 있지만
일구(一句)의 진의(眞義)로
생사에 처하지 않음만 못하다네.
그때 세존께서 이 게송을 설하시고 나서 말씀하셨다.
“어떠하냐, 족성자여. 이 정 있음과 정 없음의 뜻을 자세히 살펴서 이해했느냐?”
대답하였다.
“그러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실로 이와 같이 훌륭한 말씀은 없나이다.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정 없음에서 정 있음과 정 있음에서 정이 없는 뜻을 외고 받아 지니면, 문득 능히 온갖 여러 법을 갖추리니,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과 일체 성현은 모두 이 뜻을 말미암아 성불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후부터 저희들 모두 이 선남자나 선여인이 정 없음에서 정이 있고 정 있음에서 정이 없음을 받아 지니고 외는 것을 반드시 옹호하겠나이다.
왜냐하면 제가 관하는 바로는 여래께서 설하신 것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이 모두 이 뜻을 말미암아 성취했기 때문이니, 저희들도 또한 마땅히 이 법의 뜻에 미쳐야 하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