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명으로 풀어본 한국사
□ 중구 남창동과 북창동의 유래
국가의 양곡을 관리했던 자리
중구 숭례문과 남대문시장 사이 높은 구름은 전국 각 지방으로부터 올려 보낸 대동미大同米의 출납을 맡았던 선혜청宣惠廳이 있던 곳이다. 선혜청은 1608년(선조 41) 상평창常平倉을 개칭한 대동미, 포布, 전錢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아로서 용산강龍山江에는 별 창別倉을, 삼청三淸에는 북창北倉을 구장용영舊壯勇營에는 동창東倉을 설치하여 운영해오다가 1753년(영조 29) 균역청均役廳으로 병합된 후 1894년(고종 31) 폐지되었다.
오늘날 남창동과 북창동의 지명이 전래되고 있음은 이 부근 일대가 국가의 양곡을 관리했던 기관들이 자리 잡은 연유이다.
지금의 남창동 1가 2번지 일대 새로나백화점과 상동교회 자리는 한국은행 부근에서부터 울창한 송림으로 이루어졌다고
해서 솥고개라는 지명으로 불리던 곳으로 어질고 청렴한 재상 상진尙震이 살았던 데에서 상정승골(상동尙洞)이라 한 곳이다. 상진은 1519년(중종 14)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중책을 거쳐 영상으로 재임하였는데, 마침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임꺽정의 난을 평정한 다음 사림들을 등용시키는 등 성품이 너그럽고 도량이 큰 명재상으로 알려져 그에 대한 많은 일화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서초구 상문고등학교 정문에 있는 상진 신도비 안내석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영조英祖가 숭례문 밖 남행으로 이곳 앞을 지나갈 때 시종이 "상 정승골!" 하고 외치면, 연輦을 멈추고 반드시 몸을 굽혀 예를 하고 지나면서 "오늘날에도 상진과 같은 옛 명상이 내 곁에 있다면.."
하면서, 상진을 기리는 마음가짐을 보일 만큼 크게 존경했다고 한다.
또 한 설에 의하면 당시 상진이 살던 집터는 흉가로서 장군 귀신이 나타난다고 두려워했던 집이었다. 그런데 담대한 상진
은 뚝심으로 장군 귀신을 쫓아냈고 내려친 번개로 우물이 생겼다는 일화도 전한다.
인근에는 상진 못지않게 유명한 명상 백사白沙이항복李恒福도 살았다고 하며, 숙종 때 인물인 미수 허목許穆도 이곳에서 살면서 대대로 명망의 맥을 이어왔다.
허목 묘비, 경기도 연천군
이곳은 상동으로 1901년부터 6여 년간 독일영사관이 자리 잡았었고, 이후 19세기 말 미국 장로교 선교사인 스크랜턴
William B. Scranton이 2백 평의 대지를 구입하여 상동교회당을 설립하였다. 이곳 사랑방에서 초대 전덕기全德基목사를 중심으로 개화기 개혁의 선봉을 자처하던 이상재李商在, 이동녕李東寧, 이갑李甲, 이회영李會榮, 이승훈李昇薰, 김구金九, 최남선崔南善등이 항일운동 최초의 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를 탄생시킨 역사가 깊은 곳이기도 하다
개화기 상동교회당에서의 진풍경은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사대부와 양반들이 노비나 중인, 상인 할 것 없이 한 자리에서
예배를 봄으로써 반상班常의 계급이 무너진 장소였다는 것이다.
오늘의 남대문시장은 근대 시장사에서 동대문에오개)과 더불어 서울의 양대 물류 유통시장으로 성장하여 남문 밖 칠패七牌를 이어받아 1907년 매국노 송병준宋秉畯의 아들 송종宋鐘이 물산 회사를 차려 신창新倉으로 불렸다. 1922년에는 일본 중앙물산주식회사로 출발하여 하루 70만의 유동 인구가 밀물처럼 모여드는 곳으로 성시를 이루었다.
첫댓글
잘 배우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