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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총독 데라우치 암살 음모사건에 연유되어 미국으로 망명했고 1913년 로스앤젤레스에서 혁명수양단체 『흥사단(興士團)』[1]을 조직하여 활약하다가 3.1운동이 발발하자 상해로 와 임시정부 내무총장에 취임했다.
안창호와 김구는 특수한 관계가 있었다.
김구가 28세 나던 해에 동사(同事) 최광옥(崔光玉)의 소개로 안창호의 누이 안신호(安信浩)와 약혼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틀려지고 말았다. 그 원인은 이러하다. 안창호가 미국을 갈 때 배에서 중국 상해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양주삼(梁柱三)라는 청년을 알게 되었다. 당시 안창호가 누이동생을 대신하여 양주삼에게 청혼했다. 그때로부터 양주삼과 안신호 사이에 편지가 오갔다. 양주삼과 안신호는 양주삼이 졸업한 후에 정식으로 약혼하자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일이 아주 공교롭게 되어 김구와 안신호가 약혼한 이튿날 안신호가 양주삼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 쓰기를 이미 졸업했으니 정식으로 약혼식을 갖자고 하였다. 편지를 받은 안신호는 온밤 잠들지 못했다. 도대체 누구를 선택해야 한단 말인가. 양손에 떡 쥔 격이었다. 결국 안신호는 두 사람 모두 거절하고 말았다. 가령 양주삼의 편지가 아니었던들 김구는 안창호의 매부가 되었을 것이다.
김구와 안창호는 비록 접촉이 많지 않았지만 김구는 안창호가 총명이 과인하고 용감하고 사리에 밝으며 모두가 승인하는 웅변가고 사람들이 신임하는 혁명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김구는 안창호를 몹시 존경하였다.
안창호가 상해에 오니 김구를 비롯해 상해의 한인 독립 운동가들은 안창호가 대리 국무총리와 내무부장을 맡고 상해임시정부가 직면한 여러 가지 난제들을 풀어나가기를 바랬다. 안창호는 내무부장과 대리총리를 맡는데 대해 처음엔 동의하지 않다가 한 달 후 각지의 수령들이 상해에 모이자 그제야 동의하였다.
안창호는 확실히 능력자였다. 그는 우선 미국, 러시아, 중국 동북지구, 북경의 독립운동 골간들을 상해로 불러들였다. 다음으로 시정방침을 제정하고 정부 각 책임자와 의정원의 관계를 조율하였다. 또 미국으로부터 5만 5천 달러를 모금하여 그 돈으로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2층짜리 집을 세 내어 임시정부 사무실로 삼았다. 이때로부터 임시정부가 어느 정도 제 몰골을 갖추게 되었다.
김구는 임시정부에서 일하려는 소박한 욕망을 가지고 적당한 시기에 안창호를 찾아 이야기를 나누려고 생각했다.
8월의 어느 날, 김구와 안창호가 임시정부 앞에 있는 풀밭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갈한 양복을 단정히 입은 안창호의 몸에서는 서양 지식인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반대로 색깔이 난 쭈글쭈글한 옷을 입은 김구는 소박한 동방사나이 모습 그대로였다.
“총장선생, 전 임시정부 파수가 되고 싶습니다.”
김구가 안창호를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뮈라구요? 파수가 되고 싶다구요?” 깜짝 놀란 안창호가 김구를 쳐다보았다. 그는 김구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김구는 적수공권으로 전신무장한 일본군 중위를 때려죽인 사람이고 한국 서북지구 신민회의 주요 골간으로서 그 성망이 대단하였다. 이런 사람이 문 파수가 되고 싶다니 어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놀란 안창호를 보면서 김구가 웃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했다.
“안악 사건으로 체포된 후 난 서대문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때 난 마당도 쓸고 유리도 닦았지요. 그때 난 속으로 만약 우리나라가 독립하고 정부를 세우면 꼭 마당을 쓸거나 문 파수가 되겠다고 생각하였지요. 지금 비록 독립하진 못하였지만 그래도 정부가 있지 않습니까? 나는 본시 평민출신입니다. 나에겐 파수가 알 맞는 직업입니다.”
안창호가 이슥토록 김구를 쳐다보았다. 그는 김구의 말이 폐부지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 “국무회의에서 연구한 다음 봅시다.”하고 끝을 달았다.
안창호는 김구의 문제를 진지하게 대하고 이튿날 국무회를 열어 전문 김구의 문제를 토론하였다.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김구를 경무국장으로 선출하였다.
이 결정이 결국 김구의 후반생을 결정하였다.
그날 오후 안창호가 김구를 자기의 사무실로 불렀다.
안창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의 차장(次長) 윤형진(尹顯振), 이춘숙(李春熟), 신익희(申翼熙)는 모두 젊은이들이고 당신은 그들의 선배입니다. 만약 당신이 문 파수를 보면 그들이 어떻게 임시정부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래서 국무회의에서 새로이 경무국을 설립하고 당신을 경무국장으로 추대했습니다.”
김구가 사절했다.
“전 아마도 경찰로서의 소질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 스스로 문제를 내고 스스로 답하면서 이 방면의 능력을 시험 쳐 보았는데 결과 합격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저 보고 경무국장을 하라 하지만 적합할 것 같지 않습니다.”
안창호가 자기의 견해를 견지했다.
“만약 당신이 거절하면 젊은 사람들 밑에 있기를 싫어하는 것 같이 오해될 염려가 있으니 결정한대로 경무국장을 맡아야 합니다.” 하고 강권하였다.
경무국장을 맡던 때의 일을 두고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일찍부터 독립정부의 파수가 되고 싶었다. 그 것은 오직 나라가 독립해야만 나와 같이 미천한 사람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독립된 조국에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남의 밑에서 부귀를 누리는 것보다 더 기쁘고 더 영광스럽고 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2]
이 고백은 당시 김구가 파수꾼이 되려했던 진심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말에서 우리는 국가의 독립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 그의 고상한 애국주의 정신을 엿 볼 수 있다.
공교로움이 없으면 이야기가 생기지 않는 법이다. 일본경시청에서는 상해의 한국임시정부에 대처하기 위해 서울에서 헌병 대장을 지낸 적 있는 시케토오(重藤)를 일본 상해 헌병대 대장으로 임명했으며 동북 관동군 국제 특무 구쭈시이(掘誠)를 상해로 파견하여 시케토오를 돕게 했다.
[참고문서]
[1] 『흥사단(興士團)』: 1913년 5월 13일 안창호가 미국에서 창립한 민족운동단체
[2] 『백범일지』158쪽
권혁의 집에서 울린
『아리랑』
11월 초의 상해는 이제 금방 가을 옷을 입기 시작했다. 간혹 어쩌다 보이는 한 두 잎의 단풍이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1919년 9월 13일, 그 날 이동휘는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후 내무총장 안창호의 추천으로 김구를 경무총장으로 임명하였다.
그 이튿날 이전의 신민회성원들이었던 이동녕, 안창호, 김구, 이동휘, 이시영[1] 등 10여 명이 권혁(權爀)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10여 년 전, 그들은 서울의 양기탁의 집에서 무관학교를 세우고 한국독립투쟁을 장기적으로 벌리자는 의논을 하고 헤어졌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처럼 그 때 뜻이 같고 이상이 같던 그들이 신앙이 다르고 사상도 다른 혁명가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오늘 그들은 독립투쟁이라는 비장한 역사의 격류 속에서 상해에 모여 모두가 요직을 맡고 새로운 역사를 써가고 있는 것이다. 권혁이 나서서 자기 집을 모임장소로 제공하였다.
하다면 권혁이란 누구인가. 그는 상해에서 전설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혀 36가지의 무예를 통달했으며 금강산 도사로 통했다. 그는 10년 전 8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무마대(武馬隊)』를 조직하고 동북의 남만지대에서 독립투쟁을 진행했다. 1916년에 『무마대』를 거느리고 상해에 와 『조선인생명보장위원회』라는 이름을 내어 걸고 한국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였다.
