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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번 주는 33쪽부터 하겠습니다.
어∼이제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이제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우리 불교의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고 우리의 뭐 불교에서 말하는 본성, 본래면복 또 해탈 열반이라고 하는 그런 부분에 대해서 이제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는데. 어∼이런, 오늘 하는 법문이 좀 재미가 없는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느끼기에 이제 재미가 없으실 수도 있고 어쩌면 이것이 목적이었던 분들은 이게 가장 재미있어야 마땅한 부분인데. 어∼일반사람들은 가장 관심이 없어요. 어∼왜 관심이 없느냐면, 나 지금 세상 살기도 바빠 죽겠는데 깨달음은 저기 저 먼 나라 얘기지. 내가 어떻게 지금 내 본성을 깨닫는다는, 그런 것은 너무나도 먼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그런데 뭐 제가 몇 번,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이제 삶을 살면서,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인생을 살아보셨기 때문에 언제부터 삶이라는 게 이제 빤히 보인단 말이지요. 인생이 어떤 것인지. 삶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 이게 거의 보이지 않습니까? 나이가 어느 정도 드시다보니까 이제 남은 인생도 얼마 안 남은 것처럼 느껴지는 노 보살님도 좀 계실 것이고. 또 뭐 한 반백 년 사셨다할지라도 이게 어느 정도 살다가 우리는 곧 죽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제 우리는 살면서 어떻게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더 많이 벌고, 더 많이 행복해지고, 더 많은 것을 얻고, 가지고, 이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가 원하는 삶, 내가 원하는 인생이나 원하는 소유, 이런 것들을 가지게 되면 성공하게 되면 아∼참 내 인생은 성공적이다. 이렇게 여기고.
그것을 갖지 못할 때 내 인생은 참 절망스럽다. 이렇게 생각하며 살기 쉽지요. 남들의 판단이나 남들의 말 한마디에 휘둘리면서 살기 쉽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꿈꾸던 그 모든 것을 다 이룬다고 할지라도, 다 이룬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또 연세가 드시면 드실수록 점점 더 이런 얘기가 더 절감이 되실 것 같은데 반드시 사라지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내가 추구해왔던 모든 것. 내가 이것만 있으면 너무나도 행복하겠다, 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은 잠깐 달콤할 수 있을지언정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라는 거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을 살면서 허망한 것.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 반드시 없어질 것. 그것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정말 진실한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제 관심이 없는 것이지요. 어∼뭐 언젠가는 생사와 대적할 날이 있을 것이다, 라는 얘기를 선사스님들은 많이 하시는데.
반드시 우리는 그 생사와 대적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생사문제는 그만둔 채 살아있는 가운데 내가 이 살아있는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 살아있는 가운데 아무리 어마어마한 성취를 이루고 뭔가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거는 하나의 지난 밤 꿈과 같아서, 꿈을 깨고 나면 그 모든 것이 말 그대로 꿈인 것처럼. 지금 우리가 추구해 마지않는 그 모든 것들은 말 그대로 꿈일 뿐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사라질 거라는 거지요.
그런데도 이것이 분명한 사실인데도 명명백백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이 생사문제에 대해서 관심가지지 않고 살아있는 동안에 조금 더 행복한 이런 것들만을 추구하면서 산다는 것은 음∼이제는 좀, 아 그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그런 생각이 들고요. 그래서 이제 오늘 그 마음에 대한 이야기가 이제 시작되는데요. 한두 구절 한번 읽어보고서 또 말씀드리겠습니다.
