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성제가 없으니) 고집멸도가 없고.
無苦集滅道.
“고집멸도(苦集滅道)”도 그러하며, 이 역시 성인이 닦는 것입니다. 아라한이 닦는 4제법(四諦法)은 ‘고’를 알아 ‘집’을 끓고 ‘멸’을 흠모하여 ‘도’를 닦습니다. 실제로는 순서가 집고도멸(集苦道滅)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뒷날 어떤 사람이 외도와 변론했는데 외도가 말하기를, “당신은 왜 부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거꾸로 합니까?” 했습니다. 사실은 그가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집(集)’이 있고서야 ‘고(苦)’가 있으며, ‘도(道)’를 닦고 나서야 ‘멸(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네 마디 말은 “‘고’를 알고 ‘집’을 끊고, ‘멸’을 흠모하여 ‘도를 닦는다.”입니다.
인생은 여덟 가지 괴로움이 동시에 핍박합니다. 오늘은 시간이 부족하여 8고를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은 이 괴로움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집(集)’은 괴로움의 원인[因]입니다. 갖가지 번뇌는 괴로움을 만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이런 것들을 끊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를 알고, ‘집’을 끊습니다.. 당신은 번뇌를 모두 소멸시키고 난 뒤의 청정하고 안락한 적멸을 흠모하니, 이제 곧 도를 닦아야 합니다. 이 적멸을 흠모하면 도를 닦아야 합니다. 이게 고집멸도 4제법이며, 아라한이 닦는 법인데,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 이 역시 없습니다.
그래서 법화경은 말하기를, 아라한은 화성(化城)이며, 오직 일승법(一乘法)만 있다고 합니다. 사람조차도 공해졌는데 그에게 무슨 인생이 괴로움이겠으며, 괴로움이 어디로부터 오겠습니까? 그래서 고집멸도가 없다고 4제법도 쓸어 없앱니다. 이리하여 2승의 법인 12인연⋅4제법을 모두 쓸어 없애버려서 법집을 깨뜨립니다. 법집을 깨뜨리는 것은, 이 법이 아예 쓸모가 없다는 말과는 같지 않습니다. 바로 당신은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체의 나쁨은 바로 집착에서 나빠집니다.
(8식을 전환한 4지의) 지혜가 없고 (열반을) 얻음도 없나니,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無智亦無得. 以無所得故.
이어서는 대승의 법집을 깨뜨려서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이라고 합니다. 이전에 통원(通願) 법사가 오셨습니다. 그날은 손 거사가 있었는데 당신은 기억하는지 모르겠군요. 우리들의 이 법담에서, 제가 말했습니다, “분명히 부처님의 무위(無爲)의 법인데, 많은 사람 손에 이르러서는 유위(有爲)로 변했습니다.” 그녀가 회답하기를, “분명히 무루(無漏)의 법인데 사람들 손에 이르자 유루(有漏)로 변했지요.”라고 했습니다. 이야말로 대화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서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고 말이 통할 수 있어야, 대화라고 합니다. 현재 많은 수행자는 얻을 것이 있기를 생각하고 지혜를 구하고 싶어 하며, 얻는 것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마음이 있으면 영원히 성공할 수 없습니다! 노자(老子)조차 이러한 이치를 알았습니다. 중국의 옛날 성인은 역시 고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노자는 말하기를, “절성기지(絶聖棄智)”, 성인은 필요하지 않고 지혜를 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장자(莊子)는 “성인이 죽지 않으면, 큰 도둑이 그치지 않는다 [聖人不死, 大盜不止].”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대립적인 면인데, 항상 성인이 있으면 항상 도둑이 있어서 구분됩니다. 성인이 필요하지 않고 지혜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중국은 대승 불교를 지지하고 지킵니다. 대승 불교는 세계에서 중국이 여전히 진정으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여러 동남아 국가는 모두 소승입니다. 중국에 공자⋅ 노자가 있기 때문에 일본은 배워갔으며, 솔직히 말해 그들은 완전히 우리의 제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잘 배웠습니다.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여기서의 ‘지혜[智]’는 보살이 성불하는 법으로서, 8식(八識)을 4지(四智)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전5식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전환하고, 제6식인 의식은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합니다. 이는 거울이 물건을 비추듯이 관찰이 매우 또렷하지만, 그러나 영향을 받지 않고 분별이 없으며 흔적이 없습니다. ‘나’를 집착하는 제7말나식은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변합니다. 나를 집착하기에 자기가 있고 타자가 있으면 평등하지 않습니다. 자타가 모두 같고 일체가 모두 동체이면 평등성지로 전환됩니다. 제8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변합니다. 이 역시 하나의 비유인데, 거울은 비추지 않은 것이 없는, 하나의 크고도 둥근 거울입니다. 우리의 거울은 평면적인 것으로 단지 일방만 비춥니다. 