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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선(行禪)
행선이라 함은 몸을 움직여 돌아다니면서 하는 참선을 말한다.
좌선과 와선臥禪을 정중선靜中禪이라고 하고 행선을 동중선動中禪또는 요중선擾中禪이라고한다.
참선방에서 50분 좌선하고 10분 동안 경행을 하는데 이것도 행선에 속한다.
좌선을 하면서 불가피하게 움직일 때, 예를 들자면 공양을 한다든가 용변을 보기 위해서 움직일 때는 앉아서 좌선 정진할 때의 정신을 흐트러짐 없이 그대로 유지해야 되는데 움직이면서도 화두의심을 계속 지속시켜야 된다.
세속에서 생업에 종사 하면서 수행하는 사람들도 항상 정신을 놓지 말고 하는 일에 집중한다면 이것역시 행선이라고 할 수 있다.
행선을 동중선 또는 요중선이라고 혼용해서 말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동중선과 요중선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동중선은 글자그대로 몸을 움직이는 참선이고 요중선은 시끄러움 속에서 하는 참선이다. 동중선은 주로 돌아다니거나 몸을 움직이면서도 좌선할 때의 잡념 망상 없는 정신 상태를 지속시키는 수행법이라면 요중선은 시끄러운 시장바닥같은 장소에서도 주변 환경에 정신을 뺏기지 않고 여여如如한 정신을 유지시키는 수행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중선은 몸에 힘을 가加하는 육체적인 면을 강조 하지만 요중선은 시끄러움 환경 속에서도 마음이 동요됨이 없고 더 나아가 일상생활에서 오는 모든 시비是非거리나 희로애락에 끄달리리지 않는 고차원적인 수행법이다. 언뜻 봐서도 알겠지만 동중선 보다는 요중선이 수승한 수행법임을 알 것이다.
그렇다면 동중선은 무엇인가?
정중靜中에서 제대로 좌선을 오래한 사람이거나 또는 좌선을 거쳐 와선을 한사람은 그동안 순풍에 돛단배 같이 정진이 잘나가다 어느덧 이때가 되면 화두의 흐름이 멈추는 경계가 나타나게 된다.
이럴 때는 아무리 앉아서 좌선을 하거나 누워서 와선을 해도 공부에 진척이 없을 뿐 아니라 머리가 도도滔滔해져 뻑뻑하고 화두의 기운이 머리 좌우 또는 이마 등에 들러붙어 압박을 하는데 도저히 이 힘을 떼어낼 수가 없다.
좌선을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열심히 한 사람이나 또는 구참스님들은 이러한 경험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스님들은 이것을 고약한 상기병으로 생각하고 정진하는 것을 놓아버리고 막무가내로 돌아다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정법이 아니다.
물론 공부를 잊어버리고 돌아다니면 머리에 들러붙은 기운은 해결될 수 있을지언정 더 이상 공부에 진척은 없다.
이러한 공부 경계에서는 앉거나 누워서 정진하지 말고 주로 경행으로 도량내를 포행하는 것으로 정진을 하다가 점점 강도를 높여 육체적인 힘을 쓰는 일을 하게 되면 머리에 달라붙은 기운을 공부에 활용 할 수가 있다.
이 공부처에서는 사람 따라 다르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도솔암에서 처음에 동중공부 할 때는 잠자는 시간 빼고는 주로 산에 올라가서 화목을 한다든가 식량을 운반한다던가 밭에 가서 일을 하든가 하루 종일 움직이면서 정진을 했다.
동중에서 일하면서 정진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일에 빠지게 되어 정신이 매昧하게되는데 이때 너무 일에 빠지면 정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일꾼이되어버린다.
걸음을 걷거나 일을 하거나 움직일 때는 항상 정신을 차리어 잡념 망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노력해야 되고 잡념이나 망상이 들어오면 얼른 정신을 차려야 된다.
특히 낫으로 나무작업을 하거나 도끼로 장작을 팰 때는 일에 정신이 팔리게 되거나 쓸데없는 잡념 망상을 하게 되면 자칫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가 있으니 오로지 일하는 일념과 몸의 움직임만 있을지언정 잡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이 공부처는 주로 육체적인 힘을 써야 정진이 잘되는데 고봉 원묘선사 같은 분은 밤새 맷돌을 등에 업고 도량을 돌았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잠을 쫓기 위해서 그랬다고들 하나 사실은 동중공부를 하기 위함이었다.