33쪽이고요. 삼계가 뒤섞여 일어나지만 함께 한마음으로 돌아간다.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얘기하고 이제 편의상 뭐 이 세상 이 우주를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해놓은 이제 세계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온 우주전체라고 얘기하면 되겠지요. 온 우주 삼라만상. 온 우주전체를 얘기하고요. 이 삼계가 온 세상이, 삼라만상 온 우주가 수많은 사람들이, 뭐 수많은 어떤 존재들이, 수많은 이야기들이,
수없이 많은 것들이 뒤섞여서 이 세상이 벌어지고 우주가 벌어지고 있지만. 이렇게 다 따로따로인 것 같은 너와 내가 다르고. 우리나라와 다른 나라가 다르고. 사람과 짐승이 다르고. 또 뭐 신의 세계가 있을 거 같고. 또 저 별나라로 가면 별나라에 또 우주인이 있을 거 같고. 이런 그 무수히 많은 모든 이 우주전체 그게 낱낱이 떨어져 있는 그 모든 이들이 모든 것들이 삼계전체가 사실은 함께 한마음으로 돌아간다. 결국에는 한마음 하나일 뿐이라는 소리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그냥 편의상 어∼이 삶의 진실에 대해서 그냥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에요. 마음이라고 해서 아, 여기 있는 이 마음인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온 우주의 근원적인 본래적인 본성. 뭐 성품. 불성. 뭐 여래장. 뭐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만 그 본바탕 배경과도 같은 우리의 뿌리. 우리가 돌아갈 곳. 나의 본래면목. 참나, 나의 진짜 참나.
이것이 온 우주 본래의 우주, 본래의 자아, 그것과 둘이 아닌 하나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 있는 모두가 우리가 다 둘이 아닌 하나라고 하는 이유는 겉으로 드러난 분별의 세계에서는 두 명 세 명 네 명 다 다른 사람이고 너는 너고 나는 나지만, 함께 한마음으로 돌아가는 이 한마음이라는 본바탕 배경 우리의 본성에서는 하나라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같은 하나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하나의 마음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마음, 내 마음 따로 네 마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하나의 아버지. 이∼뭐 불자, 이런 얘기는 부처님의 아들 이 얘기가 그 얘기자체가 하나에서 나온 자식들이라는 얘기에요. 뭐 사람만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온 만중생, 일체 모든 존재가 전부다 하나임에 존재이다. 그래서 결국에는 모두가 돌아가는 곳은 같은 자리. 같은 하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대가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고, 내가 그대에게 답하는 것이 곧 나의 마음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제 우리가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 본격적으로 하게 될 텐데. 마음에 대해서 우리가 먼저 좀 정리를 하고 넘어간다면, 마음 은 불교에서 두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첫 번째는 중생심의 의미로 쓰이고 두 번째는 이제 진여심, 부처님의 마음 진여심의 의미로 쓰입니다. 어∼중생심의 마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늘 쓰고 있는 것.
그래서 어∼초기불교경전에서는 이 마음을 네 가지로 나눴지요. 그래서 수상행식이라고 해서 느낌 또 생각 의지 의도 의식, 뭐 이런 것들 전부다 이제 마음이라고 통칭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수상행이라는 느낌과 생각과 의지라는 이 세 가지는 결국에는 이 식(識), 그래서 이 식이라는 것을 심왕이라고 부릅니다. 마음에서의 왕이다.
인식하기 위해서 인식하기 위한 어떤 기초자료로써 느낌과 생각, 어떤 감성적인 것과 어떤 이지적인 이성적인 것, 그 두 가지가 바탕이 되어서 어떤 의지가 일어나고 그 의지와 이 느낌 감정 생각, 이런 것들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우리가 분별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마음이라는 것은 곧 우리가 중생심이라고 하는 마음은 곧, 식(識)을 얘기합니다.
반야심경이나 초기불교경전에서 오온이라고 얘기하는 나라는 존재는 다섯 가지로 나뉘어져 있다. 색수상행식인데 색은 몸뚱어리 물질적인 것이고 수상행식이 마음인데 수상행식 가운데 가장 심왕, 마음의 왕. 그것이 이제 식(識)이라 그래서 이 식을 어∼인식, 우리는 인식한다, 대상을 아는 마음. 대상을 판단해서 아는 마음,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이 식이라는 것이 이제 분별심을 얘기합니다. 분별심, 대상을 알려면 어떤 하나만 가지고서는 그것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다른 것과 비교해서 분별 할 수 있을 뿐이지.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할 때 너 그 사람 알아? 할 때 그 사람 하나밖에 없으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잘났는지 못났는지를 알 수가 없어요. 온 우주에 나 하나밖에 없으면 내가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알 수 있을까요?
