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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金珉基, 1951년 3월 31일 ~ )는 대한민국의 가수, 작사가, 작곡가, 편곡가이며 극작가, 연극연출가, 뮤지컬 기획자, 뮤지컬 연출가, 뮤지컬 제작자이다. 2002년 고별 음반 《김민기 전집》을 발표 후 가수 은퇴를 선언, 뮤지컬 제작에만 전념하고 있다.[1]
전라북도 이리시 출생으로, 전라북도 익산군 함열읍에서 유년기를 보내다가 초등학교 입학 직전에 서울로 이사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 재학 중 ‘도비두’라는 그룹을 결성하여, 노래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 재동초등학교 동창인 양희은을 만나게 되면서 〈아침이슬〉을 주게 됐고, 1970년에 발표됐다.[2]
1972년에는 서울대 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서 〈우리 승리하리라〉, 〈해방가〉, 〈꽃 피우는 아이〉 등을 부르다 경찰서에 연행됐으며, 그의 앨범 및 노래는 모두 방송금지 조치됐다. 이후 김민기는 시인 김지하와 조우하게 됐고 야학활동을 벌여나가기도 했다. 1973년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를 노동자들과 함께 공연했던 그는 국악인들과 교유하여 다음해 〈아구>를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2]
1977년 군 제대 이후 양희은의 〈거치른 들판의 푸르른 솔잎처럼〉을 발표했고, 동일방직 노조문제를 다룬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발표했다.[2]
1980년에는 문화체육관에서 7년의 긴 공백을 깨고 공연을 펼쳤고 1983년에는 국립극장에서 탈춤과 판소리 등 소리굿 공연을 가졌다. 1987년에는 탄광촌 이야기를 담은 〈아빠 얼굴 예쁘네요〉를 발표했고, 1990년대에 들어와 학전 소극장을 개관한 그는 1993년 22년 만에 독집앨범을 발표했고 '겨레의 노래' 사업을 추진했다. 이후 뮤지컬 〈개똥이〉와 〈지하철 1호선〉 등 의욕적인 연출활동을 하였다.[2]
노래하지 않는 가수 김민기
김민기는 나와 동시대인이다.그와 나는 한편으로는 야만의 연대였고, 또 한편으로는 불의의 연대였던 유신시대를 함께 통과해 온 동시대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잘 모른다.그의 이름은 너무나 오랫동안 금지된 이름이었고,유언비어 속에나 나도는 이름이었다.
그의 실재는 가려져 있었고, 그는 왜곡과 과장,신비화로 감싸여져 통기타 세대사이에 신화적 존재였다. 70년대 중반의 어느날 나는 어느 카페에서 그의 낮고 침울한 목소리에 실린 「친구」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다.
자정 넘은 시간 카페의 셔터는 내려져 있었고 분위기는 비밀결사 집회처럼 엄숙했다.「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요/그 깊은 바다속에 고요히 잠기면/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사람들은 낮고 비장한 어조로 그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의 침울성에 나는 불에 덴 듯한 고통을 느꼈다.그러나 나는 그 노래가 매우 생소했고,함께 부를 수가 없었다.
김민기는 누구인가.그는 시집없는 시인이요,그림없는 화가요,노래하지 않는 가수다.그는 국민적인 애창곡 「아침이슬」의 작사작곡자요,공연기획자요,현실변혁 운동가이다.그는 그 모든 것이며,동시에 그는 아무 것도 아니다.평범한 화가지망생이었던 그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그는 역사의 중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그의 개인사에는 우리 역사의 비바람치는 격동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각인되었다.
김민기는 1951년 3월31일 한국전쟁의 끝무렵 전북 이리에서10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그가 태어날 때 이미 그의 부친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의사였던 그의 부친은 패퇴해 북으로 퇴각해 가던 인민군에 의해 피살되어 그는 유복자로 태어난 것이다.
