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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론 제11권
11. 번뇌론[6]
11.18. 잡문품(雜問品)
[논자(論者)의 말]
온갖 번뇌는 거의가 열 가지 부림[十使]의 소속이다. 그러므로 열 가지의 부림으로 인하여 논을 지으려 한다.
열 가지 부림이라 함은 탐냄과 성냄과 교만과 무명과 의심과 그리고 다섯 가지의 소견[見]이다.
[문] 열 가지의 번뇌 대지법(煩惱大地法)은
이른바 불신(不信)과 해태(懈怠)와 망억(忘憶)과 산심(散心)과 무명(無明)과 사방편(邪方便)과 사념(邪念)과 사해(邪解)와 희도(戱掉)와 방일(放逸)이다.
이 법은 항상 온갖 번뇌의 마음과 함께 작용한다.
그 내용은 어떤 것인가?
[답] 앞에서 이미 상응(相應)을 깨뜨렸다.
오직 마음의 법은 낱낱이 생기는 것이라, 이 때문에 그렇지 못하다. 이것은 도리가 아니다.
어떻게 그런 줄 아는가?
혹은 착하지 못한 마음이 착하지 못한 믿음과 함께 하는 수가 있기도 하며 혹은 착하지 못한 마음이면서 믿음이 없기도 하기 때문이니 정진 등도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온갖 번뇌의 마음 가운데는 이 열 가지 법이 있지 않은 줄 알 것이다.
또 그대는 잠[睡]과 들뜸은 온갖 번뇌의 마음 가운데에 있다고 말하나, 그도 역시 옳지 못하다.
만일 마음이 혼미하고 침체할 때에는 응당 잠이 있어야 하고 들뜬 마음속에는 응당 있지 않아야 한다는 이런 허물이 있게 된다.
[문] “욕심 세계 중에는 열 가지 번뇌가 구족하고 형상세계와 무형 세계에는 진심을 제외한 그 밖의 전부가 있다” 하니,
그 일은 어떻게 되는가?
[답] 그 중에도 질투 따위가 있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경전 중에서
“어떤 범왕(梵王)이 여러 범중(梵衆)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구담 사문(瞿曇沙門)에게 참례하지 말라. 너희들은 여기에서만 머무르면서 스스로 늙고 죽음의 끝을 얻도록 하라’”고 한 이것을 질투라 한다.
역시 질투함이 있기 때문에 역시 성냄도 있어야 된다.
또 경전에서
“범왕은 한 비구의 손을 잡아끌고 함께 대중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비구여, 나 역시 네 가지 요소가 어느 곳에서 여지없이 다 없어지는가를 모르고 있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아첨하는 마음으로써 모든 범천의 대중을 속이는 것을 첨곡(諂曲)이라고 말한다.
만일 “나는 높고 귀하다. 만물을 창조한 자이다”라고 말하면 그것을 교만(憍慢)이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저기에서도 있다. 이와 같은 나쁜 번뇌가 잇기 때문에 역시 착하지 못한 것도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어떤 논자가 말하기를
“만일 부모나 화상아사리(和尙阿闍梨) 등을 탐내면 그것을 착한 탐냄[善貪]이라 하고,
남의 물건들을 탐내면 착하지 못한 탐냄[不義貪]이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손해거나 이익이거나 간에 끼치지 아니하면 무기의 탐냄[無記貪]이라 한다.
착하지 못한 법과 나쁜 벗에게 성내는 것을 좋은 성냄[善瞋]이라 하고
만일 착한 법에 성을 내거나 또 중생에게 성을 내면 좋지 못한 성냄[不善瞋]이라 하며
만일 중생이 아닌 물질에게 성을 내면 무기의 성냄[無記瞋]이라 한다.
만일 교만에 의지하여 교만을 끊으면 그것을 좋은 교만[善慢]이라 하고
다른 중생들을 경멸하면 좋지 못한 교만[不善慢]이라 하며, 무명 따위도 역시 그와 같다”고 한다.
또 논사는 말하기를 “만일 착한 것이라면 번뇌라고는 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문] 욕심 세계에서의 몸에 대한 고집을 무기(無記)라 한다. 왜냐하면
“만일 몸에 대한 고집이 착하지 못하다면 온 범부는 다 나라는 마음을 내는데, 그렇다하여 전부를 지옥에 떨어뜨릴 수는 없기 때문에 무기라 말한다”고 하니,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몸에 대한 고집은 온갖 번뇌의 근본이다. 어떻게 무기라 할 수 있겠는가?
또 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신아(神我)가 있다고 말하는 그때마다 어떻게 무기라고 해야 하겠는가?
치우친 소견[邊見]도 그와 같다.
[문] 만일 사람의 삿된 소견을 되돌려서 의심 중에 떨어지게 하면 그 사람은 바로 착하지 못한 짓인가?
[답] 그 사람은 착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차라리 의심 가운데 떨어질지언정 삿된 선정에는 들지 않기 때문이다.
[문] 어떤 사람의 말에는
“욕심 세계 매임[繁]의 번뇌는 전부가 욕유(欲有)를 계속하게 하고 형상 세계와 무형세계의 매임도 또한 그와 같이 한다”고 하였는데,
그 일은 어떤 것인가?
[답] 애욕만이 모든 존재[有]를 서로 계속되게 하는 것이니, 먼저 기뻐하고 뒤에 내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애욕은 고통의 쌓임[苦集]이다”고 하며,
또 말하기를 “먹고 마시는 탐욕 등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나기[生]를 받는다”고 한다. 삿된 소견[邪見]들 가운데는 이러한 이치가 없다.
