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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溫達) 삼국사기 권 45,열전 5의 온달전 이야기
아들아, 이번에 우리가 함께 찾았던 온달산성은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여행지 중의
하나란다. 온달산성 그 자체도 빼어나서 가치가 빛나지만, 그곳에 서서 바라보는
남한강 물줄기와 소백산 산줄기가 연출하는 경관도 멋지지..
하지만 무엇보다 온달산성이 가지는 최고의 가치는 그곳이 품은 이야기, 온달 설화의
힘이고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온달산성(충북 단양군 영춘면)
아빠는 이 블로그에서 이미 온달 설화에 대해 비중있게 다룬 바 있는데, 그보다는 좀더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풀어줄 필요가 있겠다 싶더구나.
먼저 온달하면 무엇이 떠오르냐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아들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동화적
요소가 있어서 그런지..다들, 전설 정도로 생각하는데, 아빠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아니다.
온달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를 기록한 사서인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있는 것으로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란다.
물론, 그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 그 의미를 살리는가..
그것은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기에 지금도 그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란다.
그러면 삼국사기 권45, 열전 5의 온달전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한번 따라가 볼까?
온달은 고구려 제25대 태왕인 평원태왕(또는 평강왕) 때 사람으로,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은 맑은 사람이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밥을 빌어 홀어미를 봉양하였으며, 다 떨어지고 신을 신고
헤어진 옷을 입고, 시정을 왕래하니 사람들이 바보 온달(愚溫達)이라 불렀다고 해.
그리고 평원태왕의 딸인 평강공주가 어려서부터 곧잘 우니..그때마다 태왕은 농으로
공주가 울보가 되어 사대부의 아내가 되긴 어렵고 바보 온달한테 보내버려야 겠다고
말했다고 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의 첫부분..설화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구나.
먼저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우온달(愚溫達)이란 단어..
우(愚)는 어리석다는 뜻이 있기에 여기서 바보 온달이란 말이 나왔단다.
하지만 온달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야. 왜 그런지 볼래?
고구려 무사도
일단 온달이 외모가 잘생기지 못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아.
하지만 마음이 맑은 사람이란 언급과 찢어질 듯한 가난에도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바보의 모습이라 볼 수 없지.
오히려 꾸밈없는 마음가짐과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사람된 도리를 다하는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 할 것이다. 그리고 온달은 우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지.
또 온달은 지체높은 귀족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왕실과 결혼을 할 수 없는
상당히 낮은 신분의 귀족출신이거나 평민 출신이라고 추측할 수 있단다.
다음 대목을 보자.
평강공주가 16세가 되자 평원태왕은 공주를 상부 고씨(上部 高氏)와 결혼시키려
했고, 공주는 부왕에게 평소 대왕께서 온달에게 시집보낸다 하시더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지존인 대왕께서 허언을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잘못된 명을 받을 수 없다고
반발했지.
평원태왕은 이에 당황하여 달래다가 공주가 끝내 말을 듣지 않아 노하여 평강공주를
왕궁에서 쫒아냈단다.
고구려 귀족 여인상
그런데 이 평강공주는 그런 부왕에게 용서를 빌기는 커녕, 두팔에 팔찌를 가득 채우고
패물을 챙겨 당당하게 두발로 걸어 왕궁을 정말로 나가 버리지.
그리고는 온달의 집에 찾아가. 처음 공주를 만난 온달의 어머니와 온달은 그들에게는
맞지 않는 공주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피했지만, 공주가 그들을 끈질기게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결국 온달과 평강공주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단다.
이때의 일을 보자면 먼저 온달의 어머니가 "내 아들은 가난하고 사는 것이 누추하니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은 몹시 누추하여 귀인이 거처할 곳이 못됩니다."
하고 거절했고 공주는 "선인의 말씀에 한말의 곡식만 있어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만 있어도 바느질을 할 수 있다했으니, 마음만 맞으면 되지 어찌 부귀해지고
난 후에야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설득했다고 해.
그리고 평강공주는 가지고 온 패물을 풀어 살림을 장만하였고, 온달에게 낮에는
무예를 연마하고 밤에는 글을 익히고 공부하며.. 사람 만들기 시작했지.
