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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달샘 <32> 화폐 이야기 (11) 한국의 돈 100원 주화 ④ / 이순신 장군의 25전 25승 무패 ⓑ
이전 글(옹달샘 <31>) ‘이순신 장군의 25전 25승 무패’의 계속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제3차 출정을 마치고 귀환한 후 1년 1개월 동안 이순신 장군은 연전연승했으면서도, 조금도 방심, 나태하지 않고, 군량미와 전선 등을 철저히 준비한 것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발발 이래 전라도 바다로는 일본 수군이 단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다. 그동안 9회의 해전은 모두 경상우도 바다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9회의 연승을 통해 일본 수군은 대청소가 돼버린 것이다. 아마 지금도 이 해역의 바닥에는 일본 수군의 해골들이 가득 쌓여 있을 것이다. 이 즈음에 일본 수군은 경상우도(지금의 경남 남해)로는 단 한 척의 척후선마저 띄울 수 없었다. 일본 수군은 이순신 공포증에 걸려서 서쪽으로는 나오지 못하고, 부산 앞바다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제4차 출정(1592년 8월 24일-9월 2일)을 하는 이순신 장군의 머릿속에는 이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으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난중일기(亂中日記)』를 보면 장군은 장기전(長期戰)을 준비하고 있었다. 수군의 승리만으로 종전(終戰)이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산 앞바다로 향하는 이순신 장군의 심정은 그야말로 비장(悲壯)했을 것이다.
여기서 제4차 출정의 전장(戰場)인 부산 앞바다의 해전을 앞두고 부산(釜山)을 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당시, 오늘날의 부산(釜山)은 부산이 아니라, 동래(東萊)였다. 지금은 부산시에 속한 동래구이지만, 1910년 이전에는 부산이 아니라, 부산은 ‘부산진(釜山鎭)’이라는 하나의 진영(鎭營)으로서 동래현(東萊縣)에 속해 있었다.
조선의 지방행정조직은 1413년(태종 13년) 한반도를 8개의 도{그래서 ‘조선팔도(朝鮮八道)’, ‘팔도강산(八道江山)’ 같은 말이 있음}로 분할하고, 다음과 같이 나누었다. ‘① 도(道) - ② 부{府 : 한성부(漢城府 : 수도), 유수부(留守府 : 수도 방어하는 도시), 대도호부(大都護府, 지방대도시), 도호부(都護府)} - ③ 목(牧) - ④ 군(郡) - ⑤ 현(縣) - ⑥ 면(面) - ⑦ 리(里) - ⑧ 통(統)’. 그 각 우두머리 직책은 도는 관찰사(觀察使), 부는 부윤(府尹) 또는 부사(府使), 목은 목사(牧使), 군은 군수(郡守), 현은 현령(縣令) 등이다.
옛날에 부산 지역은 거칠산{居漆山 : 지금의 황령산(荒嶺山)}을 딴 ‘거칠산국(居漆山國)’에서 나온 ‘거칠산군(居漆山郡)’이었다. 7세기 통일신라 때인 제35대 경덕왕(景德王, ?-765, 재위 742-765)이 ‘거칠산군(居漆山郡)’을 ‘동래군(東萊郡)’으로 개칭했고, 고려 때인 1018년에는 ‘동래현(東萊縣)’으로 격하되어 울주군(蔚州郡)에 속하게 되었다.
1397년(태조 5년) 조선 태조(太祖, 1335-1408, 재위 1392-1398)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동래현(東萊縣)에 소속된 진(鎭)을 설치했는데, 이것이 ‘부산진(釜山鎭)’이다. 그러므로 ‘부산(釜山)’이라는 지명보다 ‘부산진(釜山鎭)’이라는 지명이 먼저이다. ‘나루 진(津)’은 ‘교통상의 나루터’이지만, ‘진압할 진(鎭)’은 ‘적을 막아내기에 유리한 지형을 가지고 있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뜻이다. 조선 태조는 일본의 침입을 대비하여 지금의 부산시 동구 좌천동(佐川洞)에 성을 축조하고 그 이름을 ‘부산진성(釜山鎭城)’이라고 했다. 이렇게 ‘부산(釜山)’이라는 명칭이 처음 생긴 것이다. 어떤 이는 부산의 원래 이름이 ‘산이 많다’는 뜻의 ‘부산(富山)’이었다고 하나, 그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이다. 또 어떤 이는 부산 지명을 일본인 누군가가 붙였을 것이라고 하나 전혀 맞지 않은 억측이다.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것은 좌천동의 ‘증산(甑山)’이다. ‘(떡)시루 증(甑)’이다. 태조 당시에 바다에서 좌천동의 증산(甑山)을 바라보니 ‘가마솥’ 같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마 부(釜)’, ‘부산(釜山)’이라고 했다. 태조 이전 사람들은 그 모양이 떡시루 같이 보였으나, 태조 또는 태조 때 누군가의 눈에는 그것이 가마솥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떡시루와 가마솥은 그 모양이 사촌쯤 된다. 떡시루가 가마솥이 된 것이 ‘부산(釜山)’이다. 지금의 감만동-우암동-문현동-범일동-좌천동-수정동-초량동으로 이어지는 해안의 앞바다가 ‘부산포(釜山浦)’이다. 매립(埋立)된 지금의 부산항과는 달리, 당시에 다른 곳은 경사가 심했으나, 좌천동 쪽은 배가 접안(接岸)하기가 좋은 곳이었기 때문에 이곳에 부산진성이 건축되었던 것이다. 