경전 중에서 비록 “교만이 인연으로 난다”고 말하였으나 역시 먼저 교만하다가 뒤에 애욕이 있기 때문에 나는 것이니, 성냄도 역시 그와 같다. 그러므로 모두가 애욕 때문에 모든 존재가 서로 이어지는 줄 알 것이다.
[문] 모든 번뇌 안에서 견도[見諦]에서 끊는 것은 몇 가지며, 수도[思惟]에서 끊는 것은 몇 가지인가?
[답] 탐냄과 성냄과 교만과 무명은 견도와 수도의 두 군데서 다 끊으며 나머지 여섯 가지는 오직 견도에서만 끊는다.
[문] 배울 것 있는 이도 나라는 마음이 있다. 그러므로 모양에 나타나지 않는 몸에 대한 고집 갈래는 배울 것 있는 이도 아직 끊지 못한다.
[답] 이 교만은 소견이 아니다. 소견은 모양을 나타내는 것[示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간탐과 질투와 후회와 아첨 따위는 오직 수도에서만 끊는다”고 하는데
그 일은 어떻게 되는가?
[답] 이것은 모두 두 가지로서 견도에서 끊기도 하고 수도에서 끊기도 한다.
어떻게 그런 줄을 아는가?
마치 니연자(尼延子) 등이 부처님의 제자가 공양 받는 것을 보고 질투의 마음을 냄과 같이 이 질투는 도를 보게 되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견도에서 끊을 바다.
어떤 사람이 먼저는 부처님의 제자에게 아끼느라고 보시를 하지 않다가 견도를 보게 되었기 때문에 보시하면 이 간탐은 견도에서 끊는 것이니, 마치 소나찰다라(蘇那刹多羅) 등과 같다.
후회하는 것도 견도에서 끊는 것이며 수다원이 지옥에 떨어진 인연과 여덟 번째 세간에 몸을 받는 아첨 따위와 같은 것도 견도에서 끊는다.
[문] 모든 번뇌는 얼마를 괴로움을 보고 끊고 얼마를 쌓임ㆍ사라짐ㆍ도를 보고 끊으며 얼마를 수도에서 끊는가?
[답] 먼저 말한 바 견도에서 끊을 바 여섯 가지 번뇌[使]는 네 가자인 괴로움을 보고서 끊고 쌓임과 사라짐과 도를 보고서 끊는다.
그 나머지 네 가지 번뇌는 다섯 가지에서 끊는다.
[문] 몸에 대한 고집과 치우침의 소견은 다만 괴로움만을 보고서 끊겠지마는 계에 대한 고집은 두 가지로서 괴로움을 보고 도를 보고서 끊는다. 이 일은 어떠한가?
[답] 모든 번뇌는 실지로 사라짐의 진리를 볼 때에 끊어진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고집 따위도 괴로움만 보고서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
또 몸에 대한 고집은 네 가지 진리에서는 어긋나는 일이다. 다섯 가지 쌓임은 사라지지만 나는 사라짐이 없다면 도와 나라는 소견과는 서로 엇갈린다.
그러므로 몸에 대한 고집은 네 가지로 끊을 바요, 치우친 소견도 네 가지로 끊을 바다.
왜냐하면 수행하는 사람이 고통은 쌓임으로부터 생긴 줄을 보면 아주 없다는 소견[斷見]이 없어지고, 도로 말미암아 사라짐을 얻는 줄을 보면 항상하다는 소견[常見]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계에 대한 고집도 네 가지이다.
인이 있으면 과가 있으며 이 때문에 괴로움을 보는 때에 계는 자체가 고통이라. 이것으로 청정함을 얻지 못할 줄을 알게 되리니, 바로 괴로움을 보고서 끊는다.
계는 그것이 괴로움의 인인지라 이것으로 청정을 얻지 못할 줄을 알게 되리니, 바로 쌓임을 보고서 끊는다. 삿된 소견으로 열반을 비방하면서, 이 소견으로 청정을 얻는다고 하면 바로 사라짐을 보고서 끊는다. 이것으로 도를 비방하는 것은 도를 보고서 끊는 것이다.
소견의 고집[見取]은 삿된 소견에 의하기 때문에 네 가지인 것처럼 계에 대한 고집 역시 그와 같아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98사(使)라 하지 못하리라.
[답] 모든 번뇌[使]는 자리[地]에 따라서 끊는 것이요, 세계[界]에 따르지 아니한다. 그러기에 98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문] 탐냄과 교만과 삿된 소견을 제외한 나머지 네 가지 소견[身見ㆍ透見ㆍ見取見ㆍ戒禁取見]은 다 세 가지 뿌리[喜樂捨]와 상응하고, 괴로움의 뿌리[苦根]와 근심의 뿌리[憂根]는 제외된다.
성냄도 또한 세 가지 뿌리와는 상응하고 즐거움의 뿌리와 기쁨의 뿌리는 제외된다.
무명은 다섯 가지 뿌리[五受根]와 상응하고 삿된 소견과 의심은 네 가지 뿌리와 상응하면서 괴로움의 뿌리는 제외된다.
성냄과 덮는 죄[覆罪]와 간탐[慳]과 질투[嫉]는 근심의 뿌리와 상응할 뿐이라 하는데
그 일은 어떠한가?
[답] 먼저 이미 상응함이 없음을 설파하였다.
그러므로 뒤에 설명하겠다.
다섯 가지 식(識) 중에는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또 그대의 법 가운데서는 “탐냄과 기쁨의 뿌리와는 상응하나 간탐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고 하나 그것은 이유없는 말이니 간탐은 바로 탐냄의 갈래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교만은 근심의 뿌리와 서로 응하지 않으며, 역시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그대들의 하는 말은 다 자기네의 생각으로 분별하는 것이다.
