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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삶을 시처럼 시를 삶처럼 원문보기 글쓴이: 유진
곰이야기
양귀자
그때 곰 한 마리와 범 한 마리가 같은 굴에서 살며 항상 신웅에게 사람이 되게 하여 달라고 빌거늘, 한 번은 신웅이 신령스런 쑥 한 심지와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 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아니하면 곧 사람이 되리라" 하였다.
곰과 범이 이것을 받아서 먹고 기하기 스무 하루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으나 . (삼국유사)
대문들은 틈 하나 없이 잘 닫혀져 있고, 길다란 붉은 담장은 실금 한 줄 없이 튼튼한데, 거기에 투명하게 맑은 봄볕조차 푸져서 눈에 보이는 것마다 기분 좋은 홍조를 내비치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하지만 그 어여쁨을 누리는 이는 없다. 골목은 사람 자취라곤 일부러 씻어낸 듯 말끔하고 정적만이 가득했다. 아까운 봄볕은 홀로 낭비되고 있었다.
이제 막 보고 나온 집의 외양을 찬찬히 둘러보는 시늉을 하고 있으나 정작 그가 눈에 담고 있던 것은 그 깨끗한 봄볕과 넉넉한 정적이었다. 그는 이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집이야 주인이 되면 취향대로 고쳐가며 살 수 있을 테니 별 문제가 없지만 골목을 장식하고 있는 깨끗한 햇볕과 넉넉한 정적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게 아니므로 중요했다. 좋은 집을 구한다는 일은 말하자면 집 바깥의 품위까지도 선택하는 것이었다. 비좁아터진 골목에 와글대는 꼬마와 아낙네들, 그리고 온갖 살림살이 냄새가 악취로 변해 햇볕까지 중독시키는 동네와는 질적으로 다른 품위가 이곳에는 있었다.
그녀가 그나 어떤 식으로 집을 보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늘 그렇듯이 골목에 관한 자신의 정서를 그녀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혹시 설명한다 해도 전혀 다르게 했을 것이다. 햇볕이 낭비되고 있다, 라는 느낌을 꼭 그녀와 공유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자칫 위험하기만 할뿐이므로.
그녀 또한 자신의 마음속을 바로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그가 먼저 무슨 말을 하길 기다렸다. 그녀와 살면서 어려운 점이 있다면 아마도 그가 먼저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는 바로 그 점일지도 몰랐다. 결혼 초 그는 가끔씩 자신이 해야 할 말의 범위를 얼른 정하지 못해 곤혹스럽곤 했다. 범위를 모를 때는 무한대로 가는 게 가장 무난하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시기의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에도 무한대로 갔다.
"괜찮구만."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의 반응을 궁금해 하던 부동산 남자가 반색을 하며 이제 막 보고 온 집의 보충설명을 시작했다.
"앞산 뒷산 다 훤히 보이겠다, 전망으로 치면 이 동네에서 최고 자립니다. 대지가 이백 평인 게 좀 작다 싶으시겠지만, 보셔서 아시다시피 집이야 순 수입 자재만 대서 썼으니 어지간한 호화 빌라들은 명함도 못 내밀지요. 마침 강남 집이 준공돼서 그리로 빨리 들어가야 할 형편이니까 가격도 다소 융통성이 있을 겁니다. 장담은 못하지만, 한 장 밑으로도 분질러볼 수 있어요."
한 장이라면, 억이었다. 놀랄 금액은 아니었다. 집이 크면 더 올라갔고 좀 아담하다 싶으면 한 장 이쪽 저쪽인 것은 그도 알고 있었다. 어제는 다른 부동산 사람을 데리고 이 근처 몇 집을 둘러보았었다. 어제는 가랑비가 내렸었는데도 저택들을 담고 있는 우중풍경이 그를 압도했었다. 깨끗한 것은 비에 젖어도 깨끗했다.
"오늘 볼 집이 서너 개 더 있다면서요. 다음 집으로 가세요." 고개만 끄덕끄덕하고 있는 그를 조심스레 살피던 그녀가 얼른 부동산 남자의 말을 자르고 자동차를 세워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부동산 남자가 성급하게 굴었던 것이다. 아직은 가격을 말할 때가 아니었다. 이제 겨우 한 집을 보았을 뿐이었다. 그는 애써 무덤덤한 표정을 짓느라 굳어 있는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문대면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의 집 순례에도 그가 할 말의 범위는 "괜찮군"이 전부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입을 벌리면 집에 관한 수많은 상념들, 그의 온 생애가 다 묻어 있는 그 복잡한 상념의 가닥들이 새 나올 것 같았다. 사소한 것은 일부러 들켜주지만, 그러나 정말 간절한 것은 결코 들키고 싶지 않은 법이었다. 그에게 집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 만큼 간절한 것이었다.
사실을 말하면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도 두 사람이 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그 아파트는 결혼 전 그녀가 혼자 살고 있던 집이었다. 아내와 장모가 그리고 두 딸까지 모두 다섯 식구가 살던 그의 아파트보다 그녀 혼자 사는 아파트는 정확히 두 배가 넓었다. 결혼한 후 그녀는 자신이 살던 집에 그가 들어온 형식인 것을 언제나 미안하게 여겼다. 그럴 때도 그가 하는 말은 똑같았다. 괜찮아.
그 말은 그의 진심이기도 했고 아니기도 했다. 화가의 작업실이 아파트에 있다는 것은 아무리 해도 어색하니까 넓고 환한 작업실을 마련할 수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녀가 여러 차례 물어왔을 때도 그는 무덤덤하게 한 마디 했을 뿐이었다. 지금도 괜찮아.
집문제만이 아니라도 그의 "괜찮군" 혹은 "괜찮아"라는 대답은 두 사람의 일상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말이었다. 그 말이 지니고 있는 유보의 뜻에 숨어서 한 번 더 스스로를 정리해봐야 할 만큼 그에게는 그녀와의 생활이 생각보다 낯설고 힘들었다.
자신이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한다는 것에 대해 그 스스로 화가 치밀었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였겠지만 그녀는 이제 그의 괜찮아, 를 경우에 따라 자기 식으로 해석하는 데 익숙해져 있는 듯이 보였다. 어느 때는 긍정으로, 어느 때는 부정으로 그녀에게 해석되어지는 자신의 괜찮아, 가 그의 새 생활에 기여한 공로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만약 괜찮아, 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갈팡질팡했을 것이고, 예민한 그녀에게 자신의 모든 마음을 들켜버렸을 것이고, 그리하여 다시 예전처럼 뒤죽박죽이 되는 것을 수수방관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그 다음의 행로는 불을 보듯이 뻔했다. 그는 새롭게 살 수도 있었을 생의 마지막 기회를 영원히 놓쳐버리고 본래의 그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그가 그토록이나 벗어버리고 싶어했던, 불과 열 달 전까지만 해도 둘러쓰고 있었던 저 무겁고 낡은 삶의 외투를 다시 돌려 받아야 함을 뜻하는 것이었다.
열 달 전 그날, 그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고요하게 말했었다. 결혼하는 게 좋겠어요. 그 순간 그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커피잔을 놓쳐버릴 뻔했었다. 다행히 그런 불행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별다른 이탈 없이 순탄하게 제 궤도를 밟아가고 있는 두 사람의 연애가 그에게 짧은 한 순간 대단히 수상쩍은 것으로 다가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결혼하는 게 좋겠어요, 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뺨언저리로는 가을 찬바람 같은 소름이 우수수 돋아났었다.
