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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7일
백두대간 3구간 산행하다.
올 3월은 따뜻한 기운이 지속되었지만 최근 남부 지방에 비소식, 중부지방에 폭설로 인해
산행길의 눈과 일부 진흙길로 약간의 불편감이 있었다.
여원재이다.
출발에 앞서 우선 인증샷을 한다
여원재 :
여원재는 남원시 운봉과 이백면을 잇는 고개로 주민들은 흥부에게 박씨를 물어다준 제비가 넘나들던 고개라 하며 연재라고도 부른다.
고개 서편으로 평원을 이룬 구릉이 운봉면이다. 섬진강 상류가 되고, 섬진지류는 남원시가지를 거쳐 광양만으로 빠져 나간다.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고 한다.
여원재(女院峙) 한자로 여자사원의 고개라는 뜻인데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여원재(女院峙, 477m)는 운봉읍 장교리와 이백면 양가리 사이의 고개로 이성계 설화가 서린 사당(女院)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고려 우왕(愚王) 6년(1380)에 왜구를 정벌하기 위해 이성계 장군이 변안열(邊安烈)·퉁두란(퉁豆蘭)장군과 전주·남원을 거쳐 운봉(雲峰)을 향해 진군하던 도중 험준한 고개를 넘어야 했다.
이때 이성계장군이 지휘하는 부대가 고개 정상에 이르렀을 무렵 갑자기 안개가 자욱하여 시야를 가리더니 비몽사몽간에 노파(老婆)[비문에는 도고(道姑)라 되어 있다.] 한분이 이성계 장군 앞에 나타나 왜구와 싸울 시기와 장소 방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1)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지방의 미모 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자기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한 원신(怨神)으로서 노파로 변신하여 이성계 장군에게 전략을 일러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여원재 여신상은 왼쪽 젖가슴이 없으며 그 노파가 지적하여 준 결전의 장(場)이 곧 운봉 황산(荒山)이었다고 한다.
황산에서의 대승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황산대첩비가 지금도 인근 비전마을에 남아있으며, 이성계 장군은 정성을 다해 노파를 만났던 여원재 석벽에다 왼쪽 젖가슴이 잘린 여상(女像)을 새기고 그 위에 집을 지어 여상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산신각(山神閣)을 지었다고 한다.
(2) 다른 한편으로는 왜적이 함양을 유린하고 남원성을 향하는 도중 여원재 주막에서 술을 청하여 진탕마시다 얌전한 주모를 위협하여 주모의 손목과 젖가슴을 만지며 방자한 행동을 하였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난 주모는 비분하여 부엌칼로 자신의 젖가슴을 도려내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후 이런 주모에 대한 소문이 퍼져 이곳 주민들은 그 주모의 절개를 높이 기리기 위하여 그 자리에 비석을 세우고 그녀의 제각을 지었다고 한다.
아래 여원치에서 100m 서쪽으로 올라가면 마애불상 입구가 있다.
지난 산행에서 산행후 남는 시간에 다녀올 것을 그랬는데 출발시점에서는 단체행동상 갔다 오는 것을 포기하고 멀리서 마애불상 입구 사진만 찍어본다.
여원치 마애불상 :
운봉 여원치 정상을 지나 남원 쪽으로 200m쯤 되는 도로 밑 남쪽으로 향한 바위에 좌상인지 입상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불상이 하나 새겨져 있다.
높이 2.42m, 어깨폭 1.09m로 머리에는 두광을 음각하였다.
이 마애불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고 하나 여래상의 사연을 새긴 마애비에는 여상이라고 적고 있으며 내용인즉 이성계가 황산대첩에 임하여 이곳에서 길가는 노파의 계시를 받고 대승하자 바로 산신이 노파로 변신한 것이라하여 불각을 짓고 봉신하게 되었다는 줄거리가 담겨 있으며, 비문이 새겨진 시기는 1901년 7월(광무 5년)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불상의 오른손이 젖가슴을 가리고 있다고 한다.
