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환난 중에는 밀실에 들어가는 것이 살길이다(2039.2020.8.2)
사26:16-21
할렐루야
지난주에 상주에서 21년째 목회하면서 휴가라고 하는 단어를 처음 사용해 본 것 같습니다. 휴가를 다녀오겠다는 광고를 처음 한 것 같습니다. 휴가를 처음 가는데 일주일 다녀오면서 많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목사에게도 휴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금년에 코로나 때문에도 힘들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도 그렇고 한주간 휴식을 취해 보았습니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곳이 참 많다고 생각해보면서 우리 상주감리교회는 참 복된 교회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들과 함께 코로나가 오기 전에 중국 북경과 만리장성도 가보고, 백두산도 올라가보고, 제주도도 가보고 한라산도 가보고 울릉도와 독도로 수련회를 가보고, 안면도로 수련회도 하고, 마산도 가고, 거제도 가고, 포항도 가보고, 군산도 가보고, 강릉은 3번이나 수련회를 가서 구경을 하고 참 좋았습니다. 여러분도 함께해서 좋았지요. 코로나19가 없었더라면 금년에 강화도와 연평도를 다녀올까 했었습니다. 훗날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번 휴가 기간중에 지난 목요일 오전 11시에 한국성시화 주관으로 서울에 국회 앞에 가서 포괄적차별금지법 반대를 위한 기도회에 참석도 하고 왔습니다. 증거물로 카톡방에 사진을 올려 드렸습니다. 저는 경상북도성시화 창립멤버로 부 본부장을 맡고 있어서 참석을 했는데 한 천여명 모인 것 같습니다. 이것이 통과되면 한국교회도 위기를 만날 수 있고 목회자들은 설교하기도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환난이 오기 전에 함께 기도회에 참석하여 기도하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환중에는 밀실에 들어가는 것이 최고라는 확신을 갖고 말씀을 준비하여 전하려고 합니다.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이유는 오후시간에 자세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환난을 만난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야곱도 환난을 당했고, 이스라엘 왕 다윗도 환난을 당했으며, 동방의 의인이었던 욥도 환난을 당했고, 사도바울도 환난을 당했고, 우리가 믿는 예수님도 많은 환난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환난을 당한다고 하더라도 너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문제는 환난을 당했을 때 어떻게 그것을 이겨내고 승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성경이 하라는 대로 따라서 하면 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환난의 날에 할 일이 무엇입니까? 진실로 밀실에 들어와서 예배하는 것입니다. 왜 예배일까요?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모든 것은 다 풀려나기 때문입니다. 예배가 곧 천국입니다. 예배하는 자에게 형통이 있습니다. 진실로 회개하여 참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하라는 말씀에는 회개하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소홀히 드리면 안됩니다.
시50:22-23절‘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리니 건질 자 없으리라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회개하여 예배회복이 먼저 이루어져야 합니다.
성경 가운데서 환난을 가장 많이 당한 사람이 욥입니다. 욥은 동방의 의인이요, 사회적 위치나 물질적인 면에서도 큰 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재난이 닥쳐왔습니다. 적국이 침략하여 종들을 죽이고 소와 낙타를 훔쳐가고 하늘로부터 불이 내려서 종들과 양을 태웠습니다. 그리고 태풍이 불어 집이 무너져 자녀들이 죽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욥의 몸에 병이 생겨서 견딜 수 없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욥1:21절‘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 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니이다’ 이 때 욥의 아내가 보다가 하도 딱해서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고 죽으라’고 격동합니다. 그러나 욥은 말합니다. 욥2:10절‘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또한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이 정도로 욥이 예배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환난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환난이 오면 사람들은 원망합니다. 그러나 욥은 감사했습니다. 예배의 제단을 튼튼히 쌓았습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여, 당신을 섬기라고 나에게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세상을 위해 전부 낭비했습니다. 이제 나를 일깨워 주시려고 나에게 병을 주셨습니다’진정한 예배회복이 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공식적인 예배에 참석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자녀들 앞에서 예배를 잘 드리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환난이란 사람이 사는 과정에서 겪는 근심과 재난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참된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는 환난이나 핍박과 같은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환난’의 상대적인 상황은 ‘평안’입니다. 상대적인 상황이란 단순히 반대말이나 반대상황이 아니라 맞서는 상황을 말합니다. 