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 말라” 스승에 대들었다…700명 도장 깬 싯다르타 고민
“삶이 고통의 바다”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삶은 자유의 바다”라고 역설하는 붓다의 메시지가 궁금하지 않으세요?
백성호 종교전문기자가 ‘붓다뎐’을 연재합니다.
‘종교’가 아니라 ‘인간’을 다룹니다.
그래서 누구나 읽을 수 있습니다.
다들 지지고 볶는 일상의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며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붓다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가 돼라”고 말합니다.
‘붓다뎐’은 사자가 되는 길을 담고자 합니다.
동국대 불교대학원에서
석·박사 과정을 거친 백성호 종교전문기자는 작가입니다.
『인문학에 묻다, 행복은 어디에』
『예수를 만나다』
『결국, 잘 흘러갈 겁니다』등 열 권의 저서가 있습니다.
붓다는 왜 마음의 혁명가일까, 그 이유를 만나보시죠.
⑫ 지혜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라
고대 인도에는 이런 표현이 있었다.
“마하 프라즈나파라미타(Maha-prajna-paramita).”
산스크리트어인 이 말의 뜻은 이렇다.
“지혜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라.”
이 말을 그대로 한자로 옮기면 이렇게 된다.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密).”
불교 신자라면 아주 익숙한 표현이다.
그렇다.
‘반야심경’의 원래 경전 명칭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婆羅蜜多心經)’이다.
그래서 귀에 익다.
“지혜의 배를 타고 고통의 바다를 건너라”는 말은 고대 인도에 이미 있었다.
불교가 생겨나기 전에 말이다.
고대 인도인들은 ‘고해(苦海)’라는 삶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 숱한 방식으로 수행했다.
어려웠다.
그 바다를 건너려면 배가 필요했다.
고해를 건너기에 충분한 지혜의 배가 필요했다.
훗날,
붓다는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고 그 배를 내놓았다.
고통의 바다를 건너는 지혜의 배.
그 깨달음의 골수를 고스란히 담아 놓은 책이 ‘반야심경’이다.
260자로 된 가장 짧은 불교 경전이다.
8만4000에 달하는 방대한 불교 대장경의 이치가
반야심경의 260자 속에 다 들어가 있다고 평가를 받는다.
#뱀인가, 새끼줄인가
2500년 전 싯다르타가 찾는 것도 ‘지혜의 배’였다.
생로병사의 강, 고통의 바다를 건너갈 이치의 배였다.
그걸 찾기 위해 싯다르타는 웃다까라마뿟다를 찾아갔다.
당대에 구루(위대한 스승)로 꼽히는 수행자였다.
싯다르타는 바이샬리를 떠나 라즈기르로 갔다.
마가다국의 수도인 라즈기르에 웃다까라마뿟다가 이끄는 수행 공동체가 있었다.
라마뿟다의 수행 공동체는 컸다.
따르는 제자만 700명에 달했다.
싯다르타가 떠나온 알라라 깔라마 수행 공동체(300명)의 두 배가 넘었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웃다까라마뿟다는 해탈의 경지에 있다.”
해탈이 뭘까.
삶의 문제에 대한 이치를 풀어서(解),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일(脫)이다.
그게 ‘해탈(解脫)’이다.
‘해탈’이라고 하면 너무 추상적으로, 혹은 너무 관념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럴 때 ‘해탈’은 우리에게 아주 까마득한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지 말고 ‘해탈’을 쉽게 바라보면 어떨까.
가령,
방문 앞에 새끼줄이 있다고 하자.
밤에 어두운 방으로 들어가다가 무심코 밟았다.
물컹! 깜짝 놀라 방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아, 그게 뭐였지?
물컹하는 촉감이 아주 기분 나빴는데.
혹시 뱀이 아닐까?’
그렇게 의심하자 잠이 오지 않는다.
밤새도록 뒤척이며 ‘혹시, 뱀이면 어떡하지?’란 생각에 두렵다.
행여 뱀이 이쪽으로 올까 봐, 행여 이리 와서 나를 물까 봐 노심초사한다.
