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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위는 정부의 사업에 장애를 조성하고 국고 수입에 영향을 미쳤으며 의정원의 신성함을 모독하였다.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에서 선출한 임시대통령이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의정원의 결의를 부결한 것은, 바로 서울 조직에서 말한 것처럼 실제는 근본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을 부정한 것이다. 국정을 반대하고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이 국가 원수로 그냥 있다면 독립대업은 물거품이 될 것이며 순국제혼(殉國諸魂)들이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이승만의 소행은 전방에서 피 흘리며 싸우는 용사들의 기대와도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고로 이 글을 지어 이승만을 심판하는 바다.
대한민국 7년 (1925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심판위원장 나창헌(羅昌憲)[1]
위원 곽헌(郭憲)[2]
위원 채원개(蔡元凱)[3]
위원 현구(玄九)
위원 최석순(崔錫淳)[4]
3월 13일, 제13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심판결의안을 통과하고 임시의정원 임시헌법 제22조에 근거하여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하는 심판서를 통과하였다.
이승만의 죄명은 아래와 같다.
1. 마음대로 직무를 이탈하였다. 거의 5년간 미국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면서 해외교포들이 모금한 독립자금을 탐오하였다.
2. 명색이 임시대통령으로서 이른바 한국의 독립은 미국에 위탁하여 진행되어야 한다는 『곡선구국논(曲線救國論)』을 내놓아 한국임시정부를 모독하고 민심을 해이시켰다.
3. 이승만은 “의정원이 어떤 법률을 어떤 의안으로 통과했든 간에 그것은 임기응변이기에 적당히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 ”고 했는데 이것은 대통령의 체통에 어긋나는 비법적인 논조다.[5]
역사는 공정하고 법률은 무정하다. 명망이 있는 철학박사이며 미국의 한국독립운동 지도자이고 임시정부 제1임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이 공정한 판결을 받아 대통령 직에서 해임되었다.
김구는 이승만의 일을 두고 가슴 아프게 생각하였다. 미국의 한국독립운동 수령 이승만이 이러할진대 한국의 독립운동이 어느 때에 가서야 완전히 자기의 불량한 인소를 제거할 수 있을 것인가.
이승만의 실각은 주요하게 한국의 독립을 자기 힘으로 하려 하지 않고 워싱턴에 의뢰한데 있으며 직무를 이탈하고 임시정부의 결의를 부정하면서 안하무인격으로 행사한데 있다. 광복 후에 비록 대한민국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역사가 증명하다시피 그는 사실 대통령의 자격을 갖춘 사람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에서도 이승만을 위수로 한 임시정부의 일부 사람들이 외세의 힘에 의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태도를 비판하였다.
“독립국가를 창건하고 혁명정부를 건설하려면 전적으로 본국 인민들이 간고분투 하여야 한다. 지금 어떤 조선민당들은 자기가 노력하지 않고 워싱턴에 호소하여 외력의 도움을 받아 독립을 승인 받으려 한다. 군벌들을 증오하는 어떤 사람들은 열강의 힘을 빌려 군벌을 제압하려고 생각한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외세에 의뢰하여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군벌과 열강간의 결탁관계를 모르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어찌 독립자주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겠는가?”[6]
[참고문서]
[1] 나창헌(羅昌憲): 1896년 평안북도 희천 출생. 1922년 김구 등이 설립한『노병회(勞兵會)』참가함. 1925년 이승만 대통령 심판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이승만 탄핵.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경무국장, 내무부 차장 역임. 일본영사관을 폭파시키려다가 실패하고 일제에게 살해됨. 1962년 국민훈장 추서.
[2] 곽헌(郭憲): 1895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22년 임시정부 비서로 취임. 1924년 인성학교 교사로 근무 중 1925년 의정원 의원이 됨. 나창헌, 최석순과 같이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탄핵. 1926년 명성사진관 개업. 독립운동 연락처로 제공. 1927년 교민단 단장, 1932년 「윤봉길사건」으로 일본경찰의 검색을 피해 상해에 피신 중 밀정의 제보로 체포. 1938년 출옥 후 석가장에 가서 계속 독립운동에 투신.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3] 채원개(蔡元凱): 1895년 평안남도 영월 출생. 1915년 조선보병대에서 4년간 복무, 3.1운동 때 체포되었다가 탈옥, 만주로 망명하여 1926년 대한독립군 참의부 군무위원, 1930년 중국군 육군 제59사 작전참모, 1931년 중국군 육군 제2사 참모처장, 1934년 중국중앙군관학교 학원대장, 1937년 중국 제19로군 총사령부 작전참모, 1942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1944년 광복군 제2지대장, 광복 후 제3사단장 1950년 준장,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
[4] 최석순(崔錫淳):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삭주 출생. 1924년 임시정부 휘하 육군주만참의부에 들어가 항일무장투쟁을 벌림. 1925년 집안현 고마령에서 군사회의 도중 초산(楚山) 일본 경찰과 수비대의 기습을 받아 전사.
[5] 『민국일보』1925년 3월 12일.
[6]『민국일보』,『제2차시국에 대한 주장』2책 539쪽.
엉망진창이 된
임시정부
1925년 9월, 신임 국무령 이상용(李相龍)이 길림 반석현(盤石縣) 동호란하(東呼蘭河)에서 상해로 왔다. 그러나 그는 상해로 오면서 자기가 국무령으로 선거된 것을 모르고 있었다. 상해에 온 후에야 비로소 자기가 국무령으로 선출된 것을 알았다.
이승만을 탄핵한 후, 박은식(朴殷植)이 대통령으로 선거되었다. 박은식은 임시의정원에서 통과한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신헌법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실시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박은식이 국무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필경 저명한 역사학자일 뿐 성숙한 정치가는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임시정부 의정원의 결책자들이 모여앉아 형세를 분석하고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승만 사건 후, 미주의 지원이 중단될 것이고 국내의 교통은 일본 놈들에 의해 파괴된 상태라 다만 기대를 걸 곳은 만주뿐이었다. 만주에는 200만의 한인동포들이 살고 있었고 『정의부(正義府)』[1], 『신민부(新民府)』[2],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3] 등 정치조직들도 있었다. 이런 조직들은 무장도 있었고 행정기구도 있었으며 한인들 중에서 기초가 튼튼하였다. 『서로군정서』 독판(督辦)인 이상용은 만주의 독립단체 중에서 위망이 매우 높았다. 만약 이상용이 국무령으로 선출되면 임시정부는 만주로부터 유력한 지지를 얻게 된다. 이리하여 이상용을 국무령으로 선출하고 상해로 불렀던 것이다.
9월 24일, 이상용이 임시정부 대청에서 성대한 취임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취임연설에서 임시정부 내부가 단결하고 국내민중과 만주지구 한인들과의 연계를 긴밀히 할 것을 강조하였으며 유력한 무장투쟁을 진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상룡은 1858년, 경상북도 안동군 법흥동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고성(古城)이고 자는 만초(萬初), 호는 석주(石州)이며 조선왕조 개국공신 이원(李原)의 19대 후예다. 1911년 서간도로 망명한 후 이름을 계원(啓元), 상룡(相龍)으로 개칭했다. 그는 정치제도와 실용지학을 탐구했으며 천문, 지리, 수학 등에 관심이 컸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도곡선재(陶谷先齋)에 은거하여 병학에 몰두했하였다. 1911년에 서간도에 와 한만관계사를 연구, 집필하였다. 1911년 4월에 길림에 망명했고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과 함께 경학사(耕學社)[4]를 꾸리고 사장에 추대되었다. 또한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과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新興武官學校』[5]를 꾸리고 교장을 맡았으며 많은 반일 군사인재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항일독립투쟁에서 산업과 교육 우선주의, 군사 중심주의의 병행을 주장했다. 1919년에 군정부를 조직하고 총재로 추대되었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한 나라에 두개 정부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군정부를 서로군정서로 개칭하고 총재를 맡았으며 이청천(李靑天: 지청천[池靑天]이라고도 함)을 사령관으로 독립군을 꾸렸다. 그는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했다. 1921년, 이상룡의 서로군정서와 대한 독립단 등 8개 단체가 연합하여 『통의부』(統義府)[6]를 설립했다. 그러니 이상룡은 가히 만주지구 한국독립운동의 수령이라고 할 만한 거물급 인물이었다.
1911년, 이상룡은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할 때 강가에서 시 한 수를 지어 자기의 망명의지를 나타낸 바 있다.
칼바람이 비수마냥
고기 점 도려내고
배를 가르더라도
내 참으리라
슬퍼하지 않으리라
놈들이 내 가산 빼앗고
처자를 죽이더라도
이 목이 떨어질 정
결코 굴하지 않으리라
이 시에는 사나이의 굴강한 기개와 일제에 대한 한이 넘치고 있다.
이상용은 취임하자 인차 내각 조직에 착수했다. 그는 만주의 항일무장조직으로 통일된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내각성원들은 대다수 동북의 독립군 지도인물들이었다. 예하면 김동삼(金東三), 윤병용(尹秉庸), 오동진(吳東振), 김좌진(金佐鎭), 조성환(曺成煥), 이유필(李裕弼) 등. 그러나 내각성원들로 초청된 이들은 이상용의 전략의도를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들은 각자 자기단체의 이익만 고려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안정근과 왕삼덕이 이상용의 명령을 받고 그들을 찾아갔을 때 드러났다.
