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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달에 동 유럽여행을 다녀왔다.
자유여행이었다.
자유여행이라면 홀가분한 기분으로 자유를 즐길 수 있을 것같았다.
그래서 자유여행을 구상했다.
여행을 떠나기 직전까지 가슴이 흥분 되기도 했다.
인천국제공항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국제공항까지 이동하여 여기서 부터 동유럽을 순회하는 여행이다.
현지에서 미국 GM사 봉고차를 렌트 했다.
그리고 동유럽을 여행할 수있는 유심 칩을 구입하여 스마트폰에 심었다.
일행 중에 영어교사가 있어 언어소통도 가능했다.
쌀도 준비하고 밑반찬도 구입했다.
이상과 실제가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숙소와 음식이었다.
거기다 인간관계도 무너졌다.
그리고 몸도 지쳐갔다.
산천과 유적지는 정신을 송두리째 빼았았다.
그러나 이동 거리가 멀다보니 장시간을 운전해야 하였다.
패키지가 아니었기때문에 매일 숙소도 예약해야 하였다.
호텔을 제외하고 모텔이나 장급 여관과 캠핑장만을 전전했다.
장거리 이동과 당일 오후에 숙소를 예약해야 한다는 것이 회원간 서로를 피곤하게 했다.
다음날 식사를 위하여 전날 저녁부터 전기 밥통을 가동했다.
그리고 아침에 기상하여 이동할 때면 어김없이 밥통을 차속으로 운반했다.
반찬은 김과 멸치 정도가 전부다.
소피아국제공항
뜻밖에 일행 서로간의 신뢰도 무너져갔다.
말을 섞지않았다.
다시는 여행을 함께 하지 않겠다는 맹세로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여행이 무료 하다는 뜻은 아니다.
좋은 점도 많았다.
여행을 통해 평생 동안 감상하지 못할 것 같았던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천상공원이나 게르만민족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민족간의 갈등은 상호 이해부재탓때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되었고 과욕때문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신앙은 영적 영역이다.
일개 개인이 신앙을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종교의 정점은 모두 하나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5명은 개신교 신자이고 나만 가톨릭교 신자이다.
그래서 종교간 의견충돌은 거의 없었다.
불가리아 아파트
그러나 인내의 고통은 정치적 사상때문이었다.
각자가 사상이 다르기때문에 정치적 생각이 다를 수 있다.
일부는 거의 집착에 빠지고 있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도 티격태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에서 시작한 여행은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체코, 폴란드 등으로 이동했다.
과거 유고연방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까지도 여행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들 나라의 내적 요인이 여행을 차단했다.
신변 상의 안전문제가 대두 되었기때문이다.
릴리 수도원 입구
아쉬운 생각에 한참 망설이기도 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시를 방문해보고 싶었기때문이다.
사라예보 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된 곳이다.
1914년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은 3국 동맹국과 3국 협상 국 간의 충돌이다.
전쟁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다.
그결과가 동맹국은 상처를 받았다.
협상 국에 식민지를 빼앗기고 과도한 배상상금을 지불해야 하였기때문이다.
그 영향으로 러시아에서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유럽은 불안정이 지속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동맹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다.
동맹국은 서부전선에서 프랑스와 영국의 연합군과 그리고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와 싸웠다.
오스만투르크족이 동맹국에 가담하고, 불가리아도 1915년에 참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사건이 발생했다.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사라예보를 순방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저격했다.
이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서였다.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게 최후 통첩을 발송했다.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전쟁을 선포 하겠다고 위협했다.
오스트리아가 이같은 결정을 한 배경은 독일이 러시아의 개입을 막아주리라고 믿음이 있었기때문이다.
1914년 7월 25일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의 모두 받아들였다.
하지만 2가지는 거절했다.
세르비아 관리 해임 권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넘기라는 요구와 세르비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 오스트리아-헝가리 저항조직을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들이 직접 고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다.
세르비아는 이 문제를 국제 중재에 맡기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동원령을 내렸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이유다.
결과는 동맹국이 참패했다.
이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6개 공화국이 유고연방을 결성했다.
티토 사후 유고 연방은 결속이 느슨해 졌다.
그 틈을 이용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 5개국이 유고연방에서 탈퇴했다.
