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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 원이 되어 적국의 괴수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4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선서가 끝난 후, 김구가 이봉창을 데리고 장원루(壯元樓) 식당으로 갔다. 김구가 잔을 들어 이봉창의 성공을 축원했다. 갈라질 무렵에 그들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이봉창이 가슴에 선서문을 달고 손에 수류탄을 쥐고 태극기 앞에 섰다. 얼굴에서는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김구의 얼굴에는 비애가 듬뿍 어려 있었다. 이에 이봉창이 오히려 김구를 위로했다.
“저는 영원한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 떠나는 것이니 부디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으십시오.”
김구가 억지로 기쁜 모양을 하고 다시 사진을 찍었다. 그 다음 이봉창이 허리를 굽혀 김구에게 인사를 하고 자동차에 올랐다. 그 것이 마지막 인사였다. 자동차는 한국의 위대한 사나이 이봉창을 싣고 부두 쪽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자동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김구는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강철 같은 사나이의 눈에 물기가 서렸다.
[참고문서]
[1] 『백범일지』, 249쪽.
멋쟁이 『일본사나이』
그 날은 결코 평범한 봄날이 아니었다. 1931년 3월 17일, 오후 두 시, 새까만 승용차 한 대가 황포부두에 와 멈춰 섰다. 고급 양복을 입고 가죽 트렁크를 든 멋진 사나이가 차에서 내렸다. 신사의 기백이 철철 넘치는 일본 남자였다. 그가 바로 이봉창이었다. 그는 세 명의 일본인의 호위를 받으며 부두에 이르렀다. 거기서도 10여 명의 일본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이봉창을 배웅하려고 미리 부두에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봉창이 상해 홍구에서 사귄 일본인 친구들로, 이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다. 어떤 여인들은 이봉창에게 추파를 보내기도 했다. 이들 일본인들의 눈에 이봉창은 코시타 쇼우조우였으며 호방하고 견강하고 멋진 일본 사나이였다.
“코시타군, 고향에 가면 아름다운 처녀와 결혼하게. 외톨이 삶은 고달프단 말이야.”
50살 좌우의 일본 남자가 이봉창의 손을 끌며 다정스레 말했다.
한 아름다운 일본 아가씨가 이봉창의 곁으로 다가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봉창이 한 달 전에 일본영사관에서 알게 된 사이꼬라는 일본미인으로, 그의 아버지는 상해에서 방직공장을 경영하는 대부호였다. 사이꼬는 이봉창을 세상에서 둘도 없는 훌륭한 사나이라 생각하고 평소에 은근히 이봉창을 사모했다. 이봉창도 신분을 폭로시키지 않으려고 만날 적마다 항상 미소로 대해주곤 하였다.
“코사타 선생님, 꼭 우리 집에 가 우리 어머니를 만나보세요. 어머니가 기뻐하실 거예요. 우리 어머닌 당신 같은 멋진 남자를 만나고 싶어 해요.”
이봉창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인들은 이봉창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일본에 간 후에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이봉창은 예쁜 일본 아가씨의 배웅을 받으며 배에 올랐다. 한창 여객들의 짐을 검사하던 일본 경찰도 이봉창에게 인사를 했다.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
이봉창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부두에서 여객들을 감시하던 헌병대장 시케토오(重藤)가 손을 내 밀었다.
“코시타 선생, 당신은 진짜 통쾌하고 주량도 대단하더군. 그날 영사관에서 우리 몇이 모두 취해 쓰러졌다네. 다음에 상해에 오면 우리 다시 한 번 통쾌하게 마셔 봅세. 이번엔 누가 먼저 취하나 보세.”
“좋구말구. 도쿄에서의 일이 끝나면 꼭 상해에 와 당신을 찾겠네.”
이봉창이 배에 올랐다. 그는 갑판에서 두 손을 들어 그를 환송한 일본인들에게 인사를 했다.
일본에 가면 꼭 자기 어머니를 만나보라던 일본 아가씨가 이봉창의 가죽 트렁크를 들고 배에까지 올랐다. 작별할 때 그녀가 다시 한 번 부탁했다.
“일본에 도착하면 저한테 전화하세요. 바로 상해로 오지 못한다면 제가 도쿄로 가겠어요.”
이봉창이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두 개의 폭탄을 중국비단으로 만든 좁고 긴 주머니에 넣었다. 폭탄을 고환을 사이에 두고 허벅지에 끼이도록 하고 주머니 끝을 배에 묶은 뒤 그 위에 팬티를 입어 감추었는데 해관을 무사하게 통과하자 이봉창은 날듯이 기뻐 저도 몰래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
시케토오 헌병대장을 비롯한 일본 “벗”들은 친애하는 “벗” 인 코시타 쇼우조우가 자기들의 천황을 죽이러 가는 한국인 의사 이봉창인 줄 꿈엔들 생각했으랴.
후에 신문에서 일본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사람이 바로 자기들의 “벗”인 코시타 쇼우조우, 즉 이봉창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시케토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들은데 의하면 그 예쁜 일본 여인은 평생 시집을 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봉창이 배에 오를 때 부두의 한 귀퉁이에서 눈으로 이봉창을 바래준 한 여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구의 지시로 폭탄 두 개를 넣을 만한 특수 훈도시를 만들어 이봉창에게 준 이화림 여사였다. 이봉창이 다다이카 열병장으로 갈 때 폭탄을 훈도시에 감추고 갔다.
이놈들!
너희들 천황이 내 적수다
며칠 후, 이봉창이 안전하게 도쿄에 도착했다. 잔소우 구오라리 마코토(殘草區尾張室)여관에 짐을 푼 그는 부자 신분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곳곳을 유람하서 천황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 그는 신문에서 천황이 1월 8일, 일본을 방문 중인 만주국 황제 부의(溥儀)를 배동하여 다이다이키 연병장에서 열병식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읽었다. 심중에 타산이 선 그는 그 날로 김구에게 전보를 보냈다.
“1월 8일에 물건을 꼭 팔 테니 안심하십시오.”
며칠 후, 이봉창이 김구로 부터 200원짜리 돈표와 전보를 받았다.
“나는 당신이 물건을 꼭 팔리라는 것을 믿소. 당신의 성공을 축하하오.” 전보의 내용을 알아차린 그는 편지 한 통을 보냈다. 이것은 그가 조국에 남긴 최후의 몇 마디었다.
“돈을 받았습니다…… 1월 8일에 상품을 꼭 팔도록 하였으니 안심하십시오. 안녕히 계십시오. 친애하는 어머니시여! 이봉창, 1932년 1월 7일.”