증산 정상에는 바다 쪽의 왜적을 살피기 위한 망루(望樓)로서 ‘부산진지성(釜山鎭支城)’이 따로 건축되었다. 부산진성의 본성을 모성(母城), 지성(支城)을 자성(子城)으로 부르다가 ‘자성대(子城臺)’라는 명칭이 생겼다. 도시화 과정에서 부산진성이 사라졌고, 주위 산도 깎여 없어졌다. 부산진성이 없는 현재, 자성대(범일동 소재)는 ‘부산(釜山)’이라는 지명의 근원(根源)이기 때문에 중요한 곳이다. 또 여기에 오른 사람은 임진왜란 발발 때의 정발 장군의 애국적인 죽음과 이곳을 통해 조선팔도를 유린한 왜적에 대한 비분강개(悲憤慷慨)와 비장(悲壯)한 심정으로 왜란을 끝내고 싶어 했던 이순신 장군의 부산해전 승리를 되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1547년(명종 2년) 동래현은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로 승격되었고, 1592년(선조 25년) ‘동래현’으로 격하되었다가, 1895년(고종 32년) ‘동래부(東萊府)’로 승격되었으며, 일제강점기인 1910년 동래부는 ‘부산부(釜山府)’로 개칭되었고, 1914년 동래부의 남은 지역은 동래군으로 격하, 분할되었다.
1925년 경상남도 도청이 진주부에서 부산부로 이전되었고, 1949년 부산부가 ‘부산시(釜山市)’로 개칭되었으며, 1957년 동래군 일부가 부산시 속의 ‘동래구(東萊區)’가 되었고, 1973년 동래군의 더 많은 지역을 부산시에 붙여주고, 동래군은 양산군에 흡수되면서 단독 도시로서의 ‘동래(東萊)’라는 이름은 없어졌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부산, 즉 동래는 동래부가 아니라 동래현이었다. 과거 동래부였던 점 때문일까?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을 ‘동래현령(東萊縣令)’이라고 하지 않고, ‘동래부사(東萊府使)’로 호칭되고 있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그의 순국 후 부사(府使)로 추증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으나,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송상현은 사후에 곧장 부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얼마 후에는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었기 때문이다. 동래는 ‘동래현’이라고 표기하고, 송상현은 ‘동래부사’로 표기하면 이상해진다. 연구 과제거리이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현의 수영(水營)에 경상좌수영 본영이 있었다. 처음에 경상좌수영 본영은 태조 이래 부산포, 즉 부산진성에 있었으나, 태종 때 울주군(蔚州郡, 지금의 울산시)의 개운포(開雲浦)로 옮겨졌다가, 1590년(선조 23년) 동래현 남촌{南村, 현재의 수영(水營) :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의 줄인말}으로 옮겨진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현에는 경상좌수영과 7개의 진(鎭)이 있었다. 부산포(釜山浦)의 부산진(釜山鎭)과 다대포(多大浦)의 다대진(多大鎭)이 7개 중의 2개였다.
당시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의 전선 700여 척과 약 18,000 병력이 1592년 4월 13일 무방비 상태에 있던 절영도{絶影島, 지금의 영도(影島)}에 상륙하여 조선의 방어 상황을 확인한 후, 두 부대로 나누어 다대진과 부산진을 공격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다대진(多大鎭)의 다대진성(多大鎭城)을 진격하자 군졸들은 다 도망하고, 다대첨사(多大僉使) 윤흥신{尹興信, ?-1592 : 인종 때 찬성 윤임(尹任, 1487-1545)의 아들. 이분의 일생은 정말 드라마틱함} 혼자서 밀려드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며 분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했다. ‘첨사(僉使)’란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줄임말로서 진영(鎭營)의 책임 장수였다.
그 날 부산진성(釜山鎭城)을 공격한 왜군은 성의 방어가 너무 삼엄하여 일단 후퇴했다가 이튿날인 1592년 4월 14일 우회하여 측면을 돌파했다. 정발{鄭撥, 1553-1592 : 좌찬성으로서 선조의 의주 몽진(蒙塵)을 호종했고, 1597년 선조에게 신원하여 투옥된 이순신을 복권시킨 정탁(鄭琢, 1526-1605)의 동생}도 분전했으나, 역부족으로 장렬히 전사했다. 아래 그림은 영조 때의 화원 변박(卞撲, ?-?)이 ‘부산진성전투(1592년 4월 14일)’를 묘사한 것이다.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 때 화원 변박(卞撲, ?-?) <부산진순절도(釜山鎭殉節圖)>>(1760년작,
비단에 전통 채색, 145×96cm, 육군사관학교박물관)
그러나 경상좌수사 박홍(朴泓, 1534-1593)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배를 버리고 달아나, 선조에게 부산진성이 함락되었다는 장계(狀啓)를 올렸다. 이순신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사람이다.