권혁의 정보망은 거미줄처럼 늘어났다. 그는 상해에 있는 3천여 명의 한국 망명자들의 이름과 집주소를 알고 있었다. 그 어느 누가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면 그가 선뜻 나서서 구원해주었다.
국제도시 상해는 모험가들의 낙원이요 무리(幇:[빵]무리라는 뜻)들이 세력을 뻗치고 재물을 위해 살육을 하고 있는 어지럽고도 무시무시한 세계였다. 당시 상해에는 빵들이 특별히 많았다. 결국 무리(빵)란 오늘의 조직폭력배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상해의 실업가들은 모두 무슨 청빵(淸幇:청산하는 무리), 푸즈빵(斧子幇:도끼무리) 같은 조직을 끼고 있었다. 그들을 끼지 않고선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없었다. 『남의사(藍衣社)』[2]의 회원인 두월생(杜月笙)[3]도 살인과 포악으로 세력범위를 확충하였고 심지어는 장개석의 부인 송미령까지 납치한 일이 있었다. 상해에서 세력이 가장 막강한 사람이 두월생이었다.
권혁이가 상해에 발을 붙였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그가 거느린 80 여 명의 무마대는 두월생과 생사 판 갈이 싸움을 하여 마침내 두월생의 승인을 받았고 서로 형님, 동생 하는 처지가 되었다. 상해임시정부 청사도 두월생의 도움으로 얻은 것이었다. 권혁은 상해에서 폭력으로 발을 붙인 다음 돈으로 세력 범위를 넓혔다.
권혁은 프랑스영사를 끼고 2년간 아편장사를 하였다. 아편장사는 모험이 공존하였지만 돈을 마대로 벌 수 있었다. 그는 번 돈으로 한국인 학교, 여인숙, 기생집, 술집, 도박구락부 등 수많은 기업을 꾸렸다.
큰 고기가 작은 고기를 잡아먹는 동방의 명주 상해에서 권혁은 돈으로 상해의 군계, 정계, 실업가들의 신임을 샀기에 잡혀 먹히지 않았다. 상해의 중국인들이 권혁이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그러나 그는 정치를 논하지 않았다. 사회주의요, 자본주의요, 민족주의요 하는 것들에 시비를 따지지 않았다.[4]
권혁이 술상을 준비하는 사이 사람들은 저마다 나름대로의 생각에 잠겼다.
미국에서 온 안창호는 자신을 수양하며 민족을 가르치는 스승으로, 그리고 진정한 인격을 가진 교육자로 일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진실하고 참다운 삶을 주장하였다. 그가 가장 미워한 것은 거짓이요, 그가 가장 사랑한 것은 진실이었다. 모든 사람을 참된 사람으로, 우리 민족을 참된 민족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상해에 모인 한국혁명가들 사이에 공산주의냐 민족주의냐 무정부주의냐 하는 정치쟁론이 심각하여지는 이 현실 속에 신민회 동지들을 모아 나라를 사랑하고 동지를 사랑하고 지사들을 단결시키자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안창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우리 신민회 동지들이 서울에서 신민회 종지를 쓰던 그날부터 이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소. 그리고 갈라졌다가 우리가 또 이 곳에 모인 것이니 참으로 귀중하고도 의의가 있는 모임이요. 우리는 자기보다 나라를 더 사랑하는 마음으로 서로의 힘을 단합하기오.”
이시영이 말을 받았다.
“도산 선생의 말을 들으니 어제가 새삼스럽게 떠오르는구먼. 그때 우리가 쓴 「종지서(宗旨書)」의 내용을 나는 여태껏 가슴에 담고 다녔습니다.”
이시영이 감개무량하여 시를 읊듯 종지서의 한 단락을 읽었다.
“슬프다. 동포여! 아는가 모르는가, 꿈을 깨었는가. 수평(數坪)의 모옥(茅屋)도 나의 집이 아니며 수무(數畝)의 산전(山田)도 나의 토지가 아니며 동구의 수류(殊流)도 나의 간수(澗水)가 아니다.
내 몸이 죽어서 묻힐 땅이 없으며 나의 자손이 자라서 거할 실(室)이 없으니 눈을 들어 하늘을 암시함에 능히 낙루를 금하며 동함을 억제하랴. 언(言)이 이에 금함에 아, 동포 기왕에 실기(失機)함과 장래의 통탄함을 불금하며 안루(眼淚)가 방탁(滂濯)하고 강혈(腔血)이 용약하는도다.”
좌중은 모두 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이시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마다 감회가 무궁하였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잔불처럼 가물거리던 그 암흑한 세계에서 광명을 찾아 외치던 목소리, 모든 신민회동지들의 갈망이 바로 『종지서』였다.
이동휘가 뒤짐을 쥐고 방안을 바장이었다. 조선 후기 지방 하급관리로부터 대한제국의 무관이 된 후, 직업군인으로 신민회에 참가하여 함께 신문화운동을 전개하였고 기독교를 거쳐 정치가로서 북간도로 망명하여 군관학교를 꾸리고 독립군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는 동시에 한국인 사회형성과 발전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는 그였다. 무기구입으로 하여 시베리아에서 독일첩자로 감옥에 갇혔다가 러시아 혁명자 미얀스키를 알게 되었고 그의 소개로 맑스와 레닌의 책을 읽게 되었다.
그는 친히 러시아 10월 혁명을 목격하였고 1918년에는 연해주에서 한인사회당을 창설하고 공산주의를 전파시켰다. 지금 임시정부의 제2임 국무총리인 그는 반드시 임시정부의 헌법에 따라 행사하여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정치주장을 회피하기 싫었다. 그는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침묵을 깨뜨렸다.
“그때 신민회의 주장은 선진적인 독립사상이었소. 우리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소. 그러나 그때 우리는 식민주의 열강들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였고 독립적 사상의 이론적 근거가 충분치 못했던 것이요.”
이동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좌중을 돌아보았다. 부엌 쪽에서 칼질소리가 이따금 들려왔다.
이동휘가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세계는 진보하고 있소. 러시아는 제일 처음으로 프롤레타리아 주권의 나라를 세웠고…… 하긴 미국식 자산계급의 자유주의 나라도 있지만 그들도 제국주의에 불과하고 군국주의로 발전되는 일본의 야심은 더욱 커지고 있는 것이요. 우리 한국은 어떤 식으로 나라를 찾고 어떤 길을 걸을 것인가 하고 우리는 사색하여야 하오.”
이동휘가 자리에 앉았다. 또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이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 많은 말들이 출구를 찾고 있었다. 김구는 침묵 속에서 며칠 전 도산 안창호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비상한 때에야 비상한 인물이 나는 법이며 비상한 인물이라야 비상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비상한 인물, 비상한 인물의 비상한 행동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상한 인물이 우리의 가운데서 나온다면, 우리 민족은 비상한 인물로 인하여 영원히 멸시 받지 않는 민족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김구는 생각했다. 하다면 이동휘가 우리 민족을 이끌 비상한 인물로 될 수 있을까. 김구는 머리를 저었다. 김구가 일어섰다.
“상해에 와서 이동휘 선생도 만나고 도산 선생도 석오 선생도 만나니 기쁘기 한량없구려. 서울에서 있었던 그날들이 생생하구먼요. 오늘 나라를 찾기 위해 또 이렇게 만나니 만감이 교차됩니다. 나라를 찾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것이요. 꼭 어떤 나라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는 법은 없을 것이요.”