이봉창은 다시 한 번 홍국공원에 가 지형을 관찰한 후 최후로 투탄지점을 확정했다. 평소에 술을 즐겼지만 1월 7일 저녁에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자리에 누우니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지나가다.
1910년 9월, 그가 문창소학교를 다닐 때 『일한합병조약 』이 체결됐다. 선생님은 흑판에다 한국지도를 그려놓고 이야기했다.
“동학들, 이것이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한국의 이름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이 울면서 강의했다.
후에 이봉창은 한국역사에서 이름난 애국 영웅들인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강감찬, 서희, 이순신…… 등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영웅들이 그를 고무 격려하여 오늘과 같은 길을 걷게 하였다.
그의 눈앞에 김구의 자애로운 모습이 떠올랐다. 이 시각, 마치도 김구가 그를 보고 “조국과 이천 만 동포들이 당신의 승리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소.”라고 말하는 듯싶었다. 이봉창이 속으로 외쳤다.
“조국이여, 이천 만 동포여! 나의 희소식을 기다려 다오!”
1932년 1월 8일, 일본 육군이 성대한 열병식을 거행했다.
오후, 이봉창은 사쿠리다문(櫻田門) 밖에 있는 큰 거리에서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 끼어들어 천황 히로히토(裕仁)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소화천황(昭和天皇)의 본명이 히로히토다.
1901년 4월 29일, 도쿄에서 출생한 히로히토는 황태자로 있는 기간에 유럽을 방문하였다. 대정(大正)10년에 부친인 대정황제가 병사하자 섭정하다가 대정 15년에 정식으로 등극하였다. 『상서』(上書)에 있는“百姓昭明,协和万邦”이란 구절에서 소(昭)와 화(和)를 떼 내고 연호를 소화(昭和)라고 하였다. 히로히토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국민의 상징으로 되었다. 신화 중의 황제 외에 일본의 역대황제 중 재위시간이 가장 길고 가장 오래인 황제이기도 한 그는 1989년 1월 7일에 죽었다.
오전 11시 15분, 천황의 차대가 열병장에서 회궁하여 영전문 밖에 있는 경시청과 사법대신 관저 사이로 천천히 굴러 나왔다. 이때, 이봉창이 사람들 속에서 번개 같이 뛰쳐나와 경계선을 무찌르고 천황의 차대를 향해 돌진하면서 수류탄을 던졌다. 수류탄은 아쉽게도 구나이(宮內) 대신이 탄 마차의 뒤 바퀴 밑에서 터졌다. 천황이 탄 마차와 거리가 멀지 않았지만 천황의 마차는 무사하였다. 이봉창은 또 수류탄을 던졌다. 이 번 것은 정확하게 천황이 탄 마차 밑에 떨어졌지만 작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이었다. 이봉창은 자기의 계획이 실패함을 알고 태연자약하게 태극기를 꺼내들고 “한국독립만세!”를 높이 외쳤다. 이 때 경찰들이 우르르 덮쳐들었지만 이봉창은 도망치지 않고 여전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천황의 근위대와 편의대와 경찰들이 그에게로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그러나 이봉창은 여전히 “한국독립만세!”를 불렀다.
일본 기자들을 포함해 중국, 미국, 영국, 프랑스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이 비장한 장면을 렌즈에 담았다.
이봉창은 체포된 후 일경에게 자기의 진실한 이름과 나이와 적관을 밝혔다. 한인애국단 단원이며 애국단의 명령을 받고 일본천황을 죽이러 왔다고 떳떳이 말했다. 그리고 기타 다른 조직이나 개인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고 말했다. 일경이 가혹한 고문을 들이대며 막후 지휘자와 임시정부의 주소를 대라고 했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다. 어떤 땐 침묵으로 대답했고 어떤 땐 사자처럼 울부짖으며 자기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정의로운 일을 한 것뿐이라고 소리쳤다. 한 번은 심판관을 보고 “이 놈아! 너희들 천황이 내 적수다. 너희 같은 쥐새끼 무리들이 어찌 이 어른의 상대가 된단 말이냐?”하고 야유하였다[1].
9개월 후, 왜놈들은 이봉창을 극형에 처했다. 이봉창은 형장으로 끌려 나가면서도 미소를 지었다.
1월 8일, 김구는 이른 아침부터 임시정부의 울안에서 미동도 않고 동쪽을 향해 곧게 서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김구더러 식사를 하라고 권했다. 그 말에 김구가 말했다.
“이봉창이 혼자서 고군분투 하는데 내 어찌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이요?”
겨울의 태양이 마침내 서산으로 기울고 어둠의 장막이 대지를 덮었다. 김구가 침울한 표정으로 사색에 잠겨 있을 때 우체원이 『국민일보』와 『구국시보』를 가져왔다. 신문의 첫 면에 큰 활자로 “한인 이봉창 천황을 저격, 아쉽게도 명중 되지 않았음”이라고 써 있었다.
“아, 실패했구나!”
김구는 신문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동녕, 안창호, 안공근, 엄항섭 등이 모여왔다.
안창호가 말했다.
“백범, 너무 괴로워하지 마시오. 신문 내용을 보면 비록 천황을 죽이진 못했지만 우리 한국인은 정신상에선 신성불가침이라던 천황을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번 거사를 통해 우리는 전 세계를 향해 우리 민족이 일본에 귀화되지 않았다는 것을 당당하게 중명하였습니다. 이만하면 성공이지요.”
이동녕도 말했다.
“도산의 말씀에 일리가 있소. 이후 우리는 일본 놈들에게 몇 천 개 몇 만 개의 폭탄을 던져 주어야 합니다.”
엄항섭도 말했다.
“이번에 놈들이 교훈을 섭취하지 않는다면 조만간에 누군가가 일본열도 전체를 폭파시킬 겁니다.”
김구의 제의로 이봉창 의사가 영용히 취의한 1월 8일, 임시정부 직원 모두가 하루 동안 절식하여 이봉창에 대한 숭고한 경의를 표했다.
이튿날 김구가 상해의 여러 신문에다 『도쿄폭파사건진상』 이라는 글을 발표하여 도쿄폭파안건의 상세한 경과를 공포하고 이봉창 의사를 높이 평가하였다. “의사의 죽음은 무상의 영광으로서 억만 민중의 경모를 받을 것이다. 의사의 육신은 비록 한 방울의 피로 단두대에서 사라졌으나 의사의 위대한 정신은 천추만대를 두고 영생불멸할 것이다.”[2]
1932년 1월 10일에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일제의 죄행을 폭로하고 일본천황을 저격한 이유를 밝히고 한국인의 반석 같은 항일의지를 만천하에 공포하였다.
