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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 남호는 항주의 서호에 비해 손색이 없다. 흔들리는 달빛은 호면에 은빛을 뿌리고 출렁출렁 물소리 정답게 들리고 각가지 향초가 서로 엉켜 그윽한 향기를 풍긴다.
김구가 작은 배를 푸른 물에 띄워 놓고 혼자서 조용히 배에 누워 달을 감상한다.
저도 모르게 김구의 두터운 입술로부터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 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저 달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시작은 어디고 끝은 또 어딜까. 김구의 생각은 훨훨 바다를 건너 고향 황해도 해주 백운동 텃골로 날아간다. 삽짝문을 열고 아버지 김순영과 어머니 곽양식, 그리고 귀여운 두 아들 김인과 김신이 뛰어 나온다. 수면 위로 이름 모를 물새가 스쳐 지난다. 김구는 사색에서 깨어났다. 김구는 주먹을 움켜쥐고 속으로 되뇌었다. 사무치는 망국의 치욕을 씻지 않고선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리라. 삼천 리 강산을 되찾기 전에는 이 김구가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
김구는 엄가빈에서 돌아온 후 사회교(砂灰橋)의 엄항섭의 집과 오용교(五龍橋)의 진동손의 집에 번갈아가며 기거하였다. 낮에는 주가보의 배를 타고 남호와 운하 사이를 내왕하면서 양안의 경치를 구경하였다. 배에 누워 멀리 있는 어머니와 두 아들과 도쿄 감옥에 있는 이봉창을 생각하였고 홍구 일본인 감옥에 갇힌 윤봉길을 생각하였다.
선낭 주애보는 묵묵히 노만 저을 뿐 될수록 김구의 사색을 건드리지 않았다.
바람이 분다. 호수물이 배를 핥는다. 사람의 마음도 핥아주는 듯싶다.
주애보는 매일 자기의 배를 타는 이 사나이에 대해 궁금증을 품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의 집이 정말 광동에 있어요?”
비록 두 사람은 언어소통에서 장애가 있었지만 손시늉을 해가면서 간단한 생각은 나눌 수 있었다.
“그래, 광동이 내 고향이지.”
김구는 말하고 스스로도 우스웠다. 그는 평생 광동에 가본 적도 없고 심지어 광동인이 어떻게 생겼는 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 매일 배를 타고 호수에서 노는데 밥은 누가 먹여주나요?”
순박하고 선량한 처녀의 눈에 김구라는 사람은 이상하게, 신비하게 느껴졌다. 일을 하지 않고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까? “그래? 난 늘 산과 놀고 물과 놀지.”
“고향에는 부인이 계신가요? 아주 예쁘시지요?”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안 계셔.”
“어디 갔어요?”
“아주 멀고먼 천당으로 갔어.”
김구는 가슴이 아팠다. 당시 돈만 있어 제때에 치료를 했더라면 최준례는 절대 죽지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사이 배가 어느새 사회교의 엄항섭의 집에 이르렀다.
“주애보, 수고했어. 내일 아침 여덟시에 날 데리러 오게.”
그녀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엄항섭 부부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어찌하여 이렇게 늦었습니까?”
“바람이 세서 좀 늦었구먼.”
“선생님, 선언문은 다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왜실기(屠倭實記)』도 거의 완성됩니다.” [1]
엄항섭은 김구의 즐거운 기분을 눈치차리지 못한 채 원고를 김구에게 넘겨주었다.
김구가 원고를 받아보았다.
한국애국단 선언문
본 단은 실제행동을 존중하고 경솔하게 언론을 발표하지 않는다는 준칙이 있기에 오늘까지 대련사건에 대해 침묵을 지켜왔다. 그러나 교활한 적들이 여론을 살포하여 본 단이 대련에서 폭발사건을 꾸몄으며 그 목적은 국제조사단을 해치는데 있다고 갖은 날조와 무함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들의 무함과 날조를 더는 용인할 수 없어 본 선언을 발표하여 진상을 천명하는 바다.
본 단의 이봉창 의사가 도쿄에서 천황을 저격했을 때 적들은 본 단의 활동에 중국의 사회배경이 있다고 날조하였다. 후에 진상이 밝혀졌어야 허위적인 선전을 멈추었다. 여기에 대해 본 단은 더 깊은 추구를 하지 않는다.
본 단의 윤봉길 의사가 동년 4월 29일 홍구공원에서 왜놈군대의 요원을 사살했을 때 적들은 또 프랑스조계의 모든 한인들이 이 사건에 참여하였다고 날조하면서 한인주택에 대해 대수색을 하였고 프랑스조계도 3년간의 우의를 무시하고 한인들을 학대하였다. 일본인들은 또 책임을 중국당국에 떠밀고 외교쟁단을 초래했다. 이러한 행위는 일본인들이 수십 년간 일관적으로 해온 아주 악렬한 수단이다. 본 단은 엄준한 형세에 직면한 오늘 더는 침묵을 지킬 수 없다.
본 단의 단장 김구 선생은 5월 30일 『홍구공원 폭발사건』 이란 글을 발표하여 사실의 진상을 밝혔다. 그 때에야 일본인들은 부득불 11명의 한국인들을 석방하였다. 하지만 혁명의 수령 안창호 선생은 여전히 서울감옥에 갇혀 있다. 사실 전번의 폭발사건은 안창호 선생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으며 중국당국과는 더구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본 단의 단원 최흥식(崔興植), 류상근(柳相根) 등 네 명의 의사가 본년 5월 24일에 불행히도 대련에서 체포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인들은 또 새로운 요언을 살포하였다. 그들은 김구가 영도하는 한인 애국단이 도쿄와 상해에서 일으킨 폭발사건의 주요 의도는 조선총독부와 만주군정요인들을 죽이려는데 있었지만 임시로 원 계획을 변경하여 국제조사단을 습격함으로 일본이 국제 상에서 곤경에 빠지게 하고 이 기회에 한국의 독립을 시도했다고 날조했다. 또한 애국단이 중국정부와 민간항일단체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얻었다고 날조했다.
우리 애국단은 일본인들의 간활한 음모를 파탄시키기 위해 아래와 같이 반박한다.