점잖게 앉아 있던 석오 이동녕이 머리를 끄덕이었다. 한때 조선왕조의 동명진사의 벼슬까지 하고 신민회에 참가하여 이시영가 함께 유하 삼원포에 가서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꾸린 후에 연해주 지방에 가서 독립운동에 투신해 온 그였다. 그는 온순하고 부드러워 언제나 선량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였다. 그도 우리 민족이 약점이 무엇인가, 왜 한국이 망했는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두고 생각이 많았다. 하지만 분위기를 위해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여러분, 우리는 금후 손을 잡고 나라를 찾는 큰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오. 오늘 우리 대동강의 부벽루를 그려 보고 한강의 푸른 물결, 금강산의 폭포를 생각하면서 술을 마시기오. 즐겁게 취하도록 말이요.” 마음 어진 석오는 옛 벗들이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권혁이 이동녕의 마음을 헤아려 침모를 불러 술상을 차리라고 분부하였다. 권혁은 누가 무슨 방법으로 어떻게 나라를 찾는가 하는데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누구든 관계없이 무슨 방법이든 관계없이 다만 나라만 찾으면 되는 것이다.
권혁이 서울과 평양에서 불러온 무녀들이 춤 출 차비를 하고 있었다. 유성기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한강에서 술 마시고 옛정 나누던 옛날
소리 잘 하는 명창 한배에 가득 실어
한강에 뛰어 놀고……
무녀들이 춤을 춘다. 모두들 묵묵히 술을 마시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이동휘도 도산도 김구도 이시영도.
“됐다. 됐어.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상해로 왔는가? 춤추러 왔는가?”
김구가 술잔을 놓더니 손짓으로 무녀들의 춤을 제지시켰다.
무녀들은 놀란 새처럼 몸 둘 바를 몰랐다.
“하하, 괜찮아. 무서워 말아. 경무국장님이 그대들을 아껴 묻는 말이다.”
권혁이 껄껄 웃으면서 말하였다. “살길을 찾아왔소이다.”
그 중 나이가 좀 든 무녀 하나가 무릎을 꿇고 말했다.
“살길을 찾아서 왔다고? 이 상해에 와서 춤추며 산다고?”
백범의 목소리에 비애와 노기가 반반 들어 있는 듯 했다.
“예, 왜놈에게서 천대 받는 것 보다 차라리 이국땅에서 살다가 죽는 것이 편안하다고 생각해서이옵니다.”
“일어들 나시오. 그래, 살아야지요. 그러나 똑똑히들 기억하게. 이렇게 우리들과 어울렸으면 그대들도 우리들의 동지야. 그리고 떳떳한 인간이고.”
도산이 부드럽고 점잖게 말했다. 이 말을 듣고 무녀들이 울기 시작했다. 자기네들 같은 천대받는 인간들을 동지라고, 떳떳한 인간이라고 말하니 어찌 눈물이 나오지 않으랴. 난생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후에 그날 권혁의 집에 왔던 무녀들 중에서 대부분이 권혁의 밑에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면서 적게 많게 임시점부를 위해 이로운 일들을 하였다. 그 중 김구 앞에 무릎을 꿇고 “살 길을 찾아 왔소이다.”고 말하던 여자의 이름은 명주다. 일 년 후 그녀는 김구 밑에서 경위사업을 하는 현태규(玄泰圭)라는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가 일본특무라는 것을 알고 김구에게 밀고하려다가 현태규한테 발각되어 살해당하였다.
권혁이 술잔을 비우고 안창호에게 술을 따르면서 말했다.
“사실은 여기에 온 이 여자들이 빼앗긴 나라를 위해 뭔가 하겠다고 하여 제가 일부러 이렇게 청한 것입니다.”
“오, 그렇구먼. 문제없지. 어서들 노래 부르게. 거 아리랑이나 노들강변 같은걸 루 부르란 말이야. 우리가 춤을 추게.”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 간다
……
무녀들이 노래를 불렀다. 안창호가 춤을 추자 이동녕도 이시영도 김구도 권혁도 함께 춤을 추었다. 이역타향에서 모진풍상을 겪고 있는 이 불굴의 투사들이 내일의 광명을 위해 춤을 추고 있었다.
[참고문서]
[1] 이시영(李始榮): 1868년 서울 출생. 대한제국의 관료, 독립운동가, 교육자, 정치인. 1910년 6형제 50여인을 거느리고 만주에 가서 독립운동기지 건설. 1919년《경학사》를 창설. 이어 신흥무관학교를 세움. 1919년에 임시정부 의정원에 출범. 범무부장, 재무총장, 감찰위원장 역임. 1934년『감시만어(感時漫語)』를 출판해 독립정신 고취. 1935년에 국무위원 겸 법무부장, 의정원 의원, 1942년에 국무위원 겸 재무부장, 1944년 감찰장. 광복 후 부총통에 당선. 그 후 정부에 실망을 느끼고 사퇴. 광복 후에는 김구와 정치견해가 달라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 1952년 병으로 부산에서 사망.
[2] 남의사:(藍衣社),전칭은 중화복흥사, 1931년 중국공산당을 반대하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우파 장교들로 조직됨, 비밀결사 조직이자 준(準) 군사조직,이틸이아와 독일 파시스트의 갈색 당(褐色黨)과 흑수당(黑袖黨)을 신봉 함.
[3] 두월생:(1988-1951) 중국 강소성 사람. 1931년에 항사(恒社)를 창립. 수하에 몇 천 명의부하를 둠.상해의 금융,유락업을 농단. 세력이 막강하여 국민당 정부도 두려워 함. 항일쟁이 폭발하자 거액의 자금으로 항일을 지원.1949년 장개석이 대만으로 가자고 제의하고 공산당이 상해에 남으로고 권고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홍콩에 감.1951년에 홍콩에서 사망.
[4] 김운룡《광야의 아리랑》 466-467쪽.
경무사업에서
손을 펴다
일본 정부는 상해 임시정부를 소멸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다해 타격하고 파괴하였다. 유자명(柳子明)은 김구를 회억하는 글에서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 때 일본 제국주의는 상해에서 활동하던 한국 혁명가들에 대하여 갖은 방법을 다 해 감시하고 체포했다. 당시 프랑스 조차지에 거주하는 한국 혁명가들과 그 가속이 300 여 명인데 반해 일제의 특무는 600 명이 넘었다. 이 특무들은 대부분 조선총독부 경무국과 상해 일본 영사관, 일본 외무성 및 남만철로 공사에서 왔다.[1]
엄항섭[2]은 김구의 대적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선생은 감옥살이를 오래 했던 고로 적들의 심리를 잘 알고 있었다. 선생은 흔히 적들을 먼저 제압하는 전술을 써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왜놈들이 파견한 개다리들은 어느 놈도 선생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들은 김구라는 이름만 들어도 모두 벌벌 떨었다.”
사실 김구의 압력이 컸다. 안창호와 담화를 나누었던 그날 밤, 김구는 온 밤 자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임시정부를 잘 보호할 수 있을까를 두고 고심참담하였다. 그는 결국 『손자병법』에서 답을 찾기로 하였다. 손자는“적을 알고 자기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지지 않고 적을 모르고 자기만 알면 한 번 지고 한 번 이기며 적도 모르고 자기도 모르면 백 번 싸우면 백 번 진다 ”라고 말하였다. 손자는 간첩전에서 “적이 파견한 정탐을 사출한 후 좋기는 유혹하고 매수하여 다시 적들에게 보내 나를 위해 일하게 하라”라고 했으며 또 간첩에는 인간(因間), 내간(內間), 반간(反間), 사간(死間), 생간(生間) 등 다섯 가지가 있다고 지적하고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인간이라는 것은 적국의 주민을 이용하는 간첩이다. 내간이라는 것은 적국의 관리를 이용하는 간첩이다. 반간이라는 것은 적의 간첩을 역 이용하는 간첩이다. 사간이라는 것은 허위 정보를 적국에 잠입한 우리 편의 간첩이 알게 하고 그것을 적에게 전달하는 간첩이다. 생간이라는 것은 적국에 잠입하여 정보활동을 하다가 살아 돌아와 보고하는 간첩이다. 전쟁에서 간첩전은 깊고도 오묘한 전술이다. 총적으로 아래의 두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첫째, “적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적이 있다.”
