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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6 07:05 군번 없는 6·25 영웅들 … 불암산 호랑이유격대 정신 기린다 남양주시, 육사 생도 등 20명 충혼비(忠魂碑) 불암사 입구에 건립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충혼비 남양주시는 6월 17일 불암사 입구에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충혼비 제막식을 연다 1950년 육군사관학교 생도 행진 모습 불암산(佛岩山) 호랑이 유격대원 20명은 6·25전쟁 초기 계급과 군번 없이 편성돼 남하하는 북한군의 후방을 교란(攪亂)했다. 시간을 번 국군과 UN군은 전열을 정비해 반격에 나섰지만 이들은 모두 전사한 뒤였다. 이들 중 9명은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혼(魂)이 담긴 비석이 불암산에 건립됐다. 경기 남양주시는 6월 17일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충혼비〉 제막식을 연다고 16일 밝혔다. 충혼비(忠魂碑)는 불암사(佛庵寺) 입구에 높이 2.5m, 너비 0.75m 크기로 건립됐다. 비석 앞에서는 사관생도가 착용하던 철모(鐵帽)도 놓였다. 남양주시는 2년 전부터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에 주목했다. 이들을 널리 알리려고 나무로 만든 새 안내판을 설치했다. 1996년 육군사관학교가 철판으로 된 안내판을 세웠으나 오래돼 낡고 녹슬었기 때문이다. 남양주시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 〈6·25전쟁사〉 등에 따르면, 1950.6.25일 전쟁 발발과 함께 북한군이 엄청난 기세로 남하했다. 포천에 주둔하던 국군 7사단 제9연대는 육군사관학교에 집결했다. 사관생도들과 함께 태릉(泰陵) 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서다. 북한군이 서울시내로 진입하자 작전을 통제하던 사관학교장은 퇴각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사관생도 1기 10명, 2기 3명, 9연대 7명 등 20명은 미처 철수하지 못했다. 사관생도 1기생들은 임관을 2주일 앞둔 상태였으며, 2기생들은 입교한지 25일 밖에 되지 않았다. 이들은 불암산 일대에서 암호명 〈호랑이〉로 유격활동을 펼치기로 결심했다. 사관생도들은 계급과 군번이 없었다.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유격대(遊擊隊)는 6월 29일부터 3개월가량 불암산 일대에서 북한군 후방을 교란했다. 불암산 동굴을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다. 사찰 불암사와 석천암 주지를 비롯해 주민들의 도움도 받았다. 유격대는 총 4차례 공격작전을 시도해 북한군에 큰피해를 주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뒀다. 북한군을 기습공격해 30여명을 사살하고 차량을 파괴했다. 유류 50드럼을 비롯한 보급물자를 폭파했다. 북한군 훈련소를 기습공격하고 북쪽으로 끌려가는 주민 100여명을 구출하기도 했다. 9월 28일 국군과 UN군은 반격에 나서 드디어 서울을 탈환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는 모두 전사한 뒤였다. 유격대로 활동한 생도 1기생은 강원기, 김동원, 김봉교, 박금천, 박인기, 이장관, 전희택, 조영달, 한효준, 홍명집 등 10명이다. 생도 2기생은 아예 이름이 확인되지 않았다. 9연대 장병 역시 김만석 중사를 제외한 6명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은 『기록(記錄)으로 남기지 않은 것은 기억(記憶)에도 남지 않는다. 6·25전쟁 70주기를 맞아 영웅들의 오래 기억하고자 충혼비를 건립했다』고 밝혔다. / (남양주=연합뉴스) 김도윤 기자 kyoon@yna.co.kr https://www.yna.co.kr/view/AKR20200615146900060?section=culture/scholarship ● 불암산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0b1799a ● 불암사(佛巖寺) http://www.bulamsa.com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0b1798a