[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고통으로 보고 끊을 바 다섯 가지 소견과 의심과 그리고 탐냄과 성냄과 교만은 상응하지 않는 무명이며,
쌓임의 진리에서 끊을 바 삿된 소견과 소견의 고집과 의심과 탐냄과 성냄과 교만도 상응하지 않은 무명이다.
이것을 두루한 부림[遍使]이라 한다. 나머지는 두루하지 아니한다” 하니
그 일은 어떠한가?
[답] 모두가 두루하다. 왜냐하면 온갖 것은 모두가 똑같이 서로가 인이 되고 서로가 연이 되는 까닭이다.
또 자기의 삿된 소견 안에서 탐욕을 내는 것이니, 이른바 “괴로움이 없고, 내지 도(道)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견에 탐착하면서 스스로 높은 체하다가 괴로움을 설명하는 것을 들으면 바로 미워하고 성을 낸다.
또 이 탐냄은 사라짐의 진리를 반연하며 성냄도 열반을 미워하고 성내며 또한 열반으로써 스스로 높은 체하는 마음을 낸다. 도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나머지 부림에도 능히 두루함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욕심 세계 매임의 번뇌이면서 능히 형상 세계를 반연하며, 탐냄으로써 기뻐하고 성냄으로써 미워하며 그의 법으로써 스스로 높은 체하고 또한 그것으로 우월하다고 여기면서 욕심 세계가 아니라고 함과 같다.
욕심 세계의 번뇌이면서 능히 형상 세계를 반연하는 것처럼
형상 세계의 소견[見]들인 번뇌도 역시 욕심 세계의 과를 반연하며 무형세계도 또한 그와 같다.
또 이 번뇌는 모두가 공통되는 모양이면서 제각기 특유한 모양이 있다. 왜냐하면 탐냄도 공통한 모습이면서 네 천하(天下)를 다 더럽히기 때문이다.
또 장조경(長爪經)에서
“모든 인욕은 바로 탐냄이고 모든 인욕하지 않음은 바로 성냄이며, 온갖 인욕하지 않음은 바로 탐냄이고, 온갖 인욕은 바로 성냄이다”고 하였다.
또한 이 번뇌로써 스스로 높은 체하는데, 이 번뇌는 모두 몸과 입의 업을 일으키게 된다.
왜냐하면 경전 중에서
“이와 같은 소견을 내면서 이런 일을 말하되 ‘신(神)이 있다’고 하는 따위이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또 이 온갖 번뇌는 모두가 제6식 중에 있고 다섯 가지 의식 중에는 없다. 왜냐하면 생각[想]의 지어감은 제6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온갖 번뇌는 다 생각으로부터 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몸에 대한 고집 따위도 다섯 가지의 식 중에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눈으로 물질을 보면서 “내가 능히 본다”고 하며, 의심과 교만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문] 경전 중에서 여섯 가지 욕망[愛]을 설명하였다. 어째서 다섯 가지의 식 중에는 번뇌가 없다 하는가?
[답] 6의행(意行) 같은 것은 다 의식(意識) 중에 있으며 다만 눈 따위로써 열어서 인도할 뿐이다. 그러므로 6행이라 하는데, 이 일도 역시 그렇다.
또 의식 중의 온갖 분별하는 인연도 다섯 가지 식 중에는 없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식 중에는 번뇌가 없는 줄 알 것이다.
11.19. 단과품(斷過品)
[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번뇌는 하와 중과 상에서 아홉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의 하와 하의 중과 하의 상이며, 중의 하와 중의 중과 중의 상이며, 상의 하와 상의 중과 상의 상이다. 지혜도 아홉 가지다.
이 번뇌는 먼저 상의 상을 끊고 나중에 하의 하를 끊는다.
하의 하인 지혜로써 상의 상인 번뇌를 끊으며 마침내 상의 상인 지혜로써 하의 하인 번뇌를 끊는다”고 하니,
그 일은 어떻게 되는가?
[답] 한량없는 마음으로 모든 번뇌를 끊는다.
왜냐하면 경전 중에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유하자면 교묘한 솜씨를 지닌 목공이 손으로 도끼 자루를 잡고 눈으로 눈금을 보되 비록 나날이 이루어져 가는 많지 않은 분량을 분별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다 되어가는 것을 보고서 그제야 다되어진 것을 아는 것과 같아서 비구도 역시 그렇다.
도를 수행할 때에 비록 오늘에 다한 얼마 만큼의 번뇌와 어제 다한 얼마만큼의 수량을 따져서 알지는 못할지라도 다한 뒤에는 그제야 번뇌가 다한 줄을 알게 된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한량없는 지혜로 모든 번뇌를 다하는 것이요, 여덟 가지도 아니고 아홉 가지도 아닌 줄 알 것이다.
[문] 어떤 선정에 의지하여 어떤 번뇌를 끊는 것인가?
[답] 일곱 가지 의지할 곳으로 인하여 번뇌를 끊는다.
마치 경전 중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초선천(初禪天)의 선정에 의지하여 번뇌가 다하고, 내지 아무것도 없는 하늘[無所有處天]에 의지하여 번뇌가 다한다”고 하셨다.
또 이 일곱 가지 의지를 여의고도 번뇌를 다할 수 있으니
마치 수시마경(須尸摩經) 중에서
“일곱 가지 의지할 곳을 여의고도 번뇌가 다할 수 있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욕심 세계의 선정에 의지하여서도 번뇌를 다할 수 있는 줄 알 것이다.