1. 왜구들은 본 단을 호전단(好戰團)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갈망하며 절대 침략전쟁을 옹호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부단히 폭력행동을 취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기가 없고 군대가 없기 때문이다. 즉 부득이한 상황에서 선택한 유일한 수단이 폭력이다. 우리는 일본인들에게 엄정히 경고한다. 한국이 독립하기 전에 우리는 절대로 이러한 폭력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 본 단은 일본침략자들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국가들과 벗으로 지내며 절대로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홍구공원사건이 이를 절대적으로 증명해준다.
3. 최, 류 두 의사의 사명은 관동군 사령관 호조시게루(本庄繁) 대장(大將)과 남한철도주식회사 총재 나아타고우사이(內田康哉), 관동청 청장 야마오키만(山罔萬) 등을 죽이려는데 있었지 국제연맹조사단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었다.
4. 우리 민족은 신성한 민족이며 본 단은 순결한 애국단체다. 우리는 오직 독립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싸울 뿐 왜구들처럼 비열한 수단으로 국제쟁단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5. 본 단은 철저한 구국단체로서 자립정신으로 투쟁을 견지하며 절대로 그 어떤 외국인이나 외국정부에 의거하지 않는다. 왜구들은 사실을 날조하고 있는데 그 목적은 자기들의 죄악을 덮어 감추려는데 있다. 일본은 국제연맹조사단의 사건에서 기편과 위협과 공갈의 수단을 쓰면서 그 죄를 본 단에 전가시키려 하고 있다.
한 가지 사례를 증거로 내놓는다. 『동아일보』7월 18일의 뉴스다.
도쿄 17일 발: 경시청 특고과는 며칠 동안 아주 긴장하였다. 15일 두 시 다카사키(高崎) 출생의 청년 야나키타케하누(柳健治, 27세)를 체포, 구금하였다. 류(柳)는 4일 국제연맹조사단을 암살하려고 권총을 휴대하고 도쿄에 잠입하였다. 유는 본래 우익단체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타케하누는 일본인이지 한국인이 아니다. 이상의 글로 전 세계인들과 국제조사단을 향해 일본의 죄행을 폭로하는 바다. 세인들이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긴박성을 인식하기 바란다. 우리는 자유와 독립을 사랑하듯이 평화를 사랑한다. 가령 조사단이 일본의 음모를 간파하지 못한다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대한민국 14년 8월 18일
한인애국단[2]
김구는 선언문을 다 보고 말했다.
“아주 훌륭하오. 왜놈들의 음모를 폭로하고 사실의 진상을 세계 각국 인민들에게 알려야 하오. 우리들의 반일투쟁의 정당성을 세인들이 알고 그들로부터 동정과 지지를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오. 참 수고했소.”
“내일 제가 이 글을 꼭 신문사에 보내겠습니다.”
엄항섭이 말하였다. 두 사람이 이야기로 달아오르는 사이 어느덧 날이 희붐히 밝아왔다.
[주]
[1] 김구는 모든 글을 중문으로 쓴다. 『도왜실기(屠倭實記)』도 김구가 중문으로 쓴 것을 엄항섭이 번역하였다.
[2] 상해 『신보』1933년 8월 22일.
선낭 주애보와
『광동상인』의 佳緣
어느 날, 김구는 심심하여 혼자 동문 밖으로 갔다. 큰 길 옆에 있는 광장에서 군인들이 한창 훈련을 하고 있었다. 김구도 늘 군대를 건립하려고 생각하던 차라 발걸음이 저도 모르게 훈련장으로 돌려졌다. 한 군관이 김구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이 군관은 현상금을 내걸고 김구를 붙잡으라는 포고문을 본 적이 있었던 것이다. 군관이 김구 앞으로 다가왔다.
“당신 어디 사람이요?”
“나는 광동 사람이요.”
김구의 대답이 아주 서툴렀다.
“뭐 광동 사람이라고? 내가 광동 사람인데? 광동 사람 어투가 이렇지 않아.”
김구는 할 말이 없었다. 그 군관이 큰소리로 명령했다.
“따라 왓.”
군관이 김구를 보안단부로 끌고 가서 심문하였다. 문제의 심각함을 의식한 김구는 필을 달라고 하여 중문으로 “나는 중국인이 아니다. 당신들의 단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썼다. 그 군관이 김구가 쓴 글을 가지고 나갔다. 잠시 후 부 단장이 나타났다. 김구는 붓을 달라고 하여 아래와 같이 썼다.
“나는 한국인이다. 상해 홍구 작탄사건이 있은 후, 상해에서 있을 수 없어 저봉장 선생의 소개로 잠시 오용교 진동손의 집에 머물러 있다. 성은 장 씨이고 이름은 진구다.”
부 단장이 즉시 단장에게 보고하였다. 단장은 저봉장이 보통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즉시 저봉장과 진동손한테 사람을 파견하여 허실을 알아보게 하였다. 저봉장이 조사하러 온 군관을 한바탕 꾸짖고는 진동손이 보안단에 가 보증을 서고 김구를 데려오게 하였던 것이다.
저봉장은 김구가 한국의 수령인 데다 국민당 상층인물들이 자기 부친에게 김구를 잘 돌보아 달라는 부탁을 한 줄 알기에 김구의 안전을 몹시 중시하였다.
그는 김구를 자기 집에 모셔다 놓고 나무람조로 말했다.
“김 선생, 당신은 언어소통이 안 되기에 혼자서 다니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가친께서 늘 선생의 안전을 염려하시니 주의하셔야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재수 없이 면바로 광동 사람을 만났거든요.”
“가정이 있으면 의심을 덜 받을 수 있습니다. 당신한테는 돌볼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저의 친구 중에 중학교 교원이 있습니다. 과부고 30세지요. 아주 괜찮은 여자입니다. 선생께서 만나보시겠다면 제가 주선하지요.”
김구가 한참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 선생의 생각이 좋긴 합니다만 인테리 여성과 함께 있으면 신분이 더 쉽게 탄로되니 차라리 무식한 뱃사공 주애보에게 몸을 의탁하면 더 좋을 듯합니다.”
“주애보는 선낭이고 그의 부모는 농사꾼입니다. 될 수 있지요. 하지만 일단 무슨 일이 있으면 인차 저와 연락을 해야 합니다.”[1]
이튿날, 주애보의 배를 탔을 때 김구가 주동적으로 말을 걸었다.
“애보, 당신이 어느 날인가 내 부인의 상황을 물었지?”
“그래요.”
