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과 아미타불, 보현행원과 극락세계
중국에 한창 종파가 형성되던 시절, 각 종파 간의 대립과 우열 다툼은 치열했나 봅니다. 그 중 하나가 화엄과 정토세계와의 관계입니다. 화엄의 연화장정토가 더 우월한가 아니면 아미타불의 극락정토가 더 우월한가 하는 것도 화엄종과 정토종의 논쟁거리였나 봅니다.
그 와중에 화엄종의 지엄스님은 열반하시며 당신은 지금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로 간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 극락정토가 연화장정토보다 우월하다는 증거로 논해지기도 했습니다. 또 이 부분이 화엄종 사람들에게는 뼈아팠는지, 나중에 청량징관스님은 화엄에 아미타불이 나오고 지엄스님이 그런 말씀을 한 이유로 ‘부처는 다 동일하다, 아미타불이 바로 비로자나불이다’는 식으로 말씀하기도 합니다(이 부분도 조금 기억이 불확실. 나중에 확인해 보고 틀리면 수정하겠음)
화엄경 자체에는 적어도 제가 아는 한(限) 한번도 아미타불이나 극락이라는 말은 안 나옵니다. 그래서 그동안은(40화엄이 나오기 전) 사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40화엄경에 보현행원품이 실리면서 극락세계와 아미타불 이름이 나옵니다. 이걸 근거로 정토종 사람들은 봐라, 화엄도 결국엔 아미타불이요 극락정토 아니냐며 극락정토의 우월을 더욱 강조하게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그것은 보현행원 또는 보현행원품이 어떤 가르침인지 제대로 모르셔서(?) 나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보현행원품에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이 나오는 건 극락이 연화장보다 낫고 아미타불이 비로자나불보다 낫다는 차원이 제가 보기엔 아닙니다.
화엄경과 보현행원품은 그 자체가 전부 이익중생 요익중생 교화중생 제도중생에 초점이 맞춰진 가르침입니다. 화엄은 줄곧 보현행원을 강조하지만 보현행원도 본인이 성불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중생을 성불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 화엄과 보현행원품이 일러주는 보현행원의 본질입니다.
즉, 화엄은 ‘나(我)’라는 것이 처음부터 없습니다. 오직 부처님이요 오직 일체중생뿐입니다. 오직 부처님만 존재하는 화엄세계. 그런 세계에서 자신이 이미 부처님임을 알지 못하고 중생인 줄로만 알고 부처행을 못하고 중생 행만 하고 살아가는, 그래서 열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끝없는 고통 속에서 이 아름다운 세계를 사바 고해로 살아가는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일체중생을 요익하게 하기 위해 화엄은 보현행원을 설합니다.
너희들은 어리석은 범부가 아냐! 너희들이 비록 깨친 게 없고 어리석음 투성이인 범부인 줄 알지만 너희들은 사실 부처님이야! 마땅히 공경받고 대접 받아야 할 존엄한 부처님 무량공덕 생명들이란 말이야!그러니 범부로 살지 말고 지금 당장부터 부처로 살아가! 범부행이 아니라 부처행을 해!
공경하고 찬탄하고 섬겨봐! 그제 부처행이야! 그러면 당장 지금 이 자리에서 네가 바로 부처 될 뿐 아니라 부처행 안하는 이웃들도 너로 인해 부처가 돼! 너한테 섬김받고 공경 받는 이웃들이 거친 마음 거친 말 거친 행을 버리고 너한테도 똑같이 공경 찬탄하게 돼! 그러면 나로 인해 우리 모두가 부처가 되는거야!
이웃들이 부처가 못되는 건 그들이 부처가 아니라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먼저 공경할 줄 모르고 찬탄, 섬길 줄 모르기 때문이야! 한번 해봐! 너부터 공경 찬탄하면 이웃들이 과연 부처인지 아닌지 증명돼!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보현행을 통해 부처행을 이루고, 또 나로 인해 보현행을 안 하는 이웃들도 저절로 부처가 드러나게 하는 보현행! 그것이 보현행의 본질입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은 너무도 거칠어 내가 보현행을 100%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또 내가 보현행을 설사 100% 한다 해도 내 마음을 몰라주고 그것이 이익을 얻거나 딴 마음이 있어서 그러는 줄 아는 분들도 수없이 계십니다. 그런 분들을 위해 보현행원품은 마침내 아미타불의 원력(願力)을 빌립니다.