그의 모친은 함경도 원산 태생으로 연희전문 4학년 때 시위주동자로 찍혀 제적당한 사람이다.그녀는 일본으로 건너가 조산원 자격을 따서 산파로 일하다가 이리의 한 병원에서 김민기의 부친과 만나 10남매를 두었던 것이다.
김민기의 유년기를 지배한 정서는 외로움과 공포였다.손 위의 형들과 누나들이 직장이며 학교로 가버리고 나면 혼자 텅 빈 집을 지켜야만 했던 어린 그는 막대기로 마당에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혼자 하루종일 외로움 속에 방목되었던 그는 외로움을 내면화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유년기 정서를 결정지은 것들은 방공훈련 사이렌 소리,등화관제의 어둠,어둠을 흔들던 개 짖는 소리,저 혼자 울리는 커다란 괘종시계 소리,홈통에 빗물 떨어지는 소리 따위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4학년 때의 모습
김민기는 1969년 경기중,경기고를 거쳐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중고교시절 내내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렸던 그는 미대에 진학하자마자 더욱 그림에 몰입했다.세차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며 그림물감값을 조달하던 그에게 고교시절 친구가 찾아와 노래를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고교시절에 이미 소문난 기타연주자였던 그는 그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여 다방에서 함께 노래를 불렀다.그러다 보니 제대로 학점을 이수하지 못해 낙제를 했다.그 무렵 어느날, 고교 동창생인 임문일이 서강대에 다닌다는 한 앳된 단발머리 여학생을 그에게 소개했다.
김민기와 양희은의 역사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그때부터 김민기는 집안사정으로 노래를 불러 돈을 벌어야 했던 양희은의 노래 반주를 맡았고,그녀를 위해 본격적인 작곡을 했다.
양희은의 가수 데뷔곡인 「아침이슬」도 그때 태어난 노래 중의 하나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이슬처럼/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황야에/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이 노래는 발표 당시 '한국가요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여놓은 곡'이라는 평가를 받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아침이슬」은 1975년 공윤에 의해 금지곡이 되어 방송을 통해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다.다른 금지곡들은 분명한 금지사유가 명시되었지만 「아침이슬」에는 아무런 금지사유가 명시되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금지될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금지된 노래.정부의 공식적인 금지에도 불구하고 70년대를 거쳐 80 년대에 이 노래만큼 널리 불려지고 사랑받은 노래도 없다.
수만의 군중의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아침이슬」은 무서운 감동과 전율을 동반하는 장엄한 레퀴엠같았다.
1971년은 김민기에게 의미심장한 해였다.그해 김민기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독집음반을 출반했고 반체제 저항시인인 김지하를 만났다.레코드 출반은 통기타 가수들의 성지였던
YMCA 청개구리홀의 후원자인 경음악평론가 최경식씨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레코드는 발매된지 얼마 되지 않아 압수조치를 당했다.1972년 봄 서울문리대 신입생 환영회에 초대되어 노래를 불렀다는 이유에서 그는 동대문서로 연행됐고 시중에 유통 중이던 그의 레코드는 전량 수거 압수되었던 것이다.김민기의 이름으로 출반된 이 독집음반은 지금은 매니아들 사이에 수십만원에 거래되는 희귀본이다.
한국 대중음악사에 뚜렷한 의미를 각인한 노래들을 연재한다. 혹자는 '세상을 바꾼 노래'란 타이틀이 거창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 원자폭탄으로 도시 하나를 순식간에 박살내버리거나 멀쩡한 강바닥을 파내서 생태계를 초토화시키는 정도쯤이나 되야 세상을 바꿨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설득할 생각은 없다.
다만, 노래가 세상을 바꾸는 방식은 투표의 작동원리와 비슷하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을 뿐이다. 한 장의 투표권이 공동의 지향과 만남으로써 세상을 (좋게든 나쁘게든)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하나의 노래는 대중의 정서와 호응함으로써 한 시대의 사회와 문화를 규정하는 이정표로 우뚝 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세상을 바꾼 노래'들을 주목했다. 당초 19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전체를 아우르는 기획으로 준비했으나,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의 제약으로 여기서는 1970년 이후 발표된 노래들을 시대순으로 소개하기로 했다는 점도 밝혀둔다.
