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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어려울 때 만난 하나님(2260.2024.7.28)
호2:14-15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임재하셔서 우리 예배를 받으십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고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여호와 라파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 힘을 얻으시기를 축복합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쳐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은 음란한 고멜과 신실한 호세아의 결혼 생활을 통해 상징적으로 선민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사랑과 이러한 사랑을 배반하고 온갖 죄악을 범한 북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회복의 약속을 재차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하여 징계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의 말로 권고하고, 또한 물질적으로 축복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게 합니다. 그러면서 관계를 회복하게 하심으로 진정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신다는 참 사랑을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실까요?
타이르시는 하나님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을 영구히 멸하는 대신 개유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타이르다’는 말은, ‘권유하다’, ‘설득하다’는 뜻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의 포로가 될 운명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의 ‘타이르시’는 즉 ‘권유하는’ 음성 곧 죄를 회개하고 자복하라는 말씀과 세상적인 즐거움을 탐닉하는 것에서 떠나 하나님 안에서 신령한 기쁨을 추구하라는 등의 권면의 말씀을 듣고 귀기울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심을 알아야 합니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입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장차 앗수르에 멸망 당해 낙심하며 곤고한 지경에 처해 있을 북이스라엘 백성을 위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위로하고’라는 말은 입에 바른 소리로 하는 것이 아닌, ‘마음에 말하다’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해 관심을 가지고 위로하는 진심이 담긴 위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의 안락과 우상에게 자신들의 모든 것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로하시겠다는 것이니,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그 어떤 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나와 함께 하자라시며 닫힌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사랑의 손길을 내미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의 회복이라는 확실한 소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허투루 하신 게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소망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줄로 확신하기에 가질 수 있는 희망을 의미합니다. 이 약속은 이스라엘에게는 큰 희망이요, 앗수르의 포로생활에서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만을 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어떤 날이 다가온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소망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소망의 기쁨을 가지고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하시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혼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당하는 것인데 이때 어떻게 이겨낼 수가 있는가를 아는 사람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본인이 가장 어려울 때에 종교를 선택하게 되는데 불교, 유교, 천주교, 기독교 등등을 선택하게 되는데 기독교를 선택했다는 것은 참으로 잘 한 일입니다. 만군의 하나님이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만군의 하나님,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까? 가장 어려울 때에 만날수 있습니다. 어디에서 만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 뵙는 장소가 정해져있습니까? 믿음만 있으면 하나님은 어디에서나 만나 뵐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아브라함은 모리아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은 벧엘 광야, 모세는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숲속,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용광로와 사자굴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막에서 홍해 한복판에서도 하나님을 만났고 날마다 기도하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제한되어 있는 것 아닙니다. 가정에서도 직장, 질병의 병상, 죽음의 침실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는 75년도에 서울에 올라가서 77년도 남대문시장 근처에서 일할 때 직장 사장으로부터 교회를 다녀야 한다고 해서 남대문을 자전거 타고 누빌 때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 이후로는 한번도 다른종교로 눈을 돌려보지를 않았습니다. 교회는 아현동에 있는 북성교회를 다녔습니다. 오직 살길은 하나님을 만나고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고 은헤도 받고 목회의 길을 들어서서 오늘까지 달려왔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골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 ‘가장 어려울 때 만난 하나님’이라는 주제로 말씀을 증거하려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배드리는 이 시간 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아골은 어떤 골짜기입니까? 우리가 이런 골짜기에서 있다면 오늘 하나님만나 승리할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가장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1.타락의 골짜기에서 만난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평안할 때에는 하나님을 찾지 않는 법입니다. 부자로 살때에는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가장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무엇인가를 붙잡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지옥으로 보낼 수 없어서 타락의 골자기를 주어서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시켜 주십니다. 내가 타락의 길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은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만나주십니다. 그래서 많은 신앙인들이 타락된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나고 힘과 용기를 얻고 축복을 받아서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변화받아서 교회에 덕을 끼치고, 충성을 다하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목사가 되는 분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어디에서 건지실지 모르는 일입니다. 오늘 상주감리교회 예배에 참여한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만나는 축복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과 성도들과의 관계를 부부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호세아요, 아내는 고멜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소개한 호세아서 2장은 열리면서 선지자 호세아가 말합니다. 호2:2절‘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호세아가 자녀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너희들의 어머니가 음행에 빠졌다. 바람이 났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쟁론을 해서라도 어머니의 자리를 회복하도록 하라’는 당부의 말입니다. 여기 호세아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어머니는 이스라엘 곧 고멜처럼 타락한 우리모두를 상징합니다.