“그는 8년 전에 세상을 떴네. 난 지금부터 당신의 배에서 살려구 하네. 매달 15위안 씩 드리면 어떨까?”
주애보가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끄덕이었다.
김구는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이후 누가 물으면 내가 당신의 남편이구 광동 사람이구 성은 장 씨고 장사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게.”
주애보가 노래를 불렀다.
오빠는 어디서 와 어디로 가나요
이 여동생은 어디에 가
오빠를 찾아야 하나요
그때로부터 주애보의 노랫소리는 더욱 명랑해졌다. 주애보는 이 『광동상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어찌 알았으랴. 그녀가 사랑하고 있는 이 『광동사나이』 가 바로 일본 외무성과 조선총독부와 일본군 상해사령부에서 현상금 60만 원을 내걸고 체포하려는 대인물인 줄을.
김구와 주애보의 한 단락의 사랑 에피소드를 두고 유자명 선생이 이렇게 회억하고 있다.
……“남녀 지간의 결합이 모두 애정 때문인 것만은 아니며 애정이 있다 하여 모두 결합하는 것도 아니다. 백범 선생과 주애보의 동거에서 처음에 주애보는 생계를 위해 매달 15위안이라는 돈 때문에 결합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생활은 단순한 목적을 초월하였다. 내가 매번 백범 선생의 집에 가보면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하여 참으로 한 쌍의 훌륭한 부부였다. 그리고 백범 선생과 주애보가 동거한 후부터 그들의 정신상태가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았다. 그래서 석오 선생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백범이 전에 비해 많이 젊어진 것 같구려.’ ”[2]
후에 항전이 시작되자 임시정부가 남경으로 전이하였다. 김구는 형세가 좋아진 후에 주애보에게 돈 100원을 주어 가흥에 있는 친정으로 보냈다. 그러나 항전이 장장 8년이 걸려 그 사이 김구는 한 번도 주애보한테 가보지 못하였다. 세월은 유연(有緣)하지만 전쟁은 무정하다. 결국 그 때의 헤어짐이 영별이 되었던 것이다. 백범 선생은 중경에 있을 때 늘 주애보를 자주 외우군 했다.
근년에 김구의 아들 김신 장군이 혹여나 주애보의 후손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가흥을 여러 번 다녀왔지만 번마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갔다고 한다.[3]
위대한 한국의 혁명자와 한 평범한 중국 여인 사이에 맺어진 한 단락의 아름다운 사랑의 에피소드는 아리랑의 이야기처럼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에 아로새겨질 것이다.
[주]
[1]『백범일지』266쪽.
[2] 유자명『나의 회억』.
[3] 석원화『김구 선생과 중국』,『한국독립운동과 중국과의 관계』265쪽.
김구와 장개석의
첫 회견
1932부터 장개석은 정력을 중국공산당의 홍색근거지를 토벌하는데 집중함으로 객관적으로 중국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도와주었다. 1932년, 일본정부는 정식으로『만주국』을 승인하고『일만협의서』[1]에 서명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은 전 세계를 향해 중국동북이 자기네들의 합법적인 식민지임을 선포하였다. 1933년 1월 3일, 일본이 산해관(山海關)을 점령하였고 2월 25일에는 열하성(熱河省, 오늘의 하북성)을 침범하였다. 국민당 정부가 스스로 열하성을 포기하여 단 7일 만에 일군 100명이 총 한 발 쏘지 않고 열하성의 성회 승덕(承德)을 점령하였다. 고금 이래의 전쟁사에서 보기 드문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어 일군은 계속하여 장성의 각 요새를 공격하면서 단숨에 화북을 삼키려 하였다. 장성의 요새를 지키는 국민당 군대는 극히 간고한 조건에서 싸웠다. 후속부대의 지원이 없는데다가 무기 장비까지 낡아 일군의 비행기, 대포, 탱크의 진공을 막아낼 수 없었다. 1933년 4월 11일, 일군은 장성구(長成口), 희봉구(喜峰口)를 돌파하고 통주(通州)에 박근하여 평진(平津)을 위협하였다.
4월 12일, 화북의 형세가 위급해지자 그제야 당황해난 장개석이 남창에서 『군사정리위원회(軍事整理委員會)』를 소집하고 일군의 침략에 저항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장개석은 이렇게 말하였다. “장기적으로 부단히 저항하여야 한다. 예견컨대 3-5년 간 저항하면 세계에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이고 적의 국내에도 새로운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국가와 민족도 살아남을 희망이 있을 것이다.”[2] 장개석은 “살아남을 희망”을 국제형세의 변화와 적국의 국내 형세의 변화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부저항으로부터 저항에로 나아간 것은 그래도 하나의 진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구는 중일전쟁의 형세와 발전을 면밀히 주시하고 장개석의 항일태도의 변화에 큰 중시를 돌렸다. 그는 장개석과 담판할 기회가 성숙되었다고 보고 박찬익을 파견하여 담판을 진척시켰다.
박찬익은 전에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김규식 등 독립지사들과 함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하였고 후에 또 신규식, 조소앙 그리고 국민당의 원로들인 당계효(唐繼垚), 진기미, 송교인 등과 함께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가담하기도 했다. 1919년 4월 대한임시정부가 출범한 후 박찬익은 호법정부(駐악護法政府)주재 대표로 파견되어 경상적으로 손중산 및 기타 국민당 원로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여 국민당 중앙당부에서 일하였다. 이런 원인으로 박찬익은 중국국민당정부에서 위신이 높았다.
박찬익은 먼저 국민당 조직부장 겸 강소성 성장인 진과부를 찾아가 김구가 장개석과 회담을 갖고 싶다는 뜻을 전하였다.
국민당의 원로인 진과부의 삼촌 진기미와 장개석은 결의형제였다. 이런 관계므로 장개석은 진과부를 아주 신임하였다. 그도 숙부처럼 한국애국자들과의 우의를 아주 중시했다.
진과부가 자기의 저택에서 박찬익을 접대했다. 박찬익이 진과부보다 7살 위기에 박찬익을 형이라 불렀다.
“근간에 사무가 너무 복잡해서 박 형을 만날 시간도 없구먼요. 요새는 무슨 일로 바삐 보내시는가요.”
진과부가 친절하게 물었다.