[문] 견도에서 끊을 바 번뇌는 무형 세계 선정에 의지하여 끊지 않아야 된다. 이 수행하는 사람은 물질의 모양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답] 이 일은 먼저 “무형 세계의 선정도 물질을 반연한다”고 대답하였다.
[문] 먼저 초선으로부터 차례로 욕심을 여의고 2선 등에도 달하는가? 아니면 한꺼번에 도달하는가?
[답] 응당 차례로 진행해야 한다. 초선의 욕심을 여의고 2선 등에 나기 때문이다.
[문] 욕심 세계 중에서도 차례가 있는가?
[답] 모든 번뇌는 생각생각에 사라지기 때문에 역시 차례가 있어야 한다.
마치 염마천(炎摩天)에서는 포옹하는 것으로 음욕을 성취하고, 도솔타천(兜率陀天)에서는 대화하는 것으로 음욕을 성취하고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서는 서로 보는 것만으로 음욕을 성취함과 같다.
그러므로 욕심 세계의 번뇌도 점차로 다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복덕을 지은 인연으로 그 중에 가서 나는 것이요, 번뇌를 끊기 때문은 아니다”라고 한다.
희망하는 바가 미묘하기 때문에 차별이 잇음을 이룩한다.
또 근기가 우둔하기 때문에 포옹하고서야 음욕을 이루는 것이요, 근기가 점차 영리하기 때문에 서로 보기만 해도 음욕을 이루는 것이다.
[문]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수도에서 끊을바 번뇌는 점차로 끊어가나니, 먼저가 욕심 세계 매임[繁]이요, 나중이 형상 세계와 무형 세계 매임이며, 견도에서 끊을 바는 한꺼번에 끊는다”고 하는데
그 일은 어떻게 되는가?
[답] 진리의 끊을 바에 따르면서도 실지로는 온갖 번뇌는 사라짐의 진리를 본 다음에야 끊어진다.
이 일은 먼저 설명하였으니, 이른바 견도에서 끊을 바 몸에 대한 고집 등의 번뇌도 다 사라짐의 진리를 본 다음에야 끊어지며 난위의 법[煖法]으로 부터서는 무상하다는 등의 행으로 다섯 가지 쌓임의 모양을 관찰함으로써 번뇌를 끊기 시작하여 사라짐을 보고서야 비로소 다하게 된다.
[문] 욕심 세계 매임의 고통을 관찰하여 욕심 세계의 번뇌를 끊고 쌓임도 역시 같다.
욕심 세계와 같아서 생각도 생각 아님도 아닌 하늘[非想非非想處天]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
욕심 세계의 사라짐을 관찰하여 세 가지 세계의 번뇌를 끊고 도에 대한 것도 그와 같다.
그 일은 어떠한가?
[답] 사라짐의 지혜[滅智]가 능히 번뇌를 끊는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옳지 아니하다.
[문] 경전 중에서
“다섯 가지 쌓임이 무상하다 함을 관찰하기 때문에 수다원으로부터 아라한의 과위까지를 얻는다”고 하였거늘
그대는 어째서 “사라짐의 진리를 관찰하는 것만으로 번뇌를 끊는다”고 말하는가?
[답] 이 다섯 가지 쌓임을 관찰하는 지혜는 생과 멸을 합하여 관찰하기 때문에 번뇌[結使]를 끊는다.
마치 경전의 말씀에서
“비구야 ‘이 물질은 바로 물질의 쌓임이요 바로 물질의 사라짐이라’고 관찰할 것이며,
또 ‘법을 보고 법을 알면 번뇌가 끊어진다’고 말해야 한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사라짐의 진리를 보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다하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또 다섯 가지 쌓임은 그것이 고통이어서 그 가운데서 모든 번뇌가 생기며 만일 다섯 가지 쌓임의 사라짐을 보면 적멸하고 안온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고통에 대한 생각이 두루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모든 쌓임이 사라짐을 보면 번뇌가 다하는 줄 알 것이다.
“모든 법은 자체의 개성이 없으므로 하나의 버림[捨]의 마음에 의지하여 끊어진다”는 말과 같아서
자체의 개성이 없다는 것이 곧 사라짐이다.
만일 수행하는 이가 물질의 자체가 없음과 의식까지도 자체가 없는 줄을 보면 바로 깊이 번뇌를 다 여의게 된다.
또 세 가지의 해탈의 문[解脫門]은 다 열반을 반연한다. 이 해탈의 문으로써 번뇌를 끊는 것이요, 그 밖의 방편은 없다.
그러므로 다만 함이 없음[無爲]만이 도를 반연하여 번뇌를 끊는 줄 알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는 번뇌를 끊는 법은 그 일이 옳지 못하다.
[논자(論者)의 말]
모든 번뇌에는 이와 같은 한량없는 분별문(分別門)들이 있다. 그러므로 해탈을 구하는 이는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속박[縛]의 허물을 앎으로써 해탈을 얻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원수를 알기 때문에 멀리 여의는 것과 같고 험한 길을 알기 때문에 피하는 것과 같이 번뇌도 그와 같다.
또 번뇌의 속박은 몹시 미세하여 비마질다(毘摩質多) 아수라왕의 속박보다도 더하고 내지 유정천(有頂天)의 중생조차도 오히려 괴로움에 속박되는 것이니, 그러므로 그의 허물됨을 알아야 한다.
또 중생은 유정천에서까지도 오히려 도로 타락하게 됨은 다 번뇌의 허물을 보아 알지 못한 까닭이다.