난 너랑 결혼하지 않아. 그날 그는 그렇게 대답했었다. 저는 결혼하면 좋겠어요.
그녀는 다시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그렇게 말했다. 이런 식의 어긋난 대화는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굳어진 방식이었다. 그는 언제나 여자를 내쳤고 그녀는 그런 남자를 늘 다소곳하게 받아주었다. 그것은 그가 그녀에게만 새로 선보이는 연애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여자를 만나도 그렇게 했다. 세 번의 결혼도 모두 그런 궤도를 밟아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런데 네번째 여자마저도 몇 달의 만남 끝에 결혼하자는 것이었다. 앞의 세 여자들이야 운명적으로 얽힐 만 했다고 쳐도 그녀까지 순순히 이렇게 나올 줄은 정작 그조차도 짐작하지 못한 일이었다.
세번째 결혼마저 실패로 돌아가 아내와 별거에 들어갔을 때, 그는 사실 자신의 연애방식 따윈 일찌감치 잊어버리기로 작정한 터였다. 네번째 결혼이라니, 그것은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은 것이었다. 아무리 해도 그는 여자와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그를 배신하지 않았던 행복한 동반자는 술 이외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지금까지의 안간힘을 모두 포기하기로 작정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안락한 시궁창에서 마음대로 뒹굴다가 죽으리라, 그렇게 앞으로의 삶과 죽음의 시간표를 만들었다. 몇 달 지나지 않아서 그는 자신의 시간표가 생각보다 편안하다는 것을 깨달았으므로 마음 속에 아무 소망도 없었다.
그때 네번째 여자가 나타난 것이었다. "색으로 말하는 작가전"이 열렸던 한 화랑에서 화랑의 여주인이 고객이라고 그녀를 소개시켰을 때도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그것도 만취였다. 그림을 사준다면 몇 달간 술값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그는 혀꼬부라진 목소리로 말했었다. 살 능력이 있으시냐고 실눈을 뜨며 비아냥거리기도 했었다. 그때 여주인이 말했다. 김 선생님, 이분이 누군지 아세요? 평화그룹 아시죠? 평화, 윤 회장님 막내 따님이세요.
전시회가 끝나던 날, 그는 화랑의 여주인한테 꽤 많은 그림값을 받았다. 재작년 첫 전시회 때 친구들이 우정으로 사주었던 몇 개의 소품들을 빼고 나면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그림을 팔아본 것이었다. 전시회에 모두 열두 명의 작품이 걸렸었지만 팔린 것은 세 점, 그중 에서도 매긴 값대로 그림을 산 사람은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림값도 흥정하는 법인데 당신 너무 비싸게 샀다고 되려 큰소리를 쳤다. 그때도 물론 술에 취해 있었지만, 술이 아니더라도 그럴 말버릇은 그가 흔히 마음에 드는 여자 앞에서 취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녀를 여자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재벌의 딸이 아니라 해도 그녀는 충분히 그의 마음을 끌 만한 여자였다. 지난 날의 연애방식 따윈 깡그리 잊어버리기로 다짐한 것은 사살이었지만 버릇이란 속담에도 있듯이 여든 살까지 잔존하는 법이었다.
그 전화를 시작으로 그들은 띄엄띄엄 만났다. 주로 그가 전화를 걸어 나오라고 방만하게 고집을 부렸고 그녀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마포 뒷골목 돼지갈비집으로, 불광동 감자탕집으로, 종로의 싸구려 대폿집으로 순순히 나타나 주었다. 그녀가 아니고 다른 여자였다면 굳이 그런 장소만을 고집하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그녀는 어디에 앉아 있어도 온몸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여자였다. 술이라면 사흘 밤낮을 식음 전폐하고 마실 수 있는 그였으나 아무리 취했어도 그녀가 재벌의 막내딸이라는 놀라운 사실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다. 네번째 결혼 따윈 전혀 고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던 것도 어쩌면 그 사실이 잊혀지지 않아서였는지 몰랐다.
뭘 어떻게 해보리라는 야심은 분명히 없었다. 그것은 지금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재벌의 딸이라는 고운 여자를 앞에 앉혀 놓고 지저분한 술집에서 거리낌없이 술주정을 부릴 수 있다는 사실은 매혹이었다. 그는 단지 매혹을 물리칠 수 없었을 따름이었다. 결국 그것이 통상적인 그의 연애방식과 닮아버렸다 해도 진정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혹을 위해서 그는 그녀를 만날 때마다 거의 정신을 잃을 만큼 술을 마셔대곤 했었다. 그래야 매혹의 절정에 이를 수 있었다. 탁자를 쓸어안고 넘어지기, 술집 주인이 나가라고 소리지를 때까지 마시고 또 마시기, 전봇대를 부여잡고 토악질하기, 길바닥에 드러누워 고래고래 노래부르기, 그만 좀 따라다니라고 여자 쫓아내기, 이런 것들이 매번 고정적으로, 조금씩 난폭함의 수위를 높여가며 되풀이 되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쩔쩔매며 길거리에 쓰러져 잠들려는 남자를 가까운 호텔이나 여관으로 데려가 눕히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낯선 여관방에서 눈을 뜰 때마다 그는 생각했다. 어젯밤의 광란으로 끝이 나겠지. 그랬으면 좋겠군. 이젠 정말이지 매혹도 성가셔. 어차피 매혹일 뿐인데.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끝이기는커녕 그녀는 결혼하는 게 좋겠어요, 라고 말했다.
서른 다섯이 되도록 혼자 살아왔던 재벌의 고집 센 막내딸이, 세 번씩이나 결혼한 가난한 화가한테, 그것도 마흔 세 살의 지독한 술주정뱅이에게 결혼하겠다고 자신이 먼저 말했던 것이었다. 그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제까지는 매혹이었지만, 그때부터는 공포였다. 그는 문득 여태까지의 만남이 자신의 의도였던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찬물을 뒤집어 쓴 기분이었던 그는 그날 일찍 그녀와 헤어졌다. 헤어지기 전 그녀에게 던진, 난 너랑은 결혼 안해, 라는 마지막 말은 오랜 습관이 빚어낸 의미없는 그물에 지나지 않았다. 여자를 낚기 위해서 지난날 그는 얼마나 많은 반어법을 구사했던가. 그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고 시간을 벌기 위해 우선은 익숙한 방식을 구사했을 뿐이었다.
부동산 남자가 데리고 간 다음 집은 그 동네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었다. 거의 숲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넓은 정원 속에 동그랗게 들어앉은 집은 첫눈에도 아주 특별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집주인이 조각가래요. 설계도 직접 했고 지을 때 자재 하나까지 일일이 간섭을 했답니다. 그래서 그런지 확실히 예술적 감각이 있어요." 예술적 감각이라는 말에 그는 새삼스레 부동산 남자를 쳐다보았다. 자신의 사무실 이름을 무슨 무슨 부동산 프라자, 로 붙이고 있는 그 또한 현대적 감각이 넘칠 법한 젊은 사람이었다. 자동차를 주차시키느라 조금 늦게 다가온 그녀한테 남자는 다시 한 번 조각가 운운하며 집을 설명했다. 산에 박혀 있던 큰 바위 밑의 약수터까지 고스란히 정원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것과 본채 뒤로 조각가가 기거하며 작업을 했다는 사랑채가 별도 건물로 지어져 있어서 단층건물이라 해도 결코 실내평수는 좁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을 그녀에게만 덧붙이는 것으로 보아 이 젊은 남자 역시 일찌감치 돈을 내는 사람이 누구인지 간파한 모양이었다.
