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토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깨달음과 수행] <31> 최성렬
“깨달음은 중도.사성제.연기 실천하는 것”
끊임없는 수행이 곧 깨달음…서로 분리돼선 안돼
공중의 새가 날개짓 멈추면 추락하는 것과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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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부처님이 중도.팔정도 등의 가르침을 편, 인도 바라나시 근교 사르나트의 초전법륜지에 있는 다메크대탑. |
“물이 차고 더운지는 직접 마셔보아야 안다.(如人飮水 冷暖自知)” (〈혈맥론〉, 〈대혜서장〉 答 李參政 第二書) 그렇다고 바닷물의 맛을 알기 위해 사해(四海)의 물을 다 마셔볼 수는 없지 않는가. 깨달음과 수행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깨달음이나 수행에 대한 이력(履歷)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그래서 이 문제에 가타부타(是也非也)를 거론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것을 몸소 체험한 사람만이 대답할 수 있다면 과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비록 바닷물을 다 마셔 보지는 못했지만 그 물맛이 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왈시왈비(曰是曰非)에 끼어든들 무슨 문제가 있으랴 하는 생각에서 이 글의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말았다.
흔히 불교는 깨달은 이의, 깨달음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깨달음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수행을 함께 토론함으로써 “깨달음에 대한 담론(談論)을 보편화하는데 공헌했다”는 평가는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이의 깨달음과 그 수행’을 논의의 중심에 세우되 역사성과 사상성의 한계를 분명히 했어야 했다. 그래야만 심도(深度)있는 토의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의 진행 상황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이 기획토론의 중간점검에서 지적되었다. 그 중의 하나가 초기불교와 대승불교의 깨달음을 동일시한 것은 귤화위지(橘化爲枳)나 다를 바 없다는 지적으로 이해된다.
“5비구들이여, 이 두 가지 치우친 행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취하면 밝음을 이루고, 지혜를 이루며, 정(定)을 성취하여 자재(自在)를 얻고,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 중도란 이른바 팔정도(八正道)이니, 바른 소견(正見)과 내지 바른 정(正定)으로서 이것을 여덟 가지 바른 길이라 하느니라.”(〈중아함경〉 제56권, 204. 라마경 제3)
고행이나 욕락이라는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하여 지혜를 이루었다는 자신의 체험을 5비구를 상대로 설한 부처님의 최초설법, 이른바 초전법륜(初轉法輪)의 한 대목이다. 비록 몇 구절에 불과하지만 “한 티끌 속에 시방 세계를 머금듯이(一微塵中含十方)”,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핵심을 한꺼번에 유기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어째서 그럴까.
“중도를 취하면 밝음을 이루며, 정(定)을 성취하여 자재(自在)를 얻고, 지혜로 나아가고,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한 것이 그 이유가 될 법하다. 곧 밝음.자재.지혜.깨달음.열반, 이 모두가 중도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근거로 하여 깨달음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밝힌다면 그것이야말로 ‘깨달은 이의 깨달음에 관한 가르침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도란 이른바 팔정도”라는 사실을 먼저 상기해 둘 필요가 있다. 초전법륜을 중도설법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위의 인용문만이 아니라 〈중아함경〉 제43권, 〈구루수무쟁경〉 제8에도 “정견(正見) 내지 정정(正定)이 8지(支)이니라, 이를 일컬어 중도라고 한다.”고 한 것 등 곳곳에서 거듭 확인된다.
더구나 고행이나 욕락과 같이 양 극단을 버리는 중도는 이론적인 중도가 아니라 실천중도(實踐中道)라는 것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안이다. 그리고 이 팔정도가 사성제(四聖諦)의 체계 속에서 설해지고 있음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논의의 대상에 제외될 수 없는 것이라면 아는 것일지라도 다시 확인하는 약간의 번거로움은 감수해야 할 줄 안다.