또 맺음[結]을 끊지 못하기 때문에 뛰어난 체[增上慢]하는 마음을 내어 “자기는 벌써 번뇌를 끊었다”고 말하다가 뒤에는 곧 의심하고 뉘우친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의 허물을 알아서 그에게 속아 떨어지지 말아야 한다.
또 만일 중생으로서 청정하고 미묘한 열반의 쾌락을 버리고 도리어 비루한 욕심 세계의 쾌락과 위의 세계[有]의 쾌락을 탐내면 그것이 번뇌의 허물이다. 번뇌를 끊으면 큰 이익을 얻는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의 허물을 알고 깨달아야 한다.
또 해탈하는 법을 장애하는 것이 이른바 번뇌이다. 만일 번뇌를 끊지 아니하면 언제까지라도 해탈할 인연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번뇌는 바로 몸의 인연이요, 번뇌에 따라 몸이 있고 몸을 따라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통을 여의려하는 사람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모든 번뇌를 끊어야 한다.
11.20. 명인품(明因品)
[문] 번뇌가 몸의 인연이라는 것을 당연히 밝혀야 한다.
왜냐하면 모든 외도들은 이 일을 믿지 아니하면서 혹은 말하기를
“이 몸은 인도 없고 연도 없어서 마치 초목이 저절로 남과 같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만물은 바로 대자재천 등이 내는 바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만물은 세성(世性)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작은 티끌이 화합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한다.
이와 같은 말들을 하는데 그러므로 밝혀야 한다.
[답] 업으로부터 몸이 있다 하는 그 일은 먼저 성립되었거니와 이 업은 번뇌로부터 생긴다. 그러므로 번뇌로써 몸의 인연을 삼는다.
[문] 어떻게 번뇌로 인하여 업이 있는 줄을 아는가?
[답] 붙인 이름[假名]인 마음을 따르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붙인 이름인 마음은 모든 업을 쌓는다. 그러므로 번뇌의 인연으로는 업이 있다는 줄 알 것이다.
또 아라한의 모든 업은 쌓이지도 않고 이루어지지도 아니한다.
그러므로 모든 업은 번뇌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줄 알 것이다.
경전 중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되,
“만일 사람이 밝음을 얻고 무명을 버리면 이 사람은 복의 업과 죄의 업과 움직임이 없는 업[無動業]을 일으키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또 샘이 없는 업도 없느니라”고 하심과 같다.
그러면 모든 업을 일으키고 샘 없는 마음은 붙인 이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업을 일으키지 않는 줄 알 것이다.
또 배울 것 있는 이는 지어감[行]이 없다.
마치 경전의 말씀에서
“배울 것 있는 이는 돌아오면서 지어가지 않고 사라지면서 짓지 아니한다” 함과 같다.
짓는 모양이 바로 지어감이요, 지어감을 업(業)이라 한다.
또 샘이 없는 마음은 지어감의 모양이 아니기 때문에 샘 없는 업까지도 없다. 그러므로 온갖 모든 몸을 받는 업은 다 번뇌로 인하여 생긴다.
또 번뇌를 끊으면 다시 나기[生]를 받지 않으리니 그러므로 몸이 있는 것은 다 번뇌로 인한 줄 알 것이다.
[문] 온갖 중생은 다 본래 번뇌가 없었는데, 태어난 뒤부터 일어난 것이니, 마치 사람이 태어났을 때에는 이가 없다가 나중에 나는 것과 같다.
[답] 그렇지 않다. 번뇌가 있는 사람이면 모든 모양에 따르는 것이니, 울음을 우는 따위는 태어날 때로부터 실제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번뇌와 함께 생기는 줄 알 것이다.
현재에 보더라도 중생은 거의가 뒷간 따위에서 생기는 것이요, 반석 따위 중에서는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음과 맛 등을 탐착하기 때문에 그러한 가운데서 생기는 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번뇌로부터 생긴다.
[문] 지옥 따위에서는 가서 나지 아니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나 지옥 따위를 탐내거나 좋아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답] 중생은 어리석은 힘 때문에 뒤바뀐 마음이 생기어 죽으려 할 때에 멀리서 지옥을 바라보며 그것이 꽃으로 된 못이라 생각하면서 탐착하기 때문에 바로 그 가운데에 가서 난다.
마치 경전 중에서
“만일 사람이 협착한 데서 죽으면서 넓은 곳을 얻고 싶어 하면 날짐승을 안에 가서 나며,
만일 목이 말라 죽으면 물벌레로 되며,
만일 얼어 죽으면 열지옥(熱地獄)에 가서 나며,
더위에 말라서 죽으면 한빙(寒氷)지옥에 가서 나며,
만일 음욕을 탐착하면 참새에 가서 나며,
만일 음식을 탐내면 송장 속의 벌레로 가서 난다”고 함과 같다.
또 탐착으로 인하여 모든 악업을 지으며, 모든 악업의 인연이 감해지면 과보를 받는다.
또 몸을 탐착하기 때문에 모든 업이 과보를 내게 된다. 왜냐하면 자기의 몸을 탐착하면 어리석은 힘 때문에 교만 따위의 모든 번뇌가 생기고 그로부터 업을 모으고 업의 힘 때문에 여러 가지 갈래 안에 가서 나기 때문이다.
[문] 만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다면 번뇌를 끊으면 다섯 가지 쌓임은 다시는 서로 이어가지 않겠구나.
[답] 이 몸이 본시 번뇌로 말미암아 났는지라, 번뇌가 비록 다했다 할지라도 그 세력 때문에 몸은 아직도 끊어지지는 아니한다.