아골 골짜기 이렇게 말하면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어떤 인물이 생각납니까? 아간입니다. 여호수아 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에 매일 한바퀴씩 엿새동안 돌고 마지막날에 일곱 번 돌았습니다. 이러한 전쟁을 어디에서 본 적이 있습니까? 믿음의 행진을 통해서 큰 성 여리고가 기적적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여리고성보다 훨씬 작은 성 아이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맙니다. 원인은 아간 한 사람이 범한 죄 때문이었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리고 지방에 있는 넓은 골짜기요, 아간을 처형한 돌무덤이 있는 장소입니다.
히브리어로 ‘아골’은 문법적으로 말하면 ‘괴롭다, 슬프다’뜻인 ‘아칼’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괴로움, 슬픔, 고통’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아골은 슬픔의 골짜기 고통의 골짜기입니다. 그러나 고통, 슬픔이 있기 전에 범죄가 있었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아간의 죄를 상징하는 골짜기요, 아간의 돌무덤을 상징하는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지금 아골 골짜기에서 일어났던 것과 비슷한 범죄가 호세아 시대에 재현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호세아서 2장 첫부분에서 반복되는 독특한 몇 개의 단어가 있습니다. 2절 음란,음행, 4절 음란, 5절 행음 비슷한 단어들인데 이러한 죄들이 무엇입니까? 육체적인 음란 죄라기보다 영적인 음란죄를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멜이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 바알을 따라간 우상숭배의 죄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 또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바알이여, 바알이여,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옵소서’ 다른 남편 곧 바알 신을 섬긴지라 호세아는 격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누가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까? 바알? 여호와 하나님? 8절을 보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곡식도 하나님이 주신다 했고 새 포도주, 기름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바알에게 드릴려고 하는 은, 금도 하나님이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이 무엇입니까?
아골 골짜기로 방황하는 인생입니다. 아골은 어떤 곳입니까? 타락의 골짜기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죄인들아 다 내게로 오라. 불의를 행한 자, 거짓말하는 자들, 행음하는 자들도 올 것이라그리하면 내가 다 깨끗케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드리는 시간이 어떤 시간입니까? 이모든 죄를 가지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간에 나의 모든 죄를 주님앞에 고백하고 용서받는 시간입니다.
2.징계의 골짜기에서 만난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가만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할 사람들이 믿지 아니하고 우상을 숭배하고 세상의 타락의 길로 갈때에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시기에 징계를 내리십니다. 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은 죄악에서 건져 구원을 주시고 다시금 갑절의 축복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큰 일꾼으로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타락한 백성을 그대로 보고만 계실 수는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멜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사랑하사 아골 골짜기에 나타나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고멜을 붙들고 어깨를 붙잡으며 흔들기를 시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드신 것입니다. 이 매는 징계의 매요, 사랑의 매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징계의 장이라 할 수 있는데 8절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그것이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의미 있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로 여러가지 면으로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것은 곧 회복하고 승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없으면 사상아라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자녀들을 양육하지만 자녀들이 잘못한 것을 보고도 야단을 치지 아니하면 사상아든지, 상관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내가 낳은 자식을 그렇게 내버려두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이기에 매를 들어서 징계를 내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 징계를 잘 받으면 큰 축복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지금 어려운 일을 당한다던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징계가 있을 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징계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내게 기대를 걸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는데 내가 포기해버리고 하나님의 징계를 안받겠다고 한다면 멸망의 자식이 되어서 하나님은 내러벼 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어려운 징계를 주시는데 이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함을 드리고 하나님을 찬양하시면 하나님은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스리고 징계를 주실 때에는 세 단계로 우리에게 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애물의 단계입니다. 6절을 보면 ‘내가 가시로 그 길을 막으며 담을 쌓아 저로 그 길을 찾지 못하게 하리니’ 남편 호세아가 아내 고멜을 포기했다면 고멜이 자기를 떠날때에 무관했을 것입니다. 갈 테면 가버리라 했을 것입니다. 왜 떠나는 고멜을 가시로 그 길을 막고 담을 쌓아 막았습니까? 아직도 그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쁜 길로 가는데 그대로 두는 것이 사랑입니까? 타락의 길로 가는데 가시로 막고 높은 담을 쌓아서 막는 것이 미움입니까?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믿음 생활하는데 가시, 높은 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시가 찌르면 아프고 담이 높으면 뛰어 넘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장애물이 사랑의 장애물이기 때문입니다.
