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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을 이렇게도 쓸수 있구나.
조금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박일 선생의 장편소설 “안개 흐르는 태양도”를 읽으면서 첫 인상이 이러했다. 책을 다 읽고서가 아닌 한쪽으로 읽으며 줄곧 이런 곤혹에 빠지기는 처음이었다.
글에 흥취를 가지기 시작해서부터 자로 재듯이 네모반듯한 장회소설이나 또는 스케일이 거대한 역사소설이나 아니면 적어도 구체적인 이야기 줄거리를 가지고 얼기설기 실타래가 된 모순들을 풀어나가는 신소설에 익숙해왔다. 아니, 익숙하다기보다는 장편소설은 의례 그렇게 써야 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장편소설의 경우 우선 먼저 거대한 주제와 복잡한 구조를 가져야 한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편폭의 요구가 우선이긴 하겠지만 책 1권 이상의 분량이여야 한다는 특성은 그것이 장편이냐 중편이냐 단편소설이냐를 구분하는 아주 원시적이고 기초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요구 사항에 넣지 않는 게 오히려 정상적이다.
그러니까 장편소설은 다양한 인물과 복잡한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인간사회를 깊이 있고 폭넓게 종합적으로 그리는 것이 특징이다. 장편소설은 인생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과 체험을 바탕으로 풍부한 사상과 깊이 있는 인생관을 제시하게 된다. 아울러 체계성, 복잡성은 장편소설의 구조적인 특성이라 해야겠다.
그리고 장편소설이라면 인물의 성격과 내면세계를 섬세하게 그리고 해부해야 하는 게 다음 수순이다.
소설의 “플롯(plot)”이란 것은 결국 인물이 리드하여 끌고 가기 마련이다. 플롯 전개가 다채롭고 인기를 끌려면 무엇보다 그 라인에 서있는 인물의 형상 디자인이 변화무쌍하고 다 차원적이어야 한다. 자칫 슈제트가 밋밋하거나 무미건조하게 된 중요한 원인이 인물이 고루하고 경색되어있기 때문이다.
특히 장편소설의 경우 메마른 인물형상 또는 빈약한 인물성격은 그대로 작품 실패란 결과를 몰아오게 된다. 풍성한 인물의 내면 묘사는 어쩜 이야기 자체를 능가하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물론 가장 홀시할 수 없는 것이 전편 작품을 관통시키는 시대배경이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장편소설은 그 부피만큼이나 아우르는 역사시기가 길고 거대할 수밖에 없다. 인물이 아무리 퐁퐁 살아 움직인다 하여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얼마나 거창하더라도, 얼기설기 짜임새를 어느 정도 정교하게 짜더라도 일단 그것들이 위치해야 할 좌표가 매치되지 않으면 결국 돈키호테 식의 낭패상이 되고 만다. 하기에 장편소설이라면 한 세기를 넘나드는 넓은 무대까지는 몰라도 적어서 한개 시대를 착실하게 반영할 수 있는 공간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안개 흐르는 태양도”에는 이런 장치나 시설이 전혀 없다. “전혀”라는 표현이 과장되기는 했으나 우리는 이 소설에서 상기한 요소들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널리 읽혀지고 있으며 좋은 평판을 받고 있다.
전통적이고 또 정통적인 장편소설에 대한 이해를 단번에 뒤집어버린 “안개 흐르는 태양도”는 그래서 새삼스럽게 다시 연구해봐야 하는 가치를 가진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대체 어떤 구조적인 특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미니소설의 형식을 빌린
장편소설
이 소설은 비교적 수월하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다. 장편임에도 짤막한 이야기를 읽는 느낌이 든다.
소설은 2박3일간의 동창모임에 대해 쓰고 있다. 그 짧은 시간을 가히 장편이란 장자에 부끄럽지 않을 36만자로 담아냈다.
소설은 “기차역”, “하얼빈공항” 등 47개의 소제목을 설정하고 있다. 슈제트 전개의 편리성을 위해 시간과 장면 등에 따라 나누는 장절이기에 앞서 47개 소제목 모두가 각각 하나의 이야기로 되어 있는 특수한 구조다. 즉 47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조합되어 있어 헤쳐 놓으면 각자가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가 되고 모아놓으면 서로가 상부상조되는 완정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장기간 벽소설 창작에 전념해온 작가의 경력과 무관하지 않다. 작은 편폭에 스토리를 담아내야 하는 벽소설 창작에서 경험을 누적한 작가는 장편소설에서도 그 장끼를 발휘해 생각 밖의 성공을 거두게 된다.
