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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올 이즈 웰 (All is well)
“엘리! 오랜만이네. 무슨 서류를 그렇게 보는 거야?”
“응. 누가 택시 쉐어(주주 권리) 팔아달라고 내놓고 갔어.”
민재가 청문회를 마치고 택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엘리가 반겼다.
“누군데? 시장 경기도 안 좋은데. 쉐어 내놓아도 잘 안 나갈 텐데.”
“내 말이. 그래도 급한 개인 사정이 있나 봐. 얼굴이 시무룩하던데. 왜, 예전부터 다니엘 의장과 꿍꿍이가 잘 맞았던 자 있잖아. 다니엘 나팔수 무카쉬야.”
민재가 깜짝 놀랐다. 팔려고 내놓은 쉐어 명단을 봤다. 다섯 명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섯 번째에 무카쉬 이름이 보였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엘리. 지난번 통가리로 갔었잖아. 그때, 프로 골퍼 오빠 이야기했지. 그 오빠, 좀 만나볼 수 있을까?”
“존. 갑자기 뚱딴지같이 오빠는 왜? 골프 배우게?”
“아니. 나도 골프는 좀 쳤어. 싱글정도는 돼.”
“정말? 싱글이면 골프장에서 살아야 하는데. 언제 그런 시간이 있었나?”
“난 아마추어잖아. 내가 맡아 지도하는 한국학교 4학년. 꿈나무가 예사롭지 않아서. 소녀 애인데. 주니어 대회에서 좋은 성적도 얻었어.
그 아이 집안이 어려워. 골프 지원이 어려운 상태야. 전문가 눈에 좀 보여주고. 조언 좀 받아보려고. 내가 보기엔 꼭 대성할 세계 프로 선수감이거든.“
“그래? 존은 남다른 안목이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왠지 나도 궁금한데. 그 꿈나무 육성하는 데 나도 힘을 보탤까? 호호.”
“그래. 나랑 함께 유망주 꿈나무 한번 키워보자고. 일단 만나봐야 할 거 아냐? 오빠랑 약속한 번 잡아줘.”
“그러고말고. 오빠는 프로라서 투어 원정경기로 외유 중인 날이 많아. 언니도 프로 골퍼야. 언니는 좀 덜 바빠.
골프 샵을 주로 운영하고 티칭프로 일을 해. 먼저 언니부터 만나봐.“
“어디서 골프 숍을 운영해?“
“여기서 가까워. 뉴톤 로드. 골프 웨어 하우스 숍이거든.”
“골프 웨어 하우스면 엄청나게 큰 숍인데. 내 택시 손님도 많이 찾았어.”
민재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꿈나무 골퍼, 마리아가 떠올랐다. 엘리가 민재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우리도 좋은 동업자 되는 거 아냐?
“내가 언니한테 물어보고. 편리한 시간 알려줄게. 존도 그 아이 시간대 맞춰서 데려오면 되겠네. 나도 한 번 봐야지. 존과 나도 그 아이 스폰서니까”
“하하. 엘리. 진도 빠르네. 엘리는 비즈니스 감각이 뛰어나. 촉이 아주 좋아.”
“아무렴. 보석은 원석일 때 알아봐야지. 남보다 먼저 보는 눈이 필요하잖아.”
“생각난 게 또 하나. 그 아이한테 맞는 골프 클럽도 한 세트 구할거야. 유니폼과 신발도. 다른 필요 용품도. 장비가 좋아야 기력을 제대로 발휘할 테니.”
“응. 그 숍엔 다양한 골프 용품이 갖춰져 있어. 연습 장비와 골프 관련 책과 비디오까지. 그런곳엔 한번 다녀만 가도 아이는 무척 많이 달라질 거야”
민재가 손을 꼭 쥐었다. 꿈나무 골퍼 도와줄 천사들이 가까이서 계셨구먼. 그때였다. 제니가 들어왔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엘리와 이야기를 정답게 나누는 존을 보더니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민재. 너 오늘 청문회에서 다니엘 의장과 사이먼 컴플레인 매니저를 박살 냈다며. 무카쉬는 옷까지 벗게 만들고. 민재. 물불 안 가리는 정의의 사도네.”
