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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는 예상했지만, 극장가의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광해, 왕이 된 남자]의 반응이 뜨겁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제왕의 자격'에 대해 묻는 이 영화는, 대선 정국과 맞물려 있는 우리 사회에 화두를 던지고 있는 셈이다. 추창민 감독을 만났다. 2005년 [마파도]로 데뷔해 2006년 [사랑을 놓치다], 2011년 [그대를 사랑합니다]에 이어 네 번째 영화를 완성한 감독은 조용한 목소리로 영화에 대해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 이 인터뷰엔 [광해, 왕이 된 남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글 l 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구성 | 네이버 영화
추창민 감독 인터뷰
"우리가 원하는 왕은 누구인가"
- 강우석 감독이 [나는 조선의 왕이다]라는 제목으로 연출하기로 했다가 투자사와의 문제로 하차한 프로젝트입니다. 다른 감독이면 모를까, 강우석 감독이 하려고 했던 작품을 하게 되었다는 점이 부담이셨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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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투자사에서 시나리오를 보내주겠다고 했을 때 "이건 강우석 감독님이 하시는 것 아니냐"고 묻긴 했어요. 부담감… 전혀 없진 않았죠. 그런데 이런 식으로 바톤을 이어받은 감독들이 부담을 가지는 경우가, 이전 감독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냈거나 기획을 했거나 시나리오를 직접 썼을 때인데, [광해, 왕이 된 남자](이하 [광해])는 투자사에서 기획하고 개발한 프로젝트였어요. 그런 점에서 부담이 적었고, 시나리오 읽은 후엔 너무 재밌어서 곧장 하겠다고 했죠.
- [광해] 프로젝트에 뛰어 든 후에 가장 먼저 하신 일은 뭔가요?
물론 각색 작업이었죠. 많이 바뀌진 않았고요. 연출자는 자기에게 맞게 재단을 할 필요는 있는 것 같아요. 같은 코미디라도 제가 하는 방식이 있고, 제 나름대로 드라마를 구축해가는 방식이 있어서, 제 몸에 맞게 옷을 조금 바꾸었어요. 옷 자체를 다른 옷으로 가져온 건 아니고요. 좀 더 입기 쉽게 디자인을 바꾼 정도죠.
- 황조윤 작가의 버전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바뀐 건가요?
제 생각에 재미있다고 생각한 인물, 예를 들면 조 내관(장광) 같은 인물은 좀 더 생명력을 불어넣었어요. 대신 광해(이병헌)를 아편 중독으로 이끄는 안 상궁 같은 경우는 역할을 줄였고요. 제가 더 잘 할 수 있는 부분들을 부각시키는 쪽으로 조율한 정도였어요.
1, 2. 하선이라는 이름의 광대는 왕과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왕의 자리에 앉고, 가짜 왕 노릇을 하던 중 어느새 왕의 마음을 가지게 된다. -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픽션이기에 광해라는 왕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책임은 없지만, 그래도 광해라는 어떤 '상'은 그리고 가야 하지 않았을까요? 감독님이 생각하는 '광해'는 어떤 인간인지요.
그런데… 결국 [광해]는 광해라는 인물에 대해 재조명하거나 그의 삶을 그리는 영화가 아니라고 봤어요. 사실 광해라는 인물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그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렇지만 그의 삶이 드라마틱했기 때문이었어요. 상상력을 불어넣기가 매우 쉬웠던 거죠. 세종이나 영조나 정조 같은 임금은 너무 많이 알려졌고 업적도 뚜렷하기 때문에, 허구를 불어넣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어요. 하지만 광해는 좋은 점보다 나쁜 점이 부각된 인물이어서,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상상력을 불어넣기에 좋았던 거죠.
- 그럼에도 맨 마지막 장면의 자막에선 광해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는데요, 이 부분에선 재조명의 느낌을 받았어요.
그렇게 보실 수도 있을 텐데요…. 제 의도는… 구체적으로 광해를 언급했다기보다는, 우리가 원하는 군주에 대한 상을 말한 것이었어요. 백성들을 사랑하고 외세에 저항하는 그런 군주? 조선 시대에 그런 걸 제대로 한 왕이 많지 않았는데, 광해는 그런 왕이었던 거고요. 우린 그런 사람을 바라고 원한다는 부분이 컸지, 그걸 광해가 했기 때문에 "광해는 이런 사람이었다"라고 부각시키려는 건 아니었어요.
