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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24권
변연기품 ④
3) 중유의 존재증명: 경전상의 근거[經證]
또한 성교(聖敎)에서 중유가 존재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유(有)에는 일곱 종류가 있으니, 5취의 유와 업유와 중유가 바로 그것이다”고 하였다.13) 또한 경에서 건달박(健達縛)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계경에서 말하기를 “모태에 들어가게 된 것은 요컨대 세 가지의 사실이 함께 현전하였기 때문이니, 첫 번째로는 어머니의 몸의 시기가 적당해진 것이며, 두 번째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사랑[交愛]하여 화합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건달박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고 하였다.14) 중유신을 배제하고서 그 어떤 별도의 실체[物]가 존재하기에 ‘건달박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하였을 것인가?
만약 “나는 [이러한] 두 경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대가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 ‘그대가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입증할 만한 결정적 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뒤의 경은 마땅히 ‘색건타(色建陀)의 멸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고 설해야 하지만, 전승한 이가 잘못 외워 ‘건달박이 바로 나타나는 것이다’고 하였던 것이니, 이러한 상태(입태의 상태) 중에서 악기(樂器)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였다.15) 그러나 이는 경의 뜻이 아니니, 이러한 상태 중에서는 이전의 온(사유의 온)은 이미 멸하여 ‘[들어] 온다[來, 나타난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즉 다른 어떤 경 중에서는 건달박이 동ㆍ남ㆍ서ㆍ북의 여러 방소로부터 온다고 설하고 있으니, 『장마족계경(掌馬足契經)』에서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16)
“그대는 지금 아는가, 모르는가? 이러한 건달박이 바로 나타났다면 그를 바라문(婆羅門)이라 해야 할 것인가, 찰제리(刹帝利)라고 해야 할 것인가, 바로 폐사(吠舍)라고 해야 할 것인가, 술달라(戌達羅)라고 해야 할 것인가?17) 혹은 동방에서 왔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남ㆍ서ㆍ북방에서 왔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다시 이와 같이 설하였다.
“이것(건달박)은 어떠한 종족으로부터, 어떤 방소로부터 와 바로 나타나게 된 것인가?”
즉 이전의 온은 이미 멸하였으니 [그것이] ‘왔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말한 바는 다만 자신의 생각[計度]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18)
또한 세간의 논의[世論]에서도 설하기를 “두 가지 인연에 의해 남녀의 교회(交會)가 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으로, 첫째는 건달박(健達縛)이며, 둘째는 나찰사(邏刹娑)로서,19) 앞의 것은 스스로 화합하려는 [애]탐을 낳게 하기 때문이며, 뒤의 것은 강력한 힘으로 나타나 핍박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즉 중유신은 첫 번째 뜻에 부합하는 것으로, 그것은 비록 악기는 갖지 않았을지라도 건달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세간 [언설]에 따라 일시 그 명칭[名想]을 설정한 것인데, 어찌 수고스럽게 이에 대해 그토록 완고하게 주장하는 것인가?20) 설혹 그 역시 이 경(뒤의 경)을 외워 [전승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어찌 또한 이와 같은 계경을 신뢰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계경에서] “그대는 이 세상과 다른 세상과 [이 세상 다른 세상] 모두에서 마땅히 중유의 괴로움을 능히 다하지 않았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장차 몰(沒)하려고 하거나, 장차 태어나려고 하는 때’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나는 천안으로써 유정이 장차 몰하려고 하거나 장차 태어나려고 하는 것을 관찰하였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여기서 ‘장차 태어나려고 하는 것’이라는 말은 바로 중유에 근거한 것이니, 이 [세상]으로부터는 이미 몰하지만 아직 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는 구경(究竟)의 사실을 간접[遠]적으로 설한 것이다. 즉 이미 태어난 상태[已生位]에 [근거하여] ‘장차 태어나려고 하는(하였던) 것’이라는 말을 설하게 된 것으로, [계경에서] ‘대왕이시여, 지금 어디서부터 여기에 오려고 하였던 것입니까?’라고 설한 바와 같다”고 하였다.21)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마땅히 이미 몰한 상태에 [근거하여] ‘장차 몰하려고 하는(하였던) 것’이라는 말을 설했다고 해야 할 것이니, [양자 사이의] 차별의 인연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설혹 그렇다고 할지라도(다시 말해 이미 몰한 상태에 근거하여 ‘장차 몰하려고 하였던 것’이라는 말을 설하였다고 할지라도) 중유는 역시 이루어질 수 있으니, 이 [세상]에서는 이미 몰하였지만 아직 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태어난 상태에서 [‘장차 태어나려고 하는(하였던) 것’이라는 말을] 다시 설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인 것이다. 또한 오로지 구경(究竟)의 사실만을 바야흐로 간접적인 말[遠言]로 설하였던 것은 아니니, 지금 바로 보건대 간접적으로 말할 경우에도 역시 간접적으로 설하였기 때문으로,22) 세존께서 사리자(舍利子)에게 “그대는 이 동자[童]가 지금 여기에 온 것을 관찰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장차 태어나려고 할 때’라고 하는 말은 ‘이미 태어난 상태’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니라 다만 중유에 근거한 말임이 결정코 증명되는 것이다.
또한 『가주경(可住經)』에서 의성(意成) 즉 ‘의식으로 이루어진 것’을 설하였기 때문이다.23) 즉 세존께서는 저 가주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만약 그 때 그 같은 유정류가 이미 이러한 몸을 버렸다면 의성 중에 머물게 될 것이니, 그 후의 어떤 종류의 소의신도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그것을 [의성이라고] 말[施設]한다. 그리고 그 때 머물게 될 의성에는 응당 애(愛)와 취(取)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곧 여기서 의성(意成)이라는 말은 바로 중유신(中有身)을 말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결정코 중유가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자신의 주장에 따라 이 경을 그릇되게 해석하여 “의성(意成)이라는 말은 무색계를 나타낸다”고 말하였다. 즉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주의 친구가 목숨을 마치고서 유색천(有色天, 욕ㆍ색계천)을 뛰어넘어 무색계에 태어났는데, 가주는 천안통으로써 능히 볼 수 없음을 관(觀)하고서 세존께 와서 물으니, ‘만약 그 때 그 같은 유정류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하였던 것이다. 곧 여기서 ‘어떤 종류의 소의신’이란 욕ㆍ색계의 소의신을 말하는 것이며, ‘의성 중에 머물게 된다’는 말은 무색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결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마땅히 따져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중유를 부정할지라도 이러한 ‘의성’이라는 말은 다양한 뜻에 근거한 것이거늘 어떻게 결정코 무색계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겁초(劫初)ㆍ색계ㆍ무색계ㆍ변화신(變化身)ㆍ중유를 모두 다 이러한 말로 관찰하고 있으니, 그 순서대로 간략히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
예컨대 [계경에서는] “그러한 상태는 유색(有色)의 의성(意成)으로, 일체의 지체(支體, 팔다리와 몸)를 갖추지 않은 이가 없다”고 설하고 있으며,24) 또한 “어떤 부류는 단식(段食)을 먹는 하늘을 초월하여 의성천(意成天)의 처소에 따라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다.25) 또한 세존께서는 오타이(鄔陀夷, Udāyi)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의성천의 몸을 그대는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어찌 그대는 ‘이는 바로 무색계의 명칭이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26) 또한 설하기를 “이러한 몸으로부터 의식을 일으키면 다른 종류의 몸을 지닌 유색의 의성을 별도로 화작(化作)한다”고 하였으며, 또한 설하기를 “이러한 몸이 무간에 허물어지고 나면 이와 같은 온(蘊) 즉 유색의 의성을 일으킨다”고 하였다.27)
따라서 의성이라는 말은 다양한 뜻에 근거한 것이거늘 어떻게 결정코 무색계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그 밖의 다른 설도 이러한 책망과 역시 동일하다”고 한다면,28) 이치상 마땅히 그렇지 않을 것이니, [그 같은 유정류는] ‘이전의 몸은 이미 버렸지만 그 후 [어떤 종류의 소의신도]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라고 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주장은 이치상으로도 마땅히 옳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세존께서] 가주(可住)에게 무색계를 의성이라고 말하였다면, 그는 마땅히 [가주가] 천안통으로써 욕ㆍ색계를 관찰하였다고 해서도 안 될 뿐더러 [무색계에 태어나 이미] 색탐을 떠났으니 욕ㆍ색계에 태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만약 그가 태어난 곳을 추구하기(알기) 위해 천안통으로써 두 세계를 관찰하였던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무색계를 설하여 ‘[그 때] 머물게 될 의성’이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결정코 그가 태어난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경설로 보건대 ‘의성 중에 머물게 된다’는 말은 오로지 중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성취하여 나타내기 위한 말일뿐이다.
다시 어떤 경에서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인가?