“제니야. 그렇게 됐어. 회사 내 잘못된 관행은 이제부터 하나씩 일벌백계한다는 각오로. 제니는 무슨 일로 왔는데?”
“응. 내가 빌려 쓰는 차와 쉐어. 그 쉐어 홀더가 그 쉐어를 팔 거래. 나한테 노티스 주더라고. 어쩌겠어. 다시 하나 구해야지. 민재가 하나 구해줘 봐.”
엘리가 쉐어 관련 철을 넘겼다. 쉐어 팔려는 자. 쉐어 구하려는 자. 쉐어 빌려주려는 자. 쉐어 빌리길 원하는 자. 쉐어를 빌려준다는 자는 없었다.
“제니야. 어떡하니. 쉐어를 빌려준다는 자는 없어서. 요즘 돈이 귀하니까 쉐어를 팔려는 자는 많고. 대신 쉐어를 빌려 쓰려는 자도 많고. 좀 기다려봐.”
순간, 민재의 머리가 번뜩했다. 재빠르게 밑그림을 그려갔다. 쓱삭쓱삭.
‘무카쉬가 팔려고 내놓은 쉐어를 사줄까? 미안한 마음도 들고. 힘도 실어줘야 하니까. 그 쉐어를 사서 제니한테 빌려주면 어떨까? 무카쉬가 어렵다는데.
둘 다 어려운 여건이니, 이번 기회에 두 사람에게 좋은 일 해 보는 것도 괜찮겠어. 쉐어를 더 사서 택시 비즈니스 발판으로 삼는 일도 필요하니까.’
“민재야. 너 뭐 하는 거니? 사람 앞에 놓아두고, 뭔 딴생각에 젖어있어?”
“어? 내 정신 좀 봐. 어디 갔다 왔나? 내가 왜 이런 줄 몰라. 정말.”
엘리가 옆에서 한국말로만 이야기하는 민재와 제니를 보며 입을 샐룩거렸다.
‘얘들. 정말, 사랑싸움하는 거야? 뭐 하는 거야. 토라진 것도 같고. 미안한 척도하고.’
그때, 민재가 엘리를 부르며 제니에게서 시선을 뗐다.
“엘리. 요즘 우리 회사 쉐어 얼마에 거래돼?”
“응. 지난주 2만 달러. 이번 주는 1만 9천 5백 달러. 자꾸 떨어지네. 안 팔린 쉐어 4개가 있는 걸 알고 무카쉬가 더 싸게라도 팔겠다고 말하고 갔어.”
“지금. 무카쉬한테 전화해줘 봐. 쉐어 사려는 자 있다고. 내 이야긴 말고.”
엘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카쉬와 통화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더니, 민재에게 알려줬다. 회사 맞은편 빅토리아 카페에서 누구랑 이야기 중인데.
곧 회사로 오겠다고. 민재가 엘리더러 말했다. 무카쉬 거기서 기다리라고. 쉐어 살 사람이 그리로 간다고.
엘리가 전화를 다시 무카쉬와 주고받았다. 민재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재가 바로 빅토리아 카페로 향했다.
무카쉬가 구석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민재가 그 탁자 앞에 가 앉자, 무카쉬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민재가 라떼 한잔을 시켰다.
“존. 존이 내 택시 쉐어를 살 거라고? 아주 의외인데. 다른 사람 몇 명도 내놨던데. 굳이 나한테 와서 사려는 이유가 뭐지?”
“오늘 쉐어 하나 사서 누구에게 리스로 빌려줄 생각이야. 무카쉬 팔 생각 없으면, 나 다른 사람 만나 살 생각이야. 오늘 중으로 리스까지 끝내려고.“
무카쉬 반응이 별로 반기는 투가 아니어서 민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간, 용수철처럼 무카쉬가 튀어 올랐다. 민재 팔을 붙잡았다. 말을 버벅댔다.