그녀한테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반듯한 자세, 겁내지 않는 눈길, 단정하게 앞으로 모은 두 손. 거기에다 출신성분을 나타내는 몇 가지 고전적인 특징까지 모두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맑고 하얀 피부, 여릿여릿한 몸매, 가늘고 긴 손가락 등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지금은 남루한 중년사내의 행색에서 거의 벗어나 상당히 여유롭게 보이긴 하지만 그녀에 비하면 그는 아직도 저 술구덩이 속에 빠져 패악을 일삼던 과거의 체취를 온전히 다 씻어냈달 수는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스스로 자신의 출신성분을 개의치 않게 되는 때에 이르면 체취 또한 변하리라는 것을.
출신성분을 나타내는 요즘의 징표야말로 얼마나 다양하고 독창적인가. 머지않아 사람들은 그가 보여주는 징표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 누구라 해도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려우니까.
조각가의 집은 그러나 빈 집이었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대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대문이야 훌쩍 뛰어넘으면 그만일 만큼 아주 낮았지만 저만큼 보이는 안채의 현관문에 사람 기척이 나지 않는데야 무작정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낮은 대문과 낮은 울타리는 넓은 정원 여기저기 놓여 있는 주인의 조각작품들을 감상하라는 배려인 듯했다. 조각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혹시 했는데 조각을 보니 틀림없었다. 그는 부동산 남자의 소개를 받지 않고 스스로 집주인을 알아냈다.
그렇다면 이 집은 들어가볼 필요도 없었다. 대학선배이기도 한 조각가는 강물이 흐르고 앞동산 뒷동산이 다 울울창창한 시골에서 사는 것이 꿈이라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 조각가의 꿈을 훼방하는 것은 돈이 아니었다. 그의 작품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조각가는 다만 돈을 쏟아 부을 멋진 땅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서울 복판에 잘 지었다고 소문난 집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직 자연이 모자라다고 엄살인 선배를 향해 그는 접시를 던진 적이 있었다. 작년인가, 무슨 시상식의 뒷풀이 자리에서였다. 세번째 아내가 축농증 수술을 받던 날이었고, 그 수술비도 아내의 봉급에서 충당했으므로 몹시 괴롭던 날이었다.
그날 음식을 뒤집어쓰고 너무나 황당해 말을 잃은 조각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랬던 사람을 앞에 앉혀 두고 집흥정을 하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는 조각가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일은 시소의 양 날개가 공중에 비슷한 각도로 떠있을 때만 진심으로 행해지는 것이었다. 그 나머지는 모두 포즈였다. 이해였는지 오해였는지 영원히 판독되지 않는 삶의 포즈.
어쨌든 이 집을 사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하므로 그는 그녀를 돌아보며 예의 한마디를 던졌다. 괜찮군.
다른 땐 바로바로 해석하더니 이번의 괜찮군, 은 모호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작업실이 별채 건물로 딸려 있는 예술가의 집이므로 사게 되면 괜찮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예술가의 집이란 이런 것 이상이어야 하니까 그저 괜찮은 정도임을 말하는 것인지 알고 싶다는 뜻이었다. 그는 그녀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전혀 자기 주장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밖의 다른 일이 전부 그녀 주장대로 처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은근하고 다소곳하게, 얼마라도 기다리면서 결국은 그로 하여금 그리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만만찮음이 그녀에게는 있었다.
"다음에 한 번 더 볼까요, 아니면 ."
"아니, 괜찮아. 그럴 필요 없다구."
그는 먼저 자동차 쪽으로 가면서 의사를 확실하게 해주었다. 혹시 라도 선배 조각가의 귀에 자신이 집을 보기 위해 다녀갔다는 소리가 들어가는 것이 싫어서였다.
머지않아 이런 식의 주눅 든 생각에서도 벗어나겠지만, 그러나 아직은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마음자국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말은 누구한테도 해본 적이 없으나, 그녀한테서 결혼 제의를 받고 돌아오면서 그가 내내 떠올리고 있던 생각은 어려서부터 무수히 많이 들었던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였다. 연달아 과거에 낙방하는 통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린 한 선비가 마지막 과거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마침내 목을 매 죽기로 결심을 하였다는, 그러나 아리따운 처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재산도 얻었는데 알고 보니 그 처녀는 사람이 되기 위해 천 년을 기다려온 지네였다는,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알고 있는 그 오래된 옛날 이야기가 그의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왜 그 이야기에 매달리는지 생각해보았다. 동시에 네 번째의 결혼을 선택하면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해서도 곰곰 생각했다. 그녀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도 잠깐 생각을 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네 번씩이나 하게 되면 무엇이 결혼에 합당한 사랑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되는 법이었다. 결혼이라는 당위를 놓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 그것으로 사랑은 충분하지 않은가 짐작할 뿐이었다.
거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그랬듯이 사랑은 저 혼자 눈덩이처럼 구르며 부피를 늘려갈 것이었다. 그것은 그것대로 놓아두면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돌이켜 보면 그가 더 많은 시간을 바쳤던 화두는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아직도 생의 욕망이 남아 있는지를 알고 싶었다. 세번째의 결혼이 별거로 들어가면서 동시에 그는 자신의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말았음을 시인했었다. 실제로 그는 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었으며 술이 불러온 수전증으로 붓을 들기 어려운 실정에 있었다. 게다가 착한 여자들을 세 번씩이나 지옥으로 밀어붙인 그의 혼인 경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다시는 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 증거들은 그가 보아도 확실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정신의 상처들을 응급치료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조차 전혀 없는 빈털털이였으므로.
그래서 그는 아내나 친구들을 졸라 얻어먹는 소주 몇 잔이 자신의 인생과 대체되는 것을 속수무책인 상태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욕망을 버리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간단했다. 꿈을 꾸지 않으면 되었다. 내일에 대한 꿈을 꾸지 않으면 굳어진 채 방치되어 있는 유화물감과 붓들을, 그리고 엉망으로 구겨진 지나온 인생을 다 잊을 수 있었다. 욕망을 버리고 술만 구하면 되는 간단한 그 삶도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네번째의 결혼이 이 나쁘지 않은 삶보다 무엇이 더 나을 것인지를 계산해야만 했고, 새삼스럽게 절벽을 기어 올라, 상처에 옥도정기를 바르고, 새옷으로 갈아입고, 표정을 바꾼 다음, 의미있는 무엇을 해보겠다고 덤빌 욕망이 그에게 남아 있는지, 그것을 알아야만 했다.
그것을 알아내는 데 꼬박 닷새가 걸렸다. 닷새 동안 그는 밥 대신 소주를 마셔가면서 '지금의 나'를 부수고 '내가 아닌 나'로 다시 설 수 있을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했다. 이번에 시작하면 그것이 무엇이든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는 전제만 없었더라도 닷새의 시간은 덜 치열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그에겐 물러날 자리가 단 한 치도 더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을 듯이 생각하다가 방바닥에 푹 쓰러져 잠이 들면 하루가 갔다. 눈이 뜨이면 다시 소주로 입가심을 하고, 소주로 밥을 삼고, 소주로 정신의 길을 개척해가며 또 곰곰히 생각을 계속했다.