그런 분들은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포기하느냐? 아닙니다, 보현행원은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그 분들을 아미타 극락정토로 모시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연화장세계보다 극락이 나으니까 그래서 연화장을 버리고 극락을 가겠다는 게 아니라, 나의 행원으로도 제도하지 못하는 중생들을 아미타불의 원력을 빌어 극락정토로 모시고 가서 지친 마음을 쉬고 힘들었던 삶을 충분히 쉬게 하겠다, 하는 것이 화엄경의 보현행원품 마지막에 극락정토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최후의 중생 한 분도 모두 이고득락(離苦得樂)하게 하는 것이 보현행원의 맹세입니다. 그래서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해도 오늘 세운 이익중생 중생제도의 이 서원은 끝나지 않는 것이 보현행원입니다.
*다른 불교는 제가 보기엔 말은 그럴 듯하지만(?) 거의 대부분이 나의 깨달음 나의 성불에 관심 있는 가르침입니다. 중생제도도 내가 먼저 깨친 후에 하겠다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그러나 보현행원은 처음부터 중생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나라는 것은 아예 잊어버리고 삽니다. 내가 깨치든 안 깨치든 성불하든 못하든 오로지 이익중생 요익중생의 길을 가는 것이 보현행원입니다.
*보현행원이 인기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보현행원이 나를 위한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가르침은 거의 전부 내가 밝아지고 내게 뭐가 얻어지는 가르침인데, 보현행원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할수록 내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 남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힘듭니다.이 세상에는 공경하고 싶어도 공경할 수 없는 분이 너무 많고, 찬탄하고 싶어도 찬탄하기 어려운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보현행원. 그러니 개인 이익이 극대화되는 현대 사회에서 인기가 없는 건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겁니다.
*보현행원은 모든 분야에 접목될 수 있습니다. 가령 요즘 한창 유행인 명상의 경우에도 보현행원은 훌륭한 명상이 됩니다(예:공경명상 찬탄명상 섬김명상...). 그런데 돈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돈벌이가 안됨). 왜냐? 안 배워도 할 수 있거든요? 설사 배운다 하더라도 한번만 강의 들으면 그 다음엔 안 들어도 됩니다. 보현행원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023.11.3
*지엄은 일승에서는 아미타정토가 원융불가설이라는 진정한 불국토인 연화장세계에 속하는 것으로 특정 장소를 점하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며, 삼승에서의 실보토로서의 아미타정토는 그러한 연화장 세계의 초문이고, 진정한 불국토로 열등한 근기를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무애한 연화장세계에 들어가는 것은 매우 곤란하기 때문에 수행자는 우선 아미타정토에 왕생한 후에 보다 고도화된 정토에 왕생하고 그런 황생을 거듭해서 원융불가설한 화장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아미타정토를 그렇게 입문 정도로밖에 위치시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법장의) 화엄경 전기에 의하면 지엄은 임종 때 문도들을 향하여,
“나의 이 허깨비와 같은 몸은 연에 따른 것으로 고정된 성질은 없다. 지금 우선 정토에 왕생하고 나중에 연화장세계에 가련다(今當暫往淨方 後遊연화장세계). 너희들이 나를 따르려거든 이 뜻을 같이 하라”
지엄은 만년에 화엄 불공의 교의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악을 자각하고 참법에 열심이었으며, 일승에 통하는 것으로 유식관 및 기타 여러 관법을 수행하였고, 연화장세계를 동경하면서 열심히 서방왕생을 바랐던 인물이었다. 이런 점에 주의 기울이지 않는다면 화엄증으로 불리는 많은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놓치게 될 것이다. 화엄사상의 연구 이시이 코세이 197-199
첫댓글 월호스님은 佛行을 하라고 설하시지만 무엇이 부처님 행인 줄 모르시는 듯.
보현행원을 말씀해도 보현행원 자체가 부처님 행인 줄 또 모르시는 듯.
그저 윤리 도덕 생활 규범으로 보현행원을 아시는 건 아닌지.
그렇지 않으면 마하반야바라밀 염송을 권하고 부처님 행을 하라고 하시고 당신의 도량도 행불선원이라 이름짓고도 보현행원 강의가 없는 게 이해가 안 됩니다.
반야와 화엄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가 있는지, 화엄을 공부하고 반야를 공부하고 보현행원을 공부한 분들은 뼈저리게 느낍니다.
우리 큰스님은 화엄을 제대로 공부하신 적이 없는 것 같은데,
반야만 깊이 들어가신 것 같은데,
어떻게 보현행원을 그렇게 구구절절 반야와 연관을 지으셨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요
공부가 정말 깊어지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집니다.