“김구 선생을 보좌하느라 좀 바쁩니다. 김구 선생이 오늘 특히 나를 보내어 진 부장과 장 위원장께 안부를 전하게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구 선생은 폭발사건을 계획하고 시라카와 대장을 사살한 진정 영웅이 맞지요?”
“그렇습니다. 김구 선생은 중일전쟁의 형세에 대해 아주 관심이 큽니다. 현재 일본 놈들이 열하성을 점령하고 장성을 향해 진공하고 있지 않습니까?…… 김구 선생이 장 위원장을 만나 한중이 연합하여 항일할 대사를 토의하고자 합니다.”
“그렇지요. 일본 놈들이 갈수록 창궐해지고 있습니다. 장 위원장이 이미 남창회의에서 장기적으로 일본에 저항할 방침을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그는 4.29 홍구공원사건에 대해서도 관심이 큽니다. 제가 꼭 장 위원장께 김구 선생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진과부가 인차 장개석에게 보고를 올렸다.
보고를 받은 장개석이 이렇게 물었다.
“현재 대한임시정부의 상황은 도대체 어떠하오?”
진과부가 대답했다.
“세 가지 문제점이 있습니다. 첫째로 경제적 어려움이고 둘째는 각 파 지간의 파벌싸움이고 셋째는 한국독립문제에서 통일된 견해가 없는 것입니다.”
장개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나라에 수령이 없어서는 안 되지. 수령이 있어야만 각 파의 역량을 집중하여 통일된 중앙정부를 세울 수 있소.”
장개석의 이 말은 한국임시정부를 말하면서 또 자기를 말한 것이기도 하였다.
장개석은 회담 날짜를 5월 4일로 정하고 회담 지점을 남경군관학교에 있는 자기의 저택으로 정하였다.
김구가 박찬익, 엄항섭, 안공근을 데리고 가흥으로부터 남경으로 왔다. 당시 박찬익과 엄항섭, 안공근은 임시정부의 정보사업과 중국에 대한 외교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튿날 김구가 박찬익의 배동 하에 진과부의 차에 앉아 장개석의 저택으로 갔다.
장개석은 1887년 절강성 봉화(奉化)에서 태어났다. 학명이 중정(中正)이고 자가 개석이다. 1907년에 그는 보정육군학당 속성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에 가 군사를 공부했으며 1910년에 일본 진무(振武)학교를 졸업하고 동맹회의에 가입했다. 1911년에는 신해혁명 후 귀국하여 호군도독 진기미의 수하에서 단장을 맡았으며 후에 중화혁명당에 가입하여 호국전쟁에 참가하였고 1923년에 손중산이 그를 대원수부 본영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1924년에 황포군관학교 교장, 광주경비사령, 국민혁명군 제1군 군장을 맡았고, 1926년에는 『중산함사건』과 『정리당무안』(整理黨務案) 을 조작하여 공산당을 배척하였다. 이어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 상무주석, 조직부장, 국민정부군사귀원회 주석, 국민혁명군 총사령 직무에 올랐다. 1927년에 상해에서 4.12반혁명정변을 일으켜 국공합작이 파열되었고 남경정부가 성립된 후 군사위원회 위원장, 중앙정치회의 주석, 행정원 원장, 정부 주석 겸 육해공 3군 사령이 되었다. 9.18사변 후 일본의 무력침공에 대해 부저항정책을 취하고 반공내전을 견지하였다. 1936년 서안사변 후, 핍박에 못 이겨 제2차 국공합작을 접수하고 공동이 항일하였다. 항일전쟁시기 국민당총재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반공고조를 일으켰다. 1943년 국민당정부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1946년에 해방구를 진공하지만 실패하고 1949년에 대만으로 가 총통으로 국민당총재로 있다가 1975년에 사망하였다. 장개석은 한국임시정부에 대해 별로 관심하지 않다가 윤봉길의 홍구폭탄사건이 있은 후부터 관심을 가지고 한국임시정부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다부산자 차림의 장개석이 김구를 친절하게 맞이하였다.
인사가 끝나자 장개석이 아주 패기 어린 어조로 말했다.
“동방 각 민족은 손중산의 삼민주의에 부합되는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것이 비교적 좋다고 보지요.”
김구가 그 말에 동의를 표시하였다.
“일본은 마수를 뻗치고 시시각각 중국을 삼키려 하고 있습니다. 만약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우리 두 사람 붓으로 이야기 나누면 어떨까요?”
김구가 이렇게 제의하자 장개석도 좋다고 했다. 진과부와 박찬익이 밖으로 나가자 장개석이 친히 붓과 베루돌을 내놓았다.
김구가 이렇게 썼다.
“선생께서 백만 원을 주시면 2년 내에 일본, 조선, 만주 등 지에서 폭란을 일으켜 일본침략자의 뒷길을 끊겠습니다. 여기에 대해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개석이 아래와 같이 답하였다.
“상세한 계획을 세우십시오.” 김구가 종이에 썼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3]
이튿날 김구가 장개석에게 간단한 계획서를 보냈다. 김구에 대한 장개석의 인상이 좋았고 후에 둘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 날 밤 진과부는 자신의 저택에서 김구, 안공근, 엄항섭, 박찬익 등을 초대하였다. 술이 몇 순배 돈 다음 진과부가 장개석의 의사를 전하였다.
“테로 수단으로 천황을 죽이면 또 다른 천황이 나올 것이고 대장을 죽이면 또 다른 대장이 나올 것인즉 가장 바람직한 것은 장래의 싸움에 대처할 군관들을 배양하는 것입니다.”
김구가 듣고 기뻐서 말했다.
“그것이 제가 바랐던 것입니다. 단지 미안하여 감히 부탁할 수 없었으나 사실은 그 것이 내가 진심으로 바라는 바입니다. 문제는 장소와 재력입니다.”[4]
후에 쌍방은 협상을 통해 하남성 낙양(洛陽)군관학교에 한국 군사기지를 두기로 했고 경비는 모두 중국국민당정부에서 지불하기로 했다.
장개석과 김구의 담화로부터 알 수 있는 바 장개석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시종 중시하고 관심해왔다. 장개석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한국임시정부가 국제사회의 승인을 받게 하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한 것은 한국의 독립이 동아시아의 평화와 중국의 안녕에 이롭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장개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전의 한국독립문제는 원동의 백년대계다…… 완전한 중국을 회복하자면 한국이 반드시 독립하여야 한다.”