이때 공주가 온달에게 시켜 말을 사게 하는데..시정에서 파는 말이 아니라 나라에서
처분한 말(國馬)를 사게 해서 정성껏 키워 준마로 만들어 놓았단다.
여기까지의 내용으로 보면,
첫째 온달과 온달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고 가난했을 뿐,상당히 현명하고 마음가짐이
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단다.
둘째 평강공주의 성격이 상당히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여장부이고, 그러면서도
소신있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앞날을 볼 줄아는 현명한 여인임을 알 수 있지.
또 여인이라 나라 일에 직접 종사하지 않음에도 국마에 관한 내용을 아는 것을 보면
나라일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는 것 같아.
세번째는 물론 왕실이나 귀족계층에서는 조금 경우가 달랐겠지만, 당시 고구려 풍습에
남녀가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하고, 그 결혼에도 격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으며 여자들의 지위가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달리 낮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지.
물론 평강공주의 내조와 응원에 힘입었겠지만, 온달의 우직하고 성실한 성품은
그를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무예 수련하도록 했을 것이고..
그런 노력은 곧 빛을 발하게 되었지.
아들아, 다음엔 온달이 어떻게 입신해서 큰 인물로 거듭나게 되는지에 대한 얘기가
이어지게 된단다.
고구려 수렵도 벽화
고구려에는 매년 음력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서 나라의 장정들이 모여
사냥대회가 벌어지고 그때 잡은 짐승으로 천신에 제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지.
온달도 그동안 키우던 말을 타고 이 사냥에 참가해서 남보다 빨리 말을 달리고
남들보다 더 빼어난 솜씨로 짐승을 많이 잡아 주목을 끌었단다.
평원태왕의 눈에도 띄어 태왕이 그를 가까이 불러 이름을 묻고는 그가 온달이라
답하자 놀라며, 특별히 칭찬했다고 하는구나.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고구려에서 매년 3월 낙랑언덕에서 벌이는 사냥대회는..
단순히 사냥하고 천신에 제를 지내기 위한 행사가 아니란 것이지.
사냥하기 위해 산과 들을 말을 달려야 하니..자연스럽게 그의 기마술을 시험하게 되고
또 사냥을 많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활솜씨 등 무예가 뛰어나다는 말이지.
즉, 자연스러운 군사훈련의 장이 되고, 태왕 앞에서 장정들은 기마술과 무예를 뽐낼
기회가 주어진 것이며, 나라에서는 그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장수로 삼는..
인재채용을 위한 장이 되는 것이지.
이 행사에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으니 능력만 있다면 충분히 신분상승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는 고구려의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아들아, 이것이 바로 대제국 고구려가 강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겠느냐.
아들아, 그리고 생각해 보아라. 온달은 가난하여 배움이 없었지만, 평강공주의 도움으로
뒤늦게 배움의 길에 들어서서 고구려 최고의 무장 반열에 오르기 까지..
그는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겠느냐.
이것만 봐도 온달은 확실히 바보가 아니지 않느냐?
바보가 아니라, 보고 배워야할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아들아..곧이어, 온달에게 큰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단다.
당시 중국 대륙의 북쪽을 지배하던 강력한 제국, 북주(北周)가 대군을 몰아 요동으로
침공해 오고 평원태왕이 친정하여 배산(拜山)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온달은 선봉에서 역전하여 그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단다.
고구려 개마무사
이 전투에서의 대승으로 평원태왕은 온달을 공식적으로 태왕의 사위인 부마로
인정하고 대형(大兄)이란 벼슬을 내리고 크게 신임하였다고 해.
이때가 평원태왕 19년, 578년 11월의 일이었다.
아들아,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가 차라리 여기에서..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어땠을까. 그럼 진짜 한 편의 동화같겠지?
그런데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전설이나 동화가 아니라 역사라 다음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단다.
세월이 지나 590년에 평원태왕이 승하하고, 그의 장자인 영양태왕이 새로운 고구려
태왕으로 즉위했지.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부터 장수태왕과 문자명왕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만주를 지배하고
한반도에서는 한수를 건너 그 중심부를 장악하였단다.
그런데 이후 안장태왕, 안원태왕, 양원태왕까지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들은 분열되며
정치가 불안정하여 나라 힘이 약해졌지..