만약 거울이 큰 공[圓球]이면 비추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이런 지혜가 비추지 않은 것이 없음을 대원경지라 부르고, 성불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바로 8식을 4지로 전환시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왜 “무지(無智)”라고 설할까요? 바꾸어 말하면 전식성지(轉識成智)는, 아직은 당신이 성불하기 전의 수행 길에서 일입니다. 석가모니불이 성불했을 때 진정으로 도달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다음 한 마디 말입니다, “일체중생은 본래 여래의 지혜와 공덕상을 갖추고 있다 [一切眾生本具如來智慧德相].” 당신더러 전환시키라고 또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본래 일체 여래의 지혜를 갖추고 있습니다. 성소작지⋅평등성지⋅묘관찰지⋅대원경지는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지, 당신이 수행으로 전환시켜서는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지혜가 없습니다” 또 지욱(智旭) 대사의 『금강경파공론(金剛經破空論)』은 말합니다, “이런 까닭에 이 마음이 곧 3반야이고, 3반야는 한 마음일 뿐이다 [是故此心即三般若, 三般若祗是一心].” 반야란 수승한 대지혜로서 단지 한마음일 뿐입니다. 지혜는 파도와 같고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 물위에 파도가 일어나면 파도 전부가 물이듯이 단지 한마음일 뿐이다. 그래서 “지혜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법집도 깨졌습니다. 그래서 원각경에 이르면 오도(悟道)⋅수도(修道)⋅증도(證道)가 전부 아집의 인아상(人我相)입니다. 금강경이 말하는 것은 식(識) 상의 미혹으로서 네 가지 전도[四倒]인 4상(四相)입니다. 식(識) 상에서 미혹하면 이를 4상(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라고 합니다. 원각경이 말하는 것은 지혜 상에서 미혹한 4상입니다. 당신이 지혜 상에서 흐리멍덩해져서 당신의 수도⋅증도가 전부 이런 4상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식’을 전환하여 지혜를 성취함에 있어, 당신이 이런 생각들을 일으킨다면 모두 4상 안에 있는 것입니다. 금강경도 사실은 법집을 깨뜨리지만, 원각경처럼 이렇게 상세하게 언급하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길, “그렇다! 그렇다! 수보리여, 실로 아무 법이 없어, 여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如是! 如是! 須菩提,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법이 없어 부처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법을 설하시지 않았습니다. 여래가 설한 법이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혜가 없고 얻음도 없다.”입니다.
《“무득(無得)”,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음은 바로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성취함입니다. 이른바 새롭게 성취함은 단지 원래의 본유(本有)를 회복하였을 뿐입니다. 만약 새롭게 얻음이 있다면 늘어남이 있을 것입니다. 원래가 100이고 또 1을 얻는다면 응당 101이어야 합니다. 경문에서는 앞에서 이미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밝혔습니다. 만약 얻음이 있다면 늘어남이 있어 경문의 뜻과 어긋납니다. 그래서 금강경은 말하기를, “실제로는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어떤 법도 없기 때문이니라 [實無有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의 함의입니다.》
사람들은 다들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을 하나 품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무위법이 당신한테 이르러서는 유위법이 되어버렸고, 무루법이 당신한테 이르러서는 유루법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것은 불법이 영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혜가 없고 얻음도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깨달음이 열린[開悟] 사람은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을 완전히 없애버려야, 비로소 수행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수행할 수 있다 [必須除盡了有所得心, 方能行至行不到處].” 하였습니다. 당신이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을 말끔히 없애버려서 털끝만큼도 없어야 당신은 비로소 저 수행이 도달할 수 없는 곳까지 수행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증득은 수행으로 도달할 수 없는 곳입니다. 수행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들은 모두 대단히 철저합니다. 그다음은 모두 대단히 원융합니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보세요, “무소득(無所得)”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얻을 것이 있다는 마음을 품으면 바로 제가 통원 법사에게 말한 두 마디 말에 떨어집니다. “멀쩡한 무위법이 당신한테 이르러서는 유위법으로 변하고, 멀쩡한 무루법이 당신한테 이르러서는 유루법으로 변합니다.” 그것은 당신 자신만을 탓할 수 있지, 어떤 사람을 탓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