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의 시대적 소임
- 극소수 창조자로서의 역사인식 -
엄창섭
1. 공동체 의식과 언어의 분별력
모름지기 비열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각박한 삶의 처소에서 ʻ조
금은 천천히ʼ라는 ʻ미끄러짐의 미학ʼ을 지니되 직면하는 현상 앞에
서 여유로움을 지녀야 한다. 정치적으로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의
보복정치는 말끔히 청산되어야 하고, 혼돈의 시간대일수록 언론
의 행태 또한 신속·정확·공정성의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그간
에 소용돌이치는 우리 현대정치사의 흐름에 있어 국가 통수권자
들의 노후는 비참하게도 다수의 국민들에게 ʻ존재의 가벼움ʼ을 뼈
저리게 체득시켰다. 이제 원시종교에서 제단을 쌓을 때, 자연석
이나 흙을 사용하였듯이 더 이상 금속성이거나 동물적인 언어공
해를 폭력, 살생의 도구로 사용되지 않도록, 생명경외의 존귀함
과 순수서정을 확립하기 위하여, 모름지기 이 땅의 문인들은 푸
른 식물성 언어로 가시나무 새처럼 최후의 찬란한 울음을 토해야
한다. 비록 자신의 신념과 결단에 의해 자처한 그 일이 밝은 미래
사회를 위해 정의로운 일이라면 자괴감으로 포기하지 말고 지대
한 삶의 교시로 명증시켜야 한다.
김준태 시인의 ʻ어릴 적엔 떨어지는 감꽃을 셌지/전쟁 통엔 죽
은 병사들의 머리를 세고/지금은 엄지에 침을 발라 돈을 세지/그
런데 먼 훗날엔 무엇을 셀까 몰라(감꽃).ʼ 처럼, 시적 유의성을 통
하여 피조물인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을 다음과 같이 ʻ공동의 세
계가 무너져 믿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ʼ라고 확인시켜준
폴 틸리히의 현대의 특징을 되 뇌여 보아야 한다. 절망의 끝이 보
이지 않는 후기산업사회는 쉽게 끊어버릴 수 없는 인연의 실타래
로 얽혀있기에, 피곤한 영혼과 가슴을 적셔 줄 감동의 눈물이 메
말라 가는 것은 안타까운 현상이다. 인간소외로 고통 받는 오늘
의 사회에서 아름다운 동행이란, ʻ함께 우산을 쓰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행위임ʼ을 절감하여야 따뜻한 감성의 문인에게 있
어서도 의학계가 제시한 체내의 호르몬 중에 엔도르핀이 항암치
료와 통증해소에 효과가 있지만, 감미로운 예술작품을 접하거나
종교의 신비성을 체험할 때, 엔도르핀 4,000배에 이르는 다이도
르핀(dydorphin)이 생성되는 것을 감지해야 한다. 소중한 삶의 일
상에서 아름다운 대상의 경이로움에 압도되거나 새로운 진리를
터득하고, 사랑의 감미로움에 빠져들어 체내에 변화가 주어질 때
반응이 없던 호르몬 유전자가 활성화되어 엔도르핀, 도파민, 세
로토닌 등이 생성된다. 우리는 신선한 감동을 불러 일깨우고 영
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로제토 효과나 테레사 효과(Teresa effect),
그리고 시적 치유(治癒)의 가능성을 체험케 되어 ʻ한 순간 분노가
치솟아 오를 때, 좋은 기억이나 아름다운 시구(詩句)를 떠올리면
마음에 평정을 얻을 수 있다.ʼ는 노만 빈센트 필(ʻ희망은 어둠을 저주
하는 것이 아니요, 촛불을 밝히는 것이다.ʼ)의 지론을 수긍해야 한다.
2. 인식의 전환과 행복한 공간 만들기
우리는 지리적 환경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형성된 삶의 방식
에 대한 대외지향적인 주체의식을 확고하게 다지는 정체성 확립
은 더없이 소중하다. 정체성(Identity)이란, 동일 집단내의 구성원
들이 공유하는 소속감, 동질감, 자부심의 총체적 개념을 뜻하는
것이지만, 생활정서와 뿌리의식(Roots Consciousness)을 근간으로
한 실존적 가치, 이익, 미래를 보장하는 의지적 총체성은 행복한
공간 만들기와 연유하여야 한다. 일단, 몸담은 공간과 시간대에
관심을 지녀야 할 문인들은 창조적 상상력으로 산업 쓰레기 같은
정신적 생산물을 배출하지 말아야 한다. 까닭에 ʻ신의 나라는 열
매를 팔지 않는 속성ʼ을 인식하여, 무한 경쟁이 요구되는 후기산
업사회에서 역사와 문화를 근거로 고유성, 문화성, 수월성 등의
측면에서 고정 틀을 깨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여야 한다.