세르비아는 허탈감에 빠지게되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에 보복했다.
그리고 인종청소를 단행했다.
이 지역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이유다.
아직도 그 후유증은 진행중에 있다.
그래서 치안이 불안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사라예보 시를 방문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복잡했다.
서로가 원한을 씻지못하고있었기때문이다.
사라예보 시를 방문하지 못한 이유다.
역사를 연구했던 사람으로서 사라예보 시 방문을 취소 하기란 쉽지 않았다.
더 놀란 것은 렌트 카 회사가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을 방문하면 렌트 카를 회수 하겠다고 엄포 했다.
치안상황이 얼마나 불안한 가를 알 수있는 대목이다.
그러던 차에 T∙V 홈쇼핑에서 『발칸 반도의 보석상자, 장미의 나라』루마니아/불가리아 2개국 8일 여행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눈이 번쩍띄었다.
사라예보 시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가까운 나라였다.
즉각 여행을 신청했다.
그 여행일정이 2018년 5월 9일부터다.
유럽은 가톨릭 문화다.
여기서 파생된 종교가 그리스정교문화다.
그리스 정교가 발칸 반도로 전파돼 정교문화가 활성화되었다.
개신교와 이슬람교는 후발주자다.
이들 여러 문화권이 상호 공존 하면서 평화를 이루고 있는 곳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서 유럽문화권 과는 다르다.
과거 동 로마제국이 지배하고 있다가 오스만투르크족에게 멸망한 지역이다.
그래서 이들 지역은 그리스정교와 이슬람교가 섞인지역이다.
로마제국은 팍스 로마나시대 때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했다.
지금의 영국에서 서 유럽과 동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 일부, 중동 지방에 이르르는 지역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황제의 부재 시 국가 권력의 공백을 메우기위해 부 황제 제도가 신설되었다.
한 명의 황제는 로마에, 다른 한 명은 이스탄불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테오도시우스 황제 사후 로마는 두동강이 나고말았다.
두 아들에게 영토를 분할했기때문이다.
이것이 서 로마제국과 동 로마제국으로 분리된 이유다.
서 로마제국은 375년 게르만족에게 멸망되었다.
그러나 동 로마제국은 이후 1,000년 이상 발전했다.
로마제국이 동, 서 로마로 분리 되기는 하였으나 로마 교회의 영향력은 서유럽과 동 로마제국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동 로마제국이 서로마 교회를 보호하고 있었기때문이다.
8세기 초 동 로마제국의 황제 레오 3세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발표했다.
서 로마교회는 게르만족의 선교 활동에서 예수나 성모, 순교자들의 성상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 로마제국 레오 3세는 십자가 이외의 성상 숭배는 이단이라고 발표했다.
서로마 교회는 이를 거부했다.
서 로마교회는 프랑크왕국의 카룰루스 대제를 서 로마제국 황제로 대관했다.
서 로마제국의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가톨릭교와 동 로마 제국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가 탄생된 이유다.
오늘은 여행 첫 날이다.
인천국제공항 제1 여객터미널 3층 M카운터 앞에서 오후 8시:30에 미팅이 있다.
집사람과 함께 오후 6시 30분 무렵에 공항으로 출발했다.
퇴근시간과 겹쳐 교통상황은 최악이었다.
평소같으면 집에서 한시간 거리다.
그런데 거의 3시간이 소요되어가고 있었다.
미팅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인천국제공항 제2 여객터미널이 탄생한 이래 처음 인천공항방문이다.
다행히도 미팅 약속시간 10분 전에 제1 여객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탑승할 항공기는 터키 국적기다.
인천 국제공항에서 23:55에 터키 국적기 TK091기를 탑승하여 이스탄불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터키 국적기 TK091기는 새벽 05:05에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이스탄불공항에서 2시간 40분 동안 허송하다가 오전 07:45에 터키 국적기 TK1027기를 탑승하고 다시 불가리아 소피아 국제공항으로 이동했다.
불가리아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주의 국가로 갓 전환한 국가다.
때문에 아직도 사회주의 관습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 E∙U 회원국에 가입하고 있다.
그러나 솅겐 조약에 미가입 국가다.