사실 [광해]가 (하선(이병헌)에 대한 이야기이지) 광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저는 왕이라는 존재가 좀 더 힘을 가진 '강자'라고 생각하거든요. 힘을 가진 사람이 약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할 덕목이 어떤 것일지 생각하면, 인본주의적인 마음을 가진, 그리고 자존감을 가진, 그런 사람이 리더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런 부분에 더 의미를 둔 것이지, 광해라는 인물에 한정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아요.
1. 하선과 광해. 가짜 왕과 진짜 왕. 2. 허균은 하선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계산과 사상을 전하려 하나, 정작 하선의 상식은 허균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 그런데 인터넷 게시판 같은 곳을 보면 관객들은, 광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역사적 관점'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는 경우도 많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현실 정치와 맞물리는 부분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건… 곡해되든 어떻든, 좋은 현상인 것 같아요.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할 만한 '꺼리'가 된다면요. 처음에 영화를 만들 때, 자칫하면 어떤 정파에 의해 정의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런 부분을 희석시키려고 했거든요. 초반에 코미디가 많았던 이유도, [광해]가 관객을 가르치려는 영화가 아니라 그냥 재미있게 보고 그 밑에 깔린 이야기 하나 정도를 가지고 가서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광해를 이야기하거나, 리더는 어떤 모습이어야 한다고 제시하려는 건 아니었던 거죠.
왜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느냐는 지적도 있을 수 있어요. 너무 가볍게 보여준다고 말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대중과 가장 쉽게 소통할 수 있고 관객의 마음을 좀 더 빨리 열 수 있는 방식은 '유머'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조금만 목소리를 높여도 관객은 달가워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상업영화의 틀 안에서 영화를 만들려면, (감독이) 내고 싶은 목소리보다는 (관객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전하는 게 좋을 것 같았고요.
"한정된 공간에서의 빠른 호흡"
-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정확한 캐스팅이라는 느낌이 드는데요, 어떻게 가능했는지요.
아주 운이 좋게도, 첫 번째 선택한 배우들이 거의 다 캐스팅되었어요. 갈등을 한 부분은 있어요. 조 내관 역할의 장광 선생님 같은 경우는 제가 확신이 없어서 끝까지 머뭇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제일 먼저 그 역할로 시나리오를 건넨 분이었어요. 김인권 씨 같은 경우는 다른 영화의 주연이 내정되어 있어서 스케줄이 안 맞았는데 촬영 일정의 변동이 생기면서 할 수 있게 되었고요. 다른 역할들도 제작진이 원했던 배우들이 대부분 캐스팅되었어요.
1. 거의 메이크업 없이 카메라 앞에 선 중전 역의 한효주. 2. 현장의 추창민 감독과 한효주. - 중전 역의 한효주 씨 같은 경우는 조금 의외였는데요, 영화를 본 후에 인상이 강하게 남았어요.
캐스팅하기 전에 저희가 후보군을 만들어서 일반 관객들을 대상으로 모니터링을 하는데, 중전 역엔 한효주 씨가 거의 압도적이었어요. 사실 저는 한효주 씨가 너무 여리고 착한 느낌이어서 중전과 잘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데, 만나서 이야기해보니까 단순한 스타가 아닌 배우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연기에 대한 욕심도 컸고요.
- 메이크업도 거의 안 한 상태에서 등장하는데, 그 느낌이 굉장히 단아해 보였어요.
음… 제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의 특징인 것 같은데….
- 그러고 보니 [사랑을 놓치다](2006)의 송윤아 씨도 분장이 거의….(웃음)
(웃음). 한효주 씨 첫 촬영 때였는데, 분장을 다 하고 카메라 앞에 섰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안 예쁘더라고요. 조선 시대의 중전이 저렇게 화장을 하진 않았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색조 화장을 다 빼고 진짜 기초 화장만으로 가자고 했어요. 그리고 조명감독님이 정말 자기가 (한효주 씨 조명은) 책임을 지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영화 보시면 중전 장면의 조명은, 그래서 정말 좋아요.(웃음)
- 몇몇 장면은 지나칠 정도로 티가 나던데요?(웃음)
이병헌 씨가 농담처럼 그랬어요. 내가 주인공인데 왜 난 저렇게 조명 안 해주냐고.(웃음) 한효주 씨 조명에 일반적인 장면보다 두 배는 시간이 걸렸던 것 같아요. 조명감독님과 촬영감독님이, 중전 장면은 정말 신경을 많이 썼고, 대신 배우는 메이크업 없이 카메라 앞에 섰죠.