남쪽에서는 신흥강국으로 떠오르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서 공격해오고,
북쪽에서는 북주 같은 중국의 왕조와 돌궐 같은 북방민족과의 전투를 벌이며
나라가 기울어 한반도에서는 오랫동안 지배하던 한수유역의 영토를 잃고 말았단다.
고구려는 평원태왕대에 이르러서야 왕권을 다지며 나라 안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주와 돌궐을 물리치며 나라의 위기를 잘 해결하면서 고구려의 힘을 되찾기
시작했고, 이때에 등장한 평원태왕의 사람들 중에 온달이 있었던 거란다.
즉, 온달은 평원태왕이 왕권을 강화하고자 등용했던 신진무장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대국의 공주가 능력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신분이 미천한 자를 지아비로 삼고
그를 신뢰하고 내조하며 이끄는 모습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평강공주가 사람을 보는 눈이 대단했고, 또 편견없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으로 돌아와서..
온달 장군이 영양태왕에게 청하면서 이르기를
"신라가 우리의 한수 북쪽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원통하게
여기며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태왕께서 저를 어리석다 여기지 않으시고
저에게 군사를 내어주신다면 한번 나아가서 싸워 그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하니
태왕이 허락했단다.
온달 장군은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서쪽의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했고,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러 전투중에 유시(流矢)를
맞고 쓰러져 전사하고 말았단다.
장수를 잃은 고구려군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관에 모시고 운구하려 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고,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어 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이제 그만 갑시다.'하니 그제야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냈고,
영양태왕은 이를 듣고 비통해 했다고 하면서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은 끝을
맺고 있지.
온달장군의 최후
아들아, 나라의 큰 일을 맡은 장수로서 나라가 잃었던 땅을 되찾으려 했던
온달 장군 그 마음과 노력은 훌륭하다 칭송되어 마땅하다.
그가 죽음에 임하여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의지가 그만큼 강렬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평강공주의 의연했던 모습도 훌륭하다 생각되는 구나.
역시 큰 나라의 공주다운 모습이다.
아들아, 온달 장군이 주도했던 고구려의 한수유역 수복을 위한 시도는 고구려의 정신이
되살아났다는 것이고, 한반도 내의 중심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한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봐야지.
아빠의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의 내용을 분석을 마무리하며 정리한다면..
고구려의 자유로운 남여관, 상당히 높았던 여성의 지위, 매년 3월 사냥대회와 천제를
통한 고구려의 열려있는 새로운 인재등용 등 살아있는 고구려의 모습이 그 속에
녹아들어 있다.
평원태왕부터 영양태왕까지 새롭게 일어서는 고구려의 기운이 느껴지고,
그런 시대의 흐름 속, 그 중심에 있던 온달이란 흥미로운 인물의 이야기인 셈이지.
아들아, 아빠가 온달 장군의 이야기를 네게 전하며 특히 눈여겨 보기를 원하는 것은..
단순한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신분이 낮은 사람도 능력만 있다면 신분상승을 이룰 기회가 있는 역동적인 고구려의
모습과
일개 평민에서 몸을 일으켜 고구려란 대제국의 최고 무장의 반열에 오르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 산화한 고구려 장수의 상징인 온달..
그리고 민초들에게는 살아있는 희망의 증거로 역사에 남게 된 온달이란 사람 ..
그 자체란다.
네가 온달 장군의 모습을 보고 열심히 배운다면 너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빠는 그렇게 믿는다.
바로 온달이란 사람이 걸어갔던 그 길이 기록이 되어 저렇게 증거로 남아 있으니까.
작성자:방랑가족
아들아, 이번에 우리가 함께 찾았던 온달산성은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여행지 중의
하나란다. 온달산성 그 자체도 빼어나서 가치가 빛나지만, 그곳에 서서 바라보는
남한강 물줄기와 소백산 산줄기가 연출하는 경관도 멋지지..
하지만 무엇보다 온달산성이 가지는 최고의 가치는 그곳이 품은 이야기, 온달 설화의
힘이고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
온달산성(충북 단양군 영춘면)
아빠는 이 블로그에서 이미 온달 설화에 대해 비중있게 다룬 바 있는데, 그보다는 좀더
쉽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풀어줄 필요가 있겠다 싶더구나.