그래서 입국심사 시 꼼꼼하게 여권을 살폈다.
여권심사를 할 때 Korea 에서 왔다고 말하니 굉장히 반가워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릴라 수도원으로 이동하고 있다.
사람들은 소박하고 행복한 표정을 짓고있다.
인간의 행복조건은 무엇 일까?
흔히 사람들은 물질의 풍요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닌듯 싶다.
산천과 초목이 자연상태 그대로다.
싱싱하고 푸르르다.
성모성당 내부
호흡기가 펑 뚫린듯 하다.
마음까지도 편안하다.
다시 내리막길을 지나 눈 덮인 산맥을 바라보며 언덕을 올라가고 있다.
골짜기는 점점 깊어지고 숲의 터널은 지나고 있다.
얼마나 지났을까?
구중 심 처에 준령이 나타났다.
하늘을 받치는 릴라 산맥이다.
1,000m 가 넘는 암봉이다.
고봉은 만년설로 덮여있다.
그 아래서 눈부시게 빛나는 릴라 수도원이 우리 일행을 반기고 있다.
아름다움에 호흡이 멈출 것만 같다.
동 로마제국 시대의 숨결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동 로마제국은 오스만투르족에게 멸망했다.
그리고 모든 성상을 파괴했다.
수도원은 고난의 세월을 감내했다.
인고의 고통을 이겨낸 것이다.
여우비가 흩날리고 있다.
그러다가 호우로 변했다.
날씨만큼 곡절이 많은 곳이다.
릴라 수도원은 불가리아 릴라 지역의 St John에 의해 세워진 수도원이다.
10세기 초에 세워졌다.
수사들의 방만도 300여개가 넘는다.
도서관과 응접실도 있다.
릴라 수도원은 500여 년 동안 불가리아 종교의 중심지역할을 했다.
건물의 프레스코 화는 자하리 조그래프, 디미타르 조그래프 형제 등 많은 화가들이 참여하여 완성되었다.
성모대성당, 기념품을 판매하는 프레리요 탑, 박물관 등이 있다.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목조로 만들어진 라파 엘의 십자가가 눈부시다.
그외도 많은 종류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1200여점의 프레스코 화가 현재 보존되어 있다.
릴라 수도원은 10세기 경 이반 릴스키 수도사가 릴라 산 아래서 은신 하며 작은 사원을 건립했다.이것이 릴라 수도원의 시작이다.
그를 따르던 신자들과 순례자 들도 그의 은신처 주변에 모여들기시작했다.
촌락은 종교의 중심지로 변해갔다.
이반 릴스키 성인은 치유 능력을 지녔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가 죽은 후 통치자 들은 그의 유골을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의 유골은 여러 곳을 떠돌다가 1459년서야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14세기 초에 큰 지진이 발생해 수도원 건물이 파괴 되었다.
호텔에서 정심식사
이후 이 지방출신의 귀족인 프레리요 드라고보라가 요새 형식으로 다시 복원했다.
그러나 1833년에 대화재가 발생해 수도원의 건물 대부분 소실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도 불가리아에서 유일하게 정교회를 지켜 냈다.
4층 건물이 수도원을 보호하려는 듯 감싸고 있다.
그 안쪽에 성모 교회가 있다.
그리고 흐렐요 탑이 교회 옆에 세워져 있다.
회랑처럼 둘러 있는 4층 건물에 역사 박물관과 민속 박물관이 딸려있다.
릴라 수도원을 관람하고 정심식사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냇물 소리가 가야금 소리 만큼이나 정겹다.
그리고 골짜기 곳곳에서 송어를 양식하고 있다.
송어는 1급수 에서 자라는 어종이다.
정심식사는 송어구이 정식이다.
식당 종업원이 송어구이를 가지고 와 식탁에 올려놓았다.
송어구이의 짙은 향이 코를 자극하고 있다.
송어구이 한 점을 입에 넣고 수도사 들의 애환을 느껴보고 있다.
오스만투르크족에 의해 기독교 성상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성직자는 개종의 압력도 받았다.
그러나 수도사는 어떠한 압력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태산처럼 버티며 종교를 지켰다.
이것이 불가리아 정교이다.
수도사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그의 유훈이 거목처럼 불가리아에 깃들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