둘째, “드러난 것은 피할 수 있으나 숨은 것을 피하기 어렵다.”
김구는 경무국의 사명에 대해 전략상에서는 임시정부가 영도하는 대일전쟁(對日戰爭)이 정상적으로,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보장하는 것이고 전술상에서는 적들의 파괴로부터 임시정부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다. 그리고 또 임시정부의 경무국은 정식 주권국가의 경찰국과 성질이 다르므로 임기응변 하여야 하고 특수한 방식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요 임무는 왜놈들의 정찰활동을 방지하고 분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독립운동가 중의 투항자들과 변절자들을 사출하고 숙청하는 것이다. 그는 홍구(虹口)에 있는 일본영사관을 주요 정찰대상과 방비 대상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일본경시청과 조선총독부는 상해의 일본영사관을 통해 임시정부를 파괴하는 모든 계획을 획책하기 때문이었다.
김구는 20 여 명의 끌끌한 청년들로 경호인원을 선발한 다음 자기의 전투경험과 손자병법을 결합하여 그들을 훈련시켰다.
그 결과 경무국이 재빨리 제 궤도에 들어서서 직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김구가 성이 이씨라는 청년을 본국에 특파원으로 파견하여 조선총독부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두 달 후 이씨가 임무를 원만히 완성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그는 상해로 올 때 17세에 나는 김도순(金道淳)이라는 청년을 데리고 왔다. 이 씨는 번화한 대도시의 생활에 적응시키려고 김도순이 거리에 나가 구경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나 김도순은 인차 일본특무들의 목표물로 되어 결국 체포되었다. 나이가 어리고 천진한 김도순은 일본특무들의 위협과 공갈 앞에서 견뎌 내지 못하고 반변하였다. 그는 이 특파원의 거처를 알려주고 그 대가로 10원을 받았다.
김구는 아주 빨리 이 사건을 사출하였다. 김구는 간첩이나 변절자를 처리할 때 경중을 보아 회개 표현이 보이고 손실을 적게 준 자들은 석방하고 태도가 완고하거나 중대한 손실을 준 자들은 즉시로 총살하였다. 김도순은 비록 나이가 어렸지만 중대한 손실을 주었기에 당장 총살하였다.
정필화(鄭弼華)이라는 밀정이 일본인들에게 매수되어 상하이에 망명하여온 구한말 내무대신이며 애국자인 김가진(金嘉鎭)을 귀순시키려고 상해에 와 활동하다가 김구 부하들에게 체포되었다. 정필이는 악질분자였다. 공술을 받아낸 김구는 즉시로 정필을 교수형에 처했다.
1920 년 초, 일본경부에서 선우갑(鮮于甲)이라는 고등경찰을 상해에 파견하였다. 선우갑은 상해에 온 후 임시정부에 관한 정부를 수집하려고 경상적으로 프랑스 조계지를 드나들었다. 김구는 진작부터 선우갑을 의심했다. 그는 수하 사람들을 시켜 선우갑의 뒤를 밟게 하여 대량의 증거를 장악하였다.
어느 날, 선우갑이 또 조계지에 나타났을 때 김구가 갑자기 그를 체포하였다. 김구가 선우갑을 친히 심문했다. 심문이란 일종의 심리전이고 신경전이었다. 김구는 오랫동안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날카로운 눈길로 선우갑을 쏘아보았다. 선우갑은 그 눈길에 질려 감히 김구를 쳐다보지 못하였다.
김구가 갑자기 큰 소리로 물었다.
“이놈, 네 이름이 뭐냐?”
“선우갑입니다.”
“어느 민족이냐?”
“ ……”
선우갑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슨 민족이냐?”
김구가 어성을 높였다. 눈에선 날카로운 빛이 번뜩이었다. 선우갑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한-국-인입니다.”
“부모와 형제는 있느냐?”
“예, 양부모가 생존이시고 형님과 누이도 있습니다.”
김구가 아까보다는 낮으나 아주 준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듣거라. 만약 왜놈들이 너의 부모를 죽이고 너의 누이를 강간한다면 넌 어쩔 셈이냐 ? 왜놈들은 우리나라를 강박하여 《을미조약》을 체결하였고 무수한 백성들을 죽이고 강탈하고 강간하였다. 일본 놈들의 칼 아래서 얼마나 많은 우리 동포들이 희생되었는지 네 아느냐? 경무년(庚戊年) 합병 후 온 나라가 식민지로 변했고 그 때로부터 얼마나 많은 애국지사들이 무기를 들고 왜놈들과 싸웠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동포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는지 네 아느냐? 너도 3.1 운동을 알겠지? 12세 소년이 태극기를 추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왜놈들이 그의 오른 손을 자르자 그 소년은 왼손에 태극기를 추켜들고 만세를 불렀다. 왜놈들이 또 그의 왼손을 잘랐다. 그래도 소년이 계속 만세를 부르니 왜놈들은 그의 머리를 잘랐다. 그 열두 살 소년이 왜 그렇게 하였겠느냐? 네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김구는 아주 격동되었다. 심문이 아니라 마치도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는 듯했다.
선우갑도 필경은 한인이었다. 그는 김구의 말을 듣고 잃었던 민족심을 되찾고 후회하였다.
“전 동포들 앞에 죄 지은 놈입니다. 어서 죽여주십시오.”
김구가 한결 온화한 어조로 말했다.
“한 사람을 죽이긴 아주 쉬운 일이다. 하지만 한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기는 쉽지 않다. 내 너에게 권하려니와 진정한 사람이 되려면 자기만 관심할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나라와 민족도 좀 생각하여야 한다.”
김구는 선우갑에게 입공속죄(入功贖罪) 할 기회를 주고 석방하였다.
선우갑은 풀려나간 후 얼마 안 되어 매우 중요한 비밀문건을 가져왔다. 그리고 사흘 만에 조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조국에 간 후 임시정부를 칭찬하는 말을 하였다.
적들이 파견한 정탐들과의 싸움에서 첫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김구는 적들을 와해하는 책략에서 한차례 성공하였다.
일본경찰이 상해에다 파견한 밀정 강린우(姜麟祐)도 김구에게 체포된 후 김구의 교화를 받아 일본경찰에게는 가짜 정보를 제공하고 김구에게는 진짜 정보를 제공하면서 임시정부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김구에게서 가진 가짜정보를 총독부에 바친 공로로 본국에 돌아가 군수가 되었다. 김구는 손자병법 중 반간에서 성공한 셈이었다.
얼마 후에 또 한 가지 사건이 있었다.
어느 하루 성이 박씨라는 청년이 김구의 사무실로 찾아와 경무국장을 만나겠다고 했다. 박씨는 김구를 만나자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는 권총 한 자루와 필기 책 한 권을 내 놓았다. 원래 박씨는 며칠 전 일본에서 상해로 왔다가 일본특무들에게 체포되었었다. 특무들은 박씨를 보고 김구를 죽이라고 협박했다. 만약 암살에 성공하면 거액이 돈을 주고 또 한국에 있는 박씨의 가족들에게 많은 토지를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불응하면 처결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박씨는 할 수 없어 응낙하고 프랑스조계지에 잠입하여 김구를 암살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김구가 위대한 독립투사라는 것을 생각하곤 민족의 반역자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김구를 찾아왔던 것이다.