먼저 온달하면 무엇이 떠오르냐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아들아,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동화적
요소가 있어서 그런지..다들, 전설 정도로 생각하는데, 아빠가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아니다.
온달 이야기는 우리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를 기록한 사서인 삼국사기
열전에 실려있는 것으로 단순한 설화가 아니라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란다.
물론, 그 내용을 어떻게 해석해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고 그 의미를 살리는가..
그것은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기에 지금도 그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란다.
그러면 삼국사기 권45, 열전 5의 온달전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한번 따라가 볼까?
온달은 고구려 제25대 태왕인 평원태왕(또는 평강왕) 때 사람으로,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은 맑은 사람이었다.
집안이 가난하여 밥을 빌어 홀어미를 봉양하였으며, 다 떨어지고 신을 신고
헤어진 옷을 입고, 시정을 왕래하니 사람들이 바보 온달(愚溫達)이라 불렀다고 해.
그리고 평원태왕의 딸인 평강공주가 어려서부터 곧잘 우니..그때마다 태왕은 농으로
공주가 울보가 되어 사대부의 아내가 되긴 어렵고 바보 온달한테 보내버려야 겠다고
말했다고 하는 내용으로 시작하고 있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 설화의 첫부분..설화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들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구나.
먼저 삼국사기 열전에 나오는 우온달(愚溫達)이란 단어..
우(愚)는 어리석다는 뜻이 있기에 여기서 바보 온달이란 말이 나왔단다.
하지만 온달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야. 왜 그런지 볼래?
고구려 무사도
일단 온달이 외모가 잘생기지 못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아.
하지만 마음이 맑은 사람이란 언급과 찢어질 듯한 가난에도 홀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는 모습을 보면 단순히 바보의 모습이라 볼 수 없지.
오히려 꾸밈없는 마음가짐과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사람된 도리를 다하는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 할 것이다. 그리고 온달은 우직한 성품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지.
또 온달은 지체높은 귀족이 아니라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왕실과 결혼을 할 수 없는
상당히 낮은 신분의 귀족출신이거나 평민 출신이라고 추측할 수 있단다.
다음 대목을 보자.
평강공주가 16세가 되자 평원태왕은 공주를 상부 고씨(上部 高氏)와 결혼시키려
했고, 공주는 부왕에게 평소 대왕께서 온달에게 시집보낸다 하시더니 어떻게 된
것입니까? 지존인 대왕께서 허언을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잘못된 명을 받을 수 없다고
반발했지.
평원태왕은 이에 당황하여 달래다가 공주가 끝내 말을 듣지 않아 노하여 평강공주를
왕궁에서 쫒아냈단다.
고구려 귀족 여인상
그런데 이 평강공주는 그런 부왕에게 용서를 빌기는 커녕, 두팔에 팔찌를 가득 채우고
패물을 챙겨 당당하게 두발로 걸어 왕궁을 정말로 나가 버리지.
그리고는 온달의 집에 찾아가. 처음 공주를 만난 온달의 어머니와 온달은 그들에게는
맞지 않는 공주의 존재를 두려워하고 피했지만, 공주가 그들을 끈질기게 적극적으로
설득해서 결국 온달과 평강공주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단다.
이때의 일을 보자면 먼저 온달의 어머니가 "내 아들은 가난하고 사는 것이 누추하니
귀인의 배필이 될 수 없고, 우리 집은 몹시 누추하여 귀인이 거처할 곳이 못됩니다."
하고 거절했고 공주는 "선인의 말씀에 한말의 곡식만 있어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만 있어도 바느질을 할 수 있다했으니, 마음만 맞으면 되지 어찌 부귀해지고
난 후에야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설득했다고 해.
그리고 평강공주는 가지고 온 패물을 풀어 살림을 장만하였고, 온달에게 낮에는
무예를 연마하고 밤에는 글을 익히고 공부하며.. 사람 만들기 시작했지.
이때 공주가 온달에게 시켜 말을 사게 하는데..시정에서 파는 말이 아니라 나라에서
처분한 말(國馬)를 사게 해서 정성껏 키워 준마로 만들어 놓았단다.
여기까지의 내용으로 보면,
첫째 온달과 온달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고 가난했을 뿐,상당히 현명하고 마음가짐이
바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단다.