2020/06/03 13:05 6·25 때 전사한 아버지 68년 만에 만난 김대락 씨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 들어보이는 유족 6월 3일 대구 남구 충혼탑에서 열린 6.25 참전용사 김진구 하사의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에서 김 하사의 전사자 〈신원확인 통지서〉와 유품 등이 유족에게 전달되고 있다 화살머리 고지에서 발굴된 김진구 하사 「가족 품으로」 1953.7.13.일 現 비무장지대에 속한 화살머리고지 4차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김진구 하사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해 슬프기도 하고, 늦게나마 돌아오셔서 기쁘기도 하고 그러네요』 6월 3일 낮 대구 앞산 충혼탑에서 열린 〈호국의 영웅 귀환행사〉에서 정부 관계자가 전달한 아버지의 유품(숟가락·탄피)을 품에 안은 김대락(70)씨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미국 제품으로 보이는 숟가락에는 아버지가 직접 새긴듯한 이름 석 자가 눈에 띄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2.6.3일 27살 청년이었던 아버지(김진구 하사)는 국가의 부름을 받고 입대했다. 濟州道에서 2개월 가량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뒤 釜山에 도착한 아버지는 아내 품에 안긴 18개월된 외동아들을 안고 아주 짧은 시간 再會의 기쁨을 만끽했다. 김씨가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난 순간이었다. 곧장 전쟁터로 떠나야 했던 아버지는 『잘 다녀오겠다』던 약속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 아버지는 국군 제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1953.7.13일 지금의 비무장지대에 속한 화살머리고지 4차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했다. 정전협정 체결(1953.7.27)을 불과 2주일 앞두고 있었다. 강원도 철원 북방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확보한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23군 예하 제73사단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운 것으로 유명하다. 전쟁이 끝난 직후였던 그해 여름 경북 영일군 송라면에 살던 유족에게 〈전사통지서〉가 도착했다. 18개월된 아들 하나를 둔 젊은 새댁은 가눌수없이 슬픈 마음을 추스르며 농사일을 이어나가야 했다. 어린아기였던 김씨는 고향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大邱에 있는 큰아버지 댁으로 거처를 옮겼고, 2년여 뒤 어머니도 아들이 있는 大邱로 와 정착했다. 어머니는 방직공장에서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어렵사리 외아들을 키웠다. 아버지 없이 자란 아들이 늘 안쓰러웠고, 남편 시신이 없어 무덤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웠다. 올해 초 남편 유해가 발굴됐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70년 가까이 가슴에 품어온 恨을 풀 수 있게 됐다. 김 하사는 6월 19일 대전현충원에 안장(安葬)될 예정이다. 김씨는 『九旬을 넘긴 어머니께서 아버지와 함께 묻힐수있게 됐다며 안도하신다. 늦게라도 가족을 찾아오신 아버지께 고맙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 (대구=연합뉴스) 김용민 기자 yongmin@yna.co.kr https://www.yna.co.kr/view/AKR20200603095800053?section=culture/scholarship ● 백마고지 : 강원도 철원군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alswl9913&logNo=221949793609 ● 백마고지 역 : 강원 철원군 철원읍 평화로 3591 (대마리50-11) https://place.map.kakao.com/18502294 ● 화살머리고지 답사기 http://blog.daum.net/paraanmoon/7801893
2020/06/03 12:52 6·25전쟁 70주년 철원에서 거행 … 강원도는 전쟁 최대 피해자 〈기억을 넘어 함께, 희망으로〉 슬로건 … 종전선언 기원문 화살머리 고지에서 낭독 오래된, 그러나 결국 녹아내릴 냉전(冷戰) 6·25전쟁 70주년 맞아 … 국군 遺骸 고국 품으로 (CG) 6·25 전쟁 70주년 강원도민 대통합 평화 기원행사가 6월 25일 철원 일대에서 열린다. 강원도는 올해 〈6·26 전쟁 70주년〉이 생존 참전용사를 위한 사실상 마지막 10주기임을 고려해 〈기억을 넘어 함께, 희망으로〉라는 주제로 철원군 평화문화광장에서 거행한다고 3일 밝혔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이날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강원도는 6·25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라면서 『가장 많은 인원이 동원돼서 전쟁을 치렀고, 많을 땐 하루에 1만명씩 희생되는 전쟁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1970년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등을 언급하며 『강원도는 원망과 분노, 증오가 축적된 땅인데 용서와 화해의 땅으로 