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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전쟁에 승리 2(1621.2014.7.20)
창3:1-7
우리나라 속담에 설마가 무엇을 잡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예,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여러분은 정말 천재들입니다. 그러나 나는 천재가 아니라 천치라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물론 세상에서 천재(天才))는 재주가 많은 똑똑한 사람이고, 천치(天痴)는 어리석은 바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은 천재가 아니라 수재(秀才)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는 천재나 천치 모두 하늘 천자를 사용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진 재주가 인간 자신이 아닌 바로 하늘 즉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재와 천치는 백지 한 장 차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가진 사람이 천재이고, 그 지혜가 없는 사람은 천치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천재로서 ‘설마’라는 말을 신앙생활에 잘 적용하시기 바랍니다.
지난주에 영적전쟁에 승리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면서 사탄 마귀가 우리 성도와 교회를 무너트릴 때 사용하는 무기가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공동체를 무너트리는데 사용하는 10가지 전략 무기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난주에 세 가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첫째 무기는 교만입니다. 두 번째 무기는 절망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무기는 비교의식이라 했습니다. 기억이 나시나요? 문제는 수없이 많은 성도와 목회자가 이 사탄의 전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사탄의 전략인 줄도 모르고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탄의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 알아야만 대비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인간을 넘어뜨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사탄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우리 인간, 그리고 택한 백성까지도 넘어뜨리려 합니다. 사탄은 거짓말로 인간을 넘어뜨립니다. 사탄은 세상의 것과 헛된 것으로 유혹합니다. 사탄은 항상 위장합니다. 사탄은 진실 할 수가 없습니다. 사탄은 사자나 뱀처럼 천천히, 은밀히, 오랜 인내를 가지고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접근합니다. 사탄은 가장 가까운 사람을 통해서 넘어뜨리려 합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위장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불의한 방법으로 살게 하고 성공하게 합니다.
사탄은 인간을 게으르게 만들고, 헛된 영광과 육의 행복과 꿈과 환상으로 미혹합니다. 사탄은 부드럽고 별 것 아닌 것으로 침투합니다. 마치 뱀처럼 부드럽게 한 겹 두 겹 슬슬 감습니다. 사탄은 어두울 때 활동하며, 어두움에 눈이 밝습니다. 사탄은 세상사랑, 육의 것, 물질, 명예, 먹는 것, 입는 것, 성, 쾌락, 인간이 가장 좋아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사람을 사냥합니다. 사탄은 그의 부하를 우리 마음에 침투하도록 항상 기회를 찾고 엿보고 있습니다. 마귀는 비정상적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멸망하게 하는 원수입니다. 오늘은 지난주에 이어서 4번째부터 6번째 무기를 살펴보려 합니다.
1.영적전쟁에 승리하려면 사탄의 무기인 의심과 불신을 없애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에덴동산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에덴동산, 평화의 에덴동산, 자유와 행복의 에덴동산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동산에 선악과나무를 두었습니다. 그 나무를 두신 것은 이 세상에는 모든 악의 기원이 되는 마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며, 죄가 존재함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에덴동산에서 축복을 누릴 수도 있고,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이며,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교제를 언약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며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 자유를 선용되어질 때만이 복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또 이 동산에 주인공인 첫 사람 아담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아담이란 말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곳에서 인류의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유혹하는 간교한 사탄도 불 수 있습니다. 도대체 사탄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을 반역하다가 타락한 천사’가 사탄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시기, 반역, 대적’이라는 뜻이 그 안에 들어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뱀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을 상고하면서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소원합니다.
하와는 똑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뱀의 말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입니다. 뱀의 말은 ‘그것을 먹어도 죽지 아니하고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와는 설마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는 죽는다와 죽지 않는다는 말을 놓고 설마 설마하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은 솔직히 말해서 죽는다는 말이 좋습니까? 죽지 않는다는 말이 좋습니까? 아마 죽지 않는다는 말이 100번 좋게 들릴 것입니다. 바로 간교한 뱀은 인간들의 이 같은 점을 이용하여 시험 하였습니다. 이 시험은 참으로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입니다.
하와는 여기서 설마를 바로 적용을 했어야 했는데 그는 벌써 뱀에게 약점을 보이고 빌미까지 주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하와는 하나님이 들려주신 말씀을 자기 좋을 대로 뜯어 고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와는 선악과를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고, 먹으면 죽을까 하노라고 성경을 자기 멋대로 고쳐버렸습니다. 오늘날 이단들이 이 수법을 씁니다.