늙음과 병듦과 죽음.
이 모두를 우리는 뱀으로 본다.
맹독을 품은 채 우리를 노려보는 독사로 본다.
싯다르타도 그랬다.
이리저리 피해 보지만 결국 사람은 독사에게 물리고 만다.
그게 인간의 삶이다.
싯다르타는 그런 뱀에게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래서 해탈을 찾았다.
그래도 용기를 내 등불을 켜서 비춰 본다.
그랬더니 눈에 보인다.
“아하, 이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이구나!”
그 순간,
두려운 마음이 싹 사라진다.
순식간에 안개가 걷힌다.
새끼줄과 그 상황만 놓고 보면 그게 ‘해탈의 순간’이다.
새끼줄을 뱀으로 여긴 나의 착각이 풀리고(解),
나를 가두던 두려움에서 훌훌 벗어난다(脫).
이때
“아!” 하는 깨달음이 올라온다.
해탈은 이렇게 찾아온다.
나와 세상에 대한 착각을 이치로 푸는 일, 그게 바로 해탈이다.
#싹을 잘라도 잡초는 올라오네
싯다르타는 기대가 컸다.
웃다까라마뿟다를 만나면 분명 길이 있겠지.
그는 이미 해탈을 이룬 사람이라고 하고, 칭송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인도에서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라고 부른다.
웃다까라마뿟다는 그걸 가리켜 ‘해탈’이라고 불렀다.
그건 진정한 해탈일까.
싯다르타는 웃다카라마뿟다의 수행 공동체로 들어갔다.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수행처에는 싯다르타보다 먼저 출가한 700명의 선배 수행자가 있었다.
싯다르타는 주눅들지 않았다.
스승이 간 곳이면, 자신도 얼마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싯다르타는 수행에 몰두했다. 진전은 무척 빨랐다.
얼마나 세월이 흘렀을까.
싯다르타는 스승의 경지에 도달했다.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경지.
그는 비상비비상처에 들었다.
이번에는 알라라 깔라마의 경지와 달랐다.
그때는 눈을 감았을 때만 고요했고, 눈을 뜨면 시끄러웠다.
지금은 눈을 감든 뜨든,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싯다르타는 짚어보고, 또 짚어봤다.
큼직큼직한 고뇌의 덩어리들은 사그라졌지만, 자잘한 번뇌의 싹은 계속 올라왔다.
화단의 풀을 뽑았는데도 또 올라오고, 분명히 뽑았는데도 또 올라오듯이 말이다.
싯다르타는 직감했다.
번뇌의 바닥을 뚫진 못했다.
뿌리가 남아 있었다.
그걸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건 싯다르타가 찾던 솔루션이 아니었다.
이걸로는 생로병사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풀 수는 없었다.
싯다르타는 단호했다.
그는 스승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생각이기도 하고,
생각이 아니기도 한 한 자리에서는
‘나’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스승께서는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해탈이 아닙니다.
스승님은 번뇌를 다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단호했다.
가차없는 물음이었다.
그것도 스승을 향해서 말이다.
#소가 언덕에게 던진 한마디
불교계에 전해 오는 우화가 하나 있다.
언덕이 있었다.
그런데 소가 와서 자꾸 언덕에 머리를 부딪쳤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다못한 언덕이 소에게 말했다.
“소야, 너는 왜 자꾸 나에게 와서 머리를 부딪치는 거야?”
소를 꾸짖는 말이었다.
그러자 소가 한마디 했다.
“네가 거기에 있으니까 부딪히는 거지, 네가 거기에 없으면 부딪힐 일이 있겠어?”
이 우화가 던지는 울림은 크다.
사람들은 말한다.
삶의 고통이 왜 자꾸 나에게 와서 부딪히는 거지?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가 그렇게 큰 죄를 지었나?
큰 잘못을 저질렀나?
왜 고통은 나에게만 찾아오는 거지?
이 물음에도 소가 말한다.
“네가 거기에 있으니까 고통이 오는 거지. 네가 거기에 없으면 고통이 오겠어?”