환난이 오면 평안을 잃게 되고, 평안이 오면 환난이 물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환난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사45:7절‘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여기서 말씀하시는 빛과 어두움, 평안과 환난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말씀은 단순히 세상 만물을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복과 저주를 함께 지으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뤄 가시기 위해 빛도 사용하시고 어두움도 사용하시고, 평안도 사용하시고 환난도 사용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예수 믿을 기회도 있고, 회개할 기회도 있지만, 죽으면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안 믿고 죽는 사람들은 그것으로 심판을 받아서 지옥에 가게 됩니다. 우리가 날마다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서 불의의 사고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을 그냥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날마다 일어나는 이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권고하시는 사인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노아 시대에는 죄가 너무 관영하여 홍수로 심판하셨고, 소돔 고모라가 너무 악독하고 음란하며 부패하니 유황불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도 이 세상에 너무나도 죄악이 관영하여 큰 환란을 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24:21절에 보면, 그때에는 창세 이전과 이후에도 없을 환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환란이 너무 커서 오래 끌면 살아남을 육체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해서 그 날들을 감해주실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29절에는 환란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노아에게는 방주를 만들게 하셔서 그의 여덟 식구를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소돔 고모라가 유황불로 멸망할 때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어 롯과 그의 두 딸을 그곳에서 끌어내어 구원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있을 이 큰 환란을 기다리는 우리에게도 살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 믿음과 행실은 늘 함께 갑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이 있다 하면서 아무일도 하지 않았으면 이방인들에게 어찌 복음이 증거가 되었겠습니까? 믿음은 사도바울 처럼 행하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온전한 것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안에 거한다는 것은 말씀을 행하는 결단이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시시각각 결단이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에 감동하는 온전한 믿음으로 발전하여 하나님의 보혜사 진리의 기쁨이 시작이 됩니다.
나의 모든 것이 되신 주님! 오직 주님만을 사랑하고 따라갑니다. 주의 나라 이루소서! 늘 고백하고 따라가는 마음이 있어야 믿음이 자리잡습니다. 어찌하든지 구원이 우리 백성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옥은 우리가 갈 곳이 못됩니다. 가서도 안되고 우리가 견뎌낼 고통이 아닙니다. 지옥은 엄청난 고통의 현장이며 우리가 보지 못한 엄청난 재앙이며 환난중에 대 환난입니다.
지옥은 사탄과 귀신의 감옥입니다. 우리가 왜 그 곳으로 간단 말 입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반드시 이뤄가야 합니다. 말씀으로 온전해야 합니다. 쉬지 않고 주와 동행하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마나라타 예수여 오시어 함께하옵소서. 주는 오직 우리를 사랑하시며 복되게 하시는 단 한 분이십니다. 우리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마음도 그리스도의 것이 되어야 믿음이 복되게 됩니다. 우리가 반드시 소유하게 할 것은 복된 온전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찾아서 함께 좋은 길로 쉼 없이 걸어가는 것 뿐이 없습니다.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다 하면서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 어찌 저들이 살아나겠습니까? 주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으면 무얼보고 주를 따라가겠습니까? 행동하지 않으면 어찌 산자가 되겠습니까? 일어나셔야 복이 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며 주와 함께 일어나셔야만 복이 됩니다. 일찍 일어나 기도하며 주를 부르십시오. 말씀을 먼저 구하십시오. 모든 것을 더하시는 복이 오며 복음을 증거하며 행하는 복의 믿음이 됩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십자가의 사랑을 넘치게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구원과 회복은 오직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이방 땅에 포로로 끌려간 하나님 백성이 해산하는 듯한 고통을 겪으며, 거기서 벗어나고자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 소득 없는 헛된 몸부림일 뿐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죄악의 사슬을 끊을 수도, 구원을 가져올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음의 권세를 무력하게 하시는 생명의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 능력이 임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나고, 무너진 것들이 일어나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심판이 지나가기까지 주님을 앙모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성도가 환난 중에 할 수 있는 최상의 신앙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포로로 끌려가서 종살이를 할 때에 자신들의 힘으로는 바벨론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로 하였습니다. 환난을 만나면 밀실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시기를 바랍니다.
