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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8:4-15, 하나님 나라의 비밀, 24.9.29, 박홍섭 목사
8장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갈릴리 2차 사역은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그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는 사역이 주를 이룹니다. 제자훈련에 매우 큰 비중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중의 하나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어느 날 주님은 모여든 많은 무리와 제자들 앞에서 씨 뿌리는 비유로 말씀을 전하십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서 사람들의 발에 밟히며 공중의 새가 먹어버립니다.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져서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어 말라버립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져서 가시가 함께 자라 기운을 막아버립니다.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백 배의 결실을 거둡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뒤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비유의 뜻을 묻습니다.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답이 10절입니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비유로 말씀하시는 목적이 이중적입니다. 하나는 드러내어 알리는 계시의 목적이고 다른 하나는 듣고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는 은닉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알리고 다른 사람은 깨닫지 못하게 하려고 비유로 말씀했다고 하십니다. 너희와 그들, 혹은 너희와 다른 사람이 대조됩니다. 너희가 누구입니까? 1-3에 나오는 열두 제자와 막달라 마리아, 요안나와 수산나,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는 제자 공동체입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무리들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입니다.
그렇게 비유의 목적을 알려주신 뒤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해석해주십니다.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직접 그 씨를 뿌리고 있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으로 뿌리십니다.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으로 뿌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며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으며 온유한 자가 복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팔 복의 말씀으로 뿌립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말씀으로 뿌리고, 구제, 기도, 금식의 신앙 행위를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행해야 한다는 말씀으로 뿌리고 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말씀으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으로 뿌리고 계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으니 모래 위에 집은 짓는 어리석은 건축자가 되지 말고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건축자가 되라는 말씀으로 뿌리고 있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말씀으로 뿌리고 있으며,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으면 복이 있다는 말씀으로,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으며, 많은 죄를 탕감 받은 자가 나를 더 많이 사랑한다는 말씀으로 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길가, 돌밭, 가시 떨기에 떨어진 씨처럼 그 말씀이 빼앗기고 방해받고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직 좋은 땅에 뿌려진 씨만 열매를 맺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나라가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주님을 믿고 영접하면 누구든지 즉시 누릴 수 있는 주님의 통치권으로 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공중의 새가 먹어갈 수 있는 모습으로, 세상의 돈 있고 힘 있는 자가 얼마든지 괄시할 수 있고 먹고 마시는 차원의 염려 때문에 혹은 더 많은 돈의 욕심 때문에 팽개치고 외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임해 있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고 하십니다. 여기 비밀은 헬라어로 ‘무스테리온’이라는 단어로 ‘시크릿’이 아니라 ‘미스테리’입니다. 감추고 알려주지 않아서 모르는 비밀은 시크릿이지만 보여주는데도 모르는 비밀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보고 듣는데도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미스테리로 와 있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이 예수님 앞에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천국에 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어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천국의 주인임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토록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그토록 많은 귀신들린 자를 고치는 것을 보아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토록 많은 교훈을 듣고 가르침을 받아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만 그렇습니까? 무리만 그렇습니까? 그들만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예수님이 주시고자 하는 천국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제자들도 아직 다 모르고 있습니다. 몰라서 이 비유의 뜻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모든 죄인 된 인생이 그러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제자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허물과 죄로 죽어 있는 그 완악함 대로 내버려 두면 예수님이 뿌리는 말씀에 대해서 제대로 반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어도 자신의 필요와 욕심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미친 듯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더 많은 떡을 위해서였습니다. 그것이 죄인 된 인생들이 예수님께 보이는 한결같고 최대한의 반응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인생들중에 누군가를 당신을 믿게 하고 말씀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 고침과 귀신 쫓아내심의 의미가 깨달아지는 자들이 있습니다. 계속 그 깨달음과 진리로 이끌림을 받는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자들입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택함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향하여 너희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10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허락되었습니다. 