그렇게 닷새를 지내고 그는 마침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생의 밑바닥을 뒹굴며 벌레처럼 살기로 작정했을 때 삶의 이야기들은 다 지워버렸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다 지운 것이 아니었다. 천 년 묵은 지네의 옛 이야기는 남아 있었던 것이었다. 왜 그것을 남겨 두었을까. 아니, 왜 그것은 홀로 남아 있었을까. 닷새 동안 머리 속을 윙윙거리던 말벌레 같던 생각들은 일시에 그 질문 하나로 귀속되었다. 그는 차근차근, 그리고 정직하게 이제는 하나가 된 질문을 응시했다.
나는 벌레처럼 살고 싶지 않았으며, 내일을 위한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도 않았으며, 흰 눈처럼 순수하게 누군가를 다시 사랑하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벌레였고 꿈은 악몽이었으며, 배척 당하는 까마귀였다. 그러므로 내 속에 홀로 남겨진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는 말하자면 주술이었다. 내 무의식 속에서는 그거에의 모방을 향한 욕망이 있었다. 감염 당하고 싶다, 라고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이 비명이 어디 나만의 것이었던가.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가 수 천 년 동안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비명이 얼마나 길게, 얼마나 많이 내질러졌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가히 인류사적인 욕망이 아니던가.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러므로, 네 번째 결혼이라는 제의를 통과해서 '다른 나로 변하고 싶다'라는 비명의 내용을 실천하는 것이다. 운명은 내게 놀랍게도 썩은 동앗줄이 아닌 튼튼한 동앗줄을 내려 보내주고 싶어하는 것이다 .
생각은 끝났다. 그는 후둘거리는 몸을 일으킨 다음 냉장고를 뒤져 요기부터 했다.
그리고 거울을 보았다. 소주로 헹궈낸 얼굴은 말갛기만 했다. 그는 뾰죽해진 얼굴을 부비다가 다시 거울 속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눈꼬리에 말간 액체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거울 속의 자기가 기척도 없이 울고 있는 것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많이 울지는 않았다. 그가 거울에서 시선을 떼버림과 동시에 눈물도 그쳤다. 그는 알고 있었다. 거울 속으로 들여다 본 아까의 얼굴이 마지막으로 본 자신의 과거 모습이라는 것을. 다시 거울을 들여다 볼 때, 그때 그는 이제까지의 그가 아닐 것이었다. 그는 그렇게 결정을 한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 나가 되기 위해 그가 맨 처음 한 일은 세 번째 아내를 만나는 일이었다. 별거 다음은 이혼이라는 것은 아내도 짐작하고 있었다. 이럴 때는 세 번째 아내한테서만 자식 생산이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처음의 둘은 자식을 낳고 어쩌고 할 사이도 없이 후다닥 깨져버렸다. 깊이 들어가면 좀더 근본적인 이유도 나올 터이지만, 세 번의 이혼은 모두 그의 무능과 세상과의 불협화음에 원인이 있었다.
아내들은 운좋게도 모두 착하고 성실했었다. 그러나 그 역시도 악하고 불성실했던 쪽은 아니었다. 그는 어쨌건 알고 있는 방식대로는 최선을 다했었다. 잘못이 있다면 꼬일 대로 꼬여서 도저히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게스리 헝클어져 버린 운명에 있었을 터이지만 그런 소리는 하나마나한 것이었다. 그는 원래 하나마나한 불평을 늘어놓는 대산 자진해서 최악으로 달려가버리는 스타일이었다.
세번째 아내는 묵묵히 이혼 수속에 동의했다. 그는 네번째 결혼을 할 것이며 아이들 양육비는 자신이 부담하겠다고 말했다. 네번째 결혼이라는 말에 세번째 아내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이 여자가 차린 밥상을 뒤엎은 것이 얼마며 이 여자의 얼굴과 팔을 후려친 것은 또 몇 번이었는지를. 세번째 아내는 여학교 선생님이었다. 숱 많은 눈썹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던 섬세한 여자였다. 그러나 지금은 풀로 붙인 듯 눈썹은 굳어 있고 얼굴은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그 동안 꿈을 버리고 살아온 쪽은 그가 아니라 오히려 아내 쪽이었을 것이었다. 장모는 딸 대신 그의 아이들을 키워주기 위해 함께 살았었다.
아내를 때리면 아내 대신 장모가 달라들어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었다. 이 후레아들놈아, 니 놈이 우리 딸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다고 그려어 .
아무것도 해준 게 없고 앞으로도 해줄 가망이 없어 아내를 때리는 것임을 어떻게 노인이 알 수 있으랴. 이혼하면서도 아내에게 줄 아무 것도 없는 그였다. 아파트가 있지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게 아내 몫이었다. 그 아파트의 벽돌 하나도 그의 노동으로 얻어진 것은 없었다. 그는 다만 두 딸과 걸레처럼 너절너절한 과거만 줄 수 있을 뿐이었다. 그것이 마음 아팠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이혼하는 태도였다. 그는 세 번의 이혼 모두를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떨구지 않고 처리한 셈이었다. 결혼생활을 더 계속해주는 일이 미안한 일임을 그도, 아내들도 다 알고 있었다.
부동산 남자가 데리고 간 다음 집도 빈 집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부동산 남자가 열쇠꾸러미를 뒤져 대문을 직접 열었고 현관문 앞에서도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 해서 문을 열었다. 집 주인이 외국인 부부에게 세를 주었는데 그들은 지금 본국에 일이 생겨 이 나라를 떠나 있는 중이었다. 어차피 외국인 부부는 돌아오더라도 아파트를 얻어 나갈 것이고 그 사이 가능한 한 빨리 집을 팔았으면 좋겠다는 것이 집주인의 생각이라고 했다.
"집 안에 수영장이 있거든요. 이렇게 큰 집은 매물로 나오는 일도 드물지만 나와도 잘 안 팔립니다. 전엔 수영장이 있다면 굉장한 집으로 쳤지요. 요샌 안 그래요.
헬스클럽 회원권이 그런 따윈 다 해결해 주니까요. 사람들이 어떤 집을 원하는지 요샌 저도 모르겠어요. 하도 변화무쌍해서요. 정 안 팔리면 주인이 다시 들어온답니다.
주인은 양재동 빌라에 살고 있거든요. 단독두택에 살다보면 신경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말이지요. 저 아래도 평당 천만 원을 부르는 빌라를 분양하고 있습니다만, 가보실 테면 안내하겠습니다. 꼭 주택일 필요가 없다면 빌라도 한 번 고려해보십시오." 빈 집이어서 부동산 남자의 말이 많아지고 있었다. 그는 남자를 뒤로 떼어놓고 먼저 집 안을 휘둘러 보았다. 대지 자체가 비탈이 져 있던 탓인지 앞에서는 이층이었는데 들어와 보니 삼층인 구조였다. 온 집을 유리로 지었다는 생각이 들게 할 만큼 거실이건 방이건 한쪽 벽은 모두 대형 페어글라스였다. 커튼을 젖히고 들어 앉아 있으면 집인지 산 속인지 모를 만한 풍경은 대단했으므로 그는 뒤에 그녀의 시선이 있다는 것도 깜박 잊고 오래 창 밖을 바라보았다. 어떤 값을 부르든 창이 담고 있는 전망의 가치로서는 결코 과할 게 없다는 기분이 절로 드는 집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전망을 위해 보통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만한 금액을 기꺼이 지불하는 부류도 있는 법이었다. 집을 구하면서 수돗물이 잘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를 확인하고, 앞집 감나무 그늘이 안방 창문을 가리는지도 점검해야 하고, 비가 오면 하수구가 잘 막히는 집인지도 탐색해야 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었다.
