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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패망 직전의 부동산 투자
렘 32:1-44(36-44)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중심으로 ‘전쟁패망 직전의 부동산 투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패망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땅을 삽니다.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의 행동, 예언적 의미가 들어있는 상징적 행동입니다.
도대체 왜 전쟁 직전에 땅을 사라 하셨고 땅을 사게 될까요?
연평도 포격사건 뒤로 온 나라 안이 뒤숭숭합니다. 정말 전면전이 현실이 될 것인가 하는 우려가 다 있지요. 대한민국 서울에 몇 십 년 동안 투자한 것이 얼마입니까? 서울이 삼팔선에서부터 거리가 자동차로 달리면 불과 한 시간 거리입니다. 그런 상황인데 전면전이 일어나면 누가 이기고 지고 문제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연평도의 땅을 사라고 하면 여러분 연평도의 땅을 사겠습니까?
혹시 여러분 명의로 된 부동산이 있으세요? 저는 부동산을 잔뜩 끼고 눌러 앉아서는 아파트 관리비를 못 내며 어려워하는 교인들을 여러 번 봤습니다. 100평 빌라가 서울 강남에 있는데 이것이 팔려야 모든 집안이 먹고 살고 길이 열릴 텐데 팔려야 말이지요. 정말 부동산 투자를 해서 덕을 본 사람이 많이 있지만 필요할 때 팔리지 않으면 이 부동산처럼 마음에 짐이 되고 거추장스러운 게 없습니다. 돈을 필요한데 팔리질 않아요.
지금 전쟁 상황입니다. 우리나라도 그렇고 오늘 본문의 예레미야 상황이 똑같습니다.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쳐들어와서 포위하고 있습니다. 포위한지 이삼년 만에 마지막 시드기야 왕때 예루살렘이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고 남유다가 막을 내립니다. 지금 그러기 일 년 전입니다.
그때 너희가 벌을 받아서 나라가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큰 소리로 외치고 다니는 예레미야를 시드기야 왕이 가만 둘리가 없습니다. 안 그래도 괘씸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가 우리는 이제 일 년 안에 이북과 전쟁을 해서 이북에게 패망할 것이라고 얘기를 하고 돌아다닌다고 하면 고운 눈으로 쳐다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좋은 얘기를 해도 지금 어떨까 싶은 판인데 그 옛날 왕 앞에서 이 나라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진멸되고 성전도 파괴되고 왕부터 신하까지 다 포로로 잡혀갈 것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가만 놔둘 리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데 하나님에게서 명령이 떨어집니다. 너의 친척 중에 밭을 팔러 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밭을 사라. 말씀대로 그 사람이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에게 와서 밭을 사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샀습니다.
그리곤 본문 25절에 보면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내게 은으로 밭을 사며 증인을 세우라 하셨으나 이 성은 갈대아인의 손에 넘기신 바 되었나이다」
나의 주 하나님, 예루살렘은 이미 바벨론 군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 없는데 주께서는 제게 '돈을 주고 밭을 사며 주인들까지 세워서 매매 계약서를 작성하라'고 왜 명령하셨습니까? 라고 따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 왜 이렇게 이상한 부동산 투자를 하라 하셨겠습니까?
물론 투자라는 말을 하기에는 이 당시 유대사회에 땅의 대한 개념이 우리하고는 완전히 다릅니다. 내가 돈을 주고 샀다가도 희년이 되면 본 주인에게 돌려줘야 됩니다. 그러나 어쨌든 땅을 샀어요.
무엇을 말하시려고 이렇게 상징적 행동을 하게 하셨을까요?
땅을 지금 사라. 내년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할 것이 분명하지만 니가 땅 산 것이 유효하게 될 날이 올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내 선택한 백성들을 다시 복된 자리로 회복시켜 줄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섭리와 위로의 계획을 이렇게 땅을 사라는 명령을 통하여 예언을 해주신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땅을 사서 항아리에 그 땅문서를 집어넣고 인봉해서 놔두면 지금 나라가 패망하게 되고 왕이 사로잡혀가게 되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일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유효하게 될 정도로 내가 다시 회복을 시켜주겠다는 내용을 말합니다.
