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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든다 문 닫아라
(신30:11-20)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 30장 말씀 근거로 해서 <저주든다 문 닫아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얘야, 바람들어온다. 문 좀 닫아라.” 이렇게 말하잖아요. 그렇죠? 들어온다, 든다..‘저주가 들어온다. 문을 닫아라.’ 하는 그런 제목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설교가 너무나 간절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라 라고 하는 이 한 말씀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나안 복지 같은 거 이런 거 생각하지 않아도 다 주어지고 복되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제발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라고 하면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하면요?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결국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으로 표현을 자꾸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거 그것이 뭐냐 하면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놓았으니 선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 겁니다. 저주가 들어오지 않게 생명을 선택하라, 복을 선택하라.
왜 사망과 저주를 선택하느냐? 이런 얘기지요.
여러분, 겨울철이 되어 갑니다. 그런데 집안에 대문과 현관문과 창문과 또 베란다의 모든 창문을 다 열어놓고 난방을 한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희 집은 13층인데 앞뒤 맞바람이 불도록 앞뒤를 열어놓으면 뭐 바람이 엄청납니다. 여름에 날씨가 더울 때도 바람이 불어서 그렇게 더운지 모르고 살 정도로 바람이 많이 부는데 하여간 양쪽으로 티여 있는 이 아파트 양쪽 문을 다 열어놓고 난방을 한다고 해봅시다. 생 겨울에. 아주 추운 겨울에..
그거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고 소위 말해 잘 살기를 원하고 복 받을 삶을 살기 원하는데 다 어떤 식으로 사느냐?
앞뒤로 베란다 문과 모든 문을 다 열어놓은 채로 난방을 하고 있는 겁니다. 따뜻하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에요. 무서운 저주의 바람이 들어오도록 문을 다 열어놓고 그리고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겁니다.
참 그거 이상하죠? 왜 그런 일이 있을까? 오늘 한번 살펴봅니다.
모세가 재미있는 표현을 씁니다.
'내가 오늘 너에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너희들에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다. 하늘에 있기 때문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 앞에 가져다가 놓아서 내가 그걸 가깝게 여기고 그 말씀을 이룰 수 있겠느냐 말하지 말라.
또 누가 바다를 건너서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가져와서 가깝게 느끼고 그 말씀을 따라 살겠는가 이렇게 말하지 말라.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너무너무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고 그러면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들이 굉장히 지키기가 어렵다고 우리가 말을 합니다. 어떻게 성경 말씀대로 살아가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어려운 이유는 무엇이냐? 하나님이 멀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마음에 가까이 모시면 이 성경 말씀 중에 이루어지지 않을 말씀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부부 간에도 그래요. 부부가 사이가 멀어지면 남편이 하는 말을 부인이 들어주기가 어렵고 부인이 하는 부탁을 남편이 응해주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사이가 가까워집니다. 가까워지면 남편이 무엇을 먹고 싶다고 그래도 해줄 수 있고 부인이 어떤 일을 요구해도 남편이 기꺼이 들어줄 수가 있습니다.
왜 그게 힘듭니까? 멀기 때문에 그래요.
멀어지면 존재와 존재의 사이가 멀어지면 그러면 말씀도 지키기가 어렵고 부탁도 들어주기가 어렵게 된다는 것이에요.
생전 모르는 사람이 돈 뭉탱이 갖다 주고 부탁하면 들어줍니다. 왜 그래요? 돈하고 친하기 때문에. 돈이 무척 가까이 있고 친하기 때문에 돈을 갖고 오는 모든 사람의 말을 다 들어주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돈 갖고 온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게 쉽습니까? 목숨을 내놓고 그 말을 들어주는 거예요. 부정하고 부패하는 것이 왜 그래요? 목숨을 내놓고 그 돈을 받으면서 돈이 너무 친하니까 그 친한 돈이 내게 들어오면서 요구하는 게 있어요. 부정하고 부패하고 부당한 방식으로 봐주고 이런 것들을 다 하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하는 거 그 노력하는 것을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거라는 거 아세요? 도저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을 만큼 회사에서 참고 스트레스를 받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나가서 돈을 벌고 밤잠을 못 자며 돈을 벌고 그런 노력 그거 어떻게 합니까? 돈이 너무 친하니까. 돈이 친해서 그 돈이 들어오고 싶어서 요구하는 모든 것들 다 들어줘 다 들어줘요.