한국적 모던 포크의 상징이자 이정표
오늘 우리가 포크라고 부르는 음악 양식은 정확히 말해서 모던 포크다. 포크란 애당초 비전문들가에 의해 만들어지고 구전 등을 통해 계승된 끝에 전통으로 축적된 민속음악인데 반해, 모던 포크는 그와 같은 전통이 전문적인 음악인들에 의해 현대적인 양식으로 정형화된 당대의 대중음악이라는 차이가 있다.
1960년대 포크 리바이벌에 영감을 공급했던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와 피트 시거(Pete Seeger) 등이 바로 모던 포크 형성기의 주역이었는데, 이른바 싱어-송라이터의 개념 또한 (원론적으로나 장르적으로나) 그들의 역할로부터 유래한 바가 크다. 다시 말해, 모던 포크란 좁게는 미국, 넓게는 유럽의 민속음악적 전통을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 그것은, 송창식의 말마따나, 포크의 번역적 의미로서가 아니라 번안적 의미로 통용된다고 보아야 옳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한국에 불어 닥친 포크의 열풍 또한, 다른 대중음악 장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서양 팝 음악의 국내 수용 과정에서 파생한 산물이었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의 포크가 최초의 반문화(혹은 대항문화; counterculture)적 음악 현상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던 요인은 기성에 대해 선명하게 변별적인 거리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1960년대 미국의 모던 포크 무브먼트가 인권운동과 결합했던 전례에 비출 때 완전히 새로운 양상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청년하위문화(youth subculture)를 형성한 유대와 아마추어적 순수성을 지향한 태도를 통해 일종의 문화운동으로서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김민기와 '친구'의 위상이 거대한 의미를 갖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다. 주지하건대, 김민기는 당시 음악적 변혁의 상징적 존재였고 '친구'는 그의 혁명을 증거하는 이정표였다.
김민기는 독보적인 싱어-송라이터였다. 양희은의 데뷔 앨범에 수록된 '아침 이슬'의 원작자로 대중에 이름을 알린 그는 몇 달 뒤 발표한 자신의 첫 앨범 [친구/길(김민기 노래모음)]을 통해 갓 스무 살 나이에 한국 모던 포크의 금자탑을 세웠다. 물론, 그의 전면 등장 이전에도 모던 포크의 움직임은 완연했다. 쎄시봉과 청개구리와 오비스 캐빈은 진작에 젊은이들의 명소로 자리잡고 있었고, 트윈 폴리오, 뚜아 에 무아, 라나 에 로스포 등이 이미 큰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1969년 '남산드라마센터'에서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임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한대수라는 걸출한 예인이 있었다. 김민기가 한국 최초의 유의미한 모던 포크 싱어-송라이터였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그의 탁월함은 그 너머에 있었다. 김민기와 그의 데뷔작은 "한국 포크를 확립한 음반이 아니라 한국 포크를 새로운 단계로 도약시킨 음반"(신현준, 이용우, 최지선, [한국 팝의 고고학 1970: 한국 포크와 록, 그 절정과 분화], 한길아트, 2005)이라는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김민기는 앨범 [친구/길(김민기 노래모음)]을 통해 한국 모던 포크의 새로운 전범을 제시했다는 말이다. '친구'는 그 모든 새로움의 총아였다.
'친구'는 여전히 번안곡이 대세를 이루던 분위기 속에서 앨범 수록곡 대부분을 직접 창작한 김민기의 음악적 실험의 결정이었다. 탁월한 기타리스트이기도 했던 김민기의 연주와 노래는 정성조 악단의 세련된 미니멀리즘과 결합하여 나직하지만 강렬한 웅변으로 화했다. 게다가 더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보여준 주제의식의 변화였다.