선언서
흉악한 섬 도적이 우리 강토를 삼키고 만몽을 빼앗고 우리 우방을 침범하였다. 만악의 괴수는 앉아 백성의 기름을 먹고 천황이라고 자처하면서 갖은 악행을 다하고 있다. 하여 천하가 공노하고 있거늘 이런 놈을 죽이지 않으면 하늘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일본천황을 죽여야 할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만악의 괴수이기 때문이다.
2. 도적을 잡으려면 괴수부터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3. 우방의 치욕을 씻어주고 복수를 해주기 위함이다.
4. 민심에 따른 것이다.
5. 국권을 찾기 위함이다.
6.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인류를 해방하기 위함이다.
오늘 이봉창이 일황을 저격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지난 30여 년, 한국의 애국지사들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 출발하여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이어 원수들과 영용히 싸웠다. 안중근이 이등박문을 죽인 것, 이재명이 이완용을 찌른 것, 강우규가 사이토 마코토를 찌른 것, 김익상이 다나카 이키치를 죽이려 한 것 등은 일본 침략자들의 핍박에 의해 벌어진 사건들이다.
일본천황은 군벌들과 결탁하여 온갖 피비린 만행을 감행하여 백골이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루는바 그 참상을 한입으로 말할 수 없다. 하여 분을 참지 못해 우리 한인들이 일본침략자의 괴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2천 3 백만 민중의 마음은 모두 이봉창과 같다. 이제 두 번째 이봉창, 세 번째 이봉창, 나아가서 2천만의 이봉창이 나타 날 것이다[3].
1월 9일 아침, 프랑스조계지 경무국에서 일급 극비 문건을 보내왔다. 내용은 대개 이러하다.
지난 10년간 우리 프랑스 조계지의 관원들은 줄곧 김구를 보호해 왔다. 그런데 이번에 김구 부하가 일본 천황에게 작탄을 던진 사건으로 인해 일본정부에서 각서를 보내 김구를 체포하여 넘겨달라고 할 것이다. 우리 정부는 아직 일본과 싸울 결심을 내리지 않았다. 이런 연고로 우리는 다시는 김구를 보호할 수 없다. 이에 통지하니 알아서 조처하라[4].
이전에 김구는 일이 생길 때마다 이리저리 숨어 다니며 요행 위기를 넘기곤 하였다. 그런데 이번엔 천황사건으로 일이 너무 크게 확대되었다.
중국 신문계는 세계를 놀라게 한 천황암살사건을 톱기사로 보도하였다. 복건, 상해, 청도, 북경 등 지의 신문들에서 천황암살사건을 동시에 보도하였다.
미주, 하와이, 멕시코, 쿠바의 동포들은 정신이 분발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편지들을 수없이 보내왔다. 지난날 임시정부를 반대하던 사람들도 태도를 바꾸어 임시정부의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각지의 동포들이 자금을 모아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들은 임시정부가 중일전쟁에 참가하여 나라를 위해 영광을 떨칠 것을 바랐다.
허다한 열혈청년들이 비밀리에 김구를 찾아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겠다고 자원했다.
사쿠리다문(櫻里門) 폭발사건은 일본 정부에도 큰 충격을 주었다. 1월 8일, 야당의 불만 속에서 일본내각이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내각수상 우니카 이도리(犬養毅)가 자기 책임의 중대함을 알고 오후 5시에 천황 앞에 사직서를 올렸다. 천황 히로히토는 작탄에 크게 놀란지라 내각에 불만이 컸으나 안건이 아직 끝나지 않은 때에 인사변동이 있으면 또 새로운 자객이 나타날까 두려워 “명령이 내리기 전에 그대로 있으라.”고 말했다.
한편 일본 놈들은 미친 듯이 청도의 『국민일보』사를 습격하였고 국민당 남경정부에 항의를 제출하였다. 그 이유인 즉 중국신문들이 이봉창이 일본 천황을 저격한 사실을 보도할 때 “아쉽다”는 단어를 사용했다는 데서였다.
이리하여 중국에 대한 일본의 대대적인 보복이 시작되었다.
[참고문서]
[1] 『도왜실기』, 1932년 12월 1일, 애국단발행, 제9쪽.
[2] 『도왜실기』, 1932년 12월 1일, 애국단발행, 제9쪽.
[3] 『중앙일보』, 1932년 1월 10일.
[4] 『백범일지』, 251쪽.
제7부 홍구를
피로 물들이다
1932년 5월 28일, 강서의 중국공산당에서 출판하는 잡지 『홍색중화』가 한 편의 전문을 실었다.
상해주재 총영사 무라이(村井)와 여러 군정요인들이 29일 오후, 홍구공원에서 천황의 생신을 경축하는 의식을 가졌고 열병식도 거행했다…… 갑자기 한 고려인이 작탄을 던졌다. ……일본교민회 회장 가와바다(河端)가 즉석에서 사망하고 일군의 고위급 장령 시라카와(白川), 야무라(野村), 우에다(植田)와 주중공사 시게미쓰(重光奚) 등이 중상을 입었다……[1]
윤봉길이
김구를 찾아오다
9.18사변과 장개석의 부저항주의는 김구를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였다.
어느 날, 임시정부 만주특파원이 한 통의 비밀문건을 보내왔다. 문건에는 만주사변 이래 동북 삼성의 한국독립군과 동북의용군이 한중연합군을 조직하여 일군과 싸운 정황이 적혀 있었다. 2월, 이청천(李靑天; 지청천이라고도 함)부대가 흑룡강성 빈강현(濱江縣)에서 일군의 한 개 대대와 격전을 벌였다. 후에 이청천부대는 동북의용군 이규보(李奎輔), 조경한(趙擎韓)부대와 연합하여 작전하였다. 그 후 또 길림의 동북의용군 이두(李杜), 정초(丁超)부대에 대표를 파견하여 연합작전을 협상하였다. 같은 해 2월, 한국독립당의 양기하(梁基瑕)[2]부대가 요녕성 관전현에서 일군과 격전하였다. 양기하는 과불적중의 상황에서 장열하게 희생되었다. 조선혁명군의 양기봉(梁基峰), 김학규(金學奎) 부대가 요녕의 이춘윤(李春潤) 부대와 한중연합항일군을 조직하여 일군과 혈전을 벌였다.
김구는 양기하가 장렬히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슬픔에 잠겼다. 한편 한중 두 나라 민중이 손을 잡고 싸운다니 기쁘기도 하였다.