세번째 결혼 중에 그는 처음으로 아파트 분양이라는 것을 경험했었다. 물론 처음부터 아내의 이름으로 부금을 부었고 아내의 이름으로 분양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그때부터 그와 함께 산다는 전제까지 포기하고 아내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는 법적으로 집을 소유할 만한 소득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한 번도 정상적인 월급이란 것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평생을 놀고먹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안 팔리는 화가였지만 무명화가가 할 수 있는 온갖 아르바이트는 다 섭렵했다. 그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세상에 완벽하게 놀고 먹는 사람은 없다 .
마침내 새 아파트로 이사하던 날, 그는 스물 다섯 평이라는 공간이 그처럼 알뜰하게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랐다. 도대체 어디 한 군데 빈틈이라곤 없었다. 그가 캔버스를 앞에 두고 수없이 고민했던 면의 분할이란 것은 장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때 그는 집의 내부 공간만 보았었다. 앞 동에 가리워져서 오후 두 시가 넘어야 기갈 난 햇볕이 한 줌 들어온다는 것도 흠으로 보이지 않았다. 거실이며 방마다 제 규격대로의 반듯반듯한 창문이 달린 것만도 신통했다. 손바닥만한 창도 낼 수 없어서 사면이 벽인 방을 그는 수없이 경험했었다.
한 군데씩 잊지 않고 뚫어 놓은 것만도 참 대견했다. 그 창이 어떤 풍경을 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평생 거론하지 않을 줄 알았었다. 그것에 앙탈을 부릴 생각도 없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그 또한 가끔씩은 제대로 누리며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지만 무엇을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조차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지은 지 꽤 오래 됐나 보죠?"
그녀가 부동산 남자한테 묻고 있었다.
"글쎄요, 십 년 이쪽 저쪽일 거 예요."
"아녜요. 그 이상이에요. 통유리 스타일도 구식이고, 벽이며 마루 자재도 한물 간 것들이에요. 정작 살면 불편할 게 많을 것 같으네요. 개조공사비가 신축비만큼 들겠어요."
단호한 말도 그녀는 조용조용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단호하게 들렸다. 부동산 남자가 뭐라 대꾸할 말을 찾는 동안 이번엔 그에게 물었다.
"십 년 지났으니 건물값은 요구 못할 거 예요. 땅값만으로 살 수 있어요. 마음에 드세요?"
그가 넓은 창들을 마음에 들어 하고 있음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녀는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이 집을 살 수도 있다고. 어제나 오늘 본 집들 모두 그의 마음에 들었다. 좋고 낮음이야 있었지만 기본적인 하자 사항들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주인이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느냐의 차이뿐이었으므로 애시당초 이만한 저택을 상대로 취향을 기르지 못한 그한테는 아무것이라도 상관이 없었다. 그란 그녀한테 아무것이라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녀와 결혼하면서 그는 새로운 자기를 주체적으로 연기해야 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과거와의 결별이 쉽지 않다고 해서 지금의 현실 속에 자기를 집어 넣어야 하는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매순간마다 '낡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위치 이동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역시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썩 괜찮은 것은 아니고 ."
그녀는 깊은 시선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보더니 그냥 돌아섰다. 시선이 깊어졌다는 것은 마음 속 생각이 무겁다는 의미일 터였다. 겉으로야 화가가 구상하는 집의 구체적 내용을 모르니까 당신의 뜻을 따르겠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닐 것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전부 알지 못해서 불편할 일은 없었다. 지금처럼 혼탁한 시대에서는 맑은 시냇물처럼 환히 속을 보여주며 흘러가는 마음이야말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대부분 상대방의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일그러져 버린다. 그도 여태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이제는 결코 그렇게 살지 않을 것이었다. 껍질은 깨부숴야 할 폐기품이 아니라 때때로 기어들어가 마음을 숨겨야 하는 피난처인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 그녀야말로 바로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녀만이 아니고 그녀의 가족들도 제각각 마음 속에 훌륭한 동굴 하나씩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녀의 가족들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할 것임은 세 살 먹은 어린애라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처음으로 장인을 비롯한 처가식구들과 대면하던 날 그 또한 너무나 당연하게 그들의 냉대를 기대했었다. 그것은 이 결혼의 당연한 수순이라고 생각했기에 눈곱만큼도 억하심정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시종 어리둥절하다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정중한 대접이었다. 무든 식구가 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랬다.
식탁에서의 대화는 화기애애했고 늙은 회장의 미소는 자애로웠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두 사람의 결혼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도 화제에 올리지 않았다. 지나가던 과객이 무심코 들려 식사 한 끼를 대접받는다면 그랬을까, 그녀조차도 자신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까맣게 잊고 있다는 투였다. 너무나 완벽한 분위기였으므로 그는 처가집에 대해 갖고 있던 경계심을 스르르 풀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식은 어디 깊은 산 양지바른 곳에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치뤘으면 좋겠어요."
그녀의 말은 결혼식에 처가 식구들이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었다. 실제로 결혼식은 그의 별 볼 일 없는 친구들만 참석한 가운데 강원도에 살고 있는 선배화가의 시골 뜨락에서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그는 요란한 친구들의 세련되지 못한 결혼축하 풍경만 넘치게 제공했을 뿐 한없이 초라한 결혼식을 치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더 기쁘다고 했다. 부모가 참석하지 않은 결혼식에 대한 슬픔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흔적도 없는 표정이었다.
결혼 후 처음 맞는 설날에도 그녀는 혼자 친정에 갔다. 같이 가자는 말 대신 그녀는 말했다.
"잠시 집에 다녀올 게요."
말대로 잠시 다녀오기는 했다. 그러나 왜 혼자 세배를 가야하는지에 대해선 그 후에도 한 마디 설명이 없었다. 그녀는 때때로 친정에 갔지만 그때마다 잠시 다녀올 게요, 로 모든 상황을 설명했다. 그녀가 더 이상 알리고 싶지 않다면 그도 더 알고 싶어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도 그녀처럼 했다. 사실 알리고 싶지 않은 것들의 부피만 대보자면야 그를 당할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그들은 공유할 것이 전혀 없는 과거보다 현재를 더 많이 이야기하기로 약속한 셈이었다. 그것은 몹시 현명한 처사였다. 시시콜콜히 자신을 설명하지 않으니까 우선 불필요한 오해가 사라졌다. 매끄러웠다. 뜻하지 않게 허방을 만나 나뒹구는 일도 없게 되었다. 진실을 다 보이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충고도 없다는 것을 그는 그녀를 통해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 배운 삶의 기교가 몹시 만족스러웠다.
내부는 순탄했지만, 정작 바깥은 그로 인해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어떻게 알았는지 몇몇 잡지나 신문에서 연락이 오기도 했다. 화가였던 그를 잡지나 신문이 취재하고 싶어 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림으로가 아니라 네번째 결혼으로 그는 갑자기 유행해지고 말았다. 소외에 익숙해 있던 그에게는 놀라운 세상의 반응이었다.
소문도 많았다. 그가 마침내 네번째 결혼까지 실패하고 말았다는 내용까지 유포되고서야 겨우 가라앉은 소문들은 대개 악의적이었다. 처음에 그는 떠도는 소문 속에서 사람들의 악의만 읽었으므로 조금 불쾌했다. 그러나 이내 그들을 수긍했다.
