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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철학의 여러 단계들(1912),
브륑슈비크(1869-1944), P. 592.
제1부 구성의 시대 Période de constitution 01
제1권 산술학Arithmétique. 03
제2권 기하학Géométrie 43
제3권 무한소 분석Analyse infinitésimale 153
제2부 근대 시대 Période moderne 251
제4권 비판철학과 실증주의 La philosophie critique et le posivitisme 253
제12장 칸트의 수학적 철학La philosophie mathématique de Kant 253
제13장 오귀스트 꽁트의 수학철학 La philosophie mathématique d‘Auguste Comte 282
제14장 과학적 토대들의 변형Transformation des bases scientifiques 302
제5권 산술학의 진화 L’évolution de l’arithmétique 341
제15장 수의 독단론Le dogmatisme du nombre 344
제16장 산술학의 유명론Le nominalisme arithmétique 354
제6권 수리[논리]계산의 운동 L’mouvement de logistique 369
제17장 수학들의 수리[논리]계산 철학의 형성 Formation de la philosophie logistique des mathématiques 370
제18장 수리[논리]계산적 철학의 붕괴 Dissolution de la philosophie logistique 394 §234
[1절] 분석적 해석의 난점들 Les difficultés de l’interprétation analytique 395
[2절] 계층들에 대한 실재론의 난점들 Les difficultés de réalisme des classes 403
제19장 절대적 연역의 관념 L’idée de la déduction absolue 411
[절대 공간이란 용어가 이 쯤에서 논의 되는가?]
[1절] 뉴턴의 “절대들” Les “absolus” newtoniens 413 §247 §248 §249 §250
[2절] 퇴행적 연역과 전행적 연역 Déduction régressive et Déduction progressive 419 §251
[3절] “에피메니데스”의 해결, La solution de l’“Epiménide” 421 §252 §253 §254
[4절] 논리계산 비판의 결과 Le résultat de la critique logistique 424 §255 §256
제7권 ... 제2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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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장 절대적 연역의 관념 L’idée de la déduction absolue 411
[절대 공간이란 용어가 이쯤에서 논의 되는가?]
1절 뉴턴의 “절대들 ” Les “absolus” newtoniens 413
§247. [뉴턴의 절대는, 시간과 공간의 규정된 조건 하에 성립한다. 그 조건에서 절대적이다.]
러셀의 사유에서 실재론의 특권이 논리계산의 비판이 그 자체로 폭로했던 치명적 모순들에서 살아남는다면, 과학의 명제들이 진리라는 것을 원리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 왜냐하면 그 명제들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명제들이 그것들의 검증에 앞서서 초월적 실재성의 자격으로 현존하기 때문에 - 과학적 회의주의를 회피하기 위하여 그에게 필연적인 것처럼 나타날 것이다. [한편] 또는 과학이 착각의 인상들로 짜여진 직물인지, 인간적이고 주관적인 꿈인지 간에, 그리고 러셀이 칸트 철학으로부터 부여한 야릇한 해석에 따라서 비판적 관점이 심리학주의로 끌려들어간다. [다른 한편] 또는 존재론적으로 말하자면 절대 운동, 절대 시간, 절대 공간과 같은 것이 있다. (412)
우리들에 따르면 소위 말하는 딜레마는 형이상학의 언어와 과학의 언어 사이에 일련의 혼동들을 함축하고 있다. 이 혼동들은 현대의 여러 토론들에서 그것들의 그림자를 던졌다. 그리고 이 혼동들로부터 수학적 철학의 지평이 한정적으로 분간된다는 것을 욕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412)
절대운동의 관념은 내밀한 삶의 자료들에 연결되어 있다. 그 운동은 우리들로부터 발산한다. 또는 우리들 안에서 재현하면서 운동은 개별적 질서의 감각작용들을 동반하며, 감작작용들은 현상들의 실재성에 근거한다는데 의심으로 남겨져 있지 않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절대적 운동을 믿는다. 이런 믿음은 많은 경우들에서 충분하다. 벩송은 데카르트에게 편지를 쓴 영국철학자인 모루스(1614-1687)의 농담을 끌어왔다. “나는 조용히 앉아 있고, 다른 이는 1마일이나 멀어지면서 피로로 [얼굴이] 붉다. 움직이는 이는 바로 그이고, 쉬고 있는 이는 나이다.”그런데 사람들이 독창적인 형식 아래서 의식에 주어진 개별적 행동의 지평을 넘어서는 정도에서, 지각작용에서 끌어낸 귀납법들은 우리에게 오류를 끌어낼 위험에 처하게 한다. 매 순간에 우리를 희생자들로 만들 시각적 착각들은 통속인의 우상을 파괴한다. 절대적으로 나타나는 운동은, 우리가 쳐다본 공간의 장소와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의 순간이 우리에게 부여한 전망에 상대적이다. 근대 천문학에서는 우리가 태양이 움직이고 있다고 본다고 하더라도, 움직이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지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는 우리 눈에는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과학은 겉보기이고 상대적인 운동들 사이에서, 예를 들어 지구 표면의 규정된 점에서 깨닫게 된 행성들의 운동들과 별들과 같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된 기준에 연관하여 완성된 동일한 운동들 사이에서, 실증적이고 합법적인 구별을 확립한다. 이 후자들의 운동들은 단어의 엄격하고 존재론적인 의미에서 절대적일 수 있는가? 뉴턴은 절대적이라고 선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거의 항상 논쟁이 멈춘 것은 그의 권위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상 근본적인 용어들 중에서 상대성에 대하여 뉴턴보다 더 깊이있게 꿰뚫었던 과학자는 없으며, 사람들은 이런 상대성을 과학적 제시의 처음에 도입한다. “그에게 있어서, 과학의 종합적 부분은, 그 과학이 한정한 일련의 진리들을 인정하는 정의들로부터 연역된 부분은, 유일한 것도 없고 가장 중요한 것도 없다. 그 부분은 정의들에게 정당하게 도달한 분석적 탐구들로부터 항상 진행되었다.” (413)
사실상 단지, 그의 정신의 특성에, 그리고 시대의 선입견에, 근거하는 이유들에서, 갑작스런 구절이 뉴턴에게서 경험 철학에서 신학으로 이행한다. 그런데 그 신학은 보편적 온존재의 구조를 또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에 관계를 전혀 무시하고자 원하지 않는다. 이때에 운동의 절대는 마치 시간의 절대와 공간의 절대로부터 결과하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 두 절대는 이것들의 원리를, 신의 영원성과 무한성 속에서 이것들의 지원을 재발견한다. “그것은 항상 지속하고 도처에서 현재이다. 그리고 항상 현존하며 도처에 있다. 그것은 지속과 공간, 영원성과 무한성을 구성한다.”실증과학은 블로흐(Léon Bloch, 1876-1947)의 표현에 따르면, “형이상학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신비적인” 그러한 연관을 고려하지 않는다.그러나 만일 그 과학이 뉴턴이 상기시켰던 철학 외적인 요청들을 물리친다고 하더라도, 그 과학은 절대적인 것과 상대적인 것의 과학적 구별을 천만에 폐기하지 않을 것이다. 과학은 단순하게 이 구별에게로 진실한 의미를 회복할 것이다. 이는 마치 그 구별을 실재적인 것과 겉보기인 것의 구별처럼, 보다 정확하게는 아마도 전체적인 것(le total)과 부분적인 것(le partiel)의 구별처럼 해석하면서이다. 절대적 운동은, 우주의 모든 운동들이 유일한 체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은, 다시 말하면서 경험이 우리에게 부과하는 정확한 조건들에 따르면 관성의 고전적 원리가 증명되는 것과 같은, 삼면체 기준틀(un trièdre de référence)로부터 주어진 운동이다. 이 조건들을 비추어서 그것의 의존성에 의하여, 과학적으로 절대적 운동은 운동의 형이상학적 상대성을 표출한다. 인식의 근본적 상대성위에 과학적 절대의 합법성을 확립하는 것, 따라서 생산성없는 토론들의 시대를 닫게 하는 것, 그것이 비판적 발견의 가장 값비싼 결과물이다. (414)
§248. [일반인은 시간을 절대적이라 말한다. 시간은 기원 또는 원천에서부터 직관의 대상이다.]