이때 엄항섭이 총망히 들어왔다. 엄항섭은 영어, 프랑스어, 중국어에 능하여 프랑스영사관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 그의 진정한 신분은 한국애국단 성원으로 전문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왜놈들이 곧 상해를 진공한답니다. 일본내각이 육군성을 통해 참모부에다 진공방안을 제출했습니다. 일군이 이미 상해에 집결한 상황입니다.”
엄항섭은 사태가 급한지라 미처 앉지도 못하고 선채로 회보하였다.
김구가 엄항섭을 보고 앉으라고 권했다.
“일본 놈들이 요즘 부쩍 말썽을 일으키는데 그 목적의 하나는 이봉창 사건에 대한 보복이고 하나는 한 번 대 진공을 하여 중국의 태도를 진맥해 보자는 수작인 것 같소.”
엄항섭이 또 새로운 소식을 전했다.
“프랑스 영사관의 분석에 의하면 장주석도 싸울 준비를 하는 모양입니다. 전투력이 강한 19노군을 상해로 옮겨 오는데 그 의도가 일군에 저항하려는 데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죽 좋겠나. 엄군, 자네가 인차 채소시장에 가 윤봉길 군을 찾아보고 내일 나한테로 오라고 일러주게.”
“채소를 파는 그 청년 말입니까?”
“옳네. 그는 임시정부를 찾아 여기까지 온 사람이요. 얼마 전에 그가 사람을 나한테 보내 만나 본 적이 있네. 아주 귀한 시림일세.”
“알만합니다, 선생님”
엄항섭은 김구의 분부에 대해 종래로 물은 적이 없었다. 이것은 한국애국단의 규칙이었다.
격전을 앞둔 상해의 국세는 날이 갈수록 팽팽해졌다.
이튿날 김구가 사무실에서 윤봉길을 기다렸다. 왜서인지 그의 마음은 자꾸만 불안해졌다. 김구는 일본 놈들이 상해를 진공하려는 이때 자기 방식대로 일본 놈들을 타격할 방책을 모색하고 있었다. 팔선녀가 바다를 건넘에 있어 저마다 각의한 재능을 갖고 있다. 김구에게는 유감스럽게도 군대가 없었다. 군대가 없으니 부득불 이봉창식 같은 방법밖에 취할 수 없었다. 그는 이봉창의 실패를 두고 늘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작탄 실험을 한 번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번 실패하면 지혜가 한 번 는다고 하였다. 이번에는 교훈을 섭취하야 꼭 성공하리라. 김구는 그즈음 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고 윤봉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김구는 창 앞에 서서 깊은 사색에 잠겼다. 이때 벨 소리가 울렸다.
“들어오시오.”
들어온 사람은 윤봉길이었다. 김구가 일어나 윤봉길을 손을 뜨겁게 잡았다.
“타향에 와 고생이 무척 많았겠소.”
“좀 고생스럽긴 합니다마는 큰 뜻을 품고 왔기에 견딜만 합니다.”
두 사람은 국내형세, 국민당의 항일노선, 이시정부의 현황, 앞으로의 독립투쟁 전망 등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는데 이야기를 나눌수록 의기상투했다.
김구가 윤봉길을 보고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니 윤봉길이 자아소개를 했다.
“저는 충청북도 예산군 덕산면 시양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윤봉길의 소개를 듣고 김구는 윤봉길이 1908년생이며 겨우 23세라는 걸 알았다.
이어 윤봉길이 내력을 이야기했다.
윤봉길은 어릴 적에 백부한테서 한문을 공부했고 그 수준이 한시를 쓸 수 있는 정도였다. 19세부터 일어를 자습했고 일어가 아주 유창했다. 15세에 읽은 『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은 그가 충의구국의 신념을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후에 동아일보와 접촉하면서 그의 시야는 더 넓어졌다. 그 후 1930년에 상해에 와 임시정부를 찾으려고 고향을 떠났다. 그러나 청도에 온 후, 여비가 떨어져 당지에서 막노동을 하던 중에 일 년이 지나갔다. 상해에 온 후 일본인이 꾸리는 종려(鬃呂)회사에서 일도 하고 거리에서 채소도 팔면서 한편으로는 임시정부를 찾았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겨우 김구와 연락이 이루어졌던 것이었다.
김구가 윤봉길을 보면서 말했다.
“예로부터 충청도에서 많은 애국지사들이 배출되었소. 예하면 충무공 이순신 같은 분들 말이요.”
고향의 명인들의 이름이 나오자 윤봉길이 흥분했다.
“청산리 대첩을 지도한 김좌진 장군도 충청도 태생이고 그 외 윤치앙, 윤보선, 윤치호, 신채호,홍명희…… 아주 많지요.”
윤봉길의 말에 자부심이 넘쳐흘렀다.
김구는 속으로 칭찬해 마지않았다. 보아하니 자기의 선택이 빗나가지 않은 것 같았다. 이 젊은이는 안락한 생활을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어떤 역경에서도 굴하지 않고 조국을 위해 용감히 싸울 수 있는 열혈청년인 것 같았다.
“저는 이봉창 의사를 매우 숭배합니다.”
윤봉길이 문득 이렇게 말하는데 그 찰나 눈에서 섬광이 번뜩였다.
김구는 윤봉길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아주 좋소. 지금 내가 이봉창 같은 동지를 찾고 있는 중이요. 기다리시오.”
김구가 앞으로 걸어 나가 정중하게 윤봉길의 손을 잡았다. 그 무렵 김구는 방법을 바꾸어 암살과 파괴를 계속 실시하려고 인물을 물색하고 있었다.
얼마 전, 김구가 가장 믿던 학생 나석주는 동양척식회사에 침입하여 일곱 명의 왜놈을 죽인 뒤 자살했고, 또 한 명의 학생인 이승춘은 일본 대사관 요인을 죽이려다 실패하고 천진에서 총살당했다. 새로 얻은 이덕주와 유진식에게는 왜놈총독을 암살하라고 한국으로 보냈고 유상근과 최흥식을 왜놈의 관동군 사령 혼게시 게루를 암살하라고 만주로 보내려고 할 무렵, 바로 이 때에 윤봉길이 찾아왔던 것이다[3].
며칠 후 윤봉길이 또 김구를 찾아왔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람으로 말을 꺼냈다.
“전 오늘 선생님께 속말을 하려고 왔습니다.”
김구가 의자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거기 앉아서 천천히 말하게.
“선생님, 부탁합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십시오.”
“조국에다 몸을 바치려고 한다면 기회는 언제든지 있을 것이요.”
김구가 윤봉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윤봉길은 김구의 눈에서 이제 곧 한 차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주]
[1] 『홍색중화』,1932년 5월 28일.