1. 영화의 첫 신은 눈 덮인 지붕의 종묘. 추창민 감독은 [광해]가 건축적으로 두드러지는 영화가 되길 원했다. 2. 왕의 거처. 이 영화의 세트 공간은 한국에서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크기다. - 사실 궁중 사극의 가장 큰 문제는 공간이 한정된다는 점이고, 특히 이 영화는 더한 거 같더라고요. 공간적으로 답답한 느낌을 어떻게 극복하려고 하셨는지요.
제가 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 바로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궁 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라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야 재미있고 긴장감이 생길지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장 힘든 문제는, 실제 궁 안에서 찍을 수 없다는 것이었어요. 섭외를 했을 때 외부 촬영만 이틀 시간을 주셔서, 창덕궁과 경복궁을 하루씩 찍어서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할 수 있었고요.
기존의 사극을 보면 왕이 거처하는 침전이나 회의를 하는 장소 등이, 경제적 문제겠지만 굉장히 좁고 작게 설계가 되고, 왕궁이 아니라 그냥 사대부의 집 같아요. 그래서 미술 팀과 처음부터 스케일을 고민했어요. 고증을 거쳐보니 그 당시 왕궁이 꽤 컸다고 하더라고요. [광해]에 등장하는 임금의 거처 같은 경우는, 지금까지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사극의 공간 중 가장 커요. 원래 계획했던 것의 2/3이긴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실내 세트로 지을 수 있는 가장 큰 크기죠.
그러다 보니 외부로 연결되는 장면에선 굉장히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실제로 경복궁에 가 보면, 기와 크기부터 담장까지 웅장하고 크거든요. 비슷한 곳을 찾는다고 했지만, (나름 웅장한 내부에 비해) 조잡해 보이더라고요. 이 영화가 기존 사극보다 더 한정된 공간에서 찍었다고 느껴지신다면 그런 이유일 거예요. 그럴 만한 (외부) 공간을 못 찾은 거죠. - 첫 장면에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궁궐의 롱 쇼트인데요, 그건 어떤 의미인가요? 인상적인 시작이었습니다.
거기가 종묘인데요, 조선 시대 건축물을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그곳이 가장 좋더라고요. 꼭 찍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는 촬영 허가가 안 났어요. 배우가 등장하면 찍을 수가 없어서, 그냥 카메라를 고정해 놓고 찍은 거죠. 전 이 영화를 시작할 때 건축물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예전에 궁중 사극 영화들을 보면, 그렇게 건축물을 보여준 영화가 거의 없는 것 같았거든요. 그런 점에서 차별화되고 싶었어요. 영화 전반적으로도 그러고 싶었는데… 현실적으로 힘든 점이 많아서 아쉽죠.
1. 현장의 추창민 감독과 류승룡. 2. 현장의 추창민 감독과 이병헌. - 광해의 첫 등장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는데요, 부서지는 빛 속에서 단장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시작 부분에서 관객들이 시각적으로 "재밌네?"라고 느끼길 바랐어요. 사극에서 여자가 단장을 하는 모습은 굉장히 많잖아요. 그래서 이 부분을 놓고 사람들에게 이런 장면이 사극에서 너무 진부하진 않은지 물어봤어요. 재미없을 것 같아서요. 그런데 사람들이, 남자 특히 왕이 단장하는 모습은 다를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용기를 얻어서 넣었어요. 그 장면은 최대한 고급스러워 보이고 싶었어요. 유럽의 시대극 같은 느낌?
- 단장이 끝나면 광해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데 그건 어떤 의미였나요?
광해는 왕이기에 절대 곁눈질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뭐든지 정면으로 응시하고 모든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는 거죠. 그래서 첫 장면부터 굉장히 거만하게 앉고,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 그를 시녀들이 시중을 들고, 마지막엔 관객조차도 정면으로 바라보는 인물이죠. "내가 왕이다"라는 느낌을 주기 위해선 가장 힘 있는 쇼트가 정면을 보는 방식이었던 거고요.