− 불행하게도 독단적이고 실재론적인 그의 신앙선언에 의하여, 러셀은 칸트 사상의 은혜(bénéfice)라는 것으로부터 박탈당했다. 절대적 운동의 주장으로부터, 그 주장 없이 어떠한 과학적 가설이이라 할지라도 무차별적으로 어떠한 다른 가설로 대체 될 수 있을 것이고, 그 주장 없이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체계가 프톨레마오스(100경-168경) 체계 보다 우월한 진리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인데, 시간 속에 절대적으로 주어진 찰나들의 필연성과 공간에 절대적으로 주어진 점들의 필연성에서 결론을 내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시간적 또는 공간적 관계들은, 시간의 흐름 또는 공간의 현존과 독립적으로, 형이상학적 현존으로부터 부여받은 항목들 사이에 확립된다. (414)
그런데, 사람들이 마치 과학의 객관성에서 내포된 것처럼 소개하는 시간과 공간의 이런 개념작업들은 거의 도박들(les gageures)의 효과를 만드는 형이상학적 파라독사들이다. 그것의 찰나들 각각이 실재성 자체인 것으로, 또 사람들이 그것을 다루는 의식과는 독립적으로, 되는 방식에서 심리학적 삶을 객관화하면서, 사람들은 시간이 절대(un absolu)라고 말할 것이다. 단지 이렇게 사람들은 구체적 실재성을 재결합하는데 이르지 못했다. 현재의 활동성 속에서, 존재의 무매개적인 직관에서 어느 정도로 소진했을 시간에게는, 아믈랭(1856-1907)의 매우 주목할 만한 논평에 따르면, 지속 그 자체, 즉 계속(la succession)으로부터 구성하는 뭔가가 부족하다.모든 사물은 시간 안에 있다. 그러나 그 [사물 속에] 시간은 단지 기준 점들을 배열한 시간을 산다(vit). 기준점들 덕분에 시간은 자기의 고유한 변화들에 대한 지성에 이른다. 어떻게 이 기준점들이 그 자체로 주어진, 그리고 외적 관조의 대상이 되게 허용할 수 있는, 항들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 때에 하나의 존재를 가정해야(그리고 효과적으로 우리는 뉴턴이 그렇게 했던 것을 보았다) 할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 존재는 시간의 모든 찰나들로부터 시간적이고 동시대적인 생성을 뛰어넘었다. 만일 조건들이 직접적으로 모순적이 아니라면, 조건들은 적어도 우리 사유를 위하여 실현할 수 없이 남을 것이다. 사실상 만일 시간의 문제가 인간에게 제기되면, 그것은 시간 그자체가 시간의 매순간마다 시간적 계열의 새로운 항이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현존에 대한 의식이기에 때문에, 계속적인 항들의 다곱성(multipicité)을 단위(l‘unité) 속에서 발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만일 사람들이 시간을 넘어서는 내적 원리에 근거하여 시간적인 존재의 단위를 토대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면, 그 경우에만 해결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마치 스피노자가 그걸 원했던 대로, 창조적 통일성의 원리이다.또는 만일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내재성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법칙이다. 이 법칙은 그 자체로 내밀한 상태들의 독창적 계열(la suite)에 집중한다(lex continuationis seriei suarum operationum)[그것의 계산작업들의 계열로서 연속성의 법칙.] 또한 이 법칙은 코엔(Cohen, 1842-1918)과 나토릅(Natorp, 1854-1924)의 행복한 표현에 따르면 원천(der Ursprung, 기원)을 구성한다. (415)
라이프니츠의 정식은, 사람들이 신적인 기하학의 평면에서 각 모나드에게 고유한 법칙을 전개하는 형이상학적 관점으로부터 이 정식을 분리하기를 동의한다면, 시간 속에서 사는 존재를 위하여 시간의 이해[내포]의 조건들을 더 이상 아무것도 재현하지 못한다. 라이프니츠에 대한 역사가인 러셀이 카시러(1874-1945)에게 변화의 법칙의 알 수 있는 가능성을 이의로 제기할 만큼이나 더 많은 호기심이 있다. “무엇에 대한 변화인가? 무엇으로부터 인가? 무엇을 향하여 인가? 라고 사람들은 자문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논리적 개념들을 수단으로 해서만이 이런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들로부터 존재(Being)은 시간을 고려하여 모든 의존성에 자유롭고, 그리고 이어서 필연적으로 불변일 수 있다.”러셀이 분명하게 그의 반대들에게 제공하는 동일한 차례[순서]에 의해, 그는 시작에서부터 정신은, 항들을 통합하는 관계들로 이행하기 위하여 불변하는 항들의 직관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런데 계열[급수] 법칙의 예는 정당하게 반대를 증거할 운명에 처해 있다. 항상 동일한 차례이지만 연관의 예는 무한한 계속적인 항들을 파생한다(dériver). 그러한 계속은 마치 구체적 계속을 위한 추상적 상징과 같다. 우리는 이 구체적 계속에 대해, 지성의 근본적 역동론[동력학] 위에 우리의 시간적 생성을 지탱하면서 감정을 획득할 것이다. (415)