왕삼덕이 이상용의 비밀편지를 가지고 흑룡강성 해림현(海林縣)에 가서 김좌진을 만났다.
“석주(이상용의 호)가 나와 안정근을 만주로 보내 김좌진 장군을 비롯해 몇몇 선생님들을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모셔오라고 분부했습니다.”
김좌진이 이상용의 편지를 다 보고난 뒤에 말했다.
“이상용선생의 편지를 보니 고맙소. 나에 대한 국무령 선생의 믿음에 감사드리오. 헌데 나는 정치를 잘 모르고 단지 군사에만 전념하고 있을 뿐이요. 그리고 현재 신민부도 내가 수요 되니 미안하지만 난 여길 떠날 수 없소.”
왕삼덕이 설명했다.
“석주선생은 지금의 형세에서 만주의 각 항일조직이 마땅히 임시정부의 영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전 민족에게 유력한 투쟁 중심이 있게 되고 광복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김좌진이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였다.
“하지만 난 임시정부에 대해 별로 흥취가 없소. 다만 일본 놈들과 싸우는 게 원이요.”
이로부터 알 수 있는바 당시 임시정부는 김좌진의 안중에 별로 위치가 없었다.
오동진을 찾아간 안정근도 비슷한 사정이었다. 오동진도 안정근을 보고 자기는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될 생각이 없고 전장에서 일본 놈들과 싸우겠다고 태도표시를 했고 김동삼 역시 그러한 의사를 나타냈다.
이상룡이 초청한 국무위원 9명이 모두 사절하고 거기에 임시정부 내의 사상적 대립과 파쟁이 심하여 결국 이상룡은 정치적 경륜을 발휘할 수 없어 계획한 내각이 실패하고 그 자신도 부득불 국무령에서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기의 고뇌와 허탈감과 노여움을 다음과 같은 시구로 표현했다.
고국이 살기 좋거늘
너무 상심하지 말라
세상이 태평하면
다시 돌아가 살리라
상해를 떠나기 전에 그는 이동녕, 김구, 이시영 등과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하면서 이상용이 울분을 털어놓았다.
“예로부터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었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망하는 것과 죽는 것도 하나의 도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명은 어떻게 광복대업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신성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모두 애국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심단결하고 백절불굴의 의지로 투쟁을 견지한다면 광복의 대업을 완성할 수 있습니다. 인심, 즉 백성의 마음만 살아 있으면 나라가 비록 망했다 해도 망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 수령들 지간에 만중일심의 응집력이 결핍합니다. 대업을 이룩하자면 흉금이 넓어야 합니다. 단지 코앞의 작은 이익만 챙기려 하고 큰 이익을 돌보지 않는 소인배의 협착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김구가 이상용의 말이 아주 옳다고 생각했다. 김구가 이상용의 술잔에 술을 부으며 말했다.
“선생의 말이 너무나 지당합니다. 선생은 우리 독립운동이 나아가는 길에 밝은 등불을 켜 주었습니다. 우리는 선생의 고귀한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이상룡은 1926년 2월에 길림으로 돌아가 정의부와 참의부, 신민부의 통합운동을 지도하면서 왜놈들과 영용히 싸우다가 1932년에 길림성 서란현(舒蘭縣) 소성자(小城子)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임시의정원은 또 동북 『정의부(正義府)』의 책임자 양기탁(梁起鐸)을 국무령으로 추천했다. 하지만 양기탁이 단연 거절하였다. 1926년 5월에 안창호가 미국에서 돌아왔다. 임시의정원에서 안창호를 국무령으로 추천했으나 안창호가 결연히 사절하였다.
같은 해 8월, 임시의정원에서는 전에 임시정부 의장을 지낸 적이 있는 홍진(洪震)[7]을 국무령으로 선출하였다. 홍진이 동의하고 내각을 구성하였다. 내각 인원들로는 김응섭(金應燮), 이유필(李裕弼), 조상섭(趙尙燮),조소앙(趙素昻), 최창식(崔昌植) 등이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임시정부의 풍운변화에 대해 안창호가 미국의 한승곤(韓承坤)과 장이욱(張利郁)에게 편지로 알린바 있다.
……나는 5월 27일에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상해형세는 지금 극도로 혼란스러워 서로 공격하고 싸우고 때리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입니다. 인심은 극도로 악화되고 사회는 거의 사분오열 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위신도 형편없이 저락된 상황입니다. 임시의정원에서 나더러 국무령을 하라는 것을 거절해버렸습니다. 나에게는 엉망이 된 정국(政局)을 돌려세울만한 자신도 능력도 없습니다. ……홍진이 국무령이 되고 내각을 조직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잠시나마 정부의 체면이 서게 되었습니다……”
안창호의 편지를 보면 당시 상해임시정부의 어렵고 혼란스러운 상태를 똑똑히 알 수 있다. 같은 해 12월, 홍진은 기우는 대세를 막을 길 없어 부득불 사직하고 말았다. 상해임시정부는 엄중한 무정부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1926년 12월 중순의 어느 날,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이 김구를 찾아와 국무령을 맡으면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김구는 거절했다. 그는 거절 이유를 두 가지로 말했다.
“저는 절대 안 됩니다. 우선 저는 해주 시골의 미천한 백성출신입니다. 비록 우리 정부가 초창기라고 하지만 저와 같은 천한 사람이 어찌 언감생심 일국의 원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다음으로 이상용, 홍진 두 사람이 호응(呼應)을 얻지 못해 내각조직에서 실패했는데 제가 내각을 조직한들 누가 따르겠습니까?”
이에 이동녕이 말했다.
“첫째 이유는 이유가 아니고 두 번째 문제는 해결할 수 있소. 만약 백범이 내각을 조직한다면 꼭 지지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요. 나부터 견결히 지지하겠소.”
김구는 오랫동안 고려하다가 결국 걱정을 털어버리고 국무령을 맡았다. 김구는 윤기섭(尹琦燮), 오영선(吳永善), 김갑(金甲), 김철(金澈), 이규홍(李圭洪)을 국무위원으로 하는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때로부터 김구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동녕, 안창호, 조소앙, 엄항섭, 박찬익, 안공근, 김의한 등 임시정부 성원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으며 김구는 광복의 그날까지 장장 20여 년간 임시정부를 영도하면서 광복독립운동에 마멸할 수 없는 역사적 공헌을 하였으며 개국영수로 청사에 길이 남았다.
[주]
[1] 정의부: 1924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독립운동 단체. 1920년 청산리 전투 후 일본군의 만주에서의 학살과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운동이 한 때 분산, 침체되면서 통합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1924년 만주의 일곱 개 독립단체 대표들이 길림성 유하현(柳河縣)에서 통합회의를 개최하고 같은 해 11월에 독립운동연합단체인 정의부가 탄생하였다. 1928년에 해체됨.
[2] 『신민부』: 북만지구의 독립운동단체들이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통합이 추진되는 과정에서 1925년 길림성 목릉현(穆陵縣)에서 성립된 독립운동단체, 1929년에 해체됨.
[3] 『서로군정서』: 1919년 5월에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독립단체, 처음엔 명칭을 군정부(軍政府)라고 달았다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관할하의 서간도군사기관인 서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4] 『경학사』: 1911년에 이시영, 이회여, 이상룡, 이동녕 등이 민족의 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 농업을 장려하고 자제들의 민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요녕성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세운 민단적인 독립운동단체.
[5] 『신흥무관학교』: 1919년 5월 3일, 중국 길림성 유하현에 세운 독립군 양성기관, 일제의 거듭되는 탄압으로1920년에 폐교됨. 수많은 독립군 인재들을 양성하여 항일에 크게 기여하였음.
[6] 『통의부』: 1922년 만주 봉천성 환인현(桓仁縣) 남구(南區) 마권자(馬圈子)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대한통의부』라고도 함.
[7] 홍진: 1877년 충천북도 영동 출생. 본명 홍면희. 독립운동가. 임시정부 법무총장. 내무총장. 의정원 의장. 국무령 역임. 김구와 한국독립당 창설.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한국광복진선이 결성되자 운영간부에 선임. 광복후 비상국민회 의장에 선출. 1946년 사망.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견정한
독립투사
1921년, 군국주의자 다나카 이키치(田中義一) 대장(大將)이 내각총리로 되어 일본은 군국주의시대에 들어섰다. 이때 장개석은『청당명령(凊黨命令)』을 내려 대규모적으로 공산당을 탄압하였다.
1921 년 4월 18일, 남경정부가 성립되고 장개석이 주석이 되었다. 2 월 말, 상해 노동자 30만 명이 제 2차 무장기의를 일으켰다. 북양군벌이 군대를 풀어 수많은 노동자들을 살해하여 상해가 삽시에 피 바다가 되었다.
1926년에 김구는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지 7년이 지났지만 앞길은 여전히 막막하기만 하였다. 이런 기후에서 임시정부는 오직 자아생존, 자아발전의 길 외에 다른 길이 더 없었다.