하나님의 말씀이 지키기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심지어는 오른편 뺨을 치면 왼쪽 뺨도 돌려대라. 왼쪽 뺨을 치면 오른쪽 뺨인가요? 하여간 모르겠는데. 사람이 오른손으로 친다 그러면 왼쪽 뺨을 맞겠네요. 맞죠? 맞지요. 그럼 오른 뺨까지 돌려대라. 이거 어려운 거 같지요? 아니에요. 주님이 가깝고 주님이 내 마음에 늘 계시면 이 말을 어려울 게 하나도 없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한 사람 믿고 그 사람이 저기 알래스카로 출장가면 따라 갑니다. 친척 친구 친정 다 놔두고 따라 갑니다. 보통 어려운 거예요?
오늘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라,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함께 어디까지 갑니다. 근데 멀어서 그래요. 멀어서..
그런데 여러분, 이 먼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늘 저 편에 계신 거 같을 때 말씀도 하늘 저 편에 있는 것 같고, 하나님이 바다 저 건너에 있는 거 같을 때 내가 또 하나님의 말씀도 바다 저 건너에 있는 거 같고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거지. 성경 말씀이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그리고 다 세상 말씀대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돈 벌고, 직장생활하고, 사람만나 친구 만나 동창 만나 사람 사는 게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의 말씀대로 따라 가지요. 근데 여기 저주의 문이 열린다는 것이에요.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여러분과의 사에에 틈이 벌어진 만큼 저주의 문을 통하여 저주의 문이 열리는 거예요. 이 틈이 저주의 문입니다.
우리가 태초에 보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있다가 사람이 빚어지지 않습니까? 그러면 사람은 어떤 존재냐?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닌 세계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세계입니다. 거기 위에 하나님이 꽃을 피우게 하시고 나무가 자라게 하시고 또 동물들이 다니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질서를 줘요. 그 질서가 동물들에게는 본능으로 식물들에게는 생리적으로 주어져서 질서가 잡혀갑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함을 통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섭리와 계획과 질서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맞닿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언제 바람이, 겨울바람 아주 차고 매서운 북풍이 들어오듯이 언제 들어오느냐? 하나님과 내가 붙어있지 않고 틈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럼 그 틈 만큼 들어오는 거예요. 저주의 문이. 사망과 혼돈과 흑암과 공허의 바람이 그 틈 만큼 오는 겁니다.
이 틈이 없고 하나님과 딱 붙었다. 하나님과 딱 붙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과 붙은 상태에서 동서남북이 복으로 쌓이는 거예요.
돈 벌려 애쓰지 말고,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애쓰지 말고, 출세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과 붙으면 되는 겁니다. 제발 이 말을 믿으세요. 하나님과 붙으면 동서남북으로 복이 내립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제대로 들어가건 말건 내버려두고 내가 하나님과 붙으세요. 내가 하나님과 붙으면 동서남북으로 복이 내리는데, 내가 하나님과 틈이 벌어지면 벌어진 만큼 저주의 바람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이 문을 닫아야 된다는 거예요.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 중에 선택하라. 어떻게 선택합니까?
하나님과 붙어 하나님을 사랑하면 말씀도 지켜지고 그러면 딱 붙은 상태에서 저주의 문이 완전히 닫히고 사방팔방, 아브라함한테 하나님이 이 사방팔방 얘기를 많이 하세요.
‘아브라함아, 네가 동서남북으로 바라보라. 네가 보는 땅을 내가 너에게 주리라.’ 그게 복지에요.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하나님과 붙어 있는 상태에서는 보는 곳마다 복지가 됩니다. 내가 가는 곳마다 발로 밟는 곳마다 네 발로 밟는 땅을 내가 너에게 주리라.
왜?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까. 틈이 없어. 이 저주의 바람,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바람들이 들어올 틈이 없어요. 틈이 없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복이에요. 가는 곳마다 복지고, 가는 곳마다 기쁨이고, 가는 곳마다 감사에요.
근데 왜 내 마음에 걱정과 근심과 불안과 삶에 불행이 초래하게 되고 왜 이렇게 저주와 같은 그런 어렵고 힘든 일들이 주어지냐?
이 하나님과 붙어야 될 틈이 벌어진 거예요.
그러면 왜 벌어집니까? 왜 하나님과 붙어야 될 이 틈이 왜 벌어집니까?
여러분, 참 너무나 잘 살기도 쉽고 잘 망하기도 쉬워요. 돈 하나 안 들어요. 잘 사는 것도 돈 하나 안 들고 저주를 받아서 망하는 것도 돈 하나 안 들어요. 문 틈만 열리면 망하고 닫히면 복이 그냥 쏟아지는 겁니다.