§249. [시간의 절대성을 공간의 상대성으로부터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추론상 공간의 절대성을 찾아야 시간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
절대적 운동과 절대적 시간의 토론은, 러셀이 거기서 이미 알렸던 인위적 모순들을 사라지게 할 희망을 갖고서, 우리에게 공간의 상대성이란 용어에 접근할 수단을 제공한다. (416)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같은 형이상학자들에 명증하게 나타나는 이런 상대성은 러셀에게서는 “명증을 부인하는”방편이다. (416)
게다가 우리는 상대론을 불합리로 환원하는 것은 쉽다고 고백한다. 그것은 모든 명제는 주어와 술어를 갖는다고 가정하는 전통적 논리학의 틀 속에서 상대론을 고려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때에 공간은 다수의 사물들의 술어이거나 또는 하나의 유일한 사물의 술어이다. 전자의 경우에서, 즉 모나드론(le monadisme)에서, 러셀은 라이프니츠의 원전을 참조하면서, 공간 속에 사물들이 이미 위치해 있었을 경우에만 사람들이 공간적 관계를 사물로부터 추출했다는 것을 증거 한다.후자의 경우에서, 즉 일원론(le monisme)에서, 사람들은 이 이론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관계들이 확립되었던 항들의 구별을, 즉 관계들의 실재성을 위하여 필연적 조건이 있을 것이라 구별을, 부인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로쩨(Lotze, 1817-1881)의 관계들의 이론은 관계들이 전혀 없다는 주장으로 환원된다. 전술한 이론(스피노자와 브래들리 같은 이론)의 가장 논리적인 정합성이 그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하나의 사물, 즉 신 또는 절대자(l’Absolu)만을 귀결로서만 인정했고, 명제들의 유일한 전형, 즉 술어를 절대자(l’Absolu)에게 속성이게 하는 귀결만을 인정했다.” (249)
결론은, 아마도 모든 관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의 형상과 결혼해야만 했던 가설에서는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péremptoire, 소권소멸) 것이 되었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혁명이 근대철학을 정화[숙청]하려 온 것이 이 가설로부터가 아닌가? 데카르트의 규칙들(1628년)의 직관은 실체 또는 성질과 같은 단순한 항들의 이해와 아무 공통점이 없다. 그 직관은 두 수 사이에에 확립되어있는 단순한 관계를, 그리고 거기서부터 제3을 연역하게 허락하는 단순한 관계를 대상으로 삼는다. 즉 8은 4와 연관이 있고 4는 2와 연관이 있다. 마찬가지로 공간적 크기들은 순수하게 지성적인 연관들에 의해 정의된다. 그 이유는 스피노자의 실체가 너비의 성질들에 속하는 논리적 주어가 아니라, 공간적 연관들의 총체성에 의해 표현된 근본적 단위이기 때문이며, 보다 정확하게 마치 너비 속에서 공간적인 것처럼 또 마치 사유 속에서 이상적인 것처럼 동시에 속하는 연관들의 총체성에 의해 표현된 근본적 단위이다. (416)
따라서 공간적 관계를 논리적 관계로 환원하는 것을 거부해야만 한다. 그 관계(elle)는 관계 그자체(per se)이며, 라이프니츠가 그것을 인정했고, 러셀 그자신의 고백에서도 관계 그자체이다. “이 연관은(ce rapport) … 적절하게(bien)주체들의 밖에 있다. 그러나 … 실체도 아니고 우발사건도 아닌데, 그러한 겄은 순수하게 이상적 사물이어야 한다. 이 사물에 대한 고찰은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이때부터 라이프니츠에게서 공간적 질서의 개념작업은 모순 작업들에게 실마리를 더 이상 제공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순작업들에 대한 그 개념작업을 제압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마치 우리가 시간적 질서를 위하여 그것[개념작업]을 이미 제시했던 것처럼, 사람들이 모나드들 사이에 전망들의 질서를 탐구하지 않고서, 하나의 모나드에게서 우주의 전망에서 개념작업을 제한할 것이 오로지 편리할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칸트 비판의 긍정적 결과를 새로이 수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결국 그것을 보았던 대로, 칸트에게서는 공간은, 보편적이고 추론적인 개념들을 생산하는, 이법[이성]이 마치 논리적 역량처럼 고려되었다는 정도에서만 비합리적 형상일 뿐이다. 만일 사람들이 이에 따라 공간은 논리적 관계들로 연역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공간이 절대(un absolu)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뉴턴이 절대에게 속성으로 부여했던 초월의 성격을 이런 절대에게 부여하는 것, 이것은 비판론[순비]의 거꾸로 되돌아가는 것이리라. 이는 그 자신[뉴턴]이 자기의 고유한 “경험 철학”의 반대의미로 가는 것이다. (417)
§250. [뉴턴의 공간은 추론과 논리와 관계없이 절대적으로 따로 있다. 그래서 그의 천문학이 법칙[만유인력법칙]을 넘어서 원리처럼 여겨진다.]