뱀은 이미 하와가 반절은 자기에게 넘어 온 것을 알았습니다. 뱀은 자신만만하게 하와에게 말합니다.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고 말입니다. 나아가 뱀은 하와 보다 한 수를 더 떠서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리라’고 유혹했습니다. 여기서 뱀은 무엄하게도 하와와 하나님을 하나의 경쟁 대상자로 삼게 했습니다.
결국 하와는 뱀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하와는 이제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했습니다. 그녀는 설마 선악과를 따먹는다고 죽기야 하겠느냐는 의심의 눈초리로 선악과를 바라봤습니다. 선악과를 하와가 바라보는 순간 설마 하던 의구심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정말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너무도 탐스러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의 설마 타령은 뒤로 팽개치고 산악과를 따서 한 입에 집어넣었습니다.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는 즉시 선악과를 또 따서 남편 아담에게 주어서 먹게 했습니다. 정말 설마가 사람을 잡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몹쓸 놈의 설마가 온 인류를 사망으로 빠트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행동한 설마라는 생각은 평생 씻을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 할 수도 있습니다. 하와의 설마로 인한 선택은 오늘 우리에게 사망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담 예수님께서는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첫째 아담이 주었던 사망을 생명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설마 라는 생각은 아예 거들 더 보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설마 내가 죽고 다시 살 수 있을까? 설마 내가 죽는다고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를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것 밖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와가 설마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아마 그 생각은 하다못해 남편 아담에게라도 상의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고 의심을 하여서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형상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너무도 안타깝게 설마가 사람을 잡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설마가 사람을 살리는 천재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찾아와 마음속에 심어놓은 독초는 ‘의심’이고 그에 따른 ‘불신’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람 속에 들어가자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선악과를 따먹게 되었습니다.
1절에 ‘가장 간교하다’는 표현은 중국어 성경에서는 ‘가장 교활하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런 사탄이 여자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미귀의 전략이 뭡니까? 의심케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그러시더냐’,‘모든 나무 살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이 의심케 만드는 계략입니다. 그때 하와가 정확하게 대답을 못했습니다.
2-3절‘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먹지 말라’했지 ‘만지지도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죽으리라’ 했지 ‘죽을까 하노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하와는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담이 확실히 가르쳐 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창2:17-18절‘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하나님은 아담과 언약을 맺은 후에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돕는 배필을 지었습니다. 그러니 언약시점에는 하와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담이 아내 하와에게 확실하게 가르쳐 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확신이 없었던 하와를 사탄이 공격하여 의심케 하고 불신케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의심하면 그것은 결국 불신앙을 만들게 되고 결국 인간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의심이 뭡니까? 신뢰에 대한 반역입니다. 신앙적인 면에서는 의심은 독약입니다. 왜냐하면 의심하다 보면 잘못된 판단을 하게 되고 그러다가 편견과 오해로 불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심’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의심이 많은 사람은 공동체 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가정에서도 가족을 믿지 못합니다. 직장에서도 동료를 믿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목사를 신뢰하지 못합니다. 오직 자신만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결국 마귀의 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의심과 이 불신 뒤에는 항상 사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탄은 이 의심과 불신을 이용해 우리가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길을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변 사람들을 보세요. 왜 그렇게 전도를 하는데 그들이 믿지 못하나요? 복음을 받지 못하는 정확한 이유는 의심하고 불신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약속이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 불신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위로 걸어가신 내용이 있습니다. 배에 타고 있던 제자들은 그 광경을 보고 ‘유령’이라고 놀랍니다. 그런데 유독 베드로는 자신도 물위로 걸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왜냐면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주님이 걸어오라 하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의 능력을 믿고 바다위로 발을 내 딛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바다를 걷다보니 바람을 보고 무서웠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물속에 빠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뭐라 하십니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믿음이 작다보니 의심하게 되고 의심하게 되니 아무것도 못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의심’을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기초는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신뢰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의심과 불신이 있는 곳에는 기적도 없고 사랑도 용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연합도 없고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분열과 미움, 실패와 아픔이 따를 뿐입니다. 그래 사탄의 이 간교한 전략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올바로 알고 사탄의 전략을 대처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누군가를 의심케 됩니까? 그러면 즉시 찾아가 만나고 확인하고 대화해야 합니다. 만나기 어려우면 여러 경로로 사실을 파악하셔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서로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불신하게 되어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마귀의 계략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성경의 약속을 의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약속은 일점일확도 틀림이 없다고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사람을 향해서도 의심하지 마세요. 혹 의심이 생기고 불신이 생기면 곧바로 찾아가 만나고 확인하세요. 그리고 사람을 믿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세요. 사람은 사람과 섬김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은 아닙니다.