- 이전의 감독님 영화, 특히 [사랑을 놓치다]나 [그대를 사랑합니다](2011) 같은 경우엔 호흡에 어떤 여백 같은 것이 있었어요. 굳이 넣지 않아도 될 장면을 넣는다거나, 컷을 하지 않고 쇼트를 조금 더 길게 끌고 간다거나…. 그런데 이번엔 그런 느낌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어요. 편집도 굉장히 간결한 느낌이었고요.
이 영화는 호흡이 빨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이전의 영화는, 조금 느려도 되고, 여백 속에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면 [광해]는 훨씬 더 오락적인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관객보다 한 박자 더 빠르게 치고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고요. 현장에서 항상 카메라를 두 대 놓고 찍었어요. 그래서 컷도 굉장히 많고, 촬영된 소스도 굉장히 많았어요. 편집 과정에서 그것을 빠른 호흡으로 붙였고요. 시나리오 자체가 굉장히 길었고 편집해 보니 140분 정도가 나왔는데, 살짝 부담이 되더라고요. 지루해질 것 같아서 중요한 몇 장면을 뺐는데…. 아직도 아쉬워요.
1. 관객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광해. 그의 첫 등장이다. 2. 조 내관은 하선에게 "임금이란 자리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면 오를 수 없는 자리"라고 말한다. - 상참 때 교지가 백지 상태로 바뀌어 있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 부분이 설명이 안 되어서, 편집에서 뭔가 중요한 부분이 잘린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아, 그 부분이 저도 굉장히 아쉬운데…. 왕의 방엔 교지가 굉장히 많거든요. 그래서 하선이 자기도 모르게 빈 교지를 가져온 건데…. 그래서 하선이 허균(류승룡)에게 "미안하오, 나도 모르게 빈 교지를 가져 왔소"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장면이 없어도 관객들이 알 거라고 생각해서 뺐거든요?
- 그런데 빈 교지를 허균이 왕 대신 읽을 때 박충서(김명곤)가 그 모습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니까, 마치 박충서가 빈 교지로 바꿔놓았는데 그걸 허균이 마음대로 지어서 읽고 있다는 느낌을 주더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읽어내시더라고요. 정말 잘못한 거 같아요. 30초만 더 넣었어도 무리 없이 넘어가는 건데…. 이런 식으로 "빼지 말 걸…" 하는 장면들이 꽤 있어요.
- 그런 신이 또 있다면….
하선이 멘토 역할을 해주는 조 내관에게 "왜 아무 말도 없으십니까"라고 묻자 조 내관이 "임금께서 행하신 일에 제가 무슨 말을 보태겠습니까"라고 대답해요. 하선이 "그래도 한 번 해보세요"라고 하자 조 내관이 "임금이란 자리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면 오를 수 없는 자리"라고 말해요.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가 담긴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러닝타임 때문에 빠졌죠.
1~4. (왼쪽부터) 중전, 허균, 조 내관, 사월이. 그들과 하선과의 관계는 각자 조금씩 변해가고, 이런 스토리라인들이 엮이며 [광해]의 이야기는 나선형으로 전개된다. - 그런데 조 내관이라는 캐릭터가 독특하면서도 이상한 게, [광해]에서 하선이 왕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은 허균과 조 내관 두 명이잖아요. 그래서 허균은 사람들이 없을 땐 하선을 하대하는데, 조 내관은 사람들이 있든 없든 하선을 그냥 왕으로 여긴다는 거죠. 하선과 둘만 있을 땐 훨씬 더 편하게 대해도 되는데 말이죠.
그것도 사실 편집된 부분인데….(웃음) 조 내관은 "자기는 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모른다. 내관의 자리를 지킬 뿐"이라고 말해요. 하선이 진짜 왕이든 가짜 왕이든, 그저 내관의 자리를 묵묵히 수행하는 거죠. 그는 그 자리를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사람인데, 하선에게 감동해서 나중엔 "도망치라"며 의견을 피력하죠. 그는 어떤 불의에도 정의에도 움직이지 않는 인물이에요.
"이병헌, 울면서 웃다"
- 영화가 하선-허균, 하선-조 내관, 하선-중전, 하선-도부장(김인권), 하선-사월이(심은경), 이렇게 다섯 개의 관계가 나선형처럼 돌아가면서 발전하는데요, 무리 없이 편안히 보여주기가 쉽지 않은 구조라는 생각이 들어요. 부담스럽진 않으셨는지요.
음… 글쎄요….(웃음) 하다 보니까 그냥 된 거 같은데요….(웃음) 특별한 설정보다는 이야기 구조에 맞춰서 충실하게 찍었는데, 다행히 관객들에게 (그런 구조가) 설득이 된 것 같아요.