적어도 뉴턴의 신학론은 이런 절대를 상상하게 허락했으며, 이것을 신적 직관에 묶어놓았다. “분석적 실재론”은 인간적 정신 또는 신적 정신의 개입을 배제한다. 공간의 점들은 그 자체로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공간적 관계들은 그것들 사이에서 확립된다. 마찬가지 방식으로, 추론의 재료[질료]인 논리적 관계들은 앞서 주어진 항목들 사이에서 확립된다. 우리는, 그러한 가설이 우리에게로 끌려갈 갓 같이 보이는, 논리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난점들에 관해 강조할 필요가 없다. 공간 속에서 하나의 요소를 절대적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 그것은 자리차지 자체(cette position même)에 의해 그것[요소]에게 위치(une place, 장소)를 할당하는 것이다. 그 위치로부터 모든 다른 요소들이 배제되었다. 한 점의 공간적 긍정은 모든 점들의 공간적 부정에 동등한 가치가 있다. (417)
공간이 비조건적으로 절대라고 하는 원리는, 각 점에게 외부에 있다고 여기는 그 무엇과 어떠한 관계없이, 절대적 현존이라는 그것[원리]의 능력을 그것 자체로서 소모하면서, 각 점이 그 원리 자체로서 현존한다는 것을 요구하다. 그 원리는, 사람들이 절대적 점으로부터 서로서로 외적인 다양한 항들로 이해할 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그 점만이 공간일 것이다. 반대로 공간의 실재성은 다양한 항들의 동시적 현전을 함축한다. 그리고 이런 동시성은, 적어도 공간이 마치 상호 외적인 중간(milieu)처럼 정의 되는 한에서, 공간적일 수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공간적 계열로 된 항들의 동시성은, 계열의 잡다한 점들의 편재(une omniprésence, 온갖 곳의 현전)를 함축하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비 공간적 실재성의 특성이며, 정신의 특성이다. 뉴턴의 신은 공간의 여러 다른 영역에서도편재적(une omniprésent, 온갖 곳의 현전)이다. 그리고 그것의 초월성 덕분에, 신은 존재론적 절대의 성질을 공간에게 옮길(이전할) 수 있다. 인식의 인간적 주체는 공간의 여러 다른 점들에 편재적이며, 그리고 마치 자신[주체]에 상대적인 것처럼 우주의 재현작업[표상]을 제시한다. 이리하여 기하학자는 삼각형 ABC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ABC 세 꼭지점들을 동시에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지점들을 마치 서로서로 상대적인 것처럼 정의한다. 만일 공간이 형이상학적으로절대였다면, 그는 한 점A 또는 한 점B 또는 한 점C가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cet point)의 긍정주장에 대한 [지성] 작용은 이것들[ABC]과 더불어 혼동되고 또한 갇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점의 공간성은 A가 B 아니고, 도 B는 C가 아니라는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공간성의 자리차지(sa position)의 비조건성은 공간을 다른 점과의 모든 관계를 독립적이게 한다. (418)
상대성의 이런 개념작업이 절대 공간의 과학적 주제와 전혀 모순이 아니라는 것을 덧붙일 필요가 있는가? 사람들이 공간적 관계들의 특수성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또 특히 논리적 관계들과 그것들의 양립불가능성을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내는 공간이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내가 A 또는 B 또는 C라는 출발점으로서 무차별적으로 취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내가 A로부터 AB관계를 연역한다는 것을, 그리고 A와 B라는 점들을 의지적으로 제시하면서 내가 그 관계를 창조한다는 것을, 전혀 의미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임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한 점으로부터, 임의적이지 않는 관계 망을 구축한다. ABC라는 삼각형은 ACB, BAC, BCA 등의 삼각형들과 동일한 것이다. 이런 동등성을 증명하는 것을 상대성 이론에게 묻는다는 것, 그것은 그 이론에게 불합리한 요구를 부과하는 것일 것이다. 만일 그런 증명작업이 가역성에 이르러야만 하는 공간의 경우에서 필연적이었다면, 그 증명작업은 불가역성에 이르러야만 하는 시간의 경우에서도 덜 필연적인 것이 아닐 것이다[그래도 필연적일 것이다]. 동시성의 형식은 나에게 부과되는 재현작업의 조건이다. 나는 공간을 구축하면서, 마치 계속의 형식이 내가 시간을 구축하면서 복종하게 될 둘째 형식인 것처럼, 이 조건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형식들은 내적인 필연성을 표현하기 때문이고, 왜냐하면 형식들은 개별적 의식의 [내적] 자료들을 넘어서기 때문에, 이 형식들은 절대라는 겉모습을 띠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 순수이성 비판의 교육에 따르면, 무의식적 정교화의 심층들 속에 감추어진 정신의 상대성은, 필연적으로 또 이런 정신자체를 위하여, 절대의 성격을 취급한다. 공간은 과학적으로 절대적이고 형이상학적으로 상대적이다. (419)
2절 퇴행적 연역과 점진적 연역 Déduction régressive et Déduction progressive 419
§251. [연역법의 두 방향: 하나로 또는 무한으로, 그런데 그 하나가 전혀 없음(공집합)과 같은 것으로 향할 수 있는가? 없다. 그처럼 단위 없는 무한으로 향할 수 있는가 없다. 결국 영과 무한은 서수가 아닐지라도 기수로서 형이상학적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런 정식에 관하여 강조했다. 왜냐하면 이런 정식은, 러셀의 실재론이 수학적 철학의 기원에서 축적했다는 난점들이 얼마나 착각적(illusoire)인지를 이해하기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역학은 이런 정식 앞에 찰나들의 계열 또는 점들의 체계를, 마치 계열과 체계의 형성 작업에 앞서서 항들 각각이 그 자체에 의해 절대적 현존을 부여받았던 것처럼, 만날 필요가 없다. 반대로 시간과 공간의 구성작용은, 역학이 그것의 탐구들의 수평을 넓게 하는 정도에 따라서 효과적으로 완성된다. 역학이, 보다 더 후퇴한 시간의 찰나에 더 멀리 떨어진 공간의 점에게, 보편적 운동들의 규정작업을 묶는다는 정도에 따라서 효과적으로 완성된다. (419)
따라서 실증적 과학 속에서, 뉴턴 자신이 “경험 철학”의 이름으로 정식화했던 교훈을, 그리고 라브와지에가 화학이 정의상으로 조직화했던 시기에 새로이 알렸던 교훈을 잊도록 아무것도 우리에게 허가하지 않았다. 일반적 항등 또는 단순한 자연들이라는 첫째의 관념들로부터 진행한 점진적연역은, 기본적인 관념들에게로 인도하는 퇴행적연역과 더불어 상호연관에서만 가치와 범위를 갖는다. (419)
점진적 연역이 다른 방향(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또 절대 속에서 제시될 앞선 분석으로부터 분리될 종합의 방향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형이상학적 편견의 연속에 의해서 이다. 결국에 이런 주장에 의해 사람들은, 과학자가 우주에 대한 자신의 구축에 무게를 두는 제한을 회피한다고 또 절대적 연역의 논리학적 또는 존재론적 이상에 만족한다고, 허풍을 떨었다. 이리하여 퇴행적 연역은 기하학적 차원의 관념을 일반화하는 것을, 그리고 3차원으로부터, - 3차원의 관념은 직관에 의하여 암시되었던 - n차원의 추상적 개념으로 이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일단 이 개념에 도달되었다면, 논리계산의 철학은, 개념의 존재이라는 소위 기하학적 적용으로부터 개념을 독립적이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예를 들자면, 만일 사람들이 차원의 무한한 수로 투사하는 공간의 분석을 위하여 필연적인 요청들의 목록을 세운다면, - 피에리(Pieri, 1860–1913)의 표현을 따르면 절대적 투사 공간인데–사람들은 17가지 요청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인한다. 마치 3차원의 투사 공간을 정의하기 위하여 19가지 요청들을 필요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꾸뛰라(Couturat, 1868-1914)와 더불어 이로부터 “논리적 관점에서 후자는 전자보다 덜 단순하다”라는 결론을 낸다. (420)
