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힘없는 호랑이" 였다. 조선 최고의 논쟁 거리인 예송논쟁의 중심에 선 임금이었다.
명성왕후 김씨! 인조 20년(1642) 5월에 청풍 김씨 김우명과 어머니 은진 송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효종 2년(1651) 김씨는 10살에 11세인 세자(현종)와 혼인을 하였다. 슬하에 아들 하나(숙종)과 세 공주를 두었다.
6대 단종도 부인이 장순왕후 송씨 하나뿐이었다. 단종은 재임기간이 짧아 후궁을 둘 기회가 없었다 하겠지만 현종은 무려 15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종이 후궁을 하나도 두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답은 아래 글을 다 읽으면 나올 것이다..
첫째는 명성왕후 김씨가 남편 현종을 지극정성으로 모셔서 현종이 다른 여자를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근데 이것이 가능할까~?
둘째는 명성왕후 김씨가 너무 질투심이 강하고 무서워서 현종이 다른 여자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죽을까봐... 그.. 그렇다고 하더라도...??
셋째는 현종이 근본적으로 여성혐오증이 있었다. 그렇다면 명성왕후 사이에 어떻게 자녀들을 넷이나 둘 수 있었을까~?
넷째는 현종이 영민하여 본부인이 모르게 몰래 바람만 피웠다. 저 찰스나 클린턴처럼.. 그러니 후궁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과연 그게 그리 쉬울까~?
마지막은 현종이 당시의 예송논쟁의 중심에 있어서 과중한 스트레스를 받아서 여자 생각이 전혀 없었다. Important(중요한)이 아니고, Impotent(성불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두 단어를 글로 쓸 때는 문제가 안 된다. 그러나 말할 때는 지극히 조심해서 발음해야 한다.
VIP는 Very Important Person 이다. 그런데 저 위에 있는 누구를 연상하여 VIP를 Very Impotent Person 라고 하면 안 된다. 과연 그럴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실록이나 관련자의 진술이 없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상상해서 판단해보길..^^
자신이 있는 분들은 댓글로 자신의 주장을 펴보시길 바란다.
명성왕후 김씨! 아주 스트레스 하나는 free했다. 후궁이 하나도 없어서.. 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빼어나고 성품이 과격했다고 한다. 머리 좋고 성격이 불같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절대 만만한 왕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치맛바람의 대명사인 왕비가 기억나는가? 명종 어미이며 중종 후비였던 문정왕후 윤씨! 거의 수준이 비슷비슷 했다..
시어머니 인선왕후와도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고 서로 세를 넓히려고 해서 고부갈등도 많았다. 그리고 지고는 못사는 성미였다. 그러니 그 사이에 낀 현종은 어떻겠는가? 같은 남자로서 심심한 위로를 전한다..
현종과 사이에 아들(숙종)을 하나밖에 안 두어서 혹시 다른 넘(?)들이 왕위를 넘볼까 걱정을 많이 하셨다. 그런데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삼복이가 있었다. 신경이 자꾸 쓰인다. 복창군ᆞ복평군ᆞ복선군!
친정집안이 서인 출신인 명성왕후는 남인들과는 원수지간이었다. 친정아버지인 김우명이 남인들 때문에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김우명이 삼복형제를 무고했기에 사형을 당할 뻔 했고 여차저차하여 죽었기에.
삼복형제들의 장인들은 불행하게도 모두 남인 출신이었다. 집요한 성격의 명성왕후는 홍수의 변을 일으켜 삼복형제를 귀양 보내고 무고죄로 사형을 당할 뻔한 친정아버지를 살려낸다. 아들과 대신들에게 무엇을 보임으로써.. 그 무엇은~? . 다름 아닌 눈물이었다. 대비의 악어의 눈물이었다..
홍수의 변은 <궁녀의 변>이라고 하는데 삼복형제가 인선왕후의 국상 때 대비 처소의 무수리와 그짓(?)을 했다고 고발해서 증거가 없음에도 관련자들이 처벌을 받은 사건이다. '有權無罪 無權有罪' '유권무죄 무권유죄'의 한 사례다.
명성왕후! 남인들에게 결정타를 먹여 싹쓰리를 한다. 경신대축척사건으로...
1680년(숙종 6년)에 남인 출신의 영의정인 허적이 잔칫날을 맞이하여 무인들을 모아 역모를 꾸민다고 서인들이 숙종께 보고 했다.
그래서 남인에 대한 대숙청이 단행되고 삼복형제도 역모죄로 사형을 당한다. 삼복형제들, 이름에 복자를 썼는데 복도 지지리도 없다. 우연히 남인 출신의 장인을 둔 것밖에 없는데 말이다. ㅠㅠ
심지어는 아들 숙종의 첫사랑 장옥정도 남인 출신이라고 궁에서 쫓아냈다.
여자! 참, 참, 무섭다~~^^
암호랑이 같았던 명성왕후도 그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1683년(숙종 9년)에 창경궁에서 42세로 휘~~익~~ 저 세상으로 날라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