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내게로 오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나 자매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눅14:26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가족들과 손절하고 자기 목숨까지도 끊어야 하는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미련한 내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좀 애매하다. 설마 여기의 미워하다(hate)라는 단어가 내가 생각하는 그 미움은 아니겠지. 용렬한 내 생각으로는 아마도 하나님 사랑을 최상위의 가치에 두라는 뜻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에 교회에서 국내성지순례로 위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다 가신 믿음의 선구자 주기철, 손양원 두 분의 기념관을 찾기로 했다.
항일독립운동가
소양 주기철목사
1897. 11.25 경남 창원 웅천면 출생
1916 오산중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중퇴
1922 평양장로회신학교 입학
1925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 받음
1926 부산초량교회 부임
1936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 거부
1938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년형을 선고받음
1944.04.21 평양형무소에서 잔혹한 고문으로 순교
1963 대한민국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됨
(주기철목사 기념관 소책자에서 발췌)
애국지사
산돌 손양원목사
1902.06.03 경남 함안군에서 출생
1915 칠원공립보통학교 시절 궁성요배(궁성이 있는 곳을 향하여 절을
하는 예법)를 거부하여 퇴학 당함
1920 서울중동중학교 재학중 아버지가 3.1운동으로 투옥되어 퇴학
1938 평양장로신학교졸업
1939 여수 애양원 부임
1940 신사참배 거부로 6년간 옥고를 치름(종신형을 선고 받음)
1945 8.15해방으로 석방, 애양재활병원 원장으로 취임
1946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 받음
1948 여순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음, 아들을 죽인 좌익단체 단원
안재선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음
1950 6.25 전쟁때 피난권유를 거절하고 북한군에 의해 순교
(손양원목사 기념관 소책자에서 발췌)
😊 출발
순례길의 안전과 순례를 통하여 큰 감동과 울림이 있기를 기원하는 목사님의 기도를 시작으로 순례길에 올랐다.
😊손양원목사 기념관
두 시간여를 달려서 첫번째 목적지인 손양원목사 기념관에 도착했다. 들어가는 골목길이 비좁아서 대형버스가 드나들기가 수월치 않은데 길가에 주민들의 자동차들이 주차되어 있어서 기사님이 애를 먹었다. 골목을 빠져 나오니 넓은 주차장과 범상치 않게 생긴 기념관 건물이 나타났다.
기념관에 입장하니 내부 역시 특이한 구조로 되어있다. 전시관을 연결하는 통로가 마치 소라 고동 속같이 뱅글뱅글 돌아 들어간다.(노약자는 멀미주의)
전시실에는 손양원목사님의 외손주되시는 목사님께서 우리를 맞아 주셨다. 손양원목사님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을 하나라도 더 전해주시려는 열정이 보인다. 그러다 보니 말이 조금 빠른듯하다. 많은 정보를 한꺼번에 받아들이기에는 내 귀의 성능이 턱없이 좋지 않아서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겠고 느낌으로는 매우 감동적인 이야기인것 같다. 오디오와 비디오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성도님들께서는 감동이 배가되었으리라고 본다.
손양원목사님께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시다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해방이 되어서 6년만에 풀려나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에 교단 내에서도 신사참배를 인정하는 쪽과 결사반대하는 쪽으로 나눠져 있었다고 한다.
김구선생께서 운영하는 학교의 교장으로 초빙했는데 애양원 식구들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이때에 김구선생께서 애송하던 시를 써서 주었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눈덮인 들판길을 걸어갈때에
不須胡亂行(불수호란행) 오랑캐처럼 난잡하게 가지마라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오늘 내가 간 이 길이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뒤에 오는 이들에겐 이정표가 되느니라
지은이가 서산대사라고도 하고 혹자는 이양연이라고도 하는데 나는 모른다.
예수님의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 성자, 사랑의 힘이 원자탄 보다 더 강한 폭발력으로 화해와 평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다고 믿고 실천한 성자의 모습을 주마간산격으로 살펴봤다.
복원해 놓은 생가에서 목사님의 전신상 옆에 모여 앉아서 사진 한장 남기고 다음 주기철목사님의 기념관을 향해서 출발했다.
😊 주기철목사 기념관
한 시간여를 달려서 주기철목사 기념관이 있는 창원시에 닿았다. 가는길에 미리 점 찍어둔 식당에 들려서 점심식사를 해결했다. 누군가가 교회 단톡에 사진을 먹음직스럽게 찍어 올렸기에 무단으로 끌어왔다.
일사각오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하겠다는 목사님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한국기독교 순교자의 명단을 지역별로 표시해놓았다.
목사님 항일운동 모습의 파노라마를 보고있는 어린 영혼에게도 목사님의 믿음이 그대로 전해지길 기원한다.
주기철목사님의 오종기도
1.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2.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옵소서
3. 노모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4. 의에 살고 의에 죽도록 하여 주옵소서
5. 내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살다 가신 목사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헌신을 깨닫고 각오를 새롭게 다지면서 전시관을 나섰다.
두 분의 행적을 따라가다 보니 가슴 밑바닥에서 부터 무언가 형언하기 힘든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한편으론 감히 두 분의 믿음과 비교 한다는 자체가 외람되기는 하지만 나의 모습을 되돌아 보니 부끄럽기 그지없다.
주님
불쌍한 영혼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 돌아오는 길
돌아오는 길에 가까이에 있는 생태공원을 한바퀴돌아봤다.
오늘이 마침 최상문 안수집사님과 이윤정 권사님의 결혼29주년 기념일이란다. 이윤정 권사님은 28주년이라하는데 혹시~
어쨌던 축하 박수를 건성건성 치고 있는데 집사님께서 오늘 저녁밥을 제공하시겠단다. 이때부터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박수를 쩌어억 쩍 쳤다. 두 분 결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는 그날 까지 행복하고 즐겁게 지내시기바랍니다.
여기저기 좀 쏘다니다 보니 업로드가 늦어졌습니다. 현장에서 받은 감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차츰 흐려질 즈음 기억을 되살려서 그날의 감동을 다시 한번 회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