비교할 대상이 없으니까 내가 잘났는지 못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키가 큰지 작은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려면, 파악하려면 누군가와 비교해야지만 파악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내가, 내가 누구인지는 내가 안다고 여긴다면, 그 안다고 여기는 것은 식(識)의 작용입니다, 식의 작용. 그런데 그 식(識)의 작용은 남들과 비교를 통해 아는 마음,
비교를 통해서 아는 마음. 반야심경에서 반야심경의 핵심이 그거잖아요.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오온이 비추어보았더니 조견, 비추어보았더니 오온개공, 오온이 모두 공하다는 것을 깨 뚫어보았고 그랬더니 도일체고액,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고통과 액란을 넘어섰다. 즉 오온이 공하다는 깨우침이 있었을 때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는 소리거든요.
그 오온이라는 것이 오온이라는 것에서 오온이라는 것은 즉 그 부연설명으로 그 다음에 뭐 색즉시공 공즉시색 뭐 색불이공 공불이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그런단 말이지요. 수상행식이라는 것 또한 공하다는 사실이거든요. 실체가 아니다. 진짜가 아니라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우리도 뭔가를 안다고 여길 때 나는 어떤 사람이야, 라고 안다고 여길 때. 나는 능력 없는 사람이야, 라고 여겼는데.
내가 여태까지 살아오던 사람들과 비교하니까 계속 능력이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다른 곳에 가서 보니까 내가 보기에 나도 상당히 능력 있는 사람일 수도 있거든요. 전에 제가 말씀드렸나 모르겠네요. 제가 아는 어떤 친척 분 중에 그 아이가, 아이가 어∼우리 친척들이 전부다 그 친구가 공부를 잘 한다는 사실을 다 몰랐습니다. 왜냐면 공부 잘한단 얘기를 한 번도 안했기 때문에.
그리고 본인도 공부를 잘하는지 몰랐고 심지어 부모님도 공부를 잘하는지 몰랐습니다. 왜 몰랐나했더니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이제 절친하게 지내던 친구 몇 명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공부를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도 까무러치게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었던 거예요. 신기하게도 한두 세 명 정도가 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제 학교에서 시험을 본 다음부터 3, 4, 5, 6학년 때까지 계속 그 친구들 중에 한 명과 같은 반이 된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는 그∼6학년말에 벌써 고등학교 3학년 형아 들이 푸는 문제들을 다 풀고 다 푸는 정도가 아니라, 뭐 고등학교 3학년 수능시험을 영어를 봤더니 뭐 하나 틀렸다 두 개 틀렸다, 이럴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이 항상 같은 반이었던 거지요. 그러니까 분명히 자신은 딴 친구들보다 공부를 잘하는 월등히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친구들에 비하면 월등히 못하는 거예요. 이 친구 한명이 독자적으로 공부를 너무 잘했는데 그다음 학년으로 올라갔더니 그 반에도 또한 독자적으로 잘하는 애 하나가 있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친구들 한 세 명 정도가 정말 이거는 말이 안 된다싶을 정도로 공부를 잘하는 친구였다는 거지요.