이 내용이 주어지는 것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예레미야가 기도를 합니다. 16절부터 나오는 이 기도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잡고 출애굽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복지르 들여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민족이 이렇게 망하게 되었으니 이 안타까운 일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탄식어린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그러한 예레미야의 기도에 대해서 그렇게 너희가 망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30절부터 하나님의 응답이 나옵니다.
악행과 우상숭배로 인해 하나님의 분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등을 돌렸다는 것은 배반한 것 아닙니까? 끊임없는 가르침과 교훈을 거절했습니다.
이것을 종합적으로 말하면 35절 하반절에 보면 「내가 명령한 것도 아니요 내 마음에 둔 것도 아니니라」
유다가 행한 것은 하나님이 명령한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마음에 둔 것을 행한 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줄이면 하나님이 마음에 무엇인가를 두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입 밖에 내서 선민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게 명령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마음에 두셨고 입 밖으로 꺼내서 말씀하신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망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두신 것이 하나같이 선민에게 유익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 둔 것들이 선민에게 받아들여지지를 않았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33절에 보면 「끊임없는 가르침과 교훈을 거절」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이 분명히 너무너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해서 마음에 품고 계시던 당신의 계획과 생각을 선민들에게 가르쳐주시면 그대로 행하기만 하면 복이 폭포수처럼 떨어집니다. 그런데 불행한 것은 이 사람 속에 있는 죄악이 마치 땅에서 솟아오르는 무슨 송곳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에 두셔서 입 밖으로 꺼내 허락하시는 모든 명령들을 분쇄시키고 충돌하고 맙니다. 사람 속에서 자기가 마음에 둔 것이 솟아오르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심정은 “하나님, 회복하시면 뭘 합니까? 나라를 회복하시고 복된 생업의 터전을 다시 허락해주셔도 상황은 똑같이 악순환일 텐데 하나님이 마음에 두셔서 우리들에게 입 밖으로 꺼내 명령하시는 것들에 대해 충돌을 일으키고 그것을 어기는 것은 여전히 마찬가지일 텐데 도대체 회복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두신 바가 입 밖으로 나와서 되어진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아서 망하고 있는데 회복해도 그 마음의 상태는 그대로 일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 『영원한 언약』을 내가 세우겠다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경외하는 마음을 내가 선민들의 마음 속에 심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는 이야기를 일차적으로 말하는 것이지만 이 예언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이 땅에 오심과 십자가 사건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 경외함이 우리 마음에 심겨진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 경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신 것을 입 밖으로 꺼내서 우리에게 전달해주시면 우리가 그대로 복종하고 순종하는 게 하나님 경외입니다. 그런데 이게 잘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습니다. 마치 시동을 거는 부로도저처럼 밀어부칠 참인데 예레미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나라가 패망하기 직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땅을 사라고 하십니다. 지금 연평도에 땅을 사라고 하십니다. 그 땅을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 경외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노아가 햇빛이 쨍쨍한 날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그것도 바닷가도 아니고 산 중턱에다 방주를 짓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 비웃습니다. 그러나 이게 하나님 경외입니다.
우리가 움직이고 행동하고 우리의 마음이 쏠리게 되는 것은 여론을 따라 쏠리고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여기는 것들을 같이 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밀려가는 물결의 방향을 따라 우리가 밀려가게 되고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 경외는 어떨 때는 내 행동이 그것을 정면으로 뚫고 맞설 때가 있습니다. 연평도에 부동산 투자를 하라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그렇게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얻은 아들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제단 위에 아들을 놀려놓고 칼로 찌르려고 할 그때 하나님께서 멈춰라 하시고 네가 네 독자 그 이삭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알겠다 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경외함이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경외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게 안 되잖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넣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 마음에 둔 것이 내 마음에 드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에 든다는 것은 내가 그것을 좋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명령하시면 내가 그 명령이 좋아져서 하고 싶어집니다.