자신의 실력으로 깨우치고 믿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직역하면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너희에게 주어졌다”입니다. “주어졌다” 수동태입니다. 그들의 공로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주어진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병행 구절인 마 13:16에는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믿지 못하는 예수가 믿어지고 들어도 알지 못하는 말씀이 들려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입니다. 무리에게는 가르쳐주지 않으시면서도 제자들에게는 그 비유를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주시지 않습니까? 은혜입니다. 복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이 은혜와 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말씀이 깨달아져야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고 천국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이 말씀을 뿌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했습니다. 귀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말씀하는데도 듣지 못합니다. 이미 거짓된 것으로 배불러 있는 자, 이미 욕심으로 가득 차 있는 자는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의 말씀을 들려준다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내팽개칩니다. 마귀에게 빼앗깁니다. 바위같이 굳은 마음으로 저항하여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잠시 기쁨으로 받는 것 같지만 시험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배반합니다.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말씀의 기운이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욕심에 배부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주려 있고 진리에 목마르며 말씀의 가치를 아는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에게 묻고 구해야 합니다. 그냥 두시면 자리에 앉았다가 돌아갈 수밖에 없으니 은혜를 주셔서 주님의 말씀이 나의 모든 것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재리의 유혹과 여러 가지 어려움과 형편 때문에 말씀을 외면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나의 길가 같고 돌밭 같고 가시덤불 같은 마음을 갈아엎어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되는 은혜를 허락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말씀에 방해가 되는 잡초들을 다 뽑아내시고 온전히 말씀에 헌신할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천국의 복으로 내 삶에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매력적이거나 성공적인 나라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눈과 귀로 보면 아무리 보고 들어도 가치를 발견할 수 없는 나라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도가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고 유대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그렇게 와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와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아 좋은 땅으로 기경되면 그 십자가가 구원의 능력과 지혜로 다가오고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고 깨달아집니다. 우리가 그런 은혜를 받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5절입니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라고 했습니다. 좋은 땅의 은혜 좋은 마음의 은혜가 있다면 말씀에 헌신해야 합니다. 말씀에 헌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지키고 인내하여 순종하는 삶입니다.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키고 인내로 결실하는 것이 은혜받은 자의 마땅한 반응입니다.
그 누구도 처음부터 옥토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 이 열매 맺지 못하는 세 종류의 반응이 다 있습니다. 때로는 말씀이 공중의 새에게 먹히고 마귀가 빼앗아 간 것처럼 하나도 생각이 안 날 때 있습니다. 어떤 때는 힘들어서 알면서도 포기할 때 있습니다. 염려와 재물과 세상의 재미 때문에 외면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 본래의 반응입니다. 그런데 왜 믿어집니까? 왜 어떤 때는 좋은 마음으로 들리고 믿어지고 가슴이 뜨거워질 때가 있습니까?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 은혜로 세워지고 자라고 주님에게 나아갑니다.
교회에 이 은혜가 없다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매 주일 모이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데 말씀의 씨앗이 다 길가에 떨어지고 돌밭에 떨어지고 가시떨기에 떨어져서 구원과 생명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이 은혜가 없다면 동호회나 교회가 별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니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들을 수 있는 은혜, 지킬 수 있는 은혜, 인내할 수 있는 은혜, 열매 맺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 열매는 숫자와 외형과 크기의 비교가 아닙니다. 인격과 성품의 변화입니다. 탐욕의 사람이 나눔의 사람으로, 미움과 시기와 분노의 사람이 용서와 화평의 사람으로,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신적인 사람, 이웃을 사랑하는 이타적인 사람으로, 이익에 주린 사람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으로 바뀌는 삶의 변화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성공 신드롬이나 부자 신드롬이나 숫자 신드롬에 빠진 인생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헛된 신드롬을 깨트리는 방식으로 다가옵니다. 주의 몸 된 교회를 통하여 돌밭을 깨트리고 가시덤불을 치우시고 착한 마음으로 기경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새들이 말씀을 빼앗아 먹으려 공격하고, 어려움과 고난과 염려와 재물과 향락의 유혹으로 성도의 믿음이 방해받지 않도록 우리에게 들을 귀가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키고 인내하면서 순종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의 소중함을 알고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마땅히 가져야 할 자세와 신앙의 태도입니다.
계시록 2-3장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확인하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계 2:7, 11, 17, 26-29, 3:5-6, 12-13, 21-22을 보십시오.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서머나 교회에도 버가모 교회에도 두아디라 교회에도, 사데교회, 빌라델비아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도 다 똑같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기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고 이기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은혜 가운데 있는 교회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기기 위해서 들어야 하고, 듣기 위해서 이겨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이 은혜가 있어서 생명의 결실을 100배로 거두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