그런데 본인은 그걸 모르다보니까. 내 옆에 있는 친구니까, 그것도 뭐 서울에 무슨 강남에 대치동에 있는 학교도 아니고 그냥 저 소도시에 있는 그런 친구가 그렇게 잘하니, 자신은 참 공부를 잘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살았다는 것이지요. 나중에 보니까 이 친구도 공부를 이 친구들 따라가려고 막 열심히하다보니까 역시 잘하게 되잖아요. 나중에 보니까 자신도 공부를 썩 잘하는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야, 사실은 내가 이렇게 공부 잘하는지 몰랐다.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거지요. 이것처럼 잘났다 못났다, 잘 한다 못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비교를 통해서만 인식되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비교를 통해서 인식되는 모든 것은 그래서 허망하다, 라고 하지요. 진실이 아니다. 우리는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끊임없는 비교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지를 규정해왔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내가 누구다, 라고 여기는 그 인식은 진실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었던 수많은 사람과 여태까지 50년, 6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비교해온 비교의 결과를 나라고 머릿속에 정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공부를 아무리 잘해서 최고의 학교를 나오고 최고의 회사에 취직해서 돈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벌고 빌딩을 몇 채를 소유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성격이 아주 개떡 같을 수도 있겠지요. 또 그 두부부가 아주 최고의 엘리트인 부부가 너무나도 집안에서 막 싸움을 하면서 아주 지옥처럼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것을 가지고 비교해야 되고 어떤 것을, 어떤 비교를 통해서 이것이 진짜 나다, 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비교를 통해 인식한 모든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거지요. 진실은 뭐냐?
그 어떤 비교를 넘어선 자리에서 옵니다. 그러니까 인식을 넘어선 자리. 우리가 마음이라고 여기는 것은 인식 식(識)이고 분별심이고 그게 바로 중생심인데, 그 중생심이라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진실은 중생심의 너머에 있다. 즉 분별심 너머에 있다. 그럼 분별심 너머에 있는 진실은 무엇이냐? 우리는 지금까지 중생심으로 살아오다보니까 나는 이런 사람이야. 왜?
남들과 비교하니까 난 이정도의 사람이었어. 이렇게 여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 모든 비교를 넘어선 곳에 여러분의 진실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럼 비교를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 됩니다. 하늘 위 하늘아래 오로지 나 홀로 존귀하다, 라는 뜻은 내가 상대적인 남들과 비교해서 나 혼자 존귀하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지금 있는 이대로.
있는 이대로. 그저 존귀하다는 뜻입니다. 온전히 존귀함. 모든 존재는 저마다 모두 다 온전하게 존귀한 존재들이다. 지금 이대로 아무문제가 없는 것이지요, 비교하지만 않으면. 우리 인생에는 아무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괴로움은 완전히 비교에서 오거든요. 비교를 넘어선다면 지금 나라는 존재는 그냥 나일뿐입니다. 잘생긴 것도 아니고 못생긴 것도 아니고요.
돈이 많거나 적은 것도 아니고 행복하거나 불행한 것도 아닙니다. 오래 살면 성공이라고 여기고 조금 살면 실패라고 여기기도 하잖아요. 그거는 오래 사는 사람과 나를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의 평균 사망하는 연령을 보고 내 인생과 비교하기 때문에 그래요. 어차피 태어난 모든 존재는 다 죽습니다. 다 죽는데 왜 80년, 90년 살면 오래 산 것이라 여기고 행복한 것이라 여기고,
또 한 50년, 40년, 30년 살면 실패라고 여길까요. 그건 우리 분별심일 뿐입니다. 10년을 산다고 그것이 괴로운 것은 아니지요. 천년만년을 살아도 온갖 업장을, 업을 짓고 산다면 그것은 그 업장을 계속 만들어내는 고통을 끊임없이 양산해내는 삶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단 하루를 살았더라도 마음공부를 하고 삶의 이치를 일깨우고 살았다면
그것은 수백수천 년을 산 사람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삶 일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중생심으로 지금까지 나를 보아왔는데. 중생심으로 나를 판단해왔는데. 또 세상 사람들을 중생심으로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또 모든 대상을 내 아파트를 보고 나는 가난하구나. 저 옆에 있는 아주 저 비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참 훌륭하고 돈도 많은 사람들이겠구나,
하면서 열등의식을 느끼고 살거나. 나라는 존재뿐 아니라 주변 환경 상황 이런 모든 것들을 비교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은 언제나 있어요. 언제나. 모든 기준을 가지고 해도 내가 그 기준에서 전 세계 일등이기는 쉽지 않지 않습니까? 여러분 자식들 자녀들 이렇게 키워봐서 아시겠지만 자녀가 특정한 분야에 아주 월등한 모습일 수도 있거든요. 뭐 우린 자녀들에게 고통을 주는 어떤 공부로만 그걸 재니까. 공부를,
이게 정말 허망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학교라는 곳에서 공부를 가지고 등수 화시킨다. 사실은 공부 말고도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너무 많잖아요. 성격 정말 착하고 이타적인 친구들, 성격을 가지고 예를 들어 나눈다면 전혀 다른 등수가 나올 거거든요. 운동 잘하는 거가지고 나누거나. 뭐 바둑 잘 두는 걸로 나누거나. 아니면 자연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누거나.