하나님 마음에 두신 것을 내가 마음으로 좋아하게끔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게 하시고 무슨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풀어가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마음에 두고 우리가 마음에 좋게 여겨서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면 되잖아요.
하나님이 좋게 여기시는 것과 내가 마음에 좋게 여기는 게 달라서 이렇게 문제가 생기고 나라가 망하고 선민들이 패망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하나님 경외, 즉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과는 다른데 그것을 들이밀지 말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문제가 간단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봅니다. 나만 마음에 원하는 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옆집 김씨네 박씨네 최씨네도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김씨네 박씨네 최씨네 아들이 다 대학에 들어가려고 시험을 봅니다. 그런데 다 원하는 게 서울대학입니다. 이 세상에서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가 없어집니다. 한양대학교와 경희대학교가 없어지고 이화여대와 숙명여대도 없어집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게 서울대학이니까 전국에 서울대학만 있는 것입니다. 전라도에도 서울대학 경상도에도 서울대학 서울대학 분교들만 생겨야 되는 것입니다.
이게 말이 됩니까?
금방 끝난 아시안 게임. 모두가 다 이기기를 바라고 있는데 누가 이겨야 되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 세상이 내가 마음에 원하는 대로 되기만 한다고 그러면 모두가 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면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하나도 돌아가지 않고 그 순간에 박살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우리 각자 각자 마음을 통해서 순종이 되고 복종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마음의 죄악 때문에 하나님이 마음에 두셔서 입 밖으로 꺼내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명령을 도대체 지킬 생각이 들지가 않습니다.
이러니까 아무리 회복시켜서 복지를 줘봐야 또 멸망할 짓을 할 게 뻔 하니까 하나님이 이젠 아예 하나님 경외를 우리 마음에 넣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마음에 계획하신 것이 있고 입 밖으로 명령해서 꺼내신 것이 있으면 내가 그것이 좋아져서 하고 싶어지게 됩니다.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 돈을 많이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무병장수해서 오래도록 복을 누리며 사는 그것이 내 마음의 소원이 아니라 짧게 살든 길게 살든 하나님이 마음에 둔 것(35절)을 나도 마음에 들어하고 그것을 좋아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 뺨도 돌려대라는 말씀이 왜 그렇게 타당하고 왜 그렇게 맞게 여겨지고 왜 그렇게 하고 싶은지 그런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오늘 본문 39절에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하나님 경외함이란 하나님이 마음에 두신 것을 나도 같이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자식 죽이라고 할 때 자식을 죽이려고 했던 아브라함의 행동 그리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시절이 계속 되는데 방주를 지어라 하나님 말씀하시면 산 중턱에다 방주를 짓는 마음, 또 느부갓네살 왕이 포위해서 이제 망하기 직전 감옥에 갇혀 있는데 땅을 사라하면 땅을 사는 마음. 이렇게 세상 사람들은 이해도 못하고 할 수도 없고 따라갈 수도 없는 하나님의 명령들이 달콤하게 여겨지고 하고 싶어 미치게끔 되는 그런 마음 상태가 한 마음과 한 길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렇게만 되면 오늘 복이라는 것이 하나님 경외가 세네 번 반복되는 동안에 계속 경외와 묶여서 나옵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돈 벌고 싶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하고 높이 올라가고 싶어하고 많이 모으고 싶고 내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그리고 좋은 결혼해서 아들 딸 낳아 잘 살게 하고 싶은 이런 내 마음의 소원을 바랄 필요없이 하나님의 소원을 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경외만 이루어지면 다 잘 먹고 잘 사는데 이렇듯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시는데 41절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분명히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말씀 하십니다.