사람을 씀에 있어서 김구는 “의심하는 사람이면 쓰지 말고 일단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것을 항상 신조로 삼았기에 실패한 일도 있었다. 현태규(玄泰奎)사건이 그러하였다. 현태규는 김구 밑에서 7년간 일하면서 김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의 신임을 얻었다. 어느 하루, 노백린이 김구를 보고 뒷길에 한인 여자 같은 시체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김구가 부랴부랴 가보니 명주의 시체였다. 시체를 자세히 검사해 보니 피살이 분명했다. 목에는 노끈으로 조른 자국이 있었는데 이것은 김구가 서대문 감옥에서 활빈당 김진사에게서 배운 것을 경호원들에게 알려준 살인 방법 중의 하나였다. 여기에서 단서를 얻고 조사한 결과 범인이 현태규임이 밝혀졌다. 현태규는 가정이 구차했는데 돈 때문에 왜놈에게 매수되어 밀정이 되었던 것이다. 현태규는 명주와는 애인관계였다. 동거하던 중 명주가 현태규가 일본 밀정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명주는 비록 행실은 좋지 않았지만 애국심만은 열렬했고 김구를 아주 존중하였다. 그 명주가 바로 권혁의 집에서 김구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면서 “살 길을 찾아 왔소이다”라고 말하던 그 무녀였다. 현태규는 명주가 김구에게 고발하는 것이 두려워 선손을 써 명주를 죽였던 것이다.
[주]
[1] 유자명:『나의 회억』
[2]엄항섭(嚴恒燮); 1898년생. 호 일파(一波). 경기도 여주 출생. 임시정부 법무부에서 활동. 1922년 항주 지강대학(芝江大學) 졸업. 1926년 임시의정원 헌법기초위원. 1931년 애국단에 입단. 1940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 1941년 임시의정원, 외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 임시정부 선전부장, 선전기관지『한민』(1943)을 창설하고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노선과 지도이념을 선전. 한중문화협회 한국 측 이사.『도왜일기』를 집필. 1945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귀국. 귀국 전과 귀국 후까지 김구가 가장 신임하는 측근. 귀국 후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으로 김구의 노선을 지지. 1948년 김구와 같이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 6.25 전쟁 때 납북. 1962년에 사망. 1989년 독립장 추서.
변절자 황학선을
처단하다
김구가 경무국장으로 있던 시기 가장 큰 일은 황학선(黃鶴善)사건이었다.
상해 홍구의 일본영사관은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소란과 파괴를 시종 멈춘 적이 없었다. 그러한 행동이 거의 실패했지만 실패를 달가워하지 않고 계속 헌병과 간첩들을 파견하여 날이 갈수로 총소리 없는 전투가 더욱더 백열화되었다.
옛글에 이르되 군사로 적을 막고 물로 흙을 무너뜨린다고 했다.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김구는 과격한 행동을 삼가하고 방어로 공격하는 전술로 일본특무들과 일본경찰들의 침범을 하나하나 격파했다.
일본경시청 특고과(特高科)는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제특무 미쯔시나(松島)에게 중국 남방지구의 정보 수집을 주관하게 하고 중등을 협조하여 일체 수단을 동원해 상해임시정부를 파괴하라고 명령하였다. 미쯔시나는 신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혈통으로 중국어와 한국어에도 유창했다. 그는 상해에서 중국 여인과 한국 여인을 정부(情婦)로 데리고 살았다.
미쯔시나는 상해임시정부가 프랑스조계지에 있어 일하기 어려우므로 책략을 바꾸어 한국인이 한국인을 죽이는 책력을 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면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질 것이고 그 틈을 타 일망타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쯔시나는 어떤 땐 직접 한국인으로 변장하여 조계지에 진입했고 어떤 땐 한인교포들 중에 혼입하여 동태를 살폈다. 오랜 고찰 끝에 그는 황학선이라는 사람을 손에 쥐었다. 황학선은 오래전에 상해에 온 사람으로 독립운동에 열정이 매우 높았다. 국내나 타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거개가 상해에 온 날 첫날은 흔히 그의 집에 유숙했다. 이론 연고로 그는 임시정부인원들과 사이가 좋았다. 약점이라면 재물에 너무 혹하였다. 황학선의 약점을 본 미쯔시나가 그를 매수하려고 결정하였다.
미쯔시나가 황학선을 청하였다.
“황군, 내 보기엔 당신은 나와 친구로 사귈 수 있을 것 같구먼.”
황학선이 긴장하여 아무 말도 못하였다.
미쯔시나가 아주 친절하게 말하였다.
“황군, 긴장하지 말게. 사실 한인들이 오해하고 있더군. 한일합병은 알고 보면 모두 한국을 위한 것이요. 만약 일본제국이 당신들과 합병하지 않았더라면 벌써 영국이나 프랑스 혹은 미국한테 당했을 거네. 우리들은 같은 동양인이고 또 이웃이 아닌가. 때가 되면 당신들은 자치권을 행사할 거네.”
황학선이 물었다.
“정말 그렇게 될까요?”
“사이토 대장이 조선총독이 된 후 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났소. 한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창간됐소.”
“저도 두 신문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상해의 가정부(假政府)는 보잘 것 없는 도적무리들이오. 그들이 지금 한일합병을 파괴하고 있소. 황군이 일을 좀 해야겠소. 가정부의 총리, 총장들을 하나하나 없애버리시오. 일본 대제국이 당신의 공로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오. 보수는 더 말할 것도 없소. 오늘 먼저 일부분을 가져가오……”
황학선은 금전에 탐닉하여 결국 미쯔시나의 개다리가 되고 말았다.
황학선은 자기의 음모를 획책하기 시작했다.
황학선은 미쯔시나에게서 가진 돈으로 우선 2층 양옥을 사고 병원간판을 걸었다. 그는 경성의전 졸업생인 사위 나창헌(羅昌憲)을 병원에 안치한 다음 나창헌의 관계를 이용하여 많은 청년들을 끌어들여 화투도 치고 술도 마시게 했다. 그리하여 병원은 한인교포 청년들의 구락부처럼 되어버렸다. 황씨와 나씨는 『철혈단(鐵血團)』을 조직했다. 그는 청년들이 쉽게 격동하는 특점을 이용해 “임시정부 요원들이 국내외에서 모금한 돈을 탐오했다. 그 목적은 한국을 팔아먹자는 것이다.”고 선동했다.
청년들은 처음 한두 번은 믿지 않았으나 반복적으로 선전하니 결국 믿게 되었다. 황학선은 나창헌과 일부 청년들이 임시정부의 일부 작법에 대해 불만이 있는 것을 보고 붙는 불에 키질했다.
“당신들은 청년들이다. 만약 당신들이 임시정부를 성립하면 당신들은 한국의 영웅으로 될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당신들을 도와줄 것이다.”
나창헌이 황학선에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으면 새 것이 오지 않는다고 했소. 우리가 임시정부 성원들을 하나하나 없애버리면 천하가 우리의 것으로 될 것이요.”
당시 임시정부는 이동휘와 안창호 사이에 시정방침을 둘러싸고 심각한 분기가 있어 경상적으로 충돌이 발생하였다.
황학선은 두 수뇌인물의 불화한 틈을 교모하게 이용하였다. 황씨와 나씨, 그리고 『철혈단』의 부분적 두목들이 「임시정부성토서」를 발표하고 그 것을 또 신문으로 발행하여 크게 여론을 조성하였다. 철혈단의 한 청년이 간첩혐의로 체포되자 그것을 빌미로 『철혈단』수십 명 동원하여 몽둥이를 들고 임시정부를 습격하게 하였다. 김구는 이번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한 후 경무인원들을 지휘하여 과단한 행동으로 폭란을 평정하였다. 김구가 주범인 황학선을 심문하였다.
“넌 어느 나라 사람이냐?”
“당연하지요. 전 한국인입니다.”
“네가 한국인이라? 내 보기엔 왜놈의 개다리 같은데?”
황학선이 급해났다.
“뭐라구요?”
김구가 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한국인이라면 왜 왜놈들을 위해 일 하느냐?”