수군의 장수로서 수사(水使), 즉 경상우수사, 경상좌수사가 있듯이, 육군의 장수로서 병사(兵使), 즉 경상우병사, 경상좌병사 등이 있었다. 경상우병영(慶尙右兵營)은 진주(晉州)에 있었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는 유숭인(柳崇仁, ?-1592 :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 함안군수였으나, 잘 싸운 공으로 경상우병사로 승진해서 포위당한 진주성을 구하기 위해 성외로 나가 싸우다가 전사했음)이었다. 경상좌병영(慶尙左兵營)은 울주(蔚州, 지금의 울산)에 있었고,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는 이각(李珏, ?-?)이었다.
쉽게 다대진성과 부산진성을 함락한 왜군은 물밀 듯이 동래성(東萊城)으로 쳐들어갔다.
경상좌병사 이각(李珏, ?-?)은 임진왜란 발발 당시 송상현과 함께 동래성에 있었는데, 왜군이 몰려온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송상현에게 잘 방어하라고 하고는 적을 협격(挾擊 : 협공)하러 간다면서 나가 도망쳤다. 그러니 경상좌수영 본영인 수영성(水營城)은 왜군이 총 한 방도 쏘지 않고, 손에 넣었다. 이 사람도 송상현과는 너무나 대비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 일본은 세종 이래 조선 임금에게 진상품(進上品)을 종종 바쳐왔다. 1589년(선조 22년) 일본의 무장(武將)이자 대마도주(對馬島主)인 소 요시토시{宗義智(종의지), 1568-1615}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밀명에 따라 일본 사신으로 조선에 와서 선조에게 조총(鳥銃)과 공작(孔雀)을 진상품(進上品)으로 바쳤다. 선조는 조총은 받기로 하고, 공작은 돌려보내려고 했으나, 외교상의 결례라 하여 할 수 없이 받은 후, 공작은 제주도로 보냈다. 이것이 ‘공작의 유배사건’이었다. 그 조총은 협박용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조선 조정은 1590년(선조 23년) 조선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했던 것이다. 또 1591년(선조 24년)에는 승려 겐소{玄蘇(현소), ?-1612}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신으로 ‘조선을 복속시켜라’는 밀명을 받고 조선에 와서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征明假道(정명가도)’라는 글을 내놓았다.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길을 비켜주시오’라는 뜻이다.
‘明(명)’ 대신에 ‘韓(한)’을 넣으면 바로 ‘征韓(정한)’이다. 이것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한론(征韓論)’이다. 어떻게 감히 이웃나라를 정복(征服)한다는 말을 글로 나타내고 이론화한다는 말인가? 정말 고약해서 분노가 치민다. 만일 어떤 작자가 이웃집을 법 없이 제멋대로 정복하느니, 빼앗느니, 내 것으로 만들겠다느니 하면서 말과 글로 공론화하고 다니면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법적으로 처리하든지, 아니면 그를 능가하는 힘을 길러 보여주면서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래도 일을 벌이면 길러놓은, 압도적인 힘으로 혼내줘서 그 나쁜 버릇을 버리게 해야 한다. ‘정한론(征韓論)’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임진왜란(1592-1598)과 일제강점(1910-1945)으로 나타났다. 요즘 일본 우익 가운데에는 ‘신정한론(新征韓論)’이 대두되고 있다고도 하니 기가 막힐 일이다.
1592년(선조 25년) 4월 14일 동래성 문 앞에 이른 왜장이 ‘戰則戰矣 不戰則假道)(전즉전의 부전즉가도)’라는 글을 써서 세웠다.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비켜라’라는 뜻이다. 1년 전 일본 승려 겐소가 내놓은 글 ‘征明假道(정명가도)’ 그대로였다. 그러나 부사{府使 또는 현령(縣令)} 송상현(宋象賢, 1551-1592)이 ‘戰死易假道難(전사이가도난)’이라는 글을 내걸었다.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라는 뜻이다. 그리고 송상현은 왜장이 세운 팻말을 향해 활을 쏘았다. 겁을 집어먹고 달아난 자도 있었으나, 송상현의 지휘 하에 군관민이 하나가 되어 왜적과 싸웠다. 끝내 동래성은 함락되었다. 조복(朝服)을 갈아입은 송상현은 단정히 앉은 채로 적의 칼에 쓰러졌다. 송상현의 기개를 본 적장이 시를 지어 바치고 제사까지 지내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 일본군의 병력과 각 부대의 병력과 침공 경로를 살펴본다.