특히 책자로 묶어지기 전에 “장백산”잡지에 먼저 연재로 발표하면서 모름지기 독자들의 접수력에 많은 신경을 도사린 흔적이 엿보인다. 그리고 조글로에 십 수 차 다시 연재되면서 드라마 같은 소설이라는 평가도 받게 된다.
요즘같이 절주가 빨라진 세월에 장편은 독자들에게 다가가기가 좀 무리다. 시간에 쫓기는 독자들이 장편이란 몸체에 우선 기가 질리기 때문이다. 슬슬 뒷걸음치는 독자들을 책상 앞으로 당겨오자면 일방적인 우격다짐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정사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사탕”을 맛보이는 회유도 두 번 이상 더 통하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때 박일 선생만의 남다른 노하우가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 작가는 도도한 서술을 회피하고 바로 이야기 그 자체로 들어가 토막토막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이다. 독자들은 미니소설을 읽듯 장편 한부를 다 읽고도 장편을 읽었다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경지에 포섭된 것이다.
이 점은 작가의 창작후기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작자는 “남들이 쓰는 소설과 얼굴이 많이 다르게 내식대로 장편소설을 쓰려고 마음먹은 지가 오래된다.”면서 “짧은 미니소설을 많이 써온 자신의 장끼를 장편소설 속에 충분히 드러내 하나의 정체 속에서 나오는 줄거리마다 깜찍하고 재미나게 엮겠다는 생각이었다.”고 창작 전에 미리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는 고의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일단 이 소설은 얽음새에서 벌집의 모양새다. 꼭꼭 다져진 육각형의 독립적인 집이 한데 모여 벌집이라는 완정한 집을 이루듯이 이 소설은 각자가 짤막한 이야기들이 모여 거대한 장편을 이루어낸 것이다.
인물과 사건을
구체화하지 않은 구조
앞에서 필자는 이 소설이 미니소설의 형식을 빌렸다고 주장했다. 형식적인 특점을 규정한 것인데 이를테면 벌집처럼 공동분모를 가진 개개의 집들이 얼기설기 얽혀 모름지기 하나의 큰 집이 만들어졌다고 형용했다.
그렇다면 “작은 집”과 “큰 집”의 관계 설정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철학적으로 해석하면 양자는 물론 종속의 관계이고 대립통일의 관계일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대세적인 흐름 말고도 이 소설은 어느 장편소설과 다른 나름대로의 특점을 따로 가지고 있다.
일단 항구적인 인물이 없다. 이 소설은 전편 작품을 관통시키는 인물이 단 한명도 없다.
“백일호”와 “구금자”가 첫 시작에 등업 하고 또 마지막으로 커튼콜 하는 장면 때문에 자칫 이들이 주인공일 것이라고 착각할 수 있지만 절대 그게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필묵을 좀 더 허비하였을 뿐 두 사람이 꼭 주인공이여야 한다는 주장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행사 장소를 섭외한 당사자이자 학급 반장 출신이라는 신분 외에 작품의 주인공으로서 빠질 수 없는 인물성격의 형성, 발전, 승화의 과정 등이 모두 결여되고 두 사람을 통한 사건의 전개도 유기적으로 질서 있게 배치되지 못했다. 그나마 다른 인물들에 비해 형상이 상대적으로 포만감을 이루었다는 점은 승인해야겠다.
다음 인물의 성격이 유동적인 것에 동조하면서 사건도 복합적 구성방식을 선택하여 서로 닿지 않는 많은 에피소드들을 고리로 연결시켰다. 이 특점은 47개의 소제목(이야기)을 들여다보면 더욱 두드러지게 알린다.