“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이 놈아 시치미를 떼지 마라. 내가 모르는 줄 아느냐? 넌 일본영사관의 일본특무 중좌(中佐:즉 미쯔시나)와 다섯 번이나 접촉했다.”
황학선이 입을 다물었다.
“네가 산 2층집은 누가 사 준 것이며 병원 경비는 또 누가 준 것이냐? 놈이, 이실직고 못할까.”
황학선은 더 뻗쳐봐야 쓸데없는 줄 알고 미쯔시나를 만나 일본특무로 된 과정을 곧이곧대로 자백했다.
김구는 황학선의 자백서를 원문대로 공포한 다음 황학선을 교살에 처하였다. 나창헌을 비롯한 철혈단의 성원들이 임시정부를 찾아와 죄를 뉘우쳤다. 그들은 한 결 같이 황학선의 꼬임 수에 들었다고 하소연하였다.
김구는 적들이 파견한 정탐들과의 싸움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김구는 자기 어깨의 짐이 무겁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선 자기가 죽어도 보람 있다고 생각하였다.
조선총독부에서 각색된
흉악한 살인 드라마
일본경시청에서 마쯔시나를 호되게 책망하고 그를 조선총독부 경무총감 고지마(兒島) 수하에 가 일하게 하였다.
미쯔시나는 서울에 온 후, 직접 경무총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고지마가 전화로 경무국장 아카이케(赤池)도 불러왔다.
미쯔시나가 상해임시정부의 정황과 임시정부에 진입했던 간첩들의 정황을 회보하였다.
“이동휘가 볼쉐비큰가 ”
고지마가 미쯔시나에게 물었다.
“그렇습니다. 각하, 이씨는 러시아에서 볼쉐비크에 가입했습니다. 러시아에서 한인사회당을 창립했고 러시아와 만주에서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했습니다. 그는 대정 9년(1920년) 10월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로 갔습니다.”
“이승만은 아직 미국에 있는가?”
“예, 각하 대정(大正) 8년 9월에 가정부의 총통으로 선거된 후, 상하이에 오지 않고 그냥 미국에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대신 지금 안창호가 직권을 행사합니다. 이동휘와 안창호 사이에 모순이 많습니다. 임시정부 내부에는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민족주의자들이 있는데 그들 지간의 분기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습니다.”
“김구란 자가 그렇게 무서운 놈인가?”
“이 사람은 확실히 일반인과 다릅니다. 이 자가 바로 25년 전에 치하포에서 우리 육군중위 스찌다를 죽인 흉수 김창수입니다. 인천 감옥에서 월옥한 후 김구라고 개명했습니다. 안악사건에서 체포되어 유기도형 17년에 언도되었으나 감옥에서 표현이 좋아 앞당겨 석방되었습니다. 3.1운동기간에 상해로 갔습니다.”
고지마가 큰 소리로 욕했다.
“밥통들! 말짱 밥통들이야!”
한참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미쯔시나가 말했다.
“가정부가 프랑스조계에 있어 우리가 손을 쓰기 어렵습니다. 프랑스인들이 그들을 동정하니 방법이 없습니다.”
고지마가 어느 정도 분이 수그러지자 원래의 상태로 돌아갔다.
“작년 만주의 한비군(韓匪軍: 일본인들이 말하는 독립군)이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일시 승전을 하자 한인들이 기고만장해졌소. 그때 우리가 세 개 사단의 병력을 동원하여 깨끗이 소멸하려했지만 그들이 도망쳤소. 김좌진과 홍범도, 서일, 지청천(이청천이라고도 함) 등이 러시아 경내로 숨어버렸소…… 전략적으로 보면 가정부와 한비군이 밀접한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아주 크오. 만약 우리가 대륙을 진공하면 가능하게 그들이 연합할 것이요…… 그러므로 가정부의 활동을 엄격히 공제하여 한비군과 가정부의 연계를 끊어버려야 하오.”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또 다른 하나의 음모를 획책했다.
서울의 가을은 너무나 황홀했다. 만산을 단장한 울긋불긋한 단풍과 그 밑을 유유히 흘러가가는 푸른 강물이 한데 어울려 그야말로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방불케 하였다.
소나무가 울창한 남산의 한 중턱에 회색 빛 양옥 한 채가 있었다. 이 집이 바로 조선총독부이었다. 이 작은 층집에서 삼천리 아름다운 강산의 풍운을 조종하고 상해 임시정부를 파괴하는 흉악한 드라마가 각색되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제 3기 총독 사이또 마코토(齎藤實)는 원래 해군대장으로서 악명 높은 군국주의자였다. 조선통독으로 부임되어 오는 자들은 이렇게 말짱 군인 출신의 최고급 장령들이었다. 사이토는 1868년에 일본 이와테 현에서 출생했다. 1877년에 해군학교를 졸업하고 1906년에 해군대신 1912년에 해군대장이 되었다. 1919년에 조선총독으로 취임한 뒤 『무단통치』를 『문화통치 』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헌병을 경찰로 바꾸었을 뿐 병력을 증강하였으며 위장된 자치론을 이용하여 많은 지식인을 변절케 하였고 독립운동 방향에 혼선을 빚게 하였다. 1927년, 제네바에서 해국군축회의에 일본대표로 참석했고 귀국 후 조선총독을 사임하고 추밀원고문관이 되었다. 1929년-1931년에 재차 조선총독에 취임하였고 1932년에 수상이 되었다. 1934년에 『데이진사건 』(帝人事件)으로 내각 총사직을 단행했고 1935년에 친영미파로 지목되어 암살당했다. 사이토는 그만 해도 명이 긴 편이었다. 원래는 훨씬 전에 죽었어야 할 놈이었다. 일찍 1919년 9월 2일, 사이토가 처음으로 조선에 총독으로 부임하여 올 때 서울 역에서 강우규한테 죽을 번 했고 1922년, 평안북도 마이탄 강변에서국경을 시찰하다가 임정소속의 한웅권(韓雄權), 현성희 (玄成熙) 등 8 명의 저격을 받아 겨우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으며 1926년에 또 송학선(宋學先)이 사이토를 죽이려다 경성부 의원을 잘못 죽여 송학선이 살해된 적도 있었다.
사이토가 창문가에 서서 넋을 잃고 매혹적인 가을 경치를 감상하고 있었다. 조선이라는 이 수려한 삼천리강산이 과연 영원히 일본에 속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자신에게 묻었다.
조선인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성립하였다. 우리가 한인들의 저항을 그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겠는가.
한 달 전, 아직 서울에 와 총독에 부임하기 전에 그는 보도 기관을 통해 자기의 문화정책을 선전하고 언론의 자유를 얼마간 완화시킬 준비를 하였다. 헌데 서울의 거리에서 그를 맞이한 것이 작탄일 줄을 그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1920년 9월 2일 오후, 신임 총독 사이토가 취임차로 한국에 금방 도착하여 서울역 2층 귀빈실에서 환영객들을 잠깐 만나보고 마차에 올라타려고 하는 순간, 한 백발노인이 뛰쳐나와 작탄을 던졌다. 수많은 일본 경찰들이 쓰러지고 거리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육군소장 무라다(村田), 본소 경찰서장 고무다(小牟田) 등이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암살자는 강우규(薑宇奎)라고 부르는 65세의 늙은 이었다.
독립운동가 강우규는 평안도 덕천 사람으로 망국 후 간도와 러시아 등 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노인단(老人團)』을 조직하고 항일에 투신했다. 사이토가 제3대 총독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이토를 죽이려고 서울에 잠복했던 것이다. 다행히 사이토는 운수가 좋아 상하지 않았다. 강우규 의사는 11월 29일 사형 당할 때 그 아들 중건(重建)더러 “내가 죽어서 청년들의 가슴에 조그마한 충격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 것은 무엇보다 보람 있는 일이다.”하고 비장한 유언을 남겼다.[1]
나이가 칠십이 되는 한 노인은 거리에서 시위를 하다가 일경이 제지하니 자살로서 대항하였다.
