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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점초등학교총동문회 원문보기 글쓴이: 정하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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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놀이 문화와 놀이 장소는 "자연" 그대로였다. 흙과돌, 풀과꽃과열매, 물과 곤충등이 놀이의 대상이었다.
그시절 그런것을 가장많이 접할수 있는곳이 방터골이 아니었나싶다. 그래서인가 공휴일과 방학때면 가장많이 찾은곳이 방턱골인것 같다. 골짝 깊이는 알다시피 무척 깊었고, 동네 주변에서 유일하게 가제,도롱뇽이 인정한 맑고 깨끗한 냇물이365일 흐르는 곳이기도하다. 아마 그 맑고 깨끗함이 어린동심을 부른것같다.
돌꾸지의 친구상은이, 복우, 도창이가 살던 동네가 학교가는 고개길 입구였다. 그 길을 통해 방터골로도 가기도 한다. 제네들 집옆으로 신작로가 있었고 그 신작로 에서 아주작은 도랑을 폴짝~ 건너면 학교가는 고개길이었다. 작은 고개마루를 살짝 넘으면 주변엔 크고작은 소나무와,옷나무, 참나무, 싸리나무, 진달래 할것없이 온갖 나무들이 빽빽 하였고, 오른쪽 언덕위엔 상여집이 하나 있었다. (행상집 이라고도 했슴)
동네 초상이 있을때면 꽃으로 예쁘게 장식한 그 상여를 이용하여 시신을 장지까지 10여명이 광목천을 어께에 메고 만장 (죽은자를위해 쓴 시 깃발) 을 뒤로하여 종을 땡그랑~땡그랑~ 흔들며 상여소리를 내어 행렬하던 상여행렬 모습이 눈에선하다.
그래서 6학년때 과외공부후 밤늦게 그곳을 지날때면 남친 여친할것없이 서로가 바짝붙어 똘똘뭉쳐 빠른걸음을 하던 기억이난다. 때로는 모두가함께 먼저 노래를 부르는녀석의 노래를 따라 목청을 돋구어 노래부르며 지나치던 기억이 난다. 짖굿은 녀석이 가끔 한번씩 그곳을 지날때 큰소리한번 꽥~ 지르면 모두가 악~악~ 거리며 걸음아 날살려라 달려가던 순수한 시절이었다.
다행인것은 조금만 달려가 고개마루에 서면 집집마다 반짝이는 불빛과 가로등 불빛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돌꾸지가 아늑하고 평온하게 반겨 주었다.
학교가는 고개길 저밑엔 나팔고개의 신작로가 닿아있고 신장로 건너 바로앞엔 나팔고개에서 가장큰 가게가 하나있었다.
그 신작로에서 나팔고개를 등뒤로하여 스무걸음정도 걸으면 오르쪽엔 산 줄기를 싹뚝잘라 신작로를 만들어 놓았다. 거기서 앞쪽상황을 볼수없어 빵~빵~ 나팔을 울려야 했기에 나팔고개라는 이름이 붙어지지 않았나 하는 사견이다.그왼편으로 작은 오솔길이 나온다.
그오솔길에서 한번은 푸르른 뱀 한마리가 약 30cm가량벌떡 일어선 자세로 나를 노려 보면서 두갈레 혀로 낼름거리며 나를향해 달려오고 있었다.(그시절 실제상황임) 나들이할때 보통 막대기를 하나씩들고 때론 질질 끌기도하고 짚기도하고 주로 그렇게 다녔었다. 순간적으로 날렵한 행동과 판단으로 들고있던 막대기로 그 뱀의 옆구리를 90도 방향으로 후려쳤더니 달려오던 뱀이 어이없게 툭 뿌러지는 별 회괴망측한 잊지못할 일이 있었던 기억이있다.
그 오솔길을따라 낮은 고개마루에 서면 왼편 저밑으로 "ㄱ" 자 모양으로 노란색의 아름답고,예쁘장한 동점초등학교가 보이고 교무실앞 연못이 보이고 그 중앙에 버드나무가 부는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학교 주변으로 아카시아 나무가 보이며,학교 앞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아늑한 동네가 보이고 소나무점빵도 보인다. 바로밑으로는 형욱이따라 자주갔던 동점침례교회도 보인다. 또 정면으로 고개를들면 강건너 산엔 숲속 놀이를하던 산들이보이고 학교 저쪽뒤편으로 방터골입구가 보인다.
또고개마루 왼편으로 돌계단이 산꼭대기로 나 있는데, 그곳은 강원산업 재해로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위령비가 있는 곳이다. 매년 4~5월사이로 알고있는 위령제가 있는 날이면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기도 했다. 그땐 식순에따라 식이 조용히 엄숙히 진행되다가 어느한순간 눈물바다가 된다. 그 산 정상엔 라이트가붙은 화이바(걉부라고했슴)를쓴사람이 허리춤에 밧데리를 차고 망치를 들고 서있는 동상이 있었고 그 하단부엔 사망자 명단이 사면모두 빼곡히 적혀있었다. 사방 팔방으로 확-트인 그곳에도 많은 추억이 있었다.