삶의 실상을 정말 알게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 않고 공부가 그저 그럴 때는 만면에 미소가 넘쳐납니다.
이렇게 기쁜 가르침이 없거든요?
그리고 이런 걸 알면 세상 모두를 구제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자꾸 공부하다 보면 그런 게 아닙니다.
성철스님도 보세요. 세월이 갈수록 얼굴이 굳어져 가십니다.
원래 호랑이같은 스승님이시지만 공부가 익어질 때 자비의 빛으로 환하게 변해 가셨는데 말입니다.
그럴수도 있었겠구나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갸웃거려지는것이 연화장세계나 극락정토나 아미타부처님이나 비로자나 부처님이나 전혀 다르지 않은 것 아닌지요?
보현행원을 조금이라도 해 본 입장에서 본다면, 사실 보현행원은 홧병(?)나거나 자괴감 느끼기 딱 좋은 수행법입니다. ㅎㅎ
화두참선을 하다가 상기병 오른다고 하지만 보현행원도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보현선생님께선 늘 이보다 쉽고 간단한 건 없다고 하시지만...보현행원, 참 쉽지 않습니다.
가족에게나 일상의 작은 행동에선 쉬울지 몰라도 강적(?)을 만나면 정말 힘들고 어려워요. 이럴바엔 차라리 염불, 절, 참선 수행이 더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쉽지 않기때문에 보현행원품에선 아이보현행원력고...라는 표현까지 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보현선생님 위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아미타불의 위신력까지 빌려야 하는 거라면 말 다한거지요, 뭐.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현행원을 해야하는 이유는 뭘까요?
저는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알파요 오메가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깨닫고 말고, 쉽고 어렵고, 지금 하고 나중에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우리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일겁니다.
콩 심은데 콩나는 것이 아무 이유가 없는 것 처럼요.
제게 보현행원이 힘들다는 것은 아직 번뇌도 많고, 나에 대한 집착이 커서일겁니다. 나 없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이 보현행원인데 그게 잘 안되니 어려울 수밖에요.
그럴땐 또 특별한 수행이 필요하겠지만 그 수행조차도 사실 지난한 수행을 닦아서 증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 자리에서 바로 확인하고 머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짓고 지어서 또 방망이 한대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그렇게 잘 닦아서 다시 보현행원의 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모든 생명의 숙명같은 것 아닐까.. 요즘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보현 선생님 연세도 드시고, 눈도 침침해져서 글 쓰기 힘드실텐데 이렇게 장문의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저도 요즘 글 쓰기가 힘든데 이 정도 글을 쓰시려면 얼마나 힘드실까요?
감사합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__
당시 시대 상황은 각 종파들이 들불처럼 일어나는 시절이라 자기 정체성을 세우는 게 쉽지 않았을 겁니다.
또 지엄의 공부 경지가 아직 원숙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아는 화엄종은 지엄이나 현수 법장 시대에 완성되어 고정된 게 아닙니다. 적어도 징관과 종밀 시대까지는 수정 보완이 이루어진 것이 지금 보는 화엄종이지요.
화엄은 둘이 아님과 무념 무분별을 지극히 강조하는 가르침이지만 화엄종 사람들이 이 부분에 눈을 뜬 건 같지 않아요. 저의 착각인지 오만인지 모르지만 그런 느낌을 받거든요?
마지막 귀절은 우리가 과거 큰스님들을 볼 때 범하기 쉬운 실수 또는 우상화라 할까, 그런 걸 경계하는 말로 저는 받아들입니다.
실지로 요즘 제가 다시 옛스님들 사상을 리뷰를 하고 있는데, 생각 외로 공부 경계가 문제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아요. 우리는 스승님들은 지금 시대와 달리 공부가 완벽했을거다, 라는 착각을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지 몰라요.
극락정토는 두 가지 개념이 존재합니다.
중국 정통 정토종의 입장에서 정토는 최후처입니다. 즉, 성불하는 자리지요.
정토에 왕생하면 거기서 성불하는 개념이죠.
반면 정토종 아닌 분들 입장에서 정토는 성불로 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입니다.
즉 정토에 가더라도 바로 성불하는 게 아니라 거기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고 닦고 용기를 내고 좋은 가르침을 받아 마침내 성불하게 되는 거지요.
보현행원품의 제 중생의 극락왕생은 후자의 의미가 짙습니다.
고해 중생을 일단 고해에서 건져내는데 더 중점을 두는 거지요.
따라서 이런 화엄의 극락왕생 입장을 극락정토가 더 낫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인용한다면 그건 아전인수 견강부회 꼴일 겁니다.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