바꿔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라면서 행사 의미를 설명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박종화 목사는 『전쟁 70주년을 맞아 이제 종전을 넘어 평화를 선포하는 행사를 강원도 철원에서 시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이 땅에 건강평화, 안보평화, 마음의 평화를 이루자는 행사취지가 전세계에 알려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道는 원활한 행사추진을 위해 각계를 대표하는 민간위원 24인을 위촉해 〈6·25전쟁 70주년 행사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6·25전쟁 70주년 행사 추진위원회〉, 〈사단법인 평화한국〉 〈강원도-철원군〉이 공동주관하는 이 행사는 1부 조찬기도회 및 평화연합예배, 2부 공식행사, 3부 기념공연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1부 조찬기도회는 철원제일교회 복원예배당에서, 평화연합 예배는 철원 노동당사에서 열린다. 2부 공식행사는 6·25참전 유공자 및 유족, 초청인사, 도민, 학생 등 2,000여 명이 참석한다. 참전국기 입장을 시작으로 유공자 표창, 영상물 상영, 창작 공연, 6·25전쟁 희생자 헌화·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특히 67년 동안 끌어온 停戰체제를 끝내는 〈종전선언 기원문〉을 한국전쟁 최고의 격전지 〈화살머리 고지〉에서 낭독한다. 이번에 낭독되는 〈종전선언 기원문〉은 편지 형식으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구테흐스 UN사무총장 등에게 우편으로 발송한다. 우편발송 전에는 우체통 퍼포먼스도 펼쳐진다. 3부 기념공연은 미스트롯 송가인, 트로트 대부 남진, 아모르파티 김연자, 원주 출신 트로트 가수 조명섭이 출연한다. 공연은 무료이며, 생활속 거리두기 수칙 준수를 위해 좌석을 1m 이상 이격해 배치할 예정이다. 모든 관객은 발열 체크후 입장할수 있으며 〈강원투어 패스〉를 활용해 인적사항을 모두 확보할 방침이다. / (춘천·서울=연합뉴스) 이재현 정래원 기자 jlee@yna.co.kr https://www.yna.co.kr/view/AKR20200603051351062?section=culture/scholarship 2020/06/17 07:01 [6.25전쟁 70년] 최대 격전지 백마고지에서 생환한 노병의 증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이 산화한 戰友 … 소대장만 4명이나 바뀌어』 6·25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 열흘간 12차례 쟁탈전 끝 고지 수성 6.25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전한 장원탁(89)옹 『다친 소대장을 내가 업고 냅다 뛰었는데 근처에 포탄(砲彈)이 또 떨어지더라고. 그 파편에 소대장은 엉덩이를 또 다쳤지. 그래도 그 정도면 다행이야. 副분대장은 그냥 날아갔어. 방탄조끼만 남아있더라고. 비명횡사(非命橫死)한거지…』 눈가에 주름이 깊은 노병은 입대년도도 또렷이 말하기 힘들 정도로 기억이 가물거렸지만, 전투 당시 참상(慘狀)은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얘기했다. 노병의 이름은 장원탁, 우리 나이로 올해 아흔살이 됐다. 장 할아버지는 육군 2사단 31연대 수색대에서 근무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창 화폐개혁(貨幣改革)을 할때 軍에 자원했다고 했다. 때는 1952년, 6·25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했다고 알려진 〈白馬高地 전투〉가 일어난 해였다. 당시 그의 나이 22살이었다. 백마고지 전투전적지 백마고지 바라보는 老兵 백마고지 바라보는 老兵 백마고지 전투는 6·25 당시 휴전회담이 난항을 겪던 1952.10.6∼15일 철원 북쪽 백마고지를 확보하던 국군이 중공군의 맹렬한 공세에 맞서 열흘 가량 혈전을 펼친 끝에 방어(防禦)에 성공한 전투다. 당시 고지 주인이 7번이나 바뀌어 6·25전쟁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당시 철원 일대는 인근의 평강, 김화와 함께 〈철의 삼각지대〉를 이루면서 유엔군과 중공군, 인민군이 대치한 상태였다. 철원 북방에 있는 백마고지는 남동쪽으로 펼쳐진 철원평야 일대를 훤히 내다볼수있는 요충지(要衝地)로 중공군이 노리기 적격인 장소였다. 당시 장 할아버지는 하사관학교 186기로서 4주 동안 훈련을 받은뒤 하사(現상병)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하게 됐다. 『밤이 지독하게 밝았어. 하늘에 달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밝았지. 