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남부선 철도 이전에 따라 경주,울산 사이에 박상진역이 있다.
그곳은 박상진의사의 생가터가 있어서 역명이 그렇게 부른다.
그동안 독랍운동가 중에서 박상진 의사 이름은 생소하다.
최부자 최준의 누나(최영백)가 박상진 의사의 부인이다.
박상진의사 은 양정고보에서 왕산 허위 선생님의 제자이다.
허위 선생님은 대한독립을 위해 모인 독립군들의 총사령관으로 1907년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지만 안타깝겠도 실패했다.
허워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독랍군 의사들을 구속하기위해 서대문 형무소를 세웠다는 말이 있다.
이후 박상진 열사는 일본 유학을 갔다와서 판사가 되었다.
하지만 1910년 일본에 나라가 빼앗기게되자 양심상 독립군을 탄압하는 판사를 할 수없다고 생각하고, 판사직을 그만두고 조국 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친다.
당시 매국 5적이 모두 판사였던것과 비교가된다.
자발적으로 판사로서 일신과 가문의 영광을 버리고 고난과 죽음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박상진의사는 조국 광복을 위해서는 힘을 길려서 일본과 맞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시면서 , 뜻있는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을
조직하고총사령관이 되었다.
먼저 지방 유지들에게 독립자금을 모으고, 매국노들을 처단에 노력한다.
한번은 경주 효현교에서 운반하는 거금을 중간에서 탈취하여 녹동에서 잠시 피하다가 만주로 독립자금을 운반한다.
그리고 만주로 자주가서 애국지사 김좌진, 이상룡 등과 결의를 다지고, 한인교육과 광복군 양성에 온힘을 기울인다.
그러던 중
1920년 광복 자금을 준다는 약속을 어긴 칠곡거부 장모씨를 죽음으로 처단한다.
결국 이사건에 연루되어 박의사는 체포되고 대구 교도서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판사로서 일신의 영달을 마다하고, 조국 광복을 위해 한평생을 받친 애국지사이시다.
박열사의 뜻이 1920년,30년대 감좌진,홍범도,김구,최준 등의 애국지사로 이어져 조국 광복을 위한 가열찬 투쟁으로 결실을 맺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박의사의 가문도 풍지박살이 났다.
논과 밭을 다 팔아 광복 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후손들도 독립군의 자식이란 굴레로 다 흩어지고 거지처럼 살았다.
최부자의 누나인 부인은 먹을것이 없어서
매일 죽만 먹고 살아서 피골이 상접했다고 한다.(사진)
사실 대부분의 애국지사들의 가문의 가난은 지금도 마친가지이다.
일제에 고개를 숙이고 아부하면 출세하고 후손까지 떵떵거리면 살 수 있는 사회이다. 하지만 한일합방후 1910년대의 혹독한 일제 무단 통치사회에서 판사직을 버리고 분열이 일어난 박상진의사를 용기와 열정에 나는 한없이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