한쪽 가슴을 가린 불상이다.(인터넷에서)
****참조로 이성계의 황산대첩(荒山大捷)
: 우왕 6년(1380년) 전라북도 남원 운봉면 화수리에서 일어난 전투이다.
최영(崔瑩)장군의 홍산대첩(鴻山大捷, 1376년)거 더불어 고려시대 왜구와 싸워 크게 승리한 2대 대첩이다.
양이 많은 관계로 시간별 순서로 1) 2) 3) 으로 나열하여 적어본다.
당시 상황은 고려말 홍건적의 2차 침략으로 개경이 일시적으로 함락당하고(1360년) 이후 계속된 홍건적의 침략으로 고려는 북쪽의 침략에 대해 전력을 치중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려남쪽에서 일어나는 일본 왜구들이 국내에서 약탈과 수탈을 제대로 대처하기 힘든 입장이었다.
1) 진포해전(鎭浦海戰) : 1380년 8월에는 진포(금강입구, 현재 전라북도 군산)에 500여 척의 함선(艦船)을 이끌고 침입, 충청·전라·경상 3도의 연안지방을 약탈·살육하여 그 참상이 극도에 달하였다.
이때, 고려는 500여척의 일본의 대함대를 100여척으로 격파하는 대 반전을 보여준다.
고려 원수 나세(羅世)·최무선 등이 화통·화포(火砲)로써 왜선을 격파, 전부 불태워버리자 왜적은 퇴로를 잃게 된다.
한반도에서 함포가 대대적으로 사용된 첫번째 해전이었다.
2) 왜구의 연합세력 구축 : 진포해전에서 패한 왜구는 고려의 각 지역에 이미 상륙하여 흩어져 있는 왜구들과 결집하여 연합세력을 형성하여 경상북도 상주를 거쳐 사근내역(沙斤乃驛, 경상남도 함양군)에 주둔하게 된다.
3) 고려군의 참패 : 이에 고려 원수 9명과 5,000~10,000명 이상(1만~2만으로 추정)의 고려 병력이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한 왜군과 격전을 벌이지만, 오히려 2명의 원수(박수경, 배언)가 참살당하고 500여명의 병사가 도륙되는 참패를 겪는다.
아지발도는 그 여세를 몰아 북진하여 인월역(지금의 인월리)에 주둔하게 된다.
4) 황산대첩(荒山大捷)
: 지원군으로 도착한 이성계는 여원치 고개를 넘어 운봉분지를 지나 황산 근처 정산봉(鼎山峰)에 오른다. 당시 고려군의 병력은 적에 비해 10배나 열세였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아군은 이성계의 친병 1,500여명 및 고려군 및 사근내역에서 패전한 군사 정도이고, 왜군은 15,000명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황산대첩 이후 고려군이 1,600여필의 말을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연합세력을 구축한 왜군은 대군이었다. 하지만 운봉읍 황산에서 이성계장군은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이고 대승을 거둔다.
황산은 운봉읍에서 동쪽으로 약8 km 떨어진 해발 695m의 바위산이다. 당시 전투에서 왜군은 거의 괴멸되어 황산대첩에서 살아 남아 산으로 도주한 왜구가 70여명 가량이라고 할 정도였다.
황산대첩의 의미는
운봉읍에서의 황산대첩은 국내 내륙지방까지 약탈하던 일본 왜구들의 연합세력을 괴멸함으로써
① 고려말 아주 극심했던 왜구들의 활동양상이 한반도의 서부지역에서 동부지역으로 전환되면서,
왜구의 침입과 약탈을 결정적으로 멈추게 하는 일대 전기점이 되어, 창왕 때에는 대마도 원정까지 이루어지게 된다.