경에서 다섯 종류의 불환(不還)이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는 “다섯 가지의 불환이 있으니, 첫 번째는 중반(中般)이며, 두 번째는 생반(生般)이며, 세 번째는 무행반(無行般)이며, 네 번째는 유행반(有行般)이며, 다섯 번째는 상류반(上流般)이다”고 하였는데,29) 만약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일컬어 ‘중반’이라고 할 것인가?
만약 “[중유가 아니라] 욕ㆍ색의 두 세계 중간에서 반열반을 획득하는 것을 일컬어 ‘중반’이라 하였다”고 한다면, 그러한 두 세계에 태어나지 않을 경우 중간에 존재하는 일 또한 없을 것인데 어찌 유정으로서 [욕계와 색계] 중간에서 반열반으로 나아가는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만약 “거기(욕계와 색계 중간)에 존재하는 하늘을 ‘중(中)’이라고 이름하며, [그곳에 머물면서 반열반하기 때문에 ‘중반’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한다면,]30) 이치는 필시 그렇지 않으니, 그 같은 성언(聖言)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모든 부파가 [전하는] 어떠한 경에서도 ‘중천(中天)이 존재한다’고 설한 일은 없으니,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計]에 근거한 것일 뿐이다. 또한 [그렇게 말할 경우] 그는 마땅히 크나큰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역시 마땅히 ‘생’ 등의 온갖 하늘이 존재하여 거기에 머물며 반열반을 획득하는 것을 ‘생반’ 등이라 이름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31)
만약 “중반과 생반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또한 역시 중유와 생유의 두 유(有)가 성립한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도 비록 유행반 등이 존재한다고 말할지라도 유행(有行) 등의 ‘유’를 설정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중천(中天)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인정할지라도 [생천을 설정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데] 어찌 ‘생’ 등의 경우와 통하지 않는다 하여 이 하늘의 명칭(즉 중천)을 버릴 것인가?”라고 한다면,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유행(有行) 등의 세 가지를 ‘유’라는 명칭으로 설정할지라도 별도의 작용이 없기 때문으로, 거기에 머물며 반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32) [그렇지만] 여기서 설정된 ‘중’과 ‘생’의 두 가지는 [처소라는] 별도의 작용을 갖는 것이다. 또한 필시 어떠한 경우라도 생유 중에 머물면서 반열반을 획득하는 일은 없으니, [그것은] 일 찰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반은] 더 이상 별도[의 생유]로 설정되지 않는 것이다.
나아가 유행 등의 존재를 ‘유’의 갈래[有門]로 설정하는 경우 약간의 차별적인 작용을 가질 뿐이지만, ‘중’이나 ‘생’ 등의 상태를 ‘유’의 갈래로 설정하는 경우 각기 별도의 작용을 갖기에 ‘유’라는 명칭(즉 중유와 생유)으로 별도로 설정하였던 것으로, 오로지 4유를 설정하는 것만으로도 ‘유’의 작용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으므로] 번거롭게 별도의 다른 ‘유’라는 명칭을 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약 “중천(中天)을 설정한 것은 오로지 반열반으로 나아가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생반 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까닭에서 하늘의 명칭을 별도로 설정하지 않은 것인가? 만약 “중천을 설정한 것은 이러한 작용에 근거한 것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중천이라는 [하늘의] 명칭을 별도로 설정하여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고 한다면, 생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니, 결정코 [생 등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별도의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결정적 작용이 있기에 중천(中天)이라는 명칭은 설정하면서 생 등의 [천]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따라서 [그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또한 설정된 명칭은 모두 뜻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이(중반)에 대해 다른 명칭을 거짓되게 설정할 수 없는 일이다. 이를테면 [색계에 태어나] 가행도를 부지런히 운전(運轉)하여 반열반을 획득하는 것을 유행반이라 이름하며, 가행도를 행하는 일이 없을 뿐더러 부지런히 운전하지도 않고서 반열반을 획득하는 것을 무행반이라 이름하니, 여기에 더 이상 다른 명칭을 설정할 수 없다. 곧 제시된 중천(中天)은 [뜻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만 그대 자신의 욕구[欲]에 따른 것일 뿐으로, 그 누가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고서 ‘생’ 등의 하늘을 설정하지 않을 것인가?33)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거짓된 분별론으로써는 능히 중유를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이것(중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또한 결정코 중유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일곱 가지 선사취(善士趣)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34) 그것은 즉 앞의 다섯 가지 불환에서 중반을 세 가지로 나눈 것으로, [중반으로 나아가는] 처소와 시간상에 멀거나 가깝거나 중간이거나 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35) 비유하자면 장작개비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잠시 일어났다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바로 가까이서 소멸하는 것처럼 첫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쇠붙이의 작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불꽃이 일어나 중간쯤 지속하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두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비유하자면 쇠붙이의 커다란 불꽃이 흩어질 때에는 멀리까지 이르도록 떨어지지 않고 있다가 소멸하는 것처럼 세 번째 선사도 역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사실들은 무엇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들이 주장하듯이 별도의 중천(中天)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여기에 처소와 시간상의 세 가지 품류의 차별이 있을 리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주장하는 바(중유무체론)는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제 유정으로서 [정해진] 수량(壽量)[을 다하지 않고 그] 중간에 그 밖의 나머지 번뇌를 끊은 이를 다 ‘중반’이라 이름하니,36) 계(界) 혹은 상(想) 혹은 심(尋)의 상태[位]에 이르러 반열반하기 때문에 [가깝고 중간이고 멀다는] 세 가지 품류에 대해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37)
즉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번뇌가 수면(隨眠)의 상태 중에 있을 때 단(斷)의 가행을 닦는 것을 ‘계(界)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으로, 여기서의 뜻은 종자[種]가 아직 작용[行]하지 않은 상태를 설하여 ‘계의 상태’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는 바로 이근자(利根者)의 경우이다. 또한 처음으로 번뇌를 일으킬 때 바로 정근하여 ‘단’의 가행을 닦는 것을 ‘상(想)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으로, 여기서의 뜻은 염오한 생각[想]이 처음으로 작용하는 상태를 ‘상의 상태’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는 바로 중근자(中根者)의 경우이다. 또한 번뇌를 일으키고서 오래되어 비로소 능히 정근하여 ‘단’의 가행을 닦는 것을 ‘심(尋)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한 것으로, 여기서의 뜻은 번뇌의 힘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경계대상에 대해 온갖 형태로 살펴 추구[尋求]하는 것을 ‘심의 상태’라고 하였다는 사실을 나타내니, 이는 바로 둔근자(鈍根者)의 경우이다. 세존께서는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선사취 중에서 중반을 분석하여 세 종류로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비록 교묘한 생각이기는 할지라도 그 뜻은 실로 그렇지 않으니,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현반(現般, 현신에서의 반열반)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심(尋)이 존재하지 않는 경지(제2정려 이상)에 있어서도 중반을 설하고 있으니, 올타남(嗢拕南, Udāna)의 가타(伽陀, gāthā)에서 설한 바와 같다.38)
여러 성자와 현자를 모두 합하면
4정려에 각기 열 가지가 있고
3무색정에는 각기 일곱 가지가 있으며
오로지 여섯 가지는 비상처(非想處)이다.39)
즉 이 가타 중에서는 제2정려 이상 세 경지에 대해서도 역시 중반을 설하고 있는데, 모든 중반은 다 5하분결(下分結)을 끊었기 때문에 ‘심’이 존재하지 않는 경지를 ‘심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설할 수 없을뿐더러 위의 세 경지 중에는 어떤 선사취도 결여된 것이 아니다. 또한 [그럴 경우] 무색계에도 마땅히 중반이 존재한다고 해야 할 것이니, [정해진] 수량(壽量)[을 다하지 않고 그] 중간에 반열반을 획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박가범(薄伽梵)이나 사리자(舍利子) 등 일체 [모든 유정]은 다 중반에 포섭되어야 한다. 즉 오로지 도사다천(覩史多天)에 태어나 존재하는 최후신의 보살(菩薩)을 제외하고, 아울러 북구로주(北俱盧洲)에 태어나 존재하는 제 유정을 제외한 그 밖의 모든 유정은 중간에 요절[中夭]하는 일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40)
또한 그나 혹은 그 밖의 다른 모든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모두 [장작개비나 쇠붙이의] 불꽃[札火]의 비유와 상응하지 않으니, [중반으로 나아가는데] 멀거나 가깝거나 중간이거나 하는 처소와 시간상의 차별은 중유를 떠나서는 모두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다만 자기의 견해에만 탐착하여 중유를 미워하고 등지고자 하였기[憎背] 때문에 이러한 거짓된 주장을 일으키게 된 것으로, 이는 성교(聖敎)에 근거한 것도, 정리(正理)에 따른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유가 실유라는 사실은 지극히 잘 성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유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은 어떠한 견(見)에 포섭되는 것인가?