그고개마루에서 밑으로 울퉁불퉁한 바위비탈이어서 조심조심 내려가면 비탈 밭길을지나(지금은 집들과 교회가 들어서있슴) 메~메~ 하고울던 염소와 양을키우던 그 집을지나면 동점초등학교 운동장을 밟게된다. 정문은 오른쪽 모서리쪽이고 지금 이야기한곳은 학교 옆구리이다.
한여름 아지랑이가 아롱~아롱~ 거리는 운동장을 지나면 운동장옆 울창한 아카시아 숲이나오고 그 숲옆으로 철암쪽에서 흘러내려오는 강이 저위에서(병철이 집쪽) 두갈래로 갈라져 한줄기는 학교 담장옆으로 또 한줄기는 방턱골 입구쪽으로 흐르고 그사이는 여기저기 잡초가 돋아나있는 강바닦 돌밭이다. 두갈래로 흐르는 강물은 학교앞 소나무점빵(문방구) 아래에서 하나로 합쳐져 구문소쪽으로 유유히 흐른다.
방터골 입구에 들어서면 철암쪽에서 내려오는 검은 물줄기와 방터골에서 내려오는 너무도 깨끗하고 맑은물이 서로만나 인사는커녕 그 맑은물은 순식간에 검은 물줄기에 삼킴을당하고 만다. 아~~! 나는 그것이 너무도 싫었다. 이나뿐 검정물....
방터골 입구 맑은 물이 흐르는 물속에 비치는 아른~아른~ 거리는 말끔한 돌들을보며 징검다리를 건너면 오른편으로 상율이와 대섭이 집이 나란히보인다. 녀석들은 사촌간이다. 왼편에는 또하나의 작은 골짝에서 졸졸졸 맑은 개울물이 흘러내려 왔다. 그입구엔 몇체의 집이 있었는데, 지금 중,고 동창 성탁이가 전무로있는 회사의 오너도 그곳에서 한참후배로 커왔다.
거기서 조금더 위로 올라가다가 다시한번 징검다리를 건너면 조금 넓은장소와 돌배나무가 크게 하늘을 덮고있었고 그옆엔 느와집이 한체인가..? 두체인가..? 있었다. 그곳 개울건너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않은 아무리 뜨거운 여름이라도 차디찬 맑은물을 뿜어내는 "소"가 땅속에서 물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물속에 손발을 넣으면 한여름에도 손발이 시렸다. 그리고 한겨울에도 아무리춥다하여도 얼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그 "소" 는 건재하리라 믿는다.
그곳에서 조금더 위로 올라가면 왼쪽 가파른 산에 아그배 라하여 지금의 체리와같은 열매를땄었고
개울가 산딸기와 길가에서도 보이는 머루며 다래를 따기도했고 매미와 여치를 잡기도하고,가제며,개구리,골뱅이,물고기도....
또 넓고 적당히 물이고인곳과 넓은 바위가 있는곳엔 시원한 물놀이로 물장구치며 깔깔대던 향수 가득한 골짜기이다. 군데군데 군불 피워놓고 지나가는이 상관없이 젖은옷 말리며 잡은 가제와 서리한 감자 옥수수도 뻔뻔하게 구워먹던 철없던시절....
골짝 깊은산중에 가래추자라하여 약간 긴 모양의 호두가 나무 높은곳에 달려있어 톱으로 설겅~ 설겅~ 그 나무를 통째 베어 (지금은 큰일날일) 껍질에 쌓인 그 열매를 따 껍질을 벗기면 긴 가래추자(호두)가 나온다. 헌데 그껍질 액을 손에 묻히게되면 봉숭아 물들인것처럼 벌겋게 물이들어 잘 지워지지않고 일주일정도 지나야 지워졌기에 주로 그 껍질을 돌과 발로벗겼다.
골짝 깊은곳엔 화전으로 밭갈이하며 생활했던 김영복과 명화, 재학이가 있었다. 또 어릴때부터 "터" 에 예민하여 우리집 밑에서 성복이 옆집으로 또 윤식이집으로 옮겨다녔던 문식이가 어릴때부터 무언가 찾아다니더니 장성하여서도 깊은 깨달음을 얻기위해 맑은물 심심 골짜기에서 "도" 를 닦았던곳 방터골....
더덕, 도라지,산나물이며, 도토리 할것없이 먹거리를 무한정 제공해주었던 방터골.... 봄이면 아줌마들이 여기저기에서 봄나물 케며,뜯으며 분주한 곳이었고, 집집마다 나물보따리 한보따리 선사하던 고마운 방터골....
알수없는 들풀과 벌레들, 이름모를 열매와 벌 나비들, 하늘을 덮은 숲들과 맑고 상쾌한 공기며, 서로 경쟁하듯 뒤엉킨 넝쿨들, 맑은물과 주변에 너즈러진 바위들...방터골의 이모든것은 무엇하나 추억이 담기지 않은것이 없다.
언제나 우리가 갈때마다 불평없이 반갑게 맞아주던 방터골이 있어 한 시대가 즐거웠고, 그 시절이 더욱 즐겁고 아름다웠던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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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정하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