이런 관점으로부터 한 번 더: “사람들은 무한 수들의 이론이 유한 수들의 이론보다 더 단순하다고 거의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론이, 후자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귀납의 원리를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리고 사람들은 유한 수들의 이론에 의해 이행하지 않고서도 그 원리를 확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집합 이론의 발전은 표출[공언]하는 것을 효과로 삼았다고 하는 난점들이 이런 명백한 단순성 아래 감추어져 있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유한하든 또는 무한하든 기수들의 합계(la somme), 생산(le produit), 지수(la puissance)를 정의한다.”는 일반적 산술학을 기초하기 위하여, 하나의 요청은 1904년 쩨르멜로가 명시했던 요청이며, “없어서는 안 될” 요청이다. “0아닌(non nulle)[공집합 아닌] 배타적 계층들 중의 한 계층이 주어지면, 사람들은 계층들 각각의 요소를 추출할 수 있다.”계층들의 수가 유한한, 계산조작의 합법성은 직관적으로 명증하다. 무한한 수의 계층들을 위하여 합법칙성은 증며의 모든 시도에 저항하다. (420)
따라서 기하학이든 또는 분석학이든 합리적 역학의 영역 안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논리계산의 실재론이 수학에 중첩했다는 것과 동일한 관념을 형이상학의 근원에 중첩했다는 것을 재발견한다. 우리는 절대적 가치를 관념 그 자체에게 수여될 수 있는 점진적 연역의 관념을 재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관념은 실재론이 수학 철학에 도입했던 모순들의 심오한 이유이다. 동시에 우리는 고려할 수 있다. 만일 모순들이 해결될 수 있다면, 이런 해결은 논리계산의 형이상학을 위하여 승리이기는커녕, 모순의 한정적 파괴에 전념했다. 왜냐하면 그 해결은 명백하게 점진적 연역의 질서를 퇴행적 연역의 질서에 종속시키는데 있다. (421)
3절 “에피메니데스”의 해결, La solution de l’“Epiménide” 421
§252. [‘인간은 거짓말한다’라는 진술은 긍정이고 진실하다고 받아들여 한다. 그리고 악순환을 피하기 위한 것은 이 진술의 귀결과 맞추어보아야 할 것이다.]
러셀이 모순들을 이끌고 갔던 요소적 형식 하에서, 말하자면 사람들이 ‘나는 거짓말한다’는 이런 단 하나의 주장으로부터 끌어낸 제1참조에서, 모순들을 고려해 보자. 어떻게 러셀은 ‘나는 거짓말 한다’의 소피즘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는가? (421)
인간이 ‘거짓말한다’고 해보면, 논리학은 명제들의 내용에 대해 추상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학은 자기의 기술적 구조의 규칙들을 거부하지 않고서는 그런 것같은 내용을 도입할 수 없다. 그리고 논리학은 거짓말(le mensonge)의 심리학적 성격 때문에 단순하게 또 솔직하게 거짓말의 진술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거짓말의 배제를 논리적 항목들로 번역해야 하고, 배제의 원인은 오로지 심리학적 질서로부터이다. (421)
거짓말의 심리학적 사실은 거짓말의 진술에서 악순환을 끌어낸다. 악순환의 제거는 하나의 원리를 높이로 올려놓았다: [그 원리란] 악순환의 원리 그 자체가 “악순환의 파라독사들의 해결”인 것이 아니다. “이론이 해결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제공해야만 하는 것은 오로지 귀결”이다. (421)
적어도 그 이론은 극히 단순하다. 이 이론은 논리계산의 항목론[용어론]을 개조하는데, 외피해야 하는 난점들의 외부 윤곽을 부드럽게 따라가면서 행한다. ‘내가 거짓말한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내가 긍정하는 명제이고 그리고 거짓인 명제인 p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주장이 거짓이라는 그 사실 자체에 의해서, p에라는 거짓의 주장은 진리이다. 명제 p가 소위 말하는 주장의 대상인 한에서, 모순은 피할 수 없다. 모순의 피하기 위하여, 따라서 러셀은 p 는 소위 말하는 주장의 대상이 아니라고 결심할 것이다. p가 어떤 대상에게 그것을[p 자기를] 적용할 수 있게 하는 비결정작용을 본질적 성격으로 간직하면서, 또한 [p가] 명백한 변수이면서, “명제라는 단어는, 어떠한 명백한 변수도 포함하고 있지 않는 하나의 진술에 의해 주장되었던 것에 … 유보되었다.” 러셀슨 결론내릴 수 있다. “‘나는 거짓말한다’고 말하는 인간의 진술행위는, 거짓이다. 왜냐하면 그가 진실한 명제를 발언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진술행위를 행하면서 그는 명제를 진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53. [러셀은, 수학적 귀결들이 논리적 원리들을 성립시켜준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논리적 원리가 먼저있음을 인정한다. 악순환인가? 러셀에게서, 수학은 논리학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논리학의 성립을 보장하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기서 러셀의 절차는 어떤 절차인가? 예를 들어, 약간 조잡한 것이지만, 우리의 생각을 밝힐 것이다. (422)
1848년 혁명의 다음 날에, 프랑스에서 중산층들은 보편선거의 첫째 경험에 의해 경고를 받았다. 중산층들은, 그럼에도 보편성의 건드릴 수 없는 원리를 훼손함이 없이, 선거법에 의해 그 경험으로부터 효과들을 교정하기를 원했다. 1850년 5월 31일 법률은 선거인이란 법적용어의 개선을 통해서 모순을 해결했다. 모든 프랑스인들은 재산 또는 역량의 구별 없이 선거권을 누리기를 이어갈 것이다. 그러나 선거 명단의 등록부는, 상당히 엄격한 조건들에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선거인단들로부터 배제되도록 위하여, 또 선거구에 3년간 주거를 증명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예약되었다. 일단 공법이 공표되었고, 이런 조치들의 적용에 관해 결제하도록 책임진 당국은, 이법이 강제적인 조항을 아주 정당하게 실행하게 할 뿐이라는, 이런 증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만일 과학자가 객관성의 구실 하에서 입법가의 심리학에 관련된 모든 참조를 멀리했다면, 또 만일 과학자가 법률적인 순수 원리들 도움으로 법을 추상적으로(in abstracto) 생성하기를 시도했다면, 이런 법의 탄생을 설명해야만 하는 과학자는 자기의 고유한 방법에 대해 쉽게 속지 않을 것인가? (422)
사실상, 논리계산자는 1850년의 입법가의 상황에 놓여있다. 그는 이런 저런 원리들의 진리 자체를 탐구하지 않는다. 그는 이런저런 귀결에 도달하도록 그에게 허락하는 법전의 조항들을 작성한다. 러셀은 끝내는 그것을 인정했다. “궁극적인 여러 전제들은, 사람들이 그것으로부터 끌어낸 많은 귀결들이 갖는 것보다, 내속적 명증성이 적다.”이때부터 그 철학자를 위하여 첫째 [원리]인 것을, 그것은 더 이상 논리적 원리들이 아니라 수학적 귀결들일 뿐인 것을, 덧붙여야만 하는가? 왜냐하면 논리적 원리들은 수학적 귀결들의 진리에 의존하기 때문인데 상호 호환이 안 되기 때문이다. (422)
§254. [명제적 함수계산은 상징적 논리계산으로 환원할수 없다. 전자의 무한은 정수론에 속한다면, 후자의 무한은 집합론에 속한다. 전자에서는 ∞ + 1이란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후자에서는 ∞을 따로 떼어낼 수 없고 그 속에넌 여집합(φ)도 포함한다.]