② 또한 이미 여러 전투에서 명성이 혁혁했던 이성계장군은 이 황산대첩으로 완전히 국가 영웅이 되어 이 전투로 얻은 명성이 조선건국에 일조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즉 일본이 더 이상 내륙으로 침범못하고, 이성계의 명성으로 역성혁명의 하나의 주춧돌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래 사진은 왜구의 이동통로
서론이 길었다.
여원재 산행지 초입지
산행 진행방향이다.
사진에 보이는 마을은 장동마을이다.
좌측 장동마을이 보이고, 오른쪽에 지나가야 할 고남산이 보인다.
장동 마을내의 이정표
장동(獐洞)마을 :
여원재에서 출발하면 제일 먼저 지나는 마을이 장치 또는 장동부락이다.
예로부터 노루가 한가로이 낮잠을 즐기는 형국이라 하여 ‘노루골’이라 불렀는데, 이것을 한문으로 표기해서 장동(獐洞)이 됐다.
여원재에서 고남산으로 가는 길에 있는 작은 고개가 이 마을의 이름을 딴 장치(獐峙)다.
여기 묘지가 장치에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산행길이 묘지에서 우측으로 갑자기 꺽는다.
아래 묘지있는 곳의 위치
방아산 산성 갈림길 (아래 이정표)
: 장치(獐峙)에서 1㎞정도 가면 갈림길이 나온다.
좌측방향은 방아산 산성 갈림길이며 우측방향으로 200m 진행시 방아치가 있다는 이정표가 있다.
지도상에서는 합민성(合民城)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이 성은 일반적으로 합민성으로 부르지만 장교산성, 할미성, 합미성, 방학산성 등 다른 여러 이름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새로 생긴 이정표를 보아선 [방아산 산성]으로 정해진 듯 하다.
좌측으로 진행하면 방아산 산성(합미성)을 볼 수 있겠지만 진행방향과 달라 방아치로 진행한다.
합미성은 동학 때 농민군의 거점으로 활용되기도 했고, 농민군이 패전한 곳이기도 하다.
동학군이 이곳에 쌀을 저장해뒀던 곳이라 하여 합미성(合米城)이라고도 한다.
방아치 사거리 : 서북쪽 장교리와 남동쪽 장교리를 잇는 고개사거리이다.
동학혁명에 대한 유적지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뜀바위(아랫사진)
: 뜀바위란 흔한 산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틈이 갈라져 있어 뛰어넘어야 하는 바위를 말한다.
우측 계단이 있기전에는 바위로 올라가서 뛰어야 했던 듯 하다.
지나온 길
고남산 정상에 있는 안테나
그리고 고남산 정상에 있는 안내판
고남산 정상석은 여기서 10m 아래로 내려가면 있다.
고남산(古南山, 846.5m)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과 산동면 경계에 있는 백두대간의 산이다.
지리산 운봉의 북서쪽을 지키는 산으로 운봉분지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요천이 흘러내리는 산동과 남원 쪽을 모두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이 좋은 산이다.
위치상 옛날부터 전쟁의 요충지가 되었다.
고남산의 유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민들에 의하면 고남산을 태조봉 또는 제왕봉이라고도 부른다.
이는 고려 말인 1380년(우왕 6)에 인월면 인월리에 본진을 둔 왜장 아지발도에 맞선 이성계가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곳에 당도하여 제단을 쌓고 서쪽 기슭에 있는 창덕암 약수터에서 목욕재개하고 산신제를 올리고 황산(荒山)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남산 정상에 있는 산신제단은 600년 전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왜구를 정벌할 때의 유적으로 남아 있다.
앞쪽은 운봉읍으로 한눈에 바라보인다.
작전을 구사하기 위한 지형을 파악하기에 고남산이 최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쪽능선은 바래봉 능선이다.
황산은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 좌측바래봉 능선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앞쪽 안테나 건물 좌측으로 내려간다.