① 제1군 :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 18,700명
② 제2군 :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 22,800명
③ 제3군 :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 1568-1623} 11,700명
④ 제4군 :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모리길성), ?-1611}‧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도진의홍), 1535-1617) 14,700명 [※모리 요시나리의 원래 성은 모리{森(삼)}였으나, 모리{毛利(모리)}로 바꾸었음.]
⑤ 제5군 :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복도정칙), 1561-1624} 25,000명
⑥ 제6군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소조천융경), 1533-1597} 15,700명
⑦ 제7군 :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1553-1625} 30,000명
⑧ 제8군 :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 10,000명
⑨ 제9군 : 도요토미 히데카츠{豊臣秀勝(풍신수승), 1569-1592}‧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세천충흥), 1563-1645} 11,500명 [※도요토미 히데카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豊臣秀吉)}의 누나의 아들, 즉 생질(甥姪)로서 원래의 성은 하시바{羽柴(우시)}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養子(양자)가 되면서 도요토미{豊臣(풍신)로 바꾸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거제도에서 병사했음.}
⑩ 수군 :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등당고호), 1556-1630} 9,200명
도도 다카토라 외에 일본 수군 장수로는 구루지마 미치유키{來島通久(내도통구), ?-1592},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구귀가륭), 1542-1600},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협판안치), 1554-1626},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가등가명), 1563-1631}, 구루지마 미치후사{來島通總(내도통총) 1561-1597 : 구루지마 미치유키의 동생} 등이 있었다.
일본군 각 부대의 침공 경로는 다음과 같다.
①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소서행장), ?-1600} : 중로(中路), 즉 부산(동래, 1592년 4월 14일, 또는 13일)→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조령→충주→여주→양근→용진(龍津 : 지금의 양수리)나루→한성동로(지금의 경춘가도→왕산로→흥인지문)→한성(1592년 5월 2일 입성)→평안도(벽제→평양).
② 제2군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등청정), 1562-1611} : 동로(東路), 즉 부산(1592년 4월 18일)→언양→경주→영천→신녕→군위→용궁→조령→죽산→용인→한강→한성(1592년 5월 3일 숭례문 통해 입성)→함경도(안변→길주→경성).
③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흑전장정), 1568-1623} : 서로(西路), 즉 부산(1592년 4월 19일)→김해→창원→성주→무계→지례→등산→추풍령→영동→청주→경기도 남부→한성→황해도.
④ 제4군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모리길성), ?-1611} : 강원도.
⑤ 제5군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복도정칙), 1561-1624} : 충청도.
⑥ 제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소조천융경), 1533-1597} : 전라도[실패].
⑦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모리휘원), 1553-1625} : 경상도(예비대 역할).
⑧ 제8군 :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우희다수가), 1572-1655} : 경기도.
⑨ 제9군 : 도요토미 히데카츠{豊臣秀勝(풍신수승), 1569-1592}‧호소카와 다다오키{細川忠興(세천충흥), 1563-1645} : ?
1592년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을 침공한 10개 부대(수군 포함)를 합산해보면 일본군 총 병력은 169,300명이다. 이는 정확한 숫자는 아니다. 158,700명이라고도 하고, 약 160,000-235,000명이라고도 한다.
제1선 병단(兵團)이라고 하는, 즉 1592년 초기에 침공한 병력(169,300명 또는 158,700명) 외에 제2선 병단, 즉 대본영 대기부대 8개 부대(102,960명), 대본영 직속부대 5개 부대(29,000명)까지 합하면 약 30만 명이었다.
다시 이순신 이야기로 돌아온다.
임진왜란 발발 이래로 부산은 일본군의 조선 침략의 발판, 총본영이 되었다. 전선이나 무기, 병력이 부산을 통하여 보급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도 부산을 통해서 각 장수들에게 전달되었다. 아름다운 부산이 적의 복마전(伏魔殿)이 돼버렸다. 그 중심이 부산진성(釜山鎭城)이었다. 그들은 성벽을 허물고, 일본식으로 다시 쌓았다. 이를 우리는 ‘왜성(倭城)’이라고 부른다. 일본과 관련된, ‘왜(倭)’가 들어간 모든 명칭은 멸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왜(倭)’는 ‘순한 모양’의 뜻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왜(倭)’ 자를 써놓고도, ‘키 작을 왜(矮)’의 의미로 생각한다. 특히 그들이 점령한 기간이 길었던 경상도 지방의 성들, 예를 들면 울주, 부산진, 웅천, 마산 등의 성은 왜성으로 다시 쌓았다. 마치 조선이 자기네 영토가 된 양….
