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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ccini, Giacomo(푸치니)의 Opera "Turandot(투란도트)"
주요배역
투란도트 공주
알툰황제(투란도트의 아버지)
티무르왕(타타르[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패주)
류(티무르왕을 보살피는 젊은 노예)
칼라프(티무르왕의 아들)
핑(총리)
팽(재무장관)
퐁(황실 주방장)
사형집행관(푸-틴-파오)
페르시아왕자
Turandot는 전3막으로 전설적인 중국의 공주 이름이다. 대본은 주세페 아다미(Giuseppe Adami)와 레나토 시모니(Renato Simoni)가 맡았으며, 원작은 카를로 고찌(Carlo Gozzi)의 동화 투란도트이다.
줄거리
제1막
북경의 황궁 앞에 군중이 모여 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아름다운 투란도트공주의 신랑 면접시험 결과를 듣기 위해서이다. 공주와의 만남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요한 일이다. 공주의 수수께끼 테스트에 합격하지 못하면 그 누구든 목숨을 내 놓아야 한다. 공주의 테스트는 참으로 풀기 어려운 세 가지 질문이다. 도전자가 세 가지 수수께끼중 하나라도 맞추지 못하면 참수한다.
군중들의 예상대로 페르시아왕자는 공주의 테스트에 하나도 합격하지 못했다. 그 날 밤 달이 떠오를 때에 참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군중을 헤치고 늙고 눈먼 사람과 그의 노예 류(Liu)가 나타난다. 중국과 대적하였던 타타르의 국왕 티무르(Timur)이다. 전쟁에 패하여 신분을 속이고 방랑하는 중이다. 티무르왕은 피에 굶주린 군중 가운데서 죽은 줄 알았던 왕자 칼라프(Calaf)를 만난다. 만일 칼라프가 티무르의 아들인 것이 탄로 나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 한편, 투란도트공주는 황궁 앞에 나타나 얼마 후면 도끼날에 목을 잘릴 불쌍한 페르시아 왕자를 비웃고 있다. 투란도트의 모습을 본 칼라프 왕자는 단번에 마음이 푹 빠진다. 아버지 티무르 왕과 충실한 노예 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젊은 칼라프 왕자는 투란도트의 수수께끼에 도전하여 투란도트를 쟁취하겠다고 다짐한다. 핑, 팽, 퐁도 칼라프 왕자의 무모한 도전을 포기하라고 설득한다. 하지만 칼라프 왕자는 듣지 않는다.
제2막
황궁에서 공주는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가 왜 이렇게 어름처럼 차가운 사람이 되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오래 전, 공주의 어머니가 황궁을 침범한 타타르인에게 능욕 당하여 세상을 떠난 일이 있다. 그 이후로 투란도트는 모든 인간에게 복수키로 다짐하게 된 것이다. 이제 공주는 칼라프에게 세 가지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질문이다. 첫째 질문: 매일 밤 태어나서 매일 낮 죽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희망’이다. 칼라프는 세 가지 질문을 모두 현명하게 답한다. 이제 약속대로 투란도트는 미지의 청년과 결혼해야 할 처지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칼라프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보너스 문제를 낸다. 앞으로 24시간 내에 자기 이름을 맞추는 문제이다. 칼라프는 만일 자기 이름을 알아낸다면 자기를 체포해서 가두어도 좋다고 말한다. 공주로서는 별것 아닌 문제였다. 모든 북경시민에게 엄명을 내린다. 누구든지 청년의 이름을 알 때까지 잠을 잘 수 없다는 명령이다.