소설의 발단은 25년 만의 동창모임이다. 자연히 전반 작품을 꿰는 화제는 2박3일간의 활동 스토리다. 그래서 “별무리호텔”, “출석부” 같은 집합행사가 앞서게 되고 “숲속의 비밀”이나 “수영장”, “여자의 눈물”, “몽야술집”과 같은 레전드가 벌어지게 되고 더불어 “보배 찾기”, “야식장”, “태양도에서”, “우등불야회”와 같은 즐거운 장면이 벌어지게 되며 이어 “잠들 수 없는 밤”이나 “기념사진” 또는 “석별의 정”과 같은 아쉬운 대목도 있게 된다. 이 라인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쭉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물론 25년 만에 차례진 동창들의 만남이기에 학창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도 피면할 수 없다. 서로 만나면 자연히 당년에 우리는 어찌하였고 누구누구는 어떻게 했다는 얘기가 오가게 된다. 하여 “뚝배기”, “짝사랑”, “돼지족발”, “칠색박사” 등 학창시절 잊을 수 없는 일화들이 등장하게 된다. 필자가 꼼꼼히 손꼽아본 결과 이런 유의 글이 대개 17개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동창들이 오래간만에 모이면 두말할 것 없이 졸업 후의 생활이 더 궁금하기 마련이다. 그간 무슨 일을 어떻게 해왔고 지금은 무엇을 어느 정도 이루었냐가 가장 큰 관심사일수밖에 없다. 때문에 “수련이”, “철규”, “최윤희”, “좁쌀선생”, “김운재”와 같은 굵직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두루 따져보면 이런 글은 19개 이상이다.
당연히 별종 같은 이야기도 있다. 이를테면 “백청아”, “박화”와 “젊은 세대” 같은 글들이다. 동창모임이라는 큰 테두리에서 벗어난 이야기들이다.
상기한 이런 이야기들은 제목이 독립적인 것만큼이나 등장하는 인물도 수시로 바뀌면서 나름대로의 사연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홀로 존재하지 않고 호상 침투되고 호상 교차되면서 실타래같이 얽혔다. 그래서 독자들은 다 읽은 듯 다시 빠져들고 빠져들었다가 또 다 읽은 것 같은 기분을 만끽하게 된다.
이 작품은 등장하는 인물들이 경중이 따로 없이 모두가 그대로 주인공이 되어버리고 실타래처럼 한 올 한 올 풀어가야 할 모순도 제시되지 않았으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주제도 도출하기 어렵다. 한마디로 주인공이 없고, 사건이 없고, 주제가 없는 “3무”가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최대 특점이라 해야겠다.
핵심적인 포인트는
“조미료”
이 같은 시스템적인 시도가 전반 작품에 미칠 영향은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다. 자칫 흐트러지거나 최종적으로 실패를 불러오기가 십상이다. 그런 도전과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작가의 구상이 실천으로 옮겨진 데는 나름대로 그 어떤 자신이 있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요즘 주식마당에서 떠도는 말처럼 기본면(基本面) 즉 펀더멘털을 탄탄하게 엮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면 작품을 형성한 골격이 흔히 말하는 기승전결의 모델을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완성도에서 별로 짝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존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그 파워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꼭 마치 요리사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요리는 재료의 종류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그리고 조미료나 소스에 의해서 서로 구별되기도 한다.
일단 재료는 서로 다른 걸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 어차피 테이블 하나를 똑같은 재료로 채울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까 나머지는 조미료나 소스의 역할이다. 신맛을 내냐, 단맛을 내냐, 아니면 쓴맛을 내냐, 매운맛을 내냐는 대개 이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능숙능란하게 “조미료”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이여야 한다.
자명한바 여기서 말하는 “조미료”는 무엇보다 우선 언어를 지칭한다. 문학은 언어예술이라는 전제에서 새삼스럽게 언어문제를 내세우는 것은 좀 중뿔난 얘기 같지만 사실 우리는 오랫동안 언어란 요소를 많이 소홀히 해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건을 꾸미는데 지나치게 집념해오면서 사건이 어느 정도로 굴곡적이고 반전이 크며 스케일이 큰가에만 성공의 추를 매달아왔던 것도 현실이다. 그래서 우리의 많은 글들은 아직도 7~80년대의 언어로 장식되어 있다.
요컨데 소설가는 먼저 이야기꾼이여야 하는 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재치 있게 엮는 건 바로 언어다. 메마르고 조잡하며 창백한 언어로 구술한 이야기는 비록 그 사건 자체의 엽기와 신비 및 파워로 인해 잠시 감동을 줄지는 몰라도 결코 영원할 수는 없다.
