讓寧大君 (양녕대군) 4
고산(高山)추천 2조회 21824.01.08 09:40댓글 12북마크공유하기기능 더보기
외숙을 죽음으로 내몬 냉혹한 조카
양녕이 세자 자리를 버린 이유로 네 외삼촌의 비참한 죽음을 들고 있다.
태종시절 두 차례에 걸쳐 외숙인 민무구, 민무질과 민무휼, 민무회가
죽임을 당한 것에 회의를 품은양녕이 스스로 세자 자리를 박찼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앞의 두 외숙은 별개로 치더라도 뒤의 두 외숙 즉, ...
민무휼과 민무회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직접적인 장본인은 바로 세자 양녕대군이었다.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의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은 이방원이 제1,2차 왕자의 난을 승리로 이끄는데 ...
결정적인 공을 세운 인물이다.
제1차 왕자의 난에 대한 논공행상인 정사공신 2등과 태종 즉위의 논공행상인 좌명공신
1등에 책봉된 사실로 알 수있다.
그러나 이들은 태종 6년 잇단 가뭄과 흉년을 자책하여 태종이 물러나겠다는 선위파동을 일으켰을 때
" 조카인 세자가 왕위를 이을 것을 바랐다 "는
이른바 협유집권( 어린 세자나 임금을 이용하여 정권을 장악하는 것)의 혐의를 받고 사형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혐의를 입증하는 증거라고는 선위파동 때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는 주관적인 것 밖에 없으니
이들은 사실상 억울하게 사형당한 것이다.
그런데 기생 초궁장 사건 바로 다음 달인
태종 15년 6월에 느닷없이 민무휼,민무회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 세자 양녕대군이었다.
그가 꺼낸 문제가 이미 2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는 의도적인 것이다.
세자 양녕대군은 태종이 편전에서 효녕, 충녕 두 대군과 함께 있을 때 이런 말을 하였다.
2년전 4월에 어마마마가 편찮으셔서 저와 두 동생이 궐내에 있었는데 민무회와 무휼이 문안을 왔었습니다.
두 아우가 약을 받들고 안으로 들어가서 저와 민씨만이 있게 되었을 때
민무회가 자신의 가문이 패망하고 두 형이 죄를 얻은 이유에 대해 불평하기에 제가 ...
" 민씨 가문은 교만 방자하니 화를 입은것은 당연하다 "
고 꾸짖었더니,
민무회가
" 세자는 우리 가문에서 자라지 않으셨습다 ? "
라고 말했습니다.
제가 잠자코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민무휼이 저를 따라와
" 무회가 실언을 했으니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날에도 개전의 정이 없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세자 양녕의 이 말은 두 외삼촌을 죽음으로 몰 수있는 발언이었다.
태종이 즉각 두 민씨 형제를 불러 사실 여부를 묻자 목숨이 걸린 두 사람은 부인하였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대간과 형조에서 두 사람을 탄핵하고 나섬으로써 조사가 시작되었는데,
세자는 조사를 맡은 이맹균과 사헌부 안망지에게도 같은 진술을 하였다.
민무휼과 민무회는 일단 귀양에 처해져 있다가 결국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세자 양녕이 두 외삼촌을 죽게 한 것이다.
양녕이 느닷없이 2년 전의 일로 두 외삼촌을 공격한 이유는 거듭된 비행으로 궁지에 몰리자...
두 외삼촌을 희생양으로 삼아 자신의 불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이었다.
5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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