제3막
북경은 잠 못 이루는 도시가 되었다. 이 때 칼라프는 아리아 Nessun dorma를 부른다. 칼라프 왕자는 아무도 자기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해서 자신 만만하다. 핑, 팽, 퐁은 칼라프에게 ‘그대의 이름만 알려주면 온갖 재물과 아름다운 여인들은 물론 북경에서 아무도 모르게 멀리 도망갈 수 있는 방법까지 알려 주겠다’고 제시한다. 칼라프는 이 모든 제안을 거절한다. 투란도트의 경비군사들이 수상한 사람을 검문하는 중에 티무르왕과 노예 류를 체포하여 데려온다. 병사들은 이 두 사람이 그 젊은이와 함께 있었으므로 고문을 하면 그 젊은이가 누구인지 실토할 것이라고 보고한다. 노예인 류는 자기의 주군인 티무르왕의 신분이 밝혀지고 고문까지 당하는 것을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그보다도 류는 타타르의 왕궁에서부터 칼라프 왕자를 흠모하여 왔으나 칼라프가 자기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투란도트와 결혼하려는 데 대하여 마음 조려 왔던 터였다. 류가 투란도트 앞으로 나서서 ‘나 만이 그 젊은이의 이름을 안다’라고 말한다. 이에 공주는 젊은이의 이름을 대라고 류를 고문하기 시작한다. 류는 공주에게 ‘그대는 얼음과 같이 차갑기만 하다’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고문에 버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젊은이를 보호하는 류를 보고 공주는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이유로 이 여인은 그 젊은이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는가? 얼음 같이 차가운 공주의 마음이 녹기 시작했다. 칼라프가 등장하여 마음이 혼란해진 공주에게 키스를 한다. 차가운 얼음공주의 마음이 녹기 시작한다. 투란도트는 칼라프의 팔에 안겨 처음으로 따듯한 사랑의 감정을 가진다. 투란도트의 마음이 완전히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신한 왕자는 그 제서야 자기 이름이 칼라프라고 밝힌다. 공주는 군중에게 ‘이제 이 사람의 이름을 알았도다. 그의 이름은 사랑이로다!’라고 말하며 행복한 노래를 부른다.
■ 참고
고치 Gozzi, Carlo, Conte - 이탈리아 시인, 산문작가, 극작가
출생 1720. 12. 13, 이탈리아 베네치아
사망 1806.4. 4, 베네치아
국적 이탈리아
피에트로 키아리와 카를로 골도니의 연극개혁에 반대하여 이탈리아 전통극형식인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를 열렬하게 옹호했다. 이탈리아와 유럽 각지에서 널리 인정받은 그의 희곡은 많은 연극과 뮤지컬로 각색되었다.
가난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가스파로 고치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일찍 군대에 들어갔다. 1744년 베네치아로 돌아와 풍자시와 수필을 썼으며 복고적인 '아카데미아 데이 그라넬레스키'에 들어갔다.
이 단체는 이탈리아 문학을 외래문학에 오염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전통적인 코메디아 델라르테를 되살리는 운동을 벌였다. 처음에 쓴 〈La tartana degli influssi〉(1747)는 유명한 사실주의 희곡작가 카를로 골도니를 공격하는 풍자시이다. 또 색다른 코메디아 델라르테 작품 〈오렌지 3개의 사랑 L'amore delle tre melarance〉(1761 공연)에서 그는 골도니를 마술사로 묘사하고 피에트로 키아리를 사악한 요정으로 표현했다.
이 연극이 큰 성공을 거두자 계속해서 그는 9편의 '피아베(환상극)‘를 썼다. 이들은 인형극과 동양의 전설,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우화, 동화 및 스페인 극작가들(티르소 데 몰리나, 칼데론 데 라 바르카,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작품은 〈사슴 왕 Il re cervo〉(1762 공연), 〈투란도트 Turandot〉(1762 공연), 〈뱀 여자 La donna serpente〉(1762 공연),〈예쁜 녹색의 작은 새 L'augellino belverde〉(1765 공연) 등이다.
이탈리아에서 한동안 인기를 끈 고치의 피아베는 유럽의 다른 나라로 전파되어 훨씬 오래 영향을 미쳤다. 1777~78년에 그의 작품을 출판한 독일에서는 특히 영향이 컸다. 요한 볼프강 괴테와 프리드리히 실러,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슐레겔 형제는 모두 고치의 작품을 격찬했다. 실러는 〈투란도트〉를 본격적인 희곡으로 각색했으며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은 그를 셰익스피어에 비견했다. 〈투란도트〉는 나중에 페루치오 부조니의 오페라(1917 공연)와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1926 공연) 대본으로 쓰였고, 〈오렌지 3개의 사랑〉도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동명 오페라(1921 공연)의 대본이 되었다. 또한 별로 겸손한 문체는 아니나 생생한 자서전 〈카를로 고치의 회고록〉(1797)을 남겼다.