마치 막대기로 수레바퀴를 돌리다가 잠시 동안 막대기를 멈춘다 할지라도 수레바퀴는 그대로 멈추지 아니함과 같다.
[문] 만일 먼저 지은 업과 번뇌의 세력 때문에 몸이 있다면 번뇌를 끊은 그 사람도 먼저 지었던 업과 번뇌의 세력 때문에 역시 몸을 받아야겠구나.
[답] 반드시 모양을 붙잡기[取相] 때문에 식(識)은 머무를 수 있는 것이라 이 사람은 전생에 지었던 업의 세력이 다하고 지금은 형상 없는 해탈의 문을 잘 닦기 때문에 내생의 몸은 받지 아니한다.
마치 뜨거운 돌 위에는 모든 씨앗이 나지 아니함과 같다.
이와 같아서 지혜의 불로 모든 식의 처소를 태워 버리면 식의 종자는 생기지 아니하여 뒤의 계속도 끊어진다.
또 모든 법의 인연이 갖추어지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는 계속되지 않음은
마치 경전 중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식(識)은 종자가 되고 업은 밭이 되고 탐애는 물이 되고 무명은 덮개가 되어서 이 인연으로 후생 몸을 받거니와 아라한은 이런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기 때문에 후생 몸이 없다”고 하심과 같다.
그러므로 번뇌의 인연으로 나기를 받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번뇌가 없는 사람에게도 고통을 아는 마음이 있거니와 지금 나기를 받은 사람은 이러한 마음이 있음을 못 본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사람은 후생 몸을 받지 아니한다.
[문] 수다원들에게도 괴로움 따위의 마음이 있는데도 태어날 때에는 역시 있음을 보지 못한다.
[답] 모든 아라한은 지혜의 힘이 억세어서 온갖 번뇌가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죽으려 할 때에 몸을 받아 남을 장애하거니와 수다원들은 지혜의 힘이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가 되지 아니한다.
또 그대는 “이가 뒤에 차차로 나는 것 모양으로 번뇌도 그렇다”고 하나 그 일은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아라한의 샘이 없는 지혜는 번뇌를 불태우기 때문에 다시 날 수 없는 것은 마치 볶은 종자가 다시 날 수 없음과 같기 때문이다.
또 현재에 보건대, 금세에 번뇌로부터 몸이 태어나는 것은 마치 탐욕으로부터 몸 빛깔이 변해짐과 같다.
성냄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후세의 다섯 가지 쌓임도 역시 번뇌로부터 생기는 줄 알 것이다.
[문] 또한 보건대, 음식 등의 인연으로부터 다섯 가지 쌓임이 살아감이 있는데도 음식을 이름하여 몸을 받는 인연이라고 하지 아니한다.
[답] 음식은 마음에 의지하여 물질들을 내지만 번뇌는 그렇지 않아서 다시 의지할 곳이 없이도 물질들을 낸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는 몸의 인연이다.
또 현재에 보건대, 참새 따위는 욕심이 많고, 독사 따위는 성냄이 많고 돼지 따위는 어리석음이 많다.
그러므로 이 모든 중생은 반드시 이 음욕 따위의 모든 번뇌를 닦고 쌓았기 때문에 이 안에서 생겨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문] 생기는 곳은 으레 그런 법이요, 전생부터 번뇌의 인연을 닦아 쌓은 것은 아니다.
[답] 만일 그렇다면 음욕들은 인연이 없는지라 이 일은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전생부터 인연을 닦고 쌓았던 것에 따라 있는 것이다.
또 탐냄과 성냄 따위의 번뇌가 치성하면 살생 등의 모든 죄악을 지으며, 이 죄악 때문에 현세에서 매를 맞고 구속되는 따위의 고통을 받는다.
만일 번뇌가 얇으면 계행을 지니고 선행을 닦는 이익들을 얻으며 이 계행과 선행으로 인하여 현재에 명예와 이것 등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니, 현세의 손해와 이익 따위는 다 번뇌로 인한다.
그러므로 내생 또한 이와 같은 줄 알 것이다.
[문] 만일 번뇌로 인하여 몸이 있다면 나고 죽음의 왕래가 끊기리라. 왜냐하면 번뇌가 치성하기 때문에 나쁜 갈래 중에 떨어져서 기왕에 죄의 몸을 받은지라 번뇌가 다시 더하여 영영 벗어날 인연이 없다.
이렇게 되면 좋은 곳에 태어날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며, 만일 복된 몸을 받으면 복이 더욱 더하기 때문에 역시 악한 곳에 가서 나지 아니해야 하리니 이렇게 되면 나고 죽음의 왕래가 없으리라.
[답] 이 사람은 비록 나쁜 곳에 떨어졌을지라도 혹 착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비록 좋은 곳에 태어났을지라도 혹 나쁜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다.
그러므로 생사의 왕래는 끊어지지 아니한다.
또 탐냄 등의 번뇌가 줄어짐에 따라서는 좋은 곳에 가서 나며 탐냄 등의 번뇌가 많음에 따라서는 나쁜 곳에 가서 나기도 함은 마치 돼지나 개들과 같다.
번뇌가 줄어짐에 따라서 좋은 곳에 가서 난다 함은
번뇌가 얇아지기 때문에 보시도 행하고 계율 등의 복을 지니어 여섯의 욕심 세계의 하늘에 가서 나며, 음욕을 끊었기 때문에 수승한 정(定)의 쾌락을 얻으며, 온갖 번뇌가 다하면 비할 데 없는 열반의 쾌락을 얻음과 같다.
그러므로 이 몸은 번뇌로 인하여 있게 된 줄 알 것이다.