이러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쳤다.
사이토는 이 굴강한 민족을 굴복시키자면 단순히 탄압만이 아닌 완화정책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기 쉽고 너무 연하면 휘어지기 쉽다. 그러므로 강약을 적당히 결합하여야 했다. 이것이 요즈음 조선을 다스리는 사이토의 전략이었다. 사이토는 유관인원들을 불러다 이 문제를 토론하기로 하였다.
“각하, 사람들 다 왔습니다.”
비서가 들어와 보고하였다. 사이토가 보고를 받고 접대실로 들어갔다.
정무총장 미즈노타로우(水野連太郞), 조선주재 사령관 우츠노미아(宇都宮), 경무총장 아카이케(赤池), 헌병 사령과 카외시마(川島) 및 상해에서 돌아온 아이우찌(相內) 경부 등 모두 모였다.
사이토가 좌중을 한 번 둘러보고 입을 열었다.
“회의를 시작합시다. 먼저 아이우찌 군의 상해 가정부(假政府: 일본인들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가짜정부라고 불렀다)에 대한 정황보고를 들은 다음 정식 토론에 들어갑시다.”
아이우찌가 자리에서 일어나 군례를 한 다음 보고했다.
“이번에 도쿄경시청과 사이토 각하의 명령을 받고 상해에 갔습니다. 20 여일 사이에 가정부에 대한 우리 영사관의 자료를 상세히 요해하였고 제가 직접 가정부의 정황을 조사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여러 각하들에게 상세한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아이우찌 경부가 보고서를 사이토에게 바쳤다.
보고서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상해가정부 건립과정-약함
2. 최근 동태: 안창호, 평안도 사람, 호, 도산. 대정(大正) 8년(1919년) 5월 25일에 상해에 와 내무총장에 취임. 이승만이 미국에 있기에 가정부의 사무를 안창호가 주관한다. 안창호가 주로 세 가지 일을 했다. 1) 시정방안을 개조함. 2) 조선 국내를 비밀 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연통제(聯通制)」를 실시함.
연통제의 조직기구는 아래와 같다.
연통부 본부-상해
도감독부(道監督部): 감독 1인, 부감독 1인, 서기 3인, 재무 2인.
군총감부(郡總監部): 총감 4인, 부총감 1인.
목전 13도에서 해당 인원을 선발하고 있다.
3. 가정부에서 새로이 경무국을 설립하였다. 경무총장에 김구다. 호는 백범이고 황해남도 해주 사람이며 본명은 김창수다. 병갑년(丙甲年)에 치하포에서 적수공원으로 우리 육군정찰중위 스찌다(士田)를 타살했다. 당시 그가 타살 동기를 국모를 위한 복수라고 말해 국왕이 살인죄를 사면하였다. 월옥 후 김구라고 개명하고 대정(大正) 8년 4월 2일에 상해로 갔다.
“뭘? 우리 군대를 죽인 놈이 상해로 갔다?”
사이토가 참지 못하고 일어서서 고함쳤다.
헌병사령 카와시마(川島)가 우물쭈물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하, 죄송합니다. 그러나 김구는 매우 교활합니다. 대폭란 기간에 점잖게 본분을 지켰기에 그놈이 그물에서 빠져 나갔습니다. 우리가 소홀한 탓입니다.”
“조선사람 중에 그래 본분을 지키는 자가 도대체 몇이나 되오? 우리 대일본 제국은 국외에 있는 조선인에 대해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하오. 김규식이 파리 평회회의에서 항의서를 제출하여 일본제국에 아주 큰 시끄러움을 가져다주었소. 제 2차 국제 사회당회의에서 조소앙이 또 한국독립결의안을 제출하였소. 이 사람들 모두 상해 가정부에 파견한 사람들이오. 우린 반드시 상해 가정부를 견결히 타격해야 하오. 김구 같은 사람들에 대해 특히 경각성을 높이고 조속히 없애버려야 하오.”
“각하, 한국가정부는 프랑스 조계지에 있어 우리 헌병과 경찰들이 접근하기 어렵습니다.”
상내가 사이토에게 귀띔했다.
미즈노 타로우 경찰관이 입을 열었다.
“상해 가정부는 일본제국에게는 하나의 암 덩어리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정보의 기능과 헌병의 작용을 가강해야 합니다. 그리고 외교적 도경을 거쳐 프랑스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경고를 주어야 합니다.”
“상해 가정부가 성립된 이후 만주의 한국독립군이 중조 변경에서 우리 군을 400 여차나 습격하였습니다. 목전 가정부와 만주 독립군의 연계가 더 밀접해지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 본 사령은 도쿄 육군 사령부와 총참모부에 보고를 올렸습니다.” 우츠노 미야 사령관의 말이다.
사이토 마코토가 흥분을 갈아 앉히고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울에 오기 전에 하라다카시(原敬) 수상이 강조한 바 있습니다. 모든 조선인들이 정신, 감정상에서, 심리상에서 일본민족의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여야만 즉 점차 우리에게 동화되어야만 비로소 조선을 완전히 우리에게 귀속시킬 수 있습니다. 시간이 걸려야 합니다. 문화로서 정복하는 것, 이것이 곧 문화주의고 문화정책입니다. 그러나 문화정책이 무력수단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상해 가정부에 대해 두 가지 수단을 병행해야 합니다. 동경에선 지금 가정부의 요인을 요청하여 우리 내각과 협상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무력탄압과 함께 연화정책(軟化政策)을 실시할 것입니다. 가령 연화가 성공하면 가정부는 조만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김구 같은 사람은 반드시 없애야 합니다.”
사이토의 말이 끝나자 미즈노가 사이토의 말을 보충하였다.
“총독 각하께서는 이미 도쿄로 요청할 대상을 물색해 두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이 여운형입니다. 중국 남경 금릉대학 졸업생이고 나이는 35세입니다. 일찍 김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였고 김규식과 같이 파리에 가 조선독립청원활동에 참가했습니다. 일본기독교의 간사 토우타(藤田)와 가까운 사이입니다. 하여 이번 일은 승산이 있을 것 같습니다.”
회의 후 이튿날 미즈노(水野)총장과 아카이케(赤池)국장이 사이토의 밀서를 가지고 도쿄로 떠났다.
[주]
[1] 유연산『유자명 평전』110쪽
여운형이 도쿄에서
열변을 토하다
11월 초의 어느 날, 김구가 하비로 221호에 있는 경무국 사무실에서 금방 두 명의 정찰원을 보내고 나니 기분이 사뭇 상쾌하였다. 4개월 동안 그는 몇 가지 일을 본때 있게 처리하였다. 몇 개의 간첩안을 해결했고 5,6명의 특무를 체포했으며 일본영사관에서 파견한 특무들의 활동규율을 기본상 장악하였다. 김구가 내무총장 이동녕을 찾아 가려고 문을 나서려는데 여운형이 찾아왔다.
“김 국장,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회보하겠습니다.”
“무슨 일이시요?”
“조선총독부 정무총장 미즈노와 일본정부 하라다카시 총리의 위탁을 밭고 저한테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저를 일본에 초청하여 우리 정부와 일본정부가 상담을 하자고 합니다.”
“누구를 파견해 왔소?”
“일본기독교 간사 토우타 규우고(藤田九皐)인데 신분은 예수교 목사입니다. 그가 저의 안전을 절대적으로 보장하겠다고 합니다.”