고남산 정상
고남산 근처 인근 마을 명칭의 유래
당시 전쟁(황산대첩)과 연관된 명칭으로 남은 고남산 주위 지역의 이름 :
㉠ 장교리(長橋里)
: 여원치에서 고남산으로 진행하는 백두대간길의 초입의 우측마을이 장교리이다.
이성계를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지세(地勢)를 보고 고남산의 산줄기가 이 마을까지 뻗어내린 모습이 마치 긴 다리를 이어놓은 것 같다하여 장교리(長橋里)라 하였다고 한다.
㉡ 권포리(權布里)
: 장교리의 북쪽마을이름은 권포리라 한다.
고남산 정상에서 남동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다.
고남산 아래에서 산신제를 올릴 때 주둔하던 군사와 말들의 식수로 썼던 샘터 주변에 터를 잡은 권씨 일가의 권세가 크다 하여 권포리(權布里)라 하였다고 한다.
㉢ 남평리(藍坪里)
: 여원재 주막에서 수모를 당한 주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그 여인의 몸에서 물이 흘러 그 아래 마을 밭에서 자라는 풀이 쪽빛(藍)으로 변하였다고 하여 당시 지명이 남평리(藍坪里)가 되었다.
일제강압기인 1914년 행정구역 통합때 남평리(藍坪里), 계산리, 내동리 등을 합병하면서 남계리(藍鷄里)로 명칭되어 남평리 이름은 사라진다.
현재 남원 남원시 남계리의 중앙부 지역에 남평마을회관이 있다.
㉣ 황산 부근에는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보이는 토성이 있으며,
주변에서 화살촉이 많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당시 군대가 주둔할 때 말을 매어두었다 하여 군마동이라고 한다.
㉤ 인월(引月)
: 황산에서 승리를 거둔 이성계는 도주하는 패잔병을 뒤쫓아가며 섬멸하였는데,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싸울 수없게 되자
‘달[月]을 당겨놓고 밤늦게’까지 왜적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싸웠다고 한다. 그래서 인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
또한 이성계가 바람을 끌고 다니며 싸웠다고 하여 인풍(引風)이라는 지명도 생겼다.
㉥ 피바위[인월 군마동 인풍리]는 황산대첩비터에서 인월 방면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남천변에 있다.
당시 이성계가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3천여 명의 왜구를 맞아 이곳에서 싸웠는데, 이때 죽은 왜구들이 흘린 피가 바위를 물들여 지금껏 붉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아래 사진은 과거 전쟁과 관련된 지역이름들
아래 사진은 피바위 : 원래 붉은색 바위 ^^
고남산정상에서 내려오면 임도와 만나게 된다.
임도를 벗어난 산길로 3번째 임도와 접하면 아래의 경치가 보인다.
통안재(670m)
: 고남산에서 임도와 접하게 된다. 3번의 임도와 접한후 다시 산길로 들어가게 된다.
이곳이 통안재이다. 독골재에 비해 동네 안쪽에 있는 고개라고 하여 [작은 독골재]라고도 한다.
통안재와 유치재 사이 봉우리, 약 700고지 정도되려나...
우측으로 지나간다.
봉우리 지나 묘지에서 우측으로 꺽어 내려간다.
작은 사거리
유치재는 아니지만
유치재라는 지도의 글이 위치하고 있어 유치재로 착각할 수도.
이정표
유치재와 매요리 마을 중간지점에 위치한 삼각점
그리 높지 않은데 삼각점이 있다는....
아래는 삼각점 위치
드뎌 매요리 마을로 들어선다.
아래 임도에서 좌회전이다.
아래 임도에 좌측이 넘어져 있는 이정표가 있다.
매요리(매요마을 입구)
매요리(梅要里)
: 마을 동쪽에 인접한 가산리와 유치(柳峙)가 있어 번암면 모래재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약 400년 전 (임진왜란 전후) 진주 강씨와 양성(陽城) 이씨는 왜적의 침범이 잦을 것을 예상하여 지리산 능선을 따라 서북쪽으로 수정봉과 고남산을 차례로 지나 이곳 마을에 터를 잡고 중시조가 되었다.