이순신 장군은 연합함대를 이끌고 이러한 부산의 일본 수군을 공략하기 위해 1592년 8월 24일 제4차 출정에 나섰다. 부산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간 지 넉 달이 넘었고, 그로부터 18일 만인 1592년 5월 2일 수도 한성도 함락되었으며, 육전(陸戰)은 패배를 거듭했다. 명(明)의 원군이 합세하여 싸웠지만, 제2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7월 15일), 제3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8월 1일)에서도 패배했다. 그러므로 부산 앞바다를 향하는 이순신 장군의 심정은 그야말로 비장했을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당시의 이순신 장군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이전 글(옹달샘 <28>)에 게재했던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한산충무(閑山忠武)>(1918년작)에서 본 그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다.
일본 육군이 조‧명(朝明) 연합군과의 중요한 싸움이었던 제2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7월 15일)에서 승리했으나, 그들은 기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7일 전 임진왜란 발발 이래 최대 해전인 한산도해전(閑山島海戰, 1592년 7월 8일)에서 너무나 충격적인 대패(전선 73척 전부 상실, 즉 59척 격침, 14척 나포, 8,980명 전사, 장수 2명 전사, 장수 1명 자살, 장수 1명과 패잔병 400명 겨우 도망)를 당했기 때문이다. 일본 육군은 제3차 평양전투(平壤戰鬪, 1592년 8월 1일)에서도 승리했지만, 오히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여기에서 말하지 않아도‘ 명약관화(明若觀火)하지 않은가? 한산도대패(閑山島大敗) 때문이었다. 그동안의 7번의 승전이 없었다 하더라도, 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 하나만으로도 이순신의 구국 업적과 사악한 자를 징벌하는 신(神) 같은 위대함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독보적(獨步的)인 것이다. 한산도대패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 1537-1598. 8. 18}는 수군이 부산 서쪽으로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말 것, 육군은 북진을 멈추고 남쪽으로 퇴각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한 명령을 멀쩡한 정신으로 했겠는가? 한산도대패 소식을 들은 지 만 6년 만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2세로 죽었다. 죽음에 대한 함구령(緘口令)을 내렸기 때문에 한참 후에야 병사(病死)로 알려졌다. 그 병명은 아직까지 비밀이다. 그런데 뇌질환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 점을 미루어 생각해보면 그는 한산도대패 때 큰 충격을 받아 병을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D. 제4차 출정(1592년 8월 24일-9월 2일)
제4차 출정(1592년 8월 24일-9월 2일)에 나선 이순신‧이억기‧원균 연합함대 173척은 부산을 향했다. 새로 만든 전선과 나포한 적선을 추가함으로써 지난 한산도대첩 때(56척)에 비하면 세 배나 되는 대함대였다. 이렇게 전선을 많게 한 것은 부산 앞바다의 싸움이 양군(兩軍)의 운명을 가르고, 또 임진왜란을 끝낼 수도 있는 결정적인 해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제4차 출정의 해전, 즉 부산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들[전체를 ‘부산해전’이라고 할 수 있으나, ‘부산포해전’과는 구별해야 함]을 지도로 보면 아래와 같다.
▲이순신 장군의 제4차 출정에서 7전 7승한 부산 앞바다 해전들(1592년 8월 29일-9월 1일)을 함께 보는 지도
① 장림포 해전(1592. 8. 29), ② 화준구미해전{1592. 9. 1 : ‘미(尾)’를 비슷한 뜻인 ‘말(末)’로 하여 ‘화준구말(花樽龜末)’이라고도 말함}, ③ 다대포해전(1592. 9. 1), ④ 서평포해전(1592. 9. 1), ⑤ 절영도해전(1592. 9. 1 : 절영도와 송도 사이에서 벌어진 해전), ⑥ 초량목해전(1592. 9. 1), ⑦ 부산포해전(1592. 9. 1 : 초량목에서 북쪽으로 더 들어간 포구에서 벌어진 해전으로서 이 지도에는 명칭이 누락되어 있음)이다.
10) 장림포해전(長林浦海戰, 1592년 8월 29일) : 적선 6척 격침, 30명 도주 / 아군 피해 없었음.
부산으로 향하던 중 이순신 장군은 1592년 8월 29일 장림포에 왜선 6척(수군 30명)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장림포(長林浦)는 지금의 낙동강 하구인 부산시 사하구 장림동 포구로서 장림동과 을숙도 사이이다. 장림포해전(長林浦海戰)은 장림 앞바다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일본 수군 30명은 저항하다가 전선을 버리고 육지로 도망쳤고, 적선 6척은 격파되었다.
11) 화준구미해전(花樽龜尾海戰, 1592년 9월 1일) : 적선 5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었음.
▲이순신 장군의 제4차 출정에서 7전 7승 중의 2승째인 화준구미해전(1592년 9월 1일) 지도
화준구미(花樽龜尾)는 현존하는 지명이 아니다. 지금의 다대포해수욕장을 지나, 몰운대(沒雲臺 : 다대포 해수욕장 끝)를 돌아 부산시 사하구 화손대{花孫坮, 일명 화준대(花樽坮)} 서쪽의 내만(內灣)으로 추정되고 있다. 위치에 대한 논란은 남아 있다. 위 지도에서 볼 때 화손대와 침운대 사이, 또는 화손대와 솔섬 사이로 본다. 이런 지명을 찾아내어 표지석이라도 세워야 하는데…. 화준구미해전(花樽龜尾海戰) 역시 이순신의 연합함대가 적선 5척을 격침한 소규모 해전이다.