술주정뱅이 폐인에서 어느 날 갑자기 유복한 예술가의 모습을 탈바꿈한 그의 변신은 고여 있는 그들 일상에 저질러진 하나의 사건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불현듯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실재의 자기를 버리고 새로운 자기를 얻고자 애쓰는지. 얼마나 많은 꿈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현실에의 탈출에 바쳐지는지.
희망도 없이 눈 뜨는 아침, 문득문득 솟구치는 나는 누구인가, 하는 외로운 질문들, 질주하는 현실의 속도감을 이길 수 없어 아뜩해지던 삶의 빈혈. 그랬다. 그들 모두 진실로 새롭게 살 수 있는 피가, 신선한 피가 모자란 사람들이었다. 현실은 악성빈혈이었고 사람들은 수혈을 원했다.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모두 더 이상 세상과 적대관계에 있고 싶지 않다고 간절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돌연 세상과 화해했음을 선언했다. 그들 모두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던 변신에 그가 운좋게 성공했다. 사람들은 아연했다. 하필이면 그가, 하는 기분은 당연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무력한 스스로를 혐오하는 대신 그를 비난하는 쪽을 택했다. 단지 그뿐이었다. 형식은 타자에의 비난이지만, 내용은 자기에게로 가는 혐오라고 그는 이해했다. 그랬으므로 사람들의 온갖 소문에 대해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 어느 날,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예전의 그처럼 무명화가이고, 예전의 그와 마찬가지로 가난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친구였다. 한 시절, 그들 두 사람은 혈육처럼 가까이 맺어져 있었다. 똑같이 나누어 가진 불행은 서로를 형제처럼 여기게 하기 족한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사람들'과 그 친구는 다르다고 믿었으므로 전화가 몹시 반가왔다. "왜 연락도 안 해?" 하고 타박하던 친구가 이어서 "너 진짜 또 파토낸 것 아냐?" 라고 소문의 내용을 옮겨 주었어도 그는 허허 웃었다. 그는 유일한 친구였다. 말 속에 함정을 파놓을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친구와 약속을 정하고 전화를 끊은 뒤 그녀에게 말했다.
"잠시 나갈 일이 생겼어."
그녀는 어딜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입고 나갈 옷과 갈색의 순모 베레모를 내놓았다.
그 모자는 그녀가 사다준 여러 개의 모자 가운데 가장 수수해서 그녀와 다닐 때는 늘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냥 보기 좋아서 샀다지만 단순히 심심해서 모자를 샀을 그녀가 아니었다. 남편에게 모자를 씌우고 싶다는 그녀의 마음을 그는 받아들였다. 다른 약속이었다면 모자를 쓸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봤겠지만 친구를 만나는 자리였으므로 그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국전 심사위원같구나."
베레모를 본 친구의 반응은 생각대로 그게 전부였다. 그들은 차 한 잔씩을 마시고 곧 자리를 옮겼다. 그는 저녁부터 먹자고 했으나 친구는 바로 술집으로 갈 것을 고집했다. 그렇다면 좋은 안주와 향기로운 술을 친구에게 사주고 싶었던 그였다.
그러나 친구는 "안 먹던 것 먹으면 목구멍에 가시 박힌다"면서 예전에 그들이 잘 갔던 종로 뒷골목의 단골 대폿집으로 그를 데려갔다. 살찐 쥐들이 어슬렁거리고 질척질척한 바닥이 바지가랑이를 적시는 뒷골목을 걸어가면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더 나은 데서 먹을 수도 있는 것을 굳이 거절하는 친구가 예전의 친구 같지 않아서였다. 예전엔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왕창 마셔대곤 하지 않았던가. 돈이 좀 있으면 좋은 술집으로, 돈이 없으면 병소주만 마셔도 되는 집으로 스스럼없이 몰려가곤 했었는데 친구는 새삼스럽게 구는 것이었다.
"그림은 잘 돼가냐?"
서로의 잔을 가득 채운 다음 친구가 물었다. 네번째 결혼 후 외출을 삼가며 집에서 작업만 하고 있었으므로 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아서 지금은 손연습에 불과한 것이었으나 그런 것까지 일일이 친구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친구라면 그가 지금 손연습 중이라는 것쯤이야 짐작할 만한 위인이었다.
"빠이프?"
그가 파이프를 꺼내 엽초를 꾹꾹 채워 넣는 것을 보고 친구가 물었다.
"응. 들여마시질 않으니까 이게 나을 것 같아서."
그는 간단히 대답하고 성냥불을 그어 오래오래 파이프에 불을 댕겼다. 친구는 단숨에 술잔을 비우고 자신의 잔에 스스로 술을 채웠다. 그가 얼른 술병을 잡았으나 이미 잔은 채워진 뒤였다.
"지난 달 김가 전시회 오픈 때 가봤더니 네 이야기들 많이 하더라. 너도 없고 해서 바로 오려다가 김가 말버릇이 하도 고약해서 술 먹고 깽판 좀 쳤지. 나뭇가지 붙이고, 쉿조각 매달아 놓고 쓱 내걸면, 그게 작품이 되냐? 그게 또 명작이라고 신문마다 좍 깔렸더라. 눈 먼 세상 ."
친구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것은 친구의 버릇이었다. 못마땅한 일이 생기거나 기분이 더러우면 늘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는 새삼스럽게 친구의 헝클어진 머리를 쳐다보았다. 갑자기 썰렁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도 그랬을지 몰랐다.
그들은 늘 그렇게 살았다. 자신이 어긋나버리는 까닭은 자기에게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남한테 있다고 불평하며 사는 데 익숙했었다. 세상은 자꾸 변하는데 웅덩이처럼 고여 부패해가고 있는 자신을 똑바로 들여다보기 두려웠던 시간들이었다.
비굴한 태도였지만, 그때는 비굴해지지 않으려고 더 비난과 불평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었다. 다시는 그런 시간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 고 그는 홀로 중얼거렸다.
"자, 마셔라. 네가 없으니 어디 술맛이 나야 말이지. 오늘은 한 번 실컷 마셔 보자." 친구는 자신의 잔을 그에게 주려다가 멈칫하며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곤 이내 잔을 거두어 제 앞에다 놓고 철철 넘치게 술을 부었다. 그의 잔은 아직 반도 비워지지 않은 채였다. 첫잔인데 그랬다.
그는 친구와 소주 두 잔 이상은 마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녀가 결혼하면서 유일하게 내세운 다짐이 술에 관한 것이었다. 망가진 몸이 회복된 후에 반주 정도로 마시는 것은 좋으나 당분간은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그는 흔쾌히 그녀에게 약속했다.
그녀가 아니더라도 그는 금주의 결심부터 단단히 세우고 네번째 결혼에 이른 사람이었다. 술이 희석시킨 흐리멍텅한 정신 말고 부릅뜬 눈으로 나머지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술이라면 남들이 평생 마셔도 다 마시지 못할 만큼 실컷 마셨다. 더 이상 술에 미련은 없었다. 이제는 술 다음의 무엇을 정복할 시간이었다. 그는 다른 것은 몰라도 술만큼은 친구에게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결심을 정직하게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친구라면 그의 진심을 이해해 줄 것이었다.
"그래, 네 번씩 이혼할 수는 없지."