김구는 호언장담을 하지 않았고 연단에 올라 거창한 연설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신중하고 착실한 태도로 한국임시정부의 출로를 모색하였다.
김구는 임시정부 7년간의 경험과 교훈에 근거하여 목전에는 우선 정치개혁으로부터 손을 대야 한다고 인정하였다. 그는 김갑(金甲)[1], 이규홍(李圭洪)[2], 황의춘(黃義春) 등 세 사람으로 헌법기초위원회(憲法起草委員會)를 성립하고 2월 25일, 의정원 회의를 소집하고 기초위원회에서 수개한 헌법을 통과하였다.
신헌법의 첫 번째 특점은 국무위원회의 집체영도를 규정한 것이었다. 국무주석은 회의기간에 주석의 권한을 행사하며 국무위원들이 돌아가며 (輪流) 주석을 맡는다고 규정하였다.
신헌법의 두 번째 특점은 임시의정원의 권력을 가강한 것이었다. 신헌법은 의정원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최고 권력기구라는 것을 명백히 규정함으로써 총통이나 국무령의 독재현상을 피면하게 하였다.
신헌법은 1927년 5월 5일부터 효력을 발생하여 1940년까지 지속되었다.
김구가 두 번째로 해결하려고 한 것이 경제문제였다.
어느 한 번 김구는 국무위원회에서 전문 경제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임시정부가 초창기에 건립한 교통국과 안동교통지부 및 국내의 교통지국은 이미 모두 파괴되었고 국내에 건립한 연통제(聯通制)도 전부 파괴된 상태였다. 다만 동북삼성에 이상용과 양기탁의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가 있을 뿐이었는데 그나마 그들과 임시정부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일본에 있는 한인교포들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원래 임시정부의 자금은 대부분 미국 한인교포들의 모금으로 해결했는데 이승만을 탄핵한 후부터 그 길이 끊어져 버렸다. 김구는 엄준한 형세를 상세히 분석하고 여러 사람들이 자주정신을 수립하여 난관을 타개하자고 요구하였다.
김구는 자신부터 이신작칙(以身作則)하여 프랑스조계의 조랑노(鳥浪路) 보경리(普慶里) 4호에 있던 임시정부 사무실을 보경리 24호에 있는 임득산(林得山)의 집으로 옮겨왔다. 이로써 집세가 30원 절약되었다. 임시정부에서 고용하던 일꾼도 절반으로 줄였다. 그래도 집값을 제때에 물지 못할 때가 많았다.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가 고 김학철선생이 자전소설 『격정시대』에서 “서울을 떠나오는데 강여사가 나한테 노비로 쓰라며 돈 20원을 주었다. ……상해에 왔을 때 김구가 나에게 심부름을 시켰는데 수고 했다며 준 돈이 고작 단돈 1원이더라. 속이 좁은 사람이다.”라는 뜻의 말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만일 그때의 한국임시정부의 경제난을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결코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는 중국인 외에 눈이 새파랗고 코가 높은 영국인, 미국인, 프랑스인들이 자주 들락거렸지만 지금은 프랑스 조계지 순포(巡捕)가 일본경찰을 데리고 사람을 체포하러 온다든가 혹은 집세 받으러 오는 사람 외에 임시정부 사무실을 노크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한창 때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가가 이제는 수십 명도 못 되는 형편이었다. 왜 이렇게 독립운동가가 줄었는가. 첫째는 임시정부의 군무차장 김희선, 독립신문 사장 이광수,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 같은 무리들이 왜놈에게 항복하여 조국으로 돌아가고 둘째는 국내 각 도, 군, 면에 조직했던 연통제가 발각되어 많은 동지들이 왜놈에게 잡혔고 셋째는 생활난으로 각각 흩어져 밥벌이를 하게 된 때문이었다. 실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었다.[3]
하지만 김구를 비롯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오직 나라의 독립을 위해 넘어지지 않고 그 험악한 현실을 뚫고나갔다. 김구는 늘 중국인들이 입는 긴 다브산즈를 입고 손을 팔소매에 찌른 채 보경리의 좁은 거리를 부지런히 오고 갔다. 그의 기괴한 모양이 늘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사람이 그 간고하던 세월에 말없이 묵묵히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창조하였던 것이었다.
이동녕선생이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회억하고 있다.
김구가 국무위원이 된 후 독립지사들을 이끌고 피와 눈물로 3천리 장성을 쌓았다. 그들은 광복을 위하여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무수한 고난을 이겨냈다. 그 암흑하고 고통스럽던 세월에 우리는 월급이 무언지 모르고 살았다. 먹는 것, 입는 것, 심지어 병 보는 돈도 상해 우리 동포들이 마련해 주었다. 만약 내가 광복의 그날까지 산다면, 그리하여 사랑하는 조국에 돌아간다면 나는 꼭 그들에게 보답할 것이다. 그들을 위해 꼭 기념비를 세워줄 것이다……
김구는 말 그대로 기재(奇才)였다. 그의 견인불발의 투쟁정신이 나를 탄복시켰다.
어느 날, 나와 백범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50대의 한 여인이 청년 몇을 데리고 백범을 찾아왔다. 백범이 그들에게 찾아온 연유를 물으니 여인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은 어찌하여 이렇게 고생하십니까? 당신도 이젠 오십을 넘었고 칠십이 넘은 당신의 노모가 당신의 두 아들을 키우고 있지 않습니까? 하필이면 왜 이런 고생을 하십니까?”
김구가 한참 후 온화한 어조로 천천히 말했다.
“사람은 응당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 합니다. 저는 자식으로서 효도를 다 못하니 실로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치고 있습니까? 백범이 걸인이 되고 불효가 되는 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라가 독립 된다면 전 한평생 걸인이 된다 해도 한이 없습니다.”
그 여인과 청년들은 백범의 말을 듣고 모두 감동되었다.[4]
김구는 낙관주의자였고 의지가 아주 강한 사람이었다. 그 어떤 곤란과 고생 앞에서도 신심을 잃지 않고 이를 악물고 견뎌냈다. 그 시기 생활이 어려운 것도 참기 어려웠지만 가장 비참한 것은 독립운동가들의 동요였다. 독립운동가들 중 어떤 사람은 도망가고 어떤 사람은 반변하였다. 1928년까지 그러한 사람들이 10여 명에 달하였다.
한 때 한국임시정부의 창시인의 한 사람이고 반일투사이고 저명한 작가이던 이광수도 반변하였다. 그는 상해를 떠날 임박에 김구를 찾아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김구는 이광수가 반변한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구선생, 당신 생각에 우리가 언제쯤 독립할 수 있을 것 같은가요?”
“난 예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거니와 박은식선생이 임종에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독립하자면 한 20년 걸릴 거라고 했소. 그 해가 1925년이었지. 그러나 누가 똑똑히 알겠소. 다만 세월이 검증할 것이요.”
“제가 만주에 갔었는데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대가 우리 동포들을 닥치는 대로 미친 듯이 학살했습니다. 총으로 쏘아 죽이고 날창으로 찔러 죽이고 불태워 죽이고…… 너무나 잔혹하고 처참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왜 이렇게 강대할까요?”
김구가 반문했다.
“당신 생각엔?……”
“우리 민족이 더 이상 피를 흘리지 말고 일본과 타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를 죽이면 놈들이 우리를 천명 죽일 것입니다. 동포가 다 죽는데 독립한들 무슨 의의가 있겠습니까?”
김구가 엄숙하게 말하였다.
“독립하자면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없소.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면 영원히 독립할 수 없소.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왜놈들과 싸우는 것뿐이요. 승리하는 그 날까지 말이요. 역사를 보면 아무리 강한 제왕이라 해도 단합된 민중 앞에서 무너지지 않은 자가 없었소. 폭군 주왕도 그랬고 진시황도 그랬소. 제일 강하고 무서운 것이 단합된 민중의 힘이요.”
이광수는 결국 투항하고 말았다. 그가 반변한지 오래지 않아 군무차장 김의선(金義善)과 의정원 부의장 정인과(鄭仁果) 등이 연이어 투항하였다. 그러나 그 준엄한 시기에 김구를 비롯한 견정한 독립운동가들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들은 혁명 자체가 고통과 좌절을 동반하지만 정의의 혁명은 꼭 승리한다는 것을 깊이 믿었다.
[참고문서]
[1] 김갑(金甲): 1888년 부산 동래 출생. 독립운동가. 군무위원회 이사, 교통부위원, 국무원 차장 등에 선임. 1986년 건국훈장, 국민장 추서.
[2] 이규홍(李圭弘): 독립운동가. 1893년 전라도 익산 출생. 고산(高山), 진안(鎭安) 등 지에서 의병활동. 상해, 만주로 건너가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경찰에게서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 대통령 표창, 건국포장이 추서.
[3] 『백범일지』, 246쪽.
[4] 이동녕, 『나의 회상기』, 68쪽.
나석주의
장거
1925년, 그 해의 8월 29일은 범상치 않은 날이었다. 이 날은 김구의 생일이었다. 그러나 김구는 자기의 생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8월 29일 아침, 임시정부의 의원인 나석주(羅錫疇)가 고기며 과일 따위를 사가지고 김구의 집을 찾아왔다. 아침밥을 짓고 있던 김구의 모친이 놀라서 물었다.