제가, 누가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고등래퍼2에 명상을 하는 친구가 나온다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에∼봤더니 이 친구가 뭐 다른 2등 3등하는 친구들 보니까, 무슨 힙합을 하는 어떤 큰 회사 같은데 있고 거기서 제대로 배우기도 하는 아주 뛰어난 친구들이었는데. 그 친구들이 최고로 잘하는데.
이 친구는 전혀 배워보지도 않고 어디 뭐 회사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냥 혼자서 이렇게 해서 본인은 자신이 랩을 잘한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던 친구였고 일등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던 친구였다 그래요. 그런데 그 친구가 이 랩을 했을 때 모든 사람이 막 그냥 감탄의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잘 할 수가 있느냐, 하고 놀라워했다고 그러지요.
놀라워하고 있는데 본인은 정작 이건 뭐지? 싶은. 나는 한 번도 내가 잘한다는 생각을 못해봤고 이렇게 일등을 해본 적이 없다고 느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친구가 보니까 자신은 항상 뭐 명상을 한다. 뭐 이런 얘기를 너무 대놓고 많이 한다더라고요. 그런데 명상을 하고 하다니까 어∼내 마음의 평화나 또 세상의 평화나 사람들이 모두 다 이렇게 행복하고 평화롭고 모두 다 이렇게 행복한,
뭐 이런 스타일의 가사를 쓰고 이런 것들을 보니까. 참 아주 좋더라고요. 그런데 보니까. 이 친구가 뭐 하도 명상 명상을 한다. 그래가지고 사실 어른들 중에는 입으로만 명상하는 사람들 정말 많거든요. 수행한다. 명상한다. 하면서 그냥 입으로만 이런 사람들이 명상을 약간 자신의 어떤 스펙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이 친구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더라고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어떤 자기다운 어떤 천연감성. 뭐 이런 때 묻지 않은 이런. 사실은 우리 모두가 세상에서 무언가를 통해서 나를 비교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말하는 수많은 가치에 나를 꿰맞추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가 나보다 잘하는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 애쓰는 인생? 나보다 뛰어난 누군가를 쫓아가려고 애쓰는 인생?
그런 걸 완전히 내려놓고 남들에게 좀 더 잘 보여야 되겠다. 남들에게 좀 더 인정받아야 되겠다. 하는 그 모든 남들과의 어떤 비교 분별을 내려놓고 그냥 지금 이대로의 나. 이대로의 나이기를 바란다면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지요. 중생심으로 나를 바라보고 중생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다가 비교분별하지 않게 되면 그 자리가 바로 진여심으로 바라보는 겁니다.
나라는 존재를 진여심으로 바라본다면 진여심이라는 뭔가가 딱 정해져있는 뭔가의 어떤 틀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다만 비교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는다면 그냥 이 자리가 진여의 마음입니다. 비교해서 끊임없이 남들과 맞다 틀리다 옳다 그르다, 이렇게 나누는 삶은 중생심이고 그것을 내려놓는 그자체가 진여심이거든요.
