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이 깃발을 들고 주인공의 행차에 참가한 것은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깃발이 가진 의미가 모두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성상번’이란 글자가 적힌 깃발은 행렬의 주인공이 왕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지만 서쪽 곁방에 그려진 장방(帳房)에 앉아있는 무덤 주인공의 곁에 3단 털 장식을 단 깃발이 하나 서있는데, 이를 황제나 군왕이 아랫사람에게 수여하는 일종의 신표(信標)인 ‘절(節)’이란 깃발로 보아 무덤 주인공이 왕이 아니라고 보는 주장도 있다. 이런 논란은 차치하고서라도, 깃발이 주인공의 신분이나 위상을 과시하기 위한 일종의 선전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안악3호분 외에도 약수리고분, 안악1호분, 대안리1호분, 개마총 등 행렬도가 그려진 여러 고분벽화에서 깃발을 찾아볼 수 있다. 수산리 벽화 널길에 그려진 호위무사의 경우 한 손에 환두대도(環頭大刀- 손잡이 끝부분에 둥근 고리가 있는 고리자루칼로, 삼국시대 무덤에서 주로 출토됨)를 들고, 한 손에는 제비꼬리 모양의 깃발을 단 기창(旗槍)을 들고 있다. 호위무사가 든 깃발은 무덤 주인공의 가문이나 지위를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덕흥리 고분벽화의 앞방 천정 벽화에는 옥녀지번, 선인지번이란 설명과 함께 깃발을 든 옥녀(玉女- 선경에 산다는 여자)와 선인(仙人)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천왕지신총의 앞방 천정에 그려진 봉황을 탄 천왕(天王) 역시 깃발을 들고 있다. 깃발은 천상세계에서도 무엇인가를 안내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고구려에서 사용한 깃발의 종류는 5~6종에 불과하며, 대부분 특별한 문양이 없는 소박한 것들이었다.
중국의 영향으로 늘어난 깃발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귀국 후 고려의 실정을 소개한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의례행렬에 대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소감을 전했다.
“다른 오랑캐 나라의 임금들은 출입할 때에 깃발 10여 개가 따르는 데에 불과하여 신하들과 뚜렷한 분별이 거의 없다. 오직 고려는 조빙(朝聘- 나라와 나라 사이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는 일)을 통하여 오랫동안 중국의 영향을 받아 왕이 행차할 때에 호위 군사들이 의물(儀物-의례용 물건)을 잡고 가니, 다른 나라와 달리 화려하고 볼만하다.”
그의 말처럼 고려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아, 왕이 행차할 때 깃발, 부채, 금도끼 등 다양한 의물을 든 사람들이 따르는 화려한 모습을 자랑했다. 이것은 삼국시대 왕의 행차와는 달리 매우 화려한 행차였다. 서긍이 지적했듯이 왕의 행차가 화려해진 것은 송나라의 영향으로 의물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중국의 경우에는 상(常), 기(旂), 여(旟), 정(旌) 등 신분과 용도에 따라 깃발이 다양하게 구분되어 있었는데, 이를 적극 수용한 셈이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깃발에 대한 명확한 규정과 구분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고려도경]에는 임금의 행차에 상기(象旗), 해마기(海馬旗), 응준기(鷹準旗), 봉기(鳳旗), 태백기(太白旗) 등이 순서대로 따랐고, 각 방위마다 오방기(五方旗)를 든 병사들과 왕의 친위군대인 용호군(龍虎軍) 수만 명이 갑옷을 입고 작은 깃발(小旗)을 들고 길 양편으로 행진을 했다고 묘사하였다. 하지만 고려에 위에서 언급된 7종의 깃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고려사] <여복지(輿服志)>에는 무려 61종의 깃발이 소개되어 있다. 1221년 고종(高宗)이 대사령(大赦令)을 선포할 때 의장대는 무려 1380명이나 되었고, 깃발 159개가 등장했다. 삼국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깃발의 종류와 숫자가 많아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