하지만 힘이 약한 국민당 정부는 미국, 영국,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등 강대국을 이길 수 없었는바 결국은 한국의 독립을 승인한다는 자신의 낙언을 실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김구는 장개석을 비롯해 국민당 정부가 한국임시정부를 도와준데 대해 언제나 감사하게 생각하였다.
[주]
[1] 『일만의 정서』: 1932년 9월 15일, 일본이 『만주국』 성립의 제일보로 동복군벌들과 짜고 만든 협정. 협정이 체결된 후 얼마 안 되어 『만주국성립선언』을 발표했고 일본이 제일 처음으로 『만주국』을 승인하였다.
[2] 호춘혜,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대만 중화민국사료연구중심 1976년, 제318쪽.
[3] 석원화, 『김구선생과 중국』,『한국독립운동과 중국과의 관계』 265쪽.
[4] 석원화, 『김구선생과 중국』, 『한국독립운동과 중국관의 관계』 265쪽.
낙양군관학교에서
한인을 양성
1932년 이래 장개석은 노산(盧山)에 있으면서 무한, 남창, 낙양 등 지를 내왕하며 친히 공산당 토벌작전을 지휘하였다. 이번에 남경에 온 것은 장성을 진공하는 일본군과 정전협정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 5월 3일, 장개석은 남경 행정원 『북평주재정무정리위원회』를 설립하고 친일파로 악명이 자자한 황부(黃郛)를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교섭문제를 책임지게 하였다.
장성에서 항전이 시작되자 장개석은 소극적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한편 적극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재정부장 송자문(松子文)[1], 외교부장 라문간(羅文干)[2]을 파견하여 영, 미가 나서서 정전을 조율하게 함으로 굴욕적인 『송호정전(淞滹停戰)』[3] 을 다시 연출하려고 하였던 것이었다.
그러나 영, 미는 화북에서의 이익이 많지 않으므로 상해에서처럼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단지 일본이 중일조약을 유지하며 진황도 부근에서 도발사건을 일으키지 말 것만 촉구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장개석은 부득불 더러운 명성이 자자한 친일파 황부를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황 씨가 정전협정에 발 벗고 나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시기에 장개석이 남경에서 전기적인 인물인 김구를 회견하였다. 과연 백문불여일견이라고 김구의 솔직하고 굴강한 의지가 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거기다 김구가 자기의 건의를 완전히 접수하니 더욱 기뻤다. 중화민국정부 수령의 신분으로 국제적인 인물의 존경을 받는 것이 그로서는 비상히 중요하였다.
9월 초, 진과부가 장개석에게 장김회담(장개석과 김구의 회담)내용의 실행 정황에 대하여 회보하였다.
장개석이 보고를 들은 후 말했다.
“대한 망명정부의 처지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이해하여야 하오. 김구 선생은 믿을만한 친구요. 한국인들이 일본과 싸우려고 조급하게 서두르는데 대해서도 이해해 주어야 하오. 나라마저 없으니 왜 조급하지 않겠소? 그들이 나의 말을 따른다면 일이 순조로이 풀릴 것이요. 그들이 군관학교를 꾸리는 문제는 어떻게 됐소? 치중이 문제를 다그치고 있소?”
국민당 육군군관학교는 교장이 장개석이고 장치중이 교육부장이다. 한국인 학생들의 낙양군관학교 입적문제는 장치중(張治中)이 책임지고 있었다.
장치중은 장개석의 명령을 받은 후 김구를 회견하고 한국인 학생들의 입학과 훈련에 관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안배하였다.
낙양군관학교는 국민당중앙 육군군관학교의 분교고 교장은 축소주(祝紹周[4])다. 장치중은 한국인 학생들의 입학문제를 위해 친히 낙양으로 갔다. 낙양군관학교 제4대대는 주요하게 동북의 군관들을 배양하는데 입학하는 중국인 청년들은 반드시 공립 혹은 사립고중을 졸업한 사람이여야 했다. 그러나 한국 학생들은 조건이 특수하여 문화정도를 고려하지 않았다. 한국반은 보통반과 특별반으로 나누었고 보통반의 학원들은 일정한 문화정도를 구비하고 있었으며 중국인 학생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고 학제는 3년이었다. 특별반은 예비과에 속하는 것으로 신체가 합격되면 입학할 수 있었고 학제는 1년이었다. 한국 반 학원들은 2중대와 4중대 모두 두 개 중대로 구성되었고 낙양군교의 17대대에 편입되었다. 모든 교육경비는 중국정부에서 부담하였는데 한국학생들을 배양하는 교관들은 임시정부에서 책임지고 배치하였다. 장치중은 일을 아주 참답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찬익을 데리고 낙양분교에 가 축소주를 만나보고 장개석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한국인 학생들이 거리로 나가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교학, 훈련, 생활 등을 한국인 총교관이 책임지게 함으로써 그들에게 충분한 자유권을 주었다.
박찬익은 낙양에서 돌아온 후 김구에게 장치중이 한국인 학생들을 안치한 정황을 일일이 회보하였다.
이에 김구는 아주 만족해하였다.
“군교의 지점, 시설, 경비는 아무 문제 없게 되었소. 이젠 우리가 어떻게 꾸리는가에 달렸소. 옛 사람들이 이르되 천군만마의 위력은 훌륭한 장군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지. 우리는 응당 좋은 교관을 모셔야 하고 학원선발에서도 신중해야겠소.”
박찬익이 건의했다.
“총교관은 첫째로 동북독립군 중에서 선발할 수 있고, 둘째로 황포출신 중에서 선발할 수 있습니다. 동북독립군 중에서 선발하면 그들이 실전경험이 있어 좋고, 황포출신 중에서 선발하면 그들이 중국의 장령들과 인맥이 있어 유리합니다. 황포출신의 대부분이 중국군대에서 일을 보고 있습니다. 이들 중 중국공산당에 간 사람도 있고 또 일부는 김원봉의 의열단에도 있습니다.”
“내 생각엔 총 교관으로는 만주의 한국독립군 사령 이청천(李靑天) 장군이 좋을 듯하오. 그는 동경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동북 통화 신흥무관학교에서 교관을 맡았으며 일본 놈들과 수많은 전투를 하였소. 특히 9.18사변 후부터 독립군 사령이 되었는데 한 마디로 개인 조건이 상당히 우수하오.”