왜 하나님과의 틈이 벌어지고 저주의 문이 열립니까?
너무나 우습지요. 여러분. 제가 말하면 다 웃을 거예요.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멀다는 이야기는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야기에요.
말이라는 게 뭡니까? 말이라는 건 생각이 표현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건 하나님의 생각이 표현되는 것이에요. 근데 하나님과 멀어진다.
왜 멀어집니까?
내가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고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생각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 생각이 풍선처럼 커지면 커질수록 하나님을 점점 어렇게 밀어내는 겁니다.
하여간 무슨 문제든지, 자식의 문제를 내가 생각한다. ‘아, 얘는 이런 특성이 있으니까 이렇게 되면 좋겠고 얘가 만약에 대학을 떨어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렇게 생각한다. 하나님과의 틈이 벌어지는 거예요.
내 딴에는 어떻게 하느냐? 그 아이의 삶을 복된 삶으로 해줄 수 있기 위해서 생각을 합니다. 생각을 짜내는데 결국 그게 어떤 일을 봐요? 아이의 삶에 저주의 문을 열어놓는 거예요. 점점.. 엄마가 관계하고 엄마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부분 만큼을 저주의 문을 열어놓는 겁니다. 저주의 문을 통해서 혼돈-삶이 엉켜서 하나도 제대로 돼가는 게 없는 거에요. 공허-결실이 아무 것도 없어요. 애가 사는데 고3을 살고 대학을 살고 취직생활 하는데 남는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저주의 문을 열어놔서 그 저주의 혼돈과 그 저주의 공허와 그 저주의 흑암의 바람이 황소바람처럼 들어오는데 요만한 난로가지고 따뜻하게 하고 복되게 하려고 하니 이게 되겠습니까?
생각한다는 거 이거 무서운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버리는 겁니다. 저주의 문을 열어놓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말씀드렸잖아요?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하나님의 생각을 자꾸 들으려고 하는 거 이게 대화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생각을 자꾸 듣고 하나님께 자꾸 묻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가까워져요. 자꾸 저주의 문이 좁혀집니다.
부흥회를 한 나흘간 했거든요? 나흘간 했는데 이제 방송 때문에 새벽 4시 반에 나와요. 그리고 부흥회 끝나고 집에 도착하면 밤 11시가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가 잘 때 나오고 잘 때 들어가요. 그러니까 아이가 그끄저께는 ‘아빠 보고 싶어 아빠 보고 싶어’ 그러더라는 거예요. 말 한 마디 못하고 만나질 못하는 거예요. 저도 지금 이번 주 주일 이후로는 내 아이를 못봤습니다. 전혀 못봤어요. 너무너무 멀어지는 거예요. 말을 건낼 수가 없고 만나질 수가 없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지금 이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아버지를 만나질 못하는 거예요. 아버지의 말씀이 안 들린다는 게 아버지를 못 만나고 있는 겁니다. 아주 깜깜하게 못 만나요.
왜? 내가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
생각만 안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자꾸 머리가 생각이 돌아가지요.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생각을 하려면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생각하려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뭘 만드셨냐? 얼마든지 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만들어 놓으신 거예요. 너희가 마음 속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거예요. 항상 바라보라는 겁니다.
그럼 주님의 십자가가 어떻게 되느냐?
하나님을 나에게 붙여줍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하게 해줍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거예요.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 속으로 그리지 않으면서 ‘하나님, 내가 지금 이 일을 해야 되는데 해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이렇게 대화하지요. 이 대화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전부 내 스스로 만들어내는 독백이지요.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죽었음을 고백하는 과정을 지나지 않고는 하나님이 만나지지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란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았는데도 만나진다면 주님의 사건은 일어날 필요가 없겠죠. 그거 뭐 왜 일어나십니까?
언젠가 예능 프로그램에서 옛날에 가수들이 불렀던 노래들을 그 가수를 데려다 놓고 그 가수 생애에서 뭐 1등 했던 노래 2등 했던 노래 이런 걸 다시 다른 젊은 진행하는 사람들이 부르기도 하고 이러면서 하는 그런 프로그램을 한번 언뜻 본적이 있어요.