비열한 이기주의 시대에 몸담고 있는 대다수의 문인들은 공동체
의식의 새로운 문학적 토양의 구축과 함께, 창조적 정신으로 미
래의 시간대를 긍정적으로 수용하여야 할 시대소임을 지니고 있
다. 따라서 문화의 지역구심주의에 있어 도전 ․ 실험정신을 지니고
허락된 조건을 생산적으로 전환시키어 소외된 이웃을 향해 경계
를 허무는 작업을 지속하여야 한다.
이 같은 현상은 문화에 대한 안목의 확장과 변화 ․ 발전을 위해
성숙된 삶의 추세로 변형시켜야 한다. 특히 비정한 시장의 논리
에 지배받는 현대사회는, 인간이 신 대신에 등장하고 신은 퇴위
한 시간대이다. 불확실의 현대사회에서 ʻ본질적으로 인간은 과연
진정한 인간으로서의 존재인가?ʼ라는 물음에 부정적으로 답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이나 질병으로 인한 인간소외의
상황에서, 모든 것을 거대화하는 것만이 좋은 변화의 방향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ʻ작은 것이 아름답다(the small is beautiful)ʼ
는 슈마허의 지론을 인간성 회복으로 해석할 수 있기에, 공장과
기업, 학교사회와 대중매체도 다원화 특수화되어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키고 있기에 냉소적인 시장원리가 지배하는 사회현상에서
삶의 편리성을 새로운 과학기술 혁명이 주도하는 것도 중요하지
만, 삶의 일상에서 <소녀와 카나리아>와 같이 가슴을 따뜻하게
조성하는 감동의 회복이 상처 받은 영혼을 치유시키는 상관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한편, 경제적 어려움이 극심한 시간대에서 메세나 운동의 보편
화를 강조하지 않더라도, 지역마다 다채로운 문화의 지역구심주
의(local centripetalism) 양상이 현저한 점은 높이 살 일이기에, 이
제는 중앙권 중심의 문화 흉내 내기에서 과감하게 이탈하여야 한
다. 차지에 양심 있는 이 땅의 문인들이 저마다 분별력을 지니고
한국문학의 발전을 위해 미래지향적인 대책을 탐색하는 과정에
서, 일단은 단위 문학의 활성화와 회원 상호간, 그룹과 그룹간의
조직적이면서도 우호적 상호관계의 제도화가 절실히 요청된다.
러시아의 농민작가 레르몬또프가 진리를 탐구하는 정신을 끝까지
선명하게 반영시켜 ʻ러시아 문학을 가장 러시아 문학답게 만들었
듯이ʼ 우주적 현상을 객관화해야 할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은 높은
식견으로 직면하는 일상에 관심을 지니며 종교개혁자 훗스의 올
곧은 자세로 ʻ진실 위에 서서, 진실을 말하며 진실을 위해 죽으리
라.ʼ는 시대적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하여야 한다. 언어공해의 심
각성이 극심한 사회에 있어 정신작업에 종사하는 맑은 영혼의 소
유자들은 내적 빈곤에서 오는 절대고독이 아니라, 자기성찰에서
비롯되는 ʻ홀로 서기ʼ 즉, 사유(思惟)의 시간을 지니어, 한 순간 치
솟은 격한 감정의 폭발에서 기인한 언어의 횡포를 차분하게 수용
하여야 한다. 이 점에 있어 사족 같지만 ʻ예술에는 국경이 없지
만, 예술가에게는 조국이 있다.ʼ는 필자의 소신은 물론이거니와
몇 년 전 미국의 럭키산맥 촌락을 지나칠 무렵, 양파 20개의 값
은 비록 20센트였으나, ʻ한꺼번에 파는 것은 자신의 삶을 파는 행
위와 같아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없기에 몇 개 씩 팔기를 원한다.ʼ
라던 인디언 노인의 말은 기억 흔적에 오래 남아 있다. 모름지기
공동의 세계가 무너진 불확실한 시대에 생존하고 있는 우리에게
요청되는 소중한 것은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관계의 지속성이다.