“존. 팔게. 최소한 2만 달러.”
“무카쉬. 오늘 나오는 시세로 하지. 사무실로 가 엘리를 만나 계약서 쓰자고.”
그때, 민재 뒤를 패잔병처럼 따라오던 무카쉬 배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꼬르륵!”
앞서 걷는 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 끝이 스산했다.
‘저 무카쉬. 몹시 허기가 진 모양이구먼. 쉐어 계약하고 따뜻한 밥이나 한 끼 사 먹여 보내야겠네. 나도 정에 약해서 허하잖아.
사람은 모름지기 떠날 때가 좋아야 하는데. 무카쉬가 참 그걸 못 했다. 다니엘도 그러면 안 될 텐데. 사이먼도 마찬가지고.
무카쉬. 떠나가는 사람이다. 송별회를 챙겨줄 사람 하나 없을 텐데.’
사무실에 들러 엘리가 내민 계약서에 민재와 무카쉬가 서명을 마쳤다. 쉐어 가격은 시세대로 2만 달러에서 5백 달러가 모자란 가격. 1만 9천 5백 달러.
먼저 민재가 회사에 입금하고, 회사에서는 무카쉬에게 입금시켜 주기로. 쉐어 자격은 일주일 뒤부터 효력 발생 하는 거로.
이어서 제니에게 일주일 후 리스로 빌려주는 계약서도 작성했다. 엘리가 두 건이나 중간에서 회사 규정대로 서류화 시켰다.
집 사고 팔 때, 변호사 입회하에 법적 효력을 갖는 거와 똑 같았다.
일어서는 민재에게 엘리가 메모 쪽지 하나를 들려줬다. 프로 골퍼 명함에 날짜가 적혀있었다. 이번 주 금요일 오후 시간.
마리아 리를 데리고 가서 만나볼 사람. 프로 골퍼 애니카. 골프 웨어 하우스.
민재가 앞서고 제니와 무카쉬가 뒤따라 한국인 식당가로 들어섰다. K 로드와 어퍼 퀸스트리트 코너에 자리한 아시안 푸드 빌딩.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손을 드니 코리언츠, 한국식당 서빙 아가씨가 달려왔다. 메뉴판을 놓고, 물 한 잔씩도 따라주고 갔다.
제니가 메뉴 육개장을 가리켰다. 의외였다. 민재가 웃으며 똑같이 손가락을 모았다. 장국인데, 소고기를 넣어 얼큰하게 끓인 육 개장국.
보기에도 빨갛게 먹음직스러운 그림. 거기에 굵은 녹색 대파까지 넣은 조합. 비주얼이 우선 한몫했다. 조금 망설이던 무카쉬도 손가락을 보태며 말했다.
“미투!”
“무카쉬. 육개장은 코리언츠 한국식당의 명물이야. 현지인 키위나 직장인 그리고 힘쓰며 일하는 사람도 즐겨 찾아. 목수, 페인터, 배달업자, 운전자까지.
우리도 운전하는 작업자니까 한 그릇씩 먹고 힘내자고. 내가 이것 맛있게 먹는 외국 사람들 소재로 글을 써서 해외 동포 문학상도 받았어.“
“그래? 상금은?”
“뉴질랜드 돈으로 4,000달러.”
“우~와! 정말로? 직장인 한 달 급여네.”
사무실에서 경직됐던 분위기가 좀 부드럽게 풀렸다. 육개장이 먹음직스럽게 큰 그릇에 넘치도록 풍성했다. 호호 불어가며 제니가 먹었다.
민재가 윗옷을 벗어 의자에 걸치고 본격적으로 떠서 먹었다. 둘이 먹는 것을 보다가 무카쉬도 숟갈질을 했다.
각자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얼큰한 걸 무카쉬도 곧잘 먹었다. 그때. 토목공사를 하다왔는지 장화 신은 섬나라 젊은이들이 몰려와 옆 테이블에 앉았다.
코리언츠 식당 쪽을 보고 손가락 넷을 펼쳐 보이며 주문했다.