그러면 지금 우리는, 우리는 비교할 때는 중생이 돼버리는데 비교를 탁 내려놓고 있을 때. 그런데 우리는 생각이 일어나면, 모든 생각은 전부 다 두 가지로 쪼개진 생각일 수밖에 없거든요. 생각이 일어났다 하는 건 벌써 두 가지입니다. 왜냐 하면 지금 이 순간에는 아무 일이 없는데 생각을 일으킨다는 것은 과거의 무언가를 떠올리거나 미래의 뭔가를 떠올린다는 얘기잖아요.
과거나 미래를 왔다갔다, 한다는 거거든요. 지금 이순간과 과거가 둘로 쪼개집니다. 생각을 일으킨다는 자체가 벌써 비교분별이에요. 그래서 무심이라는 말을 씁니다. 분별하지 않는 무분별심. 무심이라고 하는 이유가, 마음이 없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다, 라고 얘기하는 이유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때 비교 분별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때 지금 이대로 우리가 부처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머릿속에서 나를 남들과 비교하는 마음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여러분 인생에 문제가 있습니까?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할지라도 비교하지 않으면 문제없어요. 백년을 산다, 라는 거는 우리가 만들어놓은 이 세상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틀이지. 왜 사람이 백년을 사는 게 정해진 규칙입니까? 그런 규칙 없습니다.
사람마다 규칙은 다 달라요. 백년 산 사람은 백년사는 것이 그 사람의 규칙이고 삶의 규칙이고 내가 열 살 살다죽었으면 그것이 나의 인생인거지요. 그건 성공이나 실패가 아닙니다. 저마다 자기만의 삶이 있는 것이지요. 어∼연세가 이제 조금 드시기 시작하면 이제 친구들이 하나 둘 이렇게 인생에서 사라져 가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이제 여기 군 법당이다 보니까 이제 군기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고참기수 분들 모임이 있어서 그 모임에 법회를 해 달라하셔서 법문해드리고 그분들하고 대화를 나눠보니까. 이게 70대중반이 넘어가시는 기수분들이 이렇게 모이셨는데 그분들은 모여서 나누는 주제가 그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야, 작년에는 우리보다 저∼한 3년 젊은 그 친구들이 몇 명이 죽었다는데 우리기수는 작년에 몇 명밖에 안 죽었어.(웃음)
이런 되게 스산한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야∼우리 작년에 선발했다, 우리기수. 몇 명 안 죽었다.(웃음) 어∼이런 얘기를 되게 그냥 즐겁게 평이하게 하시더라고요. 이게 되게 어찌 보면 좀 무시무시한 얘기인데. 그래서 우리가 내년에도 다시 이렇게 또 만나자. 이런 얘기를 하시던데. 그렇게 삶과 죽음이라는 것을 가지고도 나눌 수 없습니다.
아프다고 해서 아픈 것이 문제가 되느냐? 아픈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아픈 것 자체가 나의 삶이에요. 아픈 것이 문제가 될 때는 건강한 사람과 비교할 때 혹은 내가 건강했을 때와 비교할 때뿐입니다. 비교하지 않는다면 아픈 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아픔과 그냥 같이 사는 거지요. 오케이∼인정하고 아픈 거와 같이 살게 됐을 때,
오히려 그 병은 더 사라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병과 싸워 이기려 애쓰면 애쓸수록 병은 더 지속됩니다. 왜 그러냐면 병이 온, 병도 이유가 있어 왔을 거 아니겠어요? 무슨 이유겠어요. 내가 아파야 되는 이유니까 병이 온 거 아니에요. 그러면 오케이∼왔으니까 온 것이 진리이지 않겠느냐. 그 아파줄게. 아파 줄게도 필요 없어요. 그냥 왔으니까 그냥 아파지는 것이지요,
비교하지 않는다면. 있는 그대로의 삶이 실상이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나의 삶, 그자체가 실상이니까. 나는 그 무엇과 비교할 필요 없이 지금 이대로가 실상입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실상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를 공부하면 점점 더 안 아파지지 않을까? 점점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점점 더 내 삶의 생활고가 나아지지 않을까? 물론 나아질 수도 있겠지요.