사회구조 속의 인간관계는 대립과 갈등구도의 지속이 아닌 용서
와 화해와 사랑의 연(緣)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 모파
상의 단편소설 <한 오라기의 끈>에서 주인공 오슈꼬른이 말랑 뗑
에 대한 증오를 버리지 못하여 끝내 혈액이 응고되어 심장병으로
인해 죽음을 맞는 비극은 교시적(敎示的) 의미를 안겨준다. 이제
우리는 어떤 직업에 종사하던 신지식인의 사고와 경영마인드를
지니고 목숨의 시간을 관리하여 신뢰를 구축하는 정신작업에 깊
은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몰두하며, ʻ무관심이 죄악이라ʼ는 사
실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3. 시대적 소임과 국어인식의 소중함
국가적으로 문화인식에 대한 쌓기와 허물기를 반복해야 할 우리
가 조직의 구성원으로, 미적주권을 상실했을 때 그것은 언어공해
의 요인을 제공하는 인자(因子)가 된다. ʻ고통을 통해 얻어진 것은
진실한 것ʼ이기에,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을지라도 사고가 열려 있
는 식별력을 지닌 문인으로서의 ʻ고구려의 어머니들ʼ처럼 역사인
식을 엄숙히 지녀야 함은 물론, 주제의 창의성을 위해 고뇌하는
작가정신이 눈부신 자로서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나 센
케비치의 등대지기(작은키나무, 2006)와 같이 모국어에 대한 애정
을 대륙의 심장에 간직하여야 한다. 차지에 문명비평의 전형적 시
인 김광섭의 <성북동 비둘기>를 통하여 찌든 문명의 피해로 평화
의 표징인 비둘기가 삶의 공간을 강탈당하고 인간 또한 정서적인
휴식공간을 상실하고 있는 일상적 삶을 통해 마침내 그 현장을 발
견하게 된다. 후기산업사회가 인간의 삶을 편안한 방편으로 몰아
가지만 궁극적으로 자연의 파괴와 온갖 공해로 생명체인 ʻ가이아ʼ
가 건강을 상실하고 온갖 질병으로 절명하는 현상은 인류가 운명
적으로 담당하고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엄연한 사실이다. 모름지
기 더 이상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은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자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는 비열한 이기심을 버리고 진정한 이타정신을 회
복하기 위해 문학에 대한 열정을 쏟아야 한다. 자연과 인간, 그리
고 모든 생명체가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에코토피아적 상생 의지로
감성과 피가 도는 문명사회로의 치환(置換)을 수행하여야 한다.
아울러 이 시대의 주요 논의인 기계문명과 자연의 부조화로 파
생되는 인간성의 상실과 자연 파괴로 치닫는 전쟁을 극복하려고
반전 시위 현장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선행되
어야 할 조건이라면, 먼저 정쟁의 원인에 대한 분석과 문제점의
해결을 위한 진지한 노력과 합리적으로 평화를 갈구하는 문인들
이 공감대를 이루는 두터운 층을 형성한 힘의 총합이다. 간혹 인
간의 마음은 밭에 비유되는데, 그 밭에 긍정적인 씨앗(기쁨, 사랑,
이해, 즐거움, 희망)이거나 부정적인 씨앗(분노, 미움, 절망, 시기, 집착)을
뿌리고 물을 주고 경작하여 결실을 거두는 것은 문인의 몫이다.
자명한 것은 신의 나라에서는 열매(결실)를 팔지 않고, 씨앗만을
판다는 것이다. 특히 반세기 넘게 겪는 한 ․ 일 간의 갈등의 문제
는 예술문화를 통한 신선한 감동에 의해서 해소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 고로후 지방은 포도의 명산지이듯, 필자의
향리에도 질 좋은 감(紅柿)이 생산된다. 마치 ʻ강릉의 홍시를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의 영혼은 별나라에 갈 수 없다.ʼ는 말이 보편화
될 수 있도록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발상전환이 요청된다. 미래사
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나 기업, 그리고 개인은 미래상품
을 개발하여야 하고 그 동력이 시적 상상력의 확장임은 기억할
일이다. 차지에 세계고(世界苦)를 함께하는 정신작업의 종사자들인
ʻ승려와 시인이 살이 찐다는 것은 그 시대가 불행하다.ʼ는 인도의
격언이나, ʻ사회가 썩어 문드러져 똥밭에 나뒹굴지라도 시인은 눈
부신 시의 꽃을 피워야 한다.ʼ는 존 러스킨의 지론을 되 뇌이며,
2~3%의 염분이 오염된 바다를 정화시키듯, 향리를 사랑하는 일
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통섭(通涉)의 차원에서 맑은 영혼의 치유
에 주의 집중한 ʻ극소수의 창조자ʼ들은, 건강한 비판정신의 틀 위
에 민족의 역사요, 혼인 국어를 생명의 기표로 하여, 행복한 언어
의 집짓기를 높은 자유와 미래를 지향하여 존귀한 생명의 꽃으로
피워내는 창조 작업을 수행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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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섭 시인, 관동대 명예교수, 국제펜클럽한국본부 고문
강원도 강릉 출생.
성균관대 대학원 졸업(문학박사).
《시문학》등단.
한국시문학회 회장. 한국문예비평학회 부회장. 심연수시인 선양위원회 위원장.
국제펜클럽한국본부 이사.
관동대학교 교무처장, 대학원장 역임.
관동대학교 교수.
한국현대시인협회상, 후광문학상, 서포문학상, 허균문학상, 김동명문학상, 흰돌문학
상, 순수문학상, 동포문학상, 강원도문화상(문학), 강원펜문학상, 한국기독교문화상,
관동문학상, 강릉예술인상, 문화공보부장관상, 문교부장관상, 국무총리 표창 수상.
황조근정훈장 수훈.
시집 바다와 해, 생명의 나무, 다시 비탈에서 등 9권
저서 문화인식의 현상과 이해, 문예사조론, 김동명문학 연구, 현대시의 현상과 존재론적 해명 외 10권.
E-mail: eomcs@kd.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