고남산(846.8m)과 황산(698.7m)의 날줄기로 장수군 번암면의 경계선상에 위치하고 북쪽 뒷산이 구릉을 이루어 방풍(防風) 구실을 하니 풍해와 수해가 없는 곳일 뿐만 아니라 농사에 더없이 좋은 길지로 옛부터 이러한 지세는 말의 형국을 닮았다 하여 말마(馬)자 허리요(腰)자를 합하여 마요리(馬腰里)라 칭하게 되었다.
그후 임진·정유 양난이 7년 만에 끝나자 고승 사명당[유정(惟政)]이 산천을 두루 유람하다가 (난중잡록에 의하면 1593년 7월 7일에도 승군을 이끌고 남원에 왔던 기록이 있다.)
마요리에 당도하여 보니 매화의 꿋꿋한 정기가 감도는 것을 보고 이 마을에서 낳은 사람들은 매화같이 선량할 것이니 지형과 인심에 맞게 매요리(梅要里)로 고치는 것이 합당하다 하여 그 후 매요리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매요마을 입구에 있는 정자
정자이름이 말허리 쉼터이다.
과거 매요리의 구 지명었던 마요리(馬腰里)를 알려주고 있다.
매요마을회관
라면 파는 매요 휴계실
멀리 바래봉 능선이 보인다.
유치삼거리, 지금은 사거리이다.
유치(柳峙)
: 과거부터 산내면과 동면 사람들이 운봉을 거쳐 번암 장수로 통하던 그리 험하지 않는 고이다.
사치재 가는 들입구
유치삼거리 이정표
멀리 보이는 지나온 고남산
유치재와 사치재 사이 봉우리 최고봉 620정도 높이
사치재에 도착했다.
풍수설에 의하면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은 비안낙사(飛雁落沙) 형국이라고 한다
사치(沙峙)라는 뜻 그대로 모래언덕고개이다.
이 지역은 암릉이 전혀 없는 고속도로 주변과 사치재 아래로 논과 밭이 있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기러기가 모래밭에 앉은 비안낙사(飛雁落沙) 형국이라고 한다
사치재 아래 88고속도로, 동쪽방향으로 지리산 휴계소 방향이다.
사치재라서 그런가
바닥이 마사토처럼 모래양상이다.
사치재 지나 오르막 올라가면 헬기장이 나온다.
바로 이곳.
헬기장에서 본 지나가야 할 능선
좌측 697봉과 우측 시리봉
헬기장에서 바라본 가운데 수정봉 능선과 우측 고남산 봉우리.
경치가 좋다는....
아마도 저멀리 보이는 산이 지리산 천왕봉일 것이다.
시리봉 가는 길에 작은 고개에 도착
새목이재, 새맥이재이다.
새맥이재(536m)=새목이재
: 사치재에서 1㎞ 남짓 가면 새목이재와 만난다.
새목이는 새의 목에 해당하는 고개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무에 걸린 낙동 산악회의 시그널이 보인다.
시리봉 전 중간 봉우리
시리봉 삼거리
좌측은 백두대간 진행방향, 우측은 시리봉 정상방향이다.
약 300m정도 가면 시리봉이 나온다.
시리봉 정상,
높이가 777m 이다.
시리봉 삼거리로 다시 회귀해서 진행중 보이는
소위, 촛대바위 또는 남근바위,
아직 확정된 이름은 없는 듯 하다.
아막성산 으로 올라가는 길에 성벽을 쌓은 작은 돌들이 관찰된다.
아막성산(阿莫城山, 781m)
: 아막성산 정상에 산성흔적은 없으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진흙길로 미끄럽다.
다음 달에 지나가야 할 능선들
우측에 멀리 보이는 산은 방향을 보아선 백두대간은 아니고 기백산과 금원산이 아닌가 싶다.