징계가 무엇입니까? ‘내게로 돌아 오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사랑의 장애물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비유가 있습니다. 탕자는 이것을 체험했을 것입니다. 아버지 품을 떠날 때에 그곳에 가면 높은 빌딩들이 있고 맛있는 음식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돼지우리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쥐엄열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만일 집을 나간 탕자가 먼 나라에 가서 고관 집에서 자가용을 굴리며 성공적인 삶을 살수가 있었다면 그의 입에서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나이다. 내 아버지 집에는 얼마나 많은 품꾼이 있는고’ 이렇게 하지를 아니했을 것입니다.
호세아의 아내 고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는 길이 막혔을 때에 평탄하지 못했을 때에 ‘이럴 바에야 남편의 품으로 돌아가야지 내 남편이 얼마나 사랑했던가’ 장애물이 현실을 바로 보게 합니다. 오늘의 가시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합니다. 삶의 담이 하나님의 은총을 알게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가시, 담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입니까? ‘돌아와 돌아와’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을 억지로 이끌고 나가면 그 일은 곧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막으시는 일은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잃어버림의 단계입니다. 9절‘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고 했습니다. 아내에게 주었던 곡식, 기름, 새 포도주, 양털, 삼 이런 것들을 도로 가져가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하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건강도 주시고 지혜, 재물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들을 오히려 타락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는 아니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바알 신당을 찾아갔습니다. 그것으로 ‘바알이여, 바알이여’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인생들을 축복하실 수 있습니까? 한 길 밖에 없습니다. ‘내가 준 것 도로 내놓아라’ 바로 그 길입니다. 하나님은 징계하실 때에 우리에게 준 것 도로 빼앗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건강, 지혜, 재물 빼앗아갑니다. 이러한 때에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절망합니다. 더욱 타락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셔서 일으켜 세울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빼앗겼을 때에 재물이 없어졌을 때에 부도가 났을 때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헌금을 더 드린다고 합니다. 욥1:21이 무엇입니까?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했습니다. 하나님이 빼앗아가는데는 뜻이 있습니다. 주셨던 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으라는 메시지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속히 회복하라는 사랑의 촉구라는 말입니다. 빼앗기고 없어지는 형편 이것이 IMF 이후의 우리의 형편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금도 빼앗겼습니다. 통장도 빼앗겼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겼습니까? 이러한 때에 낙망해서는 아니됩니다. 더욱 용기 백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하신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어려운일을 만났을 때에 더욱더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자도 하나님, 취하신 분도 하나님인 것을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고 범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갑절의 복으로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때에 욥이 말한 것처럼 욥42:5‘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하는 것입니다. 설교로만 듣던 그 하나님을 내가 직접 눈으로 뵙는 체험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대부터는 하나님만 의지하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의 단계입니다. 10절을 보면 ‘이제 내가 그 수치를 드러내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을 가져가시면 우리의 감춰진 수치가 드러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징계하실 때에 우리를 수치스럽게 부끄럽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내 죄를 깨닫고 ‘아! 나 부끄러워’ 이것이 아름다운 믿음이요 고백입니다. 우리의 찬송이요 간증입니다. 내가 죄를 범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다, 무사태평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무관심이요 하나님의 미움이요 저주입니다. 내가 범죄 했을 때에 웃음거리가 되고 부끄럽게 되었을 때에 그때 어떻게 하던가요?