2. 영적전쟁에 승리하려면 사탄의 무기인 거짓말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잠시 간교한 마귀의 정체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사단의 특성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귀의 성격은 그 이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탄’(Satan)이란 ‘대적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의 일을 방해합니다.
‘마귀’(Devil)란 ‘참소 자, 훼방 자, 고소 자’란 뜻입니다. 남의 허물과 죄를 들추어 참소하고 음해하고 고소하는 일을 하며 거짓말을 만들어서 주의 종과 성도들을 죽이고 매장시키는 일을 합니다.
‘귀신’(Demon)이란 이름은 ‘유혹자’란 뜻입니다. 사람을 유혹하고 죄를 범케 하고 타락시키는 일을 합니다. 사탄의 제일 큰 활동목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좌절시키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과 분리시키고 멀어지게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자기를 높이고 자기가 하나님처럼 영광을 받게 하려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현재, 지금 이 시간도 역사하는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벧전5:8절에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지금 이 시간도 마귀는 실제로 활동하는 존재입니다. 어찌 해서라도 마귀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미혹하여 죄로 인도합니다. 바울은 엡6:10절 이하에서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 즉 말씀을 가지고서 마귀를 대적하여 이기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그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4절‘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사단의 본성이 나왔습니다. 본성이 무엇입니까?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8:44절에서 ‘사단을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천로역경의 저자 존 번연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면 다 거짓으로 가 버린다’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 속에는 진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 속에는 참된 진실이 없습니다. ‘다 못 믿어도 나는 저 사람만은 믿어, 얼마나 착실해’ 그러나 그런 사람 속에도 거짓과 음란과 술수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착실해 보이고 얌전해 보여도 정도 차이는 있을 뿐 마찬가지입니다.
사단은 ‘너희는 결코 죽지 아니 하리라’고 한 것은 2:17절에서 ‘하나님이 정녕 죽으리라’고 한 ‘정녕’을 무시해 버린 것입니다. 지금 사단은 하나님의 절대 명령을 절대적인 거짓으로 맞바꾸고 있습니다.
거짓말에는 거짓만의 힘이 있습니다. 오히려 진실보다 더 확실한 것처럼 보이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짓은 더 확실한 것처럼 들립니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표현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짓은 언제나 마구 부풀리기 때문에 얼마든지 더 좋게 들리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화를 보면 만화는 실제로 그렇지 않은 것을 그림으로 얼마든지 그려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부풀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만화를 좋아하게 되고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마귀를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사단은 거짓과 가장의 천재이며 위장의 천재이기도 합니다. 사단의 주특기는 속이는 것입니다. 심지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철학, 잘못된 사상, 그리고 잘못된 세계관과 이단의 배후에는 항상 악한 사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 맨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도 이 마귀의 거짓말에 속았습니다. 지금도 마귀의 거짓말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이 과학을 너무 잘 믿고, 여론을 너무 신뢰하며, 통계를 너무 신뢰합니다. 다수의 의견을 민주주의의 기초로 삼으며, 매스컴을 너무 신봉하니까 이것들을 이용해서 사단은 무신론 사상을 퍼뜨리며 인본주의 철학을 심어 주고 있습니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지 않았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는데 듣고 난 후 헷갈리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유혹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 굳게 서야만 됩니다.