12) 다대포해전(多大浦海戰, 1592년 9월 1일) : 적선 8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었음.
여기서 말하는 다대포(多大浦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포구)는 솔섬 동쪽에 있는 다대포항이다. 이 다대포해전에서 적선 8척 모두를 격침했다.
여기서 논란거리 하나를 이야기해본다. 장림포해전, 화준구미해전, 다대포해전 같은 것을 하나의 해전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만일 육전의 전투 시작 단계에서 1,000명의 병사가 공격 행군 중 2명의 척후병(斥候兵 : 적의 형편이나 지형을 정찰하고 탐색하는 임무를 띤 병사)을 사살한 것도 하나의 전투이냐고 하면서….
‘전쟁(戰爭, war)’은 ‘국가와 국가, 또는 교전(交戰) 단체 사이에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싸움’이다. 전쟁은 대체로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무력 싸움이며, 몇몇 국가들이 연합한 것은 ‘국제전(國際戰, international war)’이고, 거의 세계 국가들이 연합한 것은 ‘세계대전(世界大戰, world war)’이다. ‘전투(戰鬪, battle)’는 ‘두 편의 군대가 조직적으로 무력을 사용하여 싸우는 싸움’이다. 전투는 전쟁에 종속된 개념으로서, 전쟁의 하위개념이다. 어떤 전투는 다른 어떤 전쟁보다 규모가 클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전쟁 속에 포함될 경우에는 그것이 아무리 큰 규모라 하더라도 전쟁이 아니라, 전투이다. 대규모 스포츠 행사에서 큰 분류의 종목이 있고, 그 종목 속에 세부종목이 있듯이, 전투에서도 세부전투, 즉 소규모의 전투가 있다. 이를 영어로는 ‘combat’라고 한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전쟁(戰爭, war)’이고, ‘용인전투’, ‘행주대첩’, ‘부산포해전’ 같은 것은 ‘전투’이되, ‘battle’이고, ‘다대포전투’ 같은 것은 ‘전투’이되, ‘combat’의 성격을 띠고 있다.
이순신 장군이 수행한 해전을 ‘battle’로만 분류하면 25개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combat’까지 포함하면 25개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전선 6척을 격침한 장림포해전, 전선 8척을 격침한 다대포해전을 척후병 2명 사살한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조선 수군의 주 전선(戰船) 판옥선(板屋船)의 승조원은 최소 120명에서 최대 200명이고, 일본 수군의 주 전선인 세키부네{關船(관선)}의 승조원은 70-80명이었다. 세키부네 5척이면 약 400명의 병사가 탑승한다. 이들과 싸운 해전이 어찌 전투가 아니란 말인가?
2012년은 임진왜란 7주갑(60×7=420년)이 되는 해였다. 그 기념행사로 열린 아산 ‘성웅 이순신 축제’의 하나로서 2012년 4월 24일 아산 충무교육원에서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주최로 ‘이순신 정론’이라는 주제로 학술 세미나가 열렸다. 이 세미나에서 이순신 연구 전문가 중의 한 사람인 해군사관학교 제장명 교수는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동향평팔랑), 1848-1934} 제독의 ‘23전 23승’은 정확한 연구 결과가 아니라고 하면서, 2004년 9월 4일부터 만 1년 동안 방영된 KBS 1TV의 역사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그렇게 했기 때문에 ‘23전 23승’으로 굳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임진왜란의 대표해전은 총 21회로 이 중 이순신은 총 17회 대표해전에 참전해서 전승(全勝)했고, 세부해전 49회 중 이순신은 45회 참가해 전승(총 62전승)을 거뒀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대로 하자면 ‘25전 25승’은 물론, ‘45전 45승’, 또는 ‘62전 62승’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된다. 연구에서 나온 증거가 있으니까…. 이쯤 되면 이순신 장군의 전적이 뻥튀기기가 아닌 것이다.
13) 서평포해전(多大浦海戰, 1592년 9월 1일) : 적선 9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었음.
서평포(西平浦 : 부산시 사하구 구평동 앞바다)는 지금의 감천만(甘川灣)의 감천항(甘川港)이다. 이 서평포해전(西平浦海戰)에서 적선 9척을 모두 격침했다.
14) 절영도해전(絶影島海戰, 1592년 9월 1일) : 적선 2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었음.
절영도(絶影島)는 지금의 영도(影島)이다. 영도의 남항동 앞바다에서 적선 2척을 격침했다.
15) 초량목해전(草梁목海戰, 1592년 9월 1일) : 적선 4척 격침 / 아군 피해 없었음.