왜냐면 마음에서 분별이 사라지면 비교하는 마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절로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그것은 외부적인 조건이 좋아져서 행복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이 달라지기 때문에 행복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금 이대로 중생심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고 중생심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고 진여심으로 바라본다면, 그건 따로 진여심이라는 게 없습니다.
중생심이 사라지는 게 바로 진여심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이지. 진여심이라는 뭔가는 없어요. 그∼중생의 분별심, 비교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 그것을 그냥 이름 해서 진여심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마음이라고 이름 붙였을 뿐입니다. 선에서는 그 분별, 분별도 마음이라고 이름붙이고요. 분별을 여읜 마음도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여요. 왜 그럴까요?
왜 둘 다 마음일까요? 그 두 마음이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중생심과 부처의 마음이 둘로 나뉘어져 있어서 중생이 부처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심이 있는 그 자리에 진여심도 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은 중생임과 동시에 부처인 존재들이지요. 간단합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면.
주어진 나의 삶에 대해서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은 채 그냥 주어진 나의 삶은 온전한 진리의 실상입니다. 제법실상이구나. 촉목보리구나. 지금 이대로 아무문제가 없구나, 라고 자기답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여심입니다. TV프로그램을 보면 그런 고등래퍼도 그렇고 무슨 오디션프로그램도 그렇고 뭐 연예인이 되는 것도 그렇고 배우가 되는 것도 그렇고 다 마찬가진데요.
배우라고 할 만한, 이제 이런 표현들을 하더라고요. 사람들이 배우가 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하는 거지요. 막 연기학원을 다니면서 연기를 엄청나게 많이 해서 연기를 아주 잘 배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연기를 하는 목적이 뭐냐 하면 우리는 지금 연기를 배우지도 않았는데 삶을 연기해내고 있잖아요. 아무문제 없이.
여러분 남편과 싸울 때 남편과 싸우는 연기를 막 배워가지고 싸우는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도 안 배웠는데 아주 리얼하게 싸우잖아요.(웃음) 연예인보다도 배우들보다도 훨씬 리얼하게 싸우잖아요. 그 사실은 연기를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그냥 삶 자체가 연기이기 때문에. 그런데 특정한 연기라는 어떤 특정한 틀을 갖추어놓고서
이렇게 하면 연기 잘하는 사람. 이렇게 하면 연기 못하는 사람. 이렇게 틀을 나눠놓고 연기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을 나누는 것이지요. 그런데 배우세계에서도 아∼이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저 사람은 틀에 가둘 수 없다. 가수도 마찬가지랍니다. 아∼이 사람은 틀에 가둘 수 없다. 노래를 잘 한다 못한다, 라는 범주에 가둘 수 없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런 어떤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것은 연기를 우리가 봤을 때는 혹은 연기 교과서에서 봤을 때는 연기를 되게 못하는 사람인데 신기하게 자기만의, 자기만의 쪼가 있다는 거지요. 그 사람을 처음에는 이상하게 생각한다는 거지요. 저 사람 연기가 너무 어설퍼. 이러는데 나중에 살다보니까 연기를 계속 보다보니까 어 저게 그냥 저사람 이구나. 저건 그야말로 진짜구나.
이렇게 이제 느껴지는 때가 있다는 거지요. 가수들도 보면 노래를 정말 잘해서 가수인 사람들도 있지만 노래를 그다지 잘하지 않는데 되게 유명한 가수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그냥 자기만의, 자기만의 쪼가 있어서 그것을 인정받는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걸 좀 더 확장해본다면 사실은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냥 마∼악 노래가 나올 때 막 노래를 불렀어요.