1.환난중이라면 밀실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진정으로 도움을 요청하면 됩니다.
환난에서 성도를 구해주시는 분은 오직 나의 하나님뿐입니다. 시50:15절‘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그러므로 성도는 환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 약속의 말씀 붙잡고 전심전력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자녀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전심으로 기도한다고 할 때, 여기서‘전심’은 헬라어‘프로스칼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로 이 단어의 뜻은 강도가 칼을 들고 집에 들어와서 칼로 가족들을 위협하다가 강도가 실수로 칼을 바닥에 떨어뜨렸을 때 그 집의 가장과 강도 사이에 떨어진 칼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혈투를 벌이는 상황을 묘사할 때,‘프로스칼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를 사용합니다.
지금이 국가의 정치, 경제,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인해 생존권이 위협받는 시국에서 교회 출입하는 것도 통제받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우리 성도들이 최우선으로 해야 할 일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전심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 되신 예수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시행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해야 합니다. 그러면 응답하십니다.
환난 중에 있는 교회 안에도 더러는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믿음이 흔들리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 참에 교회를 쉬자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 참에 핑계삼아 예배 빠져도 오라소리 안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참 잘 오셨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이 참에 예배실와서 예배를 드리니 더 감격스럽고 은혜로울 것입니다.이제는 교회 지도자들과 성도들은 중보 기도를 통해 믿음을 보충해 주어야 합니다(10절).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 때문에 믿음 있는 사람들 까지 어려움을 당합니다.
환난중이라면 진정으로 주를 앙모해야 합니다. 16절‘여호와여 내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하였으며’했습니다. 이는 환난 중에 주님을 간절히 찾았다는 것입니다. 전적 하나님만을 부르짖고 찾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살 길이 있음을 깨닫고 돌이켜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환난을 만나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는 육적으로 손해를 보는 한이 있다고 할지라도 영적으로는 손해를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유는 요삼1:2절‘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했습니다. 영적으로 사는 자는 고난과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살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사단은 죽은 것은 근처에도 오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딤후3:12절‘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했습니다. 또한 행14:11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했습니다. 곧 성도들이 환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그로 인하여 더욱 굳은 믿음 위에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4:16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 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 때에 오히려 더 주님을 앙모하며 새 힘을 얻어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40:28-31절‘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 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 하리로다’했습니다.
환난중이라면 진정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16절‘주의 징벌이 그들에게 임할 때에 그들이 간절히 주께 기도 하나이다’했습니다. 이는 환난 날에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시146:3-4절‘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시50:15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했습니다.
환난 날에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 간절히 부르짖으면 우리를 건지시는데 그 이유는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얻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곧 우리의 행실을 보면 모른체 했으면 좋겠으나 그 자녀 된 우리로 영광을 얻기 위해서 즉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복을 얻도록 하시기 위해서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겠다는 망극하신 사랑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만나면 이 말씀 붙잡고 기도하시고 주님을 더욱 견고히 부여잡는 믿음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간절한 기도란 죽기를 작정하고 드리는 결사적인 기도를 말합니다. 곧 환난을 해결하는 열쇠는 기도임을 알고 곧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 밖에는 없음을 깨닫고 사생결단으로 하나님께 매어달려 부르짖었다는 말씀입니다.