초량(草梁)목은 지금의 부산시 중구 동광동 광복동 일대로서 현재는 매립된 상태이다. 초량목해전에서 적선 4척을 격침했다.
16) 부산포해전(釜山浦海戰, 1592년 9월 1일) : 적선 4척 격침 / 아군은 녹도만호 정운을 비롯한 6명 전사, 25명 부상.
제4차 출정에 나선 이순신‧이억기‧원균 연합함대 170척(173척 중 3척은 구조상의 문제가 생긴 듯함)은 장림포해전에서 초량목해전까지 여러 포구에 숨어 있는 적선들(도합 34척)을 색출하여 깨끗이 대청소하고, 현재 복원된 영도대교가 있는, 즉 대청동과 대교동 사이의 바다를 통과하여 부산포에 이르렀다.
부산포(釜山浦)는 바로 좌천동 부산진성 앞바다이다. 이 부산포해전은 한산도대첩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이순신 장군과 조선 연합함대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첫째, 전력(戰力)의 열세였다. 조선 수군은 170척(판옥선 74척, 협선 92척, 포작선 4척), 병력 1만 명이었고, 일본 수군은 470척, 병력 7만 명이었다. 제3차 출정까지 일본 수군이 잃은 전선을 합해보면 224척이고, 제4차 출정에서 격침한 것이 34척이다. 여기에 부산포에 남아 있는 470척을 합하면 728척이 된다. 그렇게 많은 적선을 격파했는데도, 470척이나 남아 있는 것이다. 또 조선은 수군만으로 전투에 임해야 했으나, 일본은 수군과 육군이 연합했다. 둘째, 전장(戰場)의 불리였다. 부산은 전쟁 발발 이래 일본의 점령지였고 일본군 전체의 총본부였다. 또 부산포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복잡한 남해와 같지 않은데다, 이미 일본 수군들이 익숙해져 있어서 이순신의 전술이 먹히지 않았다. 셋째, 조선 수군은 며칠째 항해와 전투를 해 와서 지쳐 있었다. 그러나 조선 수군에게 유리한 점은 일본 수군이 이순신에게 매우 겁을 먹고 있는 심리적 요인, 이순신의 리더십, 거북선과 판옥선 및 대포의 위력 등이었다.
조선의 연합함대가 장사진으로 부산포로 들어가자 일본 수군은 거세게 저항했다. 피아간(彼我間)에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 수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본 수군은 전선 128척 격침, 5,000여 명의 사상자(3,800명 사망, 1,200명 부상)를 낸 후 육지로 달아났다.
부산포해전은 당시까지의 그 어느 해전보다 어려운 전투였다. 아군 피해도 생겼다. 녹도만호 정운(鄭運) 장군을 비롯한 6명 전사, 25명 부상이 발생했다.
녹도만호(鹿島萬戶) 정운(鄭運, 1543-1592)은 본관이 하동(河東)이고 전남 영암(靈巖) 사람으로서 젊어서부터 호협(豪俠)하여 절의(節義)에 살고 절의에 죽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는 대쪽같이 바른 사람이고 범같이 용맹한 사람이었으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다. 그는 공물(公物)이라면 종이 한 장도 사사롭게 취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이순신{李舜臣, 1545년(명종 원년)-1598년(선조 31년)}보다 2년 연상인 동시에 무과 급제도 2년 선배였다. 그러니까 그 역시 이순신처럼 28세에 무과에 급제했던 것이다. 정운은 1570년(선조 3년) 과거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거산찰방(居山察方)이 되었다. 거산(居山)은 함경도 북청(北靑)에 있는 한 역(驛)이고, 찰방(察訪)은 역참(驛站)을 관리하는 종6품의 외관직이었다. 그러한 그가 함경도 관찰사(오늘날의 도지사)의 수행원이 민폐(民弊)를 끼치는 것을 보고는 그 자리에서 곤장(棍杖)을 쳤다. 그 일로 인해 그는 파직되었다. 그 후 정운은 웅천현감(熊川縣監)이 되어서도 그와 비슷한 일로 경상도 관찰사에 밉보여 파직되었고, 제주판관(濟州判官)일 때도 역시 상관인 제주목사(濟州牧使)의 비위를 거슬러 파직되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년 초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녹도(鹿島)’는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保寧)에 있는 녹도가 아니라, 전라남도 고흥(高興)에 있는 녹도이다. 거기에 왜구(倭寇)의 침략을 막기 위한 녹도진(鹿島鎭)이 있었고, 녹도진성(鹿島鎭城)이 있었다. 당시의 품계(品階)와 오늘날의 계급을 정확하게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만호(萬戶)’는 종4품으로서
지금의 중령(中領)에 해당된다. 정운은 자주 파직되었어도 누군가를 통해 인정받았다는 뜻이다. 부산진첨사 정발이나 다대진첨사 윤흥신의 경우 첨사(僉使)는 종3품으로서 준장(准將)에 해당된다.