쉴새없이 조명탄이 터졌고, 서치라이트도 주요 도로를 환하게 비췄지』 장 할아버지는 처음 백마고지에 도착했을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31연대 수색병으로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적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火器를 사용하는지 등을 수색·정찰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전투중 고지 주인이 워낙 자주 바뀌었기에 그만큼 수색 임무도 잦았다. 당시 소대는 전초(GOP)로 향하는 길을 我軍만 알수있도록 갈지(之)자 모양으로 내고 주변에는 지뢰를 잔뜩 심었다. 이에 중공군이나 인민군이 전초로 접근하다가 지뢰에 많이 죽었다고 했다. 장 할아버지는 전장을 떠올리며 『지독하게 싸웠다』고 다시 말했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국군과 미군은 21만발, 중공군은 5만발이 넘는 포탄을 쏟아부었다. 6·25전쟁 중 단일 전투로는 포탄을 가장 많이 소비한 전투다. 국군은 1개 사단으로 3개 사단을 상대해야 하는 병력 열세에 맞서 포탄을 4배 가량 더 퍼부어댄 것이다. 고지쟁탈전의 함성에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니 귀는 항상 멍한 상태였다. 그는 『건너편 산 너머로 중공군이 피리를 불며 쏟아져 나올때는 징그러움에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고 말했다. 포탄은 종종 아군과 적군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했다. 성(姓)이 吳씨였던 副분대장은 중공군의 폭탄에 입고있던 방탄조끼만 남을 정도로 처참하게 산화했다. 또 한 병사는 수류탄을 던지려다가 팔에 총격을 당했다. 수류탄(手榴彈)은 아군 참호(塹壕)로 떨어졌고 27명 중 12명만 살아남았다. 당시 진지 근처에는 미군이 지은 관측소(觀測所)가 있었다. 중공군이 그곳을 차지하자 소대(小隊)에서는 이를 되찾고자 지원자를 찾았다. 그때 장 할아버지를 비롯한 대부분 병력이 지원했고,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공군을 소탕(掃蕩)하고 관측소를 다시 점령했다. 장 할아버지는 『아군 포탄과 중공군 포탄이 정신없이 쏟아지는데 소대장(小隊長)을 업고 소총(小銃)까지 3자루를 메고 둑을 넘었다. 근처에 포(砲)가 떨어져서 파편이 소대장 엉덩이에 박혔다』고 회상했다. 그는 『전투 당시 소대장만 4명을 갈아치웠다. 숱한 전우들의 죽음 속에서 이렇게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라고 말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10.6일 아침 중공군 제38군의 선제공격으로 개시됐다. 모든 지역에 준비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병력을 교대시키며 집중공세를 퍼부었지만 고지는 쉽사리 함락되지 않았다. 나흘간 이어진 격전 끝에 10월 15일 국군은 마침내 고지 탈환에 성공했고, 기세를 몰아 고지 북쪽 낙타능선까지 탈환하면서 적을 완전히 몰아내게 됐다. 결국 국군 제9사단은 열흘간 12차례의 쟁탈전(爭奪戰)을 반복해 고지 주인이 7회나 바뀔 정도의 혈전을 벌인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했다. 이 과정에서 중공군 제38군은 13,000여 명의 사상자를, 국군 제9사단은 총 3,400여 명의 사상자를 낸것으로 보고됐다. 장 할아버지는 1957년 전역했다. 그는 『해마다 백마고지 전적비(戰績碑)에 참배하는데 올해에도 갈것』이라며 『젊어서 피땀 흘린 전장을 죽기 전에 다시한번 밟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백마고지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 서북쪽 12㎞ 지점에 있다. 이곳은 현재 군사분계선 남방 비무장지대(DMZ)로 민간인이 마음대로 출입할수없다. / (춘천=연합뉴스) 양지웅 기자 yangdoo@yna.co.kr https://www.yna.co.kr/view/AKR20200615024500062?section=culture/scholarship 2020/06/16 07:01 [6.25전쟁 70년] 구순의 참전용사 황병태 옹 『다시는 없어야죠』 『같은 핏줄끼리 공존공영해야 하지만 전쟁 교훈 잊지 말아야』 참전용사 황병태(91)옹 6.25 참전용사인 황 옹은 "70년전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6.25 전쟁 당시 출격 중인 F-51 전투기 편대 보훈급여 지역 따라 「들쑥날쑥」 (CG) 『동족끼리 총을 겨누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지요』 올해 91세 황병태(대구시 동구)옹은 6.25 전쟁이 발발한지 70년이 됐다는 말에 만감이 교차하는듯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1929년 10월 경남 산청에서 태어난 황 옹은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 만 23살에 다소 늦은 나이로 空軍에 입대했다. 경남 진주에 살던 황옹은 징집명령이 내려오자 주저없이 나라의 부름에 응했다고 말했다. 대구에 있는 공군기지에 배속된 황 옹은 간단한 기본훈련을 받고 곧장 작전에 투입됐다. 