[2] 양기하 (梁基瑕): 1878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출생,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고아복군 침리부 정보국장, 광복군 사령부 교육위원장, 임시정부 참의부 교육장 등을 역임.조선혁명군의 정치부 책임자로 있으며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하다가 1932년에 희행.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3] 『백범일지』, 253 쪽.
『춘운호』폭파 계획 실패
1월 28일, 음산한 구름이 상해의 하늘을 두텁게 덮었다. 밤의 장막이 서서히 드리워지자 스산한 밤은 더더욱 컴컴하고 침침하였다.
일군의 육전대가 집결을 시작하였고 공군이 일급 전투준비에 진입했다. 일군 14사단 제 24 여단이 이미 전투준비를 마쳤다.
금방 상해로 온 국민당 19 노군의 3만 여 명 장병들이 총지휘 장광내(蔣光鼐)와 군장 채정개(蔡廷锴)의 지휘 하에 만단의 준비를 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침침해지고 컴컴해졌다. 초침이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갔다. 갑자가 총소리와 포소리가 요란했다. 일군이 중국군에 향해 갑자기 돌연 습격을 하자 국민당의 19노군이 맹렬히 반격하였다. 상해의 하늘에 화광이 충천하고 총포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새벽에 일군의 비행기가 시내를 맹폭격하였다. 이틀간의 격전에서 19노군은 일군 천 여 명을 섬멸하였다. 2월 14일, 장치중(張治中)[1]이 제5노군에게 상해를 지원하여 전투에 투입하라고 명령하였다. 4시간 만에 상해를 함락하겠다던 일군의 호언장담이 깨지고 말았다.
일본 육군성과 참모부는 시라카와(白川義則) 대장을 상해 주재 일군 총사령으로 임명하였고 선후로 제11사단, 제14 사단의 10만 병력을 투입하여 상해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30 여 일간 싸웠지만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했고 대신 상망만 엄중했다.
노한 중국용사들이 마침내 위풍을 떨친 것이었다.
이때 중공중앙이 『1.28사변에 관한 결의』, 『상해사건과 관하여 각지 당부에 보내는 편지』를 채택하여 광대한 민중들이 의용대와 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전에 일떠서라고 호소하였다.
이 호소에 호응하여 상해시민들은 노동자 전지공작대, 구호대와 의용대를 조직하여 19노군을 지원하였고 전국의 수십 개의 의용군이 전선에 나가 직접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정부는 호응하지 않았다. 1.28사변 전야에 장개석[2]과 왕정위(汪精衛)[3]는 항주에서 권력을 분배하는 협의를 달성하였다. 왕정위가 행정위원장을 맡고 장개석이 군사위원장과 참모장을 맡았다. 왕, 장은 한편으로는 저항하고 한편으로는 담판하는 방침을 취하였다.
6월 30일, 국민정부가 낙양으로 옮겨갔다.
시라카와가 상해에 오기 전에 히로히토(裕仁) 천황이 친히 이 육군대장을 접견하고 훈시하였다.
“상해전투를 속히 끝내야 하오. 우리가 만주를 점령한데 대해 세계 여론이 좋지 못하오. 이제 중국본토에서 전쟁을 확대하면 일본에 더욱 불리하니 만약 적측에서 철퇴하면 추격하지 마시오.”
시라카와 대장은 천황의 훈시에 따라 상해행동방침을 확정하였다. 우선 현재의 병력으로 전쟁을 확대하자면 힘에 부치므로 아직까지는 전쟁의 확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소장파의 정서를 통제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다음으로 천황을 암살하려던 한국애국단의 본부가 상해에 있으므로 안전에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시라카와가 상해에 온 후 일군의 공세가 더욱 맹렬해졌다.
김구는 상해에서 감행한 일군의 폭행을 친히 목격하고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 일본 놈들이 간 곳마다 불 지르고 간음하고 살인했는데 그 참상을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었다. 상해시민들은 노동자 공작대와 구호대, 의용대를 조직하여 전선을 지원하였고 복단대학 학생들까지 학생의용대를 조직하여 군대들과 함께 싸웠으며 프랑스 조계지 각 곳에 후방병원이 세워졌다.
김구는 중국군인들이 쉴 새 없이 시체와 상병들을 나르는 것을 보았다. 담가에서는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김구는 부지중 한국의 운명을 생각했다. 김구의 가슴에서는 복수의 불길이 펄펄 솟구쳤다.
김구는 상해병기공장 병기부 주임이며 19노군 후방 정보국 국장인 왕웅(王雄, 한국 이름 김홍일)을 찾아갔다.
왕웅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해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다. 1898년, 평안도 용천에서 출생한 그는 본관이 김해고 초명이 김홍일(金弘壹)이며 호는 일서(逸曙)고 별명이 최세평(崔世平), 중국식 이름이 왕웅, 왕일서(王逸曙), 왕부고(王復高)다. 15세에 만주에 가 봉천에서 중국소학교를 졸업하였고,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구국일보사 사장인 중국인 황개민(黃介民)의 도움으로 귀주의 육군광무학당을 졸업하고 1921년에 한국독립군에 가담하여 대대장으로, 1923년에는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으로 지냈으며, 1926년에 중국혁명군에 가담하였다. 1945년에 왕웅은 중장으로 승급했다. 한국인으로 중국군의 중장을 지낸 사람은 김홍일 뿐이었다. 중국군의 중장으로 있는 동안 그는 배후에서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또한 총사령부 병기감, 상해병기공장 군기처 주임, 육해공군 총사령부 군기처장으로 있으면서 김구의 뜻을 받들어 한국애국단 거사에 비밀리 참가하여 큰 활약을 하였다. 1932년 이봉창, 윤봉길의 의거 때 그는 폭탄제조를 책임졌고 1945년 6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동북보안장관 사령부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임명되어 한국인 동포보호와 본국 송환에 전력하였으며 1947년에는 중국국방부 정치부 위원으로 활약하다가 1946년에 귀국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을지무궁, 태극무공,청조근진 등 훈장을 수여받았다. 중국정부로부터는 충근(忠勤), 대수운마(大綬雲魔), 대수경성(大綬景星) 등 상을 수여받았다.
김구는 왕웅을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일본 놈들이 중국의 민중을 학살하는 것을 보니 견딜 수가 없네. 여보게, 내가 중국형제들을 돕자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왕웅은 김구의 뜻을 알고 있었다.
“선생님께선 어느 걸 때리려 합니까?”
“놈들의 제일 큰 둥지를 뒤집으려고 하네.”
“믿을만한 정보에 의하면 일군 육군대장 시라카와가 상해에 와 상해전시사령부를 세웠습니다. 그 사령부가 홍구부두에 머무르고 있는 『춘운호』(春雲號)군함에 있습니다.”