“자네 이른 아침부터 웬 일인가?”
“예, 어머님, 오늘이 백범선생님의 생일입니다. 그래서 전당포에 옷가지들을 전당잡히고 약소하나마 뭘 좀 사왔지요.”
“오, 잘했네. 정말 고맙네.”
김구의 모친은 아주 기뻐했다. 학생이 선생의 생신을 축하하는 것은 선생으로서는 행복이었기 때문이다.
방안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김구가 밖에서 나는 말소리를 들었다.
나석주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선생님, 원래는……”
나석주가 생신을 축하하러 왔지만 김구의 얼굴에 반기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나석주였으니 망정이지 만약 나석주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었다면 화를 냈을 것이다. 나석주는 김구가 사랑하는 학생이었다. 뿐만 아니라 두 사람은 사생관계를 초월한 친밀한 동지관계였다.
1910년, 김구가 안악 양산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19세인 나석주가 이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후에 김구한테서 애국정신의 영향을 받고 견정한 애국신념을 수립하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되었다. 1920년에 출옥 후 상해에 와 임시의정원에서 일했다.
“기미년 이후부터 난 생일을 쇠지 않기로 했다.”
김구가 나석주를 보고 조용히 말했다.
1919년 2월 26일은 김구 모친의 60탄신이었다. 김구 부부는 모친의 환갑을 잘 차리자고 상론하였다. 모친은 실로 범상치 않은 분이었다. 그 어려운 세월에 아들 김구를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원망 한 마디 내비치지 않았다. 효자였던 김구는 생일상을 잘 차리고 벗들을 청하려 하였다. 그런데 모친이 반대했다.
“이렇게 어려운 세월에 환갑이 가당하냐? 후에 생활이 나아지면 그때 쇠기로 하자꾸나.”
김구는 모친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환갑상을 차릴 기회가 다시 오지 않았다. 상해에 온 후 모친의 환갑을 쇠 드릴 생각은 했지만 마음뿐이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생일에 대해선 아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김구의 말을 듣고 나석주는 매우 감동되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나석주는 아주 정중하게 김구를 보고 의열단(義烈團)에 참가하겠다고 말했다.
의열단은 김약산이 영도하는 비밀결사단체로서 전문 일본의 군정계 요인들을 암살하는 조직이었다. 이 조직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 일제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과 드높은 애국심, 그리고 강렬한 희생정신을 소유한 열혈사나이들이었다. 나석주는 자기도 그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것은 그의 파란만장한 경력과 관련이 있었다.
나석주는 1882년에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1911년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1]가 나석주의 고향 재령평원의 440 여 헥타르의 농토를 강점하여 당지 농민들 대부분이 일본 놈의 노예로 되었다. 그때 나석주의 나이가 20살이었다.
2년 후 나석주는 일본침략자에 대한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중국 북간도에 망명하여 이동휘(李東輝)가 꾸리는 무관양성소에서 공부했고 8개월 후 오패부(吳佩孚)가 꾸리는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며 졸업 후에는 군벌전쟁에 참가하였다. 1922년에는 김구가 그를 하남성 무관학교에 보내 공부시켰다. 다년간 군관학교에서 배양 받은 나석주는 사유도 기질도 완전히 군인식이였다. 심지어 앉는 자세도 군인식이였다.
나석주는 임시정부 내부의 파벌투쟁에 대해 극도로 염오하고 실망하였다. 그는 임시정부보다 의열단의 개인영웅주의를 더 선호하였다. 그는 전에 김창숙(金昌淑)[2]과 의열단 고문인 유자명[3]선생을 보고 의열단에 참가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김창숙과 유자명은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는 김구의 생일날에 또 의열단에 보내달라고 청들었다.
“국가의 흥망이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학생도 의열단에 참가하여 끓는 피로 적들을 죽이고 나라를 찾고 싶습니다.”
“양병천일(養兵千日)이 용병일시(用兵一時)라고 했다. 훌륭한 사나이라면 그렇게 하여야 하느니라. 보아하니 우리 대한의 전도가 창창할 것 같구나. 의열단에 가거라.”
김구는 나석주를 보고 천진에 가 유자명(柳子明)이나 김원봉(金元鳳: 김약산) 혹은 신채호(申采浩)나 김창숙(金昌淑) 등을 찾아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나석주가 상해를 떠났다.
그 무렵, 국내에 모금하러 갔던 김창숙이 상해로 와서 김구와 이시영을 찾았다. 그는 국내에서 모금하면서 “출국하는 대로 당장 이 돈을 의열단 결사대의 손에 직접 넘겨주어 왜정 각 기관을 파괴하겠다.” 고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합당한 결사대 대원을 찾았던 것이다. 김창숙도 모금한 돈을 전부 내놓았다.
김창숙의 말을 듣고 김구가 이렇게 말했다.
“나와 친한 결사대원으로 나석주와 이승춘(李承春:이화익이라고도 함)이 천진에 머물고 있고 의열단원도 많이 거주하고 있으니 당신은 유자명과 상의하여 먼저 무기를 구해가지고 천진으로 가 기회를 보아 실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김구는 김창숙이 갖고 온 돈을 나석주와 기타 사람들의 활동경비로 쓰라고 하면서 되돌려주었다.[4]
김구의 생일이 지난 뒤 나석주는 북평에 가 신채호, 유자명, 김창숙 등을 만났고 정식으로 의열단 단원이 되었다. 김구와 헤어진 김창숙은 곧바로 북평에 있는 유자명을 찾아갔다. 유자명은 감창숙에게 나석주를 소개할 생각으로 폭탄 한 개와 권총 한 자루를 구해가지고 천진으로 갔다. 나석주가 돈 1500위안과 무기를 받아 안고 말했다.
“이 몸은 나라를 위해 이미 죽기로 결심한지 오래되었습니다.”
김창숙은 나석주의 손을 꼭 잡고 부탁했다.
“의사의 용기는 후일 우리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힘써 주십시오.”
단재 신채호선생도 유사시에 사용하려고 준비하여둔 폭탄 두 개를 보내왔고 서울에 가면 아내의 도움이 필요할 줄 알고 아내한테 보내는 편지를 써주었다.[5]
1926년 12월 27일, 나석주는 중국인 노동자로 변장하고 위해에서 출발하여 안전하게 인천에 이르렀다.
1926년 28일 오후 2시, 나석주는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殖産銀行)에 작탄을 던진 후 추격하는 일경과 격전을 벌려 일경 7명을 격사하고 마지막 작탄으로 자기의 젊은 생명을 결속지었다. 이 사건은 한국 국내를 진동시켰다. 나석주의 장렬한 최후를 신문에서 알게 된 유자명은 나석주 의사를 기념하는 문장을 써서 의열단선전물에 발표하였고 김창숙선생은 자기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장하고도 열렬하도다. 단신에 총 한 자루를 가지고 많은 적을 쏘아 죽이고 자신도 태연히 죽음으로 돌아간 것이다. 3.1운동 이래 결사대로 순국한 이가 퍽 많았지만 나군처럼 장한 사람은 일찍 없었다.”[6]
김구는 나석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비통을 금할 수 없어 며칠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였다. 그는 눈물을 삼키면서 영령을 추모하였다. 그는 앞으로 적들과 특수한 방식으로 싸울 때 각별히 안전에 유의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참고문서]
[1] 동양척식화사: 일제 강점 시 그들의 특권에 의해 기초한 독점적 특수회사. 1908년 일본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이를 한국 정부에 강요하여 천만 위안 자금으로 척식사업을 시작하였다. 명목은 싼 이자로 자금을 제공하여 식량증산을 지원한다고 하였지만 사실은 농업수탈을 목적으로 한 침략성질의 특수회사다.
[2] 김창숙(金昌淑): 1879년에 경북 성주 출생. 호 심산(沈山). 1919년에 중국으로 망명, 임시정부의정원 의원이 됨. 1922년에 신채호와 함께 독립운동지『 천고(天鼓)』 발간. 1925년 임시정부 의정원 부의장에 선임. 1927년 일경에게 체포. 14년 형을 받고 대전감옥에서 복역 중 광복을 맞음. 성균관대학을 창설하고 초대학장에 취임. 이승만 정권을 반대하다가 테러를 당하기도 함. 1962년에 병사. 1962년에 대한민국 건국공로 중장이 수여됨.
[3] 유자명(柳子明): 유흥식이라고도 함. 1894년에 충남 충주에서 출생. 독립운동가이며 농업학자. 의열단 단장 김약산의 비밀참모로 국내외의 고위급 일본인과 친일파 제거에 앞장 섬. 광복 후 한국에 한 번 왔다간 후 중국 호남성 장사 농업대학에서 교수로 근무. 운남 고원지대에서 최초로 벼 재배에 성공하여 농업박사 칭호를 받음. 중국원예학회 명예 이사장.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4] 이승춘(李承春): (1900-1978)독립운동가. 황해도 장연 출신. 1920년 만주로 망명하여 의열단에 가입.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파사건에 참여. 나석주가 순국한 후 체포되어 14년간 옥살이 함. 건국훈장 받음.