그 원인이 무엇이라는 말인가? 왜 내가 이 모양이 되었다는 말인가? 물으면서 죄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는 빈 손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징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사랑의 회초리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에 사랑의 매를 듭니다. 미워서입니까? 아닙니다. 다시는 범죄치 못하게 위함이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어려운 일을 만나 징계가 있을 때에 낙망하지 말고 돌이킬 수 있어야 합니다. 징계가 있을 때에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소망의 골짜기에서 만난 하나님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소망이 있기에 모든 어려운 일을 극복하고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14절을 보면 ‘내가 저를 개유하여’라고 했습니다. 개유한다는 말은 ‘타이른다’는 뜻입니다. 협박, 공갈의 뜻이 아닙니다. 개유한다는 말 속에는 ‘사랑하는 여보, 내 찢긴 가슴을 보오. 당신을 생각하느라고 밤잠을 이루지 못했소’안타까운 가슴으로 타이르는 남편의 사랑이 담뿍 들어있다는 말입니다. ‘너는 나를 버렸지만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개유하여 그 다음 ‘말로 위로하고’했습니다. 아골 골짜기 타락의 골짜기 징계의 골짜기입니다. 누구도 아골 골짜기의 고멜을 위로할 자 없습니다. 도리어 비웃습니다. 조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어려운 일을 당할 때에 아골골짜기에서 나타나 만나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리고 고멜 인생을 향해서 말씀하십니다. ‘힘을 내라. 두려워 말라. 용기를 내라. 담대하라’그리고 위로하십니다. ‘다시 출발하라. 이제부터다.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위로라는 말은 가까이 곁에 있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항상 계십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찬송--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를 아니하십니다. 우리 곁에서 위로하시는 하나님 이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비록 아골 골짜기 같은 세상이지만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잃지 아니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포도원을 주리라’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포도원은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포도원을 주리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회복시키십니까.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너무도 엄청나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변하여 포도원을 주리라 다시금 회복시켜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에게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아골골짜기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아골의 골짜기는 타락의 골짜기입니다. 징계의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이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골짜기 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골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재물을 만난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고통의 골짜기가 기쁨, 절망의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가장 어려울 때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를 축원합니다.
또 본문 15절‘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저가’, 고멜이, ‘거기서’ 아골 골짜기에서, ‘응대하리라’ 이 말은 ‘찬송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고멜은 아골 골짜기에서 불러야 될 찬송을 잃어버린채 살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멜이 젊음, 시간, 행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 가지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고 나 같은 죄인만 위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멜은 아골 골짜기에서 외로웠습니다. 답답했습니다. 고독했습니다. ‘저 죄많은 여자를 보라’ 손가락질 받으며 지목 당하며 살았습니다. 얼마나 많은 밤을 통곡으로 지샜는지 모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 혼자서 얼마나 외롭고 슬쓸하고 고통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남편의 사랑이 회복되었습니다. ‘고멜아, 돌아 오라’ 호세아가 가슴에 품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품어주셨습니다. 그때에 잃은 찬송을 되찾게 된 것입니다. 고통의 골짜기가 찬송의 골짜기로 바뀌어졌습니다. 그러나 징계의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 고통의 골짜기가 찬송의 골짜기가 되려고 하면 한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왜 아이성 싸움에서 참패를 당했습니까? 아간의 죄 때문입니다. 언제 아이성 싸움에서 승리했습니까? 아간의 죄를 해결했을 그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서 죄악을 제하여 버리라’우리는 죄에서 떠나야합니다.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청산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성도여러분 모두에게 청산해야 될 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나만 아는 비밀한 죄, 하나님이 아시는 그 비밀한 죄가 있습니다. 그 죄를 벗어버리시길르 바랍니다. 그래야 아이성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호세아가 고멜을 버리지 않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시며 우리를 버리시지 아니하십니다.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 세상 끝날까지 떠나지 아니하실 것입니다. 이제 가장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에 만난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기에 가장 어려운 골짜기에서 만나 힘과 용기를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 사랑을 힘입어 잃었던 찬송을 찾고 잃었던 소망을 찾으면서 날마다 승리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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