“좋네. 작탄을 준비하게. 아주 위력이 큰 걸로 말이야. 그리고 몇 명의 잠수인원을 보내 ‘춘운’을 부셔 버리게. 내가 이미 5, 6명을 파견해 정보를 수집하게 했네. 이번에 실패해도 계속할 거네.”
왕웅이 응낙했다.
“잠수인원은 제가 찾을 수 있습니다. 오후에 그들과 만나겠습니다.”
“그들에게 보수를 넉넉히 주게. 성공한 다음엔 곱절 더 주겠네.”
2월 12일, 김구와 왕웅이 고용한 중국인 잠수인원이 가만히 『춘운호』에 접근하였다. 그러나 작탄을 고정할 곳을 찾지 못해 여기 아쉽게도 일은 끝나고 말았다.
김구는 계속하여 일본군사시설을 파괴할 방안을 계획하였다. 그는 일군의 비행기창고가 홍구부두에 있고 군수물 창고가 황포강 강변에 있다는 정부를 입수하였다.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본 국내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김구는 일본의 한인애국단 단원들에게 일군의 후방 운수노무대에 잠입하며 후에 상해에 와 임무를 집행하라는 밀령을 내렸다. 얼마 안 되어 일본의 한인애국단 단원들이 육속 상해부두에 이르렀다.
김구가 애써 획책한 방안이 남몰래 진척되고 바야흐로 실행에 옮기려고 할 무렵에 전쟁의 형세가 급변하였다. 장개석이 일본에 대한 국제연맹의 제재에 환상을 품고 일본과 협의를 달성하였다. 영국주재 중국공사의 조율로 3월 3일, 중일쌍방이 군사행동을 정지하고 초보적으로 『송호정전협정(淞濩停戰協定)』을 체결하였다. 협의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일군이 공공조계지와 홍구 일대로 철수한다. 그러나 그 일대에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다. 중국군대는 곤산(昆山), 소주(蘇州) 일대에 주둔한다. 그 외 또 세 가지 약속조항이 있었다. 첫째: 중국은 항일행동을 취소해야 한다. 둘째: 19노군을 다른 군과 교환해야 한다. 셋째: 중국군대는 포동과 소주하 남안에 주둔하지 못한다.
이 협정은 그야말로 상권욕국(喪權辱國)의 치욕스런 협정이어서 중국민중의 지대한 분개와 강열한 항의를 불러 일으켰다.
김구도 그 협정의 내용을 보고 분이 치밀었지만 중국정부의 결정을 막을 힘이 없었다. 김구는 부득불 자기의 계획을 잠시 취소하기로 하였다. 원래 김구는 한인 중에 일본군의 노동자로 출입하는 사람들을 이용하여 비행기 격납고와 군수품 창고에 소이탄을 장치하여 속 시원히 태워버릴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송호협정』의 체결로 애써 마련한 일이 그만 애석하게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4]
그러나 김구는 기타 지방의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3월 중순에 한인 애국단 단원인 이덕주(李德柱), 유진식(兪鎭植)을 서울에 파견하여 조선총독 우가기(宇垣)를 암살하게 했다. 그러나 행동 전에 체포되어 일이 실패되고 말았다.
김구는 또 5월 26일, 국제연맹조사단이 대련에 오며 일본 관동군 사령 혼조 시게루(本庄繁) 대장과 만철(만주철로)총재 나이타 코우사이(內田康載)가 그들을 배동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김구는 유상근(劉相根[5]), 최흥식(崔興植[6])을 대련에 보내 혼조 시게루와 나이타 코우사이를 암살하게 하였다.
[주]
[1] 장치중(張治中1890~1969): 국민당의 저명한 애국장령,원명은 본요(本堯),자 문백(文白). 안휘성 합비에서 출생. 황포군관학교 계열의 맹장. 국민당 육군 2급 상장.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지도자의 한 사람. 항일전쟁시기 제4로군 총사령관 으로 송호전역을 지휘. 1945년 중경담판에서 국민당을 대표하여 큰 역할을 함. 1949년에 국민당정부의 대표단을 이끌고 북경에 각서 주은래 등 중공대표들과 평화담판을 함. 국민당정부가 평화담판을 거부하자 성명을 발표하고 국민당에서 탈퇴.
[2] 蒋介石(1887-1975): 이름은 중정(中正),자가 개석(介石). 절강성 봉화(奉化) 출생. 국민당시기 당, 정, 군의 최고지도자. 1908년에 일본에 유학하고 동맹회에 참가. 1924년 귀국 후 황포군관학교 교장, 국민혁명군 제1군 군장을 역임. 1927년에 『4.12정변』 을 발동하여 제1차 국공합작이 파열됨. 『서안사변』 후, 항일주장을 접수하고 항일을 호소함. 1948년에 국민대회를 열고 대통령이 됨. 1949년에 은퇴를 선포. 동년에 대만에 간 후 다시 대통령을 맡고 총재가 됨. 1975년에 사망함.
[3] 왕정위(王靖衛): 원명은 왕조명(汪兆铭),자가 계신(季新),필명이 정위. 원세개 통치시기에 프랑스를 유학함. 귀국 후 손중산의 영도 하에 상해에서 잡지『건설』을 꾸림. 손중산이 광주에서 비상대통령을 맡았을 때, 광동성교육회장, 광동성 정부 참의원을 역임. 항일전쟁시기 일본에 투항하여 한간으로 윤락됨. 1944년 일본 명고옥에서 골수병으로 사망.
[4] 『백범일지』 252쪽
[5] 유상근(柳相根): 1910년 강원도 통천(通川)에서 출생. 14세 때에 부모를 따라 북간도로 이주. 1930년 상해에 가서 김구가 지도하는 한국애국단에 가입. 1932년 김구의 지령으로 대련에 가서 국제연맹조사단 환영식에 참가하는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 등 일본 고위급 인물들을 암살 하려다 체포되어 13년간 옥고를 치름. 1945년 8월 14일 광복 하루를 앞두고 옥중에서 살해됨.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6] 최흥식(崔興植): 1909년 생. 출생지 미상. 다른 이름은 경팔(慶八). 수하(水下)공립보통학교를 졸업. 가정이 구차하여 공부를 더 못하고 인쇄소 견습공으로 일함. 1931년에 전국을 유랑하다가 상해에 가서 김구가 지도하는 한국애국단에 가입. 1932년 김구의 지령으로 대련에 가서 국제연맹조사단 환영식에 참가하는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 등 일본 고위급 인물들을 암살 하려다 체포되어 사형당함.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전쟁미치광이
시라카와
4월 초의 어느 날, 일본 국기를 꽂은 고급승용차들이 꼬리를 물고 홍구에 있는 일본영사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대청에서 무라이(村井)총영사가 아주 장중하게 일행을 영접하였다. 그 중에는 상해주재 일본 총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大將)과 일군 9사 사단장 우에다(植田謙吉)중장(中將), 주 중국 일본공사 시게미쓰(重光葵) 등도 있었다. 한마디로 상해에 있는 일본군정계 거두들이 모두 모였다. 이들 중에 가장 악명이 높은 것은 시라카와와 시게미쓰였다.