아막산성의 흔적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운봉은 신라 때 모산현이라 했으며,
따로 이 아막성(阿莫城), 아영성(阿英城), 경덕(景德), 운성(雲星)이라 이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모산성은 아막산성은 옛날 백제에서는 아막성(阿莫山), 신라에서는 모산성(母山城)으로 불렸던 곳으로, <삼국사기>에서 ‘아막산성’이라고도 하며, 지금의 운봉으로 신라 때는 모산현 또는 아영성·아막성으로 적었다.
백제와 신라가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공방을 벌였던 아막성전투(모산성전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지나온 시리봉 정상부
아막산성
아막성전투(阿莫城戰鬪)
: 같은 말로 모산성전투(母山城戰鬪)라고도 한다.
1) 전쟁당시 국제적 상황
: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의하면, 601년 왜(倭)가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를 협격할 것을 제안한 기록이 등장한다.
601년 고구려·백제·왜 삼국이 신라를 공격하기 위한 협약을 맺어, 신라는 혼자서 고구려·백제·왜 삼국을 상대해야 하는 위기상황이었다.
602년 4월 왜가 병력 2만 5천을 큐슈〔九州〕지역에 집중시켰으며 신라에 상륙하기 위한 선박도 마련하였다.
하지만 602년 6월 왜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섭정 성덕태자(聖德太子)의 동생인 내목황자(來目皇子)가 병석에 누우면서 왜군의 신라출병이 연기된다.
고구려 북쪽에서는 602년 초반 수(隋)의 지원을 받던 동돌궐(東突厥)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서돌궐(西突厥)의 달두가한(達頭可汗)을 격퇴시키고 승리했다. 수나라의 영향력이 한층 확대되자 수와 적대적인 고구려 역시 신라의 공격을 유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2) 백제의 단독 공격
: 이러한 상황 속에 백제는 병력규모 4만을 갖추고 단독으로 신라를 먼저 공격하게 된다.
602년 8월 백제 무왕은 지리산을 돌파하여 남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해서 일단의 군사를 출동시켜 남원에서 함양으로 넘어가는 요충지인 아막성을 포위했다.
3) 신라의 수비 :
신라의 방어 및 모산성(母山城) 명칭의 유래 : 이에 신라 진평왕은 포위된 아막성을 구원하기 위해 수천의 기병을 급파한다.
신라 원군이 백제군을 격퇴시키고 아막성의 포위를 풀었다.
신라 원군은 다량의 노동력을 투입하여 아막성 서쪽 앞에 소타(小陀)·외석(畏石)·천산(泉山)·옹잠(甕岑) 등 4개의 요새를 건설했다.
아막성은 4개의 자성(子城)을 거느린 모성(母城)이 되었다. 이후 아막성은 모산성(母山城)이라 불리었다.
4) 신라의 반격 : 방어망을 보강한 신라군은 백제에 대해 역공을 단행했다.
아막성에서 남원 방향으로 진격한 것이다. 신라군이 몰려오자 백제 무왕은 좌병(佐平) 해수(解讐)에게 4만 병력을 주어 이를 공격케 했다. 남원과 운봉의 광활한 지역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
백제의 유인술에 걸린 신라군이 늪지까지 들어갔고, 철수를 단행하려다 백제군의 역습을 받고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때 신라 장군 무은(武殷)이 백제군에게 사로잡힐 위기에 처했다.
그러자 아들인 귀산(貴山)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동료인 추항(?項)과 함께 뛰어들었다.
귀산·추항(※ 참조로 신라의 원광법사가 세속오계를 지어준 화랑도 2명이 귀산과 추항이다.)을 둘러싸고 치열한 혈투가 벌어졌는데, 후퇴하면서 이 장면을 목격한 신라군이 귀산과 추항을 구하기 위해 다시 진격했다.