모세도 홍해 앞에서, 여호수아도 아이 성 앞에서, 엘리야도 바알의 850명의 선지 앞에서, 히스기야 왕도 앗수르의 침공 앞에서 간절히 기도함으로 그 큰 환난을 승리로 이끄는 무기로 삼았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오늘의 내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어려운 문제나 환난을 만나면 오로지 그 분 앞에 부르짖고 그 분을 찾는 믿음의 지혜자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환난중이라면 진정으로 주님의 구원을 기다려야 합니다. 19절‘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우리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거하는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를 내어 놓으리로다’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늘 우리가 감히 예상하기 힘든 일을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기대를 믿지 않고 포기했다는 뜻도 됩니다. 참된 믿음은 인간이 절망가운데 진짜 가짜가 구분됩니다. 참되게 믿는 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전혀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는 일을 마치 ‘아침 이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저녁 때까지도 바짝 말라있는 대지 위에 새벽이 되면 모든 장소에 반짝반짝 아침이슬이 맺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죽은 대지라 할지라도 이슬의 생명을 출현을 막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 인간이 막을 수가 없고, 또한 우리 인간이 재현할 수도 없습니다. 마치 새벽마다 우리 인간들이 아침이슬을 만들어서 온 대지 위에 깔아 놓을 수 없듯이 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러한 개성과 특성과 성격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과 공유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저는 새벽기도 마치고 북천냇가를 약5-7키로 조깅을 하는데 오늘은 주일이라 5키로만 달렸습니다만 가끔 가다가 아침이슬에 풀에 매달려 있는 것을 사진을 찍습니다. 아직 좋은 작품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물방울이 끝에서 붙어있는 것을 찍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집사람에게도 말했더니 어느날 여기 있어요 하는데 찍으려고 하는데 똑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느낀 것은 우리 인생이 이런 것이라고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이 물방울과 같은 인생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침 안개와 같고, 끝에 달려서 바람만 조금 불어도 떨어지는 것 같은 인생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남은 인생동안 하나님 앞에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였든지 죽은 자 같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바벨론의 환난에서 놓아 주시는 것입니다. 힘으로 능으로 할 수 없는 일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슥4:6절‘구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했습니다.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 같이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무슨 걱정을 하며 세상 사람이나 세상 것을 붙잡고 의지하겠습니까?
막10:27절‘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했습니다. 우리는 환난을, 핍박을 만나고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의 말씀을 믿음으로 다 맡겨 버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기만 하면 주께서 들으시고 다 하실 수 있는 그 분이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잠16:3절‘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벧전 5:7 절‘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도우심)하심이니라’했습니다.그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급하시지 우리가 급할 게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기다림과 오래 참음, 절제와의 싸움임을 곡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많은 환난을 당하였지만 그 환난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순종하는 회복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지혜를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환난을 만났습니까?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까? 도무지 답이 나올 것 같지를 않은 일이 있습니까? 그래서 낙심이 되고 믿음에 회의가 생깁니까? 하나님께 나아와 다 맡겨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열납 하시고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우리의 살아 계신 아버지가 되심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2. 환중이라면 밀실인 교회 들어오는 것이 살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밀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있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분노는 시련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분노가 지나가기까지 밀실에 숨으라 하였으니까 아무리 심한 시련과 고통이라도 끝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아가면서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는 이 시련과 고통이 끝날 때가 있음을 믿고 밀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밀실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여기 밀실은 우리의 가정을 뜻하고 오늘의 교회를 뜻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정이 교회같은 가정이요, 우리의 교회가 가정같은 교회이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도 가정도 사랑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어떤 곳이고 가정이 어떤 곳입니까? 항상 사랑이 넘치고 넘쳐야 될 곳이 교회입니다. 또 춘하추동 사계절을 두고 항상 사랑의 꽃이 피어 있어야 될 곳이 가정입니다. 또 이적을 만들어내는 교회, 가정이기도 합니다.
20절‘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 여기 밀실은 성도들이 숨어야 할 피난처를 뜻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포탄이 떨어지면 피난처로 피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치 전쟁터와 같고 포탄이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힘들고 괴로운 일도 많고 예기치 않게 시련과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피난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피난처는 어디 있습니까? 그 피난처는 무엇입니까? 교회는 인생의 피난처입니다. 시련과 고통의 날에는 어떤 사람이든 교회로 피해야 합니다. 갑자기 비가 내릴 때 우산 밑으로 피해야 하는 것처럼, 문제가 생길 때 인생이 힘들고 답답해질 때 교회로 피해야 합니다. 교회는 피곤한 인생들의 피난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내 인생의 피난처로 삼아야 합니다. 때때로 일 때문에 힘들고, 사람 때문에 힘들고, 문제가 생겨 힘들 때 교회를 찾으십시오. 교회 나와서 마음껏 우십시오.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도와 달라고 소원하십시오. 그때에 하나님은 밀실에서 여러분을 만나주실 것입니다.