결국 문학작품의 승부는 언어에서 나눠진다. 언어가 매칠하면 사건이 좀 서툴어도 별로 흠이 되지 않는다. 이야기 꾸미기에만 주력하는 사람치고 오래가는 경우를 거의 보지 못했다. 반면에 언어수련에 게을리하지 않은 사람은 작은 사건에도 방대한 화폭을 담아내면서 성공일로를 걷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안개 흐르는 태양도”는 언어로 승부수를 던진 전형으로 볼 수 있다. 전편 작품은 그대로 언어의 향연이다. 특히 서술어보다 대화어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위트가 넘치는 대화 속에 무르녹은 유머, 익살, 우스개, 육담들은 그대로 반짝이는 구슬과 같은 존재로 이 소설을 한 줄에 꿰어놓았다. 작가는 장인답게 공력을 들여서 47개의 이야기에 하늘의 별같이 무수한 구슬을 흩어놓아 장관을 형성한 것이다. 작가의 탄탄한 언어수양을 한눈에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우스갯소리다. 거의 갈피마다에 등장하면서 무드를 적당히 조절해주고 있다. 어쩌면 익살하고도 통하는 우스개는 일반적으로 단마디 형식으로 나타나 순간적인 웃음을 유도한다. 묵직한 화제를 가볍게 넘기는 수법에 다름 아니다.
우스개와 비슷하지만 상대적으로 약간 더 전개가 되는 유머의 사용도 만만찮다. 얼핏 손으로 꼽아보아도 완정한 형식의 유머가 20개 정도는 된다. 말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억울할 수밖에 없는 유머의 대량적인 사용은 때와 장소를 다분히 활성화시키기 위한 조처로 볼 수 있다. “야식장”이란 장절에 이런 대목이 있다.
……한 가정에 “사랑해요”와 “안 사랑해요”란 두 쌍둥이 자매가 있었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물었수다. 너희들 두 자매중 하나는 군대를 가야하고 하나는 대학으로 가야 할 것 같은데 누가 어디로 가겠느냐?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입이 빠른 동생 “안 사랑해요”가 제꺽 “저는 군대!” 하고 손을 들었대유. 그렇다면 대학으로 가야 할 자매는 누굴까요? 시-작!
“대머리”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마치도 약속이나 한듯 여 동창들이 동시에 “사랑해요!” 하고 한입처럼 외친다.
“그러면 그렇겠지. 우리 반 여성들이 한결같이 이 “대머리”를 사랑한다니까.”
보다시피 25년 만에 만난 동창들의 우애와 절묘하게 매치된다.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 위한 오락의 일종이자 의사소통의 한 형태인 유머의 삽입은 그래서 전반 작품을 살아나게 하는 매력을 가진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홀시할 수 없는 것이 육담의 공식적인 등장이다. 옛말 같은 구두식 이야기에 가끔 등장하는 육담이 소설에, 그것도 대량으로 등장하기는 아마 이 소설이 처음일 것이다.
육담은 주로 성에 관한 소재로 꾸며진 민담이기에 외설담이라고도 한다. 민간에 가장 널리 퍼져있으면서도 남녀 간의 색정이나 성생활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이유로 저속하다는 판정을 받아 글에서는 모름지기 기피의 대상으로 여겨져 공개가 껄끄럽다.
그런 육담이 이 소설에 자그마치 20여 컬레가 소개되고 있다. 따분함을 넘기기 위한 장치이기에 앞서 말 그대로 서로 허물없이 말할 수 있는 동창들 간의 관계와 그 분위기를 전달하기 위한 수법이 아닐까싶다.
소설의 돈오
구태여 소설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표준을 세울 필요가 없다는 점을 이 소설은 실례로 잘 표현했다.
본 평론은 이 소설의 형식적인 부분만 살펴보았다. 즉 소설을 어떻게 엮었는가를 집중적으로 조명해보았다.
흔히들 구성은 작품의 주제를 뒷받침 하는 부수적인 것이라고 말하지만 필자는 오히려 엮음새가 꼭 주제를 위해 봉사할 까닭은 없다고 본다. 건축사는 디자인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집이 멋들어지게 지어졌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그 집에서 누가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집 짓는 사람이 신경을 도사릴 사안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주제선행의 십자가를 벗어던져야 할 때가 아닌가싶다.
장학규 프로필:
1964년, 해림시 해남향 사호촌 출생.
1988년 연변대학 조문학부 조문전업 졸업.
출간작품: 수필집 “머리 잃은 곤혹”, 소설집 “청도로그인” 등 출간.
수상경력: “신인평론문학응모” 최우수상, “송기컵우리겨례상” 2등상, 제1회 흑룡강성 소수민족문학상 3등상 등 다수 수상.
흑룡강성작가협회 회원, 연변작가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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