1. 현장에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이병헌. 2. 현장의 이병헌과 추창민 감독. - 그런 면에서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특히 '[광해]의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이전까지 이병헌이 원 톱 주연을 맡은 영화에선, 이병헌만 두드러지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자신은 물론 조연 캐릭터들도 모두 살아 숨쉬는 느낌을 주었어요.
저는 어떤 배우든, 연기에 대해서는 다 이기적인 것 같아요. 어떤 배우든 시나리오를 읽으면 자기 캐릭터만 읽어내요. 모두들 자신이 돋보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마련이죠. 여기서 감독이라는 사람은 끊임없이 설득하는 사람인 것 같아요. 조율하고 칭찬하고 가끔은 안 좋은 소리도 하고…. 사실 저도 그런 걱정을 안 했던 건 아니에요. 그런데 이병헌 씨에게 놀랐던 게,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연기를 너무너무 잘 한다는 것.(웃음) 그리고 상대 배우의 리액션을 굉장히 잘 받아줘요.
촬영 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는 하지만, 사실 촬영 5회차까진 서로 의심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감독은 '저 배우가 이 부분을 해낼 수 있을까?', 배우는 '저 감독을 믿어도 될까?', 서로들 그러면서요. 그런데 요즘은 현장 편집을 하잖아요. 그 장면들을 본 후에 굉장히 흥미로워했어요. 그러면서 점점 더 자기 자신을 내놓고 연기하더라고요. 망가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고요. - 즉흥적인 부분도 많았나요?
많았죠. 슬랩스틱 코미디 같은 부분들…. 처음엔 '내가 너무 오버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길래 괜찮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현장 편집본을 계속 보여주면서,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를 얘기해줬어요. 이병헌 씨가 개그처럼 보일까 봐 계속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러면 영화의 전반적인 톤에서 벗어나니까요. 그런데 현장에서 스태프들이 깔깔대면서 좋아하니까 자신도 용기를 내서 이것저것 제안하고 시도하더라고요. 그렇게 만들어진 부분이 굉장히 많아요.
특히 매화틀 장면 있잖아요. 그 장면 찍을 때 너무 재밌어서, 원래는 중간에 끊고 가야 하는 건데 일부러 "컷!"을 외치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이 배우가 끝까지 연기를 하더라고요. 마지막엔 카메라에 부딪혔어요.(웃음) 그제서야 "컷!"을 외쳤고, 그 직전까지 영화에 썼어요. 저는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계산된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이번에도 많은 부분 계산했겠지만, 현장에서 굉장히 자유롭게 연기했어요.
1, 2. 현장의 이병헌과 추창민 감독. - 사실 이병헌이라는 배우가 마스크가 강렬해서, 대부분의 영화에선 얼굴 클로즈업이나 바스트 쇼트를 많이 잡는데 이번에 감독님은 전신을 보여주는 풀 쇼트를 많이 잡으신 것 같아요. 배우에게도 색다른 경험이었을 것 같고요.
그 부분에서 이병헌 씨가 약간 투정을 부렸죠.(웃음) 일반적으로 찍는 방식이 (풀 쇼트나 롱 쇼트로 전체적인) 마스터 쇼트를 다 찍은 후에 (바스트 쇼트나 클로즈업으로) 따고 들어가는데, 제가 마스터 쇼트를 조금은 꼼꼼히 찍는 스타일이거든요. 배우 입장에선 마스터 쇼트 찍느라고 힘 다 뺀 후에 힘들 때 클로즈업 들어온다는 거죠.(웃음) 이병헌 씨가 "너무 한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전 그 얼굴이 굉장히 좋았어요. 조금은 지친 얼굴이. 잘 생긴 얼굴보다 좋더라고요. 그리고 찍으면서 느꼈어요. 이 배우에게도 주름이 보이는구나, 이제 나이가 드는구나…. 전 그게 참 좋은 느낌이었거든요. 그냥 '스타 이병헌'이 아니라, 이젠 인생이 보이기 시작하는 '배우 이병헌'이 된 것 같아서요.