“듣자니 청산리 전투에 참가했던 이범석(李范奭)도 최근에 상해에 왔다고 합니다.”
“이범석은 운남 강무당 졸업생이요. 9.18사변 후, 마점산(馬占山) 부대에서 작전과장을 맡은 사람인데 역시 이상적인 후보요.”
총 교관 인선은 이렇게 초보적으로 결정되었다. 김구는 사람들을 상해, 북경, 천진, 동북 등 지로 파견하여 학원들을 모집하였고 이청천에게 연락하여 남경으로 오게 하였다.
이청천은 당시 동북의 중동철로 연선에서 일군과 싸우고 있었다. 1930년 11월 24일, 한민족연합회(신민회정편 후의 조직) 위원장 김좌진이 일본 밀탐(혹자는 공산당인에게 피살되었다고도 함)에게 살해된 후, 이청천과 홍진(洪震)은 한민족연합회와 연합하여 북만에서 한국독립당을 내오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사령관에 이청천, 부사령에 남대관(南大觀), 참모장에 이장녕(李章寧)이었다. 이들은 중동선에서 26개의 군구를 건립하고 일제와의 싸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1933년 10월, 이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군은 선후로 아성현전투(阿城縣戰鬪), 쌍성보전투(雙城堡戰鬪), 서란현전투(舒蘭縣戰鬪), 경박호전투(鏡泊湖戰鬪), 사도하자전투(四道河子戰鬪), 동경성전투(東京城戰鬪), 대전자(大甸子)전투를 진행했다. 특히 대전자전투에서 이청천과 오의성의 부대가 연합하여 일군의 한 개 연대를 섬멸하여 중국을 진동했다. 10월 10일, 이청천은 또 왕청과 녕안에서 일군과 싸웠다. 그러나 오의성이 돌연 배반하여 이청천을 습격했으며 이청천을 가두었다. 두 부대 사이에 전리품을 놓고 분쟁이 생겼던 것이다. 다행히도 주보중(周保中)이 출면하여 이청천이 풀려나왔다. 이번 일로 한국독립군은 큰 손실을 입었다. 이청천은 이규보(李奎報)와 오광선(吳光鮮)을 남경에 파견하여 임시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오광선, 이규보 등 3인은 남경에 온 후 먼저 박찬익을 찾았다. 박찬익은 이 기회에 김구가 낙양육군군관학교에서 한국인 군관들을 배양하려 한다는 소식과 이청천을 총교관으로 초빙한다는 결정을 전했다. 이규보와 오광선은 전적으로 찬성하였다. 그 후, 김구는 오광선과 이규보를 만나보고 그들에게 중일전쟁의 형세와 한국임시정부의 정황, 그리고 장개석과의 회담내용을 소개하였다. 김구는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였다. “만주독립군의 전략으로부터 보면 주력이 남방으로 전이하여 새로운 독립군을 건립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당신들에게 4천 원을 드리니 이청천 선생께 전해주시오. 그더러 속히 낙양군교에 와서 총 교관에 임하라고 일러주시오.”
오광선과 이규보는 경비를 가지고 동북으로 가 이청천에게 보고 들은 정황과 김구의 건의를 회보하였다. 1933년 11월에 이청천이 김구의 건의에 동의하였다. 이청천은 오광선, 이복원, 공진원, 김창환 등 독립군의 간부와 39명의 끌끌한 청년들을 이끌고 남경으로 왔다.
이청천이 남경에 온 이튿날 김구가 이청천을 만났다.
동북에서 15년 간 무장투쟁을 견지하면서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은 독립군 장령을 보자 김구는 격동되었다.
“장군은 만주에 망명하여 광야에서 15년 싸웠고 나는 상해, 가흥, 남경 등 지에서 15년을 보내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끝내 만나게 되었구먼요.”
이청천은 군인출신이라 직방배기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의 목표는 하나, 조국의 해방과 통일입니다. 선생께서 한국인 군관들을 배양하려 한다니 저는 두 손 들어 환영입니다.”
이청천은 김구에게 9.18사변 이후 만주의 항일전쟁의 형세와 한국교포들의 생활을 소개하였다.
이청천은 전에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없어 감사를 드렸다.
“저는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가 당시 사변 때, 극히 어려웠던 저에게 주었던 지지와 성원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청천이 말하는 당시 사변이란 바로 1921년 소비에트 러시아 서부 시베리아에서 발생한 사변을 가리켰다. 1920년 일본 놈들은 중국 동북지구의 한국독립군에 대해 피비린 토벌을 감행하였다. 한국독립군들은 핍박에 못 이겨 소비에트 러시아 자유시 지구로 전이하여 새로이 정돈하였다. 당시 서 시베리아의 부분적 지구를 점령한 일본은 소비에트 러시아에 항의를 제출하였다. 러시아는 일본과의 외교문제를 고려하여 한인 독립군에 향해 갑자기 무장진압을 하였다. 진압에서 한인 독립군 500여 명이 희생되고 917명이 체포되었다. 이 숫자는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희생된 숫자나 체포된 숫자보다 훨씬 더 많았다. 사실상 한국독립사에서 가장 큰 비극이 자유시사변이다. 사변이 발생하던 그 날 우수리강이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5]
소련군에 체포된 고려 의용군 사령 이청천은 사형에 언도되었다. 이청천은 오광선을 비밀리에 상해로 파견하여 김구에게 정황을 알렸고, 김구는 즉시 한국임시정부와 각 단체의 명의로 항의문을 작성하여 당시 모스크바주재 한국임시정부 대표를 통해 레닌에게 항의문을 제출하였다. 이리하여 이청천이 구사일생에서 살아났다.
“그때의 사건은 아주 복잡했습니다. 소련 방면에서는 우리의 독립군에 대해 편견이 있었고 우리 내부에도 심한 분열과 대립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독립한 후에는 절대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말아야지요. 우리는 1919년부터 15년 간 싸웠습니다. 15년 간의 투쟁은 우리들에게 반드시 자기의 군대가 있어야만 일본을 이길 수 있다는 도리를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중국과 연합하여 항일해야 독립이 빠르다는 사실도 알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중국정부에 한인 군관 반을 꾸릴 것을 건의한 것입니다. 제가 장군을 총 교관으로 추천했으니 부디 사양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백범 선생님, 저를 이토록 믿어주시니 실로 고맙습니다.”