과거 어떤 스님은 이 공부처에서 홀연 단신으로 바위로 이루어진 석산石山을 정釘하나와 망치만을 가지고 석굴石窟을 만들려고 파들어 갔는데 석굴을 다 파기 전에 활연대오 했다고 한다. 말이 쉬운 것이지 단단한 바위를 정 하나로 쪼아서 굴을 판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것임을 실감나게 한다.
또한 당나라 때 남악회양선사가 좌선에 집착하는 제자인 마조도일 스님을 깨우치기 위해서 “기왓장을 숫돌에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는 유명한 법문도 바로 이 공부 경계에서 동중선으로 인도하기 위함이었다.
그 공부경계에서는 아무리 앉아서 좌선을 해도 진척이 없기 때문이다.
정중공부는 요중공부를 하기위한 기초작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된다.
많은 참선인들 이 경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방황하고 있는 것 도 사실이다.
조계종단의 선객禪客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스님이며 출가해서 줄곧 결제 해제 없이 정진을 열심히 한 스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다.
우리 은사스님께서도 정진 열심히 한다고 아꼈던 우리 문도의 중진重鎭스님이었는데 2009년도 7월에 삼척의 어느 토굴에서 입적하였다.
후에 확인된 바로는 그 당시 스님은 머리에 들러붙은 기운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25년 이상을 줄곧 선방에서 결제 해제 없이 정진을 했다면 당연히 두뇌좌우 또는 이마에 화두의 기운이 크게 들러붙었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그것을 상기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상기병이 아니다.
정진을 열심히 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인 것이다.
이 공부경계에서는 일단 누워서 정진하는 와선을 해보고 정진이 순조롭게 잘되면 와선을 계속하고 와선의 경계가 지났으면 움직이는 동중선으로 바꿔서 정진을 해야 된다.
그때 스님은 항간에 듣기로는 스리랑카 또는 인도등으로 선지식을 찾아 외국에 나갈 계획도 세웠다고 하는 데, 참으로 안타깝다.
참선공부에는 자존심이 필요 없다. 물론 이 공부 경계를 아는 사람이 흔치는 않지만 혼자 꿍꿍 앓지 말고 가까운 도반을 비롯하여 큰 스님들께 물었어야했다.
이 경계에서는 절대로 선방에서는 좌선 정진할 수가 없다.
자존심 하나로 높은 자긍심을 가지고 선방에만 계속 다니다가 선방에 앉지 못하니 얼마나 상심했을까?!
그 당시 스님의 공부는 일취월장하여 높은 단계에 왔음에도 정작 자신은 그 공부법을 몰랐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듯이 아까운 스님을 놓쳤다.
정중에서 일어나 동중선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의단疑團 때문이다.
화두의심을 간절하게 들다보면 화두를 들지 않아도 저절로 순일하게 들어지는 의정疑情이 생기게 되고 이 의정은 점점 의심덩어리로 단단하게 뭉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의단이다.
이때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오로지 의심 덩어리 하나만 존재하는데 이것을 의단독로疑團獨露라고 한다.
의단독로란 고도로 집중된 의심체인데,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닌 고로 몸이 고도로 집중된 정신에 상응相應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바로 단단하게 뭉친 화두의 기운이며 이것을 진리의 기틀 이라고 해서 이기理機 라고 한다.
이 기운은 정중에 있을 때는 순풍에 돛단배같이 미끄러져 순일하게 정진이 잘되어 보물과 같이 소중한 것이었지만 동중선에(경우에 따라서는 와선 말미에) 가서는 순일하게 미끄러 나가던 화두의 기운이 멈추더니 서서히 딱딱하게 뭉쳐서 정진이 순조롭게 나가지 못하게 가로막는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讐 와 같은 존재로 변해버린다.
의단을 타파 한다는 것은 똘똘뭉친 의심덩어리를 부순다는 의미이지만 달리 말한다면 단단하게 뭉친 화두의 기운을 깨뜨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어려움은 손가락을 비벼서 단단한 바위에 구멍을 내기보다 더 힘들다고 하나 동중 그리고 요중에서 은산철벽을 투과하여 확철대오를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요중선은 무엇인가?
좌복에 앉아서 좌선할 때는 잡념 망상이 없이 잘 되는 것 같아도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실생활實生活에 접接 하게 되면 공부가 어디 갔는지 십만 팔천 리로 도망간다.
역경계에 맞닥뜨리게 되면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화를 낸다던가 위급한 상황이 오면 정신을 못 차리고 당황하게 된다. 이럴 때는 빨리 정신을 차리어 이전 정신으로 회복하도록 애를 써야 되고 그래도 마음이 잡히지 않으면 우선적으로 끓어오르는 마음을 참게 되면 잠시 후면 마음이 서서히 평온해 진다.