이는 바로 인과의 연속에 미혹하여 일으킨 사견(邪見)이니, 여러 경에서 화생의 유정을 비방하는 것을 바로 사견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다.41)
4) 중유의 형상과 4유(有)
이미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는 사실에 대해 널리 분별해 보았다.
여기서 마땅히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중유는 당래 어떠한 취(趣)로 가고, 생기한 중유의 형상(形狀)은 어떠한가?
이에 대해 어떻게 의심하게 된 것인가?
이것(중유)과 생유(生有)는 동일[一]한 업의 과보라고 하든 다른[異] 업의 과보라고 하든 다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중유와 생유가 동일한 업의 과보라고 한다면, “어떤 삭취취(數取趣, 보특가라의 의역어)는 생결(生結, 생유를 초래하는 번뇌)은 이미 끊었지만 기결(起結, 중유를 초래하는 번뇌)은 아직 끊지 못하였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한 경설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모든 업은 필시 번뇌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업은 번뇌처럼 마땅히 차별이 있으며, 그런 즉 중유의 형상도 마땅히 당래의 취(趣)와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만약 중유와 생유가 각기 다른 업의 과보라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두 가지 과보(즉 중유와 생유)가 결정코 선후로서 생겨나는 것인가? 즉 이러한 중유의 업은 순현수업(順現受業) 등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42)
또한 사람 등을 보면, 비록 숙세의 업은 다를지라도 신체의 형태가 서로 유사하여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으며, 업이 비록 동일할지라도 과보 상에 차이가 있는 경우도 있으니, 그래서 이 같은 의심을 낳게 된 것이다. 온갖 취(趣)의 중유와 당래 이르게 될 [취의] 형상은 같다고 해야 할 것인가,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에
당래의 본유(本有)의 형상과 동일한데
본유란 말하자면 죽는 찰나 이전에
태어나는 찰나 이후에 존재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업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견인업(牽引業)이며, 두 번째는 원만업(圓滿業)이다.43) 중유와 생유의 두 가지 유(有)는 견인업은 동일하지만 원만업이 다르다. 즉 견인업이 동일하기 때문에 이러한 중유의 형태는 당래 본유의 형상과 서로 유사하니, 마치 도장과 찍혀진 문상(文像)이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한 마리의 돼지 등의 뱃속에서 5취(趣)의 중유가 단박에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니, 다섯 마리의 새끼가 동시에 목숨이 끊어질 경우 각기 당래 어떤 한 취 중으로 왕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지옥의 중유가 나타난 경우라고 한다면, 어떻게 어미의 뱃속을 능히 태워버리지 않을 것인가?44)
그러한 과실은 없으니, 지옥의 불은 오직 죄가 있는 유정만을 불태우기 때문으로, 그것(지옥)을 초래할 만한 업을 쌓지 않은 자나 혹은 [그러한 업을 쌓았더라도] 아직 그 과보를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 지옥의 불에 의해 태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이치상 결정적인 사실이다. 또한 그러한 [지옥의] 중유는 항상 불에 타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어미의 뱃속을 불태울 것인가? 즉 지옥의 본유조차도 예컨대 잠시 ‘증(增)’에서 노니는 때가 있어 항상 불에 타는 것이 아닌데, 하물며 그러한 중유에서는 어떠할 것인가?45)
[이에 대해] 어떤 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설혹 [지옥의] 중유도 항상 불에 탄다고 인정할지라도 [중유를] 볼 수 없듯이 [불태워지는 것도] 역시 감촉할 수 없으니, 중유의 몸은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힐난한 말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비록 온갖 ‘취’의 중유가 한 뱃속에 있을지라도 서로 접촉하거나 태우지 않으니, [각자의] 업에 의해 막혀있기[遮, prtibandha 즉 繫縛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욕계에서의 중유는 크기[量]가 비록 오륙 세 된 어린아이와 같을지라도 근(根)은 명리(明利)하다.
그러나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욕계에서의 중유는 모두 본유가 성년일 때의 크기와 같다”고 하였으며, 다른 어떤 이는 “보살의 중유는 그럴 수 있지만, 그 밖의 다른 유정의 중유도 역시 그런 것은 아니다”고 말하였다.
즉 보살의 중유는 성년일 때처럼 형상과 크기가 두루 원만하며, 온갖 상호(相好, 32상과 80종호)를 갖추었기 때문에 중유로 머물면서 장차 모태에 들어가려고 할 때에는 백 구지(俱胝, koṭi, 백 억의 뜻)의 4대주(大洲) 등을 비춘다. [그렇지만] 지역에 따른 길상스러운 상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보살의 어머니가 꿈속에서 흰 코끼리가 우측 옆구리를 통해 들어오는 것을 보게 되었던 것으로, 91겁 동안 이미 방생(傍生)으로 태어나는 것을 버렸거늘 하물며 최후신(最後身)에 흰 코끼리가 되었을 것인가?46)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중유는 모두 생문(生門, 어머니의 陰門)을 통해 들어가는 것으로, 어머니의 배(즉 우측 옆구리)를 가르고 탯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쌍생아(雙生兒)는 앞의 아이가 적은 자이고 뒤의 아이가 큰 자이다”고 하였다.47) 그러나 이치상으로 볼 때 중유는 실로 원하는 바대로 탯집에 들어가는 것이지 생문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업의 힘에 의해 태장(胎藏)에 구속되는 것이다.
색계에서의 중유의 형태와 크기는 두루 원만하여 마치 본유의 그것과 같다. [그렇다고] 색구경천(色究竟天)의 중유신의 형태가 1만 6천 유선나(踰繕那) 만큼은 크지 않지만,48) 섬부주(贍部洲)의 취(趣) 중에서는 능히 그것을 허용할 만한 처소가 없으니, 거대한 허공으로 지극히 광활하기 때문이다. [또한 색계] 중유신의 색은 말니주(末尼珠)나 등불 등의 광명과 같으니,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색계에서의 중유는 의복과 함께 태어나는데, 참(慚)ㆍ괴(愧) 즉 내외에 대한 부끄러움이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계에서의 중유는 대개 의복과 함께 태어나는 일이 없으니, 참ㆍ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보살과 선백(鮮白) 비구니만은 예외인데, [그것은 그들의] 본원력(本願力)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오로지 이 비구니만을 예외로 한다”고 하였다. 즉 그녀는 승가에 가사(袈裟)를 보시하고 수승한 원을 일으켰기 때문으로, 이에 따라 세세생생 자연적으로 의복을 구비하여 항상 몸에서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때에 따라 다른 옷으로 바뀌기도 하였다.49) 뿐만 아니라 최후 반열반하였을 때에도 바로 이러한 의복으로써 시신을 감아서 화장하였으며, 그 유골을 수습하여 솔도파(窣堵波, stūpa:탑)를 세울 때에도 역시 의복의 형태로 주위를 동여 메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보살이 일으킨 일체의 선법은 모두 오로지 무상(無上)의 보리(菩提)로 회향되기에 우리의 종의에서는 두 사람 모두가 [의복을] 갖추었다는 설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중유와] 유사하다고 한 본유의 본질[體]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사유(死有) 이전에, 생유(生有) 이후에 존재하는 온(蘊)이다. 즉 유(有)의 본질을 전체적으로 설할 것 같으면, 그것(有)은 비록 일체의 유루법성과 통하는 것일지라도 유정의 전후 상태의 차별에 근거하여 네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즉 첫 번째는 중유(中有)로서, 그 뜻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두 번째는 생유(生有)로서, 이를테면 온갖 취(趣)에서 결생(結生)하는 찰나의 존재[有]를 말한다. 세 번째는 본유(本有)로서, 태어나는 찰나를 제외하고서 그 이후부터 죽기 이전의 단계이다. 네 번째는 사유(死有)로서, 이를테면 [현세의] 최후찰나를 말한다.
만약 어떤 존재[有]가 아직 색에 대한 이탐(離貪)을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 이러한 존재가 결정코 [사유와] 무간에 중유로 일어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일생의 단계를 네 가지로 분별하게 된 것이라면, 어찌 온갖 존재 가운데 중유를 최초의 것이라고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러한 즉 본유라는 명칭은 마땅히 중유에 근거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50)
중유에 근거한 것이 아니니, 당래 무간에 생겨날 생유 등의 세 가지는 그것(중유)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존재의] 상태[位]가 당래 무간에 중유 등 온갖 [존재의] 상태를 낳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본유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본유라고 하는] 명칭은 그 밖의 생의 온갖 상태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으로, 하나[의 존재]가 [다른] 세 가지 [존재의] 상태를 낳는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이러한 [본유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유’가 무간에 결정코 그러한 ‘유’를 낳는다고 할 경우, 이러한 ‘유’를 그것에 대한 본유라는 말로 설정할 수 있다. 또한 본유라고 하는 명칭은 바로 나아가게 될 취[所趣]에 근거한 말로서, 다른 세 가지 ‘유’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본유라는] 명칭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이다.51)
5) 중유의 여러 특징―9문(門) 분별
중유의 형태와 크기[形量]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제 그 밖의 다른 뜻에 대해서도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52)
게송으로 말하겠다.