삶의 고통은 ‘나’로 인해 빚어진다.
‘나’가 있기에 소가 와서 머리를 들이박고, 고통이 와서 문을 두드린다.
‘나’가 없다면 소가 들이박을 언덕 자체가 없어진다.
그럼 고통도 없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스승에게 물었다.
“생각이기도 하고, 생각이 아니기도 한 자리에서는 ‘나’가 있습니까?”
그 자리에는 소가 들이박을 언덕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그 자리에 가 보니 아직 언덕이 남아 있더라는 말이다.
웃다까라마뿟다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라마뿟다에게 그 물음은 낯선 땅이었다.
한 번도 밟아보지 않은 땅이었다.
답을 할 수가 없었다.
싯다르타는 이미 스승의 자리까지 가 있었다.
그래도 생로병사의 문제를 풀 솔루션은 찾지 못했다.
싯다르타는 웃다까라마뿟다를 떠났다.
자신에게는 마지막 스승이었다.
싯다르타가 찾아가 머물렀던 스승들은 당대에 인도에서 내로라하는 구루였다.
싯다르타는 무도 도장을 찾아다니며
고수를 격파하고 ‘간판 떼기’를 하듯이, 하나씩 스승의 경지를 뛰어넘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해탈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자신도 그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싯다르타는 고민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출처:중앙일보] 백성호:종교전문기자
짧은 생각
인도의
고대 브라만교에서는
우주의 본질을 가리켜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걸
한자로 옮기면
‘범(梵)’자가 됩니다.
발음이 어쩐지
귀에 익지 않나요?
불교에서는
‘범행(梵行)’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음행을 끊고
해탈을 지향하는,
우주의 본질을 좇는
출가 수행자의
바람직한 삶을
‘범행’이라고 부릅니다.
브라만교의 경전은
‘베다’입니다.
이들 경전을 가리켜
‘브라흐마나(Brahmana)’라고
불렀습니다.
우주의 본질을
담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인도 카스트 제도의
가장 높은 계층을
‘브라만’이라고 하잖아요.
이것도
발음이 비슷하지 않았나요?
맞습니다.
브라만 계급은
제사를 주관하는
제사장 계층입니다.
어려서부터 이들은
방대한 양의
베다 경전을
줄줄이 암송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들을 사실은
‘브라흐마나(Brahmana)’라고
부릅니다.
경전을 가리키는 말과
경전을 외우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똑같습니다.
다만,
한글로 쓸 때는
오랫동안
카스트 계층을
‘브라만’이라고
써왔습니다.
인도의 힌두교에는
가장 중심이 되는
세 신(神)이 있습니다.
창조와 유지,
그리고
파괴의 신입니다.
창조-유지-파괴는
이 우주가 돌고 도는
이치입니다.
그런 이치를
신의 이름을 빌려
대상화한 것입니다.
창조의 신은
브라흐마,
유지의 신은
비슈누,
파괴의 신은
시바입니다.
이 중에서
현대 인도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은
비슈누입니다.
그다음이 시바,
마지막이 브라흐마입니다.
왜 그럴까요?
브라흐마는
창조의 신인데
왜 상대적으로 인기가
낮을까요?
인도 사람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주의 창조는
이미 이루어졌다.
브라흐마 신은
더 할 일이 별로 없다.
반면,
끊임없이 변하는 이 우주를
유지하는 비슈누 신은
할 일이 무척 많다.
우리에게도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비슈누 신이
가장 인기가 많다.
파괴의 신 시바도
믿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시바 신은 비슈누 신보다
더 무서울 때가 있다.
비슈누 신은 절대
화를 내는 법이 없다.
시바 신은 다르다.
그는 파괴의 신이니까.”
브라흐만과 브라흐마,
브라만과 브라흐마나.
인도의 역사와 철학,
종교를
알아가다 보면
참 어려운 용어입니다.
발음도 비슷비슷해서
헛갈리기 참 쉽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담긴 뜻은
이렇게 차이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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