또 현재에 보건대 중생이 퇴폐한 국토와 모든 악인의 피폐한 처소를 즐겨하는 것은 모두 다 탐착으로 말미암는다.
그러므로 알아라. 나고 죽는 가운데서 중생의 사는 곳도 역시 탐착으로 말미암음은 마치 불나방이 밝은 빛을 탐내다가 등불에 타버림과 같다.
이 탐착은 지혜로부터서는 생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나방은 불 그것이 괴로움의 닿임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 속에다 던지는 것이니,
그와 같아서 중생이 내생의 몸의 고통에 떨어짐은 다 무명의 인연으로 탐애 때문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마치 물고기가 낚시를 삼키고 노루가 소리를 따르는 것은 다 탐착 때문에 죽음을 당함과 같으며,
또 사람이 탐착 때문에 멀리 다른 지방에 갔다가 돌아올 수 없음과 같다.
그러므로 다 번뇌 때문에 생기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나무를 뿌리마저 뽑지 아니하면 그 나무는 오히려 살아나듯이 탐욕의 뿌리를 뽑지 아니하면 고통의 나무는 항상 남아 있다.
부처님의 말씀에서
“나무를 뿌리마저 뽑지 아니하면 아무리 잘랐더라도 아직도 살아 있고 탐냄의 번뇌를 뽑아 버리지 아니하면 자주자주 고통을 받는다”고 하심과 같다.
또 이 몸은 깨끗하지 못하고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고 나가 없다는 것인데, 어리석음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면 어떤 지혜 있는 사람이 이런 고통을 탐내려 하겠는가?
마치 장님이 때 묻은 옷에 속아서 보배로 꾸민 것으로 여김과 같이 무명에 눈이 가려지면 허물과 근심이 많은 깨끗하지 못한 다섯 가지 쌓임을 받는다.
또 나라를 마음 때문에 몸을 받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버리지 못하는데 만일 나라는 마음만 없으면 능히 멀리 여윈다.
마치 사리불이
“청정하게 계행을 지니고 도를 얻은 이라면 죽을 때에 기뻐하기를 독약 그릇을 부수는 것 같아진다”고 함과 같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다.
또 어떤 이는 지혜가 없으므로 이 몸을 탐착하는 것이
마치 그림을 그린 상자에 부정한 것을 가득 채워 놓고 아직 열기 전에는 좋아하다가 열고 보면 냄새가 나서 더럽게 여김과 같다.
또 독사가 가득 찬 어두운 방안에서 등불이 아직 비치기 전에는 애착을 냈다가도 보게 되면 곧 버리고 떠남과 같이,
중생도 그러하여 무명이 있는 곳에 떨어지면 세간을 즐겁게 여기다가 만일 밝음이 생길 때에는 마음이 곧 싫어져서 여읜다.
이와 같이 탐애가 몸의 근본이 된다. 왜냐하면 탐애 때문에 구하기 때문이다. 구하는 데는 두 가지가 있다. 욕구(欲求)와 유구(有求)이다. 현재의 모든 욕망을 구하는 것을 욕구라 하고 다시 내생 몸을 구하는 것을 유구라 한다. 그러므로 탐애는 몸의 근본인 줄 알 것이다.
또 다섯 가지 쌓임에 집착하면 몸에 대한 고집이 생기어서 “이것이 나다”고 함을 아어취(我語取)라 한다.
이 고집 때문에 나머지 세 가지 고집[取]이 생기며, 고집의 인은 존재에 반연하고 존재의 인은 나기[生]에 반연한다. 그러므로 번뇌는 몸을 받는 근본인 줄 알아야 한다.
또 이 몸은 모두가 괴로움뿐이다. 이 괴로운 몸에서 즐겁다는 뒤바뀐 생각을 내고, 이 즐거움의 뒤바뀜 때문에 뒤바뀐 욕망을 내며, 이 뒤바뀐 욕망 때문에 내생 몸을 받는다. 그러므로 알아라. 탐애의 인연으로 몸이 있다.
또 이 몸은 음식의 인연 때문에 살게 된다. 단식(揣食)에 집착하기 때문에 욕심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함은 업품(業品) 중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내음과 맛을 탐내기 때문에 뒷간 등에 나고 닿임을 애착하기 때문에 포태(胞胎) 중에서 태어나고 따뜻하거나 서늘한 닿임에 애착하기 때문에 알로 낳거나 습기로 생겨서 다 같이 욕심세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 가지의 닿임으로 인하여 세 가지의 느낌[受]을 내기 때문에 “닿임의 인은 느낌에 반연한다”고 말한다.
의사식(意思食)도 그와 같아서 내생의 원을 일으켜 “나는 장차 이렇게 되어야겠다”라고 하여 보거나 앎이 없는 식(識)을 탐애의 근본으로 삼아 내생 몸을 성취한다.
이와 같이 네 가지 먹는 것도 다 탐애로 말미암는지라 온갖 중생은 다 먹는 것으로 생존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애욕의 인연으로 생겨난다.
또 네 가지로 나는 난생(卵生)과 태생(胎生)과 습생(濕生)과 화생(化生)은
음욕을 좋아하기 때문에 알에서 나고 태에서 나며,
내음과 맛 들을 탐내기 때문에 습기로 나게 되고
그 좋아하는 바에 따라 크고 무거운 업을 일으키면 변화로 나게 된다.
그러므로 알아라. 네 가지로 나는 차별은 다 탐애로 말미암는다.
또 네 가지로 몸을 받는 것이니, 제가 주기는 하나 남이 죽이지는 못하는 이와 같은 네 가지는 다 탐애의 차별 때문에 있게 된다.