[5] 『아나키트 이희영과 젊은 그들』.
[6] 유연산『유자명평전』179-180쪽.
[7] 유연산『유자명평전』179-180쪽.
김구가 안창호를
구출하다
1927년 3월 중순에 김구는 선후하여 두 통의 전보를 받았다. 한 통은 동북삼성 임시정부 특파원이 보낸 것이고 한 통은 북경의 『노병회(勞兵會)』 성원 백운서(白雲瑞)가 보내온 것이었다. 전보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위급. 안창호와 국민부, 참의부의 40명이 길림당국의 검거로 지금 길림감옥에 갇혀 있음. 일본관동군이 범인들을 넘겨 받으려고 장작림(張作霖)과 교섭 중.”
일본 놈들이 길림에서 대량의 투사들을 검거, 투옥한 것은 나석주 사건과 연관된다. 나석주 의사의 장한 소식을 접하자 중국의 여러 한인단체들에서 나의사의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길림에서 가진 추도대회에서는 안창호선생이 참가하여 강연까지 하였다. 이에 일제는 추도장을 습격하여 안창호, 현묵관, 김대리, 이관린 등 독림운동가들과 대회 참가자 300여 명을 체포하는 활극을 연출했던 것이다.[1]
김구가 전보문을 보고 혼자서 중얼거렸다.
“장작림이 진짜 토비로구나.”
허나 김구도 이번의 대검거가 완전히 장작림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검거의 장본인은 일본 놈들이었다. 일제는 만주를 삼키기 위해 동북의 한국 독립무장과 그 조직들을 소멸하려고 백방으로 날쳤다.
1925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국장 삼시관송(三矢官松)이 장학량을 부추기고 동북 삼성을 보호하며 한국인 불량자들을 숙청하라는 일본육군성의 명령을 받고 봉천에 와서 봉천경무국장 우천진(于天珍)과 장작림을 구슬렸다. 그는 장작림에게 많은 무기와 군사설비를 지원했으며 결국 일본의 뜻대로 우천진(于天珍)을 핍박하여 “한국인의 비법 활동을 금지할 데 관한 쌍방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을 역사에서 『삼시협정(三矢協定)』이라고도 한다.
협정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중일 양국 경찰은 협동작전하여 봉천동부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제지시킨다.
2. 중국당국은 체포한 한국독립운동자들을 조선총독부에 이양(移讓)한다.
김구는 『노병회』가 출마하여 투옥된 사람들을 구출하려고 생각하였다. 김구는 즉시로 조상섭, 이유필, 여운형 등과 더불어 구출방안을 상의하였다. 최후에 이유필을 천진에 파견하여 관계망을 통해 직접 장작림과 교섭하게 하였으며 다음으로 중국 벗들을 찾아 북경과 천진의 신문계에서 크게 여론을 조성하여 동북삼성을 침략하려는 일본의 야심과 장작림이 일본과 결탁한 진상을 폭로하게 하였다. 김구는 또 동북의 이상용과 김좌진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도 구출행동에 나서 달라고 요청하였다.
김구가『노병회』를 출마시킨 데는 충분한 근거와 이유가 있다. 『한국노병회』는 1922년에 국민대표회의에서 발기하여 세운 조직이다. 독립전쟁을 하기 위한 준비로서 10년 내에 10만 명 이상의 정규군을 배양하는 것이 목표였다.
7월 11일, 노병회의 구축활동이 성공하였다. 1928년 4월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하였다.
김구가 친히 부두에 나가 안창호를 영접하였다. 안창호는 김구의 손을 힘 있게 잡았다.
“감사하오. 백범선생, 당신께서 구원해 주셔서……”
안창호의 눈시울이 젖었다.
“당신께서는 중국의 벗들과 장작림에게 감사드리시오.”
김구가 유머적으로 말했다.
그들 두 사람은 부두를 따라 황포강까지 가면서 이야기했다. 공원입구에서 그들은 『쿠리(苦力:막일꾼)외의 중국인은 들어오지 못함』이라는 패쪽을 보았다. 두 사람이 그것을 보고 부지중 격분을 느꼈다.
김구가 패쪽을 보며 말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중국의 불행이 곧 우리의 불행입니다. 두 나라 민중이 똑같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중국의 민중들과 단결하여 일본 놈들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만 희망이 있습니다.”
안창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습니다. 한중 두 나라 민중이 환난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환난지교의 시기에 이르진 않았지요.”
김구가 독립운동의 형세를 아래와 같이 분석하였다.
“장작림과 일본이 『삼시협정(三矢協定)』 을 체결한 후부터 동북의 당국이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마구 체포하고 있습니다. 중국인들은 30, 40위안의 상금을 위해 한국인들의 머리를 베어 일본 영사관에 바치고 있습니다. 더 한심한 것은 한인동포들도 자기의 독립 운동가들을 팔아먹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서로 합작할 대신 지반을 차지하기 위해 옥신각신 싸우고 있습니다. 실로 가슴 아픕니다.”
김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제 생간엔 우린 먼저 파벌관념을 없애고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영도하는 권위 있는 정당을 건립하여야 합니다. 민족주의 정당 같은 걸 말입니다. 명칭을 독립당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방법을 대서라도 자금을 마련하여야 합니다. 자금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곤란이 있을 줄 번연히 알면서 전진하려고 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지금 길은 확실히 험난합니다. 우린 우선 내부 충돌의 비극을 청산하여야 합니다. 독립혁명의 대업을 위해 백범선생의 말처럼 모두가 단합하여 하나의 목표를 위한 정당을 건립하는 것이 아주 필요합니다.”
두 사람의 견해가 비슷하였다. 안창호의 말은 김구에게 더욱 큰 신심을 안겨주었다.
“사실 여러 사람들의 목표는 일치한데 관건은 큰 것을 중히 여기고 작은 것은 서로 양보하면서 너그럽게 대방을 수용하는 자세에 있습니다.”
안창호는 원견이 있는 탁월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김구의 말을 들으면서 저도 모르게 탄복하는 눈길로 김구를 쳐다보았다. 그는 아주 감동된 어조로 말했다.
“난 오늘 마음을 푹 놓았습니다. 임시정부에 백범과 같은 주인이 있으니 우리 독립운동은 희망이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백범선생이 칼산에 오르면 나도 칼산에 오르고 백범선생이 불바다에 뛰어들면 나도 불바다에 뛰어 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산선생이 이렇듯 믿어주시니…… 자금 문제는 아마도 해외동포들에게 의거해야 될 것 같습니다. 특히 미국과 쿠바동포들에게 말입니다.”
“그 곳의 대부분 동포들이 조국의 독립을 애타게 바라고 있습니다. 임시정부를 신임하지 않는 사람은 필경 소수에 불과합니다.”
김구는 안창호의 말을 듣고 몹시 기뻐하였다.
얼마 후, 김구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윤기섭, 김두봉, 차리석, 송병조 등과 함께 독립당 건립에 착수하고 1928년 3월 25일, 상해 프랑스조계지 보경리 4호의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독립당 성립회의를 열었다. 김구, 조소앙, 윤기섭, 이동녕, 이시영 등 26명이 참석하였다. 대회에서는 삼균주의 (三均主義), 즉 정치균등, 경제균등, 교육균등을 정치 강령으로 제정하였다. 삼균주의는 조소앙이 기초하고 대회에서 통과한 것이다.
구체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다.
1. 정치균등: 민주공화국을 건립하며 보편선거제도를 실시한다. 사람마다 인신, 경제, 정신활동의 자유를 가지며 법률에서 사람마다 평등하다.
2. 경제균등: 우선 토지 국유제를 실행하며 토지를 인민들에게 주어 경작하게 한다. 다음으로 빈궁한 농민들에게 우선권을 준다. 대기업을 국유화하며 선진적인 공업국가와 경쟁을 한다. 빈부의 현저한 격차를 피면한다. 사인 자본을 절제하며 국가와 전 민족의 자본을 발전시키는 원칙에서 노자의 균등을 실시하며 너무 빈곤하거나 너무 부유한 현상이 생기지 않게 한다. 사인 소생산기업을 보호하며 사인자본의 확대를 제한한다.
3. 교육균등: 공비와 의무교육을 실행하며 초등교육을 보급하고 전민의 교육수준을 제고한다.[2]
그러나 2년이 지난 3월 1일, 즉 3.1 대혁명 10주년 기념일에야 비로소 독립당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김구가 당의 상무집행위원으로 당선되었다.
그간 김구는 독립당 건립을 위해 착실하게 준비를 하는 한편 친히 미국의 한인교포들에게 편지를 썼다. 영어를 모르기에 김구가 한글로 쓰면 엄항섭과 안공근이 영어로 번역하였다. 비록 어떤 편지는 종무소식이었지만 대부분 회답이 왔다. 시카고의 김경(金慶)선생은 신문을 보고 임시정부가 집세를 물지 못해 문을 닫았다는 소식을 알고 200 달러를 부쳐왔다. 영국, 멕시코의 한인 교포들이 임시정부 내각 성원들이 1년 사이에 여러 번 바뀌고 헌법조문이 자주 바뀌는 것을 보고 임시정부를 신임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김구의 편지를 보고 그들은 모든 근심과 의심을 털어버리고 모금을 보내왔고 또 격정에 넘치는 찬양의 편지도 부쳐왔다.