중앙아시아의 풍운아, 티무르 Timur
세파를 마술사처럼 헤쳐 나간 수수께끼
출생 1336, 트란속사니아 사마르칸트 근처 케시
사망 1405. 2. 19, 침켄트 근처 오트라르
국적 투르크
중국 이름은 첩목아(帖木兒)이다.
역사에는 일세를 풍미한 영웅호걸들이 수두룩하지만, 티무르처럼 운세를 타고 세상에 두각을 나타낸 풍운아는 흔치 않다. 그는 선과 악, 공과 과, 행운과 불운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세파를 마술사처럼 용하게도 헤쳐 나간 인물이다. 그리하여 그의 영욕에 대한 평가는 세월을 두고 엇갈려 왔으며, 늘 수수께끼 속의 인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그의 파란만장한 70 평생이 남겨 놓은 흔적에서 이러한 점을 읽어낼 수 있다.
1966년 대지진 이후 복구하면서 설계한 타슈켄트 신시가지는 계획도시로서, 어느 길을 따라가던 사가 중심부에 있는 티무르 광장에 가 닿는다. 광장 한복판에는 영원한 우즈베키스탄의 상징처럼, 질주하는 말을 탄 티무르의 당찬 동상이 서 있다. 원래 그 자리에는 마르크스 동상이 있었다고 한다. 대통령 카리모프는 내심 티무르제국의 꿈을 꾼다고 하니, 티무르가 국부대접을 받을 수밖에 없다.
티무르(1336~1405)는 사마르칸트에서 남쪽으로 80킬로미터쯤 떨어진 ‘녹색 도시’ 라는 뜻의 샤흐리사브즈 부근의 호쟈이루그 마을 한 몽골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원래 자그마한 도시 이름은 케슈로서, 7세기 현장 스님이 인도로 가면서 이곳을 지난 바 있다. 지금 시 중심의 널따란 광장에 티무르의 대형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그 뒤편에는 티무르가 제국을 건설하고 기념으로 지은 악사라이궁전 잔해가 남아 있다. 이 궁전은 1380년에 짓기 시작해 티무르가 죽은 해인 1405년에 완공 했다고 한다. 궁전 기둥에는 “누가 내 힘을 의심하면 내가 지은 이 궁전을 보여 주라”라는 티무르의 호기어린 한 마디가 아랍어로 새겨져 있다. 그만큼 그 화려함이 자신만만하다.
‘악’은 ‘백색’이고 ‘시라이’는 ‘궁전’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궁전은 푸른색과 황금색 타일로 지어졌다. 여기서의 ‘백색’은 ‘고귀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정문은 아치 모양인데, 원래 그 높이는 50미터 이상이었으나 지금 38미터만 남았다. 이 화려한 유물에는 끔찍한 역사를 대변하는 한 증언이 남아 있어 흥미롭다. 아치문의 왼쪽(동쪽) 원주에는 아랍어로 ‘술탄(황제)은 알라의 그림자다’라는 글씨가 쓰여 있으나, 그 반대편 원추에는 건축가가 그만 실수로 ‘술탄은 그림자다’라고 잘못 썼다고 한다. 이 실수로 건축가는 아치 꼭대기에서 떨어뜨리는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티무르는 칭기즈 칸이 개발한 군사기술의 대가였고 당시의 군사 및 외교적 자원을 잘 활용했다. 변신과 임기응변의 능수인 티무르는 청, 장년 시절에 여러 세력 사이에서 묘하게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의 지반을 구축해 나갔다. 상전에 대한 모반을 다반사로 꾀하고, 결맹한 의형제를 모살하고 결국 제국의 대권을 거머쥐었다. 제국의 왕위에 등극(1369)하기는 했지만, 칭기즈칸의 직계자손이 아니어서 감히 자신을 ‘칸’으로는 참칭하지 못한다. 그의 한 후예의 딸을 취했다는 이유에서 ‘구르간(사위)의 아미르(지배자)’라고만 자칭했다. 그리고 자기 부족 출신들로 강력한 친위대를 꾸려 대외 정복에 나섰다.