[중유는] 동류(同類)와 청정한 천안에게 보이며
업의 신통[業通]이 있어 빠르며, 근을 갖추고 있으며
무대(無對)이며, [정해진 ‘취’를] 바꿀 수가 없으며
향을 먹으며, 오래 머물지 않는다.
또한 전도된 마음[倒心]으로 애욕의 경계로 나아가지만
습생과 화생의 경우 향(香)과 처소에 염착(染著)하며
천(天)의 중유는 머리를 위로하여 [올라가고], 세 가지는 횡으로 가며
지옥은 머리를 아래로 하여 거기로 떨어진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중유신(身)은 어떠한 눈[眼]의 경계대상이 되는 것인가?
동류(同類) 즉 동일한 종류의 눈과 청정한 천안(天眼)에 의해 보인다. 이를테면 중유신은 오로지 동일한 종류의 눈과 그 밖의 청정한 천안을 닦아 획득한 이에게만 보일 뿐으로, 동일한 종류가 아니거나 청정하지 못한 천안으로는 능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다. 생득(生得)의 천안으로도 능히 볼 수 없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눈으로 어찌 능히 볼 수 있을 것인가? [계경에서] “지극히 청정한 천안을 가진 자라야 비로소 능히 [중유신을] 볼 수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지옥ㆍ방생ㆍ아귀ㆍ인간ㆍ천의 중유는 각기 순서대로 그 뒤의 것을 제외한 자신과 그 앞의 중유를 볼 수 있다”고 하였다.53)
중유의 행(行)을 능히 막을 수 있는 이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인가?
위로는 모든 부처에 이르기까지 능히 그 행을 막을 수 없으니, 온갖 신통 가운데 업의 신통[業通]이 [가장] 빠르기 때문이다. 즉 중유는 가장 신속한 업의 신통을 성취하였기 때문으로, 계경에서도 말하기를 “중유의 업력을 가장 강성하다고 해야 할 것이니, 어떠한 유정도, 어떠한 가행(加行)으로도 능히 차단하고 억지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신통[通, ṛddhi]이란 허공을 마음대로 통과하여 가는 것을 말하는데, 이러한 신통은 업에 의해 획득되기 때문에 ‘업의 신통’ 즉 업통(業通)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통은 그 세력과 작용이 신속하기 때문에 ‘빠르다’고 일컬은 것이다. 즉 중유는 바로 이러한 가장 빠른 업의 신통을 갖추었으니, 온갖 신통으로서 아무리 빨리 가는 것이라 할지라도 이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계경에서는] ‘[중유의] 업력이 가장 강성하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또한 중유는 [당래 그것이 처할] 지(地)에 따른 온갖 근(根)을 모두 갖추고 있다. 비록 [앞서] ‘중유는 본유의 형상과 같다(유사하다)’고 말하였을지라도 최초의 이숙으로서 가장 뛰어나고 미묘하기 때문에, 또한 존재[有]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갖추지 않은 근이 없는 것이다.
또한 일찍이 ‘붉게 타오르는 쇳덩어리를 쪼개어보니 그 가운데 벌레가 머물고 있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로 볼 때 중유에도 무대(無對)의 뜻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대’란 대애(對礙, 연장을 지니는 공간적 점유성)를 말하는 것으로, 이는 금강석 따위도 능히 이를 차단 장애할 수 없기 때문에 ‘무대’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것이 [당래 나아가게 될] 계(界)나 취(趣)의 처소는 어떠한 경우라도 바꿀 수 없다. 이를테면 색계 중유가 몰하여 욕계 중의 유정으로 태어나는 일은 결정코 있을 수 없으며, 이와 반대되는 일도 역시 있을 수 없으니, 이것과 생유는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으로, ‘취’의 처소가 바뀌지 않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54)
이러한 [욕계의] 중유신은 단식(段食, 혹은 搏食, 분할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에 의해 자조(資助)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바야흐로 욕계의 중유는 향을 먹는데, 복이 많고 복이 적음에 따라 향이 좋기도 하고 향이 나쁘기도 하다. 그리고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건달박(健達縛, gandharva)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니, 온갖 자계(字界, 즉 어근)에는 그 뜻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이것(건달박)의 자계인 알박(頞縛, arva)이 비록 바로 ‘간다[行]’는 뜻일지라도 여기에는 역시 또한 ‘먹는다[食]’는 뜻도 있으니, [중유는] 바로 향을 먹기 때문에 ‘건달박’이라고 이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알’이] 단음(短音)인 것은 설건도(設建途, śakandhu)나 갈건도(羯建途, karkandhu)의 경우처럼 생략되었기 때문으로, 어떠한 과실도 없다.55)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중유는 향에 의지하여 몸을 지탱하며, 향을 찾아가기 때문에 건달박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중유는 얼마 동안 머무르게 되는 것인가?
이러한 중유신은 결정코 오래 머물지 않는다.
생(生)의 연(緣)과 아직 화합하지 않은 것도 오래 [머물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대덕(大德)은 “보통은 오래 머물지 않지만 생의 연과 아직 화합하지 않은 것이라면 오래 머물 수 있으니, 이것의 명근은 별도의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 해석하고 있는 것인가?56)
[이에 대해] 유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는 다만 짧은 시간[少時] 머물 뿐이니, 중유 중에서는 항상 생(生)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결정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에게로 옮겨갈 수 없는 경우라면,57) 비록 그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중유의] 업은 [그들로 하여금] 신속하게 결합하게 한다. 만약 아버지와 어머니 중 어느 한쪽으로만 옮겨갈 수 있는 경우라면, 비록 지극히 청결한 정절로써 애욕을 꾸짖고 싫어하는 자라 할지라도 다른 경계(즉 異姓)에 대한 애염(愛染)를 일으켜 현행하게 하니, 온갖 애염를 일으키는 때를 결정지어 [애염이 일어날] 때가 아니더라도 역시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혹은 [만약 결정된 유정의 종류 중에 태어날 수 없다고 한다면] 서로 유사한 다른 종류 중에 기생(寄生)하기도 하는데, 이를테면 나귀 등의 몸은 말 등과 유사한 것이다.”58)
그리고 기생하는 것은 동분만 다를 뿐이기 때문에 중유와 생유가 동일한 업에 의해 인기된다는 사실을 어긴 것은 아니니, 생연(生緣)은 비록 다를지라도 인기된 것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설혹 서로 유사한 종류에게로 옮겨가 생을 받는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들도 최소한 동류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또한 계(界)나 취(趣)를 완전히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면,59) 비록 종류가 약간 다르다고 할지라도 역시 어떠한 과실도 없는 것이다. 즉 [어떤] ‘계’나 ‘취’의 처소로 [나아가는] 업은 결정코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밖의 다른 외적인 생연의 차별이 있을지라도 두(豆)와 족(足)의 경우 등과 같은 것인데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60) 혹은 업의 종류와 차별은 무변(無邊)이기에 오로지 불(佛)세존께서만이 능히 궁구하여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61)
중유를 바로 결생(結生)시키는 것은 어떠한 마음인가?
염오한 마음으로 [결생하니], 비유하자면 생유의 그것과 같다.
장차 생유로 이어지게 되는 방편은 어떠한가?
중유 중에 머물면서 태어날 곳[生處]에 이르기 위해 마음이 전도(顚倒)됨에 따라 원하는 경계[欲境]로 치닫게 된다. 즉 그것(중유)은 비록 멀리 떨어진 곳에 머물고 있을지라도 숙세의 업력에 의해 일어난 안근으로써 능히 태어날 곳의 부모가 교회(交會)하는 것을 보고 전도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만약 당래 남성이 되는 중유라면 어머니에 대해 애욕을 일으키고, 아버지에 대해 진에(瞋恚)를 일으키며, 여성이 되는 중유라면 이와 반대된다. 바로 이와 같은 인연에 따라 남성이나 여성으로 생겨나서는 순서대로 어머니에 대해, 아버지에 대해 편애하여 무리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래서 『시설족론』에서도 이와 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건달박은 두 가지 마음 가운데 하나를 따라 현행시키니, 이를테면 애욕이든지 혹은 진에이다”고.