주된 임무는 출격하는 아군 전투기를 무장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군 주력비행기 F-80, F-86 세이버 전투기는 물론 대한민국 공군 최초전투기 F-51 등에 기관총을 달고 실탄을 장전했다. 엄청나게 무거운 로켓포를 장착하는 일도 빠지지 않았다. 공습이 잦은날에는 불과 몇분 간격으로 전투기가 이륙해 온종일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고 했다. 공습이 뜸한 날에는 항공기 정비까지 맡아 구슬땀을 흘렸다. 그는 전투기 조종사로 직접 전투를 치르지 않았지만 나라를 구하는 일에 일조한다는 생각으로 매순간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힘들때면 자신보다 조금 앞서 육군에 입대했다가 전사한 고향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버텼다. 8개월 가량 혼신을 다한 끝에 전쟁이 멈췄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후 8년을 더 공군에 몸담고 있다가 1961년 제대(除隊)한 뒤 가족과 함께 서울에서 새 인생을 설계하려고 했다.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친구를 따라 화신백화점 7층 영화관을 드나들며 사업구상을 했다. 그러나 몇달이 지나지 않아 공군에서 「전투기 무장과 정비 등을 맡아달라」고 요청해 왔다. 공군 측은 황 옹이 수락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에 있던 가족을 먼저 대구로 데려가야 할만큼 사정이 절실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기 짝이 없지만, 당시 공군은 대구기지(K-2)에 대규모 시설을 만들면서 전투기 정비·무장분야 베테랑이던 그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또한 나라의 부름이라고 생각한 황옹은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군무원으로 23년을 근무하고 1985년 정년퇴임했다. 퇴임 후 15년간 6.25참전유공자회 대구 동구 지회장을 맡다가 2017년부터 대구시 지부장으로 참전용사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 그는 2008년 국가유공자법 제정 당시 국회의원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법 통과를 위해 애쓴일에 가장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유공자 한 사람당 참전수당 33만원을 매달 받을수있게 됐다. 그럼에도 참전수당 외에 각 자치단체가 주는 명예수당이 제각각인 점은 불만이다. 황 옹이 사는 대구에서는 참전용사가 매달 8만원씩 받지만 20만∼30만원대 수당을 주는 지역도 있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낀다고 했다. 금전 욕심보다 대구에 참전유공자 수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챙겨주고 싶은 마음에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현재 대구에 생존하는 6.25 참전유공자는 3,500명 안팎이다. 고령인 탓에 해마다 300∼400명이 세상을 등져 10년후엔 찾아보기 어려울 것으로 그는 예상했다. 몸소 겪은 6.25전쟁 참상을 증언할 사람이 점점 사라지면 전후세대가 확고한 안보관을 정립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고도 했다. 황옹은 『같은 핏줄끼리 더는 싸우지 말고 공존공영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70년전 이 땅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잊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 (대구=연합뉴스) 김용민 기자 yongmin@yna.co.kr https://www.yna.co.kr/view/AKR20200611129700053?section=culture/scholarship
[6·25전쟁 70년] 남아공 용사 『전투기 몰려 참전 … 비상 동체착륙도』 [6.25전쟁 70년] 교사로 일하다 대한민국 최초 여군으로 참전 [6.25전쟁 70년] 목숨 바쳐 나라 지킨 경찰 … 전체 1/3 사상 [6.25전쟁 70년] 자원해 전장 누빈 「군번 없는」 여성들 [6.25전쟁 70년] 소년병은 전우기록 찾고, 아들은 기념관 운영 [6.25전쟁 70년] 울산 유일 피란민 노래 〈방어진 블루스〉 [6.25전쟁 70년] 「끝나지 않은 아픔」 단양 곡계굴 폭격사건 [6.25전쟁 70년] 금강 방어선 최대 격전지 … 세종 개미고개 전투 [6.25전쟁 70년] 최대 격전지 〈백마고지〉에서 생환한 노병의 증언 [6.25전쟁 70년] 펜 대신 총, 1,661명의 헌7학병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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