“육개장 플리즈!”
“오! 예!”
서빙하던 아가씨가 반기며 화답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무카쉬가 웃었다.
“정말이네. 이 음식 인기 좋네. 정말 톡 쏘며 매워. 속이 꽉 차는 것 같아.”
“나도 때로는 인도 음식, 커리 치킨을 시켜 먹거든. 마치 이 육개장 같아. 큰 그릇에 국물도 넘치고. 풍성해. 특유의 커리 냄새도 이국적이고.”
얼추 식사를 마칠 무렵, 서빙하던 아가씨가 한국 요구르트를 하나씩 건네주고 갔다. 입가심용으로 제격이었다. 무카쉬가 신기한 듯 바라보다 마셨다.
“무카쉬. 오늘 정말 엄청나게 숨 가쁜 날이었지. 마치 롤로코스터 타듯. 이제 무카쉬는 오클랜드 택시 20년 근무를 마감한 날이기도 하고.
듣다 보니 노모와 두 딸과 아내를 위해 가장으로 참 수고가 많았어. 오늘부로 새 출발 하는 데, 힘내라고 밥 한 끼 사는 거야.“
사람은 마무리가 중요하다잖아. 특히나 병상에 자주 누운 아내를 위해서도 무카쉬가 옆에 있을 시간도 더 갖게 돼 좋아. 힘내.”
민재가 힘을 실어주는 말에 제니도 응원했다.
“무카쉬. 정말 수고 많았네. 이제부턴 자신을 위해서도 시간을 내고. 무카쉬가 사용했던 오클랜드 택시 넘버. 522번.
이 제니가 잘 사용하게 됐어. 고국에서 살 때 탔던 522번 시내버스 번호야. 낯익어.”
“오. 제니도 그 번호 아니? 522번 버스. 우이동에서 미아리 길음동을 거쳐 정릉 그리고 북악터널을 지나 신촌까지. 내가 즐겨 탔던 시내버스야.”
민재의 반응에 제니가 화들짝 놀랐다. 522번의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 참 좋다. 무카쉬는 한국말은 못 알아들어도 은근한 분위기는 공유했다.
제니가 한국말을 모르는 무카쉬에게 영어로 바꿔 설명하는 사이, 민재가 자리에서 슬그머니 일어났다.
카운터에 가서 계산을 마치고, 주차장 택시로 걸어갔다. 트렁크에서 선물 세트 박스를 하나 꺼내 식당으로 들어왔다. 제니와 무카쉬가 놀란 표정이었다.
“무카쉬. 선물이야. 한국산 홍삼이야. 항암치료와 노약자나 여성 갱년기 장애에 좋대. 노모께서 아프시다며. 아내도 아프고. 한국에선 귀한 보약이야.
오늘 퇴직 기념으로 주는 거야. 나에게 쉐어를 팔기도 했고. 무카쉬도 먹어봐. 효과 좋을 거야. 나중에 만나면 내 다시 한 박스 선물로 줄게.
내 트렁크에는 귀한 사람에게 줄 선물, 홍삼 한 박스 씩 꼭 넣어서 다니거든.”
무카쉬가 홍삼 선물 박스를 든 채, 손이 떨렸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구릿빛 눈자위가 달아올랐는지 더욱더 짙어졌다. 제니가 그런 무카쉬 한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무카쉬. 무카쉬 나라 인도에서 만든 영화, 세 얼간이가 생각나네. 올이즈웰! 그 명대사. All is well!.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다 잘 될 거야. 힘내고.”
민재가 무카쉬의 다른 손을 붙잡으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무카쉬. 이제부터 우리 인생 후반전이야. 전반전 자책골은 잊어버려. 즐겁게 뛰고 역전 골도 넣자고.
자기와 가까이 있는 사람으로부터 귀히 여김 받고 사는 사람이 가장 부자래.
무카쉬도 부자이면서 행복한 사람으로 남을 거야. 하쿠나마타타!”
급기야, 무카쉬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
31화 끝(6160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