근데 진행하는 남자와 외국 여자가 나왔어요. 외국 여자가 나와서 하는데 외국 여자가 진행하는 남자를 되게 좋아해요. 한국 남자를 되게 좋아하더라구요. 그러니까 이상하게 분위기가 되어서 ‘키스해 키스해’이렇게 얘기가 됐어요. 그래가지고 무슨 카드 같은 종이를 사이에 두고선 둘이서 키스를 하라고 그런 거예요. 방송에서 진짜 키스를 할 수 있겠습니까? 영화도 아니고.. 근데 장난꾸러기 다른 진행자가 둘이서 그 카드를 사이에 두고 입과 입을 맞추고 있는데 그 카드를 싹 빼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입과 입이 마주쳤지요. 진짜 키스가 돼버린 겁니다. 정말 가까워진 거 아닙니까? 밀접하게 딱 붙은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가 그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다 내 마음을 갖다 대면 아버지와 키스를 딱 하게 된다는 거예요. 아버지와 키스를 딱 하잖아요? 아빠~ 하고 딱 껴안잖아요? 껴안자마자 갑자기 동서남북 전체로 복이 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이게 기독교인의 삶이라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진짜 하나님과 마음과 마음이 부딪치는 거예요. 만나는 거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이 지키지 못할 게 하나도 없고요 지키지 못하냐 마느냐 문제가 아니라 그것만이 살길이라는 게 보이는 거예요. 성경 말씀만이 살길이라는 게 내 마음에 보인다는 거예요. 실감이 되는 거예요. ‘야, 이 말씀들을 내가 어떻게 지키냐? 이거?’그러죠? 아니라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하나님과 딱 살과 살이 닿고 얼굴과 얼굴이 닿고, 제가 우리 아이를 데리고 맨날 뽀뽀해요. 예뻐서. 그런 것처럼 하늘에 계신 아빠가 나를 붙잡고 ‘아이고 예쁜 놈’하고 붙잡죠? 그러면 마음이 하나님 말씀이 하나도 어렵지 않고 붙자마자 사방으로 은혜와 축복만 쏟아진다는 겁니다. 여길 가도 와도 떡반죽 그릇을 만져도 다 복이 돼요. 다 은혜가 되고 다 감사의 제목이 되고.
근데 내가 생각을 해요. 아주 건전한 생각을 합니다. 건전하게 이건 어떻게 될까 저건 어떻게 될까 내가 생각을 해서 기도를 해도 생각을 하고 결론을 내린 다음에 기도를 하고. 이것은 저주의 문이 활~짝 열려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바람이 새차게 내 삶으로 불어오고 내가 생각하는 모든 문제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 사업이면 사업 이 모든 문제에 저주의 문이 활~짝 열려요. 생각하면..
그게 뭐예요? 선악과를 따먹은 거예요.
그래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 같다고 말한 헤겔 같은 철학자는 뭐라고 말을 하느냐? 선악과를 지식의 나무라고 합니다. 생각의 나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답게 되려면 선악과를 먹는 게 필연적이었다. 그건 뭐 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사람답게 할 수 없었다. 그래놓고 생각할 수 있는 힘 때문에 하나님이 됐다.
그러니 그 헤겔이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거리가 얼마나 되었겠어요? 그 틈으로 저주가 들어온 거예요.
저주가 들어온 증거가 뭐냐?
자기가 하나님이다. 내가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이다 라고 그렇게 말하는 자체보다 더 큰 저주가 어디 있습니까? 그건 완전히 생 저주지 생 저주야. 철학한다고 하는 사람이... 독일 관념주의를 꽃 피운 헤겔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얘기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하루 살아가시면서 주님의 십자가를 하나님이 허락하신 말씀의 총화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어떵게 들어야 하는가? 여기 있는 뭐 사랑하라, 봉사하라, 구제하라 이런 말씀 먼저 듣지 말고 주님의 십자가 사건을 먼저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접촉이 되고 하나님이 사랑스러워지고 하나님이 좋아지면 나머지 말씀은 저절로 다~ 이루어집니다. 그 경지에 도달해보시지요. 그 경지라고 하니까 어려운 거 같아도 하나도 안 어려워요.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과 딱 키스하고 그래서 사방으로 복이 내리게 할지언정 내가 생각하면서 틈을 벌리면 안 됩니다. 주님과 붙은 상태에서 하나님께 대화해야죠.‘하나님 아버지 내가 이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아버지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면 진짜 아버지의 생각이 들린다 이겁니다.
주님을 먼저 붙잡으면 그리고 나면 다 복이고 근데 내가 생각하면서 가는 곳마다 저주의 문을 활짝 활짝 열어. 그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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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