거짓말은 사탄이 갖고 있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거짓말을 사용했습니다. 언약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하와를 확인한 사탄은 곧바로 거짓말을 합니다. 4-5절‘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 이것은 분명한 거짓말입니다. 그래서 사탄을 거짓의 아비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짓말’이란 무엇인가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꾸며서 말하는 것이 거짓말입니다. 그러니 거짓말은 사탄의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단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거짓말을 하느냐 안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단들은 거짓말을 묘략이라 합니다. 묘략이 뭡니까? 기막힌 꾀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들은 거짓말을 꾀라고 생각하니 아무런 가책도 없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잠6: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6-7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거짓된 혀’입니다. 즉 ‘거짓말’을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심각하면 십계명 중에 9번째에 기록해 놓았겠습니까? 출20:17절‘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십계명의 구조를 보면 제9계명은 인간관계에 관한 말씀 중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 인간관계를 치명적으로 깨뜨리는 것이 바로 거짓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금지시키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중에 최고의 복이 언어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물론 동물도 소리를 통해 자신의 본능적인 표현을 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말처럼 논리와 감정, 예술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만이 언어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만이 그 언어를 표현하는 문자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해 받고 듣고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말을 통해 사람 됨됨이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많이 배웠고 외모가 뛰어났어도 거짓말을 밥 먹듯 하면 그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사탄의 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누구를 좋아할까요? 어떤 사람을 자기 종으로 삼으려 할까요? 그것은 작은 이익에 쉽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거짓말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감각이 없이 사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성경을 살펴보세요. 거짓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북 왕국 아합 왕이 왕궁 옆에 있는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을 갖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 뜻대로 잘 안되었습니다. 나봇은 그 포도원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기에 아합 왕에게 쉽게 넘길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 이세벨이 무슨 짓을 합니까? 거짓 증인 둘을 세워서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거짓말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를 돌로 쳐 죽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율법을 이용해 사람을 죽입니다. 그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 땅을 차지합니다. 결국 그 이세벨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개들이 그의 시체를 먹게 합니다. 이처럼 거짓말은 심각한 악을 저지르게 합니다.
옛날 로마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게 했고 애굽에서는 코와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사탄의 이악한 전술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나 자신부터 거짓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거짓말이 마귀의 도구인줄 알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거듭나서 마음이 깨끗해야 하고 내 입술에서 거짓이 나오지 않도록 내 입술을 통제하도록 성령님께 의탁하여야 합니다.
3. 영적전쟁에 승리하려면 사탄의 무기인 미움을 버려야 합니다.
악한 사탄은 공동체를 깨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운 공동체가 하나가 되지 못하게 합니다. 가정과 교회, 그리고 국가가 하나 되는 것을 어떻게든 막으려 합니다. 그 전략이 뭐냐? 여섯 번째 전략은 미움이 생기게 하는 것입니다. 이 ‘미움’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나타납니다. 따라서 ‘미움’은 ‘사랑’의 반대인 것 같은데 실상은 마귀가 심어주는 마음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니고 ‘무관심’입니다.
그러면 이 ‘미움’은 무엇일까요? 미움의 역사를 보면 제가 지난주 언급한 것처럼 가인과 아벨에게서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미움의 뿌리는 비교의식에서 나오고 그 결과 시기와 질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가인이 자신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하고 동생만 인정받는 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에서 미움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 미움이 심각해지면 결국 실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미워합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랑하던 사람이 미워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미워집니다. 사랑하는 목사님이 왠지 모르게 미워집니다. 그래서 힘들어집니다. 그냥 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이 교묘하게 미워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이 갈라지게 하고 동서가 갈라지게 하고 심지어는 가정도 교회도 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는 영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갈라지게 하는 영입니다. 그러기에 나와 다르다고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고 미워하면 마귀는 그 틈을 헤집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원수가 되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 미움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그것은 오직 성경적으로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를 보세요. 십자가는 더하기 표시로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더하기를 십자로 표시할까요? 십자는 하나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화목이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의 사건 없이 미움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의 장벽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었습니다.
미움은 궁극적으로 사랑의 희생을 통해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야 미움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하나 되면 미움의 장벽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나와 마음이 하나가 안 되기에 나누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도 죽었으나 상대를 위해서도 죽었음을 믿고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미움이 떠나가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잠10:12절‘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 속에 있는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시기를 축원합니다. 사실 미움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미움을 그대로 두면 나도 힘들고 상대도 힘들고 하나님도 힘듭니다. 오직 마귀만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셔서 이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악한 마귀는 여러분 속에 미움을 정당한 것으로 두게 하고 계속 그 미움 때문에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탄의 이 고도의 전략인 미움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시길 축원합니다.
오늘도 우리는 영적전쟁에 승리하려면 사탄의 전략 3가지를 생각했습니다. 의심과 불신, 그리고 거짓말, 그리고 미움, 이 세 가지가 여러분에게서 떠나가길 축원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으로 무장하여 깨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따라서 해 봅니다. ‘나를 괴롭히는 의심과 불신은 떠나갈 지어다’,‘내 속에 있는 거짓말의 영은 떠나갈지어다’,‘내속에 있는 모든 미움은 예수이름으로 명하노니 떠나갈 지어다’ 지난주 살펴본 3가지도 명심하셔야 합니다. 교만, 절망, 그리고 비교의식,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 살펴본 의심과 불신, 그리고 거짓말, 미움을 경계하셔야 합니다. 우리 속에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악한 것이 있다면 물리치시는 여러분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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