이순신은 1589년 전라도 정읍현감(井邑縣監, 종6품)이 되었고, 1591년 진도군수(珍島君守, 종4품, 만호와 동급)가 되었으며, 얼마 후 그 해 가리포(加里浦, 지금의 완도)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종3품, 지금의 준장)가 되었으며, 그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정3품 당하관, 상위 소장)가 되었다. 1593년 8월에는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종2품, 지금의 중장)가 되었다. 이순신은 초고속으로 승진한 것을 알 수 있다.
2년 후배가 소장, 중장인 이순신 밑에서 여전히 중령으로서 부하 노릇하는 녹도만호 정운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정운은 이순신의 좌장(左將)으로서, 선봉장‧돌격대장으로서 충성을 다했다. 그는 나라를 구하는 일이라면 그런 서열(序列) 같은 것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녹도만호 정운은 이순신이 바르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직언(直言)을 서슴지 않았다.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나,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좌도 쪽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고, 전라좌수영 앞바다를 맴돌자, 화가 난 녹도만호 정운은 칼을 뽑아들고 감히 상관인 이순신에게 눈을 부릅뜨고서 말하기를 “적병이 이미 영남을 격파하고 전승의 기세를 타고 한없이 밀어붙이고 있으니, 그 형세가 반드시 한꺼번에 수륙(水陸) 양쪽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공은 어찌하여 이처럼 망설이며 출전할 뜻이 없습니까?”라고 호통을 쳤다. 이순신이 그 기에 질려 출정을 하게 됐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정운은 전투에서 언제나 이순신을 보좌하고, 필요할 때는 자원하여 돌격대장이 되었다. 부산포해전에서도 녹도만호 정운이 돌격대장이 되었다가 조총을 맞고 전사한 것이다. 훗날 두 아들이 전사했을 때도 울지 않았다는 이순신 장군이 정운의 전사에서는 애통해했고, 직접 제문(祭文)을 지었다고 한다. 정운의 죽음을 포함한 6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의 발생은 이순신의 마음을 찢어놓았던 것이다.
전투 양상은 더 어려워져갔다. 남은 적선은 육지 가까이에 정박해놓고, 왜적은 육지 높은 곳에서 조총과 활로 대응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대포는 같은 높이의 목선(木船)에는 위력이 있었으나, 육지의 높은 석성(石城)을 향해서는 큰 효과를 낼 수 없었다. 오히려 탄환 허비만 생길 뿐이었다. 또 조선 수군이 상륙하여 육전을 벌일 형편도 아니었다. 그 때문에 약 350척의 왜선을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었다.
이순신 장군은 더 지체하지 않고, 전투를 종결하고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부산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으면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것이기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 있으나, 부산 앞바다를 삥 둘러싸고 있는 육지가 왜군의 수중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한산도대첩과 같은 완벽한 승전은 아니었으나, 부산포해전의 조선 승리는 큰 의의가 있었다. 남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 조선 수군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부산을 공격해올 수 있고, 대규모 육군을 포함한 조‧명(朝明) 연합군이 부산을 포위하면 일본군이 ‘독 안에 든 쥐’꼴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부산포해전의 조선 승리는 일본군 전체의 전술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 수군 연합함대는 1592년 9월 2일 제4차 출정(1592년 8월 24일-9월 2일)을 마무리하고 각각 자기 본영으로 돌아갔다. [다음 호에 계속 / 2014.1.3.(금). 조귀채]
첫댓글 부산포해전 전적 요약 부분을 수정하고, 내용에서 '녹도만호 정운'에 관한 이야기를 추가했습니다. [일곱 분이 읽으신 시점]
부산포해전 내용 중에서 지금의 계급과의 비교에서 약간의 수정을 했습니다.
아주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다음이 기다려지네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장문이라 읽는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입니다. A4 한 장 분량으로 해전 목록만 올리고 싶은 마음이지만, 그렇게 해서는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100원 주화 다음부터는 짧게 쓸까 합니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요..ㅎㅎ
제대로 이해가 가게끔 쓰실려면 장문이 될수밖에 없구요
글솜씨가 너무 좋으시구요.
작가님 덕분에 공부가 많이 됩니다요.
이순신장군의 책을 만드셔도 좋으듯합니다.
수고가 넘~많으셨습니다요..감사합니다.
다음호가 기다려 집니다.~~~^**^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작가님!!
오늘 오후에 바다언니랑 자성대에 놀러갔었는데요.
지금은 자성대가 많이 변했답니다.
달라진모습 사진 몇장 올려드릴께요...ㅎ
사진을 보니 직접 찍은 사진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정말 그러셨네요. 제 글을 읽고 나서 자성대를 가셨다면 더 고마운 일이네요. 적극성! 그게 참 맘에 드네요. 적극적인 사람이 꼭 큰 일을 한다니까요. 올해 큰 일을 이루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