연구를 거쳐 오광선, 이범석, 조경한, 한헌이 교관으로 임명되고 이범석이 학생 대장을 겸하게 했으며 안공근, 안정근, 양동오가 관리인원으로 임명되었다.
두 독립운동 거장의 만남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5년 후 김구가 대한 광복군을 건립했을 때도 김구가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추대하였다.
한 단계의 노력을 거쳐 92명의 학원이 낙양군교에 입학하였고 1934년 2월 초에 정식으로 개학하였다.
군교에서는 한인 군관대를 173대라고 불렀다. 낙양군교의 통일포치에 따라 전술학, 병기학, 통신학, 정치학 등 주요과정을 설치하고 무술, 검술, 사격, 체육 등 보조과도 설치하였다. 173대는 한인의 특수정황에 근거하여 민족교육 40%, 내무과 10%, 전숙과 30% 기타 학과 20%의 비례로 수업을 하였다. 보통반은 또 중국군에세 배우고 있는 포병과, 기병과, 항공과도 진수받았다. 비밀을 지키기 위해 외인들이 없을 때는 한국어로 강의하고 외인들이 있을 때는 중국어로 강의하였다.
그러던 중 1934년 말, 일본첩보기관에서 중국정부가 한국 임시정부를 도와 낙양군관학교에서 한국인 군사인재를 배양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하여 일본주재 중국 총영사 슈마(須魔) 가 중국 외교부에 항의를 제출하였다.
당시 일본과 타협하던 장개석은 한국 망명정부로 하여 일본과 관계가 나빠질 수 없어서 낙양군관학교의 한국인 반을 취소하였다. 이리하여 제1회 한국인 학원들은 1935년 4월 9일에 앞당겨 졸업하였다. 그리고 낙양군교에서의 한국인 군사인재 배양도 영영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그러나 김구는 결코 낙심하지 않았다. 실오리만한 희망이라도 있으면 붙잡고 절대 놓지 않았다.
1934년 12월, 김구는 남경 목장영 고안리(木匠營 高岸里) 1호에서 한국특무대 독립군을 조직하였고 전번에 졸업한 학원들을 골간으로 80명의 대원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하였다.
1935년 2월, 김구는 국민당 정부당국과 교섭하여 남경 동관두(東關頭) 25호에 학생훈련처를 설립하였다. 이런 학생들은 중국 중앙군관학교에 입학했던 예비생으로 첫 기에 30명을 모집하였다. 배우는 과목은 중국어, 대수, 기하 등이었다.
동년 6월, 동관도 한인 훈련처가 일본인에게 발각되어 강소성 고흥현(高興縣) 용지산(龍池山)에 있는 징광사(澄光寺)로 옮겼다. 9월에는 팔보후가(八寶後街) 23호로 옮겼고 두 명의 학원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10월에 다시 남경 난기가(蘭旗街) 8호로 전이했다.
김구가 이렇게 하게 된 것은 국민당 정부에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한인군사인재양성에 대해 지지도 하지 않고 경비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5년 10월에 이르러 훈련처마저 더 꾸릴 수 없어 부득불 정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6]
허나 이렇게 간고하게 배양해 낸 학생들이 훗날 한국광복군의 골간으로 되었다.
[주]
[1] 송자문(松子文1894-1971): 상해 성 요한대학 졸업, 그 후 미국 하버드대학 경제학부 석사학위 획득. 이어 콜롬비아대학 경제학 박사학위 획득하였으며, 1923년 손중산의 영어비서, 국민당 재무 총관, 1924년에 광주은행 총재, 1942년 국민당정부 외교부장, 1945년 연합국대회 중국수석대표를 맡았으며, 동년 6월, 그는 모스크바에 가 스탈린과 회담하였고, 8월에 중소우호조약 체결하였으며, 1947년에 광동성정부 주석, 1971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별세.
[2] 나문간(羅紋間1888年-1941): 자 균임(钧任),번우(番禺)사람. 민국시기 정치가. 영국 캠브리지대학 법학박사 획득함. 선후하여 북경대학 교수, 북양군벌정부 감찰장, 재정부장을 맡았다가 1915년에 사직하고 원세개를 반대함. 그리고 1921년에 북양정부 사법총장, 1922년에 대리원 원장, 1928년에 동북변방사령장관 고문을 맡았고 1931년에 국민당정부 사법행정부장을 맡음. 1932년에 외교부장으로 있다가 1934년에 사직하고 서남연합대학 교수로 임직. 1941년에 학질로 사망.
[3]『송호정전협정』: 1932년 1월 28일 일본이 상해를 공격하여 송호전쟁이 폭발하였다. 국민당 19노군이 용감하게 반격하여 침중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의 항의와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강대국이 압박으로 1932년 5월 5일 일본군과 중국정부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은 중국군민의 항일을 저지하고 일본의 전면적인 공격에 유리함을 가져다준 굴욕적인 협정으로 전 중국인들의 분노를 야기시키기도 했다.
[4] 축소주(祝紹周1893-1976): 자 시남(芾南), 절강성 소흥사람. 1911년에 중국동맹회 가담. 보정육군군관학교 졸업. 상해노동자 기의 진압에 참가, 1932년 송호전역 후 중앙군교 총대장, 제5군 참모장, 보정경비사령. 1933년에 낙양중앙군교 교장을 맡음. 1938년에 악섬감변구(鄂陕甘边区) 경비 총사령 겸 한중경비사령을 맡음. 1948년에 경호항(京沪杭)경비총사령을 맡음. 1949년에 대만에 간 후 『광복대륙설계위원회』위원. 1976년에 대북에서 사망.
[5] 범정걸:『장위원장이 한국혁명간부』를 배양,『전기문학』제30권 제6기.
[6] 홍덕범:『반일명장 홍범도를 회억하여』.
슈마가 푸대접을 받다
1935년 5월 22일, 북평정무정리위원장인 황부와 일본공사가 타협성적인 정전방안을 내놓았다. 이어 구마타키치(熊珷)와 일본 관동군 대표 오카무라 니이지(网村寧次)가 당고에서 회담하였고 5월 31일 쌍방이 일본 측에서 미리 작성한『당고협정』[1]에 서명하였다. 이 협정에 따르면 중국군대는 즉시 연경, 창평, 순의, 통주, 향하, 보지, 로대 이서와 이남으로 철퇴하여야 했고 일체 도전성적인 교란이 금지되어 있었다. 사실상 이 협정은 일본의 열하침략을 합법화한 것으로 된다.