대중문화 연구자 김창남의 지적처럼 김민기는 "'나'의 주체에서 '우리'의 주체로 그 지평을 넓혀가며 좀 더 치열한 정치적 문제의식을 드러"냄으로써 "1970년대의 청년문화가 낭만적 순수주의에서 점차 좀더 현실적인 정치성을 띠게 되면서 1980년대로 이어지는 과정을 담"(김창남 편, [대중음악과 노래운동, 그리고 청년문화], 한울, 2004)아 냈던 것이다.
알다시피, 김민기는 1972년 3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공안당국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고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정권의 억압을 받았다. 김민기와 '친구'의 신화를 (당사자도 부담스러워할 만큼) 거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공고하게 만든 일련의 조치들이었다. 오해하지 말 것은, 돌이켜보건대, 그와 같은 정치적 여파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김민기와 '친구'의 음악적 위상은 여전히 심대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김민기의 친구
김민기는 그 이름보다 그가 쓴, 모두에게 회자되는 노래 '아침이슬'이 더 유명하다. 그가 쓴 노래가 불순하다는 이유로 독재정권 하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는데, 현재 뮤지컬 연출가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지금도 변명한다. 자신의 노래는 불순하지도 않았고 반체제를 염두에 두고 쓰지도 않았다고. 그는 그저 순수했는데 다만 학생들이 데모할 때 그의 노래를 즐긴 탓에 자신이 불행해졌다고...
김민기가 서울대 미대 회화과 1학년 때였다. 가수 서유석의 말에 의하면 김민기는 맨발에 고무신을 신고 러닝셔츠 차림으로 늘 나타났다고 한다. 당시는 젊은이들이 명동에서 노래를 했는데, 김민기는 명동 길에서 마주치면 구두닦이로 오해받을 만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그는 두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턱을 고이고 있던 특이한 자세, 말하자면 데스노트의 L과 비슷하다고 할까? 점잖게 눈으로 웃으며 다른 사람의 노래를 들어주던 표정.
처음에는 혼자가 아니고 친구 김영세와 ‘도비두(도깨비 두 마리)’라는 듀엣이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김민기 혼자 노래를 했다. 밥 딜런의 노래들을 주로 불렀고 중저음의 음색과 기타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미국 음악이 부럽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다음은 음악평론가 이백천 씨의 글이다.
어느 날, 노래 사이에 이야기를 섞어가며 진행을 하는데 가까이 있던 누군가가 이렇게 중얼거렸다.
“제기랄, 영어 안 쓰면 말 못하나?”
돌아보니 김민기였다.
그때 김민기의 나이 스물, 나는 서른일곱.
영어 좀 안다고 자랑삼아 영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평상시 쓰던 말이 자연스럽게 몇 마디가 들어갔을 것이다.
부아가 확 오르는 것을 겨우 누르고 넘어갔다.
다음 주였다.
김민기가 노래를 했다.
‘Don’t think twice, it’s alright’라는 밥 딜런의 곡이었다.
아주 잘 부른 노래였다.
내가 한마디했다.
“영어 노래 말고 뭐 우리말 노래 없을까?”
2주일 정도 지난 후 김민기가 다시 와서 노래를 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뭍이요
그 깊은 바다 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르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이렇게 김민기의 '친구'가 태어났다.
물가에 친구들과 놀러갔는데 한 친구가 익사를 했단다.
그로 인해 만든 노래라고 했다.
뱃속에서 감돌다가 나온 것만 같은 낮은 음성의 노래였다.
그는 그 뒤에 음악 살롱 청개구리집에서 ‘세노야’도 부르고 ‘아침이슬’도 불렀다.
‘아침이슬’은 김민기가 먼저 불렀지만 ‘친구’보다 박수가 적었다.
그 후 이 곡은 양희은이 불러 세상에 알려졌다.
'아침이슬'은 한국인들이 뽑은 가장 유명한 애창곡이다.
그것은 대중가요가 아니라 이미 국민가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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