악순환을 회피하기 위하여, 러셀은 명제적 함수들의 적용 영역을 제한하는 데로 이끌렸다. 그는 어떠한 명백한 변수도 포함하지 않는 명제들로부터, 또 개체들만을 구성하는 것들로 삼는 명제들로부터, 함수들을 일련의 전형들(types)로 정돈한다. “이 전형들의 각각은 그 각각의 집합 안에 고려된 전형에 연관되어 있는 어떠한 함수도 포함하지 않는다.”비슷한 위계들 속에 자리를 차지한 함수들은 술어적 함수들(fonctions prédiciatves)이라 불렸다. 이 함수들은, 마치 함수들의 논증 질서보다 더 무매개적으로 높은 질서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다시 말하면 마치 “함수들이 이런 논증을 제기하기 위해 강요되었다는 것이 가장 적은 질서로부터 나오는 것처럼”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명제적 함수 φx를 위하여, 형식적으로 동등한 술어함수가 있을 것이라고, 다시 말하면, φx가 진리일 때 진리인 술어함수가, φx이 거짓일 때 거짓인 술어함수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선험적으로 우리는 그것에 대해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만일 “수학들이 가능하다고”하기 위한 그러한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이 논리계산학자들에게 속한다고 한다면,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필연적이라는 것]을 마치 공리처럼 상징적 논리학의 원리들 속에 도입할 것이다. [그 공리란], 즉 환원가능성의 공리(axiome de réductibilité)이고 이것은 진리이라는 모든 수[기회]들을 가질 것이다. (423)
반대로 논리적 곱셈보다 더 쉽게 생각하는 계산 작업은 없다. 그러나 계층들의 무한 집합 속에서 계층들의 각각이 재현하는 구성원을 선택하는 것이 합법적인가?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이런 질문에게 어떠한 무매개적인 명증도, 또 어떠한 굳건한 증명작업도 응답을 제공할 수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그것은 무한의 두 가지 정의들을 동일시하기 위하여, 비슷한 계산조작의 합법성이 화이트헤드에 의해 가정되었던 것이다. - 하나는 음(négative)의 정의인데, 무한 수는 “유한 수들을 특징지우는” 충만한 귀납법의 원리에 의해 형성되지 않는다. - 다른 하나는 양(positive)의 정의인데, 무한 수는 그 수 자체의 적분적인 부분에 동등한 집합이다. 단지 이런 이 두 정의들의 동일화작업은 그 자체로 문제이다. 1905년에 꾸뛰라는 “사람들은 무한데 대한 차이나는 두 정의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능숙하게 원리로서 제시했다. 그러나 1911년에 러셀은 “두 정의들이 강압적으로(forcément, 억지로)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는 덧붙이기를, “게다가 이것들을 동일시할 어떠한 이유도 없다”고 한다. (423)
귀결들에 의해 검증되기를 허용할 수 있는, 이리하여 과학적 가치를 획득을 허용할 수 있는 가설의 평면[도식]으로부터, 곱하기(multiplicatif) 공리는, 또는 동등가의 공리들은 우리들에게 절대적 가설의 평면[도식]으로 내려가게 한다.이 절대적 가설의 평면에서, 이론의 범위에 관하여 발언되기 위하여, “전문가의 주장에 따르면(à dire d'experts)” 개인적 인상들만이 남을 것이다. (424)
4절 논리계산적 비판의 결과 Le résultat de la critique logistique 424
§255. [논리계산학자들은 절대적 연역법을 비판한다. 직관주의가 등장할 것이다. - 그런데 논리학의 성립, 선전제를 인정하는 것이고, 이를 논리계산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을 비판한 이는 파스칼이다. 파스칼이 말하는 심정(le coeur), 직관주의자들이 다루고자 하는 심성(le mental)이 지성, 감성과 다르게 지속한다. ]
의심할 바 없이, 이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공정하다. 러셀을 작품으로부터 철학적인 고유한 의문들에 상대적인 부분만을 유보할 뿐이라면서, 그리고 관념들의 계보작업과 변형작업으로부터 전혀 회피하지 않게 적용되는 방법에 그 부분을 종속하게 하면서, 우리는 그에게 가장 우호적이어야 하는 국면 하에서 이런 작품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는 그에게서는 상징적 논리학의 진행을 위해서, 특히 관계들의 논리학의 확장[외연]을 위하여 마땅한 그 찬양을 잘 못[서툴게] 정당화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계산의 철학은 이것이(elle, 이 철학이, 자신에게) 약속되었던 역사적 숙명이 부족했다. 이 철학은 진리의 문제에 긍정적이고 독단적인 해결에 기여하지 못했다. 이 철학은, 단지 그리고 아마도 그것의 한정적인 출구[해결책]에 헌신하기 위하여, 르네상스 이래로 스콜라적 논리학의 이상과 근대 수학의 진보 사이에서 열린 토론을 일깨웠다. (424)
17세기에 호기심 많은 사정이 있다. 파스칼은, 수학자로서 그의 개인적 경험에 의해 다른 것보다 더 많이, 경고될 수 있었다. “가장 높은 탁월한 방법에서 증명작업을 형성했을 이런 진실한 방법은, 만일 거기에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두 원칙적인 사정들로 있을 것이다. 하나는 어떠한 항[목]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들은 예전에 그것의 의미를 깔끔하게 설명하지 못했었다. 다른 하나는, 말하자면, 한마디로 모든 항들을 정의하는데 그리고 모든 명제들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이미 알려진 진리들에 의해 증명하지 못했던, 그 어떠한 명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424)
사실상, 이것은, 무매개적으로 차후에라도, 덧붙여야 하는데, “이런 방법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정의하고자 원했던 초기 항들은 그것들의 설명에 쓰이기 위하여 그것보다 앞선 항들을 가정하였다는 것이,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증명하고 원했던 초기 명제들은 이것들보다 앞선 다른 명제들을 가정했다는 것이, 명증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결코 이 초기들[항들과 명제들]에게 도달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425)
이런 명증성 자체를 근거로, 빠스깔이 원죄이래로 인류에게 접근불가능하다고 선언한 이상(l’idéal)이, 그 자체로 모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불가능성을 실현할 것을 인간에게 논리학의 이름으로부과하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큰 불합리성이 있을 것인가?