『당고협정』이 체결되자 장개석은 또 내란을 안정시킬 여유를 갖게 되었다. 1933년 6월, 장개석은 남창에서 공산당을 토벌하는 군사회의를 열었다. 장개석은 4차례 토벌에서 실패한 경험을 총화하고 철저하게 봉쇄하는 방침을 제정하였다. 즉 「전략공세, 전술수세 (戰略攻勢,戰術守勢)」의 방침을 제정하였다.
9월, 장개석은 백 만 대군과 200 여 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독일, 이탈리아, 미국 등 3국 군사고문단의 협조를 받으며 공산당의 소비에트구역에 대해 대규모의 토벌을 할 준비를 하고 10월에 총공세를 발동하였다. 홍군은 박고(博古)[2], 이덕(李德)[3]의 착오적인 지휘로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처음에는 진공에서 모험주의 착오를 범했고 후에는 방어에서 보수주의 착오를 범했다. 이덕은 병력을 분산하여 진지를 고수하는 단순방어전술을 채취하였다. “한 치의 땅도 내주지 않으며 적을 대문 밖에서 몰아낸다”는 구호를 내걸고 적들의 보루 앞에서 보루를 쌓으라고 강박적으로 명령하였다. 병력 상에서 홍군은 10만이 채 안 되고 국민당 군대는 50만이 넘었다. 홍군의 장비도 국민당군대에 비길 바가 못 되었다. 결국 홍군은 참패를 당했다. 1933년 10월, 홍군은 부득불 중앙 소비에트를 떠나 장정의 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12월, 홍군은 귀주성 준의(遵義)를 점령하고 준의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었는데 회의에서 모택동의 영도적 지위를 확립했다. 이때로부터 중국혁명은 새로운 시기에 들어서게 되었다.
1934년 초의 어느 날, 김구는 낙양에서 돌아온 안공근으로부터 한인군관반의 정황을 회보받았다.
바로 이 때, 일장기를 꽂은 까만 승용차 한 대가 남경 경비사령부 울안으로 들어섰다.
차에서 3인이 내렸다. 앞에 선 자는 키가 작고 몸이 뚱뚱하였다. 그가 바로 일본주재 남경 총영사인 슈마(須魔)고 뒤에 따르는 자들은 1등 비서와 헌병사령이었다. 그들 일행은 남경경비사령 곡정륜(谷正倫)의 부관의 배동 하에 곡정륜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슈마 총영사님, 무슨 요긴한 일이 있어 친히 출마하셨습니까?”
곡정륜이 침침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슈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사실 큰일은 없소이다. 첫째로는 곡 사령관을 배알하고 둘째로는 한 가지 일을 통고할 것이 있고, 셋째로는 도움을 청하려고 이렇게 왔지요.”
곡정륜이 생각을 굴렸다. 이 자가 결코 선량한 마음을 품고 온 자는 아니니라. 이 교활한 놈이 국민당 정부 외교부를 찾지 않고 구태여 먼저 경비사령부를 찾은 데는 필시 음모가 있을 것이다.
곡종륜은 한 편으로는 경각성을 높이면서 말을 꺼냈다.
“나는 무인이라 외교 사무는 문외한입니다. 당신이 통고하려는 문제가 도대체 어떤 것인가요?”
슈마는 곡정륜의 태도가 강경한 것을 보고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
“믿을만 한 정보에 의하면 흉범 김구가 상해 조계지에서 소주, 항주로 피난했고 귀국정부의 도움으로 낙양군교에서 무슨 한인 군관단이라는 것을 꾸렸다고 합니다. 물론 이 일이 곡 사령과는 무관합니다마는 우리는 적당한 시기에 귀국 외교부에 강렬한 항의를 제출할 예정입니다. 곡 사령께서 부디 일중우의를 중히 여겨 김구를 체포하면 본 영사관에 넘겨주시길 바랍니다.”
곡정륜은 장위원장이 작년 5월, 한국 독립 혁명수령 김구를 회견했고 김구를 보호하라고 지시한 것도 똑똑히 알고 있으며 낙양군관학교에서 한국인 군사인재들을 배양했다는 것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는 이것은 중국정부의 비밀이고 중국정부의 내정에 속하는 일로 일본정부에서 간섭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곡정륜이 머리를 저었다.
“본 사령이 장악한 믿을만 한 정보에 의하면 남경경비구 내에 김구라는 한인이 없습니다. 낙양군교는 중앙육군 군교의 분교로서 한국인이 꾸린 것이 아닙니다. 주권국가가 유학생을 받는 것은 국제법에 부합됩니다. 저의 한국인 친구 한 분이 일본사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당신들 일본 군교에도 한인이 적지 않지 않아요?”
슈마는 곡정륜의 사리정연한 말에 분이 치밀어 올랐으나 겉으로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유학생과 학교를 꾸리는 문제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김구는 반일분자이며 우리 일본이 나포하려는 요범입니다. 곡 사령은 경비사령이 아닙니까? 그래서 특히 통고하는 바니 당신의 도움을 바랍니다.”
“총영사 선생님, 내가 보건대 당신의 지금의 말씀은 본 사령과는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곡 사령, 내가 중국의 옛 성구 하나를 알고 있는데…… 사람은 재물에 죽고 새는 먹이에 죽는다고 했습니다. 우리 제국 외교부와 중국 주재 사령부에선 이미 김구를 생포하면 상금 60만 원을 준다는 포고를 발표했습니다. 만약 사령께서 도와주신다면 60만 원은 곡 사령 것으로 될 게 아닙니까?”
곡정륜이 차갑게 말했다.
“당신들이 다른 사람을 찾아 상을 주십시오. 여봐라, 손님을 배웅하라!”
슈마가 일어섰다.
“잠깐, 알아두시오. 만약 우리가 김구를 체포하면 당신들은 김구가 중국적이라고 말해선 절대 안 됩니다.”
“전령병, 손님을 배웅하라!”
곡정륜이 그 날로 진과부를 찾아가 수마가 찾아왔던 정황을 회보하였다.
진과부가 말했다.(다음 호에 이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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