……김구가 한참 침묵을 지켰다. 그는 한국의 3.1운동이 일본정부를 크게 뒤흔들었고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력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은 피비린 탄압만으로 근본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보다 유연한 정책을 실시하여 인심을 농락하려고 하고 있었다. 10월 중순에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서울에서 13도 대표대회를 열고 조선의 정치개량문제를 토론하였다. 대표들이 19항에 달하는 건의를 제출하였다. 요약하면 조선은 응당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져야 하며 조선 아동들이 일본 아동들과 동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가져야 한다, 3.1운동에 참가했던 정치범들을 사면하고 식민지 정책을 식민지정치로 바꾸며 조선인의 습관을 존중해야 한다는 등이다. 사이토 마코토가 물론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상징적으로 일부 제도를 개혁했을 뿐이다. 이를테면 헌병제도를 순포제도(巡捕制度)로 바꾸고 조선인들이 선출한 지방 협찬원(協贊員)이 총독에게 건의를 제출할 수 있게 하고 일어로 교학하던 일부 과목을 적당하게 줄이고 몇 부의 한글잡지의 출간을 허용한 것 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정부가 한국정부에 특사를 파견하여 서로 상담을 하기로 한 것은 이른바 「정치개량」의 한 조치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김구가 여운형을 보고 말했다.
“임시정부의 몇몇 사람들이 일본에 특사를 파견하자고 한 바 있었는데 나도 그런 생각이요. 일본인들과 서로 싸워도 괜찮소. 그들에게 임시정부의 시정방침과 이천만 동포의 독립염원을 똑똑히 알리고 일본내각과 조야가 임시정부가 구경 무엇을 하며 이천만 동포들의 마음속의 목소리가 구경 어떤 것인가를 알리면 그 것만으로도 족하오. 이렇게 하면 우리에게 유리하오. 하지만 놈들이 교활하니 천만 안전에 유의해야 하오. 절대 놈들에게 속지 말아야 하오.”
“여기에 대해 저도 많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절대 근심하지 마십시오.”
여운형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였다.
“그래도 중대한 문제니 이동녕 총장과 의논하고 다시 봅시다.”
이 일로 임시정부 국무회의가 열렸다. 각 총장, 차장, 그리고 국무위원 전체가 회의에 참가하였다. 여운형이 회의에서 사실의 경과를 설명했다. 당시 임시정부 내부에서는 한국의 독립 문제를 둘러싸고 두 가지 대립되는 견해가 충돌하였다. 이승만을 위수로 하는 온화파들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고 평화와 외교적 수단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했다. 이런 견해는 『독립신문』창간호에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우리 삼천만 민족은 최후 일인이 남더라도 절대로 폭력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폭란을 일으킨다면 우리는 영원히 구원되지 못할 것이다. 조심하라. 조심하라. 천 번 만 번 조심하라!” 이것이 이승만을 대표로 하는 온화파들의 독립주장이다. 이승만은 또 공개적으로 군사행동을 하는 것은 “우둔하고 위험한 짓이다.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유격전을 하거나 습격을 한다면 일본인들에게 오히려 [분향]을 해 주는 것으로 될 것이며 그들한테 국내 인민을 더욱 가혹하게 탄압할 구실을 제공해 줄 것이다. 독립의 유일한 길은 서방국가들의 양지(良知)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1]고 했다. 한편 이동휘를 위수로 하는 강경파들은 미국이나 일본에 환상을 품지 말고 무력으로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여 여운형을 일본에 파견하느냐 마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쟁론이 심했다. 치열한 쟁론 끝에 결국 여운형을 임시정부 외무차장 겸 임시정부 특사로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수행인원으로 최근우(崔謹愚)와 신상완(申尙玩)에 선발됐고 장덕수(張德秀)가 번역으로 함께 가기로 했다. 여운형이 토우타 규우고에게 임시정부의 결정을 전달했고 토우타 규우고가 미즈노에게 보고했다.
11월 5일, 여운형 일행이 출발하였다. 김구 등이 그들을 황포부두까지 배웅했다.
김구가 여운형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사람에겐 비환이합(悲歡離合)이 있고 달은 이즈러졌다 둥글어지는 법이요. 상해에서 꼭 다시 만나길 희망하오. 꼭 무탈하게, 승리하고 돌아오길 바라오.”
여운형이 신심 가득히 말했다.
“안심하십시오. 백범 선생님, 무사히 돌아올 테니.”
여운형은 어떤 사람인가.
1886년 경기도 양평군에서 태어났고 호는 몽양(夢陽)이다. 1909년에 여운형은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창립하였고 애국문화계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4년에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남경 금릉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다가 중도에 그만 두고 협화서국(協和書局)에 취직하였으며 얼마 후 교민단 단장을 맡았다. 1917년에는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창설하고 교장이 되었다. 1918년에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조직 간사로 활약했다. 1919년 4월, 한국임시정부가 성립된 후 상해로 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상해 한국교민단 단장이 되었다. 그는 빈한한 가정에서 고생스럽게 자랐기에 어려움을 잘 견뎌 내고 생활이 소박하였다. 임시정부에 취직한 후 틈만 있으면 여러 가지 힘든 일을 찾아 가리지 않고 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노동자」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휴식 일에는 기독교 전파자로 자신을 엄호하면서 한인교포들에게 임시정부 주장을 선전하고 광복운동에 참가하도록 추동하였다. 1929년에 영국의 식민지정책을 비난한 죄로 3년간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1934년에 조선일보사 사장이 되었다가 손기정(孫期貞)의 일장기말살사건[2]으로 신문이 폐간되고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4년, 일본의 패전을 예상하고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이 되었으며 1945년, 광복이 되자 조선건국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되었다. 9월에 조선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스스로 부주석에 취임하였다. 1947년, 서울에서 한지근(韓智根)라는 청년의 총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다. 이 것은 물론 썩 후의 일이다.
여운형 일행은 11월 18일, 상하이에서 떠나 동경시간으로 11월 21일에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동경에서 가장 호화로운 국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일본 체류기간의 모든 비용은 일본척식일과(拓植一課)에서 전담하기로 했다.
이튿날, 여운형 일행은 조선에서 일본으로 갔다. 일방의 안배로 선후하여 내무성, 육군부, 농상국, 척식국(拓植局) 등을 방문하고 육군대신 다나카이키치(田中義一), 조선총독부 정무총장 미즈노(水野鏈太郞), 오카무라(罔村寧次) 및 기타 유명 인사들을 만나보았다.
34세의 젊은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민첩하고 활발하고 절주 있게 특수한 외교투쟁을 전개하였다.
여운형은 대신들과 조야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동양의 평화를 위해, 한, 일 두 나라 민중의 우호와 화목을 위해 한국은 반드시 독립해야 된다고 말하였다. 장덕수는 박식한 인테리였고 유능한 독립가였다. 그는 민족자치의 필요성과 세계혁명의 조류 등에 관한 문장들을 번역하여 일본인들에게 전달했는데 여운형과 배합이 잘 맞았다.
여운형은 일본에 가 외교가로서의 재능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다나카이키치와 담화할 때 특히 그러하였다.
다나카이키치가 여운형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의 독립군은 겨우 몇 만에 불과 하지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강한 군대를 갖고 있습니다. 80척의 일본 함대가 이미 태평양을 완전히 공제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와 손을 잡고 합작하는 것이 가장 명지한 선택일 것입니다.”
여운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3군 통수는 빼앗아 갈 수 있어도 필부의 뜻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나의 대답은 오직 이 한 마디입니다.”
다나카는 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내심 이 젊은이에게 탄복했다.
여운형이 상해로 떠나기 전 다나카가 여운형을 청하여 천황의 다카사카궁(赤坂離宮)을 관람 시켰는데 이 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27일 오후 3시, 여운형이 도쿄 국제호텔에서 성대한 기자 초대회를 열었다. 그는 자기가 일본에 온 목적과 개인의 정황, 그리고 한국독립운동의 진상을 역설하였다. 삐어난 외모와 늠름한 체구, 도도불절한 연설, 특유의 감화력은 거대한 촉수마냥 회장을 휘감았다. 얼마나 담찬 여운형인가. 얼마나 멋진 여운형인가! 그는 초대회를 짜장 자기의 강연회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다음 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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