그러므로 알아라. 탐애의 인연으로 몸이 있다.
또 4식처(識處)는 색식주(色識住)에 따르면 물질을 의지하고 물질을 반연하여 기쁨으로써 더 윤택하게 한다.
수ㆍ상ㆍ행도 그와 같다.
그러나 식 그것이 식처라고는 말하지 않음은 아는 그때에는 번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다.
또 열두 가지 인연은 다 무명으로 말미암는다. 왜냐하면 붙인 이름[假名]의 마음에 따름을 무명이라고 하며, 이 무명으로 인하여 복된 행과 죄의 행과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행[不動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중생을 안락하게 하여함을 복된 행이라 하고 중생을 괴롭히는 것을 바로 죄의 행이라 하고,
마음을 자비(慈悲) 등에 껴잡음을 움직이지 않는 행이라 한다.
이 모든 업에 따라서 식은 내생 몸에 머무르며, 식에 의지하여 이름과 물질ㆍ여섯 가지 감관ㆍ닿임ㆍ느낌을 내는 것이니, 이 네 가지는 전생의 업과 번뇌의 과보이다.
다시 이 느낌으로 인하여 욕망[愛]과 잡음[取]과 존재[有]를 내며 이 업과 번뇌가 내생의 나기[生]와 늙어 죽음 등을 낸다.
이와 같이 하여 열두 가지 갈래의 서로 이어감은 다 무명으로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게 된다.
또 나고 죽음은 끝이 없다.
어떻게 그러한 줄을 아는가?
경전 중에서 말하기를
“업의 인연으로부터 눈 등의 감관이 있고 욕망을 인으로 하여 업이 있고 무명을 인으로 하여 욕망이 있고 무명은 삿된 생각을 인으로 하고 삿된 생각은 도로 눈이 물질을 반연함을 인으로 하여 어리석음에 따르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알아라. 나고 죽음은 돌고 돌아서 끝이 없다.
만일 “자재천을 인으로 한다”고 하면 끝없는 것이 아니므로 이 일은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게 된다.
또 번뇌를 없앴다 하면 해탈을 얻게 된다.
또 중생의 몸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만일 자재천 등으로 원인한다면 여러 가지가 아니어야 되나 번뇌와 업이 많은 종류이기 때문에 몸도 한결같지 아니하다.
또 22근(根)에서는 여섯 가지 감관으로 인하여 여섯 가지 식을 내고 이 중에는 남근(男根)과 여근(女根)이 있으며
이 모든 법이 서로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목숨[命]이라고 한다.
이 목숨은 무엇으로써 근본을 삼는가?
이른바 업이다. 이 업은 번뇌에서 원인하고 번뇌는 느낌에 의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의 느낌을 근본으로 삼으며, 이와 같이 차츰차츰 하여 나고 죽음이 서로 이어지고 신근(信根) 등에 의지하여 능히 서로 이어감을 끊는다. 이와 같이 22근의 나고 죽음에 왕래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모두가 다 번뇌로써 몸이 있다.
또 해탈을 구하는 사람은 계율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지견(解脫知見)의 종류를 내는데, 이러한 것이 어디에 소용되는가?
모두가 번뇌를 없애기 위한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그의 이익됨을 보았기 때문에 이 여러 가지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게 된다.
또 모든 번뇌는 순서를 따라 사라져 없어진다.
세 가지의 맺음[結]을 끊어서 수다원의 과를 얻고,
탐욕의 따위가 얇아지면 사다함의 과를 얻고,
욕심 세계의 맺음이 없어지면 아나함의 과를 얻고,
모든 선정의 가운데서도 또한 그와 같으며, 순서에 따라 모두가 없어지면 아라한의 과위를 얻는다.
이와 같이 모든 번뇌가 차례로 사라지게 됨에 따라 몸도 점차로 사라진다. 만일 자재천 등을 원인으로 삼는다면 점차로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게 된다.
또 탐냄 따위의 번뇌는 모든 착한 사람이 다 끊기를 바라서 없어지는지라 반드시 탐욕 따위의 인연이 금생이나 내생에 쇠망과 괴로운 일임을 보게 되어야 그 때문에 끊기를 구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끊으려 하지 아니한다.
혹 어떤 사람은
“몸은 자재천 등을 원인으로 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람 역시 탐욕 따위를 끊으려 한다.
그러므로 알아라. 탐욕 따위의 인연으로 몸이 있게 된다.
또 지혜 있는 사람은 지혜로써 해탈을 얻는 줄을 아는지라, 지혜가 없기 때문에 속박되는 줄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다.
또 부처님은 여기저기의 경전 중에서
“탐냄의 기쁨이 다하기 때문에 바른 해탈을 얻나니, 왜냐하면 눈과 물질 따위를 속박이라고 하지 않고 탐냄의 기쁨을 속박이라 하기 때문이다.
탐냄의 기쁨을 부수기 때문에 마음은 바른 해탈을 얻고 바른 해탈을 얻은지라 마음은 열반에 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알아라.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다.
또 공과 형상이 없음[無相]과 지음 없음[無作]으로 해탈을 얻는다.
그러므로 번뇌의 인연으로 몸이 있는 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공이라 형상으로 얻을 수 없는 줄 관찰하면 사라지는 형상이기 때문에 내생의 몸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을 해탈의 문이라 하고, 그와 서로 위반되면 속박이라 한다.
이러한 일들 때문에 번뇌로 말미암아 몸이 있다는 일이 벌써 분명하여졌다.
집제의 부분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