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지
노 혜 숙
노랗게 잘 삭았다. 냄새도 적당히 시금하다. 위쪽이 좁고 가운데가 불룩하며 아래쪽이 갸름하게 빠진 모양새로 보아 순 조선무다. 제대로 된 짠지를 만난 게 틀림없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한밤중처럼 깊게 낮잠을 자고 나니 점심 때가 기울어 있었다. 모처럼의 서울 외가댁 나들이가 고단했던 모양이었다. 버릇처럼 엄마를 찾았다. 사람의 기척은 없이 뒤울안 매미만 귀청을 따갑게 울어댔다. 마루 한쪽엔 베 보자기 덮인 양은 쟁반이 놓여 있었다. 막사발에 담긴 밥 한 그릇과 짠지가 전부였다. 배가 고팠다. 생각 없이 한 숟가락을 떠 넣다 울컥 목이 메었다.
엄마를 찾아 나섰다.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엄마를 발견했다. 장마 끝에 불어난 개울물이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 나는 말없이 쪼그리고 앉아 땀에 젖은 엄마의 등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고개를 든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무선 꿈이라도 꿨다냐?"
"아니…"
"그럼 잘 자고 왜 우누?"
"그냥…"
나는 끝내 짠지 하나 뿐인 반찬에 서러워졌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엄마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후로도 나는 오랫동안 도시락 반찬으로 싸준 짠지를 먹고 자랐다.
어머니는 해마다 한 아름 둘레의 오지항아리에 짠지를 담았다. 단단한 가을무를 소금으로만 짜게 절여 다섯 달 정도 그늘에 놔두면 노랗게 익었다. 잘 삭은 짠지를 썰어 여러 번 헹군 다음 찬 물에 담가 놓으면 노르스름한 물이 배어나왔다. 거기에 매운 고추와 실파를 잘게 썰어 띄우면 제법 맛이 났다. 또 길쭉하게 채를 친 것을 물기를 꼭 짜 기본 양념에 고춧가루를 약간 넣고 조물조물 무치면 칼칼하고 개운한 짠지무침이 되었다.
김장은 떨어지고 장마에 마땅히 상에 올릴 반찬이 없을 때 '나 여깄소' 진가를 발휘하는 게 짠지였다. 찝찌름한 간 외엔 달리 아무 맛이 없는 것 같아도 짠지 한 개면 한 사발의 밥을 너끈히 비울 수 있었다. 맛보다 허기로 밥을 먹던 가난한 시절, 짠지는 수월하게 그리고 가장 돈을 적게 들여 배를 채울 수 있는 반찬이었다. 사실 근면하게 허리를 졸라매고 땅을 일구던 부모님의 삶 자체가 짠지였는지도 모른다.
읍내 장날 시장에 가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멈추는 곳이 있다. 짠지를 파는 할머니의 노점 앞이다. 입덧 난 새댁처럼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돌았다. 사천 원에 두 개를 사면 열흘은 먹을 수 있었다. 찬 물 말은 밥에 짠지를 건져 먹으며 어릴 적 툇마루에 차려져 있던 밥상을 떠올렸다. 달랑 짠지뿐이었던 초라한 밥상 앞에서 목이 매던 그때 나는 철이 들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짠지를 사 들고 간 내게 어머니는 말했다.
"그렇잖아도 짠지만 멕여 키워서 마음이 짠해 국겄는데 어쩌자고 여태 그딴걸 좋아한다냐?"
"엄마, 요즘은 이게 귀한 음식이에요. 난 고기반찬보다 좋은걸."
"애두 별나긴. 그럼 올가을엔 좀 담아주랴?"
언젠가부터 어머니는 짠지를 담그지 않았다. 식성도 옛날 같지 않은 데다 물리도록 먹은 음식을 더 이상 식탁에 올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재작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친정 식탁에는 짠지가 아예 사라졌다. 반대로 나는 어릴 때 먹던 음식으로 돌아갔다. 짠지에 대한 집착에는 내 혀의 기억, 그 오랜 기억을 불어올리는 아릿한 정서가 있었다. 짠지처럼 짜게 살 수밖에 없었던 농투성이 부모님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일치감치 가낭을 알아버린 아이에 대한 연민이었다.
장바구니를 연다. 검은 비닐봉지를 풀자 짠지의 잘 익은 냄시가 훅 코에 끼친다. 제 몸의 결기를 모조리 빼고 아침내 완숙에 이르러 나는 향기. 내 인생 이만큼 곰삭으려면 얼마나 호된 간에 절여져야 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