그게 최상의 아름다운 음악이거든요. 자기가 정말 즐거워서 저절로 흥얼거리는 노래는 그것은 무슨 오디션프로그램에서 1등 한 사람 못지않은 아름다운노래이지요. 그 자체로 가장 아름다운노래이지요. 남들과 비교해서 이게 오디션프로그램을 보면서 되게 좀 어이없는 때가 많지요.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틀이 있다 보니까 이건 잘하고 이건 못하고 하지만,
그럼 우리는 신기하지요. 야, 도대체 무얼 가지고 저 애를 잘했다 이러고 이 얘를 못했다 이러지. 내가 보기엔 얘가 더 잘했는데, 이럴 때가 있거든요. 그러면 내가 몰라서 그렇겠지. 내가 모르는 전문가만의 뭔가가 있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린 전부다.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건 없는데 사람들끼리 전문가들끼리 이걸 전문가로 하자고 정한 규칙이 있을 뿐입니다.
그 규칙에 들어가서 살아도 괜찮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전문가가 되지 않을 사람들인데 굳이 그 규칙에 들어가 살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돌을 좋아하는 수석전문가들이 아주 자기만이 좋아하는 돌의 모양이 있지만 어떻게 그 돌을 가지고 점수를 매길 수가 있겠습니까? 소나무전무가들 나무전문가들은 또 나무를 가지고 어떻게 생겼으면 얼마고 어떻게 생겼으면 얼마고 값을 매기지만,
나무를 어떻게 값을 매길 수가 있겠습니까? 저마다 독자적인 나무가 있을 뿐이지요. 그처럼 우리는 저마다, 저마다 완전한 무엇을, 어떤 기준에서 완전할까요? 내 기준에 완전한 존재입니다. 나다운 기준. 나다운 것이 가장 부처님다운 것이거든요. 나답다는 게 가장 부처님다운 겁니다. 그래서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부처님답게 사는 거고 가장 진리답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나답게 살 때 가장 힘들지가 않습니다. 힘이 들지 않는 것이지요. 무위법,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러워지죠. 삶을 사는 것 자체가 가장 자연스러워집니다, 가장 나다울 때. 그런데 가장 나다운 것은 누구를 닮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야 될 필요가 없습니다. 완전히 본래부터 주어진 본래면목이거든요. 본래부터 주어진 나의 것이거든요. 완전히 생생한 나의 것. 생생한 날것의 나의 것.
(31초 11분 녹취)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인생이 어떤 것인지. 삶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 이게 거의 보이지 않습니까? 나이가 어느 정도 드시다보니까
남들의 판단이나 남들의 말 한마디에 휘둘리면서 살기 쉽습니다.
내가 이것만 있으면 너무나도 행복하겠다, 라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은 잠깐 달콤할 수 있을지언정 반드시 사라지는 것이라는 거지요.
반드시 우리는 그 생사와 대적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생사문제는 그만둔 채 살아있는 가운데 내가 이 살아있는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할 것이냐?
식/대상을 아는 마음. 대상을 판단해서 아는 마음/분별심/남들과 비교를 통해 아는 마음,
그럼 비교를 넘어서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이 생각하는 모든 괴로움은 완전히 비교에서 옴
생각이 일어났다 하는 건 벌써 두 가지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지금 이 자리에서 부처다,
선에서는 그 분별, 분별도 마음이라고 이름붙이고요. 분별을 여읜 마음도 마음이라고 이름을 붙여요.
여러분은 중생임과 동시에 부처인 존재들이지요. 간단합니다. 그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기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래서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이 가장 부처님답게 사는 거고 가장 진리답게 사는 것이기 때문에
나답게 살 때 가장 힘들지가 않습니다. 힘이 들지 않는 것이지요. 무위법,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자연스러워지죠. 삶을 사는 것 자체가 가장 자연스러워집니다, 가장 나다울 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무멍나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법우님 녹취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
일때문에 참석못하는 법문인데 이렇게라도 법문을 접하게 해주셔서 넘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