나아가 그것은 다시 이러한 두 종류의 전도된 마음을 일으킴에 따라 바로 자기의 몸이 사랑하는 이와 결합하였다고 여기며, 미워해야 할[所憎] 부정(不淨)이 배설되어 탯집에 이를 때 그것이 바로 자기의 존재라고 여기고 기뻐한다.62) 즉 응당 기쁨을 낳게 되는 상태를 일컬어 ‘모태에 들어갔다’고 말하는데, 최후의 순간에 내보내진 두세 방울의 정혈(精血, 아버지의 정액과 어머니의 胎血)을 취하여 갈랄람(羯剌藍)을 성취하게 되니, 정혈과 서로 의지하여 무간으로 머문다. 바로 [이 때] 중유의 온이 멸하고 생유의 온이 생겨나는 것이다.63)
그리고 만약 [입태된 중유가] 남성일 경우 탯집 내에 처하자마자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에 의지하여 등을 향해 웅크리고 앉아있으며, 만약 여성일 경우 탯집 내에 처하자마자 어머니의 왼쪽 옆구리에 의지하여 배를 향해 머물러 있을 것이니, 여성과 남성은 좌우의 일에 익숙하기 때문이며, 숙세에 스스로 분별한 힘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나아가 욕계의 중유로서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경우는 없는데, 중유신(身)은 근을 결여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태에 들어온 후 혹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어떻게 근(根)을 갖지 않은 갈랄람의 대종이 능히 온갖 색근을 낳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인가?64)
누가 색근이 그 같은 [갈랄람의] 대종에 근거하여 [낳아진다고] 하였던가? 중유의 대종이 갈랄람의 대종을 근거로 하여 능히 생유를 낳는 것이다. 즉 그러한 중유와 갈랄람의 대종은 서로 의지하는 것으로, 중유의 대종은 최후에 소멸하는 상태에서 그것(갈랄람)을 인연으로 하여 이전의 대종과는 다른 대종을 인기하여 낳는다. 바로 그 같은 다른 대종이 능히 [색]근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 마치 종자가 싹을 낳는데 반드시 땅 등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째서 계경 중에서는 “부모의 부정(不淨, 즉 정혈)이 갈랄람을 낳는다”고 설하고 있는 것인가?
‘부정에 근거하여 [이전의 대종과는 다른 대종을] 낳는다’고 하여도 경에 위배되는 과실은 없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정혈의 대종이 전변(轉變)하는 상태에서 바로 [색]근의 소의가 된다. 즉 전 찰나의 무근(無根)의 대종은 중유와 함께 멸하고 다음 찰나 유근(有根)의 대종이 무간에 속생하니,65) 이는 마치 종자가 멸하고서 싹이 생겨나는 도리와 같다”고 하였다. 즉 그는 생유의 색법이 생겨날 때(다시 말해 제2찰나 유근의 대종이 생겨날 때) 중유의 색은 [더 이상] 상속하여 일어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싹이 종자로부터 [생겨난다]는 도리와는 서로 모순 되니, 무정(無情, 정혈)이 유정(색근)의 종자가 되어 그것을 인기한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상속도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무정과 유정의 두 색(정혈의 색과 중유의 색)이 함께 멸하였음에도 그 후에 유정의 색(유근색)이 일어나는데 무정의 색을 원인으로 하고 유정의 색은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66)
그렇기 때문에 앞의 설(중유가 낳은 또 다른 대종이 색근의 근거가 된다는 설)이 이치상 보다 뛰어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 욕계의 태생과 난생의 결생(結生)에 대해 논설하였다.
습생과 화생은 향기[香]와 처소[處]에 대해 염착(染著)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된다. 만약 습생의 중유라면 향기에 대해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니, 이를테면 멀리 떨어져 있는 태어날 곳의 향기를 냄새 맡고서 문득 애염(愛染)을 낳아 그곳으로 가 생을 받는데, 지은 업에 따라 그 향기가 청정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다. 만약 화생의 경우라면 다만 [태어날] 처소에 대해 염착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되니, 이를테면 당래에 태어나게 될 처소를 멀리서 관찰하여 알고서 문득 애염을 낳아 그곳으로 가 생을 받는데, 지은 업에 따라 그 처소가 청정하기도 하고 더럽기도 하다.
그리고 지옥에 태어나는 중유 역시 업력에 의해 혹 어떤 경우 자신의 몸이 차가운 비바람과 조우하기도 하고, 혹은 뜨거운 바람이나 맹렬히 타오르는 불길과 조우하기도 한다. 그러다 추위에 침탈되고 뜨거움에 핍박되어 그 혹독함에 참기 어려우면 따뜻하거나 시원한 것과 만나 그러한 재앙을 제거하기를 희구한다. [그래서] 열(熱) 지옥의 타오르는 뜨거운 불길이나 한(寒) 지옥의 회오리치는 차가운 바람을 보면 문득 애염을 낳아 그곳으로 치달아 몸을 던지는 것이다.67)
그러나 유여사는 설하기를 “일찍이 그것(지옥)을 초래할 만한 업을 지을 때 자신과 함께 지었던 도반의 무리[伴類]들을 보고서 애착하고 흠모하는 마음을 낳아 그곳으로 치달아 나아가게 된다”고 하였다.68)
중유가 어떠한 취로 나아갈 때, 그것은 어떠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될 처소에 이르게 되는 것인가?
먼저 천(天)의 중유는 머리를 바로 하여 상승하니, 마치 사람이 몸을 바로 세워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과 같다. 인간 등의 세 취(인간ㆍ아귀ㆍ방생)의 중유는 횡(橫)으로 나아가니, 마치 새가 허공을 날아 다른 곳으로 가는 것과 같다. 그리고 지옥의 중유는 머리를 아래로 하고 발을 위로하여 거기로 떨어지니, 그래서 가타(伽他)에서도 이같이 설하고 있는 것이다.
지옥으로 떨어질 때에는
발을 위로하고 머리를 밑으로 돌리니
온갖 선인과 적정을 즐기는 이(즉 獨覺)와
고행을 닦는 이(즉 보살)를 헐뜯고 비방하였기 때문이라네.
(1) 무색계에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이유와 이에 관한 제 논란
중유를 분별함에 있어 다시 마땅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이유에서 무색계에는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곳의 업은 능히 중유를 인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그곳의 업은 이러한 [중유를 인기할 만한] 공능이 없는 것인가?
기결(起結)을 끊고서 비로소 그곳에 태어나기 때문이다. 즉 번뇌가 업을 도와야 [업은] 바야흐로 능히 결과를 인기할 수 있는 것으로, 번뇌를 떠난 업은 [결과를] 인기할 만한 공능을 갖지 않으니, 아라한의 경우도 비록 온갖 업을 지을지라도 능히 당래의 존재[有]를 인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만약 거칠고 미세한 업을 갖춘 지(地)라면, 그러한 지 중에는 중유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무색계에는 미세한 업은 존재할지라도 거친 업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거칠고 미세한 업이라 함은 색이나 비색(非色)의 업, 혹은 신(身) 등의 [3]업, 혹은 10업도를 말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다시 마땅히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니, 어떠한 이유에서 ‘만약 거칠고 미세한 업을 갖춘 지(地)라면 바야흐로 중유가 존재한다’고 한 것인가? 지금 이 말 중에는 이와 같은 뜻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중유가 바로 미세한 것이고, 가게 될 취[所趣]가 바로 거친 것이니, 가게 될 취 중에는 [미세하고 거친] 다수의 만업(滿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취(趣)의 수명은 그 한도가 결정적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상태 중에서는 미세한 만업의 결과를 받는 일도 있고, 어떤 상태 중에서는 거친 만업의 결과를 받는 일도 있는데, 욕ㆍ색계 중에는 두 가지 업의 결과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중유가 존재하지만, 무색계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유여사는 설하기를 “중유는 태어날 처소[處]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게 될 취[所趣]의 형태[形]를 나타내기 때문에 설정한 것이지만, 무색계에는 처소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형태를 갖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색계에 태어나는 이는] 바로 자신의 죽은 시신 안의 신근이 소멸한 처소에서 목숨을 마치고 생을 받아야 하며,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아야 할 것인데, [그럴 경우] 중유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여기서는 가게 될 취의 형태를 나타내기 위해 중유를 설정한 것으로, 앞서 두 가지 연(처소와 형태)을 말하였지만 그 중 한 가지만 따르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명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가게 될 취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은 가게 될 취에 태어나는 것에 대해 뛰어난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만약 중유가 이미 일어났다면, 가게 될 취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중유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찌 가게 될 취[의 형태]를 능히 나타낼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중유가] 가게 될 취[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함은 중유[가 무색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상좌(上座)는 말하기를 “만약 목숨을 마치는 처소에서 바로 생을 받는 자라면 중유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잘된 것이 아니니, 사유(死有)의 상태에서 바야흐로 중유를 인기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어떻게 ‘만약 죽은 곳에서 태어나는 자라면 중유를 인기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이전에 이미 중유를 초래할 만한 업을 지어 증장(增長)시켰거늘 지금 무엇이 장애하여 중유라는 결과가 일어나 현전하지 않게 하는 것인가? 혹은 다시 중유와 생유는 동일한 업의 결과로서, 중유는 바로 이러한 일기(一期)의 생의 첫 단계이다. 그런데 만약 중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생은 마땅히 상속하지 않아야 할 것으로, 이는 마치 어떠한 경우에도 갈랄람을 뛰어넘어 알부담(頞部曇)이 생겨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으니, 이(갈랄람)는 바로 그것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일기의 첫 단계는 바로 생유로서, 중유가 첫 단계는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인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한다면, 이는 어떠한 뜻도 없는 헛된 말일 뿐이니, 그러한 생결(生結)과 기결(起結)이 모두 아직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69) 그대 역시 생결을 아직 끊지 않았다면 생이 존재한다고 마땅히 인정해야 하는 것으로, 혹 존재하지 않는다면 달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유(有)의 온은 모름지기 별도의 소용(쓰임새)이 있어야 비로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온은 반드시 ‘아직 애탐을 떠나지 않았다’는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중유가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이유이다. 예컨대 탯집 중에서 결정코 마땅히 죽을 자의 경우, 원인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무슨 소용에서 근이 생겨나는 것인가?70)
만약 “이는 마땅히 중반열반(中般涅槃)하는 자에게 생[유]의 만업(滿業)이 존재하지 않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바로 죽은 처소에서 태어나는 자의 경우에도 중[유]의 만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예증은 동일한 경우가 아니다. 즉 생유의 상태가 반드시 중유에 근거해야 하듯이, 중유의 상태 역시 생유에 근거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러한 예증은 동일한 경우가 아닌 것이다.