- 하선이 광대로 설정되어 있어서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
맞아요. 그런 부분 때문에 일부러 광대로 설정한 것이기도 하고요. 광대가 남을 흉내 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고, 그런 행동이 용납되는 사람이니까요. 이병헌 씨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극의 흐름상 이렇게 빨리 하선이 광해를 똑같이 흉내 내도 괜찮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럴 때마다 "광대니까 괜찮다"라고 우리 자신들을 설득하면서 갔죠. 관객들도 설득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 하선은 언제 진짜로 왕의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걸까요? 저는 그 지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굳이 따지자면… 사월이가 죽은 후인 것 같아요. 저는 하선이 왕이 되고 싶지도, 왕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하선이가 진짜로 왕이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허균이 마지막 장면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지만 그가 유일하게 왕으로서 목소리를 낸 건, 사월이가 죽은 후라고 볼 수 있겠죠.
1. 현장에서의 장난스러운 모습. 2. LA 미술관에서 열린 [광해] 상영회의 레드 카펫에서 인터뷰 중인 이병헌. - 왕은 사월이의 죽음에 대한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신하를 잔인하게 고문하잖아요. 그렇다면 아이러니일 수도 있는 게, 왕의 마음을 가지게 된 하선에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것이 '잔인함'이라는 사실이요. 하선은 그전까진 남을 해하는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그게…. 거기서 삭제된 장면이 앞에서 말씀 드렸던 부분이거든요. 하선도 그 부분에 대해 고민하면서 조 내관에게 묻고, 조 내관은 "임금이란 자리는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면 오를 수 없는 자리"라고 말하게 되는 거죠. 그 장면을 넣으니까 이야기는 잘 꿰맞춰지는데, 드라마가 조금 늘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고심을 하다가… 정말 그 장면은 끝까지 고심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뺐죠. 러닝타임에서 조금만 여유가 있었으면 넣었을 텐데….(웃음)
- 사실 감독으로서, 이렇게 드라마틱하고 흥미로운 캐릭터가 있는 이야기를 만나기 쉽진 않을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조금은 들뜨게 되는데, 영화를 보면 굉장히 많이 스스로를 누르고 계신 것 같아요.
연출하기로 결정하고 가장 먼저 생각했던 건 "욕심을 내선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연출자가 보이는 게 아니라, 웃음이든 이야기든 관객들이 즐겁게 담아가는 영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려면 어쨌든, 관객들이 보는 존재는 '배우'잖아요. 그래서 배우들이 화면에서 잘 놀 수 있게 만들려고 애썼어요. 물론 제가 많은 걸 요구해서 배우들이 힘들긴 했지만(웃음), 촬영할 땐 정말 무조건 배우 위주로 찍었어요. 롱 테이크나 역동적인 카메라 워크 같은 걸 욕심 낼 수도 있었지만, 가능하면 정직하게 가려고 했고요.
1. 현장의 추창민 감독. 2. 현장의 김인권, 장광, 류승룡, 이병헌. - 감독님이 욕심 냈다고 느꼈던 부분은 하선이 사람들 등을 밟고 중전에게 달려가고, 슬로 모션으로 하선과 중전이 도망가는 장면 정도?(웃음)
그런데 그것도 아쉬웠던 게….(웃음) 시나리오 쓰면서도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고, 현장에서도 최대한 열 명 정도는 등을 밟고 가게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찍으려고 보니까, 세 사람 밟고 가는 것도 어렵더라고요. 거기 엎드려 있는 사람들이 다 무술 팀인데도, 잘못하면 배우가 다칠 것 같았어요. 와이어 액션으로 하면 너무 판타지 느낌이고요. 정말 많이 연습을 했는데, 맥시멈이 대여섯 명이었어요. 아쉬워요….(웃음)
- 마지막 질문입니다. 사실 이 영화의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어요. 하선은 떠나고, 허균이 와서 예를 표하고…. 그런데 여기서 예상하지 못했던 건, 하선이 울면서 웃잖아요. 어떤 느낌을 전하고 싶으셨는지요.
저는 하선의 그 감정을 관객들도 느꼈으면 했어요. 눈물은 나지만 가슴은 뜨거운 느낌? 하선과 똑 같은 감정으로 관객들이 극장 문을 나섰으면 했고요. 그러려면 하선의 마지막 표정이 중요했어요. 첫 테이크에선 하선이 그냥 울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다음 테이크 때 눈물을 흘리면서 웃어달라고 했어요. 사실 설마 하는 생각도 있었는데….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해주더라고요.(웃음) 진짜로 놀랐어요. '이 배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웃음)
첫댓글 저도 이 영화를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