사실상 빠스깔은 레이몽 스봉의 변론에게서 논증작업을 빌려왔다. 이 논증작업은 학교의 논리학에 반대하는 것으로 통용되었고, 그리고 근대확에 반대되지 못했다. 데카르트가 말했는데, “만일 변증론자들이 앞선 재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그들은 진리를 결론짓는 삼단논법의 구축할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리고 그것은 데카르트가 논리적 이상의 중재 없이도 진리의 보편적 전형을 직접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수학을 인정했던 이유이다. 사람들은 그가 두 가지 전형들의 대립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했다고 단지 애석해 해야만 했다. 데카르트는 그 다음에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도, 아리스토텔레스와 에우클레이데스가 그것[방법]을 실천했던 그대로, 연역법의 종합적 방법을 진술의 절차의 자격으로 보존했다. 이렇게 그들은 3세기 동안 아직도 수학의 방법론을 짓누르는 애매함을 영속하게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애매함은 현대 논리계산학자들이 절대적 연역법의 관념을 복종시켰던 가차 없는 비판에 의하여 결정적으로 사라지게된다. (425)
§256. [논리학과 논리계산은 정의된 것으로 출발할까? 벩송이 말했듯이 먼저 정의한 적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을[전체를] 정의하고 하는 야망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빠스깔이 그것을 원했던 대로, 그것은 왜냐하면 “점점 더 탐구들을 밀고 나가서, 사람들이 더 이상 규정할 수 없는 원초적 용어들에 필연적으로 도달하기”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스스로 정의(la définition)를 명석한 관념으로 만드는데 이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러셀이 쓰기를, “정의라는 용어는 정의할 수 없는 것이며, 심지어는 그것이 정의된 용어도 전혀 아니다.” (425)
다른 한편, 만일 사람들이 모든 것을[전체를] 증명하려고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원리들의 증거로 쓰기 위하여 더 명석하다는 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만큼 매우 명석한 원리들에게”사람들은 또한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또한 러셀이 말하기를, “원초적 명제들은, 여기에서 논리계산의 연역작업들이 출발하는데, 가능하다면 직관에 의해 명증해야만 한다.그러나 이것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서 이것은 그것들[명제들]의 선택이 유일한 근거[이유]가 아니다. 이런 근거는 귀납적이다. 말하자면 그것들의 알려진 귀결들 가운데(그것들 자체를 포함하여), 많은 귀결들은 직관에 진실한 것으로 나타난다. 어떠한 귀결도 거짓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진실로 나타나는 귀결들은, 문제 중인 체계들과 더불어 일관성 없이 증명할 수 없는 명제들의 어떤 체계로부터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만큼) 연역될 수 없다.”
정의상으로, 논리계산의 연역작업들이 생산될 때, 실증과학은 자신의 유일한 자원들과 더불어 진리의 정복을 위하여 이미 전투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기들의 행운은 발설되었다. 상징 논리학은, 마치 천재의 자발석인 작품 이후에 시(詩)적인 예술처럼 개입하면서, 승리에 헌신할 수 있거나 또는 패배를 등록할 수 있을 뿐이다. 이때부터 이제부터 실증적 수학 철학이 스스로 자리를 마련해야하는 것은 실증과학의 지평 위에서 이다. 그 논리학은, 방법적 검증작업의 조건들 자체들이, 즉 정의들, 요청들, 증명들의 장치가, 부과하는 한계들을 넘어서, 수학의 토대를 세우는려는 공상적 이상을 거부한다. 그 논리학은 거기서 지성과 진리로 합체된다는 것을 의식하는 착상(le dessein)과 더불어 과학에서 내재적으로 이루어진다. (426) (15:09, 59SKC)
*-* 인명록
590경 에피메니데스(Epiménide, Ἐπιμενίδης, 556경활동), 고대 그리스 시인, 철학자. 샤만(iatromante (chamane)[ἰατρόμαντις, « médecin-devin »),
384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 Ἀριστοτέλης, 전384-32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제자. 형이상학(La Métaphysique, τὰ μετὰ τὰ φυσικά)
360? 에우클리데스(Euclide, Εὐκλείδης, 기원전 300년경 활동), 알렉산드리아 수학자. 원론(Éléments, Στοιχεία)(전300년경, 13권). - p.37 주1) Elém., IX, 36, éd. Heiberg, t. II, Leipzig, 1884, p. 408.
O
100 프톨레마오스(Claude Ptolémée, Κλαύδιος Πτολεμαῖος, 100경-168경), 알렉산드리아 활동, 천문학자, 점성가(astrologue), 수학자, 지리학자.
1385 스봉(Raymond Sebond (Sebon), 카탈란어로 Ramon Sibiuda, 1385-1436) 카탈란 지방의 의사, 신학자, 라틴어로 쓴 철학자.
1473 코페르니쿠스(Nicolas Copernic, Nikolaus Kopernikus, 1473-1543) 폴란드 천문학자, 의사, 수학자. 교회 참사원. 태양중심설(l'héliocentrisme).