1930년에 임시정부의 가장 큰 곤란이던 자금문제가 기본상 해결되었다. 임시주석을 맡아 4년이 지난 뒤에야 김구는 비로소 엉망이던 임시정부를 춰세울 수 있었고 이때로부터 김구는 더욱 큰 신심을 가지고 새로운 전투를 전개하였다.
[참고문서]
[1] 유연산『유자명평전』183쪽.
[2] 석원화(石源華):『한국독립운동과 중국』159쪽.
제6부 도쿄를
뒤흔든 사나이
일 년 사이에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아주 침침하였다. 임시정부는 군사 활동을 전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암살의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다. 당시 일본 놈들은 만주에서 『만보산(萬寶山)사건』[1]을 조작하여 한중 두 나라 민중 사이에 갈등을 조장하였다. 이어《9.18사변》[2]을 조작하였다. ……이러한 형세에서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건립하고 암살과 파괴를 단행했다.
한국애국단 결성
1928년을 전후하여 중국혁명은 변화무쌍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1928년 가을, 장개석은 국민당 제2기 4중 전회를 개최하고 중앙위원회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를 개조하였다. 장개석은 국민당 중앙 상무위원회 주석, 국민정부와 군사위원회 주석, 국민당 중앙 정치회의 주석으로 선출되어 모든 대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같은 해 12월 29일, 봉천군무독반(奉天軍務督辦)이며 동북 삼성 보안사령인 장학량(張學良)이 배일세력의 위협과 봉계(奉系) 내부의 소란으로 말미암아 장개석의 국민정부에 귀의하였다.
중국을 독점하는 것이 일제의 근본적인 국책이였다. 중국의 새로운 형세에 견주어 일본 내각수상 다나카 이키치(田中義一)가 『동방회의』를 소집하고 「대화정책(對華政策)」을 제정하고 중국 본토와 만주를 일본에 통합시키는 방어계통을 확립하였다. 먼저 만몽(滿蒙)을 중국 본토에서 잘라내는 방침을 제정하였다.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말이 있다. 김구는 중일 두 나라의 형세를 면밀히 주시하였다. 그는 중일전쟁이 곧 터질 것이고 그것이 한국임시정부에 새로운 영향을 끼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김구와 이동녕, 안창호가 함께 대책을 강구했다. 김구는 장개석이 중국을 통일하면 한국에 유리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중국을 독점하려는 일제의 야심이 날이 갈수록 노골화 되었다.
다나카 이키치는 일찍 이렇게 말한바 있다.
“지나를 정복하려면 먼저 만몽을 점령해야 하고 세계를 정복하려면 먼저 지나를 정복하여야 한다.”[3]
중국을 침략하고 세계를 재패하려는 것이 일본의 야망이었다. 이러한 방침을 실현하기 위해 일본 국내에선 군사 총동원령을 반포하였다. 중일전쟁이 바야흐로 폭발하려는 시점에서 한국독립운동의 임무는 변하지 않았지만 책략은 변화를 요구하였다.
안창호가 김구의 분석을 듣고 말했다.
“오늘의 동방은 여전히 불안정 요소가 많고 변화무쌍하며 사처에 위기가 잠복해 있습니다. 일본이 지금 대륙과 지나 각 국을 위협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우리 재력과 인력으로는 큰 싸움을 할 수 없습니다.”
이동녕이 아주 구체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 “지금 만주의 독립군은 김좌진(金佐鎭), 신팔균(申八均), 백광운(白光雲) 등 수십 명의 명장을 잃고 다만 북만의 이청천(李靑天), 고이지(高而志), 양세봉(梁世奉)의 부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우리들은 우선 그들과 합작하고 다음에 장개석과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것이 상책입니다.”
김구는 두 사람의 견해를 참답게 들은 후 입을 열었다.
“석오 형의 말씀에 일리가 있지만 지금 당장 그들과 연계하기 어렵습니다. 제 생각엔 돌격대 형식의 정예한 대오를 조직하고 김약산의 방식대로 왜놈들의 군정요인을 습격하여 정신상, 심리상에서 타격을 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렇게 하면 침울하던 독립운동의 분위기도 개변될 수 있고, 독립신심을 높여줄 수도 있습니다.”
세 사람이 반나절 동안 토의하였다.
며칠 후의 어느 날 밤, 김구는 임시정부의 2층에서 내각 확대회의를 열고 세 사람의 견해를 검토하였다. 회의는 극히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이동녕, 조완구, 원세훈, 박찬익, 엄항섭, 안공근 등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회의에서는 『한국애국단』을 조직하고 김구가 영도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 애국단은 사실상 김구가 영도하는 결사대였다. 결사대의 조직구성은 다음과 같다.
대장- 김구
참모- 안공근
비서-주(周) xx
중대장 겸 조사부장- 양동호
제 1소대장- 옥정호(玉鐘浩)
제2소대장 -이국장(李國章)
학생부-노태영(盧泰榮)
대원-안공근, 엄항섭, 김동녕, 안정근, 손창도, 백정기, 김의한, 김현구, 김홍대, 손두환, 이덕주, 양상근, 이수봉, 최흥식 등 80 여 명.
무릇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다 애국단에 참가할 수 있었다. 김구가 단원 선발을 책임졌다.
애국단은 기율이 아주 엄하여 단원들끼리 서로 물을 수 없었고 단체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
[참고문서]
[1] 『만보산사건』: 1931년 7월 2일, 중국 길림성 장춘현 부근 만보산(萬寶山)지역에서 일제가 술책한 한인농민들과 중국인 농민들 사이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유혈사건.
[2] 『9.18사변』: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 1931년 9월 18일 심양 부근의 유조구(柳條溝)에서 철도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이라고 트집 삼아 중국군에게 포격을 가한 사건. 일명 만주사변이라고도 함.
[3] 『중국제2역사당안관』7권, 324쪽.
밤중에 뛰어든 사나이
1930년 12월의 어느 날 밤, 임시정부 2층에서 이동녕, 원세훈, 조소앙, 박찬익, 안공근, 김구 등이 비밀회의를 열고 한국 애국단을 결성하였으며 김구가 애국단을 영도하기로 결정하였다. 회의가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사나이가 뛰어들었다.
밤중에 뛰어든 사내의 형색이 의문스러워 여럿이 그를 밀어내려 했으나 사내는 끝까지 버티면서 나가려 하지 않았다. 그는 꼭 김구를 만나보겠다고 우겼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의 의혹이 더 커졌다. 몇몇 젊은 축들은 사내가 일본간첩이 아닐까고 의심했다. 김구는 그 사람이 하도 괴상하여 만나보기로 하였다.
김구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김구를 찾아 뭐하려고 하오?”
“저는 노동자이며 이름은 이봉창(李奉昌)이라고 합니다. 일본 구주에서 일했습니다. 저는 줄곧 독립운동을 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상해에 가정부(假政府:일본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기에 [假政府]라고 불렀고 봉창은 일본인들과 생활하다보니 습관 되어 임시정부를 가정부라고 부른 것이다)가 있다는 말을 듣고 상해로 왔습니다. 전차 승무원이 나보고 보경리(普慶里) 4호로 가라고 일러주어 예까지 왔습니다.”
“독립운동은 출신을 따지지 않소. 무릇 우리 한인이면 누구나 독립운동에 참가할 수 있소. 일어가 유창한 걸 보면 해외에서 오래 사신 모양이구만.”
“예, 13세에 형님 이용태(李龍泰)를 따라 일본에 갔지요.”
“상해에 비록 임시정부가 있지만 잠자리와 식사는 보장해 줄 수 없소. 몸에 지닌 돈은 있소?”
“한 십 위안 가량 있습니다.”
“하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예정이요?”
“이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일하면서 독립운동을 하겠습니다.”
김구가 사람을 시켜 이봉창을 여관에 데리고 가게 했다.
어느 날, 이봉창이 술과 안주를 사들고 임시정부를 찾아왔다. 그 전에도 몇 번 다녀 왔기에 이젠 여기 사람들과 낯설지 않았다. 술이 얼근해지자 이봉창이 큰소리로 말했다.
“일본 천황을 죽이자면 아주 쉬운데 당신들 독립한다는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을 안 하는 거요?”
누군가 말했다.
“자그마한 문무관원 나부랭이도 죽이기 쉽지 않거늘 하물며 천황이야 더 말할 게 있소?”
“작년에 내가 동경에 있을 때 일본천황이 성묘하러 가는 것을 보았소. 그 자가 가는 길 좌우에 사람들이 엎디어 있었소. 그때 난 이런 생각을 했지. 손에 작탄만 있으면 당장 저 놈을 요정 낼 텐데……”[1]
김구가 밖에서 이봉창의 말을 들었다. 그는 이봉창이 술김에 헛소릴 친다고 생각지 않았다. 반대로 이봉창의 담략에 탄복하였다.