둘째 평강공주의 성격이 상당히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여장부이고, 그러면서도
소신있고 격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앞날을 볼 줄아는 현명한 여인임을 알 수 있지.
또 여인이라 나라 일에 직접 종사하지 않음에도 국마에 관한 내용을 아는 것을 보면
나라일에도 상당한 식견이 있는 것 같아.
세번째는 물론 왕실이나 귀족계층에서는 조금 경우가 달랐겠지만, 당시 고구려 풍습에
남녀가 자유연애를 통해 결혼하고, 그 결혼에도 격식에 크게 얽매이지 않았던 당시의
모습을 알 수 있으며 여자들의 지위가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달리 낮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지.
물론 평강공주의 내조와 응원에 힘입었겠지만, 온달의 우직하고 성실한 성품은
그를 한눈 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무예 수련하도록 했을 것이고..
그런 노력은 곧 빛을 발하게 되었지.
아들아, 다음엔 온달이 어떻게 입신해서 큰 인물로 거듭나게 되는지에 대한 얘기가
이어지게 된단다.
고구려 수렵도 벽화
고구려에는 매년 음력 3월 3일이면 낙랑의 언덕에서 나라의 장정들이 모여
사냥대회가 벌어지고 그때 잡은 짐승으로 천신에 제를 올리는 풍습이 있었지.
온달도 그동안 키우던 말을 타고 이 사냥에 참가해서 남보다 빨리 말을 달리고
남들보다 더 빼어난 솜씨로 짐승을 많이 잡아 주목을 끌었단다.
평원태왕의 눈에도 띄어 태왕이 그를 가까이 불러 이름을 묻고는 그가 온달이라
답하자 놀라며, 특별히 칭찬했다고 하는구나.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고구려에서 매년 3월 낙랑언덕에서 벌이는 사냥대회는..
단순히 사냥하고 천신에 제를 지내기 위한 행사가 아니란 것이지.
사냥하기 위해 산과 들을 말을 달려야 하니..자연스럽게 그의 기마술을 시험하게 되고
또 사냥을 많이 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활솜씨 등 무예가 뛰어나다는 말이지.
즉, 자연스러운 군사훈련의 장이 되고, 태왕 앞에서 장정들은 기마술과 무예를 뽐낼
기회가 주어진 것이며, 나라에서는 그중에서도 뛰어난 사람을 선발하여 장수로 삼는..
인재채용을 위한 장이 되는 것이지.
이 행사에는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으니 능력만 있다면 충분히 신분상승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있는 고구려의 모습을 볼 수 있단다.
아들아, 이것이 바로 대제국 고구려가 강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니겠느냐.
아들아, 그리고 생각해 보아라. 온달은 가난하여 배움이 없었지만, 평강공주의 도움으로
뒤늦게 배움의 길에 들어서서 고구려 최고의 무장 반열에 오르기 까지..
그는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겠느냐.
이것만 봐도 온달은 확실히 바보가 아니지 않느냐?
바보가 아니라, 보고 배워야할 표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이다.
아들아..곧이어, 온달에게 큰 기회가 주어지게 되었단다.
당시 중국 대륙의 북쪽을 지배하던 강력한 제국, 북주(北周)가 대군을 몰아 요동으로
침공해 오고 평원태왕이 친정하여 배산(拜山)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이 전투에서
온달은 선봉에서 역전하여 그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단다.
고구려 개마무사
이 전투에서의 대승으로 평원태왕은 온달을 공식적으로 태왕의 사위인 부마로
인정하고 대형(大兄)이란 벼슬을 내리고 크게 신임하였다고 해.
이때가 평원태왕 19년, 578년 11월의 일이었다.
아들아,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이야기가 차라리 여기에서..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어땠을까. 그럼 진짜 한 편의 동화같겠지?
그런데 온달과 평강공주의 이야기는 전설이나 동화가 아니라 역사라 다음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단다.
세월이 지나 590년에 평원태왕이 승하하고, 그의 장자인 영양태왕이 새로운 고구려
태왕으로 즉위했지.
고구려는 광개토태왕부터 장수태왕과 문자명왕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만주를 지배하고
한반도에서는 한수를 건너 그 중심부를 장악하였단다.
그런데 이후 안장태왕, 안원태왕, 양원태왕까지 왕권은 약화되고 귀족들은 분열되며
정치가 불안정하여 나라 힘이 약해졌지..