“네 가지 성제(聖諦)가 있으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괴로움(苦).괴로움의 집(古集).괴로움의 멸(苦滅).괴로움의 멸에 이르는 도(苦滅道)가 곧 그것이다.”〈잡아함 권15〉
이처럼 고성제.고집성제.고멸성제.고멸도성제의 네 가지 거룩하고 신성한 진리를 고.집.멸.도의 사성제라고 한다. 그래서 이 사성제는 중도이면서 연기사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처음의 고(苦)와 집(集)은 생사유전(生死流轉)하는 현실의 고(苦)와 그 원인을 말한 유전문(流轉門)이고, 멸(滅)과 도(道)는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 무고안온(無苦安穩)한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환멸문(還滅門)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사성제를 이해한다면 비현실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것은 의미가 상실되고 만다. 그래서 깨달음의 공능(功能)에 대한 논의로 이 토의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깨달은 부처님 스스로가 “삼명(三明)을 갖춘 바라문으로서 한 사람이라도 범천(梵天)을 본 사람이 있는가.〈장아함 권16 삼명경〉” 라고 한 것이나, 만동자(蔓童子)의 질문에 답한 ‘독화살의 비유’에서 그 해답이 밝혀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지혜를 삼먁삼보리, 곧 정등정각(正等正覺)이라고 한다. ‘정등(正等)’의 ‘정(正)’은 사(邪)됨이 없다는 것이고, ‘등(等)’은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평등, 곧 편지(偏智)가 아니라는 말이다. 부처님은 바로 그런 지혜를 정각(正覺)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부처님의 지혜보다 더 수승한 지혜는 없다는 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라 부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의 지혜를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철저하게 현실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고 알았다는 것이다.
결국 중도를 취함으로써 지혜를 완성하고, 자재를 얻으며, 깨달음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나아간다고 한 것은 최상의 상태, 즉 정각(正覺)으로 나아가는 방법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중도는 정각.지혜의 완성.자재.깨달음.해탈.열반과 동일한 개념으로 확대 전개되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이란 결국 중도의 취향(趣向)이요, 사성제의 여실지견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연기법의 깨달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렇게 중도.사성제.연기로 파악한다면 부처님의 수행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까. 이 역시 중도를 취함으로써 궁극의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수행이 곧 깨달음이라는 결론도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는 삼론종(三論宗)의 근본교의인 파사현정(破邪顯正)과 다를 바 없다. 파사와 현정을 따로 볼 것이 아니라 파사즉현정(破邪卽顯正)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리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화엄경〉이나 〈열반경〉에서 말하는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과도 다를 바 없고, 또 후대 선종에서의 즉심즉불(卽心卽佛)도 결국은 한결같이 이런 논리의 다른 한 면(面)일 뿐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더럽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청결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근본불교에서의 깨달음과 수행이라는 문제를 초전법륜의 한 장면을 인용하여 정리해 보았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은 내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닐지라도 내가 그것을 구매했다면 그것은 내 소유인 것이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글의 마무리를 위해 다시 근본적인 문제로 되돌아 가보자.
깨달음이 무엇이며, 수행은 또 무엇인가. 왜 우리는 깨달아야 하며, 깨닫기 위해서는 왜 또 수행이 필요한가. 이는 부처님의 출가동기와 직접 연결되고 나아가 오늘 우리들의 삶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 문제이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이것이 없음으로써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함으로써 저것이 멸한다.(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는 것은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문제이다.
그렇더라도 그러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존재(存在)의 상의상관성(相依相關性)을 인식하고 있더라도 그러한 삶의 태도나 유지를 위한 최선의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삶의 의의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삶에 대한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 깨달음이요, 또한 수행이 아닐까. 깨달음과 수행의 분리는 추락(墜落)이요, 정지(停止)일 뿐이다. 공중을 나는 새는 잠시도 날개 짓을 멈추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날개 짓이 없는 비행은 있을 수 없다.
최성렬 / 조선대 철학과 교수
[출처 : 불교신문 2086호/ 12월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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