그날 밤 김구는 이봉창이 든 여관에 찾아갔다. 김구는 단도직입적으로 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두 사람은 의기상투했다. 이봉창도 김구 앞에서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알고 보니 이봉창은 큰 뜻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는 상해에 오기 전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혁명에 투신하려고 결심했던 것이다.
“제 나이 지금 서른 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산다 해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늙어버릴 테니깐요. 인생의 목적이 맨날 쾌락에 있는 것이라면 지나간 31년 동안에 쾌락이란 것은 대충 맛본 셈이지요. 선생님 앞에서 건방진 소리 같지만 아무튼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과 보람 있는 기쁨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각오로 선생님을 찾아온 겁니다. 선생님, 부디 저를 믿어주십시오.”[2]
이봉창의 말을 들으면서 김구는 온 몸이 감동과 흥분에 젖어들었다. 비록 나라가 망하긴 했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있는 한 복국의 대업은 희망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맙소. 젊고 씩씩한 동지를 얻게 된 것이 무엇보다도 기쁘오. 앞으로 손잡고 일해 봅시다. 허나 때를 기다려야 되오.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찾아오오.”
그 번의 담화가 있은 후 김구는 이봉창을 애국단 단원으로 받기로 결정하였다.
김구는 그에게 일본에 가서 일본천황을 암살할 임무를 주었다. 그러나 당장은 아니었다. 그 사이 많은 준비를 해야 했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금후의 장거를 위해 일 년 간 준비를 잘 하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비밀을 엄수하기 위해 임시정부 사람들과도 될수록 적게 접촉하라고 지시했다.
김구는 이봉창의 생활이 걱정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요?”
이봉창이 잠깐 생각하더니 말하였다.
“저는 전에 철공기술을 익힌 적이 있습니다. 일어도 괜찮고요. 저는 일본에서 일본식으로 살았고 제가 쓰는 일본 이름도 있습니다. 이번에 상해에 와서 등기할 때도 일본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준비사업을 하는 기간에 일본인으로 행사할 예정입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공장에 가서 돈도 벌고 정황도 요해하겠습니다.”
김구가 이봉창의 계획에 동의했다. 그들은 그 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만났다.
이봉창은 상해 홍구에서 코시타 쇼우조우(木下昌藏)이란 이름으로 활동했다. 양수포(揚樹浦)에 있는 일본인 인쇄공장에서 일하다가 몇 달 후 영창공사(榮昌公司)에 점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일본어에 능숙하고 거동이 호방하여 어디에 가나 일본인들의 신임을 받았다.
이봉창은 대업을 위해 와신상담하는 중에 허다한 오해를 받기도 했다.
어느 날 이봉창은 일본인 복장을 하고 게다를 신고 개화장을 짚고 공장대문으로 들어가다가 중국인 노동자들한테 쫓겨났다. 평소에도 사람들은 그를 보고 “일본나으리”라고 골려주었다. 그러나 이봉창은 조금도 화내지 않고 씩 웃기만 했다. 그는 지금 받고 있는 오해가 내일의 큰 싸움을 위해 아주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정력을 집중하여 김구가 그에게 준 비밀훈련을 착실히 진행했다. 오직 그만이 그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게는 이제 상해를 떠나야 할 시간이 불과 몇 달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봉창을 오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동녕이 김구를 책망하였다.
“백범, 그 놈 알아요. 거 나무 목(木)자 밑에 아들 자(子)자 성을 쓰는 놈 말이요. 그 작자가 도대체 일본 놈인지 한국인인지 도통 분간키 어렵구만. 그런 작자가 임시정부 대문을 마음대로 드나들어서야 되겠소? 만일…… 조심하게.”
김구가 웃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금 내가 조사 중에 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신에게 만족한 해답을 줄 것입니다.”
안창호와 이시영, 조소앙도 이동녕과 비슷한 말을 하면서 김구한테 귀띔을 주었다.
“백범선생, 당신은 임시정부의 안전을 책임진 사람입니다. 이봉창이란 사내가 왠지 수상쩍습니다. 주의하십시오.”
김구는 허허 웃으면서 말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일깨워줘서.”
애국단은 극히 비밀적이어서 내부의 일을 절대 발설하지 않았다. 누구든 일단 비밀을 누설하면 엄한 처벌을 받았고 일을 성사시키자면 될수록 말이 새나가지 말아야 하였다. 하기에 김구는 가장 신임하는 동지들 앞에서도 진상을 말하지 않았다. 이봉창을 알고 있는 사람들로는 애국단 내의 안공근과 엄항섭 등 몇 뿐이었다.
이봉창의 조상들은 서울 동남쪽에 있는 수원에서 살았다. 부친 이진규(李鎭奎) 때에 이르러서는 가업을 넘겨받아 괜찮게 살았는데 후에 일본 놈들이 철로를 놓는다는 명의로 집을 빼앗아 이씨네는 부득불 서울 부근의 용산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봉창은 1908년 용산에서 태어났다.
이봉창이 태어날 무렵부터 집이 몹시 구차하여 학비도 마련할 수 없었다. 봉창은 집에서 자습하다가 열 살이 되어서야 문창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아름다운 꽃이 망울을 터치기도 전에 찬 서리를 맞는다는 시구가 있는데 이봉창의 처지가 바로 그러하였다.
이봉창은 소학을 마쳤지만 생활의 핍박으로 더 이상 공부할 수 없었다. 그는 본 고장에 있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사탕상점에 가서 일했다. 그때 그의 나이 열세 살이었다. 그는 일본인 주인한테서 갖은 학대와 능욕을 받았지만 묵묵히 참았다. 그의 어린 영혼심처에 한의 씨앗이 심어졌다. 19세 나던 해에 그는 용산역에 견습공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일본인의 갖은 폭행을 당하면서 그는 항상 원수를 갚을 기회만 노렸다. 매일 깊은 밤이면 가슴에 가득 찬 울분을 참을 수 없어 먼 산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이봉창은 적개심을 품고 용산역에서 4년간 일하다가 사직하고 일본 오사카로 떠났다.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어찌 범을 잡으랴. 내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랴!” 이것이 이봉창의 이념이었다.
오사카로 간지 얼마 안 되어 역사에 보기 드문 대지진이 일어났다. 그 번 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헌데 일본의 사회조직폭력배들이 “한인이 불을 질러 대재난이 일어났다” 는 요언을 살포하여 애매한 한인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또 한 번 망국노의 운명을 체험하였다.
이봉창은 일에 지친 나머지 병들고 말았다. 그는 근 일 년 간 병상에서 지냈다. 일가친척 하나 없이 타향에서 병까지 걸렸으니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일본에서 떠돌아다니는 마음씨 고운 한국인 청년을 만났다.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격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이봉창은 병을 치료하였다. 그 친구는 또 이봉창을 마음씨 고운 일본인 집에 소개해 주었다. 그 일본인 집에서 딸을 이봉창에게 주려 했지만 이봉창은 단연히 사절하였다. 이봉창은 그 집에서 나온 후 동경을 비롯한 일본 각 지를 두루 돌아다녔다. 그는 일본에서 거의 7년을 살았다. 그동안 『복수』, 『원수』, 『조국』, 『독립』이란 말들이 이봉창의 가슴에 깊이 뿌리 내렸다. 그는 용산역에서 일할 때 이런 통쾌한 낱말들을 여러 번 들었던 것이다. 일본에서의 경력을 통해 그는 이런 낱말들의 의미를 더 심각하게 이해하였다. 전에 그가 품었던 아리숭한 공상들이 점점 또렷한 현실로 다가들었다. 그는 이렇게 맹세하였다.
“나는 나의 생명을 자본으로 삼아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싸울 것이다. 설사 죽는다 해도 한이 없다.”
그는 이런 사상동기를 가지고 상해에 와서 임시정부를 찾았던 것이다.
『한국애국단』에 들어온 후, 그는 자기의 사명을 민족의 높이에로 끌어올렸다. 일본이 삼천리강산을 침범하고 삼천만 동포를 유린하였다. 그는 우선 침략의 원흉인 일본천황을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그는 조국을 대신하여, 삼천만 민중을 대신하여 핏값을 받아 내리라고 작심하였다. 그리고 그의 장거가 역사를 개변하는데 하나의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범의 굴에 들어가야 범을 잡는다. 그는 이제 얼마 후면 도쿄에 가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혼자 몸으로 침략자의 원흉과 혈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는 가슴이 후련하였다.
김구는 이봉창에 대해 이미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동료들에게는 알릴 수 없었다. 환경이 험악하고 사건이 중대하여 비밀을 엄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직 자기 맘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이봉창은 임시정부 사람들을 대함에 있어서 봄날처럼 따뜻했다. 그러면서도 호방한 성격과 강개한 기질은 늘 드러나 있었다. 그는 술은 좋아했지만 색은 탐하지 않았다. 또 교제술이 아주 좋았다. 그는 일본의 민요, 속담 등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없어 짜장 완전한 일본인 같았다. 홍구에 거주한지 일 년도 채 안 되는 사이에 그는 수많은 일본인 남녀들을 사귀었다. 그는 일본 경찰들도 안중에 두지 않고 농담을 하고 놀려주기도 했다. 이봉창의 호탕함이나 장소를 어울리게 하는 유쾌한 유머에 일본 여인들과 사내들이 모두 반해버렸다.