남쪽에서는 신흥강국으로 떠오르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서 공격해오고,
북쪽에서는 북주 같은 중국의 왕조와 돌궐 같은 북방민족과의 전투를 벌이며
나라가 기울어 한반도에서는 오랫동안 지배하던 한수유역의 영토를 잃고 말았단다.
고구려는 평원태왕대에 이르러서야 왕권을 다지며 나라 안의 혼란을 수습하고
북주와 돌궐을 물리치며 나라의 위기를 잘 해결하면서 고구려의 힘을 되찾기
시작했고, 이때에 등장한 평원태왕의 사람들 중에 온달이 있었던 거란다.
즉, 온달은 평원태왕이 왕권을 강화하고자 등용했던 신진무장세력의 대표적
인물이라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대국의 공주가 능력이 출중하다 할지라도 신분이 미천한 자를 지아비로 삼고
그를 신뢰하고 내조하며 이끄는 모습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그만큼 평강공주가 사람을 보는 눈이 대단했고, 또 편견없고 인격적으로도 훌륭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으로 돌아와서..
온달 장군이 영양태왕에게 청하면서 이르기를
"신라가 우리의 한수 북쪽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으로 삼으니 백성들이 원통하게
여기며 부모의 나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태왕께서 저를 어리석다 여기지 않으시고
저에게 군사를 내어주신다면 한번 나아가서 싸워 그땅을 되찾아 오겠습니다"하니
태왕이 허락했단다.
온달 장군은 '계립령(鷄立嶺)과 죽령(竹嶺)서쪽의 땅을 되찾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출정했고, 아단성(阿旦城)에 이르러 전투중에 유시(流矢)를
맞고 쓰러져 전사하고 말았단다.
장수를 잃은 고구려군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관에 모시고 운구하려 했는데..
관이 움직이지 않았고,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어 만지며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이제 그만 갑시다.'하니 그제야 관이 움직여 장사를 지냈고,
영양태왕은 이를 듣고 비통해 했다고 하면서 삼국사기 열전의 온달전은 끝을
맺고 있지.
온달장군의 최후
아들아, 나라의 큰 일을 맡은 장수로서 나라가 잃었던 땅을 되찾으려 했던
온달 장군 그 마음과 노력은 훌륭하다 칭송되어 마땅하다.
그가 죽음에 임하여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의지가 그만큼 강렬했다고
볼 수 있겠다.
남편을 잃은 평강공주의 의연했던 모습도 훌륭하다 생각되는 구나.
역시 큰 나라의 공주다운 모습이다.
아들아, 온달 장군이 주도했던 고구려의 한수유역 수복을 위한 시도는 고구려의 정신이
되살아났다는 것이고, 한반도 내의 중심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한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봐야지.
아빠의 삼국사기 열전 온달전의 내용을 분석을 마무리하며 정리한다면..
고구려의 자유로운 남여관, 상당히 높았던 여성의 지위, 매년 3월 사냥대회와 천제를
통한 고구려의 열려있는 새로운 인재등용 등 살아있는 고구려의 모습이 그 속에
녹아들어 있다.
평원태왕부터 영양태왕까지 새롭게 일어서는 고구려의 기운이 느껴지고,
그런 시대의 흐름 속, 그 중심에 있던 온달이란 흥미로운 인물의 이야기인 셈이지.
아들아, 아빠가 온달 장군의 이야기를 네게 전하며 특히 눈여겨 보기를 원하는 것은..
단순한 온달 장군과 평강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신분이 낮은 사람도 능력만 있다면 신분상승을 이룰 기회가 있는 역동적인 고구려의
모습과
일개 평민에서 몸을 일으켜 고구려란 대제국의 최고 무장의 반열에 오르고, 나라를
위해 싸우다 산화한 고구려 장수의 상징인 온달..
그리고 민초들에게는 살아있는 희망의 증거로 역사에 남게 된 온달이란 사람 ..
그 자체란다.
네가 온달 장군의 모습을 보고 열심히 배운다면 너도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빠는 그렇게 믿는다.
바로 온달이란 사람이 걸어갔던 그 길이 기록이 되어 저렇게 증거로 남아 있으니까.
작성자:방랑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