시라카와는(1869년 1월 24일-1932년 5월 26일)일본육군 1급상장이었다. 시라카와는 침화일본 관동군 사령관, 육군대신, 군사참의관을 역임했으며 1932년 1.28사변 후 침화 일군 상해 사령관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악명 높은 침략괴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해에서 거행된 천장절(天長節: 일본 천황의 생일) 경축대회에서 윤봉길이 던진 폭탄을 맞고 입원했다가 한 달 후에 상해 일본조계지 병원에서 죽었다.
시게미쓰는 명색이 주중 일본공사였지만 사실은 중국침략의 원흉이었으며 만주국을 획책한 장본인이었다. 시게미쓰(1887년 7월 29일-1957년 6월 27일)는 2차대전시기, 일본의 외무대신이며 악렬한 군국주의자였다. 1차대전부터 2차대전, 및 전후까지 중, 일, 만주에서 40여 년간 활발하게 외교활동을 진행하면서 일본의 침략정책을 막후에서 제정하였다. 가장 유명한 것은 모략을 꾸며 만주국을 새운 것이었다. 시게미찌는 죄악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 상해 홍구공원에서 윤봉길이 던진 폭탄에 맞아 한쪽 다리를 잃고 종신병신이 되었다. 1945년, 일본이 투항 한 후, 매진이치랑(梅津美治郞)과 함께 일본투항서에 서명하였고 원동군사법정에서 갑급전범으로 재판 받고 7년 유기형을 받았으며 1950년에 가석방 된 후 다시 외무대신이 되었다가 1956년에 사망하였다.
시라카와 대장이 신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위엄과 호기가 넘치는 발언을 했다.
“제군 여러분, 오늘 한 가지 중요한 일을 알리려고 여러 분을 이 자리에 모셨습니다. 어제 우니카 이도리(犬養毅) 수상 각하가 전화 통화를 하였습니다. 수상께서는 천황이 상해의 전체일본 관병들이 천장절에 성세호대한 열병식을 거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열병식의 의의는 아주 중대합니다.
첫째: 이 기회를 빌어 중국에 있는 일본장병들이 천황께 충심을 다지는 것입니다.
둘째: 이 기회에 우리 군의 상해에서의 대 승리를 경축하고 아울러 만주와 관외의 우리 장사들에게 사기를 높여 주는 것입니다.
셋쩨: 세계 각국 특히 미국, 영국, 프랑스인들에게 일본군의 위력을 과시하여 그네들이 우리 제국이 만주국을 세우고 만몽을 독점하는 것을 간섭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 번 열병식은 큰 전쟁에 못지않게 의의가 크므로 반드시 고도의 중시를 돌려야 하겠습니다. 본 사령관은 일본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을 이번 행사의 총지휘로 임명합니다. 이번 열병식에 보병 세 개 여단, 중형포대와 산포대 각각 한 개 대대, 운수대 한 개 대대가 참가하게 되며 비행기가 공중표현을 하게 됩니다. 20일 내에 모든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이날은 일급전투준비에 들어갑니다. 일정한 병력과 헌병대, 경찰대를 잘 배합하여 홍구공원과 각 거리의 보위사업을 잘 틀어쥐어야 합니다. 우리 교민들에게 발급할 입장권은 무라이(村井)군이 알아서 처리하시오.”
말을 마친 시라카와 대장이 곳곳한 자세로 자리에 앉았다.
우에다가 일어서서 말했다.
“상해전투는 일군이 대화정책강령을 실시하는 중요한 환절의 하나입니다. 천장절의 열병식은 실제상에서 서방에 압력을 가하고 위협을 주는 것이며 앞으로 중국을 정복하기 위한 한 차례 실험입니다. 허나 지금 상해에 폭력을 일삼는 한인 폭도들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에 본인은 이 번 행사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회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도시락과 물통, 일장기 외의 일체 물건은 휴대를 못하며 홍구공원 주위 50리 이내에 계엄을 실시할 것을 제기합니다.”
시게미쯔 공사는 주로 외교문제에 치중하여 말하였다.
“천장절에 경축활동을 거행하는 것은 누구도 막지 못합니다. 그러나 열병식을 거행하는데 대해서는 여러 공공조계 당국들이 극력 반대합니다. 그러나 몇 번의 교섭을 통해 그들도 대표를 파견하여 참가하기로 했습니다. 참가한다는 것 자체가 동의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에 일본민단 회장 가와바다(河端)가 일어섰다. 상해에 있는 일본 망나니들의 막후 조종자이고 편의대(사복특무대) 대장이며 수많은 나뿐 짓을 한 놈이 그 누구보다도 득의양양하여 우쭐거리면서 지껄였다.
“상해에 있는 일본 교민은 10만이 됩니다. 우리 제국이 상해에서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기에 우리 교민들은 무한한 고무를 받고 크나큰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교민들은 자발적으로 모여 거리와 식당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천황의 만세를 높이 불렀습니다. 지금 중국인들은 일본인을 보면 허리를 굽실거리며 인사를 올리고 한인들은 일본인들을 보면 멀리로 피해 다니고 영국인, 미국인들은 일본인들을 보면 엄지손가락을 빼 들고 연신 OK를 외칩니다. 저는 10만의 일본 교포들을 대표하여 천황폐하께 가장 숭고한 경의를 드립니다. 오늘 저는 이미 국제판점에다 풍성한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10만의 일본교포들의 명의로 여러 분의 광림을 환영합니다.”
예로부터 승자가 왕이 되고 패자가 역적이 되는 법이다. 상해의 모든 일본교포들이 모두 미칠 듯한 승리의 희열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유독 시라카와 대장만은 송호전투가 일본의 승리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만주를 점령한 것도 승리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략적인 각도에서 보면 4억 5천만 중국인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사자라고 할 수 있었다. 구경 누가 이기고 지는가 하는 것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속말을 그는 말할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 시라카와는 아주 일찍 일어났다. 어젯밤, 기생과 함께 달콤한 밤을 보냈지만 그의 생활규칙은 추호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사령부 울안에 있는 프랑스 오동나무 밑에서 뒷짐을 지고 오락가락 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는 대성시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가 하는 문장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의 문장을 금후 중국을 침점하는 전쟁의 의거로 삼으려고 했다.