밀실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어디서 쉴까하여 피난처를 찾아 산과 들로 해외로 갑니다. 그러나 참 피난처는 없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피난처, 영원한 피난처는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보다 많은 고비 고비를 넘긴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 32:7에서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란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두르시리이다’, 시 18:2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을 피난처로 삼은 다윗은 쫒기는 불안함 가운데서도 영혼의 평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믿고 군대의 힘을 믿고 살던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해 미움과 증오와 불안가운데 살다가 결국 비참하게 생을 마치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힘이 있고 없고가 큰 문제 아닙니다. 돈이 많고 적음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권력이 있고 없음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참 피난처가 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는 오직 주 예수이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너희가 내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하십니다. 분노의 날에는 예수님께로 피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밀실은 자기성찰을 의미합니다. 거울을 보면 그 안에 내가 있습니다. 거울속의 나에게 물어 보십시오. ‘너는 누구니’, ‘무엇을 위하여 사니’, ‘너는 제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니’, ‘너는 행복하니? 보람이 있니’라고 말입니다. 분노의 날에 밀실에 들어가라는 의미는 자기 성찰을 하라는 것입니다. 밀실은 자기 성찰의 자리입니다. 세상의 것들로 포장하고 있던 내가 밀실에 들어가서 거울에 나를 비추어 보듯이 주님 앞에서 나를 낱낱이 드러내 놓고 성찰하여 잘못을 고치고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남을 정죄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자기를 성찰하는 것은 너무 서툽니다. 자기를 성찰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의 실수와 허물과 죄가 너무 많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거기서 회개가 나오고 의지가 새로워집니다. 그때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도움이 임할 것입니다.
밀실은 기도를 의미합니다. 마 6:6을 보면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골방은 바로 밀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밀실을 가져야 합니다. 기도의 밀실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밀실에 들어가라고 시련이 오기도 합니다. 여러분, 내가 밀실에 들어가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내 문을 닫고 기도에 집중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해야 합니다. 내가 살아야 남을 살릴 수 있습니다. 목회자가 밀실에 들어가 살아나야 교회가 삽니다. 성도들이 밀실에 들어가서 살아나야 세상을 살릴 수 있습니다. 부모가 밀실에 들어가서 살아야 자식을 살립니다. 사장이 밀실에 들어가서 살아야 직원을 살립니다. 기도의 밀실에 많이 들어갑시다. 주님께로 깊어 들어갑시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옥중에서 무엇을 했던가를 공부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기도했습니다. 어떤 기도를 했을까요? 그곳에 갇힌 죄수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무슨 죄입니까. 복음을 전했다고 바울과 실라를 가두었으니 그러한 부패한 관료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위정자들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동서화합을 위해서 기도하는 곳, 남북통일을 위해서 기도하는 곳이 어디일까요? 우리의 교회, 가정입니다. 또 바울과 실라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던가요? 찬송하지 않았던가요? 아마 은혜스러운 찬송을 부르고 또 불렀을 것입니다. 깊은 밤중에 영혼이 피곤하고 육신이 괴로울 때에 들려지는 그 찬송이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큰 용기를 불어넣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구원이 임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입을 열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말씀이 증거되었을 때에 드디어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말씀 앞에서 간수장이 녹아질 수 있지 않았습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 기도가 있고 사랑, 찬송, 이적이 있는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가정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의 가정을 사랑의 제단으로 만들어 가십시다. 교회는 환난을 당한 자가 위로받는 곳, 낙망하고 실망한 자가 서로 격려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패배자 실패자가 이적을 만나 승리의 개가를 부르는 곳입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곳에 아내의 사랑 남편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꽃송이보다 아름다운 미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옥문이 열리게 하는 곳이 가정이고 쇠고랑이 벗겨지게 하는 곳이 가정입니다.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이와같은 기쁨, 소망이 차고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왜 밀실에 들어가라고 하셨습니까? 21절‘보라 여호와께서 그 처소에서 나오사 땅의 거민의 죄악을 벌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교회에서 가정에서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청종하노라면 그때 하나님께서는 날 대신하여 일어나 종횡무진 활동하시느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원수를 갚을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만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날 대신하여 벌할 인생을 벌하시고 멸할 인생을 멸하십니다. 물리칠 것을 물리치십니다. 없앨 것을 없애주신다는 말입니다. 교회에서 가정에서 내가 기도할 때, 찬송할 때, 말씀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싸울 것을 싸워주십니다. 결과 내게 승리를 가져다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