그는 적대자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약점을 이용하거나 그의 목적에 부합하는 음모와 배신, 동맹을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첩자들은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승리의 씨앗을 적의 대열 속에 뿌렸다. 그는 이웃하거나 멀리 떨어진 세력들과도 고도의 복잡한 협약을 체결했으며 영국과 중국 등의 외교문서에도 이러한 협상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전투에서는 이동과 기습의 유연성 있는 유목민적 전략이 주요공격무기였다.
30년간의 정복전쟁 결과로 확보한 판도는 서쪽으로는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지중해 동안으로부터 동쪽으로 차카타이 칸 국과 북인도까지, 북쪽으로는 카프카즈와 깁차크 칸 국까지를 아우르는 세계적 대제국이었다. 그는 최후의 일전인 오스만 투르크제국과의 앙카라 전투(1402)에서 대승을 거두고는 수도 사마르칸트에 개선한다. 전의에 불탄 노장은 70세의 노구를 끌고 곧 중국(명) 원정을 위해 거대한 준비를 시작했는데 12월말에 출정하여 침켄트 서쪽 시르다리아 강변의 오트라르에서 1405년 2월에 병사했다. 그의 시체는 썩지 않는 향유를 바르고 흑단관에 넣어 사마르칸트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구르에아미르로 불리는 호화로운 무덤에 매장되었다. 그의 이 기나긴 원정과정은 숱한 살육과 파괴로 얼룩졌다. 페르시아의 타크리트 성채를 공격할 때는 적병을 모조리 살상한 후 자른 머리로 피라미드를 쌓아 시중(示衆)하고, 호라산을 점령하고는 연와와 석회 속에 사람을 생매장해 성벽을 쌓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다마스쿠스와 바그다드 등 일단 공략한 도시는 가차 없이 폐허로 만들어버렸다.
티무르 렝크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의 적들이 경멸조로 절름발이 티무르라고 붙여준 것인데 이것이 유럽에서는 탬벌레인(Tamburlaine) 또는 태멀레인(Tamerlane)으로 되었다. 티무르는 중앙 아시아의 초원거주민과 유목민의 전통에 뿌리를 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유산의 계승자였다. 그와 그 동족들은 칭기즈 칸의 군사기술과 규율에 단련된 기동력 있는 말탄 궁술가와 검술가로서, 정착하여 생활하는 농부들을 경멸했다. 티무르는 한곳에 정착하지 않았다. 그는 사막의 고열과 살을 에이는 추위를 견디면서 지속적으로 전투를 이끌었다.
군사행동을 하지 않을 때도 그는 계절을 따라 말을 먹이기 편리한 곳을 찾아 그의 군대와 함께 이동했다. 9명의 아내와 첩들 중에서 1명 또는 그 이상의 가솔과 더불어 그의 조정도 함께 움직였다. 그는 수도 사마르칸트를 아시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로 만들려고 했으나 그가 그곳을 방문할 때는 단 며칠만 머물고 이 도시 건너편 평원에 설치한 야영천막으로 되돌아갔다.
죽기 전에 그는 영토를 생존한 두 아들을 비롯하여 손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 때문에 여러 해 동안 내분이 계속되다가 막내아들 샤 로흐에 의해 재통합되었다. 티무르는 생의 대부분을 정복과 파괴하는 데에 보냈지만 후계자들의 치세에 이르러 문화의 꽃을 피우게 한 초석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웅장한 건물로 사마르칸트를 아름답게 꾸몄고 그가 정복한 지역에서 많은 공예기술자와 장인들을 이 도시로 데리고 왔다.
사마르칸트는 학문과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의 손자 울루그 베그는 천문관측소를 설립하고 천체표를 바로 이곳에서 그렸는데 그 후 17세기 영국왕실의 천문학자들도 사용했다. 15세기 티무르 왕조의 부흥기 동안에 사마르칸트의 남동부 헤라트는 뛰어난 페르시아 세밀화 화가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16세기 초 왕조가 중앙아시아에서 멸망되었을 때 그의 후손 바부르가 카불에 자리를 잡은 다음 델리를 점령하여 후에 무굴 제국으로 알려진 이슬람계 인도제국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