역시 친구는 순순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는 친구의 잔이 빌 때마다 충실하게 잔을 채워주는 것으로 자신의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러나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의아해졌다. 순순히? 과연 친구는 순순히 그의 말을 이해해 준 것일까. 저렇게 빠른 속도로 잔을 비우는 친구의 마음은 지금 어떤 무늬일까 그는 문득 불안해졌다. 그러나 친구는 한 번도 그를 비난하지는 않았다. 친구는 단지 술을 너무 빨리 마시고 있었으며, 안주와 새 술을 청하는 태도가 이유없이 거칠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친구를 살폈다.
"박가가 뉴욕 간다는 소식 들었니? 스폰서가 생겼대. 기집애처럼 하얗게 생긴 얼굴로 누굴 하나 잡은 거지. 그런 짓을 해서라도 꼭 그림을 그려야 하는 건지 정말 헷갈리대. 다들 썩었어. 악취가 나."
친구는 또 머리칼을 쥐어뜯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살폈다. 친구는 그를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드런 놈들" 하고 후렴구를 토해냈다. 말이 과격해지는 것은 술이 어느 정도 들어갔다는 표시였다. 이제부턴 과격한 언행의 수위를 높였으면 높였지 결코 자제는 하지 않을 시간의 시작이었다. 친구가 보여주는 행동들은 사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역시 친구와 쌍동이처럼 말하고 행동했었다. 지금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해도 분명 그 또한 타락한 욕망을 숨긴 채 무의미한 비판만을 일삼던 나날 속에 던져져 있었다. 일상의 무가치한 반복을 견딘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그는 절실하게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아 예 병나발을 불기 시작한 친구를 조금은 슬픈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병신들."
일본 초대전에 작품을 낸다는 누구의 이야기를 하면서 친구는 그렇게 씹어 뱉듯이 말했다.
"막노동을 해서도 먹고 살 수는 있어! 자존심을 팔지는 않을 거야." 그림을 집어치우겠다고 소리치면서 친구는 입귀를 실룩이며 차라리 막노동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파이프에 불을 붙이며 친구 모르게 이마를 찌푸렸다. 어느 순간 지겨워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이해 못할 것은 없지만 언제까지 이해를 요구하며 살 것인가. 저런 어깃장, 저런 억지의 뿌리에 자기도 기생해서 살았다는 것을 떠올리자 울적해지고 말았다. 그는 친구의 잔에 술 부어주는 것도 잊고 파이프 연기만 울컥울컥 토해냈다. 그때였다.
"에이, 그놈의 빠이프!"
그렇게 부르짖는가 했더니 갑자기 친구는 그의 입에서 파이프를 확 뽑아내는 것이었다. 순간 그는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도록 모욕을 느꼈다. 그러나 친구는 자신이 더 화를 내며 의자가 나동그라지도록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란다. 술맛이 안 나."
그는 정말 비틀거리며 계산대로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모욕감을 추스릴 새도 없이 따라나가 지갑을 꺼냈다.
"치워, 임마. 술값은 내가 낸다. 나도 돈 있어."
그는 친구가 주머니를 뒤지는 사이 술값을 치뤘다. 그런 그를 친구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친구의 눈빛에서 무섭도록 뜨거운 증오를 보았다. 차마 친구의 비틀거리는 등에 손을 얹을 수도 없을 만큼 맹렬한 증오였다.
"개새끼."
친구는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종로 뒷골목 어둠 속으로 비척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그는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서 있다가 친구와는 반대방향으로 걸어나왔다. 그가 택한 쪽은 불빛 환한 명랑한 거리였다. 그것을 그는 가장 오랜 친구 한 사람을 잃었다. 몹시 울적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친구는 언제부터 그에게 화를 내고 있었을까. 그는 친구가 어디서부터 삐그러졌는지 생각해 보았다.
베레모? 파이프? 술? 아니면 자신의 과묵함? 어떤 것이었을까. 그러다 그는 홀연 깨달았다. 하나가 아니라 그 전부였다. 친구는 처음부터 이를 악물고 있었던 것이었다.
베레모를 안 썼더라도, 파이프를 안 피웠더라도, 거침없이 술을 마셔주었더라도 친구는 역시 그에게 '개새끼'라는 욕설을 안겨주고 떠났을 것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울적한 마음을 거두어 버렸다. 그는 변신함과 동시에 이미 지난 관계들과 완벽하게 단절되었다. 뜨겁게 살아보기 위해선 우선 차갑게 식히기부터 해야 하는 것이었다.
다음 집으로 가기 전에 부동산 남자는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네, 부동산 프라자입니다. 네 시에 가뵙기로 했는데 지금 가면 세시 사십 분이 될 것 같아서 양해 전화 드리는 겁니다. 괜찮겠지요? 어르신 안 들어오신 것 확실하죠? 네 그럼 곧장 가겠습니다."
부동산 남자는 시계를 보며 그녀를 재촉했다.
"큰길 건너편입니다. 절대 집구경 안 시켜주시는 댁인데 아침에 전화드리니까 오후에 어르신이 병원에 가신다고 안주인이 허락을 해주셨어요. 보지면 아시겠지만 그 집은 사실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귀한 집이에요."
값을 매길 수 없는 집은 가보니 몇백 년은 실히 묵었을 고택이었다. 안채와 사랑채의 구별이 엄격하고, 정원과 후원의 모양까지도 전통양식대로 생략없이 꾸며 놓아서 위세 당당한 양반가문의 가풍과 근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이었다. 부동산 남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 집은 경북 어디에 있던 오백 년 묵은 고가를 고스란히 옮긴 것이라고 했다. 수령이 몇백 년씩인 정원의 나무들까지 다 옮겨오는 데 엄청난 경비가 소요되었고 해체시킨 고가를 다시 복원시키는 데 또 그 이상의 노력과 돈이 들었다고 했다.
"문화재급이에요. 보세요. 나무들 옹이자욱하며 저 대들보까지 요새 지은 한옥하곤 댈 바가 아니지요."
부동산 남자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랑채의 길다란 난간에 일일이 새겨진 화려한 수련무늬에 이미 질려 있던 그였다. 전 같으면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비아냥거렸을 그였다. 지금이라고 그 마음이 다 바뀐 것은 아니었다. 전통적인 한옥의 아름다움을 보는 데서 그치지 않고 기어이 누려야겠다는 부자들의 고집은 여전히 이해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러나 서늘하게 가슴을 가로지르는 서까래와 절묘하게 곡선을 이루며 떨어지는 지붕의 선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스물 다섯 평 아파트를 꿈으로 간직하고 사는 사람과 수백 년 역사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집을 꿈으로 삼는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이 이 세상이라고. 건널 수 없는 강이라 해도 강은 거기 엄연히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집을 내놓았을까요?"
단아하게 꾸며 놓은 앞뜰의 연못과 후원의 그윽한 동산까지 꼼꼼하게 둘러보고 나온 그녀가 물었다. 아른아른 사람 그림자가 비치는 노오란 장판을 손을 쓸어보기도 하고, 안방의 오동나무 삼층장과 나무 침상이 어느 장인의 솜씨인지 그것까지 다 물어보던 그녀였다. 여간해선 자신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녀로서는 대단한 관심이었다.
그는 건널 수 없는 강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망설임도 없이 이미 강을 건너버린 모양이었다.
"어르신은 병환 중이구요. 자식들은 모두 미국에서 박사 따고 교수로 있는데 자식들이 어르신을 미국으로 모시려고 그래요. 그쪽에서 치료를 받으면 희망이 있다는 거지요. 처음에는 펄펄 뛰던 어르신도 이 집을 자기처럼 아끼고 간수할 사람이 나선다면 고려해보겠다고 한 발 양보했지요. 어르신은 사실 개인한테 팔기보다 시에서 문화재급으로 이 집을 인수해주길 원하시지요. 그만큼 이 집에 애착을 갖고 있으신 분이에요."