한때 그는 육군대신을 지냈던 다나카(田中義一)대장과 지금 조선총독으로 있는 우가키(宇垣) 등 3인과 더불어 육군중의 『3대금강』으로 불렸다. 그만큼 그는 세력이 막강했고 위망이 높았다. 그는 『대화정책강령』을 제정하여 『중국본토 및 만몽 을 일본에 귀납시키는 방침』, 즉 일본의 원동방어계통을 확립하려고 준비하였다. 우선 만몽을 중국본토에서 떼어내기 위해 “무력으로 만몽문제를 해결”하는 전략방침을 주요한 결책으로 삼았다. 그는 다나카나 우가키와는 달려 정계에는 흥치가 없었고 전문 군사에만 골몰하였다. 시라카와는 무수한 전투를 경험한 유능한 직업군인이었다. 일본군계의 핵심인물인 그는 전략두뇌가 아주 명석하였고 전쟁이론과 실천이 풍부하였으며 상해전의 승리가 일군이 강해서가 아닌 장개석이 크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경호(북경, 상해)연선과 절강, 안휘, 강서의 중국군대는 백만이 넘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하북, 안휘, 강소 등 지에 있는 중국공산당의 근거지를 공격하는 데 주력을 집중하였다. 당시 장개석은 “상해전투를 확대시키지 말아야 한다”, “항일과 공산토비숙청을 동시에 진행한다.”는 방침을 이유로 제5군만 상해로 증파하고 기타 부대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령 장개석이 더도 말고 한 개 군만 더 상해에 보냈더라면 상해전투는 일군의 실패로 끝났을 것이다. 전쟁은 단순히 군사의 겨룸이 아니라 정치의 겨룸이었다. 장개석의 정치목적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는 길에 푸른 등을 켜 주었다. 중국군의 19노군과 5군의 전투력은 매우 강했다. 갑북(閘北)지구의 일군이 비행기, 탱크, 대포의 엄호를 받으며 48시간을 공격하였지만 1,500 명의 사상자만 내고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였다. 특히 묘행진(廟行鎭)전투가 격렬하였다. 우에다의 제 9사단의 두 개 대대가 하루 동안 싸웠지만 여전히 열세에 처하고 두 개 중대 중 한 개 중대가 섬멸되었다.
가령 장개석이 적극적으로 주동적으로 싸웠다면 그 결과는…… 참으로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시라카와는 속으로 장개석에게 감사를 드렸다. 다음부터 어떻게 대성시를 진공할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라카와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담화를 나누고 자료를 장악하고 실정을 분석하였다.
일본육군의 3대 금강이며 상해의 일군 총사령이며 전쟁 미치광인 시라카와는 깊은 사색에 잠겨 프랑스 오동나무 밑에서 뒷짐을 쥐고 서성거렸다.
왕아초가
안창호를 찾아오다
1932년 1월 29일, 일본군이 불의에 상해를 공격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역사에서 말하는 1.29 사변이다. 1.29사변은 일본이 중국을 전면적으로 침범하기 위한 시험작전이었다. 이에 19노군의 총지휘 장광내와 군단장 채정개는 사병들을 이끌고 용맹하게 싸워 일본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전투는 꼬박 한달 가령 전개되었다. 교전쌍방은 모두 큰 상망을 냈다. 그러나 전 상해와 전국 인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성원에 힘을 얻은 19노군 장병들은 여전히 사기가 충천하였다.
19노군이 한창 분전할 때 장개석이 갑자기 “굴욕을 참고 전국(全局)을 돌보라”는 명령을 하달하여 반격을 멈추게 하였다. 장개석은 일본의 전면적인 대 중국 침략전쟁이 걱정스러웠던 것이었다. 그는 연합국의 중재로 일본의 침략을 저지시키려고 하였다. 미, 영, 프 등 나라들은 자기네들의 이익을 위해 교전쌍방에 정전을 요구하였다. 일본군은 새로운 침략방안을 모색하자면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으므로 정전에 동의했다. 쌍방은 4월 20일에 정식으로 『송호정전협정』을 체결하였다. 『송호정전협정』의 내용은 이러하다.
1. 중국군대는 모든 항일활동을 취소해야 한다.
2. 19노군을 교체하여야 한다.
3. 중국군대는 포동과 소주하 남안에 주둔하지 못한다.
『송호정전협정』은 중국의 역사에서 『남경조약』, 『천 진조약』과 같은 또 하나의 치욕의 역사였다. 『송호정전협정』의 체결은 전국 인민의 지대한 분노를 일으켰다. 특히 누구보다도 직접 왜놈들과 싸웠던 19노군장병들의 격분이 더 하였다.
그 무렵 19노군에서는 10일 후인 4월 29일에 일분군이 홍구공원에서 『천장절』 기념행사와 더불어 『송호전쟁승리경축』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입수하고는 분노가 극도에 달하였다.
장광내와 채정개가 마주 앉았다.
장광내는 1883년에 광동성 완호문(莞虎門)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국의 유명한 애국장령이었다. 1.29사변당시 19노군의 총지휘를 맡은 그는 일본군이 상해를 진공하자 군장 채정개와 함께 전국을 향해 “조국의 영토를 수호하는 것은 군인의 으뜸가는 사명이다. 우리는 한 치의 땅, 한 포기 풀도 놈들에게 내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영용히 싸울 것이다.”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그 맹세대로 하였다. 1933년에 복건에서 이제심(李濟深), 진명추(陳銘樞), 채정개 등과 중화공화국 인민혁명정부를 건립하였고 실패하자 홍콩으로 갔다. 1935년에 원 19노군 골간 장병들과 연합하여 장개석을 반대하고 공산당과 연합하자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항전승리 후 그는 제7야전군 부총사령이 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후 인민정부 방직공업부장, 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있다가 1967년에 북경에서 사망했다.
채정개 장군은 1892년 광동성 나정현(羅定縣)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국의 저명한 애국장령인 그는 1.29사변시 19노군 군장 겸 부총지휘를 맡았고 장개석이 “굴욕을 참고 전국(全局)을 돌보라”면서 반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하였으나 장광내와 함께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완강하게 반격하여 중국인민의 애국정신을 과시하였다. 후에 장개석이 공산군을 토벌하라고 채정개를 복건에 보냈으나 공산당과 반일반장협의(反日反蔣協議)를 맺고 이제심, 장광내, 진명추 등과 중화인민혁명정부를 성립하고 공개적으로 반일반장을 선포했다.(다음 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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