그러나 순경계가 나타날 때는 자신의 마음과 딱 계합契合되어서 기쁠 수가 말할 수가 없다. 이때는 옳고 그름의 판단력이 상실되기 때문에 그 경계에 헤어나지 못하고 매몰埋沒 될 수가 있어 역경계보다는 순경계를 극복하기가 더 힘든 것이다.
역경계이던 순경계이던 항상 집착하는 마음이 없이 여여如如해야된다.
이럴 때 마음이 동요됨 없이 한 결같은 마음이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 요중선이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이다.
온실 속의 화초는 온실 속에 있을 때는 평화롭게 잘 자라지만 온실 밖으로 내놓으면 강한 햇볕과 세찬 비바람에 의해서 이내 꺾이고 만다.
정중에서 정진할 때는 잡념 망상만 없애면 되지만 요중은 탐嗿 진瞋 치癡 에 그대로 노출되기 때문에 수시로 갖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요중선은 생활선生活禪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모두 나의 공부를 위한 스승이라 생각하고 인욕하면서 수행을 해야 된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면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마음이 끄달리지 말아야한다.
소승 같은 경우는 이 공부처에서 주지住持 소임을 보기 시작했다.
정중공부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번뇌, 즉 질투심, 진애심, 탐착심, 열등심, 아만심, 증오심, 쾌락심, 등을 자극하여 아뢰야식에 묻혀있는 업장들을 밖으로 끄집어내어 소멸시키는 작업이 요중선이다.
정중에서는 절대로 아뢰야식에 깊이 묻혀있는 번뇌들을 꺼낼 수가 없기 때문에 실생활을 하면서 의식의 신경에 자극을 줄 때 일어나는 번뇌를 도구삼아 정진하는 것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요중에서 모진 수모와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으면서 수행을 하다보면 정중공부는 공부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다.
실전實戰에 의한 체험을 통해서 수행을 하다보면 의식은 점점 투명해져서
삼라만상이 모두 공空 함을 체득하게 된다.
자신이 수행자라는 것 까지 잊게 되어 어떤 때는 행동하는 것을 보면 저 사람이 정말 공부하는 수행자인가? 를 의심하는 행동도 거리낌 없이 하게 된다.
정중과 동중을 초월한 것이 요중이다.
동중 공부하는 사람은 머리에 기운이 들러붙어 정중공부를 할 수 없지만 요중공부하는 사람은 이미 머리의 기운이 녹아서 정중공부와 동중공부를 가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모두 할 수 있다.
이 자리만 가도 염라대왕이 엎드려 “읍”한다는 공부경계이다.
육조혜능 선사의 육조단경에 에 나와 있는 무상송의 구절을 소개한다.
佛法在世間(불법제세간) 불법은 세간 가운데 있는 것
不離世間覺(불리세간각) 세간을 떠나서는 깨닫지 못하네
離世覓菩提(이세멱보리) 세간을 떠나서 보리를 찾는다는 것은
恰如求兎角(흡여구토각) 마치 토끼의 뿔을 구함과 같은 것이다.
세속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불자들은 삶의 현장에서 정신을 차리어 일에 집중하게 되면 잡념 망상이 없어지게 된다.
일에 너무 집착하여 정신이 매昧하지 않도록 해야 되는데,
다만 보면 보는 것으로, 다만 들으면 듣는 것으로, 다만 움직이면 움직이는 것으로, 만 하면 바로 그것이 행선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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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스님 귀한 법문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자세한 법문 감사 드립니다. 스님
스님의 귀한법문 읽고나면 항상부끄럽습니다....
읽으면 실천을해야 되는데 늘그자리입니다....
그래도 스님의법문을읽으면 자책을하는점이많네요 ....
스님늘건강하시고 좋은글많이 올려주세요 .성불하십시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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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활을 하면서 의식의 신경에 자극을 줄 때 일어나는 번뇌를 도구삼아 정진하는 것이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요중에서 모진 수모와 산전수전山戰水戰을 겪으면서 수행을 하다".
큰스님 말씀 꼭 저를 가리켜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평생 "나"라하는 걸 밑천삼아 막 살다가 부처님법 알고는 화두수행 함 해보자고 작정하니 희한한 일들이 생기고 그야말로 이리치이고 저리치이고 있습니다.그야말로 널뛰듯이 정신이 산만해지고 머리가 터질듯이 괴롭지만 한편으론 우스우면서도 이공부가 참으로 재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