이에 따라 아직 제4정려의 탐을 떠나지 않은 모든 이로서 그가 만약 생유의 만업을 이미 지었다면 필시 중유의 만업 역시 능히 지었을 것으로, 저절로 성취하였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혹은 어떤 불환(不還)은 대치력에 의해 [생의] 상속을 굴복시켰기 때문에 생결은 [더 이상] 현행하지 않으니, 이러한 불환(즉 중반열반)은 오로지 능히 중유의 만업만을 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같은 대치력을 결여하였다면, 바로 [생결과 기결] 모두에 떨어지게 될 것이니, 그에게는 그러한 두 결(結)이 현행하는 것을 장애할 만한 어떠한 공능도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아직 색계의 탐을 떠나지 않는 자의 생유는 반드시 중유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설혹 죽은 곳에서 바로 생을 받는 자라고 할지라도 역시 마땅히 ‘사유와 무간에 중유가 바로 생겨나며, 중유와 무간에 생유가 바야흐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결정코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중유에는 결정적인 특성[相]이 있다. 이를테면 아직 욕ㆍ색계의 탐을 떠나지 않은 생유는 어떠한 경우라도 중유로부터, 그 이후에 일어난 것이다. 또한 역시 중유와 그것이 나아가게 될 취[所趣]의 생유는 어떠한 경우라도 동일한 업에 의해 견인된 결과이다. 또한 역시 중유는 어떠한 경우라도 능히 무심정(無心定)에 들어 신증(身證)이나 구분해탈(俱分解脫)이 될 수 없으며,71) 아울러 세속의 동분(同分)이 아닌 마음도 일으킬 수도 없다. 또한 어떠한 경우라도 중유 중에 머물면서 근(根)을 바꾸는 일도 없고, 또한 역시 견소단의 번뇌를 능히 끊는 일도 없으며, 아울러 욕계 수소단의 수면을 끊는 일도 없으니, 이와 같은 모든 갈래에 대해 [왜 그러한 것인지]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3. 중유의 4종 입태(入胎)
[그렇다면] 일체의 중유는 다 전도된 마음[倒心]을 일으켜 모태에 들어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째서 그러한가?
계경 중에서 “입태(入胎)에는 네 가지가 있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72)
그러한 네 가지란 무엇을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첫째는 들어가는 것[入胎]에 대해 바로 아는 것이며
둘째와 셋째는 머물고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아울러 아는 것이며
넷째는 그 모든 상태[位]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며
그리고 난생은 항상 알지 못한다.
앞의 세 가지 종류의 입태는
전륜왕과 두 부처(獨覺과 無上覺)를 말한 것이니
업과 지혜와 두 가지 모두가 뛰어나기 때문에
순서대로 그러한 것이며, 넷째는 그 밖의 생(태생)이 그러하다.
논하여 말하겠다.
어떤 제 유정들은 많은 복업과 지혜[福慧]를 닦았기 때문에 죽고 태어나는 상태에서 염력(念力)에 의해 지니게 된 심상(心想)이 분명하여 정지(正知)에 산란됨이 없다. 바로 그러한 유정 가운데 혹 어떤 이는 입태(入胎)에 대해 바로 알며, 혹 어떤 이는 입태와 아울러 주태(住胎)에 대해 바로 알며, 혹 어떤 이는 입태와 주태와 아울러 출태(出胎)에 대해서도 바로 안다. 여기서 ‘아울러’라고 말한 것은, 후자는 반드시 전자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온갖 유정으로서 복업과 지혜가 다 같이 적은 이는 입ㆍ주ㆍ출태의 상태에 대해 모두 바로 알지 못하니, 전자(예컨대 입태)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할 것 같으면 후자(예컨대 주태와 출태)에 대해서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이상에서 설한 네 종류의 입태는 일체의 입태를 모두 다 포섭한 것으로서, 여기서는 게송을 짓는 법[結頌法]에 따라 이와 같은 순서로 설하였지만 계경 중에서의 순서는 그렇지가 않다.73) 그리고 이와 같은 네 종류는 바야흐로 태생(胎生)에 어리석고 어리석지 않은 상태의 차별이 있음을 설한 것이다.
모든 난생(卵生)은 입태 등의 모든 상태에 대해 항상 무지할 따름이다.
난생은 알로부터 나오는 것임에도 어찌하여 ‘입태’ 즉 탯집[胎藏]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것(난생)은 당래(當來)에 근거하여 그 명칭을 설정한 것이기 때문에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마치 세간에서 ‘팔찌를 만든다’거나 ‘옷을 짓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74) 혹은 난생을 ‘일찍이 입태하였다’는 등으로 설한 것은, 지금[의 상태(난생)]에 근거하여 옛날[의 상태(입태)]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아무런 과실도 없는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4종의 입태] 중에는 상(想)의 승해(勝解)가 전도된 자도 있고 전도됨이 없는 자도 있기 때문에 [본송에서] ‘바로 알고[正知] 바로 알지 못한다[不正知]’고 말하였다.
즉 온갖 유정으로서 전도된 상[倒想]의 승해를 지닌 자 중 혹 어떤 이는 복업과 지혜[業智]에 과실이 있어 그가 입태하는 단계에서 전도된 상의 승해를 일으켜 큰바람과 비, 혹독한 더위나 추위, 혹은 대군(大軍)의 무리가 외치는 요란하고 위협적인 함성이 어지럽게 핍박하는 것을 보고서 [이를 피하기 위해] 마침내 자기 자신이 우거진 수풀이나 밀림ㆍ굴속ㆍ띠집에 들거나 나무나 담장 아래에 몸을 숨기는 것을 보기도 한다.75)
또한 [전도된 상의 승해를 지닌 자] 중 혹 어떤 이는 복업에는 비록 어떠한 과실도 없을지라도 지혜에 과실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전도된 상의 승해를 일으켜 모태에 드는 단계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이 아름다운 동산[園林]에 들어가 꽃으로 된 누대나 전각에 오르고, 훌륭한 온갖 평상 등에 앉거나 눕는 것을 보며, [모태 중에] 머무를 때에도 자기 자신이 그 가운데 머물고 있는 것을 보며, [모태 중에서] 나오는 단계에서는 자기 자신이 그러한 처소에서 나온다고 관찰하니, 이것이 바로 세 상태(입태ㆍ주태ㆍ출태) 모두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것[不正知]이다.
그러나 만약 온갖 유정으로 전도된 상의 승해를 갖지 않은 자라고 한다면, 그는 입태하는 단계에서 스스로 입태하는 줄을 알며, 모태 중에 머물거나 나올 때에는 스스로 머물고 나오는 것을 아니, 이것이 바로 세 상태 모두에 대해 바로 아는 것[正知]이다. 『사종입태경(四種入胎經)』은 마땅히 이 같은 뜻에 따라 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입태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는 자는 머물거나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도 필시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인가?
