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순천 사건의 진실
큰비(碩雨)
1948년 9월 22일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특별검찰위원회·특별재판위원회가 설치되었으나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로 유야무야 되고 만다. 특히 군인들은 일제 강점기의 경찰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점에 대하여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친일파 청산이 무산된 상황에서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터지게 되었다. 경찰은 경찰 보조병력으로 만든 국방경비대를 얏 잡아 보았고, 국방경비대는 경찰을 친일파 매국노 집단으로 간주한데 원인이 있었다.
미군정은 제주도 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14연대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공화국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군 동원을 극대화하는 무리한 작전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여순사건 발생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1948년 초의 순천 여수지방은 다른 지방보다 비교적 온건한 좌익과 동조세력이 퍼져 있을 뿐, 남로당의 영향력은 미미한 상태였다.
14연대의 좌익세력들은 10월 들어 미군정의 군내 좌익 제거작업 때문에 동요하고 있었다. 제주 4·3 당시 박진경 중령이 암살되면서 미군정이 시작한 숙군작업은 점차 강도가 높아 가고 있었다. 연대내의 좌익세력들은 숙군의 대상으로 죽는 것보다 집단 탈영하여 목숨을 부지하자는 의견이 오가고 있었다. 지창수를 비롯한 김지회, 홍순석 등 좌익계의 하사관과 장교들은 경찰에 반발하고 있던 사병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좌익세력으로 끓어 안고 있었다. 그러나 남로당 전남도당은 좌익들의 집단행동에 대해 아직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의 14연대 좌익세력의 집단행동에 동의하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14연대장 박승훈 중령에게 육군총사령부로부터 제주도로 파견할 1개 대대를 편성하여 대기하라는 작전명령이 떨어졌다. 숙군대상으로 짚어지는 병사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지창수는 편성에서 빠져 있었다.
지창수는 곧바로 10월 19일 밤 좌익계열이거나 정권에 불만이 큰 하사관들을 소집해 대책을 협의하였다. 결과로 제주도로 이동 중 선상반란을 계획한 후 남로당 전남도당에 지원을 요청하나 이루어지지 않는다. 장교식당에서는 출동장교들의 환송파티가 7시경 끝나고 장교들이 쉬고 있는 사이 연대장과 부연대장은 여수항에 나가 승선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열 시가 채 안된 시각인데 갑자기 비상나팔이 소리가 울려 퍼졌다. 2700여명의 장병들이 집결하자. 지창수가 연단으로 뛰어 올라갔다.
“지금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 지금 조선인민군이 남조선해방을 위해 38선을 넘어 남진 중에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며 장병들을 선동하였다.
대부분 장병들은 이에 동조한다. 이를 반대한 하사관 세 명은 즉석에서 사살되었다. 국기게양대의 태극기는 인공기로 교체되었다. 순식간에 영내 반란통합이 이루어진다. 지창수는 스스로 인민해방군의 연대장이 되고 뒤따르던 하사관들은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분대장으로 삼아 반란군 조직을 마쳤다. 자정이 되었을 때 이들은 여수 시내로 나갔다. 여수시내의 좌익단체 및 학생단체 600여 명에게 무기가 지급되고 새벽 3시 경에는 여수경찰서를 접수하고 새벽 5시경에는 군청, 시청, 관공서, 은행, 신문사 등 중요기관을 점령하였다. 9시 경에는 여수의 전 시가지는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들은 우익인사와 우익청년단 등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경찰관과 각 기관장, 우익단체원, 지방유지 등은 반동분자가 되어 경찰서 뒷마당에 결박당하고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즉결처분 되었다.
거리에는 인공기가 계양되기 시작하여 오후에는 전 시가지가 인공기의 물결을 이루었다. 오전 10시경부터 경찰서와 군청에는 보안서 및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4연대는 ‘제주도출동거부병사위원회’ 이름으로 「애국 인민에게 호소함」이라는 성명서에서 “모든 애국 동포들이여! 조선 인민의 아들인 우리는 우리 형제를 죽이는 것을 거부하고 제주도 파병을 거부한다. 우리는 조선 인민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싸우는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되려고 봉기”했다고 밝히고, ‘동족상잔 결사반대’와 ‘미군 즉시 철수’ 등을 요구하였다.
10월 20일 오후, 수천 명이 참가한 인민대회에서 “인민위원회의 여수행정 기구 접수, 대한민국 분쇄 맹세, 친일파 민족반역자 경찰관 등을 철저히 소탕,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실시” 등이 결의 되었다. 여수, 순천의 지방 좌익세력과 청년·학생들이 봉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한편, 오전 9시 30분경 반란군 700여 명이 기차로 순천역에 도착하자 순천의 2개 중대가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순천경찰들은 피신해버렸다. 반란군이 나타나면 대치 병력들이 합세하는 양상이 이어졌다. 10시경 4연대까지 반란군에 합세하였다. 경찰 등의 방어체계는 모두 무너지고 말았다. 당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승만 정부보다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와 이웃 관계가 더 중요한 상황이었다.
순천을 점령한 반란군은 3개 부대로 늘어나 1천여 명이 학구 쪽으로 나아갔다. 또한 일부는 광주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 보성, 화순 방면으로, 경상도지방으로 진출하기 위해 광양, 하동 방면으로 아무런 방어를 받지 않고 진격해 갔다. 다른 지방 토착 좌익들은 군중을 선동해서 경찰서를 공격하는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국방장관 이범석 주재의 국방부 긴급대책회의가 끝나고 21일 미 군사고문관인 하우스만 대위는 오후에 특별반을 이끌고 광주로 내려온다. 10월 21일 육군총사령부에 토벌사령부가 만들어지고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광주에 파견되어 본격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정부당국은 당시 3.8선에 8개 연대 병력을 남기고, 대부분의 병력을 여순지구로 파견하였다. 지방의 사태 때문에 3.8선을 허술하게 비우는 위태로운 군 작전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22일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그날 오후 3시 제12연대 2개 대대가 순천 공격을 개시하였다. 23일 새벽까지 제 2연대 1개 대대, 제 4연대 1개 대대, 장갑차 부대, 경찰부대는 이른바 동순천역의 인민군사령부를 박격포와 정찰기의 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부대를 앞세워 총공세를 취하였다. 좌익세력의 미미한 저항이었으나 오전 11시경에 순천시내의 전역을 탈환할 수 있었다. 벌교지방과 보성지방도 10월 24일까지 완전 진압되었다. 좌익 지창수가 주도한 여순사건은 사실상 8일 만에 막을 내렸다,
여순사건에 대하여‘제주도 유격대에 가해지고 있던 정부의 압력을 분산시켜 제주도의 혁명을 성공시키고 본토에 제2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전국적인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좌익세력들이 계획적으로 발발시켰다는 분산압력설’을 주장하기도 하나, 그런 개연성은 있을 수 있지만 이 주장의 근거가 확인된 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