하나님이 신이 나셨습니다. 왜? 하나님 마음에 둔 것들을 우리가 마음으로 기뻐하고 그대로 행하니까 하나님이 신이 나서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경외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경외하는 방법을 알려주시고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그러니까 이 땅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서 내가 걱정할 필요없고 계획할 필요없고 내가 소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성을 다해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돌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복을 기쁨으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경외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 경외가 일어나질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마음과 한 길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음과 한 길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것 말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식 문제, 인간관계 문제, 연평도 문제, 이북 문제 무슨 문제이든지 간에 한 마음 한 길로만 가면 됩니다.
한 마음!
주님의 십자가 바라보면서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한 길!
무슨 문제가 있든지 내 마음의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백 가지 문제에 - 인간관계, 돈 문제 - 한 길인 십자가를 보며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나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있어야 됩니다. 이 땅에 대해서는 죽은 자입니다.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 앞에서 오직 한 마음, 오직 한 길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라고 있다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갑자기 내 마음에서 소원이 일어나는데 빌립보서 2장 13절에 사도 바울의 말처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 땅에 대해서 온전히 십자가에서 죽을 때 한 마음 한 길 다시 말해서 십자가의 마음 십자가의 길 죽은 것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삽니다.
이것을 경험해보셔야 됩니다. 땅에 대해서 철저하게 죽으면 내 눈 앞에 살아있는 아내보다 자식보다 남편보다 더 실감나게 살아있는 분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다 죽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완전히 죽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이 되고 하나님의 계획이 전달이 되는데 그 증거가 성경에 나온 모든 말씀이 달게 느껴지고 그 말씀을 그대로 행하고 싶어 안달이 납니다.
이것이 하루 이틀에 되질 않습니다. 사도바울의 말처럼 날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한 마음 한 길 무슨 문제가 닥쳐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 나라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점점 더 많이 세상에 대해 죽고 그러면 점점 더 많이 반비례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더 많이 친해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많이 깊어지면서 하나님의 속마음에 두신 것들이 어떤 명령이 나오더라도 기쁩니다.
구약의 아브라함이나 노아나 다윗은 순종하고 복종을 했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쉽습니다. 한 마음 한 길. 무슨 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십자가만 바라보고 내 죄악으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그 주님의 죽음에 나도 함께 죽었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노라면 하나님 경외함이 내 마음에서 하고 싶어지는 상태가 됩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경외가 이뤄지면 돈 벌고 싶어하고 오래 살고 싶어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뜻을 이루고 싶은 그런 소원이 생겨서 하나님 뜻대로만 살게 되면 복은 우리가 읽은 36절부터 44절까지 하나님 경외와 복이 몇 번 나오는가 짝을 맞춰 보십시오. 경외만 되면 복 복 복 복입니다. 그러므로 복을 좇아갈 필요도 없고 복을 마음에 둘 필요도 없습니다.
한 마음, 한 길을 제시한 것입니다.
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땅을 사라하십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어떻게 땅을 삽니까?
그런데 땅을 삽니다. 이게 하나님 경외입니다.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식으로 살아갑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은 그것을 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서 복종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십자가만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세상과 정면으로 맞서서 가는 길도 내가 기쁘고 즐거워서 하게 됩니다. 한 마음, 한 길을 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경외가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복으로 복으로 채워 나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상한 부동산 투자 속에 감추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경외 그리고 그 경외를 가능케 하는 한 마음과 한 길인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언해주고 계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경외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아니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한 마음, 한 길 내 마음 붙일 곳 내 마음의 갈 길을 정해주셔서 주님의 십자가만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에 하나님 경외가 심겨지고 하나님이 마음에 둔 것을 나도 좋아하게 되어 복된 삶을 살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사오니 이 영원한 언약이 오늘 내 눈 앞에서 확인되는 복된 하루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0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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