깨달음이 저열하고 미혹함이 뛰어나므로 이치상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장차 모태에 들어가려고 하는 상태에서는 [4]지(支)의 몸과 온갖 근(根)을 구족하여 손상됨이 없었을 뿐더러 강승(强勝)하고 명리(明利)하였음에도 바로 알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모태에] 머물거나 나올 때를 말해 무엇 할 것인가? 즉 그때는 [4]지와 근이 손상되거나 결여되었을 뿐더러 이열(羸劣)하고 암매(暗昧)하므로 능히 바로 안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 용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모태에] 머무는 것에 대한 정지(正知)는 모태에 들어갈 때의 뛰어난 정지라는 한 가지 힘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며, [모태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정지는 [모태에] 들어갈 때와 머무를 때의 뛰어난 정지라는 두 가지 힘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
또한 앞의 세 종류의 입태도 동일하지 않으니, 이를테면 그 순서대로 전륜왕(轉輪王)과 독각(獨覺)과 대각(大覺)이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즉 첫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전륜왕의 그것으로, 들어가는 상태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만, 머무는 상태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하며,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도 바로 알지 못한다. 두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독승각(獨勝覺)의 그것으로, 들어가는 상태와 머무는 상태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만,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한다. 세 번째의 입태란 말하자면 무상각(無上覺)의 그것으로, 들어가고 머물고 나오는 상태에 대해 모두 능히 바로 안다. 그리고 이러한 앞의 세 가지 입태의 인간은 당래의 명칭으로써 드러나는 인간이다.76)
다시 [세 종류의 입태에는] 차별이 있으니, 순서대로 [각기] 업과 지혜와 두 가지 모두의 세 종류가 뛰어나기 때문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즉 첫 번째(전륜왕)는 업이 뛰어나니, 숙세에 일찍이 광대한 복업을 닦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독각)는 지혜가 뛰어나니, 오랫동안 다문(多聞)을 익혀 사택(思擇)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세 번째(무상각)는 두 가지 모두가 뛰어나니, 광겁(曠劫, 3아승기겁 100겁을 말함)에 걸쳐 뛰어난 복업과 지혜를 닦고 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의 세 종류의 입태를 제외한 그 밖의 나머지 태생과 난생은 복업과 지혜가 모두 저열하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네 번째 입태가 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이러한 네 종류의 입태는 모두 보살에 대해 분별한 것으로, 말하자면 최후유(最後有)가 바로 세 번째 입태이고,77) 도사다천(覩史多天, 도솔천)의 전생(前生)이 두 번째 입태이며, 가섭파(迦葉波) 부처님을 만난 다음의 전생이 첫 번째 입태이다. 그리고 그 이전의 생은 모두 바로 네 번째 입태이다. 혹은 다시 초ㆍ제2ㆍ제3 무수겁(無數劫, 즉 아승기겁)이 그 순서대로 앞의 세 종류의 입태이며, 그 이전의 생은 모두 바로 네 번째 입태이다”고 하였다.78)
[입태 등은] 존재[有]로 상속하는 것인데, 어찌 염심(染心)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정지(正知)로서 어머니의 탯집으로 들어간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정지와 정념(正念)은 근율의(根律儀)로 설해지며, 대저 근율의는 결정코 마땅히 선심(善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같은 과실은 없으니, 일체의 정지가 모두 선성(善性)에 포섭되는 것이라고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마땅히 정지로서의 허광어(虛誑語, 즉 妄語)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혹은 입태의 상태는 상속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오로지 바로 결생(結生)하는 찰나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속의] 상태 중에서는 대개 선심이 일어나고 염오심은 적게 일어나기 때문에 ‘정지’라고 말한 것이니, 이는 마치 세간에서 ‘흰 콩 무더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79) 혹은 그들에 대해 공경심을 일으키게 하고 미란(迷亂)되지 않게 하는 것을 ‘정지’라는 말로 설정한 것으로, 이를테면 ‘이 분은 바로 나의 아버지이고, 이 분은 바로 나의 어머니이다’고 참답게 알기 때문에 ‘정지’라고 일컬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세 번째 입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최후유의 보살은 계(戒)의 과보 등에 대해서도 모두 분명하게 알고 있으며, 모태에 들어갈 때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들어가거나 머무르는 상태에 대해 바로 알지 못하였을 경우 나올 때 바로 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출태의 정지(正知)는 앞의 원인(입태와 주태에 대한 정지)에 의해 인기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실은 없으니, 무시(無始) 이래 익혀온 이와 같은 세속의 애염(愛染)으로 말미암아 [입태하기] 때문이다. 즉 세간을 현견(現見)하건대, 되풀이하여 익혀온 힘으로 말미암아 잠시 태어날 때 문득 애염을 갖는 것이다.80)
어떻게 [이 같은] 4종의 입태를 설할 수 있을 것인가? 오로지 바로 알고 입태하는 것과 바로 알지 못하고 입태하는 것의 두 종류만을 [설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모태 중에] 머물거나 나가는 것을 입태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마땅히 ‘입태에 네 종류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모태에] 들어가는 것이 [머물거나 나오는 것에 비해] 수승하기 때문에 ‘네 종류가 [있다]고 말하더라도 과실이 없다. 이를테면 모태에 들어갈 때 [바로 알고 바로 알지 못하는] 차별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머물거나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도 능히 바로 알고 [바로 알지 못하는 차별이] 있는 것이다. 즉 바로 알지 못하는 일[不正知]이 없이 어머니의 탯집에 들어가야 머물거나 혹은 나오는 상태에 대해서도 능히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에, 머물거나 나오는 것에 대해 전도된 상(想)의 승해가 없이 능히 스스로 아는 것은 들어가는 것의 차별에 의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입태’라는 말과 함께 머물고 나오는 상태를 설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머물고 나오는 상태에 대해 비록 바로 알거나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여섯 가지를 성취하지 않으니,81) 들어가는 것이 [머물거나 나오는 것에 비해] 수승하기 때문이다. 비록 [앞의] 세 종류(전륜왕ㆍ독각ㆍ대각)에 동류(同類)와 이류(異類)의 차이가 있을지라도 전체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설하였으며, 그러한 까닭에 그러한 [세 종류의] 갈래에 근거하여 모태에 처하는 일(즉 입태)을 궁극적인 것[究竟]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이류에 두 종류의 입태가 있으며, 동류 중에도 다시 두 종류가 있어 네 종류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82)
2.4. 무아(無我)와 윤회상속
여기서 마땅히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니, 누가 [저 세간으로] 가 입태(入胎)하는 것인가?
어째서 ‘누구’라고 묻게 된 것인가?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즉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 세간으로부터 중유의 온을 타고 저 세간으로 가 입ㆍ주ㆍ출태한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士夫, puruṣa,내적 자아)가 존재하여 그것이 이 세간으로부터 저 세간으로 가 입ㆍ주ㆍ출태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83)
그 같은 주장을 막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무아로서, 오로지 번뇌와 업에 의해
조작된 제온(諸蘊)만이 존재할 뿐으로
중유의 상속으로 말미암아
입태하는 것이니, 마치 등불과도 같다.
[업이] 인기한 순서대로 증장(增長)하여
상속하고, 다시 번뇌[惑]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에 시작은 없다.
논하여 말하겠다.