그날, 폭탄을 숨길 팬티가 완성되던 날 이봉창은 일본의 남녀들과 일본영사관에서 어울려 술 마시게 되었는데 술이 얼근 하자 “여보게들, 나의 사랑하는 벗들, 그대들은 아는가! 훈도시(팬티)는 우리 일본인들이 만든 우리의 점유물이라는 걸. 헌데 가장 통쾌할 때가 말이야 바로 훈도시를 척 벗을 때란 말이야. 하하! 하하하!”
이봉창은 다이다이카 열병장에서 폭탄을 터뜨릴 장쾌한 장면을 염두에 두고 말했지만 멋을 모르는 일본인들은 단순한 농담인줄 알고 모두들 미친 듯이 웃어댔다. 이봉창은 일본인들 앞에서 돈을 쓸 때에는 물 쓰듯 했다. 하여 일본인들은 모두 그를 대부호의 아들로 착각하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일본 영사관도 마치 제 집 드나들 듯 했다.
[참고문서]
[1] 《백범일지》247쪽
[2] 《백범일지》 248쪽
이봉창이
『범의 굴』 로
1931년 7월, 일본육군성은 『만몽문제해결방안대강(滿蒙問題解決大綱)』을 제정하고 중국 동북에 대해 군사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하였다.
일본은 여러 차례 사단을 일으켜 전쟁을 발동할 구실을 찾았다. 같은 해 6월, 일본 참모부의 간첩 나카무라 신타이로우(中村震太郞) 등 4명이 동북 흥안령 군사금구에 잠입했다가 중국군대에 붙잡혀 처형당했다. 일본관동군 사령부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진상을 날조하고 동북에 군대를 증파하였다. 같은 해 7월 1일, 장춘주재 일본영사관에서는 만보산(滿寶山) 한중농민들 사이에 분규를 중재한다는 구실로 일경을 출동하여 중국농민들을 진압하고 수 십 명을 때려죽였다. 같은 해 9월 18일, 일본관동군 남한철도수비대는 명령을 받고 심양북쪽 교외에 있는 유조하(柳條河) 부근의 철로를 폭발시키고는 도리어 중국군대가 한 짓이라고 무함하였다. 이를 트집 삼아 갑자기 중국군대의 주둔지인 심양북대영(北臺營)을 습격하고 봉천성을 폭격하였다. 이것이 세계를 놀래킨 9.18사변이다. 사변 후 장개석의 『부저항주의』방침에 따라 군대를 관내로 철수시켰다.
9월 18일의 봉천성의 총성은 세계를 놀래키고 중국인민을 분노시켰다. 동북삼성의 민중은 항전에 궐기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는 군중을 발동하여 항일유격전을 벌였다.
헌데 장주석이 왜 부저항 명령을 내렸을까? 그래 근 백여만 평방킬로미터의 국토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삼천만 민중이 일제의 철제에 짓밟히는 데도 가슴이 아프지 않단 말인가?
김구를 위수로 하는 임시정부의 사람들은 장개석의 처사에 대해 이해할 수 없었다.
19일, 김구는 임시정부 사무실에 앉아 금후에 할 일을 두고 생각에 잠겼다.
임시정부는 성립된 이후 말 그대로 파란만장의 험난한 길을 걸어왔다. 임시정부 내부의 갈등과 알력으로 어떤 사람은 임시정부를 떠났고 어떤 사람은 반변했다. 거기다 혹심한 경제난으로 임시정부는 위기에 봉착했다. 9.18사변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새로운 역사 시기로 떠밀었다. 한중 두 나라 민중이 연합하여 항일투쟁사를 새롭게 엮을 때가 왔다. 김구는 마땅히 고통을 겪고 있는 동북민중들을 성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중요한 시각에 전 세계와 중국인민들에게 한국임시정부의 힘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김구는 암살 계획을 구상했다. 적들의 중요한 군사시설과 고급 지휘관들을 타격 대상으로 삼고 부동한 지점을 선택하여 부동한 시간에 습격함으로써 가장 적은 희생으로 가장 큰 승리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 김구의 생각이었다.
9월 20일, 김구는 임시정부 사무실에서 국무위원 긴급회의를 열고 동북삼성을 침략한 일본제국주의를 강력하게 규탄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임무를 분석하고 연구하였다.
10월 21일, 김구는 상해 한인단체 대표회의를 소집하였다. 이번 대표대회에 한국독립당, 한국청년동맹회, 유학생회, 한국애국호인회(韓國愛國好人會) 등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김구는 이외 이봉창이 동경 행에 필요한 경비와 무기를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는 미국 하와이 동포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요청했다. 그리고 중국군대에서 육군 소장으로 있는 왕웅(王雄: 본명 김홍일, 한국애국단 단원이며 후에 국무위원이 됨)을 찾아갔다. 그는 왕웅더러 작탄 하나를 준비하고 김현(金鉉)을 하남에 보내 작탄 하나를 더 가져오게 하라고 일렀다.
12월, 하와이에서 몇백 달러를 부쳐왔고 왕웅과 김현이 수류탄 두 개를 가져왔다.
12월 10일, 김구가 이봉창을 불렀다.
“1월 8일에 다이다 이키(代代木) 연병장에서 열병식이 있게 되오. 천황 히로히토가 꼭 참가할 거요. 상황을 봐가며 행동하오.”
“알았습니다. 다이다 이키 연병장으로 가는 길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과 행동이 일본인과 똑같습니다. 주석께선 안심하십시오.”
“만약 행동 전에 체포되거나 행동 후에 체포되면 어찌 하겠소?”
“자결할 겁니다. 혹시 자결하지 못하고 체포된다 할지라도 절대로 나라와 민족에 욕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국의 진정한 용사답게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김구는 일부 세절적인 문제에까지 반복적으로 설명하였다.
이튿날 김구가 봉창에게 거액의 돈을 주면서 일본에 가기 전 모든 준비를 착실히 하라고 재삼 부탁하였다.
이봉창이 떠나기 전 날 밤 김구는 프랑스 조계지에 있는 중흥여관(中興旅館)에서 함께 잤다. 이 밤이 어쩌면 마지막 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이 길로 관산로(關山路)에 이르니 此去關山路,
그 어디나 안개 자욱한데 迷瀠霧不開.
차디찬 강가에 기러기 날고 江寒流雁影,
골짜기엔 원숭이 울음 처량해라 壑響助猿哀.
이 시는 청조의 시인 곽상업(郭相業)이 장강을 유람하고 쓴 『우박남진관(雨泊南津關)』 중의 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봉창의 이번 걸음은 관산로가 아니고 파쇼독재의 원수인 일본 천황을 죽이기 위한 고군작전으로 원수의 마굴로 들어가는 비장한 싸움의 길이었다. 도쿄라는 전쟁터를 향해 진군하는 혈전의 길이었다. 결과는 오직 두 가지 뿐, 전군의 훼멸이 아니면 천황의 죽음으로 인한 전 세계의 진동과 경악이었다.
이봉창이 문득 말을 꺼냈다.
“그저께 선생님께서 저한테 돈뭉치를 주셨을 때 전 울었습니다. 전 민단 사무실에서 직원들이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걸 보았습니다. 헌데 선생님께서는 아무런 우려도 없이 저에게 거액의 돈을 주셨습니다. 제가 흑심을 품고 이 돈을 챙기고 도망친다거나 일본경찰에 고발할 수도 있습니다. 조계지를 한 걸음도 떠나지 못하는 당신께서 어디 가서 절 찾겠습니까?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저를 믿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저의 일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것입니다. 선생님의 넓으신 도량에 탄복할 뿐입니다……”[1] 김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봉창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이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날 밤, 김구와 이봉창은 이봉창이 일본에 가 할 일들을 자세히 토론하였다.
밤중까지 이야기하다 이봉창이 잠들었다. 그는 아무런 걱정도 없이 달콤하게, 너무나 평온하게 자고 있었다. 긴장감이란 꼬물만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김구는 잠들 수 없었다. ‘너야말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애국자이고 열혈 사내구나. 너와 같은 젊은이들이 있기에 한국은 꼭 독립할 것이고 번영 창성할 것이다’. 그는 이봉창으로 하여 긍지와 자부를 느꼈다. 당시 이봉창은 겨우 32세였는데 결혼도 하지 않았다. 부친은 2년 전에 용산에서 돌아가시고 연로한 어머님의 정황은 모르고 있었다. 만약 이 시각 모친이 곁에 있다면 과연 무슨 말씀을 하실까? 이봉창은 그 누구도 엄두를 못 낼 특수한 싸움터로 가게 되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살아오기는 어려웠다. 그가 가진 두 개의 폭탄 중 하나는 천황의 몫이고 하나는 그 자신의 몫이다……
밤이 깊었다. 김구는 또 한 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튿날 새벽, 김구는 이봉창과 안공근의 집으로 갔다. 안공근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이며 한국애국단의 참모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간단한 선서의식을 진행했다. 이봉창이 태극기 앞에서 수류탄 두 개를 들고 선서했다(다음 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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