아버지를 구하려는 귀산의 혈투가 신라군을 분발시켰고, 여기서 아막성전투의 승기를 잡으면서 결국 백제의 4만 대군이 큰 타격을 받았으며 신라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5) 결과 : 아막성전투에서 신라가 승리하자 603년 7월 왜의 신라침공계획은 취소된다.
그해 8월 고구려가 신라 서북의 본영인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했지만 진평왕이 친히 병력 1만을 이끌고 북한산성에 나타나자 위세에 눌린 고구려군도 철수하고 만다.
아막성 전투의 위치 : 아막성전투로 유래한 명칭인 아영면은 아막성의 동쪽에 있는 면이다.
아명면(阿英面)은 봉화산의 백두대간 능선과 지능선(함양·인월 경계의 연비산 능선) 사이에 펼쳐진 구역으로 남원의 문헌 기록상 최초로 등장하는 지역이다.
아영은 삼국시대에 아막(阿莫), 아용(阿容), 아영(阿英)이라 했다고 한다. 아막성은 1977년 12월 31일 도기념물 제38호로 지정됐다. 아영면 성리 83번지에 위치하며 성 안에는 운성암(雲城庵)이라는 암자가 있다. 성의 윤곽이 드러나 있고 성문지(城門地)도 구분해 낼 수 있으며 서쪽 성벽은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다.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아막성이 경상남도 함양읍과 전라북도 남원시 동면 경계 부근 고개에 위치한다고 한다. 북쪽의 상산(霜山)과 남쪽의 삼봉산(三峰山: 1,186m) 사이의 안부에 있다고 한다.
이는 남원의 동쪽과 함양의 서쪽을 접하는 경계는 삼봉산(三峰山: 1,186m)-투구봉-팔령재-오봉산(878m)-안산-봉화산(919.6m,백두대간 경로)의 능선으로 팔령재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백두대간 지나는 아막산성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7㎞정도에 위치한 남원과 함양을 남북으로 구분짓는 능선이다.
즉 아영면 성리에 있는 성리산성(곽장근 <<호남 동부지역 석곽묘연구>>, 서경문화사, 1999)이 아닌
팔령재에 위치한 성산리산성(김태식 <<가야연맹사>> 일조각, 1993, p115)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는 1차방어선(성리산성) 2차 방어선(성산리산성/팔령치) 등 여러 성을 축조했을 것이다.
아막성의 위치는 1차방어선인 성리산성(아영면 성리 83번지)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지형상 백제군이 포위할 수 있는 산성은 성리산성이고, 2차 방어선 넘어 서쪽의 시리봉은 서쪽 남원산동면, 남서쪽 운봉읍, 남쪽 인월읍 모두를 관할할 수 있는 지형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막성이 팔량치 고개에 위치한다는 것은 팔령치(팔령재)의 오기로 보인다. 팔랑치는 남원의 남서쪽(바래봉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의견이다.
복성이 뒷재
복성이재 날머리
첫댓글 다음님 덕분에 공부 많이 하네요
넘 감사드리고
수고하셨습니다
총무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
역사적 설명을 더한 세세한 산행기.. 최곱니다
백두대간 16기 화이팅입니다. ^.^
백주대간 산행때는 앞만보고 줄행랑으로 걷고 백두대간 구간구간의 역사와 유래 그외정보들은 여기서 차분히 열공하고 갑니다ᆞ 다음님 고맙습니다 *.*
저도 공부중입니다. ^.^
자세한설명 최곱니다 ^^
4월초에 뵙겠습니다. ^.^
땜~빵구간이라~ㅎ
한 여름..휴가때 제로대장님과 이곳 갔을때..
듸~지는 줄알았내요..
오랜만에 들려
그 시절을 회상해 봅니다...
산행기 잘 보고 갑니다..
회원님들 이렇게라도 뵐수 있어 좋습니다..
16기 대간 산행 무사 완주하시 기를 기원 합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