능히 [저 세간으로] 가 입태하는 실유의 자아[實我]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색(色)이나 안(眼)처럼 그 자성이나 작용[作業]이 획득(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84) 즉 소의와 소연에 근거하여 식(識) 등이 일어나는 상태에서 [그대가] 주장한 별도로 작용하는 실유의 자아는 성취되지 않는 것이다. 이를테면 토끼 뿔 등의 경우처럼 별도의 작용이 이미 존재하지 않을뿐더러 명료하게 인식될 수 있는 자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적으로 작용하는 사부(士夫)가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세존께서도 역시 [외도가] 주장하는 ‘작자와 향수자로서, 능히 후세로 가는 실유의 자아’를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세존께서는 “업도 존재하고 이숙도 존재하지만, 그 작자는 획득될 수 없다. 이를테면 능히 이러한 온을 버리고서 그 밖의 다른 온을 능히 상속하는 것이니,……(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였던 것이다.85)
다시 ‘[외도가] 주장하는 작자 등으로서의 실유의 자아는 실로 획득(인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자아] 자체는 실유이지만, 그 근거를 획득할 수 없거나 획득할 만한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종의에서는 결정코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획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니, 그 밖의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1) 유아론(有我論) 비판
자아를 주장하는 모든 이들은 [다음의] 네 종류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첫째는 자아는 존재하지만 바로 온(蘊)을 본질[性]로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둘째는 온과 다른 것으로서 온 중에 머문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셋째는 온과 다른 것으로서 온과는 다른 법 중에 머문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넷째는 온과 다른 것으로서 어디에도 머무는 곳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아는 실유이지만 획득될 수 없다’는 이와 같은 네 종류의 주장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먼저 ‘자아는 존재하지만 바로 온을 본질로 한다’는 주장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개별적인 온을 자아라 하든 [5온] 전체를 자아라 하든 모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자아는] 각기 개별적인 온의 자상(自相)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이며, [5온 전체는] 마땅히 가설로서의 [자아(假我)만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아는 존재하지만] 온과 다른 것으로서 온 중에 머문다’는 주장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자아] 자체를 영원한 것이라고 하든 무상한 것이라고 하든 모두에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찰나 찰나를 각기 달리함으로 단일한 자아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사멸하고 생겨나는 것이라고 하는 즉 마땅히 작자[의 의미]를 상실하게 될 것이며, 작자가 아니라는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경우라도 온을 떠나 생성 소멸하는 법은 획득(인식)되지 않기 때문에 무상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면, [자아는] 마땅히 전변(轉變)하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고, 생ㆍ노ㆍ병ㆍ사도 다 성취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마땅히 별도의 다른 취(趣)로 나아가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며, 애호하거나 애호하지 않는 경계대상과 화합할 때라도 자아는 마땅히 고락에 따라 전변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역시 또한 고락과 상응하는 번뇌에 의해 시달리는 일도 없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번뇌에 의해 시달리지 않는 것이라면, 마땅히 그것에 의해 법(즉 선)과 비법(즉 불선)을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런 즉 미래세의 애호하거나 애호하지 않을 소의신도 [그것을 초래할 만한] 원인(법과 비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생겨날 리가 없어야 한다. 그럴 경우 ‘자아 자체는 비록 영원할지라도 소의신이 개전(改轉)함에 따라 자아가 변이(變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고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다고 한다면, 자아 자체는 자신(自身)의 생ㆍ노ㆍ병ㆍ사나 번뇌와 업의 결과인 온갖 취(趣)에서의 고락에 따라 전변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본래부터 완전[畢竟]히 해탈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그러한 것으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자아를 영원한 것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와는 달리 ‘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을 떠나 제3의 취(聚)로서 존재하니, 그것을 자아라고 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예컨대 허공(虛空) 등의 온갖 무위법은 그 자체 온과 다른 것이기 때문에 온 중에 머물지 않는 것처럼,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하여 온 중에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자아는 존재하지만] 온과 다른 것으로서 온과는 다른 법 중에 머문다’는 주장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염오하거나 청정한 온의 법과 이미 서로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 같이 분별한 자아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니, 이미 온에도 의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거늘 어찌 비온(非蘊, 온과는 다른 법)에 의지할 것인가? 자아와 비온도 서로 관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자아는 존재하지만] 온과 다른 것으로서, 무위법의 경우처럼 어디에도 머무는 곳이 없다’는 주장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 허물이 앞에서와 같기 때문이며, 또한 마땅히 본래부터 영원히 해탈한 것이라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같이] 주장된 자아는 이미 머무는 곳이 없다고 하였으니, 색신(色身)이나 고락 등의 수(受), ‘크다’ ‘작다’는 등의 상(想), 선악 등의 행(行), 색이나 소리 등에 대한 식(識)과 어떠한 경우라도 서로 관계하지 않을 것이며, 그럴 경우 마땅히 본래부터 5온을 원리(遠離)한 것이어서 어떠한 공용(功用, 노력)에 의하지 않고서 스스로 그러하여 해탈한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도가] 주장한, 능히 이 세간을 버리고 다른 세간으로 상속하는 작자로서 실유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획득(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즉 [자아] 자체는 실유가 아닐 뿐더러 그 근거를 획득할 수도 없고, 획득할 만한 근거도 없기 때문에 획득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외도들은 어떤 소연(대상)에 대해 자아관념[我執]을 일으키는 것인가? 비록 모든 온[諸蘊]을 떠나 별도의 자아[我性]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소연을 [자아로] 집착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오로지 모든 온을 경계대상으로 삼아 [자아] 관념을 일으키니, 계경에서 “모든 유정이 자아 등에 대해 집착하는 바를 관찰해 보건대 그러한 일체의 집착은 오로지 5취온에서 일어나는 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비록 그러한 외도들이 설하는 바와 같은 진실의 자아[眞實我]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성교(聖敎)에서는 세간에서 설하는 바에 따라 자아를 가설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미 진실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자아를] 가설할 것인가?
비록 진실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세간[언설]에 따라 [5]온을 일시 자아라고 가설하는 것이다.
어떠한 인연에서 자아는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설한 것일 뿐 다른 것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인가?
염오하거나 청정한 법은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성취되기 때문에 ‘자아는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게 된 것이다. 즉 모든 잡염(雜染)은 다만 모든 온에 근거하여 찰나로 상속하는 것으로, 번뇌와 업의 세력에 의해 인기된 중유가 상속함으로써 모태로 들어갈 수 있다. 비유하자면 등불이 찰나에 상속하여 다른 곳에 이르는 것처럼 모든 온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가령 아직 욕계의 탐을 떠나지 않았을 경우, 내(內)ㆍ외처(外處)를 연(緣)으로 하여 비리작의(非理作意)를 일으키면 이로부터 탐 등의 번뇌가 생겨나고, 저열하거나 중간이거나 수승한 사(思, 의지)와 아울러 식(識)도 함께 일어난다. 일어나서는 능히 당래 비애(非愛)의 결과를 견인하며, 역시 또한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의 생연(生緣)이 된다. 그리고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은 동류(同類)나 이류(異類)인 전 찰나의 구생연(俱生緣)을 관찰하여 그 생기를 획득할 때, 혹은 선한 성질인 경우도 있고, 혹은 염오한 성질, 혹은 무기의 성질인 경우도 있는데, 일어나서는 다시 능히 자신의 당래 결과를 인기하며, 아울러 무간에 일어나는 식 등의 생연이 된다. 이와 같이 연이 되어 그 다음다음 찰나에도 계속하여 능히 두 가지의 결과(非愛의 결과와 무간의 식)를 견인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온의 상속은 전생[先世]의 번뇌와 업에 의해 인기된 수량(壽量, 수명의 길이) 등의 법을 영납(領納)하였지만, 그 이숙의 세력이 다하여 없어질 때 죽어서 식과 소의가 다같이 소멸하는 상태[滅位]에 이르게 되면 능히 중유(中有)의 식 등을 낳는 연이 된다. 그리고 중유의 모든 온은 [다시] 전생의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마치 환영(幻影)이 상속하듯이 태어날 곳으로 가 어머니의 뱃속에 이르게 되며, 중유가 소멸할 때 다시 능히 연이 되어 생유(生有)의 온을 낳으니, 비유하자면 등불이 비록 찰나에 소멸할지라도 능히 전후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무간에 전전 상속하여 다른 곳에 이를 수 있는 것과 같다.86)
따라서 비록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온은 찰나에 소멸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능히 후세에 나아간다고 하는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모든 온은, 이를테면 전세의 번뇌와 업의 세력에 의해 인기되어 순서대로 점차 증가하여 일기(一期) 동안 전전 상속하였듯이 다시 번뇌와 업에 의해 다른 세간(내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원인이 다르면 결과에도 다름이 있다는 것은 지금 바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온갖 인업(引業)의 과량(果量)은 동등하지 않다. 즉 수명의 과보가 길고 짧은 것은 업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강성[增]하거나 미약[微]한 업[의 세력]에 따라 인기된 수명과 신근 등은 계속하여 서로 의존하며 갈랄람(羯剌藍)ㆍ알부담(頞部曇) 등 그 뒤의 온갖 상태로 점차적으로 증장하게 되는 것이다.
무엇을 일컬어 갈랄람 등이라고 한 것인가?
이를테면 온이 상속 전변하는 상태는 동일하지 않은데, 이와 같이 점차로 증장하여 근(根, 감관)이 성숙한 상태[熟位]에 이르게 되면, 내(內)ㆍ외처(外處)가 작의 등의 연과 화합하여 탐 등의 번뇌를 발생시키고, 온갖 종류의 업을 조작하여 증장시키니, 이러한 번뇌와 업으로 말미암아 다시 앞서 언급하였듯이 중유가 상속하여 다른 세간(내세)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87)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은 존재의 수레바퀴[有輪, 즉 생사를 윤회하는 4有의 轉生]에는 시작이 없다. 즉 번뇌[惑]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온갖 업을 조작하고, 업의 힘을 원인으로 하여 능히 생을 인기하며, 생이 다시 원인이 되어 번뇌와 업을 일으키며, 이러한 번뇌와 업으로부터 다시 생이 있게 된다. 따라서 존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도는 것으로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시작이 있다고 주장한다면 시작에는 마땅히 그 원인이 없어야 할 것이며, 시작에 이미 원인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밖의 다른 것도 마땅히 스스로 생겨나야 할 것이니, 달리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현재 관찰되고 있는 사실과 서로 모순 되는 것이다.88)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결정코 원인 없이 일어나는 법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라도 능히 원인이 되는 영원한 법[常法]은 존재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 자재천(自在天)을 논파하면서 이미 널리 부정하여 비판하였었다.89) 그렇기 때문에 생사에는 결정코 시초가 없으니, 비유컨대 곡식 등이 전전 상속하는 것과 같다.
그렇지만 [생사의] 끝[後邊]은 있으니, 그 원인(즉 번뇌와 업)이 다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종자 등이 다하게 되면(썩어 문드러지면) 더 이상 싹 등을 낳지 않듯이 [번뇌와 업이 다하여] 생사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구경(究竟)의 청정(즉 열반)이다.
따라서 염오함과 청정함은 오로지 온에 근거하여 성취되는 것으로, 실유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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