그런 다음 부동산 남자는 듣는 사람도 없는데 목소리를 낮추었다.
"주인 어르신이 왕년에 세도가였어요. 장관을 두 번씩이나 지낸 분이고 장관직 물러난 다음에는 굵직굵직한 국영기업체 회장으로만 돌아다니신 분이라니까요." 남자는 더욱 목소리를 낮추어서 늙은 세도가의 이름을 말했다. 물론 그도 적잖이 들어본 이름이었다. 그런데 그녀한테는 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친숙한 이름이었던 모양이었다.
"아아, 최 회장님 ."
고개를 몇 번 끄덕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그녀의 옆얼굴을 보면서 그는 문득 불안했다. 최 회장 집을 보고 나온 후 그녀는 아직 그한테 어떠냐고 묻지 않았다.
어떤 집이건 일단은 그의 반응부터 기다리던 그녀였다. 지금 그녀의 마음이 가 있는 곳은 어디일까. 어느 순간 강렬하게 그녀의 실체를 만지고 싶었지만, 그러나 그는 참았다. 그가 알 수 없는 어떤 먼 곳, 그녀는 너무 멀리 있다. 그는 아마 영원히 그녀한테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그들은 부동산 프라자로 돌아왔다. 남자는 여직원에게 맛있는 커피를 석 잔 부탁하고서 두툼한 노트를 가져왔다.
"아마 이 근처의 적당한 매물들은 거의 다 본 셈일 겁니다. 조급히 생각 마시고 천천히 결정하세요. 일이억짜리 집이야 후다닥 사고 팔지만 이런 집들은 저도 절대 재촉하지 않아요. 제가 일해보니까 이 동네 집들은 돈이 있다고 아무한테나 팔리는 것도 아니더라구요. 집의 운명이 있다고 할까요. 가만히 놓아두고 있으면 생각도 못한 곳에서 임자가 나타나요. 그래서 전 집주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요. 집이 더디 팔리는 것은 어딘가에 살고 있을 미래의 집임자한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아서 그런 거라구요."
집의 운명. 그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커피잔을 감싸쥔 채 그를 바라보았다.
집의 운명과 사람의 운명을 떠올리고 있을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담담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의 담담한 눈빛이, 잔물결 하나 없이 잔잔한 행동이 부러웠다. 그가 도달해야 할 먼 곳은 아마 저 담담한, 저 잔잔함일 것이었다. 그때가 되어야 비로서 전혀 다른 나로의 변신이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때가 되면 그는 자신까지도 속일 수 있을 것이었다.
"최 회장님 댁은 어떻습니까?"
부동산 남자가 그녀를 보고 물었다.
"아."
그녀는 잠시 커피잔을 들여다보았다. 다음에 이어질 말이 무엇이든 간에 사람을 주목시키는 힘이 그녀의 태도에는 있었다.
"사실은, 제 부모님이 평소에 최 회장님 댁에 관심이 많으셔서 여쭈어볼까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최 회장님 댁에 혹시 변동이 생기면 제게 전화를 해주세요." 부동산 남자의 두툼한 노트에 전화번호를 적고 난 그녀가 그를 돌아보았다.
"나중에 저희가 그 집에 들어가 살 수도 있을 거 예요. 조금 더 나이가 들면 전 그럼 집에서 살고 싶어요. 그곳엔 집의 숨결이 있더군요." "그럼요, 그럼요. 진짜배기 집이지요. 누구라도 한 번쯤은 살고 싶은 집이 바로 그 집입니다."
부동산 남자는 열심히 그녀의 말을 지지했다. 남자는 이제 확실히 알았을 것이다.
그녀의 정체를. 부동산 중개가 직업인 사람의 직감이 맡아내는 그녀의 정체는 어떤 것일까. 그러면 부동산 남자가 추정하는 자신의 정체는 또 어떤 것인가. 그는 차가 떠날 때까지 유리문을 활짝 열어 놓고 그들을 배웅하는 부동산 남자의 아무 그늘 없는 활달한 얼굴을 보고 또 보았다. 그는 그 그늘 없음이 순간적으로, 엄청나게, 부러웠다.
"내일 다른 동네로 가볼까요?"
능숙한 운전 솜씨로 차선을 바꾸면서 그녀가 물었다. 그는 대답할 시간을 벌기 위해 파이프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녀가 차 창문들을 활짝 열었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칼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그녀의 옆모습을 그는 한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저만큼 앞에서 붉은 신호가 들어오고 그녀는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당신 혹시 천 년 묵은 지네 이야기 알아?"
그는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문득 그렇게 말해 버렸다. 운전대에 얹혀 있는 흰 손, 바람에 나부끼는 싱싱한 머리칼, 반듯하게 드러난 이마, 부드럽고 둥근 어깨, 그리고 이 편안한 자동차. 그런 것들이 아마도 그런 말을 하게 시켰을 것이었다.
"그건 왜 물으세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그는 스위치를 눌러 창문을 닫았다. 일시에 소음이 사라지고 고요가 가득 넘쳐왔다. 그는 이제 파이프도 꺼버렸다.
연기가 고요를 흐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을 마친 뒤, 그는 천천히 대답했다.
"당신이 천 년 묵은 지네가 아닌가 해서."
"그래요?"
그뿐 그녀는 한동안 운전에만 열중하는 듯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전 내내 당신이 지네가 아닌가 생각했어요. 천 년 동안 사람이 되기 위해 기다린 지네 말예요."
내가? 내가 지네라고? 천 년 묵은 지네에게 단지 선택 당했을 뿐인 비참했던 선비가 합당하면 합당했지 지네라고?
그는 허허, 웃으려다가 문득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도 가끔은 불안한 모양이었다.
그녀도 이 삶의 제비뽑기로 얻어진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지네가 기다려야 했던 천 년 이란 기간은 어쩌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가장 마지막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을까. 가장 첨단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멸망이 이야기되고, 어제의 시간과 오늘의 시간을 연결한 끈이 사라져 버린 아슬아슬한 오늘이야말로 천 년을 다 채운 최후의 때가 아닐까. 그는 더욱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그녀한테 동지애를 느낄 수 있을까 .
자동차는 이윽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아직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그를 향해 그녀가 아까의 물음을 다시 던졌다.
"내일 바쁘세요? 이쪽이 마음에 안 들면 강남도 있으니까요. 괜찮은 집은 오히려 그쪽이 더 많을 거 예요."
이제는 정녕 그가 대답해야 할 차례였다. 괜찮군, 같은 애매모호한 서성거림 말고 중심이 깃들어 있는 말, 그런 말을 그는 찾아내야만 했다. 그 말이 가슴 속에 들어 있다는 뜻이었을까, 그는 한동안 두 손으로 가슴을 문대며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사이 그녀는 좁은 자리에 간신히 주차를 끝냈고, 자동차의 시동을 껐다. 그리곤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지난 후, 그는 온 정신을 다해 또박또박 가슴의 말을 꺼냈다.
"아니. 다른 데는 필요없어. 집을 새로 짓겠어. 내일 그 동네 다시 가서 집 지을 땅을 알아보는 거야."
그는 자신의 말에 마침표를 찍고 안전벨트를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