1533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1596), 르네상스 시기에 프랑스 철학자, 휴머니스트, 도덕론자.
1596 데까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 프랑스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1613 사시(Louis-Isaac Lemaistre (ou Lemaître), Sacy (anagramme d'Isaac), 1613-1684), 포르-르와얄과 가까운 카톨릭 신부, 신학자, 성경번역자, 인본주의자.
- [빠스깔과] 사시와 대담(Entretien avec M. de Saci, 1655)은 빠스깔과 당시 포르-르와얄의 지도신부(directeur de conscience)인 사시 사이의 대담이다.
1614 모어/모루스(Henry More, [Morus], 1614-1687), 영국 철학자, 캠브리지 플라톤학파. 데카르트와 편지교환.
1623 빠스칼(Blaise Pascal, 1623-1662), 프랑스 박학다식(un polymathe), 수학자, 물리학자, 발명가, 철학자, 도덕론자, 신학자. - [파스칼의 가명: Louis de Montalte, Amos Dettonville, Salomon de Tultie.]
1632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마흔다섯], 세파라드 유대인 공동체에서 온 포르투갈 출신 네델란드 철학자.
1642 뉴턴(Isaac Newton, 1642–1727), 영국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구화학자, 천문학자, 신학자.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들(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1687)
1646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 독일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외교관, 역사가, 사서. 문헌학자. Nouveaux Essais sur l'entendement humain, 1704(1765 출판)는 로크의 Essai sur l'entendement humain, 1689)에 대한 반박문이다.
1675 클라크(Samuel Clarke, 1675–1729), 영국철학자, 영국국교 목사.
1668 코스트(Pierre Coste, 1668-1747), 프랑스 인쇄업자, 번역가, 신학. 프로테스탄트로서 낭뜨칙령(1598) 폐지(1685)로 프랑스로 들어가지 못했음.
[1689 스미스(Robert Smith, 1689-1768), 영국 수학자, 음악이론가. Robert Smith (1768). Cours complet d'optique traduit de l'anglois de Robert Smith
1724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일 계몽기(Aufklärung) 철학자.
[1737 모르보(Louis-Bernard Guyton-Morveau, 1737-1816) 프랑스 화학자, 법률가, 정치가. 백과전서파(디드로, 달랑베르와 함께, 백과전서 보충판 참여).
1743 라봐지에(Antoine Lavoisier, 1743-1794), 프랑스 과학자. 화학을 실험적이고 수학적인 과학으로 정립.
[1748 베르틀로(Claude-Louis Berthollet, 1748-1822) 프랑스 화학자. 라봐지에 영향으로.]
[1755 푸르크르와(Antoine François Fourcroy, 1755-1809) 프랑스 의사, 화학자. 백과전서파] [보르보, 라브와지에, 베르틀로, 푸르크르와는 Méthode de Nomenclature Chimique, 1787을 출판했다.]
1817 로쩨(Rudolf Hermann Lotze, 1817-1881), 독일 철학자, 의사, 논리학자.
1842 코엔(Hermann Cohen, 1842-1918), 독일 유대인 철학자. 마르부르크의 신칸트학파 철학자(avec Paul Natorp).
1846 브래들리(Francis Herbert Bradley, 1846-1924), 영국철학자, 관념론자. The Principles of Logic,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22.
1854 나토릅(Paul Gerhard Natorp, 1854-1924) 독일 철학자, 교육학자. 신칸트주의 마르부르크 학파. Platos Ideenlehre. Eine Einführung in den Idealismus, Leipzig, 1903, p. 160.
1856 아믈랭(Octave Hamelin, 1856-1907), 프랑스 철학자. 네오헤겔리안의 대표자. Le système de Descartes, Préface d'Émile Durkheim, Paris, 1911, F. Alcan, 392 p.
1859 벩송(Henri 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860 피에리(Mario Pieri, 1860–1913), 이탈리아 수학자 투영기하학과 페아노의 작업 영향을 받은 논리학의 문제들에 관한 연구자.
1861 뒤앙(Pierre Maurice Marie Duhem, 1861-1916) 프랑스 물리학자, 화학자, 역사학자, 인식론자.1872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 영국 철학자, 수학자, 논리학자.
1861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 1861-1947), 영국 철학자, 논리학자, 수학자, 미국서 활동.
1862 힐버트(David Hilbert, 1862-1943) 독일 수학자. 수학의 형식주의자 Grundlagen der Geometrie (Les fondements de la géométrie[13]) en 1899.
1868 꾸뛰라(Louis Couturat, 1868-1914), 프랑스 수학자. Les principes des mathématiques 1905
1871 쩨르멜로(Ernst Zermelo, 1871-1953), 독일 수학자. 집합론.
1874 카시러(Ernst Cassirer, 1874-1945), 스웨덴 출신 유태계 독일 철학자, 나토릅, 코헨과 같은 마르부르크학파.
1876 블로흐(Léon Bloch, 1876-1947), 프랑스 철학자, 물리학자. 콴타이론(la théorie des quanta)을 프랑스에 도입.
(17:03, 59SKC) (12:20, 59SL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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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n-1차원: [지수의 차원이 높일수록 그 표면은 n-1차원이다.]
수학사에서 n-1차원은 비유클리드 기하학(특히 리만 기하학)에서 초곡면(Hypersurface), 경계(Boundary), 그리고 국소적 좌표계의 차원을 뜻한다. 19세기 중반 베른하르트 리만이 공간을 고차원으로 확장하면서 핵심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 초곡면과 공간의 모델링
내재적 곡면: n차원 비유클리드 공간(또는 리만 다양체) 안에서 정의되는 n-1차원의 매끄러운 곡면이나 공간을 의미한다.
예시: 3차원 유클리드 공간에 둘러싸인 2차원 구면(Spherical surface)은 3차원 공간의 입장에서 보면 2차원(n-1) 초곡면이다.
* 국소적 차원과 위상적 경계
국소적 동형: n차원 다양체는 아주 좁은 영역(국소적)에서 바라보면 n차원 유클리드 공간과 닮아 있지만, 그 공간이 끝나는 가장자리나 제한구역은 항상 한 차원 낮은 n-1차원의 형태를 띤다.
경계의 차원: 수학사에서 위상적 성질을 정의할 때 n차원 도형이나 